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6/10

129호/동향]독일:반핵운동을 배반한 녹색당

 
    뉴스 > 전체기사
[129호/동향]독일:반핵운동을 배반한 녹색당
picis picis@jinbo.net
반핵운동을 배반한 녹색당
[주간녹색좌파] 4/11 짐 그린

3월 26-29일 동안 있은 프랑스에서 독일 도시 고어레벤으로의 고준위 방사능 폐기물
수송을 지지함으로써 독일 녹색당은 자신의 원래 강령의 네 원칙-환경 지속가능성, 탈무
장, 사회정의, 민주주의-을 저버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왼쪽도, 오른쪽도 아니지만
전선에 서 있다"는 그들의 주문(呪文)에 내재하는 보수주의와 기회주의 뿐이다.

프랑스 라아그에 있는 원자력기업 코제마(Cogema)사의 재처리 공장에서 기차와 트럭
에 실린 여섯 개의 '캐스터(Castor, 방사능 물질 저장·수송용 용기-옮긴이)' 컨테이너-
각 캐스터에는 원자로에서 사용후 연료의 재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결정(結晶)화된 폐기
물 10톤씩이 들어 있다-는 소금 광산이 '임시' 저장소(재활용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이
곳에 반영구적으로 보관된다-옮긴이)로 사용되고 있는 고어레벤으로 운송되었다.
핵폐기물의 수송 몇주 전 동안 수만 명의 시위대가 독일 전역에서 일련의 시위에 착
수하였다. 폐기물 수송 열차의 진행로를 따라 수천 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철로에서 연
좌농성을 벌이고 시멘트를 붓고 철로에 쇠사슬로 몸을 묶는 등 열차 운송을 지연시켰
다. 진압 작전에는 2만여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으며 수천 명의 시위대가 단넨베르크 역
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물대포가 사용되기도 했다.
독일에서 나온 사용후 연료와 재처리 폐기물 수천 톤이 여전이 라아그에 남아있으며 독
일과 프랑스 정부는 매년 두 차례의 수송을 계획하고 있다.
여섯 개의 캐스터 폐기물 컨테이너가 종착지에 도착하긴 했지만 독일 정부가 부담한
정치적, 재정적 비용-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 3월 28일자에 따르면 경찰 작전 비용
이 천만 마르크(930만 달러) 이상 소요되었다고 한다-으로 인해 앞으로의 수송이 위태
롭게 되었다.
고어레벤으로 재처리 폐기물을 이송한 것은 독일 원자력 기업들이 직면한 문제, 즉
한계에 다다른 사용후 연료 저장 능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방편이었다.
코제마사 또한 독일 원자력 기업들의 동기와 유사하다. 앞으로 운영을 계속하기 위해
서는 재처리 폐기물을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고어레벤으로 폐기물을 수송한 결과 독일 원자력 기업들은 얼마 안가 코제마로 사용
후 연료를 다시 수송하게 될 것이다.
폐기물 수송에 대한 대중적 반대는 환경 및 공중보건 상의 위험에 기인하는 것이다.
1998년, 캐스터 컨테이너가 10여년 동안 유럽 전역을 왔다갔다 하면서 허용치보다 많은
방사능을 방출해왔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많은 경우에 국제원자력에너지기구(IAEA)
가 권고하는 방사능 허용치를 초과했으며 때로는 100배를 넘어서기도 했다.
오염 스캔들과 이에 대한 대중적 반응의 결과로 당시 기민연(CDU) 정부는 폐기물
수송을 계속할 수 없었으며 캐스터의 철도 운송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3월 26-29일
의 캐스터 수송은 98년 이래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세계에너지정보서비스(WISE)의 2월 16일자 뉴스 성명에서 요헨 슈타이는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지금 수송 금지가 종언을 고하고 있지만, 현 환경장관이 녹색당 당원
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캐스터가 이제 보다 안전해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터무니없는 합의'

독일 녹색당은 1998년 후반 사회민주당의 하위 파트너로 연정에 참여하였다. 녹색당
과 사민당 모두 원자력의 단계적 축소를 주창했으며 정부 구성 100일 안에 이를 입법
화하겠다고 약속했었다.
600여일이 지난 작년 6월 14일 사민당-녹색당 정부는 입법화는커녕 원자력기업들과 '합
의'에 도달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의 상원의원 봅 브라운은 이 합의가 '커다란 승리'라고 환호했
지만 대부분의 논평가들은 이를 원자력기업들의 커다란 승리로 간주하면서 '터무니없는
합의'라고 조롱하였다. 이 합의에 힘입어 독일 원자력기업들의 주가는 4-5% 상승하였
다.
과거에 독일 녹색당은 "원자력 종식을 위한 분명한 일정표"를 요구했었다. 그러나 6
월 14일의 합의는 '단계적 축소'를 위한 시간표를 명기하기는커녕 19기의 원자로 모두
에 대해, 32년인 원자로의 평균수명에 상응하는 생산치를 설정하였다.
녹색당은 협상 과정에서 2002년 총선 전까지 가장 노후한 2기의 원자로를 폐쇄하라
는 요구를 빼버렸다. 녹색당과 사민당 지도자들은 또한 핵연료에 대한 투입세 신설이라
는 녹색당의 제안을 기각시켰다.
1999년 1월 사민당-녹색당 정부는 2000년 1월 1일부터 독일의 사용후 연료 재처리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녹색당은 이 결정이 "핵에너지의 180도 선회"라며 환호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국 또다른 거짓 약속임이 드러났다. 이번 합의로 2005년 7월 1일까지 재
처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민당-녹색당 정부는 입법을 통해서든, 프랑스와 영국의 재처리 공장들로 사용후 연
료를 수송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으로써든 원자력의 신속한 종식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
러나 정부는 오히려 합의를 선택했으며 그 결과 프랑스와 영국으로 사용후 연료를 수
송하고 재처리 폐기물을 독일로 되가져오는 과정을 재개하고 있다.
3월 10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당대회 표결에서 녹색당의 압도적 다수는 3월 26-29
일의 폐기물 수송 저지에 반대하였다. 당대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으로 인해 녹색당은
"원자력 합의에 반하는 행동이나 시위, 봉쇄"를 구축하거나 지지할 수 없었다.
반핵운동에 대한 녹색당의 배반은 환경 지속가능성, 탈무장, 사회정의, 민주주의라는
자신들이 선언한 원칙을 배신한 것 가운데 최근의 일에 불과하다.
녹색당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녹색으로 치장하는 놀랄만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1999년 2월, 독일 제2의 은행의 수석 경제학자인 마르틴 후프너는 녹색당이 "수많은 영
역에서 경제적 합리성의 목소리로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후프너는 녹색당이 경제 정책 및 사회 정책에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고 있
다고 말했다. 그는 "세대간 평등"-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허황된 말들 가운
데 하나이다-과 관련하여 정당화된, 녹색당의 연금 증대에 대한 반대를 예로 들었다. 녹
색당은 연금을 확대함으로써 미래 세대에 경제적 부담을 더 지우는 건 현명치 못한 처
사라고 주장했다.
1999년에 도입된 연료세 및 전기세 증가는 "환경세"라고 선전되었지만, 기업들은 크
게 감면시켜주면서 저소득층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녹색당은 국가 지출의 대량 삭
감-연금생활자와 실업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을 지지해왔으며 절약, 변통성,
자율 등과 같은 녹색 캐치프레이즈로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탈무장과 비(非)-비폭력
탈무장과 비폭력이라는 녹색당의 원칙 또한 탈선을 거듭하고 있다. 1998년 선거 직전
에 발표한 녹색당의 선거강령은 "정치의 탈군사화-군대의 폐지와 나토 해체-"를 목표로
선언했었다.
선거 몇달 후 녹색당은 세르비아와 코소보에 대한 나토의 군사공세를 지지하였다. 아
이러니하게도 1999년, 몇몇 녹색당 인사들은 사민당으로부터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겠
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치뤄야 할 필수적인 대가라고 당의 군사주의를 옹호했었
다.
일부 녹색당 인사들은 또한 1998년 이후 이라크에 대한 군사공격을 지지하였다. 한
예로 지난 2월 외무장관이자 녹색당 지도자인 요시카 피셔는 미국과 영국의 폭격을 비
난하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정부는 그들을 "이해"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녹색당은 또한 현재 군사계획참모부와 정치안보위원회를 신설하고 6만여 명으로 구
성된 강력한 '신속대응군' 창설을 준비 중인 유럽연합의 군국주의화를 지지하고 있다.
코소보와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의 폭격이 끝나고 석 달이 지난 후 녹색당 의원단 방
위 대변인인 앙겔리카 베어는 문서 하나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녀는 독일 군대가 "기
동성과 기술, 작전상의 우월성, 갱신된 지도력을 통한 규율, 다국적, 국제적 작전들에서
의 유연한 배치 능력 등"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출(庶出)로 간주되는 녹색당의 개념들은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라는 제목
의 베어의 문서 전체에 걸쳐 맹렬하게 비난받고 있다. 그녀의 문서는 녹색당의 절약과
변통성을 독일과 유럽연합, 나토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좇을 수 있는 "높은 작전수행 능력과 보다 비용효율적인 군대"에 대한 지지로 변환시키고 있다.
베어에게 "해방"이란 독일 군대를 잠에서 깨우는 것을 뜻한다. "구조적 개혁의 불충
분함으로 말미암아 군대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이로부
터 해방되어야만 한다."
1999년 5월 13일 열린 당대회에서 피셔는 녹색당의 마지막 원칙인 민주주의에 관해
이렇게 언급했다. "여러분이 시한 없이 [세르비아와 코소보에 대한
나토의] 폭격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라고 호소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경우 저는 이에 따
르지 않을 것입니다."독일 연방선거는 내년에 치러진다. 1998년 연방 선거 이래 많은
주 및 지방선거에서 녹색당의 득표율이 하락했으며, 원내 진출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5%를 얻을지조차도 불확실하다.
녹색당이 원내 진출에 실패하는 게 독일인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퇴보를 의미
할런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녹색당은 -풍력 에너지의 상당한 성장 등- 몇몇 성과를
획득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전쟁 개입과 원자력 정책의 대실패 등과 같은- 일련의 중
요한 이슈들에서 녹색당은 진보운동을 적극적으로 가로막아왔다.
녹색당의 대차대조표는 부정적인 면이 압도적이며 지배계급의 품에 안겨버린 당의
정치적 궤적 또한 분명하다. 독일사회생태연구소(GISE)의 페터 슈타우덴마이어의 말을
빌자면, "과거에 활동가들이 이끌던 '당에 반대하는 당'이 풀뿌리운동과의 연계를 상실
한 채 경력을 좇는 직업 정치인들의 사교집단으로 움츠러들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57호/동향] 유럽의 우향우

