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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종량제? 모뎀시절로 돌아가자고?

예전 56K모뎀으로 전화선에 연결해 통신을 하던 시절. 전화 요금 많이 나올까봐 오래 쓰지도 못하고 하루 한 시간, 그것도 새벽에만 겨우 썼었다. 그때 내가 하이텔에 가입해 있던 동호회의 수가 13개. 토론방과 플라자까지 드나들었으니 하루 검색하고 써야 할 글의 수가 장난이 아니다. 그런 모두 한 시간 안에 다 처리했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글 쓰는 속도가 무척 빠른 편이다. 어지간한 글은 10분을 넘어가지 않고, 조금 장문이다 싶으면 30분에서 1시간 사이에 다 쓴다. 논리의 비약이나 논거의 오류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일단 다 쓰고 올리고 나서 그 다음에 생각한다. 그때 길들여진 습관이다. 한 시간 안에 여러개의 글을 써서 올려야 했던 그때의 버릇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그럼 왜 그렇게 급하게 글을 써가면서까지 하루 한 시간 통신만을 고집했느냐? 말했다시피 전화요금 때문이다. 하루 한 시간으로도 2만원이 훌쩍 넘어가는데 마음대로 썼다가는 10만원이고 20만원이고 대책이 없다. 우리집이 남들만큼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남들만큼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통신을 오래 쓴다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딱 한 시간 쓰고 더 이상은 쓰지 않았다.

 

지금도 다른 사람과 리플 논쟁이라도 할라치면 꽤 피곤해 하는 것도 그때의 영향이다. 글 올라온 것 보고 일일이 반론 달 수 없으니, 일단 통신을 끊고 나왔다가 생각을 정리해서 노트패드 같은 것으로 정리해서 반론을 올리곤 했었다. 그러다보니 내 토론방식은 조금 느리다. 아니 한참 느리다. 하루에 글 한 개. 거기까지가 한계다. 그때는 그런 식으로 인터넷을 썼었다.

 

만일 인터넷 종량제를 실제로 실시한다 한다면 아마도 나는 그때 하이텔 쓰듯 그렇게 인터넷을 쓰게 될 것이다. 돈이 아까우니까. 그렇지 않은가? 기본요금이야 어쩔 수 없이 낸다고 하더라도, 추가요금은 너무 아깝고 부담스럽다. 하루 한 시간. 아니 사실 그것도 무리일 지 모르겠다. 지금 예상되어지고 있는 요금정책대로라면 이틀에 한 시간이나 겨우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만 그럴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솔직히 인터넷 쓰지 않는다고 죽는 것 아니지 않은가? 처음이야 조금 불편하겠지만 나중에 인터넷 요금 나온 거 보고 나면 대부분 쓰린 속을 참아가며 인터넷을 줄일 것이다. 자신의 경제사정에 맞추어서. 여전히 인터넷 많이 쓰는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들에 불과하겠지.

 

결국은 인터넷조차도 돈 없는 놈은 쓰지 못하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돈 없는 인간들이가 가장 값싸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가 돈 많은 인간들의 것으로 돌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돈 없는 인간들이 무슨 재주로 그 많은 비용까지 지불해가면서 인터넷을 하겠는가? 차라리 그 돈으로 책이라도 사서 읽는 게 백 만 배 이익이다. 아니면 술을 마시던가.

 

온라인 게임? 우리나라 온라인 게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시장도 넓고 유저들의 충성도도 높아서 다종다양한 온라인 게임들이 세계최초로 우리나라에서 개발되어지고 서비스되어지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 종량제 해보라. 누가 하겠는가? 온라인 게임 요금에 더해 막대한 인터넷 요금까지 지불해야 하는데. 결국 온라인 게임도 끝장이다.

 

결국 남는 것은 인터넷 요금을 감당해낼 정도의 경제력이 되는 사람들끼리의 노닥거림 뿐. 돈 없는 놈들은 인터넷 요금 감당하지 못해 차마 끼어들기조차 두려운 돈 있는 놈들끼리의 노닥거림만 인터넷에 남아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인터넷의 죽음. 계급도 신분도 성별로 나이도 상관없이 모이던 불특정다수의 네티즌이 경제력에 의해 구분되어지는 계급적 특권화에 따른 차가운 소멸. 대한민국 인터넷의 미래는 그렇게 소멸되어간다.

 

하여튼 걱정이다. 하는 꼬라지 보아 하니 인터넷 종량제는 이미 기정사실이다시피하다. 앞으로는 하루 한 시간 겨우 인터넷 하는 것이 고작이게 될텐데, 그동안 인터넷에 중독되다시피 했던 것을 한 시간으로 줄이려 하니 벌써 정신이 아뜩하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8개의 블로그 가운데 몇 개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쯧.

 

저작권법으로 VTX시절의 텍스트문화를 다시 되살려내더니, 이번에는 인터넷 종량제로 전화요금 계산하며 통신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고 한다. 복고풍의 유행이라는 것인가? 그 인간들 머리가 퇴화한 것일까? 아니면 시대가 퇴행하는 것일까? 정신없는 요즘이다. 원래 앞으로 걷기보다 뒤로 걷기가 더 정신없는 법이니까.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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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 시대가 왔다!!

나는 원래 글에 그림이나 음악 넣는거 무척 싫어한다. 아니 싫어하는 건 아니다. 그림 넣고 음악 넣어서 그럴싸해진 글을 보면 무척이나 기분이 좋기는 하다. 다만 그러한 과정이 귀찮을 뿐이다. 아주 귀찮다. 그림 구하고 음악 구하고 다시 그것을 태그까지 넣어가며 편집하는 과정이.

