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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도토리 키재기로 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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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도토리 키재기로 귀결
독일 총선, 내각 구성 오리무중인 가운데 좌파당 약진 돋보여
윤태곤 기자 peyo@jinbo.net
기민·기사 원내 1당 차지했으나 사민당에 불과 3석 앞서

국제적 관심을 집중시킨 가운데 지난 18일 실시된 독일 총선의 윤곽이 드러났다. 예상대로 기민·기사 연합(CDU/CSU)이 35.2%의 득표율로 225석을 차지해 1당 자리에 올랐으나 사민당(SPD)과의 의석수는 3석에 불과해 선거전 초기의 기세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또한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 Wahlalternative Arbeit & Sozial Gerechtigkeit)"당과 민사당(PDS)의 연합으로 이번 총선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좌파당(Linke Partei)는 8.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54석을 차지해 녹색당(GRUNE)을 누르며 기염을 토했다.

10월 2일 추가선거가 실시되는 드레스덴 선거구를 제외한 최종 결과는 다음과 같다.
 독일연방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전이 시작될 즈음에는 엥겔라 메르켈의 돌풍과 더불어 기민·기사 연합이 사민당을 20% 이상 앞서가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아젠다 2010 조차 부족하다는 기민·기사연합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고위 당직자들의 인종주의적 발언들이 결국 사민당과의 격차를 끌어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복잡한 연정 구도, 자민당과 녹색당이 캐스팅 보트 뒬 듯

한편 30%대 양당과 10% 미만의 세 당등 5개 정당이 사이좋게 의석을 나눠가짐에 따라 내각 구성을 두고 복잡한 머리싸움이 펼쳐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현재 독일 언론들이 내놓고 있는 경우의 수는 다음과 같다. △기민·기사연합 + 사민당 대연정(447석) △기민·기사연합 + 자민당 + 녹색당 (337석) △사민당 +자민당+녹색당 (334석) △사민당 +좌파당 +녹색당(327석).

위의 네 가지 조합 가운데 일단 두 번째와 세 번째 조합의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자민당의 경우 대체로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의 가운데에서 약간 우측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평가받는 중도우파 정당으로 기민·기사연합, 사민당과 각각 연정을 꾸린 경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양당 어디와도 다 연정이 가능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녹색당의 주요 인사로 슈뢰더 내각에 외무장관으로 참여한 요슈카 피셔는 “우리(녹색당)은 정부에 계속 남아 있기를 바란다”며 “어떤 형태의 연정에 참여할 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총선 직후 내놓았다.

앙겔라 메르켈이나 슈뢰더 양자가 똑같이 상대와의 연정을 없고 자신들이 내각을 주도할 것이라 공언하고 있기 때문에 자민, 녹색당을 끌어들이려는 양자의 경쟁은 치열할 전망이다. 게다가 대연정의 경우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가 내고 슈뢰더의 사민당이 하위파트너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범좌파라는 점에서 사민+좌파+녹색당이 결국 내각을 꾸릴 것이라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좌파당이 내각에 들어가려면 아젠다 2010이 근본적으로 수정되거나 아니면 좌파당이 자신들의 입장을 바꿔야만 하기 때문이다.

좌파당의 총리후보로 나섰던 오스카 라퐁텐이나 기지 전 사민당수, 프란츠 뮌터페링 사민당수등 주요 인사들은 ‘슈뢰더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수차례 분명히 한 바 있고 슈뢰더 역시 어떠한 경우에도 좌파당과의 연정은 없다고 발표한 바 있다.

또한 실리적 측면에서라도 사민당의 신자유주의적 정책노선을 비판하며 54석을 차지해 독일 정치의 한 축으로 선 좌파당이 연정에 참가할 가능성은 낮다는 지적이다.

독일 총선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베를린에서 선전을 자축하고 있는 좌파당 당원들
 Linke Partei홈페이지

한편 예상대로 독일 총선은 유럽전역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급격한 우경화 행보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범진보세력인 사민당 그리고 굳건한 양당구조를 깨고 세를 확산하고 있는 좌파당, 녹색당의 득표율을 합하면 과반이 넘고 기민·기사당 연합과 자민당을 합친 것보다 약 6% 정도 앞섰다.

이런 결과에 대해 프랑스 사회당등 이른바 ‘제3의 길’을 걷는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와 미국독주에 반대하는 독일인의 선택”이라며 아전인수격 해석을 성급하게 내놓고 있지만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민당등 유럽내 전통적인 주요 좌파정당들은 이미 ‘좌파’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잃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오히려 1980년 녹색당의 충격적 등장 이후 25년 만에 다시 거대 정당 구도를 깨뜨리고 의회 내의 비중 있는 급진세력으로 등장한 좌파당의 행보를 눈여겨 볼 만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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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50만 원 일자리 170만 개 만든 독일 ‘아젠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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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독일 선거: 실망성 투표와 계급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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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독일 선거: 실망성 투표와 계급 균열
대연정인가? 신호등 연정인가? 아니면 재선거인가?
정병기 
대연정인가? 신호등 연정인가? 아니면 재선거인가? 지난 18일 치루어진 독일 조기총선 결과를 두고 모두들 연정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양대정당인 사민당과 기민/기사연이 1% 미만의 차이를 두고 득표했고 어떠한 연정 가능성도 어려운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표 1> 참조). 또한 10월 2일에 다시 치루어질 드레스덴 선거에서 사민당이 의석을 추가한다면 기민/기사연과 정확히 동수의 의석을 갖게 되는 기막힌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표 1> 2005년 독일 총선 결과
 http://stat.tagesschau.de/wahlarchiv(검색일: 2005년 9월 19일)

가능한 연정 시나리오는 대연정(기민/기사연, 사민당), 신호등 연정(적황록: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 흑황록 연정(기민/기사연, 자민당, 녹색당), 적적록 연정(사민당, 좌파/민사당, 녹색당)이다. 사실상 연정 교섭에서는 기민/기사연의 메르켈 후보보다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가 더 큰 선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비록 제1당은 아니지만 가능한 연정 조합이 많기 때문이다. 슈뢰더는 제2당의 후보이지만 총리를 연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대연정의 가능성은 양대 정당 모두가 거부하고 있고, 녹색당과 자민당은 환경정책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한 배를 타기 어려우며, 좌파/민사당은 어떠한 형태의 연정 참여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의회가 3회까지 총리를 선출하지 못하게 되면 재선거가 실시될 수도 있다. 현재 독일 정국은 어떠한 것도 분명하지 않다.

양대정당의 실표와 실망성 투표

좌우파 정당연립간의 비김수를 결과한 이 선거 결과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7년 집권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해온 적녹연정은 적지 않은 유권자들을 떠나게 만들었으며, 기민/기사연 또한 정책적 차별성을 보이지 못해 실표를 한 것이다. 유권자들 절반이 투표가 임박해서야 지지 정당을 결정했으며, 약 1/3이 적극적 지지보다 실망에 따른 소극적 투표를 했다.

이러한 현상은 지지표의 이동에서도 명확히 나타났다. 사민당은 4.2%(약 236만표)의 실표를 했는데 사민당을 떠난 표들 중 약 97만표는 좌파/민사당으로, 약 62만표는 기민/기사연으로 갔으며, 약 37만 명의 지지자들은 기권했다. 3.3%(약 146만표) 실표한 기민/기사연은 사민당과 녹색당으로부터는 지지자들을 견인했으나, 64만 명의 기권자를 낳았으며 자민당에게 110만표를 빼앗겼다. 이번 총선은 기권자가 양산되고(투표참여율은 지난 선거보다 약 2% 낮은 77.7%), 표의 이탈이 두드러진 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득표를 제고한 두 정당인 자민당과 좌파/민사당도 실망성 투표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더욱 노골적인 자유시장 정책을 주장한 자민당은 2.4%를 더 얻었으며, 전통 좌파의 기치를 든 좌파/민사당은 4.7%의 득표를 제고했다. 그러나 표의 이동으로 볼 때, 자민당의 득표도 전통적 지지층의 확대라기보다는 사민당과 기민/기사연으로부터 옮겨온 지지자들이 많고, 좌파/민사당의 경우도 실망성 투표의 효과가 51%인 것으로 나타났다.

좌파/민사당의 약진과 계급 균열의 재등장

이번 선거의 승자는 자민당과 좌파/민사당이다. 물론 이 정당들도 실망성 투표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아 득표율 제고가 전적으로 진정한 세력 강화의 결과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지표들의 종사상 지위별 성격을 보면 독일에서도 계급균열의 양상이 다시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표 2> 참조).

기민/기사연이 자영업자와 연금생활자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으며, 자민당은 자영업자들에게서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반면 사민당은 노동자층과 학생 및 연금 생활자로부터 높은 지지율을 획득했으며, 녹색당은 학생과 사무직 및 자영업자 등 인텔리층을 핵심지지층으로 하고 있다. 과거에도 사회계층별 지지가 10% 안팎의 차이를 보였던 점을 감안하면, 기성 네 정당에 대한 지지율 분포가 과거와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확대된 것만은 사실이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좌파/민사당의 지지율 분포이다. 좌파/민사당의 지지율은 압도적으로 실업자와 육체노동자들에 치중되어 있다.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한 좌파/민사당을 선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표 2> 종사상 지위별 투표경향(2005년 총선, %)
 http://stat.tagesschau.de/wahlarchiv(검색일: 2005년 9월 19일)

정책에 따른 투표 경향도 계급균열적 성격을 보여준다(<표 3> 참조). 유권자들이 선택한 투표의 정책적 동기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세정책과 외교안보정책을 제외하면 대동소이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당별로 보면 매우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사민당의 경우 사회정책이 가장 높고 경제정책과 노동시장정책이 유사한 비율을 보였다. 기민/기사연과 자민당을 선택한 유권자들은 경제정책과 노동시장정책을 중요한 이슈로 꼽았는데, 그중 경제정책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반면 녹색당 지지자들은 환경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좌파/민사당 지지자들은 사회정책과 노동시장정책을 중시했다. 특히 좌파/민사당 지지자들의 사회정책에 대한 관심은 다른 어떠한 정당 지지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 60%를 보였다. 녹색당을 제외하면 우익의 자민당과 중도의 기민/기사연 및 사민당 그리고 좌익의 좌파/민주당이라는 구도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표 3> 정당 지지자들의 정책별 지지 동기(%) (* 복수 답변 가능)
 http://stat.tagesschau.de/wahlarchiv/wid246/umfragethemen0.shtml(검색일: 2005년 9월 19일). http://www.tagesschau.de/aktuell/meldungen/0,1185,OID4766402,00.html(검색일: 2005년 9월 19일)

노자 계급 모순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모순이자 근본적인 모순이다. 독일 사회에서 그 모순은 사회복지국가를 통해 완화되었지만, 신자유주의적 공세로 인해 다시금 첨예해지고 있다. 2005년도 독일 총선은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는 만큼 그 희생자도 늘어날 것이며 제도적이든 비제도적이든 새로운 정치세력화가 그들을 결집할 것임을 드러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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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와 절차는 과연 민주주의를 보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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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와 절차는 과연 민주주의를 보장하는가
독일 2005년 총선결과와 남은 과제
갈현숙(베를린자유대) 
지난 18일 벌어졌던 독일총선에 대한 갈현숙의 글을 싣는다. 갈현숙은 이미 “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이라는 글을 참세상에 실어 독일과 한국에서 과감한 사회개혁안으로 포장, 선전되고 있는 아젠다 2010의 속내를 분석한 바 있다. 갈현숙은 이번에도 독일 총선 결과의 의의와 전망에 대한 깊이 있고 생생한 분석을 담은 글을 보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연정론, 선거제도 개편론을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한국에서는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정치제도상 최선의 개선방향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독일 총선을 바라본 갈현숙은 “독일식의 정당제도는 양당제도에 비해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오는 결점들을 채울 수 있는 여러 장치가 있다”고 그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다양성과 가능성을 제도로 풍부하게 할 수 있지만 바로 모두 한 표로 처리된 유권자들의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없다는 점”에 대해 지적한다. 이어 “만약 사민당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경우 이번 선거의 결과를 아젠다 2010개혁을 완수하라는 국민의 뜻으로 오역하고 선전할 것이다”며 “뻔한 거짓말이 너무나 복잡한 민주주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이러한 완성된 절차에 무엇으로 대항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음은 갈현숙의 기고글 전문이다.


총선 결과로 더욱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독일

지난 9월 18일 독일에선 2005년 독일 총선이 치뤄졌다. 선거결과는 이미 국내에도 보도됐지만 연립정부구성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현재 독일의 정계 및 이를 주시하고 있는 국민들의 시선엔 긴장감이 가득하다. 그 이유는 한 정당이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로 선거가 마무리 되면 정당간의 연립을 형성해서 정부여당을 구성하고 수상을 추대하기 때문이다.

2005년 총선이 그 이전의 총선과 구별되는 점은 이전의 경우, 보통 거대 정당 하나와 소수정당 하나와의 조합으로도 정부여당을 구성할 수 있는 의회의석의 과반수 이상이 가능했다. 문제는 이번 선거의 경우, 거대정당(1)+소수정당(1)의 조합으로 50%이상의 지지율을 넘지 못하는데 있다.