 
    뉴스 > 전체기사
[157호/동향] 유럽의 우향우
picis picis@jinbo.net
유럽의 우향우
「인디즈타임즈」 2002/02/19, 더그 아일랜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극우라는 유령이. 조지 W. 부시의 장기적 전쟁은
외국인혐오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반이민 집단 히스테리 등 나치적 감정을 전 대륙
에 걸쳐 증폭시켰다. 부패로 손상되고 정책적으로 파산 상태인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는 도망치고 있으며, 아직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곳에서는 정치 지도부가 경제 위기
를 심화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서유럽 거의 대부분에서 좌파 중 사민주의적 정
부 혹은 좌파-중도파 동맹이 정권을 장악했던 90년대의 "장미 유럽"(장미가 유럽 사
회당·사회민주당의 로고였다-옮긴이)은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
독일의 게라드 쉬뢰더와 영국의 토니 블레어에게 소중한 "제3의 길"은 전통적인
사민주의적 정치의 "클린턴화"를 의미하며, 프랑스 수상 리오넬 죠스팽의 타협 정치
는 사실 싱겁기 그지없다. 그러나 정치적 색깔이 무뎌진 유럽 좌파 기회주의자들을
대체하기 위해 경쟁하는 세력들은 훨씬, 훨씬 더 나쁘다. 프랑스-독일 간 협상이 전
통적으로 유럽 공동체의 정치, 경제를 지배하면서 점점 유럽의 연방화 경향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라인 강 양쪽 모두에서 진행될 선거에 힘의 균형을 급격히 우측으
로 돌려버릴 위험이 있다.
프랑스의 우경화는 다른 어떤 유럽 국가보다 북아프리카계 인구가 많다는 사실에
서 연유한다. 프랑스는 50년대와 60년대 전후(戰後) 성장 시기에 과거 식민국가들로
부터 수십만의 육체노동자들을 수입했다. 전통적으로 대규모인 이민자 가족들의 제
2, 3세대 젊은이들은 정체성의 위기에 빠져있다. 불어로 말하고 그들 부모 조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프랑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황량하고, 답답하며, 저소득과 높은 물가상승의 고립
된 교외 도시에 갇혀, 할 일 없는 많은 빈민가 젊은이들은 자신의 유일하게 진정한
정체성을 경범죄를 일삼는 집단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들은 범죄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 모든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조짐을 보여줬던 작년 지방자치선거에서 왜 프
랑스 좌파가 40개 도시에서 권력을 잃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사회당의 죠스팽은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여론조사에서 현직 대통령인 보수적 쟈크 시라크에 점점 뒤지
고 있거나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죠스팽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은 아마 이민에
대한 강경주의자인 그의 내무부장관d;었던 장 피에르 셰브느망으로부터 나올 것이
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이며 유럽통합회의주의자인 셰브느망은 1991년에 프랑스의 걸
프 전쟁 지지에 저항하는 뜻에서 이전 사회당 정부의 국방장관을 사직했다. 그는 당
시 시민운동(불어 약자로 MDC)이라는 당을 창립했는데, 이 당은 최근 그가 사직할
때까지 죠스팽의 집권 동맹에 참여해왔다. 질서의 보증인인체하고, 프랑스 언론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체"라는 별명을 붙여준 그는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전직 공산주의자 장관, 급진좌파당 (급진적이지도 좌파이지도 않은 소규모 중산층
정당) 지도자들과 초극우 카톨릭 정치인인 비스꽁 필리쁘 드빌리에 등을 포함한 지
지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알록달록한 퀼트 동맹을 꿰매고 있다.
셰브느망의 반미주의와 안보 히스테리에의 영합으로 그는 여론조사에서 죠스팽보
다는 시라크의 지지자들을 더 많이 끌어들여, 2단계로 치뤄지는 대선 과정의 첫 번
째 라운드에서 그는 '제3의 인물'이 되었다. 그가 워낙 잘 되어가고 있어 많은 선경
지명이 있는 프랑스 정치 분석가들은 결승에서 죠스팽-시라크보다 죠스팽-체 사이의
결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시라크 자신은 녹색당을 제외하고 프랑스의 모든 중요한 정당들에게 연속적으로
제공한 조직적 뇌물 스캔들로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 또한 부패 스캔
들로 타격을 입었고 좌파, 우파 정당을 막론하고 여러 장관들이 다양한 부패 죄로
수감되었다. 죠스팽 개인의 재정적 고결함이 지금까지 문제시된 적은 없지만, 그의
신뢰도는 람베르티스뜨(편집증적이고 은둔적인 지도자 삐에르 람베르트의 이름을 붙
인)로 알려진 매우 비밀스러운 트로츠키 분파의 스파이로서 사회당에 처음 입당했다
는 사실이 밝혀지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수년동안 죠스팽은 그가 과거 트로츠키
파였다는 소문을 부인하면서 그의 형과 혼동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 시절 사회당 서기로 재직할 때까지 분파주의 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그의 과거 트로츠키파 동지들로부터 나온 공개적인 증언들이 쌓여가자
그는 할 수 없이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것은 우파에게 공격 거리를 제공해주
었고, 죠스팽의 지하 암호명인 "미셀 동지"에 대한 악의적 언급이 죠스팽 비판자들
의 담론을 장식했다.
한편 인종문제를 미끼로 삼는 신파시스트 장 마리 르펜 -악명높은 반유대주의자
이며, 그의 국민전선은 부패와 부실운영 때문에 집권했던 중요한 시장직 세 개를 작
년 지방선거에서 잃었을 때 무력화되었다- 은 다시 한번 여러 대선 여론조사에서
13%나 얻고 있다. (전 부인에 의하면 집에서 히플러를 항상 "아돌프 삼촌"라고 부
른다는 르펜은 나치 수용소의 오븐을 "역사의 세밀함"이라 부른 것으로 유명하다.)
이와 동시에 죠스팽의 "복수 좌파" 동맹의 다른 두 구성원은 공산당(한때 프랑스의
가장 큰 전후 정치정당이었던)과 녹색당인데, 이들 모두 여론조사에서 약 5%대로
하락했다. 만약 죠스팽이 대선에서 진다면 -르펜과 셰브느망이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는 결승에서- 좌파 동맹은 6월 총선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에 처
하게 될 것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역시 다가오는 9월 선거에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있다. 부시
가 의회에서 "악"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몇 주 후, 그의 독일 사민당 -유럽 사회주
의의 모태 정당으로서 역사적인 뿌리가 있는- 은 지난 50년 동안이나 장악하고 있던
함부르크에서 새롭게 창당한 반이민자적 '법과 질서 당'이 기가 막히게 총 투표의 4
분의 1을 얻는 바람에(많은 부분 사민당의 전통적 노동계급 유권자들의 표를 가로챈
것이다.) 권력을 상실했다.
독일 경제는 현재 거의 자유 낙하 상태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슈뢰더의 권력
장악을 도왔던 쟁점인 실업은 거의 10%가 되었으며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지방 조
세 수입을 깡그리 흡수해버렸던 조세법이 기업친화적으로 바뀌어(슈뢰더가 주도했
다), 독일 도시들은 서비스를 대폭 삭감하고 파산 직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고용 수
치를 위조하고 과장한 슈뢰더의 노동부 장관을 둘러싸고 엄청난 스캔들이 터져 버
렸다.
신나치 독일국민정당(NPD)를 금지시키려던 시도는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또 다른
스캔들이다. 전체주의적 과거를 가지고 있는 독일에서 어떠한 정당이라도 불법화시
키려는 것은 예민한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며, NPD를 불법화시키는 것은 경제 침체
에 빠져있는 구(舊)동독에서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신나치를 순교자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이다. 더구나, 지나친 반이민 태도가 금지 사유로 언급되었던 최소한 5명의
NPD 지도자들은 독일정보기관원으로 밝혀졌다.
이 모든 상황은 보수적인 기독민주연합(CDU) 후보인 에드문트 슈토이버에게 대
단히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 있다. 그는 바이에른 정치계의 권위있는 거물이며 과거
나치의 악명높은 아부꾼이었던 프란츠 조세프 슈트라우스의 후계자이다. 불타오르는
민족주의자이며 유럽통합회의론자인 슈토이버의 법과 질서, 이민자 강경 담론은 특
히 실업률이 17%나 되는 동독에서 인기있다. 슈토이버 집권의 바이에른은 슈토이버
가 기업들에게 제공한 뜻밖의 보조금 덕분에 유럽의 하이테크 수도가 되었고, 바이
에른의 실업율은 국가 전체의 대략 반정도인 5%를 약간 넘는다.
"바이에른의 기적"을 만든 사람인 체 하는 이 사람이 상대로 자리잡고 있는 한
슈뢰더가 수상직을 지속하게 될 가능성은 올해 가을 독일 의회의 의석수가 거의
10%나 줄어들 것(이전의 보수적 정부가 1996년에 통과시킨 법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이라는 사실에 더욱 희박해지고 있다. 유력한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
네 차이퉁에 따르면, "만약 올해 선거 결과가 1998년과 똑같이 나온다면, 사민당과
녹색당의 21석 우위는 아마 개혁조치 때문에 8석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평화주의자인 녹색당의 지지율은 당수인 요시카 피셔 독일 외
무장관의 전쟁찬성 견해에도 불구하고, 9.11 이후 여론조사에서 폭락을 거듭해왔다.
슈뢰더의 유일한 생존 희망은 동독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놀라울 정도로 강한
그레고르 기지 주도의 전 공산주의자들인 좌익민주당(PDS)과의 동맹이다. 사민당은
이미 몇 개 지역에서 민사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인 사민
당 지도자 클라우스 보베라이트를 시장선거에서 함께 지지했던 베를린도 포함된다.)
슈뢰더는 민사당과의 동맹을 부정했지만, 2월 여론조사에 의하면 독일 국민 38%만
이 그를 믿는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악의적인 반이민 및 인종주의 캠페인으로
당선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수상이 포스트-파시스트 정당인 국민동맹과 외국인혐오
주의자인 움베르토 보시의 북부동맹 지원 하에 집권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의 '포
르자 이탈리아(전진 이탈리아!)'는 서유럽의 그 어떠한 정당과도 다르다. 이탈리아의
가장 부유한 사람인 그는 가장 많은 당원을 모집하거나 가장 많은 표를 조직화한
자에게 현금과 상을 주던 암웨이와 마찬가지로, 당을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만들었고
그는 이런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갑부로서 이탈리아 텔레비젼의 45%를 소유
하고 있고, 정부의 수반으로서 그는 현재 세 개의 국영 TV네트워크를 통해 추가
45%를 장악하고 있다.
이탈리아 부수상인 지안프랑코 피니 국민동맹 총재는 국민동맹의 전신(前身)인
MSI(1946년 과거 파시스트들이 창당한 '이탈리아 사회운동')에 17살 때 입당했다. 왜
냐하면 좌파 시위자들이 그가 존 웨인의 [초록색 베레모]를 보러 극장에 가는 길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바로 몇 년 전인 1994년에 그는 라 스탐파
에게 무쏠리니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베를루스코니
는 피니를 유럽연합 헌법제정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지명함으로써 유럽연합을 조
롱했다. 나아가, 베를루스코니는 국영 텔레비젼을 통제하기 위해 전(前) 파시스트 청
년 지도자를 선택했고, 이민장관은 무솔리니의 마지막 보루였던 살로 공화국의 일원
이었다. 그리고 TV 홈쇼핑 프로그램의 전 호스트였던 문화장관은 최근 현대 미술을
"배설물"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야당인 중도좌파 올리브동맹은 내부 권력투쟁에 빠져들면서 완전히 혼란
상태에 있다. 지도자인 전 로마 시장 프랑세스코 로텔리는 최근 [가디언]이 지적했
듯이, "허약하고 열정이 없다". 전 공산주의자들인 좌익민주당의 호리호리한 지도자
피에로 파씨노 또한 보다 카리스마적인 대안을 제공할 것 같지 않다. 노벨상 수상자
인 다리오 포의 절규는 베를루스코니가 차례로 사법부 등의 국가 기관을 그의 손아
귀 아래 두면서 민주주의에 가할 수 있는 죽음의 위협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 외에, 갈색과 검은 피부의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가 역사적으로 포용력
있고 사회민주주의적이던 스칸디나비아에까지 전염되었다. 작년 10월, 노르웨이 노
동당은 90년 역사에서 최악의 총선 결과에 고통받고 있으며, 루터교 목사인 후엘 마
그네 분데빅이 이끈 보수 연합에 의해 쫓겨났다. 그 다음 달 덴마크 사회민주주의자
들은 50년이래 최악의 결과를 얻어 반이민, '법과 질서' 강령을 들고 출마한 안더스
포그 라스무센이라는 카리스마적 젊은 보수주의자에게 권력을 잃었다. 한편, 극우
정당인 덴마크국민당은 나제3의 정당이 될 정도로 표를 긁어모았다. (스칸디나비아
대륙 어느 곳에서도 이민자는 인구의 5%를 넘지 않는데도 말이다.)
스페인에서는 보수적인 수상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의 인기는 부패로 점철된 펠리
페 곤살레스 사회당 정부를 패배시킨 이래 6년 동안 가장 높다. 그리고 벨기에에서
는 신파시스트 플랑드리 민족주의자들인 '블람스 볼록'은 2년 전 총선에서 총 투표
의 10%를 득표했는데, 이 때 부패병에 걸린 사회당 연합 정부를 희생으로 이 정당
과 기타 극우 정당들이 선전하도록 나섰다. 전쟁으로 확대된 외국인혐오주의적 안보
히스테리는 나치를 사랑하는 오스트리아 선동주의자인 요르크 하이더의 행운을 적
지 않게 도왔으며, 그의 신파시스트 정당인 극우 자유당(FPO)은 1월 말 여론조사에
서 집권 연립정부의 지지율과 똑같은 25%를 기록했다.
에드문트 슈토이버가 내년 가을에 새로운 독일 수상이 된다면, 보수주의, 민족주
의, 반이민이라는 새로운 로마-베를린-비엔나 축은 유럽 연방 건설을 중단시킬 수
있으며, 인권에 대한 유럽연합의 완강한 약속을 없애버릴 것이다. 대륙 위에는 인종
주의라는 어두운 구름에 덮여있는 상황에서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미래는 점점 더
어두워지는 듯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7년만의 파업 4% 벽 넘겨

 
    뉴스 > 전체기사
7년만의 파업 4% 벽 넘겨
독일 금속노조 파업
클리핑기사 chamnews@jinbo.net
정원호/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과정
조합원 2백80만명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독일 금속노조의 2002년 임금교섭이 7년만의 파업을 거쳐 마무리국면에 접어들었다.

노조의 6.5% 인상요구와 사용자의 3.3% 인상안의 대립으로 노조는 6일 독일 남서부의 바덴-뷔르템부르크주(州)에서부터 파업을 시작하여 13일부터는 베를린/브란덴부르크주로 확대했는데(독일에서 임금교섭과 파업은 교섭지구별로 이루어짐), 15일 바덴-뷔르템부르크주의 노사가 2002년 6월부터 4.0%, 2003년 6월부터 12월까지 3.1%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동독지역이었던 베를린/브란덴부르크주의 파업은 72년만에 최초라는 점에서 독일 노조의 새 역사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독일에서 흔치않은 파업이 발생한 것은 “높은 임금인상이 경기회복을 방해하고 고용사정을 악화시킨다"는 사용자들의 상투적인 주장에 대한 노조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실제 노조는 그러한 주장을 존중하여 지난 수년간 낮은 임금인상을 감수했지만, 결과는 엄청난 생산성증가와 이윤증가에도 불구하고 소득분배는 악화됐으며 고용 또한 오히려 감소됐을 뿐이다.