 

그럼에도 한때 그림을 넣고 음악을 넣어가며 글을 썼던 이유는 워낙에 텍스트만 죽어라 올려놓으니까 사람들이 잘 안읽거든. 진짜 안읽는다. 내용 없어도 일단 사진이 있고 음악이 있으면 어떻게든 찾아 읽는데, 나처럼 괜히 글만 긴 경우는 별로 잘 읽지 않는다. 그래서 경쟁력 재고 차원에서, 나도 인기 좀 끌어보겠다고 그림도 넣고, 음악도 넣고 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어졌다. 위대하신 저작권님 덕분이다. 그림을 넣으려 해도 그림의 저작권이 걸린다. 음악을 넣으려 해도 음악의 저작권이 걸린다. 그렇다. 이제는 핑계가 생긴 것이다. 그림도 음악도 넣을 수 없는. 그야말로 온리텍스트를 지향하는 나의 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그림 넣고, 음악 넣는, 멀티미디어적인 포스트로 인기를 끄는 시대는 갔다고 봐야 한다. 이제 멀티미디어 포스트는 끝났다. 다시 80년대식의 텍스트 위주의 포스트 시대가 돌아왔다. 그림도 음악도 넣는 걸 귀찮아하는 나같은 텍스트족의 전성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하이텔 VTX화면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는 텍스트의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꿈이라 생각했던 텍스트 시대가 저작권법으로 인해 다시 돌아왔다. 90년대 감성에 머물러 있는, 아직은 아날로그적인 텍스트세대인 나를 위해. 복고의 위대함이여. 저작권법의 은혜에 축복이 있을진저. 바야흐로 내 시대의 도래다. 프하하하하하하~!!!!

 

그런데 나중에는 영화 보고 평론 썼다고 저작권법에 걸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제목을 마음대로 인용했다고. 내용을 마음대로 인용해 썼다고. 상상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음을 조인다. 설마. 진짜 설마로만 끝나고 말겠지? 불안하다.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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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려도 좋아?

"사과로도 부족하다면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아!"

 

일본 만화에 많이 나오는 대사 가운데 하나다. 주로 실수로 잘못을 저지른 캐릭터 - 특히 여자 - 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하는 말이다.

 

아마 가장 유명한 만화로는 아다치 미츠루의 <슬로우스텝>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여자주인공이 변장으로 속이고 있던 것을 들키게 되자 사과하면서 눈을 감고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다고 말한다. 눈을 감고 있는 틈을 노려 키스를 하려다 불발로 끝나기는 하지만.

 

사실 별 것도 아닌 대사.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대사인데 요즘 유독 저 대사가 어떠한 명대사보다도 가슴에 와닿는다. 여기저기 화내고 싸우고 돌아다니면서 겪는 여러가지 일들 때문이다.

 

나는 성격이 좀 격한 편이다. 화도 잘 내고 울기도 잘 하고 웃기도 잘 하고 풀리기도 잘 풀린다. 말하자면 단순열혈남? 그보다는 우리나라식으로 속좁고 성격 더러운 인간이다. 그래서 조금만 화 나는 일이 있어면 참지 않고 그대로 화를 내 버린다. 괜히 쌓아두었다가 나중에 앙금 만드는 일 없도록.

 

사실 내가 화내는 이유 대부분은 그렇게 큰 일이 아니다. 큰 일일 경우 아예 무시해버리거나 화도 내지 않고 창을 닫고 사라져버리니까. 화를 내는 것은 그나마 화를 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작은 일들이다. 그런데 대개는 이 작은 일들이 큰 일로 번진다. 바로 사과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화를 내면 사람들은 바로 사과를 한다. 사람들이 좋아서인지 몰라도 일단 화를 내면 사과를 한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왜 화를 내는지도 모르고, 왜 사과해야 하는 지도 모르면서도 사과를 한다. 아니 정확히는 사과해 준다. 이게 사람을 열받게 만든다. 끝없이.

 

사과라고 하는 것은 상대가 불쾌해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가 나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제하는 데서 시작된다. 상대가 불쾌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과가 아니다. 그냥 사과해 주는 거지. 징징대며 보채니까 사과를 적선해주는 거지.

 

그럼에도 일단 저렇게라도 사과를 하고 나면 상황은 역전된다. 일단 사과를 해놓았으니 사과를 한 사람은 모든 책임에서 면제된다. 남은 것은 일단 화가 났고, 거기다 저런 황당한 사과를 받은 사람의 용서. 만일 여기서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화 낸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간다. 속좁고 화 잘내고 예의없는 사람으로.

 

대개 저런 식으로 사과를 하고 나면 사과를 한 사람은 끝간 데 없이 당당해진다. 진짜 당당하다. 왜 사과를 받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미 사과를 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힐난하며 책임을 묻는다. 그러면서 속좁은 사람이 된다. 그렇게 예의없는 사람이 된다.

 

더 웃기는 건 주위에서 끼어드는 인간들이다. 대개 구경꾼들은 화를 낸 사람에게 적대적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일단 화를 냈다 하면 그 화 낸 인간에게 더 큰 책임을 묻는다. 뭘 그런 걸로 화를 내냐고. 왜 조금 더 참지 않았느냐고. 구경꾼이니까. 철저한 타자니까. 더구나 화를 내게 만든 사람이 사과라도 했다 치면 그 다음은 더 끝장이다. 여기서 굽히고 들어가지 않으면 아예 그 사이트 떠날 각오까지 해야 한다. 안그러면 버티지 못하니까.