<2005년 독일 총선 결과.2005년 9월 19일 현재>


SPD:사민당, CDU/CSU:기민/기사연합, Gr?ne:녹색당, FDP:자민당, Linke.PDS:좌파연합당(WAGS, PDS)
첫번째 그래픽은 2005년 이번 선거에서의 득표율을 표시하고 있고, 두번째 그래픽은 지난 2002년 선거와 비교했을 때 득과 실을 비교한 것이다. 세번째 그래픽은 국회내의 의석수 중 각 정당이 차지하게 되는 의석수를 의미한다.
<출처>http://www.fr-aktuell.de/uebersicht/alle_dossiers/politik_inland/
bundestagswahl_2005/die_wahl/?client=fr&cnt=728803&src=180760

위의 그래픽을 보면 기존의 정부여당이었던 사민당 34,3% 녹색당 8,1%를 합하면 42,4%의 지지율이 보수당인 기민/기사연합 35,1 자민당 9,8으로 합산지지율은 44,9%이다. 즉 적녹연정의 경우도 보수자유진영의 경우도 기존의 연합정당으로만으로는 정부 여당구성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조합 가능한 연정시나리오가 쏟아지고 있다.

독일 총선 결과가 제기한 몇 가지 의미들

연정가능 시나리오들을 살피기 전에 이번 독일총선의 의미를 몇 가지 살펴보자. 우선 위에서도 말했듯이 더 이상 거대 정당-사민, 기민-중심의 정치에서 10%이하 지지율을 받는 정당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정당으로는 좌파연합정당, 녹색당 그리고 자민당이다. 거대 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감소하는 반면 이당들에 대한 지지율 상승이 의미하는 바는 거대 정당의 정치력에 대한 실망감이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당정치의 다각적 발전의 차원에서 이러한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둘째, 슈뢰더의 내각 신임안제출, 의회해산등의 진통을 겪으면서도 사민당은 기대 이상의 득표율을 얻은 점과 그 어느 때보다도 유리한 조건에 있었던 기민/기사연합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한 점이다. 선거 이틀 전 까지만 해도 보통 기민/기사연합의 지지율은 41%를 넘었다. 반면 사민당은 평균 33%를 유지해왔다. 선거 초반기 만해도 사민당은 27%로 출발해서 선거전이 계속 되며 지지율이 꾸준히 상승하기 시작했고 기민/기사연합의 경우 시작도 40%이상에서 출발해서 크게 변화 없이 지지율을 유지해왔으나 이런 선거결과는 충적적인 것이다.

일반 대중의 목소리는 당연히 적녹연정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고 당연히 이번 선거를 통해 그런 불만의 목소리가 현실을 바꿀 계기가 될 듯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거결과를 볼 때 과연 선거전 고양되고 조성됐던 그 불안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고 있다. 또한 선거운동기간 동안 나타난 지지율관련 여론조사에 대한 신빙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에 보인 유권자들의 판단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았다.

‘적녹연정(사민/녹색)도 문제지만 기민/기사연합도 더 문제다‘

기민/기사연합의 양대 지도자
우:기사당의 슈토이버 좌:기민당의 메르켈
 www.tagesanzeiger.ch
아젠다 2010 개혁프로그램으로 인해 적녹연정에 대한 독일국민들의 민심이 떠나있었다. 6-7월의 시기는 기민/기사연합에겐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고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선거 전략을 구사해왔다. 문제는 이들이 구사해 온 선거전략의 기본을 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노선과 역분배적 사회복지 시스템이 그간 정권을 유지해온 적녹연정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들을 야기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을 국민들에게 전해 줬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기민/기사연합이 향후 재무부장관으로 지목하며 등용한 경제학 교수 키르히호프(Kirchhof)가 제안한 세율개혁안이다. 사민당은 소득세의 경우 최고소득자의 경우 42%인 반면 소득에 따라 15%까지 적용한다는 안을 제시한 반면 키르히호프의 경우 소득의 차이와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25%의 소득세를 부과하는 안과 부가가치세의 인상을 묶어 제시했다. 이는 소득의 형평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직접세율이라는 점과 부가가치세 인상을 통한 간접세율의 상승이라는 점에서 소득이 많은 사람들에게만 유리한 세금정책인 것이다.

이러한 키르히호프의 제안이 현실화 될 경우 적녹연정보다 더욱 불합리한 상황이 촉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국민들 사이에서 조성되기 시작했고 적어도 이들 연합이 정권을 잡게 하면 안 된다는 공감이 슈뢰더의 사민당에 회의적이었던 기존의 (사민당)지지자들을 묶어냈다고 볼 수 있다. 사민당 지지자들이 가진 딜레마는 지난 7년간의, 특히 정권 2기 동안의 슈뢰더 정권의 내용대로라면 사민당에 표를 던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기민/기사연합당이 정권을 잡게 둘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선거 전날 유권자들의 인터뷰중 이런 사민당 지지자들의 맘을 가장 잘 반영한 대화가 있었다. “슈뢰더가 계속 총리자리에 있길 원하는가?“ ”그렇다. 그러나 이제까지 처럼은 안 된다.“

미디어나 정치인, 경제인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경제성장을 위해 노동조건은 유연화와 해고조건 완화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분담금의 최대한 축소를 선전해왔다. 마치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오는 경제, 사회적 문제가 기존의 이런 시스템이 원인이 되기 때문이라는 비논리적 덮어씌우기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테두리에서 살아온 독일인들의 입장에선 그들의 연금, 의료, 실업금여 등 생활과 직접 연결되어 공공성을 보장해 오던 제도들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신자유주의’를 내세워 어쩔 수 없는 대세로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선거의 표로서만 그 분노를 표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사민당은 기민/기사연정의 위험한 곡예로 인해 어부지리로 얻은 표도 상당한 것이다.

독일전역에서 고른 지지율 확보한 좌파연합당의 선전

셋째, 좌파연합당과 자민당의 선전이다. 우선 항상 6-7%를 유지해온던 자민당이 9%를 넘겼다는 점에서 현지에서는 자민당을 이번 선거의 최대 승자로 꼽기도 한다. 독일 정당정치상 자유민주당의 당성으로 흡수할 수 있는 지자들의 마지노선이 7%라는 주된 평가에서 나온 이번 선거결과는 실로 놀랍다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추가된 2%이상의 지지율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면 다름 아닌 기민/기사연합당으로부터 이전된 표가 상당하다는 분석이다. 자민당은 우선은 자축의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결국 연정을 형성해갈 파트너 당에서 표를 가져온 꼴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절반의 승리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반면 좌파연합당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좌파연합당은 선거기간 내내 모든 미디어로부터 거의 봉쇄되다시피 해 보도도 잘 되지 않았고 더욱이 여론조사 지지율의 조작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민사당(PDS)의 표밭이었던 구 동독지역 뿐 아니라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당 (WAGS)’이 구서독지역에서의 선전함으로써 독일전역에서 고른 지지율을 획득하게 됐다.

이는 통일 후 처음으로 현재 독일의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해 동서독 모두를 아우르는 정당으로 그 입지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민사당은 그저 동독당이란 이미지에서 벗어나 좌파연합당의 선거운동을 통해 새롭게 자리매김을 해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좌파연합당이 그들이 선거를 위해 연합하며 가장 주요하게 내세웠던 대의인 ‘의회정치 안에서 의회 밖의 소리를 진정으로 담아내는 좌파당’으로 그 역할을 채워가는 것 일게다.

대연정, 신호등연정, 자메이카 연정 모두 쉽지 않은 조합

이제 독일의 각 정당들에게 남은 과제는 어떻게 연합정부를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선거 다음날인 19일 월요일부터 다양한 조합가능성이 고려되고 있다. 우선 거대 연정으로 사민당과 기사/기민 연합이 제시되고 있다. 이 경우 세 당의 당성의 차이를 떠나서도 수상 자리를 슈뢰더가 쉽게 포기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복잡한 조합이다. 현재 다수의 국민들은 독일이 여러 면에서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느끼고 이러한 위기를 거대 정당간의 연정으로 극복해주길 바란다는 식의 여론이 보도 되고 있다.

두 번 째 가능성은 사민-녹색-자민(적-녹-황:신호등연정)이 제시되는데 이 연정에 대해서 이미 자민당은 절대 적녹과는 함께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다. 세번째 가능성은 기사/기민연합-자민-녹색(흑-황-녹:자마이카 연정-자마이카 국기와 색이 같다고 이렇게 부른다)인데 이 경우도 녹색당이 신호등 연정에서 자민당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대의 의사를 표시한 바 있다.

무엇보다 녹색당의 경우 원전문제에 민감한 당인데 이 사안에 있어 흑황연합과는 적대적이다. 이 세가지 가능성외에 좌파당과 사민, 녹색당의 적적녹 연정도 이론상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 그 어떤 당도 좌파당과는 연정의 뜻이 없다고 밝혔고 좌파당 역시도 야당으로 남겠다고 한 상황이다.

제도와 절차는 과연 민주주의를 보증하는가?

10월 2일 드레스덴 선거에 출마하는 좌파연합의 카챠 키핑
 http://www.katja-kipping.de/

선거 직전 드레스덴에서 갑자기 지역구의원이 죽은 관계로 드레스덴만 10월 2일 선거를 치루게 됐다 (선거용지에 인쇄된 후보자 이름을 바꾸기 위해서 연기된 것이다. 민주주의의 절차와 형식을 갖추는 일은 비용과 시간 그리고 인내가 필요하다). 드레스덴에서 채워질 의석수가 세석인데 만약 모두를 사민당이 차지한다면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예상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하여튼 선거 후 14일 내에는 연정에 대한 결론이 도출되야 한다. 꾸준한 물밑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조화 가능한 가능성이 아직 발견되지 못한 듯 싶다.

지난 18일 독일국민들은 그들을 대신해 향후 4년을 책임질 정치가와 정당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유권자들의 최선의 선택이었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모두 같은 한 표로 처리됐다. 문제는 바로 이 점이다. 독일식의 정당제도는 양당제도에 비해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오는 결점들을 채울 수 있는 여러 장치가 있다. 위에 언급한 것 처럼 거대 한 당의 뜻대로 정권이 좌우 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의 장점을 말한다.

그러한 다양성과 가능성을 제도로 풍부하게 할 수 있지만 바로 모두 한 표로 처리된 유권자들의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사민당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경우 이번 선거의 결과를 아젠다 2010개혁을 완수하라는 국민의 뜻으로 오역하고 선전할 것이다. 뻔한 거짓말이 너무나 복잡한 민주주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이러한 완성된 절차에 무엇으로 대항할 수 있을까?

갈현숙 님은 베를린자유대 사회학 박사과정을 지내고 있다.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도토리 키재기로 귀결
노대통령이 부러워한 슈뢰더의 승부수? 그리고 아젠다 2010
월급 50만 원 일자리 170만 개 만든 독일 ‘아젠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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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녹색당 제치고 제4당으로, 좌파연합의 승리&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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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 제치고 제4당으로, 좌파연합의 승리"
[정대성의 독일통신](1) - 연정 구성을 둘러싼 독일 정가의 소용돌이와 9.18 독일 총선의 의미
정대성(빌레펠트대학) 
"슈뢰더는 영원한 총리가 되려는가?"
"나는, 게르하르트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난 23일 독일 <빌트>지의 일면을 장식한 머릿기사 제목이다. 로마 황제 카이사르의 복장을 한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그래픽 사진도 곁들여졌다. 총선후 독일 정국이 연정 구성과 총리직을 둘러싼 소용돌이 속에서 연일 갑론을박을 거듭하는 가운데, 매일 수백만 부를 찍어내는 유럽 최대의 '황색' 일간지 <빌트>가 슈뢰더의 총리직 '욕구'를 이렇게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야욕'에 빗대어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23일자 '빌트'의 1면 머릿기사
스캔들 기사를 선호하고 뚜렷한 보수 성향을 '자랑하는' 이 신문은 차기 정부의 출범 선언문이 다음처럼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황당하게 비꼰다. "나, 게르하르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첫째, 기민/기사연합은 두 정당으로 분리되었다. 둘째, 따라서 나의 사민당이 원내 제1당이다. 셋째, 내가 총리를 계속한다!"

패러디를 넘어 공개적인 야유와 비아냥 수준에 이른 <빌트>의 이러한 '공격'은 총선에서 0.9% 차이로 기민/기사연합에 패배한 사민당 지도부가, 연방의회에서 '연합체'로 구성된 기민/기사연합을 두 개의 정당으로 쪼개고 제1당이 되기 위해 '연방의회 규정'을 바꾸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데 직접적으로 기인하는 듯하다.

현 연방의회 규정은 기민당과 기사당이 연방의회에서 단일 의원단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민/기사'연합'이라는 명칭 그대로다. 물론 기민당과 기사당은 엄연히 다른 두 개의 정당이지만 기사당은 바이에른주에만 존재하고, 대신 바이에른주에는 기민당이 없다. 그래서 성향이 비슷한 형제당인 두 정당은 기민/기사연합으로 연방의회 선거에 임하고 하나의 의원단을 구성해온 것이다.

