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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 줄기 빛'인 젊은이들과 '히틀러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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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 줄기 빛'인 젊은이들과 '히틀러의 아이들'
[정대성의 독일통신](3) - '작은 히틀러'와 '백장미단'
정대성 
히틀러
'히틀러'. 세상이 다 아는 이름이자, 지구촌 사람들이 '독일' 하면 떠오를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히틀러란 이름은 오늘날까지 그 '악명'으로 독일의 '어두운 과거'를 대변하고 있다.

독일 사람들은 어떨까. 히틀러는 그냥 지우고 싶은 끔찍한 과거일 따름일까. 그렇지 않다. 현재를 살아가는 독일인에게 히틀러와 나치는 단지 먼 옛날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직도 독일은 나치 희생자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하고, 그들에게 바쳐진 기념물이 독일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올해만 해도 베를린에서 거대한 기념물이 새로 완공되었다. TV에서는 히틀러의 시대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물리지도 않는 단골 메뉴이며, 서점에서 히틀러와 나치를 기록한 책을 찾기도 식은 죽 먹기다.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인수한 1933년에서 2차대전의 끝인 1945년까지 겨우 12년을 지배한 독일 '제3제국'의 역사는 이처럼 오늘의 독일인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어두운 과거이자 '지나간 현재'인 것이다.

'하일 히틀러!' 세상이 다 아는 나치식 경례로 '히틀러 만세'라는 뜻이다. 물론 히틀러 만세를 외치며 세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은 나치의 역사는 다행히 60년 전에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종전 60주년을 기념해 올해 독일에서는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에 서명한 5월 8일 전후로 갖가지 행사들이 열리며 '나치로부터의 해방'을 자축한 터였다.

하지만 나치의 '망령'은 여전히 독일을 배회하고 있다. 나치를 추종하는 신나치인 '히틀러의 아이들'이 오늘도 독일 땅을 버젓이 활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국인 증오를 앞세운 폭력을 마다하지 않으며, 낡은 흑백 영화처럼 다시금 '하일 히틀러'를 외친다. 물론 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탓에 대놓고 외치기는 어렵다.

그런데 최근 '용감한' 히틀러의 아이 하나가 법정에 섰다. 신나치 시위에서 과감히 오른 팔을 치켜들며 '나치식 경례'를 한 대가다. 그는 법정에서 당당했다. "당신이 작은 히틀러라고 생각하나요?" 판사가 묻는다. "예."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는 문제의 '작은 히틀러'
'작은 히틀러'를 자처하는 29세의 이 독일 청년은 철두철미한 나치 추종자다. 그는 십여 년 전 5명의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방화사건의 범인 가운데 하나였다. 범행동기는 '외국인 혐오'였다. 그는 최고형인 10년을 선고받고 감옥 생활을 했다. 그리고 출소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법정에 선 것이다.

판사의 말대로 10년 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구제불능의 이 신나치는 결국 넉 달 동안 다시 '창살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이름으로' 법정에 선 것은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역사를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나치와 히틀러가 도발한 2차대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1943년 2월 일단의 독일 청년들도 법정에 선다. 이유는 정반대였다. 히틀러 만세를 부르는 대신 '백장미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과 선동을 일삼은 '죄' 때문이었다.

백장미단은 숄 남매를 비롯한 뮌헨 대학생들이 주도한 비밀 지하 조직이었다. 그들은 1942년 6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주로 뮌헨과 남독일 지역에서 히틀러와 나치에 반대하는 팜플렛을 배포하거나, '히틀러 살인자' '자유' 같은 구호를 벽에 휘갈기며 무소불위의 파시즘에 용감히 맞선다.

하지만 1943년 2월 18일 뮌헨 대학에서 팜플렛을 나눠주던 숄 남매가 체포된다. 나흘 뒤 나치 법정에서 숄 남매를 포함한 3명의 백장미단 청년은 사형을 선고받고 바로 그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두 달 뒤에도 2명의 청년과 뮌헨대학 교수 하나가 '백장미단의 이름으로' 같은 길을 밟는다.

2월 초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결정적인 패배로 패전의 먹구름이 드리워지자 초조해진 나치 정권은 어떤 저항의 싹도 용납지 않으며, 꽃다운 청년들의 목숨마저 그렇게 순식간에 앗아간 것이다.

1943년 2월 22일에 처형된 3명의 '백장미단' 청년들
그러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숨져간 젊은 넋들의 원혼을 달래기라도 하듯 나치 군대는 돌이킬 수 없는 '패전의 벼랑'으로 치달았고, 히틀러는 자기 손으로 불지른 침략전쟁의 파국이 코앞에 닥치자 지하 벙커에서 자살의 길을 택했다. 결국 히틀러는 살아 생전 이루 헤아리기 힘든 '만세' 세례를 받고도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올해 독일에서는 나치 치하에서 백장미단의 이름으로 히틀러에 맞선 그 청년들을 그린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수많은 히틀러의 아이들이 앵무새처럼 히틀러 만세를 노래할 때 그들은 용감하게 저항하며 꽃다운 목숨을 바쳤고, 오욕의 나치 역사에서 이렇게 '한 줄기 빛'으로 남은 것이다.

60년 뒤 법정에 선 '작은 히틀러'는 자신이 그 '오욕의 역사' 맨 뒷줄에 서 있음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나아가 나치에 망령든 '오늘의' 히틀러의 아이들은 나치 역사가 세계뿐 아니라 그들 독일인에게까지 골 깊은 상처로 남았음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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