 

그렇게 떠난 사이트가 꽤 된다. 워낙에 화를 잘 내는 성격인데다 같지도 않은 사과따위 사과라고 받아들여줄 정도로 유한 성격이 아니라 끝까지 화내며 싸우다 속좁고 성질더러운 예의도 모르는 놈이 되어 거의 쫓겨나듯 떠나게 된다. 게시판을 떠나 거의 블로그에 정착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도 쫓겨나느라 이젠 쫓겨날 데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하여튼 웃기는 일이다. 무엇 때문이든 화가 났다고 한다면 그 화를 푸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화 난 당사자의 권리다. 분명한 이유가 있어 화가 났다면 그 이유가 해소되기 전까지 화를 풀든 말든 그것은 화가 난 사람의 책임이다. 설사 진심어린 사과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닌가도 그 화난 당사자의 책임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화를 내면 화를 낸다고 속 좁은 인간이 된다. 사과같지 않은 사과를 하고도 일단 사과를 했다고 화를 풀지 않으면 예의도 모르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한 마디로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개같은 일이 있고, 아무리 좆같은 일이 있어도 무조건 화 내지 말고 참으라는 것이다. 뭐 이런 개좆같은 일이 있는가 말이다.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위의 저 만화 대사를 떠올린다. 사과를 하고도 그 사과로 부족할 것 같으면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라고 하는 저 대사. 원래 저게 정상 아닌가? 사과를 할 때는 상대방이 용서할 것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용서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용서의 방법을 구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솔직히 인터넷에서 저렇게 때리란다고 해봐야 때릴 수도 없다. 오프라인에서 누군가가 저렇게 때리라고 뺨을 내민다고 진짜 때릴 수 있는 인간은 얼마 없다. 누가 때릴 수 있겠는가? 미안하다며 차라리 자기를 때려서라도 화를 풀 수 있으면 때려도 좋다는데. 오히려 거기서 화를 내면 그게 이상한 놈이다.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대가 화가 나 있다는 정도는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상대가 나로 인해 화가 나 있다는 정도는 인정하고 들어와도 되지 않을까? 사과를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 화가 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기 잘못이 없다면 좀더 솔직하고 당당하게 해명해야 하지 않을까? 잘못했다는 생각도 상대가 나로 인해 화가 났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화가 났다니까 적선하듯 사과를 던져주는 것보다는 말이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또 사이트 하나를 떠나왔다. 그냥 좋게좋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역시 그러기 싫다. 무엇보다 그 사이트에 대한 애착이 없다. 남아있고자 하는 애착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참아봤겠는데, 사람도 그렇고 장소도 그렇고 여러가지로 정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손 털고 나와버렸다. 성질도 제대로 못 부리고.

 

뭐 이 글 보고 나더러 속좁고 성질더럽고 예의도 모르는 인간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할 수 없다. 중요한 건 내가 그러한 상황을 그냥 참고 넘어가지 못하겠다는 거니까. 최소한 나에게 있어 그냥 참고 넘어가도 좋을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는 거니까. 그것이 중요하다. 결국 화를 내는 것은 나 자신이니까.

 

어쨌든 마지막에는 사이트 떠날 각오까지 하고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화를 내면 그 사이트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화를 참지 못해 화를 내고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 사이트를 떠날 것까지 감수해가며 화를 내는 만큼 최소한 화를 내는 데 대한 나름의 리스크는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화를 내는 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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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나도 천재...???

드디어 나도 천재의 대열에!! 피라 하면 천재의 상징 아닌가? 창백한 피부에 곱상한 외모. 뭔가 비련에 젖은 우울한 눈빛. 때때로 쿨럭이며 치솟는 목젖. 그리고 흥건히 젖어드는 피! 이야말로 천재의 미학! 불운한 천재의 상징! 그렇다! 피다! 피야 말로 천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드디어! 나도 피를 토했다.

 

어제 맥주 몇 잔 마시고 완전히 맛이 가서 거의 토하면서 집에 왔다. 집에 와서는 토할 것도 거의 남아있지 않던 상태. 그래도 자면 나아지겠거니 하고 잠이 들었는데 웬걸? 새벽녘에 무언가 불끈불끈 치밀어오르는 듯 하더니 결국 물과 같은 멀건 것이 계속 토해진다. 거의 두 시간 쯤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자려다가 토하고, 자려다가 다시 목 아래가 불끈거려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는.

 

그런데 그 와중에 결국 화장실에 채 미치지 못하고 토한 게 몇 번 있었다. 오늘 아침 다시 깨어나 그것 치우겠다고 휴지 들고 나섰더니 우와아아아~~!! 피다~! 피~!! 찐득거리는 투명한 토사물 가운데 가라앉아 있는 것은 붉은 피였다. 조금은 거뭇하게 변색된. 그렇다! 드디어 나도 피를 토하는 천재의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그동안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었다. 곱상한 외모. 음울한 눈동자. 하늘하늘한 몸매. 격한 성격. 더구나 넘치는 재능. 불우한 경제환경. 하늘이 시기하기에 충분한 이 넘치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를 천재라 여기기엔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하나 부족했다. 그런데! 그런데! 드디어 그 하나가 채워진 것이다! 피! 피를 토함으로써!!

 

앞으로 나를 천재라 불러달라! 아니 당장 필명을 천재로 바꾸어야겠다. 피를 토하는 천재로! 푸하하하하하하하~~~!! 젠장! 달말에 돈 들어오면 그거 가지고 병원에나 가봐야겠다. 천재도 좋지만 오래 사는 게 더 좋다. 일단 한 번 천재 해봤으니까 이제는 장수기록을 갱신해봐야지.

 

하여튼 고작 맥주 좀 마셨다고 피까지 토하다니 드디어 나도 죽을 때가 된 모양이다. 쳇. 어쨌든 이제부터는 나도 천재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든 말든!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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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날 때 이렇게 주문처럼 되뇌인다.

 

"돈 안되는 일에 목숨 걸지 말자."

 

굉장히 울적할 때도 주문처럼 이렇게 되뇌인다.

 

"돈 안되는 일에 목숨 걸지 말자."

 

무척이나 싫은 인간이 있어 드잡이질하고 싶을 때도 역시 이렇게 말한다.

 

"돈 안되는 일에 목숨 걸지 말자."