하지만 선거 직후부터 사민당은 기민/기사연합의 지지율은 두 개 정당을 합친 것이니 만큼 사민당이 최대의 지지를 받은 1당이라는 '논리'를 펴왔고, 급기야 녹색당과 좌파당의 지지를 얻어 연방의회 규정을 바꿔 원내 1당이 되려한다는 말이 흘러나오며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사민당 내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자 당수 뮌터페링은 재빨리 그럴 계획이 없다고 밝혔지만, 보수 색깔을 분명히 하며 기민/기사연합과 그 당의 총리 후보 앙겔라 메르켈을 지지하는 <빌트>는 '분'을 채 삭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현재 온갖 추측과 예상이 난무하며 독일 정가를 달구고 있는 연정구상과 총리직을 둘러싼 힘겨루기와 줄다리기는 총선에서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본적인 원인이 돌려진다. 하지만 독일은 전통적으로 한 정당이 과반수를 얻지 못해 연정형태의 정부가 구성되어온 것이 관례였다.

기실 이번 선거의 딜레마는 집권 사민당-녹색당은 물론 야당의 연정 파트너인 기민/기사연합-자민당도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사민당-기민/기사연합의 대연정을 제외하면 3개의 정당이 함께 정부를 구성해야 할 처지에다, 총리직 싸움이 긴장을 증폭시키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기민/기사연합의 주장은 간단하다. 최다 득표를 한 기민/기사연합이 연정을 주도해야 하고 총리 자리 역시 그들의 후보인 앙겔라 메르켈의 몫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총리직과 연정 주도권을 포기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어 보이는 슈뢰더와 사민당 당수 뮌터페링은 정색을 한다. 지난 5월까지만 해도 사민당에 20% 이상 앞섰던 기민/기사연합의 지지율이 수직으로 떨어져 결국 사민당보다 고작 0.9%밖에 많지 않고, 그마저도 두 정당을 합한 것이니 만큼 슈뢰더를 총리로 하는 사민당이 정부구성을 주도해야 옳다는 것이다.

선거 결과가 발표되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기민당 지지자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민/기사연합의 구상은 우선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에 녹색당을 끌어들이는 흑-황-녹의 '자메이카 연정'(자메이카 국기가 흑.황.녹색으로 이루어짐)에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슈뢰더 정부에서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였던 녹색당과의 정책 차이도 만만치 않고, 녹색당 쪽에서도 당 노선의 수정을 감수하며 보수연정의 '하위' 파트너로 들어가는데 적잖은 위험부담을 가지는 만큼 '자메이카 연정'이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예상대로 23일 녹색당과의 연정협상은 별다른 성과 없이 큰 차이점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

기민/기사연합의 다음 카드는 사민당과의 대연정이다. 물론 현재 이 구상의 최대 걸림돌은 사민당이 총리직을 포함한 연정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는 점이다.

한편, 사민당의 구상은 일단 사민당-녹색당에 자민당을 데려오는 적-녹-황의 '신호등 연정'이었다. 하지만 선거 직후부터 자민당은 사민당-녹색당 정권의 수명을 '장관 자리 몇 개'로 연장할 뜻이 전혀 없다고 못박아 왔다.

그러면 사민당의 다음 대안도 기민/기사연합과의 대연정이다. 물론 슈뢰더를 총리로 앉히는 사민당 주도하의 연정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기민/기사당 역시 메르켈을 총리로 하는 연정 주도권 주장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의 수뇌부가 모인 지난 22일의 연정협상 논의는 예상대로 별반 소득 없이 끝났다.

독일 언론은 정국의 이러한 상황을 가늠하며, '누구도 권력을 얻지 못한 카오스 선거'(<슈피겔>)에 뒤이은 '연정 주도권과 총리 자리를 둘러싼 싸움'으로 요약하고 있다.

'누구도 권력을 얻지 못한' 선거라는 평가는 수치상의 선거결과로 뒷받침된다. 집권 사민당은 34.3%로 지난 2002년 선거보다 4% 이상을, 기민/기사연합은 35.2%로 3% 이상을 잃었다. 사민당-녹색당 연정의 지난 7년간의 정책은 도합 42.4%의 지지율에 그쳐 결국 국민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선거 초반 과반수를 웃도는 지지율을 얻어 집권이 거의 확실시되던 기민/기사연합-자민당은 45%를 얻는데 머물러 지지표가 대거 이탈했음이 입증되었다. 특히 기민/기사연합은 선거 직전까지 각종 설문조사에서 40%를 웃돌던 지지율이 35% 남짓으로 곤두박질하는 충격을 받아 '패배한 승자'의 모습으로 비쳐졌다.

또한 이번 선거 결과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서독 시절부터 정권을 주고받으며 독일 정치를 이끌어온 거대 양당인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이 연방의회 선거에서 얻은 지지율의 합이 70%를 밑도는, 1949년 서독 최초의 선거를 빼면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는 2차대전 후 독일 정치를 주도해온 거대 양당의 힘이 균열되기 시작하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이제 거대 정당은 더 이상 그리 거대하지 않고, 군소 정당은 더 이상 그리 작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선거 당일부터 '이 날의 승자'로 공공연히 지목된 것은 군소 정당인 자민당이었다. 자민당은 지난 선거보다 2.4%가 많은 9.8%를 얻어 일약 제3당으로 올라섰고,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리며 온통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사민당의 슈뢰더는 그 날 저녁부터 자민당에 노골적인 '러브 콜'을 보냈다.

선거 승리에 환호하는 자민당 지지자들
그렇다면 자민당이 진정한 승자인가? 신나치 정당을 빼면 독일의 현 정당 구조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자민당은 분명 지난 선거보다 125만명의 유권자를 더 얻었다. 하지만 자민당은 유권자들의 정당별 이동상황 분석 결과 다른 정당들과 얼마 안 되는 유권자를 주고받았음에 비해, 같은 보수 진영인 기민/기사연합에서 125만 표를 뺏어왔다. 결국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표심 이동이 자민당을 제3당으로 만든 것이다.

자민당을 제외하면 지난 선거보다 득표가 늘어난 정당은 '좌파당'(좌파연합)밖에 없다. 민사당과 선거대안당이 연합해 당초의 예상을 깨고 거센 돌풍을 일으킨 좌파당은 결국 8.7%의 지지율을 획득해 녹색당을 제치고 제4당으로 당당히 연방의회에 입성했다. 민사당이 2002년 선거에서 겨우 4%에 그쳐, 지역구 직접선거로 당선된 2명을 빼곤 비례대표제 하한선인 5% 규정에 묶여 연방의회 입성이 좌초된 것에 비하면 무려 4.7%가 늘어난 수치이다. 그렇다면 '이 날의 승자'는 자민당이 아니라, 자민당보다 두 배나 득표를 늘린 '좌파당'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좌파당의 지도자 기지와 라퐁텐(우)
좌파당은 지난 선거와 비교해 200만 표 이상을 더 끌어모으며 모든 정당에서 유권자들을 뺏어왔다. 무엇보다 사민당이 96만표로 좌파당에 가장 많은 유권자를 빼앗겼다. 또 지난 2002년 선거에서 기민/기사연합,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에 표를 던진 유권자 가운데 각각 74만명, 51만명, 12만명, 8만명이 기권으로 돌아선 반면, 유일하게 좌파당만 지난 선거의 기권자 가운데 39만명의 표심을 얻었다.

하지만 좌파당의 이러한 도약은 크게 언론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선거 직후 어느 정당도 좌파당을 연정 파트너로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좌파당만 빼고' 어느 정당과도 연정 협상 테이블에 앉겠다는 태도가 시종일관 지배적이다. 현재로선 사민당-좌파당-녹색당으로 구성되는 적-적-녹 연정의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좌파당 역시 선거 후 강력한 야당으로 남아, 복지국가의 토대를 허무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본격적인 비판의 날을 세울 것임을 공언하고 있다.

잡지 '포커스'의 선거 특집호 표지. 기민당, 자민당, 사민당, 녹색당을 대표하는 얼굴이 각각 실렸지만, 좌파당의 대표는 빠져있다.
물론 외면적 이념 성향으로 보면, 흔히 중도 좌파로 분류되는 사민당과 녹색당에 좌파당을 더해 범 좌파 진영으로 분류할 수 있고, 중도 우파의 기민/기사연합과 자민당이 범 우파 진영을 이룬다. 산술적으로 좌파 진영의 득표는 과반수를 넘긴 53.1%이고, 우파 진영은 45%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 좌파진영의 연정이 '불가능의 영역'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선 사민당과 좌파당 지도부의 '개인적인 앙금'이다. 특히 좌파당의 돌풍을 진두지휘한 오스카 라퐁텐은 사민당의 옛 당수였다가 사민당을 탈당해 좌파연합을 성사시킨 인물로 슈뢰더와 '견원지간'이 된지 오래다.

사민당과 좌파당의 정책노선 차이도 이에 못지 않게 골이 깊다. 좌파당은 슈뢰더 정권이 사활을 걸고 추진한 '아젠다 2010'이나 '하르츠 IV' 같은 개혁을 누구보다 거세게 비판해 왔다. 또 좌파연합이 '좌파당'이라는 명칭을 택한 데에도 사민당을 더 이상 좌파 정당으로 볼 수 없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

따라서 적-적-녹으로 꾸려지는 '범 좌파 연정'은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24일자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에 따르면, 언젠가 가능하겠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하지만 이 신문은 독일 국민이 좌파를 다수파로 만들었고, 이는 기민/기사연합-자민당의 보수 진영이 공공연히 찬동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여하튼 좌파당이 일으킨 돌풍은 독일 여론이나 정치권에서 그에 걸맞는 관심이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좌파당은 과거 민사당이 구 동독 지역에서는 꽤나 표를 얻었지만 서독 지역에서 1%에 불과한 '무시'에 가까운 대접을 받은 것에 비해, 이제 서독 지역에서도 5%에 육박하는 득표를 올리며 54개의 연방의회 의석을 가진 명실상부한 '전국'정당으로 거듭났다.

좌파당 돌풍의 진원지는 물론 구 동독지역이다. 구 서독 주민이 좌파당에 4.9%의 지지를 보낸 반면 구 동독 주민들은 25.4%의 표를 던져, 동쪽지역에서 좌파당을 사민당에 이은 제2당으로 만들었다. 구 동독 주민들의 이러한 좌파당 지지는 동서 지역의 현격한 격차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그 '좌절한' 동쪽 주민들의 '분노한' 표심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다.

나아가 구 서독 지역에서까지 좌파당이 약진을 보인 것은 사민당 정부가 경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해온 '복지국가 허물기'에 경종을 울리는 징후로도 읽을 수 있다. 선거전 막판에 사민당이 상당한 세력을 회복한 것도, 기민/기사연합과 자민당이 경제 회복을 내세워 사회보장과 복지정책의 후퇴를 '더' 강화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반감의 결과로 보인다. 기실 사민당은 선거 막판 기민/기사연합에 맞서 '사회정의와 평등' 및 '약자를 보호하는 정당'이라는 고색 창연한 '옛'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전면에 내걸어 효과를 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선거 결과는 빈곤층의 확대 속에 독일 사회를 가로지르는 '사회 양극화' 과정의 반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기민/기사연합의 표가 대거 더 오른쪽의 자민당으로 갔고, 적잖은 사람들이 맨 왼쪽의 좌파당에 기대를 걸었다. 좌파당의 정책은 '실현 불가능한 대중선동'이라는 다수 여론의 지속된 비판에도 불구하고, 10% 가까운 독일 국민들이 '복지국가의 틀'을 지키고 실업수당을 올리겠다는 좌파당의 공약에 표를 던졌다.

결국, 중도를 대변하는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 세력은 약화된 반면, 오른쪽의 자민당과 왼쪽의 좌파당이 힘을 키우며 사회 양극화 현상이 선거 결과에 투영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슈피겔>이 선거 특집호에서 '왕이 되려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꼬집은 슈뢰더와 사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왜 독일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지난 7년간 이어진 적-녹 연정의 지속을 부정했고, 당의 지지율이 지난 15년 이후 최저에 그쳤는지 곰곰이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7년 적-녹 연정의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된 높은 실업률과 경기침체 문제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기본적인 울타리인 사회복지의 급격한 후퇴만 낳고 별달리 개선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려는 꿈을 부여잡고 있는 메르켈과 기민/기사연합 역시 이번 결과가 당의 역사상 3번째에 해당하는 최악의 득표임을 기억함과 아울러, 특히 선거전 와중에 불거진 구 동독 주민 모욕 발언에다, '가진자'에게 혜택을 준다는 비판의 도마에 오른 세제개혁 논란이 더해지며, 선거 초반의 압도적인 지지가 어떻게 급전직하했는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쥐트도이췌 차이퉁'의 23일자 만평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총리직과 연정 구성을 둘러싼 두 정당의 '명분 없는' 주도권 싸움은 독일 국민들의 냉소만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아닌게 아니라 23일자 <쥐트도이췌 차이퉁>은 슈뢰더와 메르켈을 암시하는 듯한 남녀가 협상 테이블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싸우는 그림을 만평으로 실어, 총리직과 연정 주도권을 둘러싼 '이전투구'가 독일 국민들의 바램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주도권 싸움은 두 정당 '모두' 선거에서 국민의 매서운 비판을 받았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끗이 망각한 채, 어떻게든 정권을 잡아 보겠다며 '도토리 키 재기'에 골몰하는 촌극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여하튼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은 오는 28일 다시 대연정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자메이카 연정'이나 '신호등 연정'이 난항을 보이며 실현 가능성이 거의 희박해지고 있어 '대연정'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고 있는 것이 현실적 배경이다. 또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독일 국민들은 높은 실업률을 비롯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대연정을 선호한다고 드러나고 있어, 두 정당은 적잖은 압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나아가 대다수 독일 국민은 연정 협상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갈 경우 불가피한 길인 '재선거'에 반대하고 있음을 여론조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돌아오는 대연정 협상 테이블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몰라도 <쥐트도이췌 차이퉁>의 '이전투구 만평'이 그대로 재현되기를 바라는 독일 국민은 없을 것이다.