이에 대해 노조는 높은 임금인상이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소비를 늘리고 경기회복을 가져와 일자리도 늘릴 것이라고 주장하며, 요구의 관철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는데, 이는 두 지역의 파업찬성률이 90%에 달했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번 합의에 대해 노조는 당초 요구는 관철하지 못했지만 ‘마의 4%'를 돌파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바덴-뷔르템부르크의 시범적인 결과는 관례에 따라 전국에 확대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부 사용자들은 이에 불만을 표시하며 일자리를 감축할 수밖에 없다고 위협하고 있어, 향후에도 고용을 둘러싼 대립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88호] 5.20 ~ 5.26

민주노동당기관지 <진보정치> http://www.kdlpnews.or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책 실종된 인물 선거 사민ㆍ녹색당 신승 &quot;고맙다 홍수야, 미국아&quot;

 
    뉴스 > 전체기사
정책 실종된 인물 선거 사민ㆍ녹색당 신승 "고맙다 홍수야, 미국아"
해설│독일총선 결과
클리핑기사 chamnews@jinbo.net
▲ 독일 총선의 진정한 승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왼쪽)와 요슈카 피셔 외무장관이 지난 24일 총선 후 첫 회의를 갖고 기자회견에 임하고 있다.

강정수/베를린 통신원  jskang@web.de
23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밤새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전날 출구조사와 선거개표 방송은 자정 무렵까지 우파 기민/기사연합이 독일 총선에서 원내 제1당이 됐음을 말하고 있었다. 비록 근소한 차이였지만 좀처럼 역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기민/기사연합의 슈토이버 총리후보는 투표 마감시간이 정확히 1시간이 지난 22일 저녁 7시, 환호하는 당원들 앞에서 “선거에서 승리했다”며 기염을 토했다.

얼마 후 조금은 위축된 표정으로 사민당 지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슈뢰더 총리는 “밤은 길다”며 끝까지 개표를 지켜볼 것을 당부했다. 비록 원내 제1당 자리를 기민/기사연합에게 빼앗긴다 해도, 사민당과 녹색당의 전체 지지도가 과반수를 0.1~2% 앞서나가고 있어 ‘적녹연정’의 운명도 긍정적으로 점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에 대한 탁월한 육감을 소지한 것으로 평가받는 슈뢰더 총리가 이번에도 무언가를 감지했었던 걸까?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마감된 개표방송은, 8천8백54표 차이로 사민당이 원내 1당을 사수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은 38.5%라는 공히 동일한 지지율을 얻었지만, 사민당은 의석수에 있어서 3석을 더 확보함으로써 기민/기사연합을 따돌릴 수 있게 됐다.

사민당과 녹색당이 내놓은 선거전술은, 당내 인기스타 슈뢰더 총리와 피셔 외무장관을 전면에 내세우는 ‘인물 중심’ 전략이었다. 이는 ‘정당명부제’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정당 및 정책 대결 선거를 ‘인물 대결’로 바꿔 보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정당 지지율에 따라 사실상 의석이 배분되고, 다수당 대표후보가 총리가 되는 독일 선거제도에서 시도된 최초의 ‘인물선거 전략’은 두 가지 계산 속에서 탄생했다.

먼저 우파 기민/기사연합에서도 가장 우파에 속하는 슈토이버 총리 후보에 대한 광범위한 ‘반슈토이버 정서’가 그 하나다. 또한 초라한 정당 지지도에 비해, 월등히 높은 피셔 장관과 슈뢰더 총리의 대중적 인기가 ‘인물 선거 전략’의 나머지 한 축을 구성했다.

정치인 선호도 조사에서 이 두 명은 지난 4년 줄곧 1, 2위를 유지해 왔고, 슈토이버 후보의 경우 선거 끝나는 날까지 단 한번도 5위권 안으로 진입해 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여기에 독일 기상계측 역사 이래 가장 큰 강수량을 기록했던 지난 8월의 ‘대홍수’는 선거전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번 홍수는 자연 재앙이 아니라 ‘환경 재앙’으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구 동독지역을 강타했던 ‘대홍수’는 ‘환경 문제’가 ‘경제 불안 심리’를 비집고 주요 사회 관심사로 등장하는 호기를 만들어줬다. 무려 3주간 지속된 홍수 기간 동안, 사민 녹색 양당의 지지율은 마침내 바닥을 치고 상승곡선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녹색당 정치인들과 정책들은 갑작스레 방송과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됐다.

8월말에는 선거 양상을 뒤바꿀 수 있는 계기가 ‘외부’로부터 찾아 왔다. 딕 체니 미 부통령이 이라크에 대한 ‘선제 공격’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이에 슈뢰더 총리는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2차 대전의 경험자들이 생존하는 독일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 심리는 빠르게 확산됐고, 냉랭하게 등을 돌렸던 평화주의자들이 사민당과 녹색당 곁으로 돌아왔다.

또한 보수 우익 ‘슈토이버 반대’ 구호가 마침내 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사민당에 대한 지지도가 급상승했다. 투표 1주일 전 마지막으로 조사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사민당이 기민/기사연합을 근소하게 따돌리는 믿기 어려운 역전이 일어났다. 사민당에 대한 지지 호소가 아닌 ‘슈뢰더를 총리로’라는 구호 외에는 특별하게 새로운 선거공약조차 내걸지 않았던 사민당으로 볼 때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무려 8.6%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마의 8%선을 가뿐히 넘긴 녹색당은 창당이래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당을 위협해온 정체성 위기 또한 모면한 것이다. 그러나 ‘피셔를 찍자’를 선거구호로 내세웠던 녹색당의 앞길이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다.

녹색당 주요 정책들은 이미 지난 4년 집권 기간동안 ‘다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뿐더러, 차기 집권기간을 주도해 갈만한 새로운 선거공약도 제시되지 못했다. 사민당과 녹색당의 의석수가 원내 과반수보다 정확히 4석 앞서는 사실도 커다란 질곡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의원 개인행동보다는 ‘규율’이 강조될 것이고, ‘표 단속’은 당내 권위주의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선거 승리를 일궈낸 피셔 장관과 슈뢰더 총리는 자신들에게 보다 집중된 당 권력을 십분 즐기며 제2기 ‘적녹연정’을 맞이하고 있다.
[ 105호] 9.30 ~ 10.6
민주노동당기관지 l진보정치l http://www.kdlpnews.or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콜비츠2

 
    칼럼 > 칼럼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콜비츠2
케테콜비츠: 독일 판화를 많이 남긴 여류화가(1867--1945년)
참세상뉴스 chamnews@jinbo.net
[낫을 갈면서/동판/1905]

농민전쟁

1840년 초 침머만의 <대농민전쟁사개설>을 바탕으로 엥겔스가 농민전쟁을 분석한 글을 마르크스가 간행한 잡지에 기고하였는데 1870년 다시 단행본으로 이 글이 나왔다. 이 글을 보고 형상화한 작품이 [농민전쟁]이다. 1902년 당시 독일은 사회주의가 위세를 떨치며 계급투쟁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농민전쟁]의 역사적배경은 15세기 말 16세기 초 지배계급을 이루는 봉건영주, 성직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농민들이 그 부담을 다 떠맡았다. 농민은 소나 말, 그 이하의 취급을 받고 살았다. 농민들은 영주의 토지에서 일을 하였고 자신의 농지에서 올린 소득은 십일조나, 지대, 전쟁세, 제국세 등으로 다 빼앗겼다. 당시에는 영주에게 돈을 바치지 않고는 결혼을 할 수도 없었다. 뿐만아니라 그의 아내와 딸 또한 영주의 소유였던 것이다.

이 때 루터의 종교개혁이 농민의 반란을 일깨운다. 토마스 뮌쩌는 ‘천국이 아닌 지상의 왕국 건설'을 주장하며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설파하는 자들이 농민들을 약탈하고 파멸시키고 있고, 수탈당하는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작은 죄를 범하면 사형에 처해진다고 교회의 성직자들과 지배계급을 강하게 비판한다. 15세기 말 부터 유럽 곳곳에서의 간헐적인 농민반란이 1525년 그의 지도아래 독일의 70%에 달하는 농민의 참여로 농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억압되었던 분노는 봉기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무자비한 진압 또한 가속화 되었다.

농민전쟁은‘산더미처럼 쌓인 파괴의 잔해와 나무마다 매달린 농민의 시체'로 참혹산 양상을 띄었고, 마을을 통째로 불태워 약탈과 대량학살까지 저질러 졌다. 이 속에서 토마스 뮌쩌는 고문으로 참수당했고, 농민반란이 들불처럼 퍼지자 루터는 지배계급인 영주와 귀족편에서서 평화를 부르짖으며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농민의 반격이 심해지자 루터는 ‘미친개를 죽이듯이 두들겨 패고, 목졸라 죽이고, 찔러 죽여아 한다'고 외친다. 농민에 관해서는 어떠한 잘못된 자비도 실천되어서는 안된다고 떠들어댄다.

독일의 농민전쟁은 한 계급이 전체적으로 계급운동에 참여한 독일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당시가 서양미술사의 꽃이라고 불리는 르네상스시대이다. 이렇듯 유럽 각지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을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미켈란절로, 뒤러 등의 거장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쏟아낸다. 독일의 조각가이자 목판화가인 리멘슈나이더가 농민전쟁에서 농민들 편에 서서 교황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심한 고문으로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은둔생활을 하다 죽어갔다.

이러한 처참한 역사적 사건인 농민전쟁을 현재적으로 부활시키고자 [농민전쟁] 작업을 한다. <밭가는 사람들>, <능욕>,< 낫을 갈면서>, <무기를 들고>, <폭발>, <전쟁터에서>, <잡힌 사람들>의 7부작으로 완성된다.

콜비츠의 작업순서는 [직조공의 봉기]가 먼저 제작되지만 [농민전쟁]이 [직조공의 봉기]보다 훨씬 앞선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다. 그리고 [농민전쟁]연작은 [직조공의 봉기]와 같은 구성으로 진행과정과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해낸 것으로 7개의 대형판화로 주제에 대한 정확한 상황설정, 감정처리, 탁월한 구성과 묘사로 완결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 연작에서도 억압하는 지배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밭가는 농부의 노고에서, 여인의 능욕 등의 표정과 몸짓, 분노에서 이들을 짓밟는 자들을 간접적으로 더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

[농민전쟁]에서도 역시 케테콜비츠는 피지배계급의 피끓는 분노를 너무도 적확하게 포착하여 리얼리즘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작품하나 하나가 고도의 예술성을 담보한 탁월한 작품이다. 작품을 만나면 그녀의 가슴을 대하는 느낌이다. 아주 오랫동안 작품을 보고 또 보고 느끼길 바란다.

*[밭가는 사람들/동판/1906]-연작1


*[능욕/동판/1907]-연작2

첫번째 <밭가는 사람들>을 완성하기 위해 9개의 상황을 설정하고, 6개의 상황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구도는 레핀의 부두노동자(1870-1873)와 비슷하다. 밭가는 농부들의 노고가 보는 이에게 그대로 이전되면서‘영차'하며 당기거나 밀어주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한다.

<능욕>에서는 케테콜비츠의 작품에는 나타나지 않는 식물의 세부적인 묘사로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처참한 상황에서의 흐드러진 꽃의 세부묘사는 찢겨진 여인과 화사한 꽃을 대조시킴으로서 당시의 몸서리치는 모욕, 허탈, 슬픔과 노여움이 그대로 전이되며 영주와 귀족에 대한 분노를 한층 고조시킨다.
*[낫을 갈면서/동판/1905]-연작3

*[무기를 들고/동판/1906]-연작4

*[폭발/혼합기법/1903]-연작5

이 연작의 반전이 이루어지는 <낫을 갈면서>는 앞의 두 작품보다 먼저 제작된 작품이다. 습작과 변형말고도 12가지의 상황설정이 있었던 작품이다. 농민들의 힘든 노동과 여인의 능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와 폭풍전야의 긴장을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한 인물의 심리를 포착하고 있다. <무기를 들고>는 날카로운 창과 낫을 들고 나선형 계단을 물밀듯이 밀려드는 사람들. 참아왔던 분노를 무장을 하고 봉건영주와 귀족을 처단하러 간다. 계속 이어지는 사람들을 밝은 빛으로 처리하여 분노와 힘의 크기를 표현하였고, 대각선 구도의 치솟아 올라가는 구도로 역동성과 열기를 표현하고 있다.