 

한때 도에도 빠져보고 선에도 빠져봤었다. 워낙에 격한 성정이라 조금이나마 달래볼 수 있지 않을까 동양의 고전에 깊이 빠져들어도 봤고 신비주의라는 것에도 심취해봤다. 그러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저 머릿속으로나 받아들이고 말 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 결국은 아무 보람 없이 거칠고 즉흥적인 성격 그대로만이 남을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 자신을 다스리는 한 가지 키워드를 찾아내게 되었다. 바로 "돈"! 어차피 돈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돈 없으면 인터넷도 못한다. 돈 없으면 몸 누일 작은 방조차 구할 수 없다. 라면을 먹을래도 밥을 먹을래도 돈이 없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돈이 내게는 없다. 그 절박함. 그것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돈이 절실해지고 나니 다른 것들이 그저 하찮기만 하다. 좋고 싫고 옳고 그르고 다 부질업기만 하다. 화가 나고, 울고 싶어지고, 미워 죽이고 싶어지다가도 돈을 생각하면 다 하찮은 것처럼 여겨진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돈. 오로지 그 하나 뿐이니까. 덕분에 돈을 생각하면 나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말하자면 돈의 자유라고나 할까?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화 내봐야 돈이 안된다면 그것은 가치없는 일이 된다. 아무리 울고 깊어지는 일이 있어도 울어봐야 돈이 안된다면 울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미워하는 것 또한 그것이 돈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미워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화가 나고, 울고 싶고, 미워할 "뿐" 그래야 할 필요는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유. 다른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감정이나 이성, 경험, 그외의 다른 주위의 것에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자유. 오로지 돈 하나에만 매달리면 되는, 오로지 돈 하나만을 바라보면 되는, 거의 무한한 절대의 자유. 도라고 하는 것은 곧 자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돈. 따라서 돈은 자본주의의 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나는가? 울고 싶은가? 짜증나는가? 누군가 미워 견딜 수 없는가? 그러면 다음과 같이 외쳐보라.

 

"돈 안되는 일에 목숨걸지 말자."

 

그러면 지금 화내고 있는 것들이, 울고 싶어지는 것들이, 짜증나는 것들이, 그 미워 죽겠는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듯 여겨질 것이다. 돈이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화내고 울고 짜증내고 미워하는 나 스스로가 바보같이 여겨질 것이다. 그것이 곧 자본주의의 도. 인간을 궁극의 자유로 안내할 자본주의의 도일 것이다.

 

문제는 돈 되는 일을 만나면 사람이 참 비굴해진다는 것. "돈인데?"라는 한 마디로 모든 반론도, 모든 항의도, 모든 이의제기도 의미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돈"이니까. "돈이 되는 일"이니까. 돈 안되는 일에 목숨 걸지 않는 만큼 돈 되는 일에 목숨을 걸게 되는 것이다. 하긴 그럴 일도 별로 없기는 하지만. 나도 이제는 돈 되는 일에 목숨 좀 걸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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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자는 글은 안쓰게 된다.

어느날 어떤 글을 써보고 싶어진다. 게임이라든가, 만화라든, 애니메이션이라든가, 혹은 나에 관련된 어떤 것들. 조금은 심각하고, 조금은 잘난 체 해볼 수 있는 그런 것들. 한 번 그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이번엔 왠지 좀더 잘 쓰고 싶다는 글 욕심도 생긴다. 그래서 자료조사랍시고 이것저것 준비를 한다.

어디서는 관련된 논문을 찾아 필요한 부분을 발췌한다. 집에 굴러다니는 책을 뒤적여 그에 관련된 내용을 찾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비슷한 주제에 관련된 글을 찾아 스크랩해놓기도 한다. 글에 삽입할 그림도 열심히 찾아 모은다. 필요하다면 음악도 다운로드받아 준비해놓는다. 하여튼 글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일단 최대한 모아둔다. 오랜시간에 걸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그러나 정작 모든 준비가 갖춰지면 쓰지 않는다. 절대. 결코. 쓰고자 해서 그토록 준비했던 글은 거의 대부분 쓰여지지 않은 채 머릿속에만 남는다. 쓰려고 준비하는 동안 쓰고자 하는 모든 에너지를 다 소비해버리기 때문이다. 논문을 보고, 책을 뒤지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사이, 어느새 쓰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완전히 충족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은 대개 즉흥적인 것들이 많다.

조금 잘 써보겠다고 쓰는 글들은 대개 글이 되지 않는다. 대신 전혀 자료조사 없이, 전혀 사실확인 없이, 그냥 충동이 시키고, 손가락이 내켜서 휘갈겨쓰는 것들이 글이 된다. 20분 안팎 걸려 쓰여진, 길어아 한 시간 정도 딴 짓 하면서 대충대충 쓴 그런 것들이 글이 된다. 컴퓨터 하드에는 그와 관련된 좀더 멋진 글을 쓰기 위한 다양한 자료가 남아있는 채.

비효율도 이런 비효율이 없다. 조금 잘난 체 해보겠다고 열심히 준비하면 준비하는 동안 만족해버려서 글 안쓰고도 배불러 배 두드리며 손 털어버린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준비따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던 것들은 어느 순간 충동에 밀려 글이 되어 인터넷에 공개된다. 잘난 체 좀 해보겠다고 블로그니 뭐니 만들어놓은 주제에 바보짓도 이 정도면 국보급이다. 그러고도 블로그 운영이라니.

지금도 내 하드에는 내가 쓰고자 기획만 해두었던 글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있다. 사진만 해도 몇 백 메가가 되고, 텍스트만 또 몇 백 메가다. 하지만 대부분 내가 뭣 때문에 모았는지조차 잊고 있다. 그때 내가 어떤 글 쓰자고 저 자료들을 모았는지조차. 그러면서 잘난 척 여기저기서 즉흥적인 글은 잘도 쓴다. 아는 사람이 보면 비웃고 말 그런 글들을. 그야말로 사서쪽팔림이다.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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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의 3요소...