68혁명 당시 '비상권한법' 반대 시위 장면
하지만 전후 서독사에서 1966-69년에 단 한번 존재한 대연정은 당면한 경제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는 일각의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견제하는 명실상부한 야당의 부재로 인해 의회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 침해된다는 거센 비판 속에, 비상사태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비상 권한법'에 반대하는 저항을 조직한 '의회 외부 반대파'(APO)가 결성되는 등 독일 '68혁명'의 분출에 한 기폭제가 되기도 했던 역사를 안고 있다.

이런 역사를 감안할 때, 두 거대정당이 한 울타리에 동거하는 대연정이라는 옷이 과연 독일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안성맞춤'일지는 섣불리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다.
정대성 님은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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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노래’와 ‘증오의 노래’

 

    칼럼
‘해방의 노래’와 ‘증오의 노래’
[정대성의 독일통신](2) - 불안의 시대를 파고드는 독일의 신나치 록 음악
정대성 
“꿈이 노래를 잃으면 제 마음을 묶는 사슬이 되는 법이다.
혁명이 사랑을 잃으면 추하고 가공할 폭력이 되는 법이다.
사랑을 잃은 폭력이 노래를 좋아하면 그 노래 역시도 사슬이 되는 법이다.”
- 이청준 <흰 옷> -

‘노래하는 혁명가’와 ‘전자기타를 든 테러리스트’ - 역사와 감옥 속으로 들어가다

칠레, 1973년 9월.
2001년 ‘영원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노래하던 미국의 심장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던 때로부터 꼭 28년 전의 그 날인 9월 11일, 남미 대륙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세상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의 대통령궁도 전투기의 폭격으로 화염에 휩싸인다. 칠레 민중의 염원을 등에 업고 3년 전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은 민중연합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미국을 등에 진 군부 쿠데타에 맞서 ‘기관총을 들고’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아옌데 대통령 최후의 사진. 가운데가 아옌데 대통령
4일 뒤, 노래와 기타로 아옌데와 함께 하며 선거를 통한 민중연합 정권의 창출에 기여한 칠레 민중의 벗이자 ‘노래하는 혁명가’ 빅토르 하라도 수많은 동료와 함께 무참히 학살당한다. 시체 더미 속에서 발견된 하라의 몸은 총탄 자국 투성이고, ‘해방 세상’의 염원을 기타에 담아내던 두 손은 처참하게 부러져 있었다.
‘노래하는 혁명가’ 빅토르 하라는 ‘해방의 무기’인 노래와 함께 그렇게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독일, 2005년 3월.
록 밴드 <란처>가 연방 법정에 선다. 죄목은 ‘범죄단체 결성’이다. 밴드 멤버들이 모여 총질이라도 도모한 것일까. 아니, 그들의 ‘무기’도 노래이다. 하지만 ‘검둥이의 선거권은 목 메달고 배에 총알을 박아 버려’ 같은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극단적으로 인종 차별적인 노래 가사이다. 나아가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 진드기, 그 더러운 것은 어서 모조리 사라져야 해’ 같은 외국인 증오를 드러내 놓고 부추기는 섬뜩한 가사도 스스럼없이 무기로 사용했다. 30여년 전 빅토르 하라가 부러진 손으로 내려놓은 ‘무기로서의 노래’를 이들이 다시 집어든 것이다. 그것도 정 반대 방향에서.
밴드 이름부터가 ‘병사’란 뜻으로 나치 냄새 깨나 풍기는 이 그룹의 노래 가사에 대해 연방 판사는 ‘죄다 범죄감’이라고 밝힌다. 담당 검사는 그룹 <란처>가 미국을 비롯해 스웨덴, 폴란드, 네덜란드, 벨기에의 극우파 네트워크를 통해 음반을 만들어 배포했으며, 예술가라는 포장은 순전히 가면이고 ‘전자 기타를 든 테러리스트’가 자명하다고 단언한다. 법정은 이 밴드의 목표가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증오심을 퍼트리고 극우파적으로 선동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룹의 보컬이자 작사자는 결국 3년 4개월의 중형을 선고받는다.
‘전자 기타를 든 테러리스트’ <란처>는 ‘증오의 무기’인 노래와 함께 그렇게 감옥 속으로 들어간다.

‘범죄 선동은 범죄가 된다’

극우 민족민주당의 시위에 가담한 '란처'의 보컬

독일에서 음악 그룹이 ‘범죄단체’ 결성 죄를 선고받은 것은 사상 처음이다. 이는 필시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일 듯하다.
물론 밴드 <란처>의 음반은 독일 음반가계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없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약 10만장에 달하는 이들의 음반이 이미 독일에서 유통되고 있다고 본다. 그 대부분이 불법 복제 음반으로 주로 학교 파티나 청소년 모임에서 틀어진다고 한다.
또한 <란처>는 여러 극우파 록 그룹 가운데 단연 간판 격인 밴드로 이들의 선동은 실제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몇 년 전 신나치 성향의 청년들이 베트남인 둘을 폭행으로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법정에서 피고들은 범행 당시 <란처>의 노래를 불렀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그밖에 신나치의 다른 외국인 폭행사건 현장에서도 이 밴드 노래가 불려졌음이 밝혀졌다. <란처>를 범죄단체로 판결한 판사는 이 밴드가 그러한 폭행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질책했다.
그렇다면 ‘예술적’ 표현도 범죄가 되는가?
‘음악은 범죄가 아니다!’
법원의 판결에 항의하는 신나치 시위대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 자체로 보면 참 흠잡을 데 없는 말이다. 하지만 독일 법정은 예술이 다른 사람들의 인권 침해나 공공연한 차별을 넘어 범죄 행위까지 선동한다면 ‘범죄가 된다’고 지극히 ‘상식적으로’ 판결했던 것이다.

독일 극우 록 밴드 - 1990년대에 폭발적으로 팽창

독일에서 1989년에 10여 개에 불과하던 극우파 성향의 록 밴드는 불과 10여 년만인 2001에 200개를 넘어서며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옛 동서독 지역을 불문하고 독일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는 상황이다.
이들 극우파 밴드는 그 이름부터가 극단적이고 과격하다. <아리안 혈통> 같이 나치를 곧장 연상시키는 이름을 비롯해 <진군>이나 <피와 명예>, <살기> <폭탄> <독재자> <강자의 권리> <증오 공동체> <돌격대> <테러 99> 같은 명칭들은 한눈에 이들의 성향을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이에 비하면 앞서 말한 ‘병사’라는 이름은 다소 평범한 느낌까지 든다.
또한 이들은 음반 표지에 나치 문양이나 나치 병사를 등장시키기 일쑤고 전투 장면이나 유혈 낭자한 폭력 장면을 흔히 이용한다. 그들은 짧은 군인 머리나 빡빡 머리를 좋아하며 문신 새기기를 즐기며 전투화를 선호한다.

외국인과 좌파 - 극우 밴드의 공적 1,2호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무기인 ‘증오의 노래’로 무엇을 주장하는가? 극우파 록 그룹이 발휘하는 영향력의 원천은 앞서 독일 법정이 지적하듯 무엇보다 노래가사에 있다. 특히 성장기 청소년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선동적이고 폭력적인 가사는 이들 극우파 그룹을 이해하는 척도이자 판단의 핵심 열쇠임에 틀림없다.
그룹 <란처>의 노래 ‘병사’는 “우리의 혈관에는 바이킹의 피가 끓는다. 우리는 아리안족 청년들의 목소리다”라고 외치며 나치의 망령을 스스럼없이 불러낸다. 극우파 록 그룹의 노래가사에서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이 폭력 찬미이다. <강타>라는 그룹은 ‘독일 청년’이라는 곡에서 “우리의 얼굴은 증오로 가득 차 있고 폭력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고 노래하며,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니 딴 생각말고 때려 죽여라”고 소리친다.
나아가 신나치 그룹들에서 ‘독일’은 단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신성한 존재’ 그 자체이다. ‘독일을 위한 투쟁’이 그들의 전부이며, “신성한 것은 사람들이 언젠가 불태워버린 책도 인간도 아니고, 오로지 조국 그 하나이다”(<0815>의 노래 ‘우리의 조국은 신성하다’).
이제 이들은 조국의 영광을 가로막는 적들을 만들어 낸다. 좌파는 “공산주의 돼지 새끼”(<란처>)이거나 “아나키스트 돼지 새끼”(<0815>)이고 이주자는 “외국인 돼지 새끼”(<돌격대>)이거나 “터키인 돼지 새끼”(<민족의 분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공적 1호는 ‘외국인’이다. 그들에게 외국인은 범죄자이고, 마약상이며, 포주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지되고 “우리나라에서 나가”(<돌격대>)야 한다.
공적의 2번째 자리는 ‘좌파’의 몫이다. “우리는 너희를 증오한다, 너희는 쓰레기일 뿐이거든. 우리는 너희를 증오한다, 너희는 좌파 기생충일 뿐이거든”(<겨자 머리>).
이처럼 독일 극우파 록 밴드의 ‘무기’인 노래가사는 외국인이나 좌파 및 유대인에 대한 증오나 폭력 선동을 비롯해 나치 시대를 연상시키는 독일 민족의 영광에 대한 찬미로 가득하다.

‘무기로서의 노래’ - 세계로 퍼져나가는 극우 밴드

신나치 록그룹의 자켓 이미지

비록 독일에서 유독 강세를 보이지만 극우파 록 밴드는 사실 오늘날 유럽 전체를 망라하는 현상이다. 북유럽의 스웨덴이나 핀란드를 비롯해 영국과 프랑스를 넘어 동유럽 나라들까지, 극우파 록 밴드가 음반을 내고 정치적 극우파들의 ‘음지의 나팔수’로 활동하지 않는 나라는 눈을 씻고 찾아야 할 정도이다. 물론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극우파 밴드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세계적으로 극우파 밴드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특히 90년대 들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외국인이나 유대인, 정치적 좌파에 대한 증오와 폭력적인 수사로 가득한 수많은 불법 음반들을 쏟아내며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고 있다. 독일의 신나치 밴드 <돌격대>가 “노래는 탱크보다 위험한 우리의 무기”라고 외치듯, 극우파 록 밴드의 노래는 목적의식적인 강력한 선동이자 정치의식의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의 시대’가 극우 밴드와 극우 정당을 살찌운다

극우파 밴드 노래의 대표적인 소비자는 30세 이하의 남성들이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극우파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이들의 노래는 듣는다. 노래를 통해 감정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하고 정치적인 일체감을 가지기 위해서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극우파 록은 “인종 전쟁을 위한 음악”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들 음악이 주로 극우파나 인종차별주의자 세계에서 유통된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다. 독일에서 이들 밴드를 듣거나 음반을 가진 학생들을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극우 록 음악은 금지되어 있고, 또한 바로 그것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더 흥미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 연방 법정의 유례없는 이번 판결은 현재 가뜩이나 극우 세력의 발호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 극우 신나치 밴드의 이런 선동적인 노래가 특히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데 제동을 걸려는 의도로 보인다.
더불어 이번 판결은 음지에서 ‘예술의 가면’을 쓰고 청소년들을 선동하는 극우 록 밴드뿐 아니라, 5백만 실업자라는 ‘불안의 시대’를 사는 독일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를 애꿎은 외국인이나 유대인에게 돌리며 세력을 키우려는 극우 정당을 겨냥한 매서운 경고가 되어야 할 듯하다.

