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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반

2010.03.13 14:03 프린트기사 원본복사가 가능한 심플모드입니다.
“두리반이 싸워야 투기꾼들이 함부로 못한다”
철거 투쟁 중인 홍대 앞 식당 ‘두리반’
박종주 기자 메일보내기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 동교동 삼거리에 있는 식당 ‘두리반’을 찾은 것은 금요일 저녁 여섯 시 반 쯤이었다. ‘대강 그 때 쯤 가겠다’고만 잡아 둔 인터뷰 약속은 마침 두리반 식두들의 식사 시간과 겹쳤다. 두리반의 사장인 안종려 씨는 “밥이 없다”며 곤란해 했고, 결국 함께 간 친구와 함께 근처의 다른 식당을 찾아야 했다. 그래 봐야 똑같은 사람이 사는 동네인데도, 홍대역 근처의 식당은 비싸기만 했다.

명색이 ‘식당’인 두리반이 찾아 온 손님에게 줄 밥이 없는 곳이 되어 버린 것은 지난 해 크리스마스 이브의 일이다. 2006년, 두리반이 위치한 동교동 167번지 일대가 ‘지구단위 계획’ 지역으로 지정되고 건물 바로 앞에 공항 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치솟기 시작한 땅값은 두리반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았다. 두리반이 세 들어 있던 건물은 남전디앤씨라는 회사로 넘어갔고, 이내 한국토지신탁으로 다시 넘어 갔다. 2008년 2월에는 가게를 비우라는 명도 소송장이 날아 왔고, 2009년 겨울에는 가게 집기가 들려 나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결국 가게 앞에 펜스가 둘러졌다.

이틀 뒤인 26일, ‘두리반 식구’들은 절단기를 들고 식당을 찾았다. 굵은 철사를 끊고, 양철 판을 들어내고 다시 들어온 두리반. 그들은 그곳에 침낭을 깔고, 휴대용 버너를 설치해 농성장을 꾸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80일 가까이 농성을 해 오고 있다. 기자가 두리반을 알게 된 것 역시 그 즈음의 일이다. 하지만 오며 가며 밖에서 보기엔 어두컴컴하고 흉흉하기만 할 뿐 인기척이 없어, 안에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된 지난 11일 불쑥 찾아가 인터뷰 약속을 잡고, 다음날인 12일 저녁, 인터뷰를 고사한 사장 안종려 씨 대신‘두리반 사장의 남편’ 소설가 유채림 씨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들은 일’일 뿐

 

안종려, 유채림 씨 부부가 두리반을 연 것은 2005년 3월의 일이었다. 딱 일 년만인 이듬해 3월, 두리반이 위치한 동교동 167번지 일대는 마포구의 ‘지구단위 계획’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건 농성 하면서 최근에 알게 된 거고,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죠”라는 유채림 씨는 “2007년에 개발 이야기가 떠 돌기 시작하면서 건물이 팔릴까봐 긴장을 하기도 했는데, 건물주들이 ‘쉽게 팔아 넘길 의향을 없으니 안심하라’고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마음을 놓았죠”라고 말했다.

△ 왼쪽 건물의 일층이 두리반. 맞은 편 도로 한 가운데에는 경전철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프로메테우스 박종주

하지만 몇 배 씩 치솟는 땅값 앞에서 건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매각되고 말았다. “12월에 건물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새 건물주는 남전 디앤씨라는, ‘투기꾼들이 급조해서 만든 회사’였죠. 어느 날 와서는 가게를 비우라고 엄포를 놓고 가더라구요.” 유채림 씨의 기억 속에서 모든 것은 ‘들은 일’일 뿐이다. 한 가족이 삶을 꾸려 온 가게 건물이 누군가에게 팔렸다는 사실도, 그와 함께 그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세입자가 자신의 사정이나 입장을 이야기할 기회는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두리반을 비롯해 건물에 세들어 있던 11 세대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10조는 최대 5년까지 임차인의 영업권리를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철거하거나 재건축하기 위한” 경우는 예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하는 기간의 영업 보상금이나, 시설투자비, 권리금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공영 개발이 아니라 민간 기업의 사업인 탓에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장치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재판에서 패소하면서 이들은 한국토지신탁의 재판 비용까지 물어야 하게 되어 보증금마저 돌려 받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4층짜리 건물의 지하에 세들어 있던 댄스 학원은 지상층이 다 빈 후 용역 업체에서 건물의 유리창을 다 깨고 펜스를 둘러 철거, 위험 등의 말들을 낙서 해 놓은 탓에 결국 항소조차 포기하고 가게를 비우고 말았다. “건물을 흉물스럽기 짝이 없게, 곧 무너질 것 같이 꾸며 놓으니까 누가 춤을 배우러 오겠어요,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죠. 결국 1원도 못 돌려 받고 쫓겨난 거에요”라고 유채림 씨는 말했다.