내 인터넷 생활의 시작은 토론방에서부터였다. 이러저러한 문제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과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때로는 다퉈가는 토론이라는 것에 맛을 들이면서 인터넷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다. 하이텔 토론방은 물론 야후, 네이버, 네이트, 나중에는 서프라이즈와 스탠딩, 폴리티즌까지. 포털은 물론 정치사이트까지 넘나들며 거진 10년간의 인터넷 공력을 쌓아왔다. 말 그대로 인터넷 토론공력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물론 그런 토론 따위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토론을 하면 할 수록 느끼게 되는 것이 온라인에서의 토론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어떠한 효용성이 있느냐 하는 본질적인 의문이었다. 거의 대부분 아무런 결론 없이 서로 감정만 상하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첨여한 주제일 수록, 토론에 참가한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토론이 치열하게 이루어졌을수록 항상 결론 없이 사람만 다치고 끝나곤 했었다.

지금 토론방에서 노는 것은 취미생활 이상의 의미는 없다. 누군가를 바꾸겠다는 생각도 없고, 뭔가를 바로잡아보겠다는 의욕도 없다. 오로지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하고,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어 들려준다는 그 이상의 생각은 없다. 그래서 괜히 심각해지고, 괜히 치열해지는 토론방은 알아서 피한다. 피곤하니까. 어차피 그런 토론방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어줄 여유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말을 들려줄 여유도 없을테니까. 대충 살펴보고 아니라 생각하면 술렁술렁 피해 나오고 만다.

어쨌든 10년이라는 세월동안 거의 토론방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나름대로 토론이라는 것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온라인에서의 토론. 토론을 어떻게 하면 이기고, 어떻게 하면 감정 상하지 않고 도망나올 수 있는가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다. 토론의 3요소라 하는 것은 그 가운데 토론을 즐겁게 하면서, 또한 토론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일컫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시간

토론방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시간이 많은 사람이다. 그 누구도 시간 많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 겨우 시간 내서 글 하나 올려놨더니 그 다음날 그보다 더 많은 분량의, 열 개의 글이 올라와보라. 토론할 기분이 나나. "가"라고 하는 주제 하나를 떠들어놨더니 그에 파생되는 "나""다""라""마""바"까지 끄집어내서 시비를 걸어 보라. 한정된 시간 안에 그 모든 것을 상대하려면 말 그대로 머리 뽀개진다.

더구나 일반적으로 먼저 손 털고 일어나는 쪽이 토론에서 졌다고 판단한다.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먼저 손 털고 일어나서 사라지는 쪽이 일단 논리에서 밀렸다라고 대부분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는 졌다는 소리 듣기 싫어 토론방에서 죽치고 앉아 버티게 된다. 이때 가장 오래, 가장 늦게까지 토론방에 남아 버틸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사실상 최종승자인 것이다. 결국 승부의 관건은 시간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토론이 즐겁다. 할 말도 마음껏 할 수 있고, 토론방이 닫히는 것이 먼저인가, 내가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먼저인가를 기쁜 마음으로 감상할 수도 있다. 감정싸움이 시작되면 상대가 마지막으로 한 욕이나 인신공격에 마지막 방점을 찍듯 최대한의 욕설과 최대한의 인신공격으로 돌려줄 수도 있다. 소위 폐인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인터넷 토론방의 절대지존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2. 신뢰

신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또 하나는 타자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또한 가장 절대적인 요소들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자기 주장을 당당히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그에게 나의 생각과 나의 감정, 나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많이 아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결코 당당할 수도, 솔직할 수도 없다.

이 두 가지 가운데 보다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물론 당연히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경우에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 따위 굳이 필요치 않다. 어차피 온라인. 기껏해야 텍스트로 욕설이나 주고받는 정도다. 직접 만나 치고 받고 싸울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은 잠시 무시해도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런 것이다. 어느 종교의 경우 외부에서 비판을 하면 "신이 주신 시련"이라고 간단히 일축해버린다. "사특한 존재들이 신을 따르고 믿는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기까지 한다. 자기 자신의 옳음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토론방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판마저도 "어리석음의 소치"로 여기게 된다. "어리석고 무식해서 저런 소리를 하고 있다"쯤으로 아구 간단히 정리하고 인식하게 된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절대 옳다. 나는 절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어리석은, 그리고 무식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들의 비판 따위 한 귀로 듣고 흘릴 수 있다. 어차피 나보다 못난 틀린 비판들이기 때문이다.

대개 토론을 잘한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보면 표가 난다. 다른 사람을 먼저 무시하고 시작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을 철저히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고, 그 사람의 인격과 자격까지 검증해낸다. 그리고 토론 내내 그것을 적용시킨다. 무식한 놈. 어리석은 놈. 생각이 잘못 박힌 놈이라는.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열받는다. 비웃고 조롱하며 무시하기까지 하는 데에야 견딜 재간이 없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확실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3. 열정

토론은 논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감으로 한다. 이것이 옳다는. 이것이 절대 옳다는. 반드시 이 옳은 것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그러한 서로 다른 정의감이 충돌하는 것이 바로 토론이다. 당연히 토론에서 이기는 것도 그러한 정의감이 강한 쪽이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절대 물러서서는 안된다는, 투철한 사명감과 의지를 지닌 사람들.

사실 나만 하더라도 토론 도중 논리에서 밀리는 것을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논거에서 딸리는 것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논리에서 밀리는 것은 내가 머리가 나빠서일 것이고, 논거가 딸리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 적어서일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단지 내 머리가 나쁘고, 아는 것이 없을 뿐인 것이다. 당연히 논리에서 밀려도, 논거가 딸려도 어지간해서는 결코 승복하는 법이 없다. 토론 도중 책을 찾아 공부해가면서 토론에 임하는 한이 있더라도, 끝내 시간과 감정, 노력의 한계로 손 털고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버틴다.