빅토르 하라의 ‘해방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빅토르 하라

‘노래하는 혁명가’ 빅토르 하라의 ‘해방의 꿈’은 비록 칠레 인민연합 정권의 ‘천일의 꿈’과 함께 비극적으로 막을 내리며 역사로만 남았지만, 그가 남긴 노래들은 오늘도 여전히 ‘못 다한 해방’을 노래하고 있다. 하라의 노래 <민중이 일으키는 바람>이 아직도 세상을 흔들어 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꺼지지 않는 ‘민중의 바람’이 아직도 그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바람이 나를 부르네
민중의 바람이 나를 부르네
영혼이 나를 울리는 사이
시인은 그렇게 ‘민중의 길’을
노래할 것이네
언제까지나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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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호]독일 유권자들의 정책적 투표동기와 사회인구학적 성격 및 지지 경향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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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호]독일 유권자들의 정책적 투표동기와 사회인구학적 성격 및 지지 경향 변화
국제/ 정세와 초점 - 2005년 독일 총선 분석
한노정연 
2005년 독일 총선: 독일 유권자들의 정책적 투표동기와 지지경향 변화

정병기 / 한노정연 부소장


[원문보기]

서 론

지난 9월 18일 총선 이후 독일 정국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양대 정당인 사민당(SPD)과 기민/기사연(CDU/CSU)이 1% 미만의 차이를 두고 득표했고 어떠한 연정 가능성도 예단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1년 후의 세력 약화를 염려해 스스로 불신임을 통과시켜 조기 총선을 시도한 슈뢰더 총리(Gerhard Schröder)의 계획은 아직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정권교체의 희망을 가지고 조기 총선을 수용했던 기민/기사연의 메르켈(Angela Merkel) 후보도 야심의 한 켠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다.
독일민족당의 후보가 선거 기간 중에 사망함으로써 10월 2일에 다시 치러질 작센(Sachsen) 주 드레스덴(Dresden) 시의 선거도 현재의 난국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민당이 의석을 추가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사민당과 기민/기사연이 정확히 동수의 의석을 갖게 되는 더욱 기막힌 경우가 생길 수 있다(각주 : 드레스덴의 현재 선거 결과는 기민/기사연 30.2%, 좌파/민사당 24.3%, 사민당 22.7%, 자민당 10%로 나타났다. 이 지역의 의원은 총 3명으로 배정되었으며, 직접 출마자는 기민/기사연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와 같이 독일 정국은 선거에서 총리와 집권 연정이 결정되지 못하고 선거 이후 정당 간 교섭에 의해 정부가 구성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 이를 두고 이탈리아의 언론은 과거 이탈리아의 정치와 유사하다고 하여 “이탈리아화된 독일(germania italianizzata)(각주 : 이탈리아 국영방송 RAI 뉴스, http://www.rainews24.it/Notizia.asp?NewsID=5 6770(검색일: 2005년 9월 19일).)” 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이번 선거의 표면적인 의미는 좌우익의 소수당들이 선전하고 집권 연립 정당들과 중도의 양대 정당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표 1> 참조). 특히 구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과 사민당에서 분리ㆍ창당한 선거대안당(WASG)이 연립하여 좌파적 대안으로 부상했다. 2002년도 총선과 비교해 양대 정당은 모두 3∼4%의 실표를 보였으며,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인 동맹90/녹색당도 0.5%의 지지율 하락을 보였다. 반면 자민당과 좌파/민사당은 2.4%와 4.7%의 득표율을 제고하여, 각각 제3당과 4당의 위치를 차지했다.

<표 1> 2005년도 총선 결과(첨부파일 참조)


왜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독일 유권자들이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선거 분석을 통해 알아본다. 우선 선거 결과와 가능한 연정 조합 및 그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선호도를 개관하고, 정당 선택의 정책별 동기를 살펴본 후, 성ㆍ연령ㆍ종교ㆍ지역 및 종사상 지위라는 사회인구학적 지표를 통해 지지 경향을 분석한다. 그리고 2002년도 선거에서 나타난 각 정당의 지지자들과 기권자들이 금년 총선에서는 어떠한 지지경향을 보였는지 지지표의 이동을 통해 알아본다. 선거 분석의 주요 자료는 독일 제1공영방송인 ARD가 Infratest dimap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자료이다. 조사는 9만 명을 대상으로 선거 당일 출구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1. 연정 조합에 대한 선호도와 정당 선택의 정책별 동기

1) 연정 조합에 대한 선호도
가능한 연정 시나리오는 대연정(기민/기사연, 사민당), 신호등 연정(적황록: 사민당, 자민당, 동맹90/녹색당), 자마이카 연정(흑황록: 기민/기사연, 자민당, 동맹90/녹색당)(각주 : 흑ㆍ황ㆍ녹색으로 이루어진 자마이카 공화국 국기의 색깔을 본 따서 만들어진 용어.), 좌파 연정(적적녹: 사민당, 좌파/민사당, 동맹90/녹색당)의 네 가지이다. 그러나 대연정의 가능성은 양대 정당 모두가 거부하고 있고, 동맹90/녹색당과 자민당은 환경정책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한 배를 타기 어려우며, 좌파/민사당은 어떠한 형태의 연정 참여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의회가 3회까지 총리를 선출하지 못하게 되면 재선거가 실시될 수도 있다.
사실상 연정 교섭에서는 기민/기사연의 메르켈 후보보다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가 더 큰 선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비록 제1당은 아니지만 가능한 연정 조합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슈뢰더는 제2당의 후보지만 총리를 연임할 가능성이 크다.
연정 형태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선호도는 선택지의 제시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났다. 모든 형태의 연정 참여를 거부한 좌파/민사당을 제외한 조합인 대연정과 자마이카 연정 및 신호등 연정에 대한 조사에서는 각각 42%, 20%, 18%로 나타났다. 대연정에 대한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 점이 사민당과 기민/기사연을 압박하는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모든 가능한 연정 조합에 대한 여론 조사(각주 : Deutsche Welle 방송사의 여론 조사. 총 1,073명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를 보면, 대연정에 대한 선호도가 26.6%로 역시 가장 높지만, 그 다음은 21.4%를 얻은 신호등 연정이 잇고 있으며, 세 번째는 좌파 연정이다(<표 2> 참조). 이 조합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사민당이 주도하는 연정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대연정을 주도하는 총리를 누구로 하느냐를 물었을 때 결과는 더욱 상이하게 나타났다. 슈뢰더가 이끄는 대연정이 메르켈이 이끄는 대연정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선호도를 보인 것이다. 따라서 대연정에 대한 압박이 작용할지라도 슈뢰더 총리의 선택 폭과 행위 공간이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표 2> 연정 조합 지지도(첨부파일 참조)


2) 정당 선택의 정책별 동기
이번 선거는 경제 살리기가 가장 중요한 선거 이슈였다고 이야기한다. 실제 전체 유권자들의 38%가 경제정책을 가장 중요한 이슈로 꼽았으며, 그 다음이 노동시장정책과 사회정책으로 각각 34%와 32%를 차지했다(<그림 1> 참조). 조세정책(19%)과 외교안보정책(13%)은 모두 20% 이하의 유권자들만이 관심을 보여 상대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림1> 정당 선택의 정책별 동기(첨부파일 참조)

그러나 노동시장정책과 사회정책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제 경제정책보다는 사회ㆍ노동정책이 66%의 관심도를 보여 그 중요도는 오히려 두 배 가까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2005년도 독일 총선은 경제정책이 좌우했다기보다 사회ㆍ노동정책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사실 경제정책에 있어 양대 정당의 차이점은 그다지 크지 않다. 물론 기민/기사연이 공급정책을 중시하고 사민당이 수요와 공급 정책을 병행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양 당 모두 일자리 창출과 연계하되 성장 위주의 정책을 실시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각주 : 각 정당의 정책에 대해서는 Stern, No. 29, 2005.7.14, pp.46-51; 김수행ㆍ안삼환ㆍ정병기ㆍ홍태영, 2003, 『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 영국,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정병기, 2003, “독일 적녹연정의 ‘아겐다 2010’과 신자유주의 정치”, 『현장에서 미래를』제93호(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2월호), pp.57-68 참조.). 적녹 연정의 정책은 ‘아겐다 2010(Agenda 2010)’을 통해 성장 위주의 재정ㆍ경제정책으로 증명된 바 있으며, 실제 이 정책을 실표의 주요한 이유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곧 중도우파와 우파 정당들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적녹연정이 수용함으로써, 중도좌파와 좌파 유권자들은 사회ㆍ노동정책으로 관심을 돌렸고, 경제정책은 주로 중도 우파와 우파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 정당 선택의 경제정책적 동기는 사민당과 동맹90/녹색당 및 좌파/민사당 지지자들 중에서는 각각 27%, 20%, 23%에 불과했던 반면, 기민/기사연과 자민당 지지자들 중에서는 그 두 배를 넘는 53%와 56%로 나타났다.
노동시장정책은 집권 연립정당들을 제외한 기민/기사연과 자민당 및 좌파/민사당 지지자들이 모두 42%로 높은 관심도를 보였다. 이것은 중도우파와 우파 지지자들이 경제정책과 연계된 노동시장정책을 선호한 반면, 좌파 지지자들은 사회정책과 연계된 노동시장정책을 선호하는 방식으로 양극화된 현상을 의미한다. 반면 적녹연정의 노동시장정책은 우파의 정책을 수용함으로써 좌파 및 중도좌파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정당 선택의 동기를 형성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동맹90/녹색당의 경우는 환경정책적 특수성으로 인해 이 부문에서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51%).
사회정책에 있어서는 이데올로기적 차이에 따라 더욱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을 보였다. 사민당과 동맹90/녹색당의 경우도 41∼45%의 지지자들이 관심을 보였으며, 좌파/민사당 지지자들의 관심도는 60%라는 압도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반면 기민/기사연과 자민당 지지자들은 16∼17%만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경제정책과 노동시장정책에서 적녹연정에 불만을 가진 중도좌파 지지자들도 사회정책에서는 일정한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좌파 지지자들은 사회정책에 대단한 불만이나 희망을 가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기민/기사연이 수요중심의 경제정책을 우선시하고 자민당이 친기업적인 자유시장 중심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좌파/민사당은 케인즈주의적인 전통 사민주의 노선을 주장한다는 정책적 차이가 작용한 결과였다. 그리고 적녹연정은 이른바 ‘하르츠 법안(Hartz) IV’에 따른 실업급여의 감축과 정년 연장 등 노동조합의 반발을 산 정책을 통해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불만을 샀던 것이다(각주 : 생활보조금과 실업급여를 통합한다는 명분으로 실업급여 II를 도입하여 실업급여를 서독 지역 월 345유로, 동독 지역 월 331유로로 감축했으며, 부족분은 이른바 1유로 직업(시간급 1유로짜리 비정규직)을 통해 보정하도록 했다. 또한 연금수령연령도 현재 61세에서 65세로 연장을 기도하고 있다. http://www.bundesregierung.de/Politikthemen/ Arbeitslosengeld-II-Hartz-IV-,11874/Alg-I-Bezugsdauer.htm(검 색일: 2005년 9월 19일); http://www.bundesregierung.de/Politikthemen/ Arbeitslosengeld-II-Hartz-IV-,11881/Arbeitslosengeld-II.htm< /a>(검색일: 2005년 9월 19일). 이에 대해 독일노련 DGB는 강력히 반발하는 성명을 냈다. http://www.dgb.de/themen/btw2005/gewerksch_a nforderungen.htm(검색일: 2005년 9월 19일).).
조세정책과 외교안보정책은 중요한 선거 이슈가 되지 못했다. 조세정책에서 자민당 지지자들이 31%를 보여 다소 높게 나타났을 뿐, 다른 정당들의 경우는 지지자들의 20% 안팎에서 고른 관심을 보였다. 세금에 민감한 자영업자들의 지지도가 높은 자민당의 지지층 구성이 반영된 것이다. 외교안보정책도 선택지로 삼은 정당의 경우 조세정책과 마찬가지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핵에너지 및 전쟁과 관련해 관심도가 높은 동맹90/녹색당에서 다소 높게 나타났는데, 여기에는 연정에서 외교를 담당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2. 사회인구학적 정당 지지 분포

1) 성과 연령에 따른 정당지지 분포
성과 연령에 따른 정당지지 분포는 제2차 대전 이후 독일 정치에서 선거를 좌우할 정도의 커다란 특징을 보이지 않았으며, 이번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이 집단들의 지지율 분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전체 정당 득표율 분포와 유사하게 나타났다(<표 3> 참조).

<표 3> 성과 연령에 따른 정당 지지 분포(%)(첨부파일 참조)


여성들의 경우는 양대 정당에 동일하게 35%의 지지율을 보였으며, 나머지 정당들에게는 7% 혹은 9%의 지지율을 보였다. 남성들은 기민/기사연에 대한 지지율이 조금 높아 36%이고 사민당이 33%로 3% 더 낮았다. 그밖의 정당들은 7∼11% 사이에서 지지율을 보였지만, 그중에서는 자민당이 가장 높았다. 주목할 만한 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보수적인 경향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당별로도 역시 큰 차이는 아니지만, 사민당과 동맹90/녹색당이 여성 지지자의 비율이 높고, 나머지 정당들은 남성 지지자의 비율이 다소 높다. 이른바 탈물질적인 사고를 염두에 둘 때 여성 문제를 신속히 흡수해간 사민당이 동맹90/녹색당과 함께 여성들로부터 지지를 상대적으로 많이 획득한 반면, 전통적 좌우 이데올로기를 가진 정당들은 남성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연령별로는 양대 정당의 경우 다소 의미 있는 차이를 보인다. 30세 미만 유권자들에서 사민당이 35%로 가장 높은 지지율을 획득했고, 기민/기사연이 4% 더 낮은 31%를 나타냈으며, 다른 정당들은 대동소이하게 7∼11%의 지지율을 보였다. 30∼59세의 연령층에서는 양대 정당이 동일한 지지율을 얻었으며, 다른 정당들은 역시 9∼11%에 머물렀다. 특기할 만한 것은 60세 이상에서 기민/기사연이 45%를 얻어 사민당보다 무려 10%나 더 높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다른 소수 정당들 중에서도 자민당이 9%를 보여 비록 작은 수치지만 다른 두 정당들의 5∼6%보다는 월등히 높았다.
정당별로 보면, 사민당이 모든 연령대에서 33∼35%의 고른 지지율을 보인 반면, 동맹90/녹색당이 상대적으로 젊은층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고, 기민/기사연은 반대로 노년층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대가 선거 결과를 좌우할 정도의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탈물질주의적ㆍ탈권위주의적 사고를 동기로 하는 동맹90/녹색당과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주의 정당인 기민/기사연의 차이가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2) 종교와 지역에 따른 정당 지지 분포
종교 문제도 독일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기민/기사연은 여전히 종교적 원칙이 자신의 근본적인 존재이유임을 부정하지 않는 만큼 종교적 지지층의 차이는 존재한다. 기민/기사연은 가톨릭 신자들의 46.0%가 지지했고 신교도와 기타 집단의 지지율은 32∼36% 선을 유지하고 있다(<표 4> 참조). 반면 사민당은 신교도들로부터 40.7%의 지지율을 획득했고, 가톨릭으로부터는 훨씬 더 낮은 28.4%를 얻었다. 반면, 다른 정당들의 경우는 가톨릭과 신교도 및 기타가 유사한 비중을 이루고 있다.

