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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독일청녀 파시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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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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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발행일: 2006년 9월 23일) | 전체보기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최일붕

조지 부시와 럼스펠드는 이슬람이 '파시즘'이라고 주장한다. 무슬림 전부를 파시스트로 싸잡아 매도한다는 점말고도 이런 주장은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 오늘날 프랑스의 장-마리 르펜, 인도의 쉬브 셰나 등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파시스트들은 단순한 극우가 아니다. 단지 혐오스런 인종차별주의자인 것만도 아니다. 단순히 소수자와 좌파에 대한 혹심한 억압과 강경한 탄압을 자행하는 권위주의자들인 것만도 아니다.

파시스트들은 민주주의를 ― 자유민주주의조차 ― 파괴하고,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노동계급 조직을 분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들은 선거를 폐지하고 싶어하고, 사회 대다수가 누려 온 자유를 전면 공격한다. 그래서 사회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활동한다. 히틀러는 아우슈비츠라는 홀러코스트 공장을 지어 유대인 6백만 명을 도살했다.

파시즘은 중간계급 대중에 기반을 둔 독특한 정치 운동이었다. 물론 소수 대자본가 개인들이 파시스트 정당을 지지해 자금을 제공하곤 했다. 또, 파시스트 운동이 노동계급의 비조직 또는 주변적 인자들을 일부 포섭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직 노동계급 운동의 상당 부분을 포섭한 적은 없다.

파시즘의 주요 지지 기반은 언제나 중간계급이었다. 중간계급은 매우 모순된 계급 지위와 사상이 그 특징이다. 그들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며 심각한 위기 때 양쪽 모두를 비난하며 오락가락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효과들 때문에 삶이 어그러지지만 그에 맞서 싸울 조직은 없는 각종 자영업자들(소기업주, 농부, 소상점 주인 등)과 조직되지 않은 관리직·전문직 종사자들(노조원 아닌 공무원, 다수 변호사와 의사 등)은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집단적 힘도, 대기업주들의 경제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들의 인생은 심각한 경제 위기와 대량 실업으로 망가질 수 있다. 그러면 이들은 대자본가를 원망하지만, 또한 노동자들도 원망한다. 특히 노동조합과 좌파를 증오한다.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에 더욱 끌린다. 이 때 파시스트들이 이들의 절망을 표현하는 기치를 제공하고 이들의 분노를 돌릴 속죄양을 제시한다면 대중적 세력을 규합할 수 있다.

파시즘 운동은 중간계급의 이러한 매우 모순된 처지와 사상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래서 모든 권위주의 정권이 파시즘인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정권도 파시즘은 아니다. 임지현 교수는 박정희의 ‘대중독재’론을 주창하고 있지만, 박정희는 중간계급 대중 운동을 구축하지 않았다.(새마을운동은 국가가 통제한 관치 캠페인으로, 포퓰리즘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박정희는 데마고기로 재벌에 대한 반감을 조장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벌을 옹호했다. 좌파적 미사여구는커녕 일본 메이지 유신 식의 이데올로기로 통치했다. 나치당의 정식 명칭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이고, 아우슈비츠 정문에 걸린 표어가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인 것과 비교해 보라.

박정희는 또, 비록 어용이지만 한국노총이라는 노동조합 기구도 존속시켜야 했고, 국회의원 선거도 허용해야 했다.

아우슈비츠

파시스트들이 중간계급 불행의 책임을 전가하는 대상이 꼭 유대인일 필요는 없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독일 파시즘(나치)과 달리 유대인을 속죄양 삼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파시스트들은 대부분(가령 인도에서도) 오히려 무슬림을 증오한다.

그러나 모든 인종차별적 정당이 파시스트인 건 아니다. 미국 공화당은 유색인종과 무슬림을 천대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지만, 파시스트는 아니다. 공화당은 중간계급이 아니라 대자본가들에 기반을 두고 있고, 또 대중 운동도 아니다.

또한, 모든 민족주의 정치세력이 파시스트인 것도 아니다. 2005년 봄 다양한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난한 민주노동당 내 좌파 민족주의자들을 파시스트로 매도했는데, 노동계급 정당 또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이거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염원하는 좌파 지식인들이 나치와 비슷한 성격의 세력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이 파시즘이라는 생각도 터무니없다. 이슬람주의(정치적 급진주의 이슬람)에 한정해 살펴보더라도 헤즈볼라나 하마스 등을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빗대는 건 아무래도 우습다. (더 자세한 논의는 7면에 실린 아닌디야 바타차리야의 글을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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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의 주간신문 <맞불> | 발행인 김인식 | 서울시 종로구 광화문우체국 사서함 1243 우)110-612 | 전화 02)2271-2395 | 팩스 02)2271-2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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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cism

제 1 차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대부터 제 2 차세계대전 말기인 45년까지 세계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독재적 정치·경제·사회사상·정치체제의 총칭. 이탈리아의 B.무솔리니에 의해 처음 제창되어 체제가 확립되었다. 어원은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파생된 말로 본래 묶음〔束〕이라는 뜻이었으나 결속·단결의 뜻으로 의미가 변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칭하나, 대중사회이론이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는 현대사회의 모든 강권적·독재적·비민주적 성격을 띠는 정치운동을 파시즘이라고 정의한다. 전쟁 이후로는 전체주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발생 배경〕

18세기 말부터 누적되어온 사회적 불안과 제 1 차세계대전 후 만성적 공황 및 전승국·패전국 등의 정치·사회적 불안은 각종 혁명적 기운을 초래하였다. 이에 대한 극도의 반동적 경향에서 나타난 것이 파시즘이며, 그 원인은 근대사회의 위기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정치체제의 안정과 균형이 파괴되고 기존의 정치세력이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상실하였을 경우, 무정부적 진공상태를 메우기 위해 파시즘이 등장한다. 그 발생요인은 정치·사회적 배경과 경제적 배경으로 나눌 수 있다.

<정치·사회적 배경>

제 1 차세계대전이 종결된 1920∼30년대의 경제적 위기는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고, 유럽에서는 민주주의의 전망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외부의 객관적 요인은 다음과 같다. ① 국제적 대립과 전쟁 위기의 격화 ② 국내 정치의 불안정·부패·무능·비능률의 병리현상 ③ 각종 사회조직의 강화에서 오는 자율적 균형회복 능력 상실 ④ 정치적·사회적 집단간의 충돌 ⑤ 대량 실업 및 직능적 조직으로부터 탈락한 사람들의 출현 등이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사회혁명에 대한 불안이 싹트게 되고 노동자들의 조직적 투쟁에 대한 농민·도시의 프티부르주아의 반감도 거세어져 갔다. 지식인이나 기술자들의 허무주의 양상도 강해 전반적으로 정치나 사회사상의 회의와 절망이 증폭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국주의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던 대다수 국가들은 권위적인 리더십에 대한 갈망이 싹트면서 새로운 정치체제의 모색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정치·사회적 위기가 집중적으로 격화된 상황을 민주주의적 정당이 수습할 능력과 지도력을 상실하여 파시스트 세력은 노동운동의 분쇄와 의회민주주의적 정치질서의 부정이라는 극우 이데올로기를 기초로 하였다. 프티부르주아 세력에 정치적 기반을 둔 파시즘운동은 반혁명과 전투적 조직으로써 단기일에 사회안정을 기도하려 하였다.

<경제적 배경>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를 계기로 국가에 의한 경제 통제·감독을 행하는 형태로 발생하였고 무솔리니는 이러한 간섭주의를 혼합경제라고 불렀다. 전후의 몰락한 경제 위기 속에서 전통적 프티부르주아들은 점차 급진화되어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띠면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이데올로기로 기울었다. 이 중간 계층은 현상 변화의 열망을 교묘히 이용한 파시스트당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독점자본과 중간층을 포섭한 파시스트 운동의 결합 과정에는 노동자 계층의 오류와 패배가 존재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 새롭게 강대해져 가는 이 계층에 대항할 결집된 힘으로서 일당 독재의 형태를 필요로 하였다. 독일의 정치학자 C.슈미트는 파시즘 국가를 전체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국가가 사회·경제 모두를 관장하는 특성을 지닌다고 설명하였다. 시민적 자유와 노동자의 권리가 전면 부정되고 개인의 경제활동도 국가 이익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도 다르다. 파시즘은 사회주의와 달리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 정치사상과 제도에는 반대한다. 그 점에서 반자본주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이나 파시즘의 진정한 대립개념은 사회주의 국가체제이다.