나머지 상가들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결국 항소에서도 패소하고 망연자실해 있던 상가 세입자들이 ‘개별 협상’ 앞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서로 흩어지면 모두가 죽는다, 뭉쳐서 대응하자”고 약속은 했지만 당장 장사를 할 수 없는 처지에서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남은 아홉 세대의 세입자들은 가게 보증금에나 미칠까 말까 한 보상금을 받고 결국 뿔뿔히 흩어지고, 두리반만이 남아 흉흉한 빈 건물을 지키게 된 것이다.

“두리반이 싸워야 투기꾼들이 함부로 못한다”

 

△ ‘두리반 사장의 남편’ 소설가 유채림 씨.
ⓒ 프로메테우스 박종주
아무리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고는 해도, 혹은 아무리 자신의 가게의 추억이 소중하다고 해도, 이미 펜스로 막힌 문을 뚫고 들어가 농성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되셨나요, 뻔한 질문을 던지자 유채림 씨는 “그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난다”며 잠시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24일에 쫓겨 났는데, 용역들이 다 떠나고 나니까 ‘이제 다 끝났구나’하는 절망감이 들었죠. 그런데 집사람(안종려 씨)이 펜스를 두드리면서 대여섯 시간을 가게를 빙빙 돌면서 통곡을 하더라구요. 그날처럼 절망스러웠던 적도 없었죠.”하고 말하는 유채림 씨의 목소리가 조금씩 잠기기 시작했다.

“여섯 시 반쯤 용역들이 떠났는데, 밤 열두 시가 다 돼서 겨우 설득해서 녹번동 집으로 갔어요. 어지어찌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옆에 집사람이 없더라구요. 부랴부랴 가게로 가 봤더니, 휴일인데도 동네 단골들이 밥을 먹으러 왔다가 그렇게 된 걸 보고는 웬 일이냐고 묻고, 집사람이 울먹거리면서 설명을 쭉 하고는 막 우는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운 거에요. 그랬는데 모교 민주동문회 후배 몇 명이 찾아 와서 ‘농성을 하자’고 저를 설득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설득에 나선 민주동문회의 동문들이 두리반 농성의 가장 큰 공신이었다. 유채림 씨를 설득하는 것에서부터 농성 물품을 조달하고, 순번을 정해 날마다 불침번을 서 준 것이다. 거기에 더해 유채림 씨가 속해있는 한국작가회의 회원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농성을 하자’는 한 마디에 두 부부가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화 운동 하면서 감옥에도 갔다 오고, 촛불 집회 때도 연행 돼 가면서 집회에 다닌 사람이 정작 자기 일을 나약하게 포기하느냐, 두리반이 싸워야 투기꾼들이 함부로 못한다, (개발업자들이)세입자들을 존중하고 협상의 파트너로 생각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이야기들에 떠밀리듯이 약속을 했어요. 이대로 물러서고는 집사람이 정말로 못 살 것 같아서, 더더욱 하기로 마음을 먹기도 했죠”라고 유채림 씨는 결심의 계기를 설명했다.

그렇게 시작한 농성이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두리반의 소식은 마포 곳곳으로 퍼졌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들과 마포 촛불 연대, 민중의 집 등 마포 지역의 진보단체들의 연대가 시작된 것이다. 협상 타결로 용산 참사 사건이 일단락되자, 용산 현장에서 활동하던 문화예술인들이나 촛불을켜는그리스도인들 등의 종교인들도 두리반을 찾았다. 덕분에 “마음이 많이 편안해 졌다”는 유채림 씨. 지금 두리반에는, 따로 순번을 정하지 않아도 늘 찾아 와서 함께 밤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고 한 주에도 서너번씩 정기적인 문화 공연과 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마포구 지구단위 계획의 최전방에 두리반이 있다”

 

안종려 씨와 유채림 씨가 식당을 운영한 것은 2001년부터의 일이다. 궁핍하게 살고 있는 소설가 동생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며, 사촌형이 운영하던 찜질방의 식당코너를 내어 준 것이다. 한창 찜질방 붐이 일어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도 찜질방에 놀러 오던, 말하자면 ‘호황기’였다. “2년 반을 운영했는데, 24시간 영업이니까 눈코 뜰 새 없이 잠도 못 자며 일을 했다. 집사람이랑 저랑 밤낮 교대로 일하면서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번 돈에 은행에서 대출도 받고 해서 두리반을 인수했죠. 그게 전부 날아가고 길바닥에 나앉을 상황이 된거에요”하고 말하는 유채림 씨의 표정에서 분통함이 보였다.