[농민전쟁] 연작에서 <폭발>은 [직조공 봉기]의 <폭동> , 1899년의 <봉기>를 이어가는 것으로 한 주제에 대한 깊은 탐구을 느낄 수 있고 (이것은 케테콜비츠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특성을 보인다). 또한 혁명적인 예술가로서 대중봉기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봉기의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농부를 독려하며 ‘하늘을 나는 여인’을 침머만의 <대농민전쟁사개설>에서의‘검은 안나’로 등치시킨다. <폭발>에서 ‘검은 안나’(등진 여인)는 군중과 함께하는투쟁하는 여성으로 발전한다.

*[전쟁터에서/동판/1907]-연작6

*[죄수들/동판/1908]-연작7

흑백의 대조로서 표현한 <전쟁터에서>는 개선된 부식법을 사용하여 밤의 어둠을 나타냈다. “고통은 아주 어두운 빛깔이다”고 말한다. 봉기이후의 처참한 상황을 자식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어머니의 손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손과 죽은 자의 얼굴과 램프의 빛만 밝게 표현하고 나머지는 어둠과 별 묘사 없이 표현하였다. 가슴 뭉클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죄수들>이 마지막 작품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결박당한다. 비록 승리하지 못한 투쟁으로 잡힌 몸들이 되어 고개숙이고, 슬픈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고, 지쳐 쓰러져가지만 영주와 귀족에 대한 분노와 울분은 그대로 남아있다. 농민의 단단한 어깨와 팔, 다리, 담담한 표정에서 새로운 투쟁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농민전쟁] 연작은 5년간의 작업으로 1908년 완성되고 ‘역사미술학회’에 의해 출판되었다. 농민전쟁 연작을 마치며 그는 독일 판화가의 제1열에 우뚝 서게 된다. 연작은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고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한 속에서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 독일에서도 계급투쟁이 격렬하여 사회주의자들은 사상 유례없는 선전선동을 하게 되는데 케테콜비츠는 사회주의자 예술가로서 투쟁의 열기를 북돋웠다. 또한 자신이 가진 능력의 최상의 것을 투여했다고 자부하였던 작품이다.

짐플리시시무스
1909년 케테콜비츠는 하이네, 알베르트 랑겐 등이 활동하고 있었던 풍자 시사주간지인 [짐플리시시무스]에 사회비판적인 그림을 싣기 시작한다.

<가내노동>에서는 대도시 생활의 힘든 삶, <임시숙박소>의 프롤레타리아의 즐거운 일상, 혼자된 여자의 고단한 삶, 실직, 배고픔과 절망, 원하지 않는 임신 등 노동자 가족의 전형적인 불행들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4년여의 이 작업을 통해 중요한 양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자신의 회화적인 착상을 직접 모델을 이용, 꼼꼼하게 발전시켜서 동작 몸짓을 하나하나 힘들여 완성했으나 이제 밑그림을 재빨리 그려내고 본질적인 요소를 집중하기 위해 세부묘사를 생략한다.
*[가내노동, 짐플리시시무스, 1909, 11, 11]

*[임시숙박소, 짐플리시시무스, 1911, 1, 16]

“신속하게 완성해야 한다는 것, 대중적으로 표현해야만 할 필요성, 그러면서도 <짐플리시시무스>를 위해서도 예술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늘 나를 새롭게 사로잡아 오래도록 충분히 다 말하지 못해온 것을 대중 앞에서 더 자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유달리 이 작업에 애착을 느끼도록 하였다. 단 하나 나쁜 점이 있다면 내가 이 잡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부터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이 잡지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더 이상 이 잡지가 저속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눈에 안 띄도록 감출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은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하는 케테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예술이 계급투쟁과 노동자계급 의식 형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예술의 당파성을 견지하고 있다.

“ 이제 어디에서나 모두가 궁핍과 싸워나가는 과정에 내가 참여해 줄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요구이며 정상적인 일이다. 나는 정말로 기꺼이 나의 작품으로 이 일을 도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기분내키는 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곧바로 큰소리를 듣게 된다. 빨리해! 노인복지를 위해! 아동복지를 위해!”

게르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콜비츠연구서>에서 “독일 조형예술가들 중에서 노동자 계급내의 민중성을 케테가 포괄한 세계에 필적할 만큼 획득하거나 최소한 그러한 경지에 버금가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된 작품들은 노동자의 일상적인 슬픔과 기쁨을 민중적으로 표현하였다.

전쟁

일곱개의 목판화로 [전쟁] 연작은 1922-1925년에 걸쳐 완성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젊은이들이 지원병으로 전쟁터에 나가고 콜비츠의 둘째아들 페터도 지원하였다. 1914년 10월 10일 임관한 18살의 페터는 20일 후 전사통지서로 돌아온다. 콜비츠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힘든 삶을 보내며 자신의 슬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희생/ 목판/ 1922-1923]-연작1

*[지원병들/ 목판/ 1922-1925]-연작2

<희생>은 제단에 희생물을 바치듯 두 손으로 어머니가 아이를 무엇인가에게 바치고 있는 그림이다. <북두>라는 잡지에 실려서 1931년 최초로 콜비츠를 중국에 소개한 이 작품은 노신과 그 동료들의 공감을 샀고, 중국의 미술학도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중국 목판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해골모습의 병사, 우는 병사 등으로 무의미하고 절망스러운 전쟁을 <지원병들>이 표현하고 있다.

전쟁연작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표현하는 것으로 전쟁으로 인한 한 사람의 죽음과 연관된 부모와 부인, 자식, 어머니들을 표현해 냄으로써 전쟁의 참혹함을 전하고 있다.
*[부모/ 목판/ 1923]-연작3

*[과부1/ 목판/ 1922-1923]-연작4

*[과부2/ 목판/ 1922-1923]-연작5

*[어머니들/ 목판/ 1922]-연작6

“전쟁반대 포스터를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 일을 생각하면 나는 즐거워진다. 어떤 목적을 지닌 작품은 순수한 예술일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작업할 수 있는 한 나의 예술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지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1922년 여류화가 에르나 크뤼거에게 보낸 콜비츠의 편지 중에서)

“ 나는 전쟁을 형상화해내기 위해 무던히 애섰지만 그것을 포착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말하고 싶어한 것을 어느 정도 말해줄 목판화 시리즈를 완성했습니다. 그 제목은 <희생>, <지원병들>, <부모>, <어머니들>, <과부들>, <민중>입니다. 이 그림들은 마땅히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 모두가 겪은 이 참담한 과거를.”(1922년 작가 로망롤랑에게 보낸 콜비츠의 편지 중에서)

예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뚜렷이 인식하며 [전쟁]이란 주제를 다루면서도 노동자계급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전쟁>연작 이외에 반전의 메시지가 담긴 1914년 작인 <근심>, <어머니들>, <작전 중 사망>과 <전쟁은 이제그만!>(1924)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 >(1942) 등이 있다.
*[전쟁은 이제 그만/ 석판/ 1924]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 마지막 석판/ 1942]

프롤레타리아

<실업>, <기아>, <자식의 죽음>으로 목판으로 구성된 이 연작은 [직조공의 봉기]나 [농민전쟁]에서의 작품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한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과는 달리 더 가까이에서 관찰한 노동자계급의 극단적인 빈곤의 삶을 간결하게 추상적으로 묘사했다.

석판이 부드러우면서 구상적, 구체적인 반면 목판은 거칠고 추상적으로 표현을 하는데 적합하다. 1926년 10월 16일 알프레드 두루스는 [적기]에서 [프롤레타리아 ]연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그녀는 클링거의 영향을 받고서 졸라,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아르노 홀츠, 율리우스 하르트 등의 문학에서 접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참한 삶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에서 벗어나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빈곤한 삶을 더 가까이에서 더 강하게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기에 이르렀다. 이것과 나란히 기법도 무른 동판화에서 시작하여 석판화를 거쳐 가장 거친 목판화에 이르렀다. ”

콜비츠는 이 작품에 대해 “이 판화들은 나쁘지는 않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작품들만큼 내게 절실한 작품은 아니었다. 다만 작업하는 시간이 즐거웠기 때문에 손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고 말하고 있다.

이 [프롤레타리아] 연작은 1945년 이후의 동독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먼저, <실업>을 살펴보면 원근효과로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두번째 작품 <기아>는 열다섯 번이나 구도를 바꾸면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 작품으로 안타깝게 그림을 구할 수 없다. <빈의 굶주리는 어린이들을 위하여>라는 작품에서도 다룬 주제로 보다 간결하고 추상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하였는데 채찍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탁월하게 형상화 한 작품이다. <자식의 죽음>에서는 자전적인 작품이지만 자신의 특수한 사항을 전혀 그리지 않은 채 본질적인 내용만을 표현하였다.
*[실업/ 목판/ 1926]

*[자식의 죽음/ 목판/ 1925]

이상으로 [농민전쟁], [짐플리시시무스], [전쟁], [프롤레타리아] 연작을 살펴보았다. 콜비츠의 작품의 힘은 주제를 포착하여 한 화면으로 구성해내는 구성력이 대단하다. 더 이상 그 주제로서는 다른 구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히 포착해 낸다. 또한 감정전달이 그대로 옮겨오는 놀라운 힘을 작품에 새겨 넣는다. 아이의 눈을 통해 엄마의 몸짓을 통해, 농민의 육중한 다리와 어깨에서 그대로 전해진다. 역시 탁월한 예술작품이며, 노동자계급의 예술에서 가장 빛나는 전형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케테 콜비츠 작품을 능가하는 노동자계급의 예술을 본 적이 없다. 또한 지배계급예술과 견주어서도 절대적으로 월등한 예술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을 감상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케테콜비츠 마지막 글로 [죽음]연작과 플랑카드, 포스터 등 사회ㆍ정치적인 그림들과 일상적인 그림들, 그리고 자화상과 그의 예술세계와 영향에 대하여 다룬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 콜비츠 1

 
    칼럼 > 칼럼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 콜비츠 1
케테 콜비츠: 독일 여류화가(1867-1945년)
참세상뉴스 chamnews@jinbo.net
*<봉기/동판/1899>

지난 글에서는 예술이 노동의 산물임과 함께 예술의 계급성을 다루면서 노동자계급의 예술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노동자계급의식과 노동자계급예술이 최초로 발생한 독일의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계급성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는지, 작가의 사상은 어떻게 작품 속에 표현되는지, 시대와 정치적 상황들이 어떻게 작가와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볼 것이다.

케테 콜비츠라는 위대한 예술가의 삶과 사상, 작품을 풍부하게 이해하고, 그의 공헌과 한계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은 노동자문화운동에 큰 자산으로 남지 않을까 한다.

*왼쪽. <1930년대 초의 케테 콜비츠> / *오른쪽. <팔을 고인 자화상/1920>

이 글이 그것을 위한 단초라도 되었으면 한다. 또한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내용과 형식 두 측면 모두에서 노동자계급의 예술을 완벽하게 현실화한 케테 콜비츠의 위대한 예술세계를 만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에게 글을 짧고 쉽게 쓰라고 권유받았다. 그러나, 워낙 위대한 예술가를 알려내는 작업이기에 단지 개인의 소감을 간단히 밝히고 말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케테 콜비츠 작가의 시대적, 역사적, 정치적 배경뿐만이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의 시대적, 역사적, 정치적 배경들을 알릴 필요가 있기에 부득이하게 이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할 생각이다. 글이 조금 길더라도 이해를 바라며, 진지한 검토를 부탁한다.

첫 번째 글에서는 서문 <낯선, 그러나 너무 친근한 케테 콜비츠>와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미술사적 배경을 다루는 <사회주의 운동의 기운을 받으며 성장한 사회주의자 케테 콜비츠>, 콜비츠의 청년시절에서 노년 시절에 이르는 사상적인 흐름을 살피는 <자신에게 엄격했고 당당했던 케테 콜비츠>, 그리고 본격적인 작품해설을 시작하여 판화 연작 <직조공들의 봉기>를 다룰 것이다.

두 번째 글에서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의 악랄한 지주계급에 맞선 농민들의 반란을 다룬 <농민전쟁> 연작, 시사 주간잡지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한 작품,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슬픔의 반전 메시지를 담은 <전쟁> 연작과 <프롤레타리아> 연작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 글에서는 노년의 <죽음> 연작과 플랭카드, 포스터 등 사회정치적인 그림들과 조가작품,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남긴 자화상과 그의 예술적 영향력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다룰 것이다.