〔파시즘의 특성〕

반자유주의·반의회주의·반마르크스주의의 성격을 띠는 파시즘은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정치적 반동이 가장 극단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형태이다. 이론적 이성에 호소하지 않고 특정 계층의 미성숙과 후진성, 무경험으로 모험을 감행하므로 자본주의사회의 정신적 산물을 수용하기도 한다. 그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요약하면 ① 반합리주의에 근거하므로 광신적이며 독단적이라는 점 ② 불평등과 폭력이라는 2가지 기본원리로 인해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를 초래하며 국제법과 국제질서를 부정한다는 점 ③ 단순한 정치제도라기보다 생활양식에 가까우며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전체주의적 성향을 드러낸다는 점 ④ 엘리트에 의한 정치를 원리로 삼으며, 일당독재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는 점 ⑤ 행동규칙은 폭력과 기만에 중점을 둔다는 점 ⑥ 조직 및 관리 원칙은 경제와 관련되는 협동체국가이며, 경제는 국가관리의 자본 및 노동연합회로 세분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파시즘의 성립과 형태〕

파시즘의 발전과 독재 체제는 각 나라의 역사적·사회적·경제적 조건에 따라 다르며, 그 민족적 특수성과 국제적 지위에 따라서도 다른 형태를 지닌다. 파시즘의 성립은 1920년대에 이탈리아·폴란드·헝가리·포르투갈 등을 시작으로 33년 독일, 38년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에스파냐 파시즘이 정권을 잡았다. 그 재편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① 선거 또는 대중적 기반의 확산을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독일·이탈리아) ② 우익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포르투갈·에스파냐·그리스) ③ 우익 권위주의 정권이 군부 또는 무장파시스트 세력의 친위쿠데타에 의해 파시즘으로 변질되는 경우(핀란드·헝가리·폴란드) 등이다.

<이탈리아 파시즘>

이탈리아는 가장 전형적인 파시즘 국가이다. 내셔널리즘의 호소를 통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였고, 정치와 경제의 긴밀한 협동체계를 꾀함으로써 파시즘을 창출하였다. 이를 주도한 무솔리니는 <로마진군>을 행하여 계급 개념 위에 민족 개념을 두고 <아래로부터 형성, 조직된 국가>임을 주장하였다. 1922년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는 자본가와 노동자 쌍방의 직업조합을 결성하고, 협동체 방식에 의한 국가로 개편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맨위에 <협동체전국협의회>가 있고 그 아래 설치된 22개 협동체의 개별적 주도권을 존중해주면서 국가 이익에 조화시키는 권한을 지녔다. 34년 2월 협동체에 입법권이 주어짐으로써 무솔리니는 강력한 국가건설과 세계진출의 꿈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 1933년 1월 독일 나치스정권과 손잡고 에티오피아 침략, 국제연맹 탈퇴, <독·이·일> 3국동맹체결을 거쳐 제 2 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도국이 되었다.

<독일 나치즘>

1923년 나치당은 뮌헨에서의 궐기가 실패한 후, 패전으로 인한 사회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광범위한 중소생산자계층을 결집하였다. <국민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계급 일부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29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은 나치당 세력확장의 요인이 되어, 32년 선거에서는 제 1 당이 되었다. 1930년대의 심각한 위기를 해결할 능력을 잃은 지배층은 그 광신적 정치신조에도 불구하고 33년 1월 A.히틀러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지배층의 낙관과는 달리 히틀러는 《바이마르헌법》 제48조에 규정된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활용, 모든 권한을 장악하여 33년 3월 2일에 제정된 <민족과 제국주의 위난 배제를 위한 법률>로 바이마르공화국은 붕괴되었다. 그 뒤 히틀러는 전체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해 제 2 차세계대전을 준비하였다. 300개가 넘는 영방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은 이탈리아·프랑스와 같은 근대적 통일국가 형성이 민족적 염원이었다. 민족통일을 구호로 <게르만민족의 우월성> <피의 순결> <반유대주의>라는 독일 특유의 민족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일본파시즘>

천황제 파시즘이라고도한다.<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목표로 정권을 획득한 이탈리아·독일과는 달리, 메이지헌법〔明治憲法〕 체제 아래 <위로부터의> 강권적 국가체제를 형성하였다. 국가에 의한 경제의 감독과 통제의 강화, 침략적 민족주의·반자유주의·반사회주의 등의 사상교호,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 제정, 40년 대일본산업보국회 결성 등으로 천황제 파시즘 체제를 구축하여 1931년 만주침략, 33년 국제연맹탈퇴, 40년 독·이·일 3국동맹체결 등을 단행하였다.

<그 밖의 파시즘>

1920∼30년대에는 각 나라에서 파시스트 정권과 파시즘 운동이 잇달아 나타났다. 1920년 헝가리 홀티 정권, 28년 폴란드 피우스츠키 정권, 33년 포르투갈 사라자르 정권, 36년 에스파냐 프랑코 정권 등과, 제 2 차세계대전중 탄생한 칠레·브라질·아르헨티나 등의 파시스트 정권이 있다. 이러한 정권들중 1936년 7월부터 39년 3월까지 공화주의자·사회당·공산당의 협력에 의해 탄생한 인민정부에 대해 일으킨 프랑코 우익 정부의 내전은 노동자의 저항 등 인민전선 정부측의 반격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그 밖에 정권 획득에 이르지 못한 파시즘 운동들이 일어났으나 제 2 차세계대전 후에는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예외적으로 프랑코 정권처럼 오래 살아남은 정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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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새로운 파시스트 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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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호/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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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새로운 파시스트 대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3월호 장-이브 카뮈

오스트리아의 현재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본호에 실린 폴 파스퇴르의 글 참조) 유럽에서는 극우파가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스칸디나비아 3국이나 영국에서처럼 선거제도로부터 배제된 경우는 극우 운동이 테러리즘에 호소하고 있으며 다른 경우에는 정치적 대의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우파와 좌파 사이의 모호함을 파고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파시즘'의 부활이라기보다는 정치, 경제적 합의의 민주주의에 대한 마비효과이다.

1999년 6월 13일 진행된 유럽의회 선거에서의 극우 정당들의 붕괴와 프랑스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분열은 이들이 쇠퇴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았지만 최근 투표에서의 결과는 이러한 예측을 실망시키고 있다. 작년 10월 3일 오스트리아 총선에서 외르크 하이더의 자유당(FP )은 26.91%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했고 같은 달 24일에는 크리스토프 블로셰가 이끄는 스위스의 국민당이 22.5%의 득표율로 사회주의자들과 나란히 1위 자리를 차지하였다. 독일의 경우 독일인민연합(Deutsche Volksunion; DVU)이 동부지역 하원의회(Lana)들에서 데뷔를 했으며 노르웨이에서는 작년 9월 14일 치러진 지방자치 선거에서 진보당(FP)이 13.4%(1.4% 상승)를 득표하였다.
서유럽에서 외국인혐오 정당들이 끈덕지게 지속되고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은 급진자유주의적 경제, 사회 사상이 점차 널리 퍼지고 정치 지도자 및 경제 우두머리들 운데 민족국가를 과거의 유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분명해진 것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유럽의 극우파들은 사회에서 기반을 획득하였고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전투적 행동주의보다는 투표함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지독한 소선거구제(first-past-the-post)에서처럼) 선거제도가 군소정당에 불리하거나 (스웨덴의 경우처럼) 비전통적인 견해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매우 강하다는 등의 이유로 극단적 사상이 선거를 통한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나라들에서는 전투적 행동주의가 여전히 관심사가 되고 있다. 조직상의 분열과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부재 또한 극우파 운동의 현실화를 가로막을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폭력적이고 공공연한 여러 소규모 네오나치 및 인종주의 그룹이 주류 정당과 나란히 또는 심지어 그들 내부에서 등장하였다(일부 투사들은 양자 모두에 속해있다). 정치평론가인 제프리 카플란과 레너드 와인버그가 설명하듯이1), 이들 그룹은, '질서(The Order)'나 '아리아 민족들(Aryan Nations)' 같은 미국 테러주의 집단들의 활동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들은 미국에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스웨덴의 폭력 작전에서 드러난 것처럼 대규모 행동을 선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위험한 운동은 일부 스킨헤드족들처럼 어떠한 사회, 정치적 반향도 얻고 있지 못하다.
동부독일의 '랜더(L nder)'가 젊은층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폭력적 극우 운동이 활발한 나라들의 경우 이들은 여러 상징적 도구를 통해 자신들이 국가사회주의나 파시즘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법을 어기기까지 한다. 이 극우 집단은 현재로서는 소수파이다.
1945년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실제 지지자들을 거느린 극우 정당은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의 독재국가들에만 존재했다. 그러나 빈곤의 확산과 증대, 다문화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이제는 대부분의 서유럽 민주국가들에서 극우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이민의 유입은 많은 나라들에서 정치적 권리와 시민권 부여와 더불어 귀화의 물결을 가져왔으며, 이에 따라 소수 언어와 문화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정책이 뒤따랐다.
60년대와 70년대 산업화 도상에 있던 나라들에 있던 극우파의 무게중심은 이제 중부 및 북부 유럽으로 옮겨졌다. 초기 연간 극우파의 봉홧불이었던 이탈리아 사회운동(Movimento Sociale Italiano)은 80년대와 90년대에 접어들어 프랑스의 국민전선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사회주의운동의 자리를 이어받은 국민전선은 다른 나라들의 수많은 운동에 모델이 되었다. 이들은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다양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실질적이지만 단명한 경우(다니엘 페레가 이끄는 벨기에의 국민전선(Front National)),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당선자를 내지 못한 경우(스웨덴 민주주의자(Sverigedemokraterna)), 완전히 주변적인 경우(스페인의 국가민주주의(Democracia nacional)와 이탈리아의 국민전선(Fronte Nazionale))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두 개로 쪼개져 여론조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장-마리 르팽의 당은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완벽한 패러다임이 아니다.

