2005년 늦가을 쯤인가,

"비서구"의 시각에서 국제뉴스를 생산하는

연합통신사가 생길 참이라 해 썼던 글.

 

"반서구"를 빙자한 또다른 중심주의의 혐의가 있다 해도,

그렇게 깔끔하게 치부하고 말 문제는 아니지 싶어서였다. 

 

어차피 "비서구"의 시각이라는 게,

지리적 장소 따위가 아니라 사태를 파악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

 

1.

글을 읽거나 시사토론 프로그램 볼 때마다 늘상 마뜩치 않았다. '지적 명망가'의 입, 엄밀히 말하자면 그 입의 권위에 기대는 이들. 물론, 그게 자신이 펼치는 논지에 탄력을 줄 윤활유기라도 하면 또 모르겠다. 인용된 이가 단지 저명하단 이유만으로 거론된 만큼 동어반복에 머물 뿐인데도, 인용한 이는 그걸 논증이라며 므흣해 한다.

여기다 대고 부당한 권위의존의 오류를 당장 멈추시오, 라고 일갈하면 그나마 덜 괴로울까? 글쎄, 별로인 게, 이런 비판의 날 자체가 무뎌서만은 아니다.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해온 온갖 담론들, 그 속내가 실하냐완 별개로 저런 인정욕망에 기대 진리인 양 대접받은 게, 어디 하루이틀였어야 말이지.

따지고 보면, 본말이 전도된 권위의존의 오류, 오류는커녕 우리 현실의 담론세계를 꼴짓는 지배적 원리였다. 근대적 문명화와 의료선교라는 사명에 불타올랐던 프랑스와 미국 선교사들이 '야만'과 '정체'로 아로새겨진 '조선담론'을 발명한 19세기 이후부터니까, 백 년이 훨씬 넘는다.


2.

그럼 한반도를 근대문명의 실험공간 쯤으로 여기며 탄생했던 '조선담론', 그 실례를 보자.


미국인은 제아무리 게으름을 피우게 되더라도 노동은 고귀하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낀다. 아무튼 이론적인 면에서 어린이들은 노동의 존엄성을 배운다. 그러나 조선에는 그와 정반대되는 견해가 있다. 노동은 '일'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2차적 의미는 손해, 손실, 재난, 불행이고, 이런 생각은 모두 이 말과 관계가 있으며 이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제임스 게일, 1898, 211쪽; 조현범, 2002, 131쪽서 재인용.


그야말로, '몰라도 다 아는 구미 vs. 세상물정 어두운 조선'이라는 익숙한 이항대립의 완성. 이윤 쥐어짜내는 흡혈장치일 뿐일 근대 노동규율에 익숙치 않대서 그게 그렇게 문제인지도 의문이지만, 무엇보다 여기에 조선인 자신의 목소리와 삶의 빛깔이 끼어들 여지나 자격, 아예 없다. 어차피 그건 근대적 가치확산의 문명사적 필연성을 떠받쳐줄 숭악한 이미지들의 자의적인 조합이었으니까.

이런 담론들이 근대 자본주의세계에서 일종의 진리처럼 통용되며 지적 권위를 인증받게 된 건 조선인 개명엘리트들에 의해 적극 수용되고, 이후 일본의 식민정책학 담론에도 응용되면서부터다. '조선담론'의 근대적 유통망은 이처럼 외부로부터 일방적으로 강제된 것이 아니었다. 그건 구미/일본 식민주의와 토착 부르주아 엘리트 세력 간의 공모 속에서 생겼고, 또 뿌리내린 것이었다.

우리나라 관련 외신의 초월적 권위와 해석적 특권에 아예 침묵하거나 외려 더욱 힘을 실어주는 '주류'매체의 관성은 이러한 역사적 내력과 맞닿아 있다. 이 유통질서를 흔드는 건 조선담론의 지역판촉책으로 누려온 자신들의 존재론적 기초를 스스로 허무는 셈일테니.

지금까지 구미권에서 생산, 직수입된 여러 판본의 '조선(한국)담론'들이 특정한 역사적 국면마다 극단의 이미지를 오가는 동안, 주류매체의 소비패턴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다.


3.

지난 주 초(2005년 11월 중순 경), 한국관련 외신 하나가 좃중동을 위시한 거의 모든 중앙일간지 경제면을 일제히 장식했다. 오토바이헬멧 생산 부문 세계 1위 업체로 널리 알려진 홍진HJC의 회장 홍완기씨에 관한 기사다. 외신출처는 미국의 유력권위지 워싱턴 포스트. 원문의 얼개는 이렇다.