<표 4> 종교와 지역에 따른 정당 지지 분포(%)(첨부파일 참조)

반면 지역은 통일 이후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구서독 지역에서는 기민/기사연이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어 37.5%에 이르며 사민당이 제2당으로서 35.1%의 지지율을 보였다. 전체 유권자들의 지지경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동맹90/녹색당과 자민당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전체 독일 유권자들의 지지율보다 조금 높은 비율을 보이며 타 정당과의 차이 면에서도 유사하다. 다만 좌파/민사당이 전체 8.7%의 지지율과 달리 구서독지역에서는 4.9%의 낮은 지지율을 보였다.
구동독 지역의 주민들은 이와 매우 상이한 경향을 나타낸다. 사민당이 기민/기사연보다 약 5% 가까이 높은 지지율을 보여 30.5%에 달했고, 좌파/민사당이 25.4%를 득표해 제2당의 위치를 장악했다. 기민/기사연은 좌파/민사당보다 불과 1% 더 낮은 지지율을 얻었지만 제3당에 머물러야 했다. 다른 두 소수정당에 대한 지지율도 구서독 지역에서보다 조금씩 낮다. 구서독 지역에서 좌파/민사당이 사민당으로부터 지지자들을 견인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반면, 구동독 지역에서는 민사당에 대한 전통적인 지지를 유지한 것이다.

3) 종사상 지위에 따른 정당 지지 분포
종사상 지위에 따른 분포도 지역만큼이나 두드러진 차이를 보였다. 양대 정당 간에도 종사상 지위에 따른 각 집단의 지지율은 약 5∼7% 정도의 차이를 보였으며, 학생과 자영업자의 경우는 거의 곱절의 차이를 나타냈다(<표 5> 참조).

<표 5> 종사상 지위에 따른 정당지지 분포(첨부파일 참조)


육체노동자를 중심으로 분류된 노동자층은 37%가 사민당을 지지했으며, 그보다 6% 적은 31%가 기민/기사연을 선택했다. 동맹90/녹색당과 자민당의 노동자 기반은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좌파/민사당은 12%를 획득해 일정한 노동자적 기반을 과시했다. 일반노동자층만 보면 사민당과 기민/기사연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공무원과 고위 사무직을 포함하기는 했지만 사무직 노동자들을 함께 계산하면 양대 정당의 노동자 지지율 차이는 약 9%로 가볍게 볼 수치가 아니다.
자영업자들은 노동자들과 정반대의 투표경향을 보였다. 기민/기사연이 압도적으로 많아 전체 자영업자들 중 42%로부터 지지를 받은 반면, 사민당과 좌파/민사당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어 21%와 6%에 머물렀다. 자민당도 불과 2%의 차이로 사민당에 버금가는 지지를 자영업자들로부터 받았으며, 동맹90/녹색당도 좌파/민사당의 두 배인 12%를 얻었다.
연금생활자들의 경우도 기민/기사연 지지율이 높아 자영업자의 경우와 동일한 수치인 42%를 나타냈다. 그러나 소수정당들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으며, 사민당에 대한 지지율은 그리 낮지 않아 36%를 기록했다. 연금생활자들의 지지율이 가장 낮은 정당은 동맹90/녹색당으로 4%에 불과했다. 기민/기사연의 60세 이상 지지율이 높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학생들의 지지도는 자영업자와 정반대의 경향을 보였다. 사민당이 가장 높아 40%에 도달했고 기민/기사연은 25%였으며, 동맹90/녹색당, 자민당, 좌파/민사당 순으로 낮아졌다. 역시 젊은층의 지지율 분포처럼 탈물질주의적ㆍ탈권위주의적 요소가 작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실업자의 경우는 일반노동자의 경우에 준하지만, 특기할 것은 좌파/민사당에 대한 지지율이 23%로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 비율은 기민/기사연 지지율(24%)보다 겨우 1% 적은 것이며, 사민당 지지율(31%)보다도 8%만 적은 것이다. 이것은 양대 정당에 대한 노동시장정책과 사회정책에 대한 실업자들의 불만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더 중요한 요인은 구동독 주민에 대한 사회경제적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구동독 지역 실업률은 구서독 지역 실업률의 두 배이며, 하르츠 법안 등 정부의 사회정책이 아직도 동서독 지역 주민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실정이다. 실업자들과 구동독 주민 전체의 정당 지지경향이 유사하게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정당별로 보면, 사민당은 자영업자와 실업자를 제외한, 노동자, 사무직, 연금생활자, 학생들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고 있는 중도좌파 성격을 강하게 띠며, 기민/기사연은 자영업자와 연금생활자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는 보수적 중도우파의 성격을 띤다. 좌파/민사당은 노동자와 실업자에 지지율이 집중된 전통 좌파 정당인 반면, 자민당은 자영업자 중심으로 사무직과 학생들의 지지를 일정하게 받는 전통적인 우파 정당이다. 한편 동맹90/녹색당은 학생, 자영업자, 사무직 등 인텔리겐차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는 전형적인 탈물질주의적 신좌파 정당으로 남아 있다. 2005년 독일 총선은 탈물질주의적 신좌파가 세력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가운데, 계급 균열이 확대된 선거라고 할 수 있다.


3. 정당 선택의 변화 경향

1) 적녹연정(사민당-동맹90/녹색당) 지지자들의 변화 경향
적녹연정의 연립파트너들은 대부분 실표했다. 사민당은 7년간의 정치에 대한 부담을 가장 크게 받아 실표의 폭이 컸으며, 동맹90/녹색당도 사민당 지지자들로부터 일부 유입되기는 했으나 역시 전반적으로 많은 지지자들이 당을 떠났다(<그림 2> 참조).
특히 사민당 지지자들의 경우는 분당으로 인해 전체 실표(4.2%, 약 236만 명) 중 41%에 해당하는 약 97만 명이 좌파/민사당을 따라갔으며, 기권자도 약 37만 명이 양산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민/기사연을 선택한 기존의 지지자들도 적지 않아 약 62만 명에 달했다. 자민당과 동맹90/녹색당 및 기타 정당으로 지지 정당을 바꾼 사민당 지지자들도 적지 않아 각각 약 14만 명에서 16만 명을 헤아렸다.

<그림2> 사민당 지지자들의 지지 경향 변화(첨부파일 참조)

분당이라는 효과를 제외하면 사민당을 떠난 유권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정당은 기민/기사연이다. 기민/기사연을 선택한 62만 명은 전체 이탈표 중 26.3%에 해당하는 높은 비율이다. 사민당과 기민/기사연의 정책적 차별성이 약화된 결과이다.

<그림3> 동맹90/녹색당 지지자들의 지지 경향 변화(첨부파일 참조)

동맹90/녹색당은 사민당으로부터 14만표를 획득하기도 했으나, 좌파/민사당에게 24만 표, 기민/기사연에게 13만 표 등 다른 정당들에게는 모두 빼앗겨 약 37만표(-0.5%)의 지지자 감소를 초래했다. 기권한 지지자들도 적지 않아 약 7만 표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체 이탈 표의 약 13.7%에 달하지만 다른 정당들에 비해서는 가장 낮은 수치이다(사민당 15.7%, 기민/기사연 29.0%, 자민당 48.0%). 이것은 이미 대부분의 정당들이 탈물질주의적 정책을 수용함으로써 동맹90/녹색당 지지자들이 이동하여 선택할 여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당을 떠난 동맹90/녹색당 지지자들의 약 47%가 좌파/민사당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여성과 환경 및 반전 문제에서 좌파/민사당이 적극적으로 탈물질주의적 정책을 수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성과 젊은층의 좌파/민사당 지지율이 높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그보다는 동맹90/녹색당 지지자들 중 계급모순을 인식하는 근본주의적 성향의 지지자들이 적녹연정 참여를 주도했던 현실주의 노선에 반대한 현상으로 해석된다.

2) 기민/기사연-자민당 연립 지지자들의 변화 경향
기민/기사연도 이번 선거에서 실표를 거듭했다. 적녹연정으로부터 유입된 표들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다른 정당들에게 표를 빼앗겼다(<그림 4> 참조). 반면 자민당은 기권자를 많이 내긴 했으나, 기민/기사연과 적녹연정 지지자들로부터 많은 지지표를 획득하여 득표율을 제고했다(<그림 5> 참조).
기민/기사연은 전체 실표 210만 표 중 28.1%에 해당하는 62만 표를 사민당으로부터 획득하고, 5.9%인 13만 표를 동맹90/녹색당으로부터 견인하여, 최종적으로 약 146만 표(-3.3%)의 실표를 보였다. 기민/기사연 지지자들 중에서도 약 29만 표는 좌파/민사당으로 이동하는 이데올로기적 월경을 했다. 그러나 기민/기사연 지지자들은 무엇보다 연립파트너인 자민당으로 이동해간 비율이 전체 이탈 표 중 50.2%나 되었으며, 기권율도 29.0%를 보여, 대부분은 동일한 이데올로기 진영에 머물거나 투표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그림4> 기민/기사연 지지자들의 지지 경향 변화(첨부파일 참조)
<그림5> 자민당 지지자들의 지지 경향 변화(첨부파일 참조)

2005년 선거에서 자민당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2002년도 총선에 비해 2.4%에 해당하는 103만 표의 지지를 추가로 획득하여 다시 제3당의 위치를 회복한 것이다. 자민당은 적녹연정으로부터 지지자들을 견인했으나, 대부분의 새로운 지지자들은 기민/기사연으로부터 옮겨온 부동층이었다. 자민당은 전체적으로 득표율을 제고했기 때문에 이탈 표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전체 이탈 표 중에서 기권자의 비율은 대단히 높았다(48.0%). 더욱 놀라운 것은 이탈 표들 중 전체의 40%에 해당하는 10만 표가 좌파/민사당을 선택하는 이데올로기적 월경을 했다는 것이다. 기민/기사연이 노동자층에 일정하게 뿌리를 둔 중도우파 정당이라면 자민당은 자영업자와 기업을 중점적으로 대변하는 전통적인 우파 정당이므로, 이 월경은 매우 극단적인 선택으로 해석된다.

3) 좌파/민사당 지지자들의 변화 경향
좌파/민사당은 전체 4.3%에 해당하는 212만 표를 추가했다(<그림 6> 참조). 좌파/민사당의 지지표들은 대부분 구동독 지역의 민사당 지지자들과 사민당 지지자들로부터 왔다. 사민당 좌파를 이끌던 라퐁텐(Oskar Lafontaine)을 중심으로 창당된 선거대안당(WASG)과 구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이 연합한 결과이다.

<그림6> 좌파/민사당 지지자들의 지지 경향 변화(첨부파일 참조)

그러나 구서독 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민사당이 공산당의 후신이라는 점에서 부담을 느껴 좌파/민사당을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민당 지지자들로부터 97만 표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구서독 지역의 전체 득표율은 4.9%에 불과했다.
사민당으로부터 옮겨 온 지지자들 외에 새로운 지지자들 중의 많은 부분은 2002년도 선거에서 기권한 유권자들이었다. 전체 신규 지지자들 중 20.3%에 해당하는 43만 표가 기권표로부터 유입된 것이었다. 그밖에 기민/기사연과 자민당으로부터 이데올로기적 월경을 해온 유권자들도 18.4%인 39만 명에 달했다. 새롭게 좌파/민사당을 선택한 유권자들 중 사민당 외 다른 정당 지지자들과 기권자들에서 유입된 수가 기존 사민당에서 유입된 유권자들보다 8.4%나 많은 54.2%를 보여 좌파/민주당의 성장가능성을 제시하는 해석도 가능하다.
2002년도 기권자들은 대부분 기성 정당에 대한 혐오나 실망성 투표의 성격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좌파/민주당과 기타 소수정당을 지지한 기권자들의 비율이 전체 기권자의 28.6%였던 반면, 기성 정당 지지자들은 대거 기권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그림 7> 참조).