제3의 물결

현재에는 알프스 북부와 남부(외르크 하이더와 크리스토프 블로셰의 정당들, 움베르토 보시의 북부동맹(Lega Nord), [스위스의] 티치노연합(Lega dei Ticinesi)), 스칸디나비아(노르웨이의 카를 하겐의 진보당(Fremskrittspartier), 피아 키에르고르의 덴마크인민당(Dansk Folkeparti))2) 등지의 민중주의 운동으로 대표되는 보다 유망한 제3의 물결이 존재한다. 이들 정당은 (외르크 하이더라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들은 최소한의 국가개입을 신봉하고, 외국인혐오적이
지만 (적어도 공식성명상으로는) 인종차별과 반유태주의는 거부하며, 자신들이 극단주의자로 간주하는 국민전선이나 플랑드르블록(Vlaams Bloc) 같은 집단과는 협력을 고려하지 않지만 우파 정당들과는 기꺼이 연정을 형성할 것이다.
이들 정당은 전통적 의미에서 파시즘 세력은 아니며 이들의 성공은 본질주의적 용어(오스트리아의 탈나치화 실패라든가 스위스의 뿌리깊은 외국인혐오증 등)로 설명될 수 없다. 이러한 요인은 항의표에 기반해서 성공한 극우정당인 프랑스의 국민전선이나 벨기에의 플랑드르블록 같은 혼성물들의 성공조차 설명할 수 없다. 플랑드르블록은 종종 이차대전 이전의 플랑드르 운동의 친나치 이탈파의 자연적 계승자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정치평론가 마르크 스윈지도우는 플랑드르블록의 지지자 가운데 17%가 국민연합(People's Union)에 투표한 데 비해 4∼5%만이 플랑드르 민족주의자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 결과 국민전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념과 전투적 사고방식에 있어 여전히 전통적 극우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지도부와, 그러한 정치적 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한때 좌익 성향을 가졌을 수도 있는 기층 대오 사이에 기본적인 분열이 있는 듯
하다. 플랑드르 지방의 경우 1991년에 사회주의자들에게 표를 던졌던 젊은이의 21%가 나중에는 플랑드르블록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999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사민당으로부터 213,000표를 빼앗아갔다. 덴마크의 경우 1998년에 인민당을
지지했던 이들 가운데 10%가 이전에는 사민당에 표를 던진 사람들이었다.
이들 정당의 지도자들이 과거에는 극단주의의 징표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덴마크인민당의 모겐스 캄레는 사민당 국회의원이었으며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떠오르는 스타인 토마스 프린초른은 크리스토프 블로셰와 마찬가지로 전혀 극
단적일 게 없는 평범한 기업가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브뤼노 메그레와 그가 이끄는 공화주의적인 국민전선-국민운동(Front National-Mouvement National)과 구별되며, 이는 메그레가 전통적 우파의 성원들 가운데 보다 많은 지지를 획득하지 못함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주는 듯하다.
따라서 두 개의 상충하는 정치투쟁의 개념이 존재한다. 반혁명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또는 향수병적인 사고틀 속에 갇힌 과거지향적인 개념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현대화를 받아들이는 미래지향적인 개념이 그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을 재규정하지 않은 정당들은 움츠러들고 주변화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 1995년에 지안프랑코 피니가 부과한 개혁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삼색불꽃 사회운동(Movimento Sociale Fiamma Tricolore)은 이제 1.6%에 불과한 득표를 얻고 있다.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등의) 권위주의 체제를 대변하고 이를 옹호하는 것에 불과한 강령을 가진 정당들은 대부분 사라졌다3).
외국인혐오적인 민중주의 운동은 사회적 지위와 일자리가 가장 위험에 처한 국민계층 사이에서 특히 눈부신 성과를 얻고 있다. 프랑스의 상황도 예외가 아니다. 국민전선은 1997년 선거에서 몇몇 선거구에서 30%를 득표하였다. 또한 젊은층(오스트리아의 경
우 30세 이하 가운데 35%)과 종교가 없는 이들, 투표 불참자들 가운데 이들 운동에 대한 뚜렷한 지지가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다양한 설명이 제출되었다. 몇몇 이론에 따르면 경제적이거나 상징적인 이해가 핵심이다. 경제위기로 타격을 입은 국민계층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외국인혐오증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벨기에에서는 플랑드르
블록이 자신에 대한 지지의 대부분을 미숙련 노동자층에서 이끌어내었고 1999년 오스트리아 선거에서는 블루칼라 노동자의 48%가 자유당에 표를 던져 이 계층의 대변자로서 자유당을 다른 정당들에 앞서게 만들었다.
독일의 경우, 정치평론가 패트릭 모로는 1996년 지방선거에서 공화당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17%로 잡고 있다. 그는 극단주의 운동에 대한 지지와 낮은 노동조합 가입률, 실업의 경험, 대가족, 사회복지에 대한 의존, 불충분한 교육 등이 밀접한 상
관관계를 갖는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극우파가 각각 9.8%와 15.3%를 득표하고 있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경우 실업과의 가시적인 연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나라에서 극우파에 대한 지지는 자영 기업인과 점차적으로 노동자층에서 오는 것이다. 두 나라 모두 진보당들이 사회민주당을 앞질러 지도적인 노동자 정당이 되었다. 가능한 하나의 설명은 부르주아지 정부나 사회민주당 정부 모두에서 복지국가가 동등하게 잘 이루어진 나라들에서는 좌파에 대한 노동계급의 충성이 침식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 전통의 일부인 권위
주의적 요소가 가능한 유일한 출구로 새로운 우파로 전환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역설에 마주치게 된다. 본질적으로 민중으로 구성된 선거민들이 어느 정도건 민족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채택하는 후기산업주의적 극우 정당들에 투표를 하고 있다. 이들은 간략히 말해 자유무역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경제 정책은 경쟁력과 번영을 보장하고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경제의 전면적인 탈규제를 요구하게 된다. 스위스 인민당의 강령은 사회복지 사기행위를 비난하고 유연한 임금과 노동시간, 다양한 국가복지의 종
식(이는 자연스럽게 기업측에 유리한 조세상의 조정을 동반한다) 등을 요구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정당들은 세제에 대한 저항과 복지국가의 권력에 재갈을 물리고픈 욕망으로부터 성장하였다. 이러한 주제들은 알렉산드라 콜렌 상원의원이 이끄는 플랑드르블록의 소수 자유주의 분파의 강령에서 그 반향을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북부동맹은 보다 복잡한 경우이다. 북부동맹은 자본주의의 현대화와 소기업의 폭발적 증가가 이와 병행하는 제도 및 정치적 틀의 급속한 현대화를 동반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북부 이탈리아의 신흥 중간계급과 소기업인의 대답으로 읽혀질 수 있
다. 외국인과 남부 이탈리아인에 대한 북부동맹의 증오, 과세에 대한 저항, 허구적인 정체성과 역사(파다니아독립공화국이나 파다니아 민족은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다)에 기반한 독립 요구와 더불어 북부동맹의 등장을 낳은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그리고 기
민당의 붕괴로 야기된 우파의 공백)이다.
허버트 키트셸트4)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러한 대중적 지지의 이유를 세계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세계화는 국가개입에 기반한 평등주의적 쟁책의 도입을 가로막으며, 가난한 유권자들로 하여금 시장을 자유롭게 함으로써(또
는 민중주의자들과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의 표현대로 하면, 창의적 에너지를 해방시키고 개인의 이니셔티브를 고무하며 국가개입을 최소로 유지함을 통해 사람들이 출세 길을 오르도록 도와줌으로써) 사회정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편협한 자유주의