실제 토론방에서 강한 사람들을 보면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 종교 등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특히 종교에 관련된 토론에서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아무리 논리를 들이대고, 아무리 근거를 들이대더라도, 상대의 승복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스스로 먼저 지쳐 일어나고 말 뿐이다.

박정희 추종자들과의 토론이나, 노무현 지지자들과의 토론 또한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김대중 지지자들과의 토론이 그랬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 결코 허물어지지 않을 단단한 성벽에 대고 머리를 박아대는 듯한 절망감. 무한루프다. 끝내는. 같은 말 반복하고, 같은 논리 반복하고, 결국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다 지쳐 쓰러지고 만다. 버티는 사람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인지 요즘 토론방에 가보면 박정희 추종자와 노무현 지지자만이 남아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 무섭도 종교조차도 그들 앞에서는 한 물 갔다고나 할까? 새로운 토론방의 주류라 하겠다.


생각해보면 20대 중후반, 한창 토론방에 빠져 있을 때, 나 또한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지간한 토론에서는 밀려본 적이 없다. 설사 아흔 아홉 명이 전부 반대편에 있고, 나 혼자 그들을 상대하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라 할 지라도 결코 주눅드는 법이 없었다. 시간도 넉넉했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있었고, 반드시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투철한 사명감과 정의감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때는 토론방이 너무도 재미있었다. 그 살벌함과 그 냉엄함이 짜릿할 정도로 좋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시간의 무서움을 알게 되면서, 나 자신에 대한 회의에 빠져들게 되면서, 무엇보다 옳다는 것이 무언지 그르다는 것이 무언지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토론방이라는 곳이 전처럼 즐겁지 않게 되었다. 피곤하다고나 할까? 질렸다고나 할까? 그보다는 무섭다는 말이 더 옳을 듯하다. 무섭다. 토론이라는 것이 이제는 조금은 무섭다. 왜 해야 하는 지, 무엇때문에 무엇을 위해 해야 하는 지 모르기에 더욱 무섭다.

그래서 지금은 토론방에 가더라도 토론을 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글만 올리고 나온다. 읽든 말든, 받아들이든 말든,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린 채, 나의 역할을 글 하나 올리는 데에 한정지어버린다. 때로 그 이상을 요구하거나, 그 이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리면 그조차도 포기해버린다. 글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피곤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무서워서. 취미생활로 즐기고자 취미생활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은 할 수 없기에 그리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아직도 나름대로는 토론방이 재미있다. 글 하나 올리고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내 글과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은 또 하나의 재미다. 때로는 동의해주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가끔은 욕설을 퍼붓고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 예전에는 꽤 열받았을 상황도 이제는 왠지 재미있는 단막극을 보는 듯 흥미롭고 재미있다.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방관자로서의 재미랄까? 덕분에 지금도 토론방에서 잘 놀고 있다. 토론을 하기 위해서가 아리라 구경하기 위해서. 철저히 구경꾼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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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가 축구공을 밟아 터뜨린 이유는?

제가 모 사이트에서 소설을 하나 연재하고 있습니다. 연재작으로는 세 번 째. 전에 연재하던 것을 조금 안좋은 일로 중간에 그만두는 바람에 반 년 만에 연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작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해서일까요? 어떻게 된 게 리플마다 전에 쓰던 작품만을 이야기하네요. 그거 언제 연재 다시 할 거냐고. 그 소리 들을 때마다 하드에 저장되어 있는 그 작품의 나머지 부분을 날려버리고 싶더군요. 화가 나서.

마음에 드는 작품입니다. 아주 좋아하구요. 가장 저다운 작품이면서 또한 제가 다시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싶은 작품이었습니다. 중간에 그만두게 된 건 그 무렵 신경이 날카로워있던 터라 리플로 인한 화를 참아내지 못해서였지, 작품 자체의 문제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장기연재를 고려해서 여러가지 많은 준비를 해두었었습니다. 설정이라든가, 캐릭터라든가, 시납시스라든가, 거의 2년 분은 준비해 두었을 겁니다. 그런 걸 한 순간 실수로 중단해버린 거죠.

워낙에 뜻하지 않게 중간에 끝내버린 거라 아쉬움도 많이 남습니다. 그래서 몇 번인가 리메이크를 시도하기도 했었죠. 결국은 중간에 한 번 단절된 것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지만요. 역시 중간에 한 번 리듬이 끊기고 나니 전처럼은 안되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다시 때가 되면 리메이크 하기로 하고 일단은 지금까지의 글과 설정, 캐릭터들을 봉인해두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지금 쓰는 것에 전념하려구요.

그런데 정작 새로 연재하고 있는 작품에 달리는 리플이라는 게 바로 그 전에 연재하던 작품에 대한 질문들입니다. 언제 다시 연재하냐고. 그 뒷부분 어디서 볼 수 있느냐고. 지금 쓰고 있는 건 전혀 다른 소설인데 엉뚱하게 이미 연재를 중단해버린 작품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전부이기라도 한듯 말이죠.

화가 나더군요. 진짜 화가 납니다. 그게 전부가 아닌데. 지금 연재하고 있는 건 그게 아닌데. 그럼에도 자꾸 지나간 것들만 이야기하고 있으니 증오스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쓴 소설인데 제가 증오하게 되어버립니다.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아, 주성치가 그래서 축구공을 밟아 터뜨렸구나 하구요.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나는 지금 <쿵푸허슬>을 보여주려는 거야! <소림축구>따위는 잊어!" 라는.

창작자에게 있어 전작에 대한 사랑은 영광이면서 또한 굴레입니다. 자신의 작품에 관심과 애정을 보인다는 것은 창작하는 사람에게 있어 더할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관심과 애정이 지금 새로운 창작에까지 집착으로서 작용하게 되면 그것은 굴레가 되어버리죠. 자기가 자기가 아닌게 되어버리는, 오로지 과거의 한 점에 고정되어버리는 그러한 구속입니다. 예전에 게임을 만들 때도 느꼈었죠. 만화를 그릴 때도요.