<그림7> 기권자들의 지지 경향 변화

그에 따라 2005년도 총선의 투표참여율은 지난 선거 때보다 1.4%가 하락해 77.7%에 머물렀다. 기존의 기권자들이 신당과 기타 소수정당에 대한 기대를 걸고 투표에 참여했으나, 새롭게 유입되는 기권자들이 더 많아진 까닭이다.
좌파/민사당과 자민당이 좌우에서 약진을 했지만, 2005년도 총선의 결과는 실망성 투표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유권자들 절반이 투표가 임박해서야 지지 정당을 결정했으며, 약 1/3이 적극적 지지보다 실망에 따른 소극적 투표를 한 것이 사실이다(각주 : http://www.tagesschau.de/aktuell/meldungen/0 ,1185,OID4766402,00.html(검색일: 2005년 9월 19일).). 자민당의 득표율 제고와 좌파/민사당의 부상으로 계급 균열이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좌파/민사당의 경우도 실망성 투표의 효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실제 새롭게 좌파/민사당을 지지하게 된 유권자들의 51%가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에 따른 반사적 투표인 것으로 나타났다.


4. 결론

정당별 득표율만을 볼 때, 2005년 독일 총선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연정 참여 정당 및 양대 정당의 약화와 소수 정당들의 약진이다. 연정 조합에 대한 지지도는 대연정이 가장 높지만, 그중에서는 현 총리 슈뢰더가 이끄는 대연정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신호등 연정과 좌파 연정에 대한 지지도도 그에 버금가도록 높은 비율을 보였다. 개별 수치상으로는 사민당이 가장 실표를 많이 한 것으로 집계되지만, 좌파/민사당으로 분리해 나간 표를 감안하면 좌파와 중도좌파 진영의 세 정당에 대한 지지율은 불과 0.3% 하락하여 우파와 중도우파 진영의 두 정당의 하락률 0.9%보다 작게 나타났다. 결국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진영 간의 승패를 따질 근거는 없으며, 오직 중도의 양대 정당에 대한 지지율 하락과 선명한 좌우 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상승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정당 선택의 정책별 동기에서는 기민/기사연과 자민당이 유사한 경향을 보여 경제정책이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사민당과 좌파/민사당은 사회정책이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 그러나 사회정책에 대한 관심도는 좌파/민사당에서 가장 두드러졌으며, 동맹90/녹색당 지지자들은 여전히 환경정책에 우위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인구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여성과 젊은층은 상대적으로 탈물질주의적 진보성을 띠어 사민당과 동맹90/녹색당에서 지지율이 높았던 반면, 남성과 노년층의 지지율은 보수중도당인 기민/기사연과 전통적인 좌파정당인 좌파/민주당에서 높게 나타났다. 종교와 지역의 정치 균열 면에서는 기민/기사연이 여전히 가톨릭 세력에 상대적으로 많이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남부 가톨릭 지역과 북부 산업지역 간의 새로운 지역균열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균열은 이미 기존에도 존재했던 것이며 이번 선거에서도 정치적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동서 간의 지역균열을 남북 간의 지역균열로 상쇄하려는 언론 플레이로 여겨지는 측면이 없지 않다.
지역적으로는 동서 간의 균열이 두드러졌다. 종사상 지위를 기준으로 보면, 자영업자들이 기민/기사연과 자민당을 압도적으로 많이 지지한 반면, 노동자와 실업자들의 지지율은 좌파/민사당과 사민당에서 높았다. 특히 좌파/민주당은 노동자ㆍ실업자의 지지율이 대단히 높아 자영업자의 비율이 압도적인 자민당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결국 좌우 정당연립 간의 비김수를 결과하여 정국을 표류시킨 2005년도 독일 총선 결과는 양대 정당과 적녹연정에 대한 실망성 투표와 동서독 간의 지역균열 및 종사상 지위에 따른 계급 균열의 확대로 특징지을 수 있다.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하지만 아직 아무도 승자로 확인되지 못했다. 아마도 기성 정치무대를 뒤흔드는 격변을 준비하는 역사의 흐름만이 이번 선거의 진정한 승자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수행ㆍ안삼환ㆍ정병기ㆍ홍태영, 2003, 『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 영국,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이탈리아 국영방송 RAI 뉴스, http://www.rainews24.it/Notizia.asp?NewsID =56770(검색일: 2005년 9월 19일).
정병기, 2003, “독일 적녹연정의 ‘아겐다 2010’과 신자유주의 정치,” 『현장에서 미래를』제93호(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2월호), pp. 5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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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rn, No. 29, 2005.7.14, pp.46-51.



한노정연 홈페이지 http://kilsp.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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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 줄기 빛'인 젊은이들과 '히틀러의 아이들'

 
    칼럼 > 칼럼
역사의 '한 줄기 빛'인 젊은이들과 '히틀러의 아이들'
[정대성의 독일통신](3) - '작은 히틀러'와 '백장미단'
정대성 
히틀러
'히틀러'. 세상이 다 아는 이름이자, 지구촌 사람들이 '독일' 하면 떠오를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히틀러란 이름은 오늘날까지 그 '악명'으로 독일의 '어두운 과거'를 대변하고 있다.

독일 사람들은 어떨까. 히틀러는 그냥 지우고 싶은 끔찍한 과거일 따름일까. 그렇지 않다. 현재를 살아가는 독일인에게 히틀러와 나치는 단지 먼 옛날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직도 독일은 나치 희생자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하고, 그들에게 바쳐진 기념물이 독일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올해만 해도 베를린에서 거대한 기념물이 새로 완공되었다. TV에서는 히틀러의 시대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물리지도 않는 단골 메뉴이며, 서점에서 히틀러와 나치를 기록한 책을 찾기도 식은 죽 먹기다.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인수한 1933년에서 2차대전의 끝인 1945년까지 겨우 12년을 지배한 독일 '제3제국'의 역사는 이처럼 오늘의 독일인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어두운 과거이자 '지나간 현재'인 것이다.

'하일 히틀러!' 세상이 다 아는 나치식 경례로 '히틀러 만세'라는 뜻이다. 물론 히틀러 만세를 외치며 세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은 나치의 역사는 다행히 60년 전에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종전 60주년을 기념해 올해 독일에서는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에 서명한 5월 8일 전후로 갖가지 행사들이 열리며 '나치로부터의 해방'을 자축한 터였다.

하지만 나치의 '망령'은 여전히 독일을 배회하고 있다. 나치를 추종하는 신나치인 '히틀러의 아이들'이 오늘도 독일 땅을 버젓이 활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국인 증오를 앞세운 폭력을 마다하지 않으며, 낡은 흑백 영화처럼 다시금 '하일 히틀러'를 외친다. 물론 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탓에 대놓고 외치기는 어렵다.

그런데 최근 '용감한' 히틀러의 아이 하나가 법정에 섰다. 신나치 시위에서 과감히 오른 팔을 치켜들며 '나치식 경례'를 한 대가다. 그는 법정에서 당당했다. "당신이 작은 히틀러라고 생각하나요?" 판사가 묻는다. "예."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는 문제의 '작은 히틀러'
'작은 히틀러'를 자처하는 29세의 이 독일 청년은 철두철미한 나치 추종자다. 그는 십여 년 전 5명의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방화사건의 범인 가운데 하나였다. 범행동기는 '외국인 혐오'였다. 그는 최고형인 10년을 선고받고 감옥 생활을 했다. 그리고 출소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법정에 선 것이다.

판사의 말대로 10년 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구제불능의 이 신나치는 결국 넉 달 동안 다시 '창살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이름으로' 법정에 선 것은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역사를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나치와 히틀러가 도발한 2차대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1943년 2월 일단의 독일 청년들도 법정에 선다. 이유는 정반대였다. 히틀러 만세를 부르는 대신 '백장미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과 선동을 일삼은 '죄' 때문이었다.

백장미단은 숄 남매를 비롯한 뮌헨 대학생들이 주도한 비밀 지하 조직이었다. 그들은 1942년 6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주로 뮌헨과 남독일 지역에서 히틀러와 나치에 반대하는 팜플렛을 배포하거나, '히틀러 살인자' '자유' 같은 구호를 벽에 휘갈기며 무소불위의 파시즘에 용감히 맞선다.

하지만 1943년 2월 18일 뮌헨 대학에서 팜플렛을 나눠주던 숄 남매가 체포된다. 나흘 뒤 나치 법정에서 숄 남매를 포함한 3명의 백장미단 청년은 사형을 선고받고 바로 그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두 달 뒤에도 2명의 청년과 뮌헨대학 교수 하나가 '백장미단의 이름으로' 같은 길을 밟는다.

2월 초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결정적인 패배로 패전의 먹구름이 드리워지자 초조해진 나치 정권은 어떤 저항의 싹도 용납지 않으며, 꽃다운 청년들의 목숨마저 그렇게 순식간에 앗아간 것이다.

1943년 2월 22일에 처형된 3명의 '백장미단' 청년들
그러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숨져간 젊은 넋들의 원혼을 달래기라도 하듯 나치 군대는 돌이킬 수 없는 '패전의 벼랑'으로 치달았고, 히틀러는 자기 손으로 불지른 침략전쟁의 파국이 코앞에 닥치자 지하 벙커에서 자살의 길을 택했다. 결국 히틀러는 살아 생전 이루 헤아리기 힘든 '만세' 세례를 받고도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올해 독일에서는 나치 치하에서 백장미단의 이름으로 히틀러에 맞선 그 청년들을 그린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수많은 히틀러의 아이들이 앵무새처럼 히틀러 만세를 노래할 때 그들은 용감하게 저항하며 꽃다운 목숨을 바쳤고, 오욕의 나치 역사에서 이렇게 '한 줄기 빛'으로 남은 것이다.

60년 뒤 법정에 선 '작은 히틀러'는 자신이 그 '오욕의 역사' 맨 뒷줄에 서 있음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나아가 나치에 망령든 '오늘의' 히틀러의 아이들은 나치 역사가 세계뿐 아니라 그들 독일인에게까지 골 깊은 상처로 남았음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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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호] 독일 거대연립정부 형성과 사민당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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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호] 독일 거대연립정부 형성과 사민당의 미래
정세와 초점/
한노정연 
정세와 초점/


독일거대연립정부 형성과 사민당의 미래

갈현숙 / 한노정연 연구원, 베를린자유대 사회학 박사과정


지난 9월 18일 독일에선 연방총선이 치러진 후 수상을 결정하고 내각을 형성하기까지 거의 한 달이 소요됐다. 독일의 정치 제도상 한 당이 투표율 중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이념의 색깔이 비슷한 정당간의 연합으로 과반수 이상의 지지가 될 경우 연립정부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선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은 정당이 없을 뿐더러 연립가능한 정당간의 연합으로도 과반수를 넘기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연립가능한 정당간의 연합을 조합한다면 보수당적 성향을 띤 기민/기사 연합당(이하 연합)과 자민당 그리고 보수당과 대별되게 표현되는 진보적 성향을 띤 사민, 녹색당간의 연합을 생각해 왔다. 아래 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이번 선거에선 언급된 방식의 조합으론 지지율의 과반수를 넘을 수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좌파연합당의 성향이 분명히 진보적 성향을 띤 정당임에도 사민당과 녹색당은 좌파연합당과 연정의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봉쇄했다는 점이다. 적적녹(사민-좌파연합-녹색)의 지지율을 합산하면 51%로 보수성향당의 지지율인 45%보다 6%앞선다.

<표 1> 2005년 독일 연방총선결과(투표율: 77.7%)
정당명
의석수(총 614석)
지지율(%)
사민당(SPD)
222
34.2
기민기사연합(CDU/CSU)
226
35.2
좌파연합당(Linke.PDS)
54
8.7
자민당(FDP)
61
9.8
녹색당(Grüne)
51
8.1
기타
-
4.0