낯선, 그러나 너무 친근한 케테 콜비츠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1 <궁핍/석판/1897>

케테 콜비츠란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특별히 진보적인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전혀 알 수 없는 예술가다. 자본가계급에게는 해로운 사람으로 당연히 제도 교육에서는, 제도권 예술계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케테 콜비츠는 그만큼 우리에게 낯설다. 하지만 그를 알게 되면 그가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케테 콜비츠의 그림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계급의식을 일깨워주고 예술적 체험을 주는 감동적인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이미 나는 그를 만났다. 과거 운동이 활발하던 때에는 미술운동도 역시 민중운동의 한 세력으로 명실공히 자리하고 있었다. 민예총(민족민주예술인총연합), 민미협(미술), 민음협(음악) 등등 문화운동이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벽화, 걸개, 판화 등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온 거리와 학교, 공장, 농촌에 그려지고 집회의 필수품이었던 때였다. 지금은 무용담이 되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지금의 문화운동에 복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때를 꿈꾸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제 문화운동이라고는 노래와 비디오 운동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때, 케테콜비츠를 대하는 나는 상당히 진지하였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를 만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하기도 하고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격동하는 시대에 진지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그는 나를 너무 부끄럽게도 했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10여년 전의 그에 대한 미천한 이해를 조금은 더 깊이 있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10년, 20년, 30년이 지난 후에야 그를 보다 올곧게, 보다 충분히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2 <죽음/석판/1897>


케테 콜비츠의 삶과 예술을 접하면서 역시 예술은 계급성을 표현하며, 인간의 삶과 사상을 표현하며, 모든 것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명제를 다시 느낄 수가 있었다. 또한 예술이란 인간 개인이 새로운 인식을 통해 의식을 발전시킨 결과물이기 때문에 산고의 작업임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과 노동자계급에게 겸허하고 한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케테 콜비츠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케테 콜비츠는 젊은시절과 중년까지 사회주의자로 <게르미날>(1893), <직조공들의 봉기>(1893-1898) 연작, <농민전쟁>(1903-1908) 연작, 시사주간지 '짐플리시시무스'(1907-1909)에 사회비판적인 판화를 기고 하는 등의 왕성한 판화작품 활동을 한다.

하지만 노년에는 자신의 나약한 사상적 한계에 고뇌하며 여전히 심정적으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자신이 평화주의자인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케테 콜비츠는 50대, 60대이던 1920, 30년대에도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1919), <러시아를 도우라!>(1921), <선동가>(1926), <프롤레타리아> 연작(1925)처럼 간단히 평화주의라고 치부할 수 없는 귀중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케테 콜비츠는 그림으로써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을 불어넣어 준, 위대한 노동자계급의 예술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설사 케테 콜비츠 자신이 사상적 동요를 부끄러워하며 노동자계급 예술가라는 영예를 거부한다 해도 역사는 기꺼이 그에게 그런 영예를 부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3 <음모/석판/1898>


사회주의 운동의 기운을 받으며 성장한 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는 1867년 7월 8일 독일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 운동이 비스마르크와 어린 황제에 맞서 가열차게 투쟁을 하고 있던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는 복음주의와 종교의 권위를 거부하고 합리주의와 윤리를 강조하는 자유 신앙운동을 하였고, 아버지 칼 슈미트 또한 자유주의적 사상을 지닌 사람으로 세속적인 성공이 보장되는 법관생활을 그만두고 미장이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라는 예술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회주의 사상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콜비츠는 아우구스트 베벨, 마르크스주의자인 오빠 콘라트 슈미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영향을 받는다.

케테 콜비츠가 살았던 19세기 후반부와 20세기 전반부는 정치, 사회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일대 변혁의 시대였다. 18세기 말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은 혁명과 반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1905년 러시아혁명, 1914-1919년 1차 세계대전, 1917년 2월과 10월의 러시아 혁명, 1918-1923년의 독일혁명, 1933년의 히틀러 집권과 1939-1945년 2차 세계대전 등 굵직한 사건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독일은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과 세계에서 중요한 나라였다. 독일에서 파시즘이 집권하여 야만으로 가느냐 변혁으로 가느냐는 그 시대의 관건이었다.

미술사조에서는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에 이어 혁명과정에서 생겨난 19세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인상주의, 모더니즘이 등장하였고, 세잔느를 이어 브라크와 피카소가 큐비즘을 구축하였다. 또한 표현주의, 야수파,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래파 등 20세기 전반기에 다양한 미술사조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 당시 고흐, 고갱, 뭉크, 클레, 마네, 모네, 샤갈, 꾸르베, 마티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과 그에 영향받은 유럽과 세계 노동자투쟁의 분출은 미술에서도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요구했고, 리얼리즘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이런 속에서 케테 콜비츠는 1885-86년에 베를린의 여자예술학교에서 슈타우퍼 베른의 가르침을 받고, 맑스 클링거의 판화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권유받는다. 1888-89년에는 뮌헨의 여자 예술학교에서 루드비히 헤르테리히에게 회화를 배우게 된다.

1891년에는 칼 콜비츠와 결혼한 다음 북부 베를린으로 옮겨와서 의사인 칼 콜비츠가 일하는 의료보험조합의 무료진료소에서 하층민의 고통과 불행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케테 콜비츠는 노동자계급의 세계가 아름답다고 느끼던 낭만적이고 연민에 어린 시선에서 "노동자들의 결혼생활은 남편과 아내가 모두 건강할 때라야 유지될 수 있다. 그녀가 일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노동자들의 세계는 부르주아의 그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세계이다. 그곳은 전혀 다른 가치척도가 지배한다"고 여기게 된다.
남편 칼은 케테 콜비츠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칼과 케테는 사상과 현실의 동반자로서 서로간에 사랑과 존경, 신뢰로 살아간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4 <직조공들의 행진/ 동판/1897>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당당했던 케테 콜비츠

콜비츠는 당파를 취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한때는 혁명론자였다. 어린 시절과 소녀 시절에는 혁명과 바리케이드를 꿈꾸었다. 지금 내가 젊다면 틀림없이 공산주의자였을 텐데. 아직도 그 꿈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지만 내 나이가 벌써 50대다. 그리고 전쟁을 겪었고 페터와 마찬가지로 수천의 젊은이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면서 자신은 사회주의는 원하지만 "나는 평화주의자임을 한 번도 고백하지 못한 채 그 주변에서 동요하고 있다"고 1920년 10월의 일기에서 솔직하게 밝힌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예술가로 간주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페테르스부르크 거리에 전시된 내 작품을 보고서 나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내가 확고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 같은 여류 예술가가 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똑바로 제 갈 길을 찾아가길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감동을 느끼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리프크네히트의 정치노선을 추종하지는 않지만, 리프크네히트를 애도하는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또 그 그림을 노동자들에게 증정할 권리가 있다." 케테 콜비츠는 자신에게 엄격하였고 진지하였으며, 당당하였다.

케테 콜비츠의 사상적 흐름을 변증법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항상 노동자계급의 편에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며 진정으로 그들과 함께 편하게 살기를 갈구하였지만 현실의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등 감당하기 힘든 현실들이 케테 콜비츠를 체념하게 했다. 특히 아들의 죽음은 오랫동안 깊은 영향을 미쳤다. 콜비츠는 자신이 살아온 사회적조건과 인생역경 속에서 많이 힘들었고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 조건을 뛰어넘어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처럼 혁명 예술가로 굳세게 진군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과학적인 이론을 체득하여 노동자계급의 힘과 노동해방을 이해하지 못한 케테 콜비츠의 한계라고 본다. 투쟁을 하면 희생이 따르고, 그 희생은 인간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희생에 따른 고통을 이겨내고 계속 투쟁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할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 그리고 투쟁을 해도 패배만 하고 승리가 멀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럴 때에도 과학적인 이론으로 노동자계급의 힘을 믿고 노동해방을 추구하며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케테 콜비츠에겐 희생과 패배에 따른 고통을 능히 이겨낼 만한 이론과 전망, 당파가 없었다. 또한 당시 케테 콜비츠의 한계는 영웅적으로 싸웠지만 번번이 패배했던 독일 노동계급 운동의 한계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에게 영감과 힘을 주는 위대한 예술을 창조해낸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시대는 달라도 여전히 케테콜비츠의 고뇌를 함께하는 노동자, 예술가들이 많이 있음을 전하면서 위로를 대신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5 <폭동/동판/1897>

직조공들의 봉기

케테 콜비츠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직조공들의 봉기]가 있다.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은 독일 실레지엔 지방의 직조공들의 봉기다. 1840년대에 산업혁명이 유럽을 휩쓸었다.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직조 기계들은 집에서 손으로 직물을 짜던 직조공들의 생활조건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직조 기계는 손으로 작업하던 직조공들보다 훨씬 싼 값에 제품을 내놓았고, 이윤을 많이 챙기려던 중개인들은 손으로 만든 제품을 보다 싼 값에 사들여 직조공들의 수입을 최저 생계비 이하로 떨어뜨렸다. 1844년에 최초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슐레지엔 직조공의 봉기였다. 이 내용을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이 희곡으로 만들었다. 1893년 2월 28일 이 [직조공들]이라는 희곡을 보고 난 후 그 감동으로 제작한 것이 케테 콜비츠의 [직조공 봉기]이다. 그리고 이 봉기를 다룬 노래로 '실레지엔의 직조공'이 있으며, 이 노래는 '최초의 노동자계급의 예술'이란 평가도 받는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서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이하 생략)

1844년 하우프트만의 [직조공들]은 단지 무대 위의 희극이 아니라 그 당시의 혁명적 투쟁을 예고하는 살아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져 황제 빌헬름 2세는 극장의 궁정특별석을 해약하고, 드디어는 1890년 "사회민주주의자들이란 하나같이 제국과 조국에 해를 끼치는 인사들이다"고 담화문까지 내렸다. 케테 콜비츠가 [직조공 봉기] 연작을 끝낼 무렵인 1897년에는 파업주동자들에 대한 징역형 선고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1896년 하우프트만에게 쉴러상이 추천되었을 때 빌헬름 2세는 승인도 거부하였다.

콜비츠의 이 판화가 1898년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을 때는 상당한 충격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심사위원회는 콜비츠에게 금상을 추천했으나 빌헬름 2세는 그것도 거부했다. 이 때 빌헬름 2세는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예술을 모두 "시궁창 예술"이라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콜비츠의 판화는 1899년 드레스덴에서 전시되었을 때 금상을 수상했으며, 1900년 런던에서도 상을 받았다. 이 [직조공들의 봉기]로 케테 콜비츠는 판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6 <결말/동판/1897>


[직조공들의 봉기]는 <궁핍>, <죽음>, <음모>, <직조공의 행진>, <폭동>, <결말>의 6부작으로 석판과 동판으로 만들었다. 그는 먼저 시작한 [게르미날] 연작을 버려두고 [직조공들의 봉기]에 몰두했다.

이 연작은 1893년부터 1898년에 걸쳐 완성됐다. 하우프트만의 희곡과 달리 콜비츠의 [직조공들의 봉기]에서는 작품 속 그 어디에도 억압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직조공들의 실존과 삶, 투쟁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계급투쟁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고, 당시의 자본가의 악랄함과 직조공들의 분노를 처절히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여성에 대한 당시의 저급한 봉건적 사고와 편견에 맞서 여성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다 하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콜비츠의 사회주의적 여성관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케테 콜비츠가 상당히 아끼던 작품이었던 것 같다. 1921년의 한 일기에서 이 작품에 대해 "나의 [직조공들]"이란 표현을 한다. 또한 이 작품은 가장 민중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평가된다.

<게르미날>의 한 장면/동판/1893>

다음은 이 글을 이어 케테콜비츠의 작품해설로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의 악랄한 지주계급에 맞선 농민들의 반란을 다룬 <농민전쟁> 연작, 시사 주간잡지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한 작품,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슬픔의 반전 메시지를 담은 <전쟁> 연작과 <프롤레타리아> 연작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 글에서는 노년의 <죽음> 연작과 플랭카드, 포스터 등 사회정치적인 그림들과 일상의 그림들,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남긴 자화상과 그의 예술세계와 예술적 영향력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다룰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quot;여성 배려 기업에 '평등 인증' 마크&quot;

 
    뉴스 > 전체기사
"여성 배려 기업에 '평등 인증' 마크"
벨트라우트 다스 독일 성평등사업국장
한국보육교사회 kdta@chollian.net
"여성이 가정과 직장생활을 양립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독일 정부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입니다."

지난 3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평등한 일.출산.양육을 위한 국제포럼'에 참가한 벨트라우트 다스(사진). 독일연방 정부의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의 국제 성평등사업국장인 그는 독일의 후진적 여성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육시설을 늘리는 게 필수"라고 말문을 열었다.

독일에서 3세 미만의 아이들과 초등학생을 맡아줄 보육시설은 4%에도 못 미치고 있다.

이 같은 문제가 취업을 갈망하는 여성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판단한 독일 정부는 2005년부터 3세 이하의 어린이 보육시설을 위해 연간 15억유로(약 1조9천억원)를 지원키로 했다. 또 취학아동의 방과후 교실을 위해서도 연간 40억유로(5조원가량)를 쏟아붓기로 했다고.

기업이 가정과 직장의 양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지원 정책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독일도 마찬가지. 긴급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독일 정부는 지난 2001년 7월 정부와 주요 기업 간의 협약을 통해 고위직에 사내 보육을 제공하고 노동 시간도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또한 독일 정부가 지원하는 '평등마크제'와 '가정과 직장 감사제'는 기업에 이익이 되면서 여성들의 취업을 돕는 주요 정책이다.

다스는 평등마크제가 "임금과 재교육.특별 상여금 등을 남녀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하고 여성을 적절하게 배치해 업무능력을 키우는 기업에 평등마크를 주는 제도"라고 소개했다.