차라리 제가 전작에 대해 미련이 많은 타입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어떤 작가처럼 자기 작품만 죽어라 리메이크하는 완벽주의자라면 또 괜찮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지나간 일에 대해 크게 연연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저처럼 자기가 그린 그림이나, 원고를 쉽게 태워버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저보다 더 자기 글 잘 지워버리고, 많이 지워버린 사람 별로 없을 겁니다. 몇 년 새 지운 글만 거의 2천 개가 넘으니까요. 남아있는 글과 지운 글의 수가 거의 비슷하죠.

그런 성격이다 보니 이미 지난 일은 지난 일이 되어버립니다. 언제고 다시 생각이 다서 새롭게 창작한다면 모를까 이미 쓸 때가 아니라 생각되어 봉인한 거라면 더이상 생각할 것도 없는 지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지금 쓰고 있는 이것 하나가 중요하죠. 그런데 거기다 대고 과거의 작품만 이야기하고 있으니 돌아버릴 밖에요. 아주 돌아버릴 지경입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요.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솔직히 성질난다고 날려버리기엔 그 작품을 위해 준비했던 것들이 너무 아까우니까요. 조용히 참고 있다가 나중에 다들 잊을 때가 되었을 때 그때 다시 리메이크 할 겁니다. 지금보다 더 멋지게 말이죠. 그동안 글 쓰면서 느낀 건데 소설은 확실히 나이를 따라가더군요. 경험한 만큼 글이 나옵니다. 아무리 글 잘써도 경험이 일천하면 글도 일천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을 믿습니다. 시간이 지금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하여튼 자기 작품에 대한 관심과 애정때문에 그 작품을 증오하게 된다는 것이 어이없는 역설입니다. 어떻게 자기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작품을 증오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것이 부모가 자식을 증오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엇나가는 거죠. 사랑이. 사랑이 엇나가 결국 채워지지 못한 사랑이 증오가 되는 겁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주성치의 심정이 되어 생각해봅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하고. 그냥 무시하고 계속 쓰느냐. 아니면 요구에 따라 조기 리메이크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예 아이디를 바꿔 새로운 사람인 양 새로운 작품을 쓰느냐. 어느쪽이든 전부 바보같습니다. 어쨌든 지금 당장 연재하는 것을 완성해야겠죠. 나머지는 그 다음에 고민할 문제입니다. 스트레스의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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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나쁜 새벽...

오늘 우연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내 뒷담화를 하는 어떤 포스트를 발견했다. 뒷담화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은 나를 무척이나 싫어하던 사람. 다른 한 사람은 무척이나 나에게 친한 척 살갑게 대하던 어떤 누군가. 나를 싫어하던 인간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평소 친한 척 하던 인간이 거기서 그러고 놀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충격이었다. 나 또한 그 사람을 무척이나 좋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어쩌면 이런 것이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인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곳에서는 착한 가면을 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본색을 드러내는, 무한한 인터넷의 바다 만큼이나 수없이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곳. 그렇지 않아도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라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던 차에 다시 한 번 실망을 더한다. 고작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도대체 어디에서 알마나 되는 나에 대한 험담이 돌아다니고 있을까? 나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이 돌아다니고 있을까? 내가 아는 그 친한 척 하는 사람 가운데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이 뒤에서 그런 짓을 하고 다니고 있을가?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다. 들리지 않으니 또한 알 수 없다. 그래서 의심만 깊어진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다.

 

역시 사람이라는 것은 살과 살을 부대껴야 한다. 마음과 마음을 부대껴야 한다. 싸우고 갈등하고 화해해봐야 한다.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해봐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사람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고작해야 인터넷 따위. 고작해야 아이디 따위. 고작해야 온라인으로 텍스트나 나누는 따위로 인간관계라 하는 것은 우습다. 진짜 우습다.

 

물론 모든 관계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온라인에서의 인연으로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때로 선물도 받는다. 작년엔 그림 그리라고 타블렛도 하나 받았다. 내가 그림 그려서 올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보내온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그래도 인터넷을 버틴다. 그러나 역시 사람을 믿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 대인공포증인 것일까? 아마도 그런 것같다. 요즘은 게시판에도 잘 가지 않는다. 예전엔 그렇게 열심히 토론도 하고 논쟁도 하던 그 곳이 이제는 두려워진 때문이다. 정말 무섭다. 그 사람들이. 그 가면 뒤에 숨은 악의가. 그것이 인격으로 보일 때 그 두려움은 실체가 된다. 숨막힐 정도로 두려운.

 

글 쓰는 건 내 취미생활이다. 내 생각을 정리해서 나만의 글로 풀어내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두렵다. 그래서 일부러 인터넷에서는 더욱 두터운 가면을 쓰려 한다. 아이디는 단순히 아이디일 뿐이라 여길 수 있는.

 

하여튼 기분나쁜 새벽이다. 왜 하필 거기서 그 아이디를 검색했을까? 왜 하필 그 글을 클릭했던 것일까? 아니었다면 그저 좋은 기억으로만 남을 수 있었을텐데. 아니었다면 그저 좋은 관계로만 남아있을 수 있었을텐데. 후회가 앞선다. 차라리 몰랐다면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라 하는 후회다. 정말 기분나쁜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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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의 비겁함...

아는 변호사가 그러더군요. 왠만하면 재판같은 거 하지 말라구요. 특히 저같은 사람은 재판하면 안된다구요. 돈 없고 배운 거 없는 놈 재판해봐야 돈만 깨지니까 재판 할 일 있을 거 같으면 그냥 돈 물어주고 말라고 하네요. 그게 재판비용 절약하는 방법이라고. 그러면서 끝에 덧붙이는 말이 "법이니 논리니 하는 건 결국 배우고 가진 놈들 편하게 세상 지배하자는 수작이다."라나요?