이는 민중주의적 투표에서 보여진 외국인혐오증의 요소까지 부분적으로 설명가능하다. 노동시장에서 외국의 경쟁으로 위협받고 있다는 사람들은 사회복지와 일자리로부터 이민자들을 제외시킨다는 단순한 이유로 민중주의 정당들의 자유주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에게 급진자유주의는 민족적 편애로 완화되기만 하면 용인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국민전선은 1995년 가을의 사회적 전환점 이후 (다른 극우 정당들보다 훨씬 큰 정도로) 자유주의에 등을 돌려버렸다. 국민전선은 이제 비록 프랑스 시민들만을 위해서지만 어느 정도의 공공서비스와 사회복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국민전선의 주장은 정치인과 공무원이 부패하고 무능하며, 국가 동냥 체제의 실패를 나타내는 상징인 동시에(따라서 질서와 안정에 대한 끈덕진 요구가 있게된다), 부의 창조자들(소기업인, 전문직 종사자, 숙련공, 농민, 그리고 심지어 노동자)과 비교되는 쓸모없는 비생산적 사람들의 무거운 짐
으로 인해 야기된 압도적인 조세 부담이 있게된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의 존재와 극우파의 득표 사이에 자동적인 상관관계가 있지는 않을지라도 이민에 대한 반대는 의심할 바 없이 주요한 요인이다. 1997년 유로바로메트르(Eurobarom tre) 통계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의 국민전선과 벨기에의 플랑드르블록, 독일의 공화당(Die Republikaner) 등에 투표한 사람들은 무조건 이민을 반대하며 모든 형태의 다문화주의를 거부한다고 한다(이들 정당의 인종차별은 이종교배라는 망령에 근거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민중주의 그룹이나 이탈리아의 국민동맹(Alleanza Nazionale)과 북부동맹,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같은 다른 운동의 신봉자들은 그렇게 인종주의적이지 않다. 이들이 이민에 반대하는 것은 외르크 하이더의 강령에서 분명히 보이는 것처럼 문화적 차이의식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민족이 가지는 특수한 성질에 대한 자각이 다른 민족성을 존중하고자 하는 욕망과 뗄레야 뗄 수 없다(이는 대체로 신우파의 인종차이주의로부터 빌어온 공식이다)고 주장한다.
급진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극우파의 발흥 사이에는 훨씬 분명한 상관관계가 입증된다. 앞에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공화당 지지자의 87.5%, 국민전선 투표자의 68.4%, 자유당 지지자의 45.7%가 유럽연합이 그릇된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플랑드르
블록 지지자들의 경우 이보다 낮은 수치를 보인다(40.8%인데 이는 사회당 지지자의 38.9%를 가까스로 넘어설 뿐이다). 이는 아마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프랑스의 민중주의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민족국가에 대한 최선의 대응수단으로 플랑드르 운동에서는 다인종적인 유럽이라는 사고가 대중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반유럽적 경향은 스칸디나비아와 스위스에서도 발견된다.
극우파 정당들은 사실상 일종의 편협한 자유주의, 즉 국가경계선 내부로 제한되고 사회복지나 국가통제의 해체를 동반하는 자유무역 없는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일종의 이동이 있어왔다. 따라서 프랑스 국민전선이나 이와 유사한 조직들은 세계무역기구(WTO)에 대한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반면 크리스토프 블로셰는 WTO에 반대하지 않으며 외르크 하이더는 나토 참여를 지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낡은 정당 체계라는 사자(死者)의 망령이 유럽에서 극우파의 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은 분명하다. 스칸디나비아와 스위스, (1999년 총선 전의)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에서는, (오스트리아의 경우는 사민당과 인민당, 다른 나라의 경우는
주요 정당 사이에 연방의회 의석의 안정적 분배를 보장하는 스위스식 마술 공식인, 사민당과 보수당 사이의) 영구적인 연립정부나, 시장 규제냐 탈규제냐 하는 처방에 의해서만 구분가능한 사민당과 우파 자유주의 정권의 정기적인 교체로 정치적 풍경이 특징
지워졌었다.
주요 정당들의 정실주의(cronyism)와 이들이 국가와 맺고 있는 근친 관계는 제도상의 어떠한 근본적 개혁도 가로막았으며 선거제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따라서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정치인들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가 프랑스 국민전선, 벨기에 플랑드르블록, 오스트리아 자유당, 이탈리아 북부동맹 등에 대한 투표를 좌우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었다. 이탈리아 국민동맹의 지지자들은 자신이 참여한 민주적 게임룰과 권력구조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예외적이었다. 유일한 실질적인 예외는 룩셈부르크와 네덜란
드였다. 이들 나라에서는 매우 강력한 합의가 있었지만 여기서조차 국민운동(Nationalbewegong)과 중도민주당(Centrumdemokraten)은 실패하였다. 부정할 수 없는 권위주의와 외국인혐오주의적 성격은 논외로 하더라도, 급진우파 정당들은 분명 좌
파와 우파 사이의 구분선의 모호함과 사민주의자들을 새로운 중도로 이끌어오는 것에 관한 광범위한 합의로부터 커다란 이득을 얻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이 현질서에 대한 주류의 반대여론을 대표한다는 사실은 좌파에게는 자신의 무능과 배신에, 그리
고 보수우파에게는 자신의 맹목과 비겁에 대면하게끔 한다.
이들 정당이 권력을 잡게 될 경우 무엇을 기도할 수 있거나 하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이탈리아의 사례는 극우파가 어느 정도까지는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외르크 하이더 같은 일부 지도자들의 기회주의는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자기의견을 고집하지 않을 때 이들은 자유민주주의의 변형틀로 빠져들 수도 있다. 하여튼 당분간 우리는 공공당국에 권위주의적 압력을 행사하고, 민주주의에 낯선 것일 뿐만 아니라 외국인혐오적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될 수도 있는 공
공생활의 가치로 되돌아갈 정당들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 장-이브 카뮈 : 정치평론가. 저서로는 『유럽의 극단주의자들(Les Extr mistes en Europe. Centre europ en de recherche et d'action sur le racisme et l'antis mitisme(CERA) 연례보고서, Editions de l'Aube, Paris, 1998)』, 『국민전선: 프랑스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Front National: eine Gefahr f r die franz sische
Demokratie? Bouvier Verlag, Bonn, 1998)』 등이 있다.

<후주>

1) Jeffrey Kaplan and Leonard Weinberg. Fade to black: the Emergence of a Euro-American Radical Right, Rutgers University Press, Piscataway, New Jersey, 1998.

2) 스웨덴의 네오나치즘에 대해서는 D mokratins f rg rare(논문집), Statens Offentliga Utredningar, Stockholm, 1999를, 덴마크의 신우파에 대해서는 Johannes Andersen and others, Valelgere med omtanke. En analyse af folketingsvalget 1998, Forlaget Systime, Arhus, 1999를 보라.

3) 1999년 6월의 유럽의회 선거에 나선 5개 팔랑헤주의나 급진주의 정당은 61,522표를 획득하였다. 포르투갈의 경우 네오살라자르주의 국민동맹은 후보를 내지 않았으며 그리스의 반유태주의 정당인 최전선(Front Line)과 중도연합(Centre Union)은 1.57%(101,044표)를 득표하였다.

