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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독일이데올로기』(1장만)

선집 1권임 ㅇㅇ
인간관
 
 
경철수고에서 ‘유적 존재’로서 인간이란, 사회 속에서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인 노동을 하는 인간. 자신의 본질을 실현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인간, 특히 ‘계급’의 구성원으로서 인간개념을 강조한 것
 
첫째,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을 ‘감성적 대상’으로서만 파악하고 ‘감성적 활동’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인간을 감성적 활동으로서, 즉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으로서 노동을 하는 존재로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비록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을 ‘유’로서, 즉 사회성을 가진 존재로서 파악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유’는 “다수의 개인을 순전히 자연적으로 결합하는 내적인 무언의 보편성(Thesen 6쪽)”에 머무르고 있다. 즉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즉 일정한 생산 관계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계급적 이해 관계를 담지하고 있는 자로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6번째 테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용해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총체)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역사 과정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심성을 그 자체로서 고정시켰으며, 추상적인 즉 고립된 인간 개인을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포이에르바하가 종교적 심성과 구체적 역사 과정사이의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7번째 테제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적 심성 자체는 바로 ‘사회적 산물’(ein gesellschaftliches Produkt)이다. 종교적 심성은 인간의 고유한 심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들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4번째 테제에서 종교적 세계가 세속적 기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종교적 세계를 폐기하기 위해서는 세속적 기초의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혁명적 실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역사와 사회로부터 인간을 추상화하여 고립적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인간을 단지 ‘유’(Gattung)로서, 즉 개인을 자연적으로 결합하는 보편성으로서만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7번째 테제의 주장처럼 포이에르바하가 분석하는 추상적 개인도 ‘일정한 사회 형태’(eine bestimmte Gesellschaftsform)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고정 불변하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회적 관계에 따라 변화한다. 따라서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인간이란, 인간의 본질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조건지워지고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양식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생활 수단 및 재생산될 생활 수단 자체의 성질에 의존한다. 생산의 이러한 양식은 개인들의 신체적 생존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만 고찰되어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이미 이러한 개인들의 활동의 특정한 방식이며, 그들의 삶을 나타내는 특정한 방식, 그들의 특정한 생활 양식이다. 개인들은 그들이 그들의 삶을 나타내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이 무엇인가는 그들의 생산에,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에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어떻게 생산하는가에 일치한다. 따라서 개인들이 무엇인가는 그들의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에 달려 있다.” (197)
 
생산 양식이란 인간이 생존을 위하여 자신의 생계 수단을 생산하는 방식이며, 이것의 구체적인 형태는 그 사회의 생산력이나 생산 관계와 같은 물질적 생산 활동의 조건들에 좌우된다. 그렇지만 각 개인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는 자신이 속한 사회적, 물질적 조건에 따라 상이하게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개인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자신의 생산의 물질적 조건에달려 있다”고 말한 것이다. 개인의 삶의 방식이나 특성은 생산 양식과 같은 일정한 물질적 생산 조건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관계의 총체’인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렇게 개인의 본질적 특성이나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이러한 물질적 생산 조건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개인들이 자의적으로 선택하거나 변경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일정한 물질적 조건의 제약을 받으면서 생산 활동을 하게 된다.
 
물질적 조건이나 사회적 관계가 인간을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 양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도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규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아무런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자립적] 발전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자신들의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또한 그들의 사유 및 그 사유의 산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202)
 
시대에 따라 물질적 생산 조건 및 사회 관계가 변화하면 이에 따라 인간은 다양한 삶의 방식과 의식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시대의 한 사회에서도 개별 인간들은 사회 관계, 특히 생산 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생산 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의식을 갖게 된다. 즉 계급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나 계급 의식을 갖게 된다.
 