오토바이헬멧 생산으로 세계적 일가를 이룬, 개미처럼 근면성실한 한국 기업인이 있었으니, 동종업계의 배짱이스런 미국 기업인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게 아닌가. 어찌나 근검한지, '미국적 소비'와 부동산투자에 탐닉하는 미국 기업인과 달리, 번 돈은 쓸 줄 모르고 저축과 연구개발로 돌린다. 임직원들의 저축률, 소비규모와 성향도 이와 마찬가지. 세계화 시대, 수입-소비-차입의 악순환에 허덕이는 미국경제와 수출-저축-대출의 선순환을 그리는 한국(및 아시아)경제 사이의 극심한 불균형이 여기에 다 집약돼 있다. 오호, 통재라.


세계경제하 미국 헤게모니의 꾸준한 쇠퇴는 어떤 궤적을 그려왔고, 미국의 후견 아래 이뤄진 동아시아 반공-자본주의블럭의 발전 및 부상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따지는 데 이 기사가 얼마나 쓸모 있을까란 의문, 일단 제끼자.

한국인들의 높은 저축률, 사실상 부재하다시피한 사회안전망과 문화적·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불안심리의 단면일 뿐 아니라, 그나마도 저축 자체가 힘든 생계형 노동자 수가 증가 추세에 있다는 것 또한 탄탄한 외환보유고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엄연한 현실 아니냔 반문 역시 마찬가지.

홍 회장 사는 서초동소재 1백 평형대 아파트를 "서울의 한 중산층 아파트"라고 뭉개는 중앙일보의 남다른 감각, 재벌신문다워 그런 거라 해두고.

개미 같은 성실함과 근검성 덕인 줄 알라던 홍 회장의 경제적 부, IMF 때 환율급등으로 얼떨결에 굴러든 로또성 횡재였음을 친절히 알려준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이마저 조선에 밀리고 중앙에 추월당한 동아의 안쓰런 처지 탓이겠거니 해두자.

조선? 이 매체는 그저 "크게 보도"했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굴지의 미국 주류매체에서 한국인 본 좀 받으라고 실어준 것만도 어디냔 식이다. 마치 벽지에서 일류대 합격하면 현수막 내걸었다는, 그런 삘이랄까. 의외로 일등신문답지 않은 천진함이 아주, 돋보이는 조선이었다.

도식적 비교, 무리한 일반화와 논리적 비약으로 바람난 무우 마냥 구멍 숭숭인 이 기사의 질은 차라리 부차적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이런 기사가 주류매체에서 '묻지마 소비'의 형태로 거의 한결같이 유통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니까.

WP 같은 매체가 담론생산 및 해석의 주체로서 스스로 부여한 특권적 시선에 대해 비판적 개입은커녕 흉내내는 데나 올인해온 주류언론/방송의 바나나 근성, 이거 빼놓곤 이같은 외신소비의 천편일률성, 당최 설명이 안된다. 이 점에 있어선 <한겨레>도 별 다를 바 없었다.

<뉴스위크>를 자매지로 하는 WP로부터 근대적 위생관념은 물론 노동규율조차 모르던 '미개한 조선인'에서 건실한 한국인으로, 미국 자본가들에게조차 귀감이 될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화신으로 마침내 인정받았다는 게 내심 뿌듯해서였을까?


4.

<몬도가네>, <쇼킹아시아>, <쇼킹아프리카> 기억들 하시는가? 독일과 이탈리아서 제작된 이른바 '엽기' 타큐멘터리 영화의 원조격으로, 비디오로 출시 후 한동안 인구에 잘도 회자됐더랬다. 이탈리아, 대만, 일본 및 인도,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서 담아낸, 말그대로 엽기적이고 잔혹한 장면들 때문이었다.

그나마 <몬도가네>의 제작취지는 일견 아주 그럴 듯하다. 근대의 잔혹성, 그러니까 "문명 속에 도사린 야만의 얼굴을 리얼하게 조명"하겠다지 않나. 근데 실제로 보면 <쇼킹아시아>나 <쇼킹아프리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덜 문명화된' 유럽인과 비서구인들의 야만스런 백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이 때 야만이란 근대문명의 또다른 얼굴이 아니라, 문명화 세례가 충분치 않아 발생한 비극에 가깝다. 조선을 그렇게 바라봤던 구미 선교사의 식민주의적 시선이 여기서도 견고히 작동하고 있는 셈인데, 이 비디오를 보며 생기는 언짢음과 분노는 이와 무관치 않다.