예전부터 논리라고 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성이라는 데 대한 회의죠. 저 자신이 느껴봐서 알거든요. 만화도 그려봤고 게임도 만들어봤고 요즘은 소설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다양한 캐릭터의 다양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려내야 하죠. 그를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논리가 필요하구요. 설사 그것이 살인자라 해도 말이죠.

이성으로 변명하고자 하면 변명하지 못할 게 없습니다. 살인도, 강간도, 강도도, 사기도, 부정도, 다 변명이 됩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집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다고 여기면 됩니다. 그 다음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죠. 아는 것 모르는 것 있는대로 끌어모아 그 논거로 삼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논리 완성이죠.

논리와 비슷한 말로 궤변이라는 게 있습니다. 논리인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은 논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궤변이라고 하는 그 상대 입장에서 그것은 논리입니다. 이쪽에서 논리라 하는 것이 저쪽으로 가면 궤변이 되구요. 누가 옳은 것일까요? 누가 논리이고 누가 궤변인 것일까요? 나는 논리이고 저들은 궤변일까요? 아니면 저들은 논리이고 내가 궤변인 것일까요?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논리의 근거가 되는 가치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에 의해 부여된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애초부터 가치라고 하는 것이 부여되지 않습니다. 도롱뇽이 더 귀중하고 돌덩이는 더 하찮고 하는 그런 가치라는 것은 원래 이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었을 뿐이죠.

가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발명품에 불과합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자갈보다 기기묘묘한 모양의 수석이 더 귀중한 것처럼 사람의 생명마저도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계량화하여 측정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생명은 더 귀하고, 누구의 생명은 덜 귀한 것처럼 말이죠. 민주주의도, 인권도, 자유도, 평등도, 권리도, 의무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인간에 의한 것이니까요.

당연히 논리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가치를 따라가게 됩니다. 즉 사람의 생명을 민주주의와 같은 이념보다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되면 그러한 전제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국익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 쓸데없이 남의 나라 가서 죽을 짓 자초한 인간에게 잘못이 있다는 논리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전제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논리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논리라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전제입니다. 이성이니 논리니 하는 것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그 본질적인 감성이 느끼고 판단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소중한가에 대한 직관적인 가치부여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논리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한 것은 그러한 전제에 대한 동의여부를 결정하고 따질 문제인 것이죠.

가끔 논리적인 글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자신의 논리에 도취되는 사람들도 보죠. 그 논리에 도취되어 어느새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 사람들을 봅니다. 전제가 되어야 할 가치가 논리에 종속되어 오로지 논리에 의해 그 옳고 그름이, 그 소중하고 하찮음이 결정되어버리는 모습을 보면 때때로 서글프기도 합니다. 도대체 뭘 위한 논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소중하고 하찮고를 결정하는 것도 논리가 아닙니다. 직관입니다. 감성입니다. 그렇다고 믿는 그 본질적 마음입니다. 논리는 그것을 설명해 풀어낼 뿐입니다. 그러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다른 이를 납득시키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기 위한 논리이지, 논리에 의해 옳고 그름이, 소중하고 하찮음이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그 직관적인 믿음을 배제한 논리란 얼마나 비겁하고 저열한 것일까요? 자신의 진심어린 감성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합리와 논리에 이끌려 판단한다는 것이란 얼마나 비겁하고 저열한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저만 그러한 것들에 대해 그렇게 예민하게 느끼고 고민하는 것인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성이니 논리니 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은 황량한 사막과도 같은 세계 뿐이라는 것을요.

예전에 알고 지내던 방송관계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연기자가 연기를 잘 할수록 그것은 가식이 되어간다."구요. 무슨 뜻이냐면 원래 현실에서 그렇게 멋드러지고 깔끔하게 감정표현을 하고 대사처리를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 어색하고 더 서툴죠. 그럼에도 연기자가 멋드러지고 능숙하게 연기해내면 사실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환상이죠. 연기라는 것에 대한.

논리도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원래 논리로 정해지지 않은 부정형의 가치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논리라 하는 것은 그것을 정형화해서 끄집어내는 과정일 뿐이죠. 그런데 그것을 전부라 여겨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근거로 세상을 정형화시키려 합니다. 일부 진식인들이 말하는 "일관된 철학을 갖지 못한 어리석은 국민"이라는 말과 같이 말이죠.

요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런 논리의 환상을 봅니다. 논리에 취해 논리만으로 모든 것을 보려는, 그 논리로 모든 것을 결정지으려는 사람들을 봅니다. 논리적인 사람들입니다. 저따위보다는 훨씬 많이 배우고, 훨씬 많이 알고, 훨씬 논리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동의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그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죠. 그 믿음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세상을 살아도 결국 사람은 같은 세상을 살 수 없는 법인 모양입니다.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느끼는 것도 모두 다르니 결국은 다른 세상인 셈이죠. 그것을 느낍니다. 서로 섞일 수 없는 거대하고도 절대적인 층위를요. 저같은 주제로는 어쩔 수 없는 강고하고도 높은 벽입니다. 한낱 글 몇 줄로 어찌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요즘 그것을 더욱 절실히 느낍니다.

넋두리입니다. 그냥. 논쟁이라도 할까 몇몇 게시판에서 끼어들었다가 끝내 포기하고 다 털고 나와버렸습니다. 왠지 피곤해서요. 게시판 하나 분량의 글로 그 전제까지 모드 설명하고 설득하고 납득시킨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익한 일인가를 느끼게 되니 엄청 피곤해지더군요. 남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넋두리 하나. 역시 나는 그냥 돈이나 벌어야겠습니다. 제게는 무리에요. 이런 건.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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