루프트한자.독일은행.바이에른 등 독일의 주요기업들이 평등 마크를 획득했다.

'가족과 직장 감사제'는 근로자가 노동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지, 재택 근무 등 노동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지 등을 독립된 감사기구가 모니터하는 제도다. 또 가족이 있는 사원에 대한 회사의 재정적 지원, 보육시설 등도 점검한다.

이 같은 감사를 받는 데 걸리는 시간은 3~4개월. 감사를 통과한 기업은 '기초감사인증서'를 받는다. 인증서를 받는다 해도 직접적으로 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럽 전체에서 인쇄물 등에 이 마크를 광고함으로써 좋은 기업이란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 이익을 볼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2003.09.08 09:42 입력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뉴스 > 전체기사
제도좌파정당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란
- 독일과 영국의 최근 사례를 중심으로
노동자의 힘/이명재 
오늘날 서구의 사민당이나 노동당이 더 이상 노동자계급의 당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대중적 차원의 정치적 심판은 대안부재 속에서 지연되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기반이 되고 있다. 이는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뚜렷이 드러난 바 있다.

그러나 냉전체제의 종식과 사민주의의 우경화 또는 신자유주의로의 포섭으로 창출된 정치적 공백은 새로운 노동자계급정치에 의해 채워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비록 사민주의가 사실상 정치적 소멸의 길에 들어섰음에도, 그들의 강고한 제도적·조직적 기반은 아직 붕괴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사민주의 제도정치의 해체과정은 긴 역사적 과정이겠지만, 이 균열과 해체현상은 새로운 계급정치의 주체들의 노력에 의해서 가속화될 수도 있다. 특히 최근 4∼5년간 반세계화운동과 국제반전운동, 노동운동의 전투성 회복 움직임 등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계급적 역학의 역동성과는 대조적으로 제도정치 또는 선거정치에서의 새로운 세력재편은 주체형성의 지연으로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영국과 독일에서 사민주의의 조직적 기반인 노동조합운동에서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최근의 노동자투쟁에 힘입은 바 크며, 사민주의의 지도부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란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커다란 변화를 알리는 시작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 신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한다!

최근 영국 노동당과 노동조합간의 전통적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논란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을 지지했던 노동조합들이 노동당에 맞서고 있다. 특히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제3의 길'이란 포장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대처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점은 이미 대중적으로 폭로되었다.

지난 6월 17일에 열린 특별대의원 대회에서 소방관노조(FBU, Firefighter Brigade Union)는 35,205표 대 14,611표의 압도적 비율로 노동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지도부의 타협안, 즉 노동당에 대한 정치 지원금을 5만 파운드에서 2만 파운드로 삭감하자는 수정안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노동당과의 관계를 청산한 결정이었다.

지난 2002∼03년에 걸친 소방관 파업에서 블레어 정부의 반노동자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좌파 지도부에 대한 조합원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번 결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 조합원들은 지난 파업의 성과가 미흡하다는 인식 하에서, 재파업에 들어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올해 2월 7일에는 전통적 노조 중의 하나인 철도항만운수노조(RMT, Railway, Maritaime, and Transportation Union)가 노동당에서 축출당했다. 이는 작년 RMT의 스코틀랜드 지부가 스코틀랜드 노동당(SLP)을 탈당하고, 새로운 통합좌파 정당인 스코틀랜드 사회주의당(SSP) 지지를 선언하였고, 지도부가 이를 승인하자 철도노조 자체를 당에서 축출한 것이다. 이에 대해 위원장 봅 크로우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노동당은 필요 없다"며 반박했다.

또한 최근 통신노조(CWU)는 국영우체국인 로열 메일의 민영화에 대한 정부의 태도 여하에 따라 30만 파운드의 정치자금의 지불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볼 때, 2002년부터 본격화되고 있는 영국의 노동자투쟁은 신노동당 블레어 정부에 대한 정치투쟁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이는 낮은 수준에서 노동당에 대한 정치헌금 문제에서 FBU, RMT의 경우와 같이 노동당과의 관계 청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영국노총(TUC) 내에서 좌파블록의 등장과 전투적 좌파지도부의 확산, 다양한 형태와 수준의 파업 등 영국 노동자계급운동의 변화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1980∼90년대 대처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이은, 블레어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계급적 저항이 이와 같은 내적 변화와 맞물려, 과연 노동당을 포함한 영국 노동자계급운동 자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신노동당과 노조의 분열은 새로운 정치지형으로 나아가는 신호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독일 : 사민당에 대한 좌파적 대안이 필요하다!

사민당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슈뢰더식 제3의 길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과 분노는 상대적으로 운동후진국이었던 독일에서도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작년 11월과 올해 4월 각각 10만명과 50만명이 나선 전국적 반슈뢰더 투쟁은 새로운 변화의 길잡이였다. 이와 같은 대규모 대중투쟁은 사회운동과 좌파를 중심으로 '선거대안 2006'(WA2006)이라는 연대체를 출범시켰다.

슈뢰더의 '아겐다 2010'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해체전략에 다름 아니며, 이에 대한 대중적 반란 속에서 사민당의 정치적 위기는 시작되었다. 지난 유럽의회 선거는 사민당에게 사상 최악의 패배를 가져다 주었고, 이 위기의식은 지도부에 저항하는 노조 지도자 4인의 숙청으로 드러났다. 이들과 사민당에서 탈당한 노조지도자 2명 등 사민당 탈당파 6인은 '노동과 사회정의'(ASG)라는 캠페인 그룹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 양 그룹이 지난 6월 20일 베를린에서 전국모임을 갖고, 새로운 연대체인 '선거대안 노동과 사회정의'(Wahlalternativ Arbiet und sozial Gerechtigkeit)를 출범시켰다. 이날 모임에는 아니 하이케, 토마스 헨델, 클라우스 에른스트 등 반슈뢰더 노조그룹(ASG), 사민당, 녹색당, 민사당 탈당그룹, 다양한 좌파정당, 금융과세연합(ATTAC)을 포함한 사회운동단체, 반제·반파쇼 청년단체 등에서 온 70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석하였다.

이 날 모임에서는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과 반슈뢰더 정서의 공유가 이루어졌으며, 선거참여를 둘러싸고는 시기 상조론의 신중론과 2006년 총선 참여론이 맞섰다. 아직은 초동단계여서 많은 부분에서 모호한 점이 존재하지만, 당 건설의 문제는 10월 또는 11월의 전국총회에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현재 가동할 수 있는 70여 개 지역조직을 결성하고, 정강문서 작성팀을 구성하여 토론용 문서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최근 좌파성향의 TV잡지인 <파노라마>의 여론조사 결과이다. 전체적으로, 사민당 22%, 기민련 45%, 녹색당 12%, 자민당 8%, 민사당 6% 등의 결과가 가온 가운데, 응답자의 6%가 새로운 좌파정당에 투표할 것이라고 응답했고, 32%의 응답자는 지지를 고려하겠다고 답했다.

최근의 이런 좌파적 흐름은 사민당에 대한 노동자계급 대안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넘어 조직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민당, 민사당, 녹색당 등 제도좌파의 집권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역설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좌파운동은 한국의 노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사민주의의 사실상 해체의 시작과 새로운 계급정치

독일 사민당과 영국 노동당에 대한 노골적인 반란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물론 아직은 새로운 계급정치의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반란은 이미 드러난 사민주의의 정치적 사망에서 조직적인 사망으로의 이행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며,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추세이다.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은 노동조합운동이다. 현재의 반란은 노동조합 또는 그 내부의 좌파지도부들이 주도하고 있지만, 문제는 이런 위로부터의 반란이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과 충분히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흐름이 제도좌파의 역사적 오류를 다시 반복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현시기 일국적 계급투쟁, 반세계화투쟁과 반전투쟁 등 대중투쟁의 정치적 성과가 제도정치 내로 수렴되거나 실종된 채, 외부로부터의 압력으로 끝나는 한계를 넘기 위해, 이 대중운동은 전술적으로 제도정치로 진입해야 하지만, 전략적으로는 제도정치의 해체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이 과정은 사민주의의 조직적 해체를 뛰어넘어, 21세기의 새로운 계급정치를 창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월급 50만 원 일자리 170만 개 만든 독일 ‘아젠다 2010’

 
    뉴스 > 전체기사
월급 50만 원 일자리 170만 개 만든 독일 ‘아젠다 2010’
노무현 대통령이 벤치마킹 하려는 독일, 일본의 ‘신자유주의 개혁’ (1)
윤태곤 기자 peyo@jinbo.net
노무현 대통령이 과감한 승부수로 상찬한 ‘아젠다 2010’, ‘우정산업민영화’

최근 거듭해 대연정론을 주장한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과 독일의 예를 대연정론의 주요한 논거로 삼아 제시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인즉슨 독일의 경우 슈뢰더 총리가 ‘아젠다 2010’이라는 개혁안에 대해 자신의 자리를 걸고 의회를 해산해 국민들로부터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이고, 일본의 경우 고이즈미 총리가 ‘우정산업 민영화’ 라는 개혁안을 내걸고 역시 의회를 해산해 국민들로부터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자신도 그런 ‘개혁안’을 내걸고 승부수를 띄워 국민들로부터 직접 심판을 받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고 있어 답답하다며 ‘대연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제는 내각제 개헌론까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과감한 개혁 승부수’로 상찬한 독일의 ‘아젠다 2010’과 일본의 ‘우정산업 민영화’는 ‘낡은 국가운영 시스템의 개조’에서 ‘극단적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극단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얼마 안 남은 양국 총선(일본: 9월 11일, 독일: 9월 18일)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에 참세상은 과연 ‘아젠다 2010’과 ‘우정산업민영화’가 무엇인지 또한 각기 자국에서 신세대 정치인으로 불리는 슈뢰더 총리와 고이즈미 총리가 이를 통해 무엇을 노리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젠다 2010’과 ‘우정산업민영화’에 대한 분석은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이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향후 행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젠다 2010’ 으로 50만원짜리 일자리 170만개 창출한 슈뢰더 정권

1998년 집권당시의 슈뢰더
 독일 총리실
사민당 출신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2003년 3월 해고규제완화, 실업급여 삭감, 세금 감면, 소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방대한 분량의 노동·복지 개혁안인 ‘아젠다 2010’을 내놓았다.

독일의 우파 야당인 기민·기사 연합은 같은해 가을 ‘아젠다 2010’에 대한 전폭적 지지의사를 표명했고 이에 따라 ‘하르츠’라는 이름의 ‘노동개혁안’이 순차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2004년 7월에는 실업수당 기간을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고 사회보장금과 실업수당을 통합하는 직업소개소가 제시하는 저임 일자리에 반드시 취업해야 하는 하르츠 IV가 여야 합의로 상원을 통과했다.

2005년 1월부터 시행된 ‘하르츠 IV’ 이전에 독일 실업자들은 24~32개월 동안 직전 급여의 4분의 3 정도를 실업수당으로 받고, 정해진 실업수당 기한까지 취업을 못할 경우 그보다 약간 줄어든 실업지원금을 받아 생활했다. 그러나 '하르츠 IV' 시행 이후 부터는 실업수당은 12~18개월 동안만 지급되고 , 그 기간 이후에는 개인 자산이나 배우자 소득이 없는 실업자에게만 한 달에 331~345유로(한화 약 45만원)의 정액 실업수당이 지급된다.

슈뢰더 정부는 ‘노동복지 축소’라는 채찍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슈뢰더 정부는 2003년 4월부터 ‘1인 기업 창업시 3년간 지원금 제공(1년차: 600유로, 2년차 330유로, 3년차 200유로), 월급여 400유로 이하 작은 일자리 창출시 소득세 감면’이라는 당근을 제시했다. 슈뢰더 정부는 이를 통해 2004년까지 11만개의 1인 기업과 170만개의 작은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1유로의 환율이 대략 1300원 정도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월급 50만원짜리 일자리 170만개를 정부 지원 하에 만든 셈이다.

'혁신과 성장‘구호 아래 성매매 알선하기도 한 독일 정부

아젠다 2010- 혁신과 성장
 독일 연방정부 홈페이지

독일연방정부 공식 홈페이지(www.bundesregierung.de)는 ‘아젠다 2010’의 구호로 ‘혁신과 성장’(INNOVATION UND WACHSTUM)를 제시하고 있다. 실업급여를 줄이는 대신 저임 일자리를 많이 제공함으로써 정부와 기업의 재정 부담을 줄이고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 ‘혁신과 성장’의 주 내용인 셈이다. 김대중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생산적 복지’가 떠오르는 지점이다.

‘월급 50만원짜리 일자리 170만개 창출’이라는 성과에 대해 기민·기사련 같은 우파 야당 뿐 아니라 독일 재계도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이들과 독일정부는 화살을 노조로 돌려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 방위적 압력하에서 독일 금속노조(IG 메탈)와 지멘스는 생산시설을 국외로 옮기지 않는 대신 임금 동결과 주당 노동시간 연장에 합의했고 다임러-크라이슬러, 오펠, 폴크스바겐 같은 대표적 기업들은 일자리 보장과 노동시간 연장이 포함된 임금동결을 맞바꾸는 대열에 합류했다.