4) Herbert Kitschelt, The Radical Right in Western Europ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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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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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호/동향] 오래된 이탈리아, 새로운 파시즘
picis picis@jinbo.net
오래된 이탈리아, 새로운 파시즘

[르몽드디플로마띠끄], 2002년 2월, 이그나씨오 라모네


은밀한 설득의 형태 중, 있는 그대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무자비하다.
- 삐에르 부르디외

이탈리아에서는 "있는 그래도"라는 것으로 전통적 정치 정당의 시대가 이제 지났다는 것을 대다수 투표자들에게 성공적으로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설득했다. 이는 매우 단순한 사실에 뿌리를 둔다. 즉 1980년이래 정치 체제가 매우 위험스러운 속도로 퇴화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는 부패 때문이라고 한다. 부정부패의 규모와 범위는 놀라운 정도이다. 체계적인 뇌물 은 750억 유로 상당의 국가 손해를 가져왔다. 정당으로 흘러 들어가는 은밀한 자금줄은 특히 사회주의자나 기독민주주의자 등 엄청나게 부유한 정치인들을 키워냈다. 독립 언론의 편집장, 인드로 몬타넬리는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특정 정당 간부들의 생활이 공개된 수입액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후주 1-
이미 1992년에 '마누 풀리떼(깨끗한 손)' 캠페인과 안토니오 디 삐에트로 판사는 사업가와 정치인들 간 부정부패의 네트워크를 밝혀내고 있었다. 전 총리이자 사회당 당수인 베띠노 크락시는 불법으로 부를 축적한 혐의를 받았으며, 거의 린치를 당하고 군중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등 혼란 속에서 사퇴했다. 다음은 역시 전 총리이자 기독민주당 당수인 길리오 안드레오띠였다. 그는 마피아와의 유착 및 살인사건에의 연루로 기소되어 공개적으로 비방 당했다.
이 두 거인의 몰락으로 정치 체제 전체에 쇼크가 퍼졌다. 단 몇 달 사이에 수백 명의 하원, 상원과 전 장관들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고, 판사의 조사를 받아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이와 같은 불법 자금 운용에 대한 고발이 쌓여가자 정치 계급은 대중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거부당하고 불신임당했다. 에릭 조세프는 "엄청난 진공과 패닉 상태가 형성되어 몇몇은 쿠데타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 후주 2 - 라고 묘사한다.
그런데 쿠데타 대신, 대중은 집단적으로 텔리비젼에 최면 걸렸다. 이미 국민동맹의 후기 파시스트들 및 북부리그의 외국인혐오주의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등장하여 그의 첫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94년 5월부터 12월까지 총리를 지냈다. 그의 첫 총리직이 갑작스럽게 끝났지만,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그도 역시 의심스러운 거래와 뇌물 등 비정상적 자금운용의 혐의를 받았지만, 여러 요소들의 결합으로 2001년에 그의 컴백이 가능해졌다.

그 요소들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그의 엄청난 부이다. 그의 사회주의자 친구 베띠노 크락시가 애초에 보호해준 덕에 그는 완전 무(無)의 상태에서 세계 14위로 가장 부유한 사람, 이탈리아에서는 최고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 후주3 - 여러 개 음모에 가담해 그는 부동산에서 큰 성공을 이뤘고, 이어 수퍼마켓과 물류, 보험과 광고, 그리고 영화와 텔리비젼을 통해 부자가 되었다. 베르텔스만 그룹, 루퍼트 머독, 레오 커쉬와 쟝마리 메시에와 함께 그는 유럽의 언론 거물 중 한 명이 되었다.
상징적 폭력 - 후주 4 - 과 연관된 부와 권력을 자신의 텔리비젼 채널들로부터 얻은 베를루스코니는 세계화의 진실 중 한 가지를 증명한다. 즉, 경제와 언론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정치 권력을 획득한다는 사실이다. - 후주 5 - 그것도 승리적으로 말이다. 그가 이끄는 포르자 이탈리아(Forza Italia) 당은 2001년 5월 선거에서 30%를 득표해 이탈리아의 주요 정치 정당이 되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대중추수주의자이자 선동가로서 그가 가고자 하는 길에 장애가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정치 파트너를 선택하는 데 있어 전 파시스트 지아프랑코 피니와 인종차별주의자 움베르토 보시와 거래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세 명은 유럽에서 가장 징그럽고 구역질나는 정치가 3인조를 이룬다. 5월 선거 이전에 [이코노미스트]는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혐의를 언급하면서 그는 이탈리아를 지도할 능력이 없으며 민주주의에의 위험이자 법치에 위협이 된다고 했다. - 후주 6- 이 암울한 예언은 옳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적 정당들의 비참한 몰락 이후 이탈리아 사회 -한 때는 세련됨의 본보기였던- 는 정치 체계가 허물어지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난폭해지고, 엉뚱해지고, 위험스러워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영화계만 진정한 저항을 했다) 바라보았다. 놀이공원 행상인과 같은 분위기로, 그리고 그의 TV 독점 덕분에 베를루스코니는 다리오 포가 '새로운 파시즘'이라 부른 것을 만들어가고 있다. - 후주 7 - 문제는 이 우려스러운 이탈리아의 정치 모델이 유럽 나머지 지역에 얼마만큼 확대될 것인가이다.

후주

1) 에릭 조세프가 [Main basse sur l'Italie. La r sistible ascension de Silvie
Berlusconi] (그라세, 파리 2001년) 37페이지에 인용했음.
2) Ibid, p41
3) 미국의 [포브]지는 베를루스코니의 재산이 145억 유로 정도라 추정하고 있다.
4) "상징적 폭력이란 한 사람이 공범과 함께 사회 구성요소에 가해지는 형태의 폭력
을 의미한다." 삐에르 브르디외 (로익 와쾅 공저), [R sponses] (쐬이, 파리 1992)
5) 이러한 증명은 마이클 블룸버그도 해줬다. 미국의 24시간 금융뉴스 채널인 블룸버
스 TV의 백만장자 소유자인 마이클 블룸버그는 선거자금으로 7천7백5십만 유로 이
상 지출해 2001년 12월 1일 뉴욕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6) [이코노미스트], 2001년 4월 28일 자, 런던
7) 다리오 포, 'Le nouveau fascisme est arriv ', [르몽드], 2002년 1월 1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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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파업 - 독일식 은행자본주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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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파업 - 독일식 은행자본주의 논란
박철우 crow1848@hanmail.net

금융노조 "은행이 기업 통제해야"
재경부 "경제력집중 되레 심화"

금융산업 노조가 내세우는 총파업 명분은 통상 노동쟁의 때 노조가 주장하던 것과는 다른 점이 많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된 사항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외환위기 이후의 정부 경제정책 방향을 총체적으로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 5일 금융노조는 독일식 금융체제인 은행자본주의 도입이라는 또다른 논쟁거리를 들고 나왔다.

노조는 “정부가 추진하는 은행 대형화와 겸업화는 70년대 이후 미국에서 투기자본이 만연하면서 은행권 부실이 누적되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며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이런 미국식 투기자본주의에 우리 경제를 내팽개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증권자본주의 육성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은 결국 우리경제의 안정적 자금조달을 막고, 투기성을 극대화시시킬 것이라는 게 금융노조의 주장이다.

노조는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은행이 기업을 통제하는 독일식 은행자본주의를 채택해 안정적인 기업자금 조달과 철저한 기업구조조정을 유도하자”고 주장했다. 독일처럼 은행과 기업의 상호지분 보유를 매개로, 은행은 기업의 이사회 의장으로 평상시엔 경영에 간섭하지 않되, 유사시엔 구조조정을 총괄지휘할 수 있도록 하고, 노사공동의 의사결정기구를 출범시켜 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자는 얘기다.

그러나 정부는 “금융노조의 주장은 비현실적”이라고 반박했다. 은행자본주의는 오히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에 따른 경제력 집중을 심화시키고, 기업 부실이 고스란히 은행으로 옮겨갈 위험이 크며, 은행과 기업의 야합으로 부실기업 퇴출이 지연될 수도 있다는 게 재경부 반론의 요지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특히 독일의 경우에도 은행들의 도덕적 해이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미국식 자본주의로 이행하자는 견해가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이 재벌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듯이 은행이 산업자본을 지배하는 것도 견제와 균형을 잃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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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노조' 건설을 위한 첫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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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노조' 건설을 위한 첫발
사랑방 rights@jinbo.net


영국GMB, 독일 IG Cemie 조합원자격 공동인정

자본진영의 국제적단결에 대응하는 노동진영의 국제적 단결은 가능할
것인가? 그 해답의 단초를 보여주는 사건이 지난달 유럽에서 일어났
다.

지난달 3일 영국의 최대 노동조합인 GMB총노조와 독일측의 IG
Chemie (화학노련)가 조합원자격 공동인정 협정(joint membership
agreement)에 서명함으로써 유럽의 초대형 노동조합의 창설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고 영국의 인터넷 잡지
보도했다.

이에 따라, 양국의 1천8백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국외에서 노동할 때 상호 조합원자격을 보장받게 되었으며, 현재 수혜대상은 12만명에
달한다고 이 잡지는 밝혔다.