* 인간관 정리 : 따라서 인간에 대한 ‘유적 존재’라는 규정과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규정은 인간 본질의 다른 측면을 파악하기 위한 규정이므로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양립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구분되게 사회 속에서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인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유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이러한 노동이나 삶의 방식이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 특히 물질적 생산 관계와 같은 계급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기도 하다. 인간은 보편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노동을 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정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 계급적 행위와 같은 특수한 삶의 방식을 영위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적 유물론 (220쪽에 개괄적 정리)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총체로서 생산 양식, 즉 시민 사회가 한 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구성하고 그 위에 국가와 같은 사회 조직이나 종교, 철학과 같은 사회적 의식이 들어선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관계를 건축물에 비유하여 생산 양식이 물질적 토대를 이루고 그 위에 사회 제도 및 사회적 의식과 같은 상부 구조가 들어섬으로써 하나의 ‘사회 구성체’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사회와 역사를 유물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이론
그들은 헤겔이나 청년 헤겔학파가 역사와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그들의 역사관을 ‘관념론적 역사관’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자신들의 이러한 역사에 대한 관점을 직접적으로 ‘유물론적 역사관’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오늘날에는 ‘역사적 유물론’(historischer Materialismus)이라는 용어가 ‘유물론적 역사관’과 동일한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 자신은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다만 엥겔스가 1892년에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이라는 책자의 영어판 서문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를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즉 어떤 사회를 독립적이고 고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의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고찰한다. 그래서 과학 또는 학문도 이러한 역사적 관점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과학이나 학문의 일반적인 탐구 방법은 대상을 변화와 발전의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보는 역사학적 관점을 취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상은 크게 자연과 인간 사회로 나뉘어지기 때문에, 과학은 자연의 역사를 다루는 자연 과학과 인간의 역사를 다루는 정신 과학 또는 인문 사회 과학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양자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적 활동을 통해서 서로 관련을 맺으면서 상호 작용을 하게 된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역사를 유물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헤겔이나 청년헤겔학파의 역사 서술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반면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 서술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202)이다. 즉 헤겔이나 청년헤겔학파가 ‘절대 정신’이나 ‘유’, ‘인간’과 같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존재에서 출발하여 역사를 서술한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이나 ‘현실적인 생활 과정’과 같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에서 출발하여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적 역사관은 청년헤겔학파처럼 인간의 고정된 본성을 전제하고서 이것을 토대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물질적 조건들 속에서 시대에 따라 다양한 생산 활동을 하는 현실적 인간을 전제로 하여 역사를 서술한다. 이러한 전제는 관념론적 역사관에서처럼 인위적으로 고안해낸 추상적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험론적 역사관에서처럼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단순한 사실의 집합도 아니다. 유물론적 역사관은 현실적으로 경험 가능한 사실을 역사 서술의 출발점을 삼는데, 그것은 고정되거나 죽은 사실이 아니라 ‘발전 과정 속에 있는 실천적 인간’이다. 이처럼 유물론적 역사관은 물질적 생산 활동을 하는 인간을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역사의 첫번째 전제) 역사의 주체가 된는 인간의 생존이다. 만약 인간이 생존할 수 없다면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생존을 위한 생산 활동, 즉 노동이 역사의 출발점이자 역사의 기본 조건이 된다. 인간은 이러한 생산 활동을 통해서 자연을 가공하여 변화시키고 나아가 자신의 삶도 변화시키게 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의 역사가 형성된다. 생산 활동은 역사의 기원이자 역사의 필수 조건인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의 삶에서 이러한 ‘물질적 생산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것을 역사 서술의 제 1전제로 삼았던 것이다.(208)
역사의 제 2전제는 인간의 욕구 충족과 이에 따른 새로운 욕구의 창출이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생산 활동을 해야 하는데, 만약 이러한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에 만족하여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새로운 변화가 없게 되고 이로 인해서 역사의 발전도 없게 된다. 즉 동일한 형태의 생산 활동만이 반복됨으로써 사회적 변화도 없게 된다. 그
러나 인간은 기존의 욕구 충족에만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욕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생산 활동을 펼치게 되며, 이로 인해서 생산 활동의 방식이나 사회 관계에서도 변화와 발전이 있게 되어 새로운 역사가 전개된다.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의 발전에서 새로운 욕구의 창출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208~209)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의 발전에서 인간의 능동적 욕구와 같은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역사가 단지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기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동적인 작용에 의해서 전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러한 역사 이해는 인간적 요소를 배제하는 기계론적 유물론과는 차이가 있다.
역사의 제 3전제는 출산을 통해서 사회 구성원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출산을 통해서 기존의 사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구성원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더 많은 출산을 통해서 인구가 증가되면 이에 따라 새로운 욕구가 창출되고 이로 인해서 새로운 사회 관계가 등장하게 된다. 인구의 증가는 사회적 활동의 영역을 확대시킴으로써 가족 중심의 단순한 형태의 분업을 큰 사회 중심의 복잡한 형태의 분업으로 발전시키고 나아가 생산력의 증가와 함께 사회 관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209)
이 세 가지는 긴밀하게 연결된 ‘세 가지 계기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한 사회의 발전 단계를 평가할 때 이러한 물질적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는 방식, 즉 생산 양식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서 각각의 사회 구성체를 구분하고 있다.
“한 국가의 다른 국가에 대한 관계뿐만 아니라 이 국가 자체의 전반적인 내부 구성까지도 그들의 생산의 발전 단계와 내부 및 외부 교류의 발전단계에 따라 규정된다. 한 국가의 생산력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는 분업의 발전 정도에 따라 가장 명백히 나타난다.”(198)
국가와 국가 사이의 상호 관계뿐만 아니라 또한 한 국가 자체의 구조나 형태까지도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발전 단계에 의해서 규정된다. 즉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어떤 형태의 국제적 교류를 하는지, 또는 한 국가가 어떤 조직 형태를 갖고 있으며 그 속에서 개인들은 어떤 사회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물질적 생산 활동의 발달 수준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물질적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는 시민 사회를 역사의 진정한 중심으로 간주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 단계에서 존재했던 생산력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거꾸로 그것들을 조건지우는 교류 형태가 바로 시민 사회이다. […] 이 시민 사회가 모든 역사의 진정한 초점이자 무대라는 것은, 그리고 현실적인 관계들을 무시하고 군주나 국가의 행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종래의 역사관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는 여기서 이미 명백해진다.”(216-7)
생산력의 교류 형태 = 생산 관계
시민 사회를 ‘모든 역사의 진정한 초점이자 무대’
이념이나 사상과 같은 사회적 의식의 생산자는 인간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삶은 일정한 생산력과 생산 관계라는 물질적 토대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이로부터 제약을 받게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의 의식이 물질적 생산 활동 속에 직접적으로 편입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생산 활동에 의해서 조건지워지고 규정되기때문에 ‘의식’은 ‘의식된 존재’이다. 즉 의식은 사회적 존재를 반영한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의식이 사회적 존재로부터 자립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본다. 도덕이나 종교, 형이상학, 이데올로기와 같은 인간의 사회적 의식 일반은 그 자체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자립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생산활동과 연관되어 발생한 것으로서 이러한 물질적 삶이 의식의 형태로 승화된 것이다.
 
예를 들면 근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나 경쟁, 사적 소유의 이념은 자본가 계급의 경제적 이해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한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은 지배 계급의 물질적 이해 관계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을고찰할 때도 이러한 물질적 생산 활동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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