이러한 노동복지 축소의 물결 와중에 해외토픽을 장식한 황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005년 1월 독일 연방정부의 직업소개소는 정보기술자 출신의 한 실직여성에게 ‘성매매 일자리’를 소개했고 이 여성이 거절하자 실업급여를 중단하려 한 것이다. 성매매가 합법화된 독일에서 정부가 제시한 일자리를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하면 실업급여를 중단하는 ‘하르츠 IV' 규정에 의해 정부 기관이 ’성매매 알선‘에 까지 나선 이 사건은 ’아젠다 2010‘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속내와 무관하게 ‘아젠다 2010’은 ‘생산적 복지’의 전범으로 각국 정부들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랐고 초국적 금융평가기관들은 독일의 ‘개혁안’을 칭찬하기 바빴다. 2003년 여름까지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던 사민당 정부의 지지율은 2004년 가을에는 30% 대를 돌파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국의 모 신문은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슈뢰더 개혁이 필요하다는 이해가 국민 사이에 확산된 것”이라 평가하며 “슈뢰더가 2006년 재선에 성공할 것”이라는 섣부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대성공 거뒀다는 ‘아젠다 2010’의 이면은

슈뢰더 총리와 기민련 당수 앙겔라 메르켈의 티비 토론
 AP통신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성과’를 거둔 슈뢰더 정부가 의회를 해산하며 조기 총선 실시라는 승부수를 띄운 것일까? ‘아젠다 2010’이 발표된 2003년 당시 독일의 실업률은 9.8%를 기록했다. 그런데 연이은 하르츠와 ‘일자리 창출’에도 불구하고 2005년 3월 독일의 실업률은 무려 12.5%로 급등했다.

이어 5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서 주정부를 구성하는 지방선거가 실시됐다. 독일 서부에 위치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는 루르 탄광을 배후로 하는 전통적 광공업 중심지로 지난 40여년간 사민당이 한 번도 패한적이 없는 사민당의 핵심 지지 지역이다. 독일 남동부의 바이에른주가 기사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정치권의 중심지라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은 정확히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슈뢰더 정부는 바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선거에서 참패해 독일 전역 16개 주 가운데 5개주의 정권밖에 유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9월 18일로 예정된 총선과 관련된 여론조사에서 동독 출신 여성정치인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기사연합은 현재 사민당을 넉넉히 따돌리고 있다. 전통적인 ' 기민VS사민' 대결구도에 새로 등장한 ‘좌파당’(Linke Partei)이 어느 정도 약진하느냐가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기민련등 우파는 슈뢰더의 ‘아젠다 2010’을 그대로 이어 받고 긴축재정등을 통해 강력한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따라서 독일총선은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하고 있는대로 ‘아젠다 2010’이라는 ‘개혁안’이 받아들여지느냐 마느냐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의 정치구도를 오른쪽으로 당겨버린 슈뢰더, 그리고 좌파의 대응

좌파당(Linke Partei)을 이끄는 오스카 라퐁텐
 독일정치전문 사이트 Politikerscreen
결국 슈뢰더의 ‘아젠다 2010’은 실효도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독일 내 ‘좌파VS우파’의 전통적 대립구도를 훨씬 우측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전통적 사민당 지지 계층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어차피 슈뢰더 사민당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사용하는데 그럴 것 같으면 전통적 우파 세력이 신자유주의라도 잘 하지 않겠냐’는 심정으로 지지 정당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거듭 주장하는 ‘대연정’의 향배가 짐작되는 지점이다.

한편 2004년 7월 사민당내 반신자유주의 세력의 일부가 사회당을 탈당해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 그룹을 결성했고 사민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거물 정치인 오스카 라퐁텐이 2005년 5월 이에 합류했다. 이들은 현재 구 동독지역에 주요 근거지를 둔 민주사회당과 ‘좌파당’이라는 선거연합당을 결성해 총선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슈뢰더가 이끄는 사민당의 우경화를 비판하면서 “사민당은 7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오스카 라퐁텐은 “사민당의 ‘아젠다 2010’이 노동자의 복지를 축소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최저 임금과 연금액을 각각 월 1,400유로와 800유로로 올리고 실업보험금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했다. 지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저소득자에 대해 의료비를 면제하고 세금혜택을 주는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벤치마킹 하려는 독일, 일본의 ‘신자유주의 개혁’ 게재 순서
(1)월급 50만원짜리 일자리 170만개 만든 독일의 ‘아젠다 2010’

(2)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
갈현숙(독일 베를린 자유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3)우정사업민영화, 340조엔의 우편저축액은 어디로?

(4)민영화 법안은 폐기되었다
요코 아끼모토 ‘ATTAC 일본’ 사무처장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

 
    뉴스 > 전체기사
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
노무현 대통령이 벤치마킹 하려는 독일, 일본의 ‘신자유주의 개혁’ (2)
갈현숙(독일 베를린 자유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총선을 앞둔 독일과 일본의 신자유주의 개혁, 그 두 번째 순서로 갈현숙의 글을 싣는다.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는 연구자인 갈현숙은 슈뢰더가 의회를 해산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 독일 사회가 50여년간 유지해왔던 '사회시장경제체제'가 위기에 봉착하게 된 원인 그리고 이에 대한 슈뢰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대응을 구체적이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민당 정부가 내놓은 신자유주의적 대안(아젠다 2010)의 허구성과 한계를 지적한 필자는 새로운 좌파 정당(독일 내)의 등장과 유의미성을 인정하면서도 지금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진행할 수 있는 사회정치집단의 복원과 성장에 열정을 쏟아야 할 때"라 지적한다. 아래는 갈현숙의 기고글 전문이다.


연정 파트너 녹색당 무시하고 내각 재신임안 제출한 슈뢰더

9월 18일에 독일 총선이 열린다.
좌:기민당수 앙겔라 메르켈 우: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독일 공영방송 ZDF

지난 8월 24일자 인터넷 한겨레신문의 기사제목 중 <노대통령 '고이즈미, 슈뢰더 부럽다‘>가 눈에 띄어 기사를 읽게 됐다. 기사를 읽으며 슈뢰더의 재신임안 배경에 대해 도대체 남한에 어떻게 소개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기사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노 대통령은 특히 슈뢰더 총리의 재신임 요구에 대해 이 일을 할 수 없으면 앉아 있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정치를 마감하려는 것이고, 또한 정권을 바꿔서라도 이 개혁은 해야 되겠다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강력하게 던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추론한다."고 했다.

이 구절을 번역해서 독일국민들에게 보여주면 몇 사람이나 동조할지 의문이다. 해외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전체적 맥락에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 뽑아내져 국내사정에 맞게 위장되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한 사건을 보는 입장은 다양하지만 입장에 대한 의사표현 이전에 반드시 전제돼야 할 것은 정확한 사건의 경위와 배경에 대한 정보의 공유일 것이다. 물론 의도적인 가감을 감안하고서도 말이다. 적녹(사민당과 녹색당)연정의 재신임안배경에 대해 일어났던 당시 상황을 따져보자. 지난 5월22일 노르트라인-붸스트팔렌 (Nordrhein-Westfalen) 주정부 선거에서 사민당이 참패하면서 16개 주선거에서 다섯 곳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주정부를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에게 넘겨주게 됐다.

더욱이 노르트라인-붸스트팔렌지역은 39년간 사민당이 패배해 본 적 없었던 사민당의 표밭이었다. 한국에 빗댄다면 대구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것과 비슷한 충격일 것이다. 선거결과가 확정되자 수상인 슈뢰더는 연정의 파트너인 녹색당에 묻지도 않은 채 현 내각에 대한 재신임안 요구를 발표했다. 발표 이후 재신임안 의결이 의회에 제출됐고 8월 연방의회의 동의를 거쳐 지난 25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연방의회선거를 9월18일에 시행하게 된다. 여당집권기간이 1년이 남아 있던 시점에 집권여당의 대표가 이런 결정을 한 데는 연방의회내의 과반수이상을 여당 의원이 차지하고 있더라도 지방의회선거결과 구성된 주 의회의 2/3가 야당 의원으로 구성되므로 주 의회가 연방의회의 강력한 비토(Veto)세력으로 자리해 사실상 정권과 연방의회가 그 수행능력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노르트라-붸스트팔렌 주정부선거 전에 사민당의 패배할 경우에 대한 우려의 시나리오가 이미 퍼져있었다. 노대통령은 슈뢰더 수상이 든든한 당의 비호를 받으며 강령한 개혁의지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천명하려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었을지 모르나 사실은 내각과 연방의회를 통해 행사할 수 있었던 영향력이 차츰 주정부선거에서 사민당의 패배가 거듭되며 상실해 오다 결국 손발이 잘린 형국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현 적녹연정을 이러한 사면초가의 상태로 몰아넣은 것일까? 그것은 적녹연정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독일의 사회보장제도와 노동시장을 대폭 개혁하기위해 고안된 "아젠다 2010(Agenda 2010: 독일어로는 아겐다 2010 이라 부른다)" 때문일 것이다.

기여금 원칙으로 유지해온 독일의 '사회시장경제 체제‘ 위기 봉착

독일 금속노동자들
 독일 공영방송 ZDF
독일은 2차 대전 후 사회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체제로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왔다. 시장경제시스템에 ‘사회’란 개념을 적용해서 경제뿐 아니라 ‘모두를 위한 복지’ 역시도 국가의 중요한 책임으로 설정해 발전시켜온 것이다. 50년대부터 포디즘적 생산관계를 토대로 경제 부흥과 완전고용이 가능케 됐고 이러한 완전 고용을 기반으로 사회보장제도의 기본 골격을 한 노동자와 그의 가족에 대한 의료보험, 연금, 실업보험 등의 각각 사회보장재원을 자본가와 노동자가 반반씩 부담하는 형태의 기여금원칙을 근간으로 삼았다. 이에 정부는 이를 법적으로 관장 및 관리하고 일부의 기여금을 담당하는 역할을 해왔다.

바로 이점이 북유럽 복지국가와 다른 점인데 북유럽의 경우 세금을 통한 재원의 재분배 형태라면 독일의 경우 기여금 원칙을 기반으로 한 사회보험의 형태이므로 상하 간 재원 재분배 정도는 북유럽에 비해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통일 후 막대하게 투입된 통일비용에도 불구하고 비용만큼의 효율성을 창출하지 못한 구동독 재건프로젝트의 한계와 지구적 차원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시스템이 이 시기 더욱 강하게 작동되면서 독일의 복지국가 시스템에 이전보다 강력하게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복지국가의 위기는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경제위기의 국면마다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이 입만 열면 떠들어 대는 독일의 생산력과 생산 입지의 비경쟁성과 관련 됐다기 보다는 현재의 기여금원칙에 입각한 사회보험시스템은 완전고용을 전제로 했을 때 그리고 중심부,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 간의 축적구조와 생산관계가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 전지구적으로 작동하기 이전의 조건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던 조건과의 비교에서 원인이 발견될 수 있다. 완전고용을 전제로 한 기여금 원칙은 고실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예전의 모습으로 유지하기 어려울뿐더러 현재 실업의 문제는 노동의 유연화정책으로 출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지난 1998년 16년 만에 정권교체가 되면서 사민당과 녹색당이 정부여당이 됐고 2002년 재집권에 성공해서 집권 2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독일 사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실업문제다. 독일의 실업률은 연평균 정권 교체기였던 98년 9.4%에서 다소 감소추세를 보이다가 집권 2기째였던 2003년 9.8%상승하더니 2005년 3월12.5%까지 상승했다가 7월 11.5%로 다소 떨어진 상황이다. 열 명 중 한 사람이 실업자란 이야기고 구동독지역의 실업률은 구서독지역의 1.5배에서 2배를 상회한다. 실업자가 발생하면 일단 기여금을 통한 사회보장재정의 수입이 줄어드는 반면 실업보험과 생활보호지원금이 지출 돼야 하는 이중적 재정고가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이 통일 후 가속화 되었고 좀처럼 실업률은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실업의 원인을 복지국가시스템과 강력한 노조 때문이라고 선전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와 크게 다르지 않는 노선을 적녹연정이 걷기 시작한 점이다. 집권 2기째인 2003년 3월 14일 연방의회에서 슈뢰더 총리의 "Agenda 2010"에 대한 기조연설을 시발로 같은 해 9월 기민/기사연합의 대폭적 지지로 통과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초기 Deutschland bewegt sich ‘독일이 움직인다’ 란 구호에서 ‘혁신과 성장’으로 변했다 (http://www.bundesregierung.de/Themen-A-Z/-,9757/Agenda-2010.htm). 독일이 움직여 혁신과 성장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일 게다. 그러나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어떤 내용의 혁신과 성장인지에 대한 사민당의 당성에 맞는 고민의 흔적도 내용도 찾기 힘들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의 유권자들은 기민당과 사민당의 차이를 어디서 찾아야하는지 상당히 혼란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해야만 한다면 보수당인 기민당이 하는게 낫지 않겠냐는 푸념도 있었다.