협정과 관련해 IG Chemie의 슈몰트 위원장은 "우리의 목표는 모든
노동자가 교섭 협약시 최소의 기준을 확보할 수 있도록 유럽 수준에서
공동 조합원자격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협정을 통해, 독일에서 일하는 GMB 조합원은 IG Chemie 조합원
자격을 얻게 될 것이며, 대의원들로부터 법적인 자문과 지원 및 훈련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영국에서 일하는 독일 노동자들
도 법적인 자문, 보건 및 안전 정보와 국민보험 급여상의 재정보조를
얻게 된다고 이 잡지는 밝혔다.

GMB는 1백여 개의 군소 노동조합과 약 80만의 조합원으로 구성되었
으며, 벨기에 브뤼셀에 최초로 사무소를 개설한 영국 노조였다. GMB
는 수년동안 IG Chemie와 비공식적으로 협조해 왔으며, 이밖에도
다른 노조들과의 추가적 협정에 관해서 협의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4월 4일(금요일) 인권하루소식 제 857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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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통일이 동독여성의 권리를 후퇴시켰다&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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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동독여성의 권리를 후퇴시켰다"
사랑방 rights@jinbo.net


Tatjana Ansbach(인권변호사, 독일)씨 발표 요지

동독에서는 실업이라는 것이 없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취업이
보장되었고, 대부분의 여성은 직업을 가졌다. 80년대 말 여성의 취업율
은 91.2%였다.

3세이하 유아의 80%가 유아원에서 보육되었고, 3-6세 어린이의 95%
가 유치원에 다녔다. 이에 대한 보육·교육비와 어린이를 위한 휴일
캠프 또는 취미활동 비용은 최소한에 불과했다. 여성은 매달 하루의
유급월차를 받았고, 여성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특별강좌가 모든
분야에서 열렸다. 출산휴가는 1년이었고, 그 기간에 평상 임금의 70%
가 정부로부터 지급되었다. 원래 일자리로 복귀하는 것 또한 보장되었
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 가운데 한 쪽이 1년에 6주까지 유급휴가를
낼 수 있었다.

이상의 이야기만으로 천국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는 그렇
지 않았다. 가사일은 여성이 거의 전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들
은 2개의 직업, 즉 직장에서의 일과 가정에서의 일을 소화해야 했다.
이는 동독의 지배적인 사회·경제적 위계질서의 상층이 남성들에 의해
독점되었던 현실과 연관이 있다.

통일 이후 많은 여성들은 여성의 존엄성이 자신의 경제적 자립에 의해
결정되고, 취업이 자신의 삶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동독 시절 무엇이 가장 좋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한번도
일과 가정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받은 적이 없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통일 이후 서독의 경제(정치·법까지 포함하여)제도가 그대로 동독에
복제되었다. 서독의 제도는 효율성이 높은 제도이지만, 한편으론 일과
가정의 평행을 더욱 어렵게 했다. 우리는 과연 경제적 효율성이 다른
모든 가치를 충족시킬 정도로 중요한 가치인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야 하는 시점에 방을 이룰 수 없다. 서독 법이 동독에 적용됨으로써 우리는 여성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규범과 법까지도 계승받은 것이다. 동·서독 여성
들 사이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상호 공감이나 협력이 없었다.
동·서독 여성들이 서로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7년 6월 20일(금) 인권하루소식 제 9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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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일 노동자들의 저항을 반영하는 선거와 일자리 요구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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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일 노동자들의 저항을 반영하는 선거와 일자리 요구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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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동자들의 저항을 반영하는
선거와 일자리 요구 시위

-「투사(Militant)」 통권 62호/11호, 1998년 3월 23일 -

칼-에릭 이삭손(Carl-Erik Isacsson), 스웨덴 소더탈예(Sodertalje) 금속노조


스웨덴 스톡홀름 - 3월 1일 독일 니더작센주의 주지사인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oder)가 기민당후보 크리스티안 불프(Christian Wulff)를
누르고 재선되었다. 이번 주선거는 장관직과 연방정부 수반 등을 선출하게될 9
월 27일 연방선거의 전주곡으로 전국적 차원에서 주목을 받았다.
니더작센 선거에서, 사민당은 총투표의 47.9%를 획득했으며 이는 1994년
44.3%에서 상승한 것이다. 연립정부를 이끌고 있는 기민당은 94년의 36.4%에서
하락한 35.9%를 획득했다. 녹색당은 0.4%가 떨어진 7%를 얻었고, 작지만 헬무트
콜 총리의 연립정부에서 중요한 파트너인 자유민주당은 지방의회 참여에 필요한
5%에 약간 부족한 표를 얻었다.
이는 사민당이 니더작센주 선거 사상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한 것이다. 지난 연
방선거들에서 헬무트 콜에게 패배한 오스카 라퐁텐과 슈뢰더는 주요한 가능성이
었다. 언론들은 슈뢰더를 최근 수상에 오른 영국노동당의 앤서니 블레어와 종종
비교하고 있다. 두 정치인은 모두 자국 경제문제에 관해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자들보다 더 공공연하게 친 자본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슈뢰더의 승리가 발표된 직후, 라퐁텐은 사민당의 수상 후보로 그를 추천하였
다. 이는 4월 17일 라이프찌히에서 열리게될 전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비준될
것이다.
니더작센 선거 전 슈뢰더는 94년보다 낮은 지지도를 얻을 경우 수상후보로 나
서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헬무트 콜 총리는 기민당 후보 울프를 확고히 지지했
으며 슈뢰더의 지지를 깎기 위해 니더작센에서 선거집회를 11번이나 열었다.

여전히 기록적 수준인 실업

사회민주당 선거운동의 주요주제는 실업이었다. 실업은 2차대전 후 거의 매달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2월 서부독일의 실업은 0.1 포인트 내려서 10.4%가 되었
지만, 동부독일의 실업률은 21.1%에서 21.3%로 올라갔다. 200개 도시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주 35시간 노동과 실업수당의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9월 선거까지 매달 지속하기로 계획되어 있다.
슈뢰더는 2000년까지 실업을 절반으로 축소하겠다는 콜의 약속--거의 실현가
능성이 없는--을 계속해서 인용했다.
작년을 통해 젊은 층의 주정부 수반들은 기민당내에서 콜의 지도력에 의문을
던져왔고, 니더작센 선거 이후, 가장 인기있는 기민당 정치가인 볼프강 샤우블
레(Wolfgang Schauble)가 헬무트 콜을 제치고 수상후보로 나설 것이라는 추측이
증가하였다.

유럽통화연합

유럽연합 구성국 정부들은, 세계 무역과 금융에서 미국달러화에 대한 경쟁자
가 될 수 있다는 주문(mantra)을 외며, 단일통화인 유로(Euro)를 1999년 1월 1
일부터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단일통화 참여의 주요한 기준은 재정적자가 국
내총생산의 3%를 넘지 않는 것이다. 뉴욕타임즈가 "최소한의 땜질(minimal
tinkering)"이라고 묘사한 바를 통해, 2월 서유럽 정부 각료들은 그리스를 제외
한 15개 유럽 국가 모두가 이 기준을 충족시킨다는 수치를 발표하였다. 한 예로
제국주의 국가중 가장 약한 경제를 지닌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과 같은 수치인
2.7%의 재정적자를 발표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가까스로 정확히 3%의 재정적자를 보였다. 현재 11개 국가가
1999년 1월 1일 시작되는 단일통화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5월 초 유
럽연합은 [단일통화-역주] 출범에 참여할 국가를 공식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영
국, 덴마크, 스웨덴 정부는 기준을 충족함에도 불구하고 출범시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독일 연방은행(Bundesbank)과 유럽 다른 중앙은행 관리들은 모든 유럽통화연
합 후보국-- 특히 이탈리아와 벨기에--이 단일통화에 참여할 기준을 정말 충족
시켰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독일에서는 정치정당을 망라해서 단일통화 참여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유로가 독일마르크보다 약할 것이라는 예상과 단일통화가 상징하는 긴축조
처--병가 급여와 연금의 삭감과 학생들에 대한 수업료의 도입 등-- 때문이다.
이들 긴축조처는 또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적 세계체제 하의 노동에 이미 디플
레이션 압력을 증대시키는 경향을 가지며, 경제적 붕괴를 위협하고 있다. 슈뢰
더는 독일에서 단일통화 출범 연기를 제의하는 정치가중 하나였다. 선거운동 기
간 그는 단일통화라는 이슈를 비켜갔다. 그러나 수상후보로 추천된 직후 슈뢰더
는 "공평한 방식으로 유로의 위험성을 분석하기 위한 독일 최고 두뇌의 연석회
의"를 소집하겠다고 제의했다. 슈뢰더는 독일중앙은행 전 총재이자 사회민주당
원인 칼 오토 폴(Karl Otto Pohl)을 회의 주관자로 임명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150명의 유명한 경제학자들은 단일통화의 연기를 호소한 바 있다.
본이 유럽의 파트너임을 재확인하면서, 사회민주당 의회지도자인 루돌프 샤핑
(Rudolf Scharping)은 슈뢰더의 언급에 대한 대답을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
언하였다. "우리 당의 목표는 소비자를 보호하고 통화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
이다. 이는 유로회의론(Euro-skepticism)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세금문제에서 퇴보한 콜

