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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실종된 인물 선거 사민ㆍ녹색당 신승 "고맙다 홍수야, 미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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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실종된 인물 선거 사민ㆍ녹색당 신승 "고맙다 홍수야, 미국아"
해설│독일총선 결과
클리핑기사 chamnews@jinbo.net
▲ 독일 총선의 진정한 승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왼쪽)와 요슈카 피셔 외무장관이 지난 24일 총선 후 첫 회의를 갖고 기자회견에 임하고 있다.

강정수/베를린 통신원  jskang@web.de
23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밤새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전날 출구조사와 선거개표 방송은 자정 무렵까지 우파 기민/기사연합이 독일 총선에서 원내 제1당이 됐음을 말하고 있었다. 비록 근소한 차이였지만 좀처럼 역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기민/기사연합의 슈토이버 총리후보는 투표 마감시간이 정확히 1시간이 지난 22일 저녁 7시, 환호하는 당원들 앞에서 “선거에서 승리했다”며 기염을 토했다.

얼마 후 조금은 위축된 표정으로 사민당 지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슈뢰더 총리는 “밤은 길다”며 끝까지 개표를 지켜볼 것을 당부했다. 비록 원내 제1당 자리를 기민/기사연합에게 빼앗긴다 해도, 사민당과 녹색당의 전체 지지도가 과반수를 0.1~2% 앞서나가고 있어 ‘적녹연정’의 운명도 긍정적으로 점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에 대한 탁월한 육감을 소지한 것으로 평가받는 슈뢰더 총리가 이번에도 무언가를 감지했었던 걸까?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마감된 개표방송은, 8천8백54표 차이로 사민당이 원내 1당을 사수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은 38.5%라는 공히 동일한 지지율을 얻었지만, 사민당은 의석수에 있어서 3석을 더 확보함으로써 기민/기사연합을 따돌릴 수 있게 됐다.

사민당과 녹색당이 내놓은 선거전술은, 당내 인기스타 슈뢰더 총리와 피셔 외무장관을 전면에 내세우는 ‘인물 중심’ 전략이었다. 이는 ‘정당명부제’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정당 및 정책 대결 선거를 ‘인물 대결’로 바꿔 보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정당 지지율에 따라 사실상 의석이 배분되고, 다수당 대표후보가 총리가 되는 독일 선거제도에서 시도된 최초의 ‘인물선거 전략’은 두 가지 계산 속에서 탄생했다.

먼저 우파 기민/기사연합에서도 가장 우파에 속하는 슈토이버 총리 후보에 대한 광범위한 ‘반슈토이버 정서’가 그 하나다. 또한 초라한 정당 지지도에 비해, 월등히 높은 피셔 장관과 슈뢰더 총리의 대중적 인기가 ‘인물 선거 전략’의 나머지 한 축을 구성했다.

정치인 선호도 조사에서 이 두 명은 지난 4년 줄곧 1, 2위를 유지해 왔고, 슈토이버 후보의 경우 선거 끝나는 날까지 단 한번도 5위권 안으로 진입해 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여기에 독일 기상계측 역사 이래 가장 큰 강수량을 기록했던 지난 8월의 ‘대홍수’는 선거전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번 홍수는 자연 재앙이 아니라 ‘환경 재앙’으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구 동독지역을 강타했던 ‘대홍수’는 ‘환경 문제’가 ‘경제 불안 심리’를 비집고 주요 사회 관심사로 등장하는 호기를 만들어줬다. 무려 3주간 지속된 홍수 기간 동안, 사민 녹색 양당의 지지율은 마침내 바닥을 치고 상승곡선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녹색당 정치인들과 정책들은 갑작스레 방송과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됐다.

8월말에는 선거 양상을 뒤바꿀 수 있는 계기가 ‘외부’로부터 찾아 왔다. 딕 체니 미 부통령이 이라크에 대한 ‘선제 공격’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이에 슈뢰더 총리는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2차 대전의 경험자들이 생존하는 독일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 심리는 빠르게 확산됐고, 냉랭하게 등을 돌렸던 평화주의자들이 사민당과 녹색당 곁으로 돌아왔다.

또한 보수 우익 ‘슈토이버 반대’ 구호가 마침내 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사민당에 대한 지지도가 급상승했다. 투표 1주일 전 마지막으로 조사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사민당이 기민/기사연합을 근소하게 따돌리는 믿기 어려운 역전이 일어났다. 사민당에 대한 지지 호소가 아닌 ‘슈뢰더를 총리로’라는 구호 외에는 특별하게 새로운 선거공약조차 내걸지 않았던 사민당으로 볼 때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무려 8.6%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마의 8%선을 가뿐히 넘긴 녹색당은 창당이래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당을 위협해온 정체성 위기 또한 모면한 것이다. 그러나 ‘피셔를 찍자’를 선거구호로 내세웠던 녹색당의 앞길이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다.

녹색당 주요 정책들은 이미 지난 4년 집권 기간동안 ‘다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뿐더러, 차기 집권기간을 주도해 갈만한 새로운 선거공약도 제시되지 못했다. 사민당과 녹색당의 의석수가 원내 과반수보다 정확히 4석 앞서는 사실도 커다란 질곡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의원 개인행동보다는 ‘규율’이 강조될 것이고, ‘표 단속’은 당내 권위주의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선거 승리를 일궈낸 피셔 장관과 슈뢰더 총리는 자신들에게 보다 집중된 당 권력을 십분 즐기며 제2기 ‘적녹연정’을 맞이하고 있다.
[ 105호] 9.30 ~ 10.6
민주노동당기관지 l진보정치l http://www.kdlp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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