문제는 그 분노와 언짢음, 몬도가네스런 시선의 폭력에 대한 정당한 반응인 만큼이나, 구미인들이 설정한 문명의 경계 바깥에 있다는 데 대한 모멸감의 표출이었다는 데 있다.

구미인들의 우월적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여 쪽바리들에겐 쾌감을, 아시아인들에겐 안도를 느끼는 걸로 만족하겠다? 그것도 한 방법이긴 하겠지만, 언발에 오줌누는 격일 뿐이다. 비록 백인은 아니지만, 걔중 '개명'의 자질이 출중하다 인정받겠다는 거니.

그렇게 우린, 한국인들은 시간관념이 없다고 하면 울다가, 그런 한국인들이 역동적이라고 하면 므흣하니 웃음짓는다. 자꾸 그러면, 똥꼬에 털나는데도.

결국 백인 아닌 사람들은 '인간'도 아닌 만큼 절멸도 무방하다 본 근대 유럽의 야만적 시선 자체를 갈아엎지 않는 한, 워싱턴 포스트의 헐렁한 기사를 첨삭도 없이 내보내는 한국 주류매체의 천편일률성은 깨지지 않는다. WP가 한국인의 자긍심과 대외 이미지 아무리 높여줬대도 결코 희희낙락할 수 없는 이유다.

외려 모멸스러운 건, 우리에 대한 서구매체의 특권적 시선을 지멋대로 승인하곤 이에 대한 인정욕망을 온데다 조장·선동하는 한국 주류매체의 유구한 담론수용 및 소비패턴이니까.


5.

이런 패턴의 민망한 말로는 사실 1997년 IMF 사태 때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군사독재 시절 국산기사면 약발 잘 안드니까 고도 경제성장과 '한강의 기적'이 선공후사 중시하는 근검한 한국인들의 헌신적 집단문화 덕분이란 내용의 외신으로 여론호도하던 주류매체들, 머라 했는지 기억나시는가?

정실 자본주의와 오랜 연고적 집단주의가 한국경제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는 외신보도로 그전까지 칭송해대던 집단문화 성토의 선봉에 나섰더랬다.

자칫 IMF로 주류의 기득권을 떠받치던 질서 자체가 주저앉을지 모른단 공포 때문였을까? 체면이고 뭐고 과거는 묻지 말잔 식으로 정색을 하곤 한국사회에 대한 온갖 훈계와 처방, 그리고 '변신'의 당위성을 늘어놓는데, 여하간 그 천연덕스러움엔 실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때그때 지들 입맛 따라 담론내용도 변덕스런 외신의 장단에 덩달아 놀아나는 한국 주류매체의 관점없음과 기회주의적 행태, 그네들 나름의 '한국에서 사는 법'이라고 해두자. 문제는 덩달아 우리까지 저렇게 처연하게 살아야 하냐는 거다.

강자와의 동일시, 달리 말해 서구-백인-남성중심의 주류질서에 대한 인정욕망을 선동하는 주류매체의 생존법이 싫어 이네들관 세상을 다르게 보고 또 다르게 사는 법을 체득하려는 이들에게 한국의 언론현실, 확실히 척박하다.


6.

그런데 이런 풍토에 맞서려는 국제적 움직임, 현재 비서구권 나라들 중심으로 본격화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내년 3월로 알려진 '비동맹통신사' <베르나마통신>의 출범이 바로 그것. "인터넷을 통해 참여국가의 통신과 신문기사를 공유·유통함으로써 서구언론이 생산한 편향되고 왜곡된 발전도상국 뉴스에 맞선다"는 게 출범취지다.

물론, 이게 한국을 비롯한 세계 주류매체의 구미의존적 담론소비 지형을 얼마나 바꿔놓을지 당장 판단하는 건 아직 섣부르다. 반서구를 앞세우면서 정작 서구가 퍼뜨려온 가치와 우월적 시선은 고스란히 답습하는 경우가 적쟎았으니까.

그래도 근대 서구인들의 문명적 자부심을 살찌우고자 발명된 조선(한국) 및 아시아담론, 그리고 여기에 또아리튼 서구의 나르시시즘적 세계인식과 명백히 선을 긋겠다는 비동맹통신사의 다짐, 가뭄 끝의 단비마냥 반갑기 그지 없다.

농사도 단작 위주로 가면 결국 땅 자체가 죽는다는데, 담론농사를 업으로 삼는 언론/방송이라고 크게 다를까? 공존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지력의 유지 때문에서라도 현대세계를 이해하는 시선의 종다양성 확보는 필수적이다. 서구에 대한 인정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첫걸음, 바로 여기서부터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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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2 03:45 2008/03/02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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