사민당 신중간 노선이 내놓은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안, ‘아젠다 2010’

아젠다2010 과 하르츠를 반대하는 집회
 독일인디미디어 de.indymedia.org
노대통령이 부러워했던 그 개혁의지란 것은 바로 슈뢰더와 소위 사민당 내부의‘Neue Mitte(신중간)’노선의 신자유주의 경제구조에 맞는 구조개혁의 전면 수용에 대한 개혁의지 였던 것일까? 이러한 개혁을 사민당이 정부여당이 되어 지난 7년간 진행시켜온 것이다. 그럼에도 사민당 평당원들은 그래도 보수당이 앞장서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하는 것보다 낫지 않았겠느냐는 의구심에 가득 찬 질문을 스스로 던지곤 한다. 1869년 8월 8일 노동자 해방을 위해 건설된 사민당이 자본주의 의회정치 구조 안에서 이렇게 ‘진화하고 발전’한 것이다.

‘아젠다 2010’은 경제성장과 높은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의 임금비용 및 사회적 비용의 감소와 이를 위해 노동시장개혁과 복지시스템의 대폭 혁신을 목표로 한다. 경제, 교육, 세금, 노동시장, 의료보험, 연금 등의 분야가 주요 개혁 프로그램의 대상이고 각각의 하위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그중 가장 문제로 꼽히는 것이 의료보험개혁과 노동시장 개혁 그리고 해고조건 완화이다. 독일의 의료보험은 개인기여금도 한국에 비해 높지만(서른이 넘은 학생신분의 여자의 경우 최하로 측정돼 한화로 약 15만원을 매달 의무로 기여해야한다) 병원 방문시 현금을 지불하는 일이 없었고 어떠한 병에 걸려도 추가로 개인이 지출하는 비용이 거의 존재하지 않다가 차츰 현금지불과 추가지불의 요소가 상승하고 있다. 게다가 2004년부터는 일 년을 사분기로 나누어 매 분기별로 10유로를 지불해야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런 변화에 분노를 느낀 독일인들은 이 비용에 대해 의사를 만나기 위한 ’입장료’라는 쓴 소리를 하기도 한다. 즉 ‘건강’만큼은 사적 영역에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예방,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라는 안목에서 공공의 영역 내에서 해결하고자 했던 공공성이 ‘아젠다 2010’을 통해 심각하게 공격 받고 있는 것이다. 건강은 한 사회가 모두를 위해 공적영역에서 서로 책임지고 보호해야하는 기본 철학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로 이전엔 실업자와 생활보호대상자에게 각각 따로 지불된 급여에 대한 재정적 부담을 덜고 노동동기를 유발한다는 미명하에 실업급여와 생활보호금을 장기적으로 하나로 통합하는 개혁이다. 이것이 현재 독일 서민들에게 일명 공공의 적으로 불려지는 ‘하르츠 IV’이다. 이 개혁프로그램이 시작되기 1년 전 실업률 감소를 위해 Minijob(하르츠II)을 정부차원에서 실시했다. 보통 일반 독일노동자가 고용이 되면 노동계약서를 써야하고 이는 해당 노동자의 사회보장보험에 강제적으로 가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Minijob으로 고용된 노동자는 사회보장보험에 가입할 의무도 없으며 해고규정도 유연할뿐더러 임금역시도 최저임금수준이다. 하르츠IV 개혁으로 실업기금을 1년까지 받은 후 생활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 이 생활보조금을 받기 위해선 노동의 의욕을 보여줘야만 한다. 슘페터식의 ‘노동을 위한 복지’를 부활시킨 것이다. 장기실업상태에 놓은 사람들은 생활보조금을 얻기 위해서라도 정부가 ‘창출’해 놓은 Minijob에 등록해서 최저 노동조건과 최저 임금을 감내하며 노동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의아스러운 점은 하르츠IV와 Minijob을 통해서도 실업률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과 실업기금과 생활보조금 지급액수가 감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하르츠IV의 초기 단계에선 이전 시스템에서보다 더 많은 지출이 됐다는 것이다.

기업에게는 혜택을, 민중들에게는 내핍을 강요

'Geiz ist geil'현수막이 붙은 백화점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함부르크 시민들
 독일인디미디어 de.indymedia.org
슈뢰더 정부는 독일경제위기의 타개책으로 한편으론 해외로 도피하는 기업들에게 매력적 생산입지를 제공한다는 명목 하에 기업의 사회보장분당금을 줄이고 이들의 법인세(25%에서 19%로 하향조정-현재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법인세를 책정하고 있다)를 연차적으로 줄이는 한편 노동자의 해고규정을 약화시켜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다른 한편 복지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공공성의 축소와 복지와 노동을 연계시키는 발상의 전환을 제시해서 약 2년 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이들의 위기에 대한 응급처치는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의 위기에 대한 진단에 대해 많은 의구심이 일어날 뿐이다.

실제로 해외로 도피하는 자본이나 생산입지의 장점을 요구하는 기업가들의 요구를 들어줬음에도 그들은 생산 자본에 투자하지 않았고 금융 자본 쪽으로 많은 자본을 빼돌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번 더 많은 유연화와 더 유리한 조건을 앞세운다. 실제로 2002년 통계에 의하면 독일에서 있는 기업들이 기업의 총비용중 직,간접 임금으로 사용되는 부분은 21%에 불과했다. 문제는 기업가가 생산 자본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보다 금융자본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현재의 국면에선 더 많은 편안함과 장점이 유지되고 확장되는데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생산입지를 빌미로 정부와 협상하는 상황에서 국가가 자본의 요구를 어쩔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대세인양 이제까지 비춰졌고 반복되어 왔다.

21세기 초반부터 독일사회를 엄습하고 있는 유령과 공포는 실제로 독일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보다 더 많은 위기가 조장되어 “우리는 더 이상 잘나가지 않고 우리의 연금은 바닥이 났고 우리의 미래는 불안하므로 있을 때 절약해야만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이 절약이데올로기는 한 전자상가의 광고문구로 요약된다. ”Geiz ist geil : 인색함이 끝내주는 거야!“ 케인즈주의 경제학자인 보핑어 교수는 이런 절약과 경제위기조장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국민경제에 악으로 작동해서 내수경기의 침체를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요는 사민당이 정부 여당으로 경제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한 고민의 지점들은 바로 이런 지점들에 있었어야 했다. 노동자와 서민 그리고 빈곤에 처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악화해서 상층부가 유지되는 아래로부터의 분배가 아닌 사회적 형평성과 기회의 평등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기본적인 사민당의 노선이었단 말이다.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과 연합 ’좌파당‘의 출현

좌파당의 쌍두마차 게오르그 기지와 오스카 라퐁텐 포스터 앞을 지나가는 베를린 시민들
 독일 공영방송 ZDF
이런 정부여당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반기를 들며 사회정치세력으로 형성되어 출현한 것이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 Wahlalternative Arbeit & Sozial Gerechtigkeit)"당이다. 선거대안(WASG)당은 2004년 7월 사민당내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불만을 품은 공공노조, 산업금속노조 간부 등이 사민당을 탈당해 그 기반을 만들었다. 이들은 올해 1월 정당으로서 공식출발해서 지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선거에서 2.2%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들을 이루는 구성원들은 신자유주의 공세 이후 현실정당정치 내에서 점점 기반이 축소된 좌파세력의 새로운 공조와 시민사회단체 내에서 정당정치의 좌파세력 복원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중심이다.

이에 1995년 사민당대표를 거쳐 1999년 재무부장관직을 사퇴한 오스카라퐁텐이 5월24일 사민당을 공식적으로 탈퇴하고 노르트라인-붸스트팔렌 주정부선거 이후‘선거대안당’으로 입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 2002년 연방의회선거에서 의회진출에 실패했던 민주사회당(PDS)과 함께 선거연합정당으로 ‘좌파당(Linke Partei)’이란 선거연합당명 아래 두 당이 선거운동에 임하고 있다.

좌파당은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는 당들 중 유일하게‘Agenda 2010’을 반대하고 있고 경제, 재정 그리고 사회정책에서의 기본적 방향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선거 주요전략을 소개한다면 직접민주주의의 강화, 사회적 정의 재고와 구축, 평화, 시민권보호, 국민생활 기초보장(Grundsicherung: 최저임금을 1400유로 선에 맞추고 빈곤문제에 적극 관여 가능한), 교육에 대한 동일한 기회, 형평성 있는 조세제도(꾸준히 증가한 노동자들의 조세율을 하향하는 반면 법인세 및 상위 소득자들에 대한 형평성에 맞는 세율적용), 구동독지역에 대해 서독지역만큼의 개발지원, 극우주의 퇴치 그리고 시장을 위해서가 아닌 인간과 사회의 안전을 위한 유럽연합이 될 수 있도록 합당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http://sozialisten.de/wahlen2005/positionen/index.htm)

이들이 연합정당으로 언론에 소개된 것이 세달 남짓 되지 않는다. 게다가 헌법재판소는 최근까지 이들의 연합선거로 인한 연합후보자들에 대한 합법성을 심사하기도 했다. 초기 이들의 연합을 지켜보며 조사된 설문에선 평균 18%정도의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지지율은 조금씩 주춤하며 하향하고 있는 것으로 매스컴은 보도하고 있다.

7월 중순부터 독일국영방송(ARD)에서 실시하고 있는 여론조사의 결과는 아래와 같다.

의회 그리고 정당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사민당 내부에선 좌파당을 향해 좌파의 분열은 독일을 위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닐 뿐 아니라 연정의 파트너로도 좌파당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다. 한국처럼 선거가 지나면 헤쳐서 다시모여 하는 식의 당 운동과 달리 독일의 정당운동은 백년의 세월동안 보수당, 사민당, 자유당의 큰 성향아래 각각의 정당들이 발전해왔다. 그런 이유로 이번 좌파당의 행보는 이전 독일 정당역사상 볼 수 없었던 새로움이자 그만큼 쉽지 않은 시작이었다. 게다가 동서를 어우르는 최초의 연합정당이기도 하다. 부르주아 선거에서 자본주의 의회정치에서 좌파의 소리를 내고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의회 안 정당들이 노동자와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지 않고 천편일률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은 대세이니 어쩔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조장해 왔고 거기에 사민당역시도 투쟁의 의지보다는 이러한 조류를 함께 형성하고 공고히 해왔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선거 국면에서 ‘더 많은 일자리, 더 적은 세금’이란 선거용 구호로 도시를 도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 생략된 말들, “더 많은 일자리를 위해 노동조건은 더욱 유연화 되어야 하고 해고규정은 약화되어야 하며 기업의 사회보장분담금은 줄여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을지는 확신은 못한다. 왜? 우리는 정치인들이니까“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업을 독일에 묶어 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세율을 낮춰져야 한다. 이것은 모두 국민을 위한 고육지책인 것이다“

이렇게 생략된 말들 밝혀내야 하고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치개혁이 위기를 약화시키지도 해결시키지도 못했던 명백한 결과들에 대해 밝히고 그 책임에 대해 추궁해야 한다. 이미 검증이 나 실효성을 갖지 못하는 정책들이 이름만 둔갑하거나 포장만 새로 해서 끊임없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형태로 재등장하고 있다. ‘개혁’은 새롭게 고친다란 뜻이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도 사민주의자도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 개혁의 내용이 노동자, 시민들의 요구로 채워지기 위해선 다양한 정당이외의 사회정치 집단이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해야한다. 그리고 그 압력은 민중과 시민들로 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다. 아젠다 2010때문에 슈뢰더는 정치적 타격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자본주의 의회정치라도 시민 사회내에서 수용할 수 없는 선이라는 것이 있다. 더불어 의회주의에 너무 익숙한 독일의 시민들은 의회주의 염증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투쟁해야 할 때다. 이러한 시점에서 좌파당은 하나의 가교가 될 수 있으리라본다.

9월 18일 독일은 연방의회선거를 치룬다. 국민 한 사람이 두 표를 행사할 수 있는데 한표는 지역구의 후보자에게 다른 한 표는 정당을 보고 투표한다. 독일 국민의 선택이 어디로 향할지라도 실망할 필요도 기대를 품을 필요도 크게 없다고 본다. 다만 의회정치를 감시하고 견제하며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진행할 수 있는 사회정치집단의 복원과 성장에 열정을 쏟아야 할 적절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노무현 대통령이 벤치마킹 하려는 독일, 일본의 ‘신자유주의 개혁’ 게재 순서
(1)월급 50만원짜리 일자리 170만개 만든 독일의 ‘아젠다 2010’

(2)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
갈현숙(독일 베를린 자유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3)우정사업민영화, 340조엔의 우편저축액은 어디로?

(4)민영화 법안은 폐기되었다
요코 아끼모토 ‘ATTAC 일본’ 사무처장
월급 50만 원 일자리 170만 개 만든 독일 ‘아젠다 201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