콜의 가장 커다란 역행은 상원(Bundesrat)에서 사회민주당이 제안한 "세금 개
혁"을 지연시킨 것이었다. 독일의 경우 세금은 높은 수준이며, 실업 다음으로
가장 큰 정치적 문제로 간주되고 있다. 두 이슈는 독일 통일과 밀접하게 연결되
어 있다. 서부의 자본주의 국가와 동부의 노동자국가라는 상이한 사회관계를 지
닌 두 국가가 독일 지배자를 위기로 몰아넣은 적대적 사회관계들을 통합시키는
과정이 그것이다. 슈뢰더는 소득세 인하와 아동수당 인상을 요구하며, 한편으로
연립정부가 콜의 세금개혁에 포함된 것처럼, 부자들에 부과되는 기업세나 자본
세 등만을 인하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다.
2월 6일 사민당이 다수인 상원은 피난처를 찾는 사람들에 대한 구제를 절대적
인 최소치로 축소하는 법안을 승인하였다. "불법적으로" 독일에 입국해있는 사
람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다. 20만명에 이르는 보스니아 전쟁 난민
들은 이 조처로 특히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슈뢰더의 니더작센 주정부 내무장관은 이 새로운 법안에 대해 보다 노골적으
로 지지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보다 엄격한 난민법안은 기민당과 사민당
양자의 유세에서 주요주제이다. 이는 우익폭력의 증가, 특히 동부독일에서의 증
가에 관한 대중매체의 보도로 우익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슈뢰더의 선거운동에
서 예상되는 다른 주제는 성범죄에 대한 가혹한 처벌과 저임금으로 직업을 창출
함으로써 실업을 축소하는 것 등이다. 슈뢰더의 선거강령은 라이프찌히에서 열
릴 사민당 임시 전당대회에서 투표로 결정될 것이다.

노동자들의 저항

독일에 있어 노동자들이 사회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이동하는 것은 영국과 프
랑스의 유사한 현상을 따르는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토리당정부와 드골주
의자정부는 지난해 각각 선거의 패배를 겪은 바 있다. 1년전 여론조사에서 사민
당이 30% 미만을 획득하고 보수당이 30% 이상을 얻은 스웨덴에서도 상황이 바뀌
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사민당은 36.5%의 지지를 얻었고 보수당은 27.5%를 얻
었다. 덴마크에서는 사민당의 소수당정부는 자신의 항해에서 맞바람을 느끼고 3
월 11일 조기선거를 요구한 바 있다.
이는 긴축조처와 삭감을 부과하려는 시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반영한
다. 한 예로 독일 공공노동자들의 노조는 올 겨울 두 번의 경고파업을 벌인 바
있다. 협상은 지연되고 있으며 다음주 중재과정에 돌입할텐데, 이는 공공노동자
들의 파업 찬반투표로 귀결될 수도 있다. 협상의 주요한 이슈중 하나는 병가시
임금을 100%에서 80%로 삭감하겠다는 정부의 주장이다. 이는 96년 콜정부가 이
들 수당을 삭감하려 했을 때 노동자시위와 수십만명의 파업을 촉발시킨 이슈였
다.
다른 노조들도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유사한 요구를 하며 협상에 들어가고 있
다. 인플레이션을 보상하는 임금과 수당의 인상, 서부와 동부의 동일한 임금과
노동시간, 정부기금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 등이 그것이다. 학생
들도 교육이 무료였던 독일에서 수업료를 도입하는 것에 항의하고 있다.

독일경제에 타격을 가하는 아시아의 위기

독일은행(Deutsche Bank)은 1월 29일 아시아에 대한 차관에서 예상되는 손실
을 보증하기 위해 14억마르크(7억8천8백만불)을 예비비로 남겨야 한다고 발표했
다. 은행측은 남한,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기업에 90억마르크를 대출한
바 있다고 말했다.
전세계 모든 제국주의적 금융기관중 독일은행들은 아시아위기에 가장 노출되
어 있다. 스웨덴의 일간지인 Svenska Dagbladet에 따르면, 96년말 이들 나라에
대한 독일 은행들의 차관은 총 천2백억불이고, 이는 위기에 처한 아시아 국가들
에 대한 세계 은행대출의 17%를 차지한다.
연방은행 보고서에 의하면, 독일 경기순환의 상승은 97년 4사분기에 저하되었
으며, 경기호전의 원동력이었던 수출도 수요저하로 인해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산업생산이 통일 이후 최고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 또한 이윤의 불
확실성 때문에 저하되고 있다. 92년 이후 매년 증가해온 기업 도산은 96년에 비
해 97년 6.2% 상승했다. 연방은행 보고서에 의하면, "아시아의 저성장이 그곳의
수입을 줄인다면, 독일의 수출에 가혹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 동시에 아시아의 거대한 평가절하는 아시아산업에 경쟁력을 주게 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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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 유럽통화연합을 둘러싼 노동계급의 저항, 긴장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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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 유럽통화연합을 둘러싼 노동계급의 저항, 긴장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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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로 부각되는 제국주의적 경쟁 :
유럽통화연합을 둘러싼 노동계급의 저항, 긴장 심화

[투사(the Millitant)] 4/20, 칼-에릭 아이작슨(스웨덴 금속노조 회원)