유채림 씨는 “길바닥에 나앉는다는 게 다른 게 아니라, 은행 대출은 아직 갚지도 못했거든요. 대출도 못 갚고 빚만 지고 나오게 되는 셈인거죠. 원래 근근히 살던 것보다 더 못한 환경으로 떨어지게 되는 거에요”라며, “지금 가게 반만한 것만 얻어줘도 아무 소리 안 하고 나가서 먹고 살기나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 가게 반 만한 것’ 역시 ‘철거민’에게는 크기만 한 꿈이다. 지난 해 11월, 다른 세입자들이 다 나갔을 무렵 두리반을 찾아 온 용역 업체에게 안종려 씨는 “두리반 반 만한 곳이라도 얻어 주면 나가겠다”고 말했다.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럼 철거하고, 공사 기간동안 함바 식당(건설현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가건물 형태의 식당)을 하게 해 달라. 그리고 건물이 완공되면 한 귀퉁이라도 임대해 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해 봤지만 역시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협상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는 게 유채림 씨의 생각이다. 대여섯 평 쯤 되는 작은 규모의 가게가 대부분이었던 터라 크지 않은 보상금으로 대부분 세입자들을 내보낼 수 있었지만 유독 두리반은 서른 평이 넘는 큰 규모였던 탓에 보상금 합의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천 오백이면 이천 오백, 이런 식으로 보상금 상한선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돈으로는 두리반 같은 가게는 해결이 안 되니까, 애초부터 들어 내려고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유채림 씨는 말한다.

식당을 여는 데 들인 권리금만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근처에 새로이 두리반을 열 수 있었더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그렇게 순탄하지 못했고, 어느새 두리반은 마포구의 유명한 ‘접경지역’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보니까, 홍대입구역에서 신촌역까지, 마포구 지구단위 계획의 최전방에 두리반이 있게 되었더라구요. 우리가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그나마 다른 영세 세입자들이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라는 유채림 씨는 “지금은 우리 가족 보상도 보상이지만, 쉬쉬하면서 우리끼리 협상하고 할 게 아니라 연대해 준 사람들과 이야기해서 문제를 다중으로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지치고 힘든다고 해서 얼렁뚱땅 끝낼 수 없다는 책임감이 생긴거죠”라고 말했다.

“사람이 정말정말 고마웠다”

 

△ 방문객들이 붙여 놓은 응원의 메세지들이 벽을 덮고 있다.
ⓒ 프로메테우스 박종주
농성이 시작된 이후 아직 물리적인 위협이 닥친 적은 없다. 농성 시작 사흘 째 되던 지낸해 12월 29일, 점심 께쯤 찾아 온 지구대 대원이 오후에 철거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고 갔지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종교인들과 대마침 발표된 작가회의 성명서 덕분에 실제로 침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닌 탓에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서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날마다 찾아 와 주는 사람들 덕분에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고.

부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 아들은 곧 군대에 가고, 작은 아들은 올해로 고3이 되었다. 수험생 뒷바라지를 하느라 안종려 씨는 두리반 농성장과 인천의 집을 오가며 ‘출퇴근’ 생활을 하고 있고, 유채림 씨는 한 시도 두리반을 떠나지 않고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식당 간판을 달고도 길손들에게 밥 한 그릇 내어주기가 어려운 형편이 되어 버렸지만, 커피 인심, 말 인심만큼은 여전히 후하다.

“농성하면서 사람이 정말정말 고마웠다, 그거 하나―그리고 제 아무리 잘났어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 정직하게 노동하고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삶, 그것 자체가 내 자식에게 물려줘야 할 것이고 나도 평생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는 것을 이번 농성을 통해서 뼛속 깊이 느꼈다”는 유채림 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사람이 정말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건물을 둘러 싼 펜스에 온갖 낙서가 되어 있어 겉보기에는 좀 흉흉하지만, 그리고 밖에서 보기엔 마치 불이 꺼진 것 같기도 하지만 두리반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문을 열고 들어 가면 차 한 잔을 권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시간을 잘 맞추면 멋진 공연이나 소박한 술자리를 즐길 수도 있다. 화려한 홍대 거리, 그 뒤켠에 있는 질박한 삶의 공간 ‘두리반’을 한 번쯤 찾아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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