독일 수상 헬무트 콜이 유럽연합 15개 회원국 중 11개 국가와, 계획된 유럽
경제및 통화 연합(EMU)의 출범에 대한 독일 정부의 지지를 선언한지 하루만에
독일 중앙은행의 총재가 다시 회의를 표명했다.
4월 5일 독일 하원에서 발언한 분데스방크 총재 한스 티트마이어(Hans
Tietmeyer)는 이탈리아와 벨기에의 GDP 대비 공공채무 비율이 너무 높아서 단일
화폐 내부의 통화정책에 대해 "매우 빠르게"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정도의 많은 나라들이 EMU를 출발시켜야 하는지는 정치적 결
정사항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토론하기를 거부했다.
통화연합에 참가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나라들은 "유로"를 경쟁 통화, 특히
미국달러화와 일본엔화에 대항하는 경제적 블럭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강한 유
로는 오늘날 두가지 이유로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나는 장래 회원들, 특히 프랑
스와 독일 사이의 상충하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
는 이들 나라의 자본주의 지배자들이, 자본가 계급이 이윤을 얻기 위해 부과할
필요가 있는 긴축 조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
다.
EMU의 출범국가는 5월2일에 공식적으로 결정되며 공동화폐는 1999년 1월 1
일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3월25일 유럽연합의 집행기구인 유럽연합집행위는 EMU
에 가입할 나라로 11개국 - 오스트리아, 벨기에, 핀란드, 프랑스, 독일, 아일랜
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델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을 추천했다.
영국과 덴마크는 현재로서는 통화동맹에 가입하지 않기로 유럽연합과 조약을
맺은 바 있다.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지난해, 환율메커니즘(ERM)과 EMU
에 초기에는 불참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스웨덴 관리들은 EMU계획이 너무 불
안정하다고 주장했지만, 이후에는 스웨덴 국민의 지지가 적어서라고 말을 바꿨
다. 그리스의 경우는 집행위의 말에 따르면 가입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말했
다.
이 추천과 함께 집행위는 EMU조건이 얼마나 잘 충족되었나에 대한 이른바 수
렴(convergence) 보고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특히 이탈리아와 벨기에를 겨냥
한 것인데 이탈리아는 GDP의 120%이상의 공공채무가 있으며 이는 원래 조건 60%
의 두배이다. 벨기에 역시 유사한 경우다. 그러나 집행위는 이들 정부들로부터
이 수치가 앞으로 현저하게 감소할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다고 말했다.
보고서에서 다루는 또 하나의 기준은 통화 안정성이다. 핀란드와 이탈리아는
EMU 가입의 기준으로 간주되는 ERM에 2년간 참여하지 않았고, 집행위는 그들 통
화가 지난 2년간 충분히 안정적이었으므로 이 요구조건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스의 경우 2001년까지 EMU와 공동화폐에 가입하려는 시도를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고 주장하며 가혹한 긴축조치를 발표했다. 3월 중순 그리스 정부는
ERM에 참가를 신청했으며, 이는 자국화폐인 드라크마를 14%평가절하한 후에 받
아들여졌고, 또한 그리스 당국은 시장규제 완화와 기업 및 은행의 민영화를 더
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독일재무장관 테오도르 바이겔(Theodor
Waigel)은 그리스의 ERM가입을 환영하지만 계획된 긴축정책이 철저히 수행되어
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요크에서 3월 중순 다른 유럽연합국가의 재무장관들과 비공식 모임을 가
진 뒤 바이겔은 새 화폐의 안정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5월
초 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 특별 안정성 선언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
든 국가가 그들의 수렴 계획에서 약속한 것을 이행한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고 말했다.
3월25일 유럽중앙은행의 전신인 유럽통화기구(EMI)도 유럽연합집행위에 의해
추천된 공동 화폐의 시작을 승인하는 "수렴 보고서"를 내놓았다. 집행위는 몇몇
국가들이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수치를 조작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나 3
월 25일 기자회견에서 EMI수반인 윔 뒤젠베르그(Wim Duisenberg)는 현재 평균
2.4%로 산출된 EMU 가입예정 11개 국가들의 예산 적자가 부분적으로는 일시적
평가의 결과이며 이탈리아 경우는 "유로 세금"같은 농간의 결과라고 말했다. 그
는 이것이 더 지속가능하고 장기적인 평가들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공공채무를 줄이고 "노동 유연성"을 성취할 더 많은 긴축조치를 요구했다.
티트마이어는 3월27일 기자회견에서 분데스방크의 수렴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는 이탈리아와 벨기에가 그들의 공공채무를 줄일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를 표명
했고 이들 정부가 더 확실한 약속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긴축조치는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실업률이 12%이상을 웃도는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점점 심화되는 긴
축조치로 인해 사회적 항의가 촉발되고 있다. 수만명의 실업자와 시민들이 독일
전역에서 일자리를 요구하는 월간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항의 시위의 조직자들에 따르면 이 시위는 연방선거가 있는 올해 9월 27일까
지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실업자들에 의한 거리시위와 고용사무소 점거가 지난 6개월동안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었고 이탈리아에서는 3월 중순 수만명이 일자리 제공을 위
한 정부의 대책을 요구하면서 밀라노와 나폴리, 팔레르모를 행진했다. 그리고
그리스의 노동자들은 최근 정부의 노조 탄압에 대해 일련의 파업을 일으키고
있다.
심화된 긴축조치가 사회적 폭발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대기업 언론에
서도 표명되고 있다. 3월26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더욱 '사회적인'
유럽에 대한 요구가 지도자들을 궁지에 몰아넣다"라는 머릿기사를 실었다.
"엄청난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고 런던 정치경제 학교(LSE)의 전 학장인 랄
프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가 트리뷴지에서 말했다. "일단 모든 사람이 단
일 화폐에 들어가면 그들은 다시 이완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안정성 협
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1999년과 2002년 사이에 적어도 하나의 주요 회원국
이 국내의 사회적 정치적 이유로 EMU를 떠나야 하거나 떠나고 싶어할 지도 모
른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해체되기 시작할 수도 있다."


농업보조금 삭감 제안

유럽연합집행위는 3월 18일 2000년에서 2006년까지의 7개년 예산 제안에서 유
럽연합 내부의 긴축조치를 제안했다. 이것은 유럽연합 공동농업정책(CAP)의 육
류, 곡물, 우유에 대한 보장가격을 30%까지 인하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집행위는 또한 지역원조는 오직 가장 가난한 지역들에게 그리고 목표를 하향
조정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농업 보조금은 유럽연합 예산의 절
반을 차지하며 지역원조는 4분의 1을 차지한다. 유럽연하의 연간 총 예산은 약
1천억 달러이다. 수입 측면에서 보면 회원국들이 각국 GDP의 최대 1.27%를 유럽
연합 예산에 납부한다. 집행위는 이 수입측면에 대한 변화는 제안하지 않았다.
그리고 독일 연방 선거때까지는 수정하지 않을 예정이다.
이전의 유럽연합 보조금 삭감은 그리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지중해의 많은 회
원국 농민들의 항의를 야기했다.
집행위의 제안은 독일에서 심한 비판을 받았다. 농민조직 의장은 그 계획을
"거대한 도발"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재무장관 바이겔은 독일의 예산납부액이
낮아지지 않으면 장래 유럽연합 결정을 저지하겠다고 위협했다.
독일은 유럽연합 예산에 200억 마르크(108억 달러)를 납부한다. 스웨덴, 오스
트리아 그리고 네델란드도 바이겔의 비난에 동조했다.80년대에 당시 영국 수상
이던 대처는 영국 납부금의 환불을 협상했다. 이것은 지금 다른 납부국들과의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스페인은 120억 마르크의 수혜국이며 그리스는 80억마르
크, 포르투갈은 55억마르크, 아일랜드는 47억 마르크의 수혜국이다. 어떠한 수
혜국도 덜 받기를 원치않으며 어떠한 납부국도 더 내기를 원치 않는다.
집행위의 제안은 공식적으로는 유럽연합의 중유럽 및 동유럽으로의 확대를 위
한 자금마련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사이프러스, 에스토니아, 폴란드, 체
코, 헝가리, 슬로베니아와의 가입협상은 올해 3월 30일과 31일에 시작되었다.
동시에 모든 유럽연합 농무장관들은 농업보조금 삭감 제안에 대한 반대를 표명
했다. 유럽연합 확대를 위한 회담을 마치고 나오는 외무장관들은 농민 시위대와
마주쳤다.


사이프러스를 둘러싼 분쟁

3월 중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열린 유럽연합 외무장관 회의에서 사이
프러스의 유럽연합 가입 문제는 긴장을 유발했다. 그리스는 그리스가 유럽연합
과 터키 사이의 관세동맹을 승인할 경우 사이프러스가 회원가입 협상에 초청될
것이라는 약속을 1996년에 받았다. 80년대 초반 이후 터키정부는 회원가입을 신
청했으나 그리스와 독일 정부의 반대 때문에 심각하게 고려된 적은 없었다.
터키가 회원가입 1차 협상에 초청되는 6개국에 포함되지 않은 반면, 사이프러
스는 포함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후 터키와 유럽연합의 사이는 냉각되었다.
사이프러스 섬은 군사적으로 점유, 분할되어 있다. 그리스의 후원을 받는 남부
사이프러스의 정부가 회원가입 대상이 된 것이다. 터키 군대는 북부를 장악하고
있다.
프랑스는 사이프러스의 두 지역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독일과
터키의 사이가 나빠지자 프랑스는 유럽연합 확대에서 터키를 배제하는 것에 반
대하는 유럽 강대국이 되었다.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그리스와 터키가
각각 관장하는 사이프러스 양측이 공동대표로 통합될 때까지 사이프러스와의 가
입협상을 연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리스는 사이프러스와의 협상이 3월 30일
에 시작하지 않으면 다른 5개국의 가입협상도 저지하겠다고 위협했다.
에딘버러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외무장관들은 만장일치로 분리된 사이프러스
와의 협상이 계획대로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분리된 사이프러스가 유
럽연합의 회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 그들은 또한 사이프러스
통일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터키 외무장관은 3월30일 북부 사이프러스 방문 중에 터키측 사이프러스 지도
자를 만난 후 "그리스측 사이프러스 정부가 또 다른 전쟁으로 가는 길을 닦고
있다"라고 선언했다.
남부 사이프러스 정부는 지난 몇년간 상당한 양의 무기를 수입해왔다. 최근
요구는 러시아 지대공 미사일로 올해안에 운송될 것이다. 그 미사일은 그리스
전투기들이 "비상"시에 머무르게 될 사이프러스 남부 파포스에 가까운 공군기지
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 외무장관은 최근 미국방문 중 터키군
대가 미사일을 파괴하면 그리스는 남부 사이프러스 정부를 방어할 것이라고 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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