선거결과를 두고 볼 때 국민들은 보수적 성향을 띤 정당보다는 진보적 성향을 띤 정당에 보다 많은 지지율을 보냈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세적으로 수용하는 정치가 아닌 보다 적극적인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치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사민당과 녹색당의 좌파당에 대한 거부, 그리고 좌파당 역시도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펼치는 어떠한 당과도 연정을 할 수 없다는 당론으로 인해 진보적 성향의 정당간의 연정과 내각구성은 선거전부터 불투명하게 비춰졌다.
드레스덴지역의 최종선거(드레스덴지역은 선거직전 후보자가 갑자기 사망한 관계로 2주 후에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결과 연합당에 1자리 의석수를 늘려줬다.) 이후 독일에서 가장 큰 국민정당인 사민당과 연합간의 거대 연립정부에 대한 구체적 합의의 진행속도가 가속화됐다. 거대 연립정부(이하 연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음에도 미디어를 비롯해 정당들까지도 가장 구체적이면서 가장 최선의 대안이 거대 연정이라는데 합의하는 분위기였다. 부정적인 측면의 견해로는 우선 수상 자리에 대한 문제로, 슈뢰더 전 총리와 메르켈간의 인물 중심적 평가에서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보다 많은 지지를 받은 연합의 대표인 메르켈이 아니라 슈뢰더란 점과, 조기총선의 모험을 걸었던 슈뢰더의 측면에서도 수상 자리를 쉽게 내줄 수 없다는 점에서 양 당간의 합의가 도출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사실 슈뢰더는 드레스덴의 선거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수상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리한 정치적 발언들을 해왔다. 예를 들면 연합은 두 당, 즉 기민당과 기사당의 지지율을 합해 얻은 결과이므로 일당으로 국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당은 사민당이고 그러므로 수상 자리는 사민당이 지켜야 한다는 식의 논리였다. 두 번째 부정적 측면은 두 당간의 선거 시 제시했던 공약의 내용을 중심으로 봤을 때 연정으로 향하기 위해 노동, 사회정책에서 서로 합의 가능할 수 있는 타협점과 향후 내각이 구성된 후 서로간의 갈등이 될 만한 요소들의 조화가능성에 대한 회의에서 나온다. (1965년에 연합과 자민당간의 연정이 깨지면서 1966년부터 1969년 까지 사민당과 연합당간의 연정경험이 이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예상에도 불구하고 거대연정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편으론 재선거를 치르더라도 연합과 사민당 모두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보다는 정치적 위험이 더 크게 계산된 부분이 분명 있다는 점과 다른 한편 양 당 간에 이견이 조율되지 않던 상황에서 미디어는 줄곧 현재 독일은 위기에 빠져있고 정치인과 정당들은 이러한 현실을 책임 지기 위해서 중대한 결정, 즉 거대 연정으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식으로 여론몰이가 진행되고 있었다. 재선거가 치러지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 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인지 국민도 정치인도 모두가 재선거를 기피한 부분이 있고, 그렇다면 주어진 조건에서 연합당과 사민당이 거대연정을 실현시켜야 하는 점, 그것이 현실의 조건이라 할 땐 양 당은 보다 많은 권력쟁취를 위해서 서로 기 싸움을 벌여야만 했었다. 바로 이 권력투쟁 때문에 슈뢰더가 끝까지 수상 직을 쉽게 내놓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드레스덴 선거 이후 연합당과 사민당은 거대연정을 형성을 위한 협상에 박차를 가했다. 그 협상의 결과로 우선 수상직과 장관직 6개 그리고 각료 2개를 연합에 배정했고 사민당은 부총리직과 장관직 8개를 갖기로 협의했다. 모두 수상직과 부수상직을 포함해 각각 9개의 내각 직을 나누어 갖게 됐다. 이 협상의 결과로 독일 정치역사상 최초로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메르켈은 1954년 7월 신학생 호르스트 카스너(Horst Kasner)와 선생이었던 헤르린트 카스너(Herlind Kasner)간의 첫째 딸로 함부르에서 태어났다. 이후 카스너 가족은 구동독 지역이었던 Templins(템플린스)로 이사했고 메르켈은 대학시기 전까지 이 곳에서 보냈다. 이후 (Leipzig)라이프지히 대학에서 화학전공을 시작해서 이후 박사학위까지 취득한다. 1989년 Demokratischer Aufbruch(민주주의 출발)당에 가입함으로써 처음 정계에 입문해 이듬해 현재의 동독지역 CDU에 입당하게 된다. 1991년 헬무트콜이 최초 통일된 독일의 수상으로 선출된후 여성과 청소년을 위한 부의 장관으로 최초로 장관직을 역임했고 정치적 경력을 쌓으며 2000년 CDU의 최고 당수로 선출됐고 2005년 10월 독일연방공화국의 최초 여성수상으로 등극했다.
이 여성으로서 수상 자리에 올랐다.
수상 직에 메르켈이 결정됐던 당일 독일 언론에선 여러 관점의 보도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정치적 분석에 앞서 무엇보다도 가장 역점을 두고 보도됐던 뉴스는 바로 그녀가 최초의 독일 여성 수상이란 점이었다.
그런 보도를 보면서 메르켈을 여성으로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내 자신에게 끊임없이 의구심이 생겼다. 이러한 의구심은 분명, 박근혜가 대통령후보로 거론될 때 그가 여성이란 이유로 정치적 지지자를 확산시켜가는 현상을 볼 때 박근혜를 여성을 볼 수 없는 관점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두 여성을 보며 공히 비판이 가는 지점은 여성으로서 최고 정지적 지도자가 될 경우 남성 중심의 정치판에 여성으로서 그런 자리에 올랐다는 결과만으로 다른 평가의 지점들이 탈각되는 것이다.
아무튼 수상 직 결정이후 사민당내부에선 여러 논의가 진행됐다. 우선 슈뢰더는 차기내각에 관여하지 않고 정계를 떠나겠다는 발표를 했고 기존에 사민당 당수였던 뮌터 페링이 부수상직을 맡게 됐다. 일반적으로 부수상직과 외무부장관의 자리는 겸직이었다. 그러나 이번 거대 연정에선 부수상직과 외무부 장관직을 분리하고 기존의 경제&노동부를 분리해서 노동부장관직을 뮌터 페링(사진) 사진 출처: http://www.spiegel.de/dossiers/politik/0,1518,285193,00.html.
이 겸직하기로 결정했다.

사민당은 수상 직을 연합에 주는 대신 아젠다 2010을 완수할 수 있는 중요한 장관직인 노동사회부와 건강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내각인 재무부를 가져옴으로써 비싼 거래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표 2> 2005년 독일 총선 이후 거대연정 내각(2005년 10월 17일 오후 현재)
연방수상
Merkel 메르켈
연합-CDU (여)
수상사무처장(각료)
de Maizière 데 마이지레
연합-CDU
연방의회의장(각료)
Lammert 람메어트
연합 원내교섭위원
내무부
Schäuble 쇼이블레
연합-CDU
경제&기술부
Schtoiber 슈토이버
연합-CSU
국방부
Jung 융
연합-CDU
가족부
Leyen 레이엔
연합-CDU(여)
교육부
Schavan 샤판
연합-CDU(여)
소비자보호&농림
Seehofer 제호퍼
연합-CSU
부수상
Muenterferig 뮌터페링
사민당
노동&사회부
외무부
Steinmeier 슈타인마이어
사민당
법무부
Zipries 집프리스
사민당(여)
재무부
Steinbrueck 슈타인브뤽
사민당
건강부
Schmidt 슈미트
사민당(여)
환경부
Gabriel 가브리엘
사민당
개발(도상국)지원부
Wieczorekzeul 비조렉죌
사민당(여)
교통&건설부
Tiefensee 티펜제
사민당


사민당은 연합과 비교해 비교적 일찍 장관직을 내정했다. 그러나 연합의 경우는 내부 기민당과 기사당간의 장관직을 두고 쉽게 합의가 도출되지 못했다. 가장 큰 장애물은 경제부장관직을 맡게 된 슈토이버가 메르켈을 견제할 만안 그의 사람들을 심기위해 보다 많은 장관직을 무리하게 기사당에 배정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비자보호 및 농림부 장관직만을 결국 얻어내게 됐다. 이렇게 해서 연합 내부에선 기사당이 두개의 장관직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기민당 의원으로 배정이 확정됐다.
10월 17일 오후 기민/기사 연합당출신 신임 장관들이 결정 난 후 이들 신임장관과 메르켈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 슈피겔지는 이 사진 아래에 “메르켈의 대단히 친절한 가족(Merkels schrecklich nette Familie)”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출처:http://www.spiegel.de/politik/deutschland/0,1518,grossbild530311380206,00.html/

신임내각의 주역들이 완료됐다. 그러나 연합과 사민당간의 아직 조율되지 못한 중요한 쟁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연금개혁, 외교정책에 있어선 두 당이 공통분모가 많은 반면 노동시장정책, 세금정책, 사회정책, 에너지 정책 그리고 터키의 유럽연합가입문제 등에선 공통분모를 찾기가 힘들다.

<표 3> 사민당과 연합 사이의 갈등이 되는 주요 정책들

사민당
연합(기민/기사)
실업급여
최대 18개월로 한정, 실업급여II가 서독지역수준과 맞춰질수 있도록 동독지역 상향 지원
실업급여 최대 축소 기여금에 비례한 지급
해고규정
해고보호규정 유지 (변화 없음)
해고보호규정 최대 완화
세금정책
소득세 비례 세율규정
소득세 기준세율 축소, 실업기금 형성을 위해 부가가치세 인상(간접세 인상)
사회보험
시민보험(Bürgerversicherung) 확산-소득기준 보험료책정
소득과 무관한 무차별 동일보험액 책정(Kopfpauschal)
환경 및 에너지 정책
원자력폐기 고수 석탄생산 바람직
원자력에너지 복원 및 석탄생산 반대
외교정책
터키 유럽연합가입 찬성
터키 유럽연합가입 반대

선거전이 한창일 때 두 당은 상대 당에 대해 정책내용뿐만 아니라 인신공격까지도 서슴지 않고 했었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을 듯 보였던 두 당이 거대연정이란 지붕아래 공생하게 됐다. 양당의 대표들은 어제의 일은 덮고 독일의 앞날과 미래를 위해 더 많은 이해와 협력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보며 너무나 아이러니하게 느끼는 점은 사민당의 정치적 판단이다. 좌파당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으나 연합과는 함께 할 수 있었던 현재 독일 사민당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연합은 사회적 정의와 형평성 보다는 경제발전을 위한 노동, 사회정책의 유연성을 우선의 가치로 내세운다. 현재 독일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일자리 창출을 양 당이 모두 차기내각이 풀어야할 과제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 해법의 내용은 너무나 다르다. 그 모든 차이를 인지하면서 사민당은 연합과 손을 잡았다.
혹자는 이번 사민당의 연정결정을 두고 제2의 고데스베르크 강령이고 이젠 정말 건너지 말아야 했을 강을 사민당이 건너고 말았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관점들에 대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너무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사민당내부의 당권파들은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슈뢰더정권 1기 때의 신중도파(neue Mitte)들의 정치적 지향이 2005년 거대연정으로 결과된 점 - 조기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이 정책을 펼친 점, 선거에서 좌파성향의 당들과 연합하지 못한 점, 거대연정으로 밖에 향할 수 없었던 점 - 에 대해서 그들은 정치적 책임을 져야만 한다. 150년 사민당의 역사는 신중도주의자들만의 역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신중도주의자들은 그들의 노선만을 점철시켜 지난 7년간 사민당을 끊임없이 우측으로 개량화 시켜왔다. 의회정치 내에서 사민당 진화의 방향이 현재 독일 사민당의 모습으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일자리가 있고 조직된 노동자 이외의 노동자(대표적으로 실업자와 노조에 가입되 있지 않는 비정규직)와 그 외 시민들의 권리와 요구에 대해서 사민당은 어떤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사민당이 주요 타겟으로 삼은 중간계층을 포함하기에도 그들의 이념은 이미 많이 오른쪽으로 흐르고 있다.
남한의 정치제도만 봐오던 내가 독일에서 거대 연정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보면서 소위 민주주의적인 의회정치의 다른 차원을 경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복잡하고 더딘 과정 어디에도 아래로부터의 개입과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발견되지 못했다. 훨씬 세련되고 섬세한 유럽식 민주주의적 의회정치 제도, 그걸 통해 다시 한 번 인지하게 된 것은 의회 밖의 사회, 노동운동의 귀중함이다. 사민당의 혁신 역시도 이러한 의회 밖의 운동세력의 압력으로 당내의 당권투쟁이 다시 촉발되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이념이 재논의 될 수 있을 때만이 그들의 불투명한 미래가 보다 투명해 질 것이라 생각된다.
이제 형성되어 출발할 독일 거대연정의 수명이 과연 얼마만큼 유지될지 그 역시도 지켜볼 일이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http://kilsp.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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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호]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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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호]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지양
특집II: 노동운동 출구를 찾자(6)
한노정연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지양

현장에서 미래를 제114호
만프레드 스트로벨


특집II/노동운동 출구를 찾자(6)


이 글은 독일의 고참 현장 활동가가 노동자 계급운동의 새로운 지평으로서 기존의 박제화된 투쟁, 구호만 요란하게 난무하는 관념적 투쟁들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부터 정면 돌파할 계급 내, 계급 간 연대,‘직접적 생산자들의 연대’를 제안하고 있는 글입니다. 노동운동의 역사와 노동자계급의 현재 상태가 우리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논의 내용이 다소 생소할 수 있고, 또한 정치경제학적 사유 속에서 구사되는 개념들 때문에 어려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출구를 찾아나가는 데에 유력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아 게재합니다. 노동자 계급운동의 미래를 고민하는 동지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 편집자 주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지양


만프레드 스트로벨 / 독일 비판적 노조활동가 모임. 번역: 송기철 연구원


* 이 글은 2005년 7월 15일 베를린 메링호프에서 개최되었던 강연문을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약간의 개인적 이력을 소개하면서 강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 개인적인 발전과 관계된 것이고, 발전이야말로 오늘 주제의 중심적인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지양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발전 가능한 것으로 사고하고 논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발전이 혁명적 행위로 전환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발전을 고려하지 않고, 인지하지 않고, 추적할 수 없는 그러한 사고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개관적인 관계의 발전이건, 개인적 집단적 주체성의 발전이건, 개념의 발전이건 간에 그렇습니다.

저는 3년 전에 정년퇴직한 63세의 연금생활자입니다. 1960년대 말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지만 중퇴를 하고 도로건설장, 가구공장, 달걀부화장, 인쇄공장, 그리고 배관 공장에서 임금노동자로 생계를 이어온 사람입니다. 제가 1975년부터 일했던 배관공장은 구 만네스만 재벌의 계열사로 사회민주당의 아성이었으며, 저는 이곳에서 노동조합의 대표, 그리고 마지막 3년간은 비 집권파의 대표로 직장평의회 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다양한 공장들에서 한 일들은 저의 개인적인 발전을 각인시켰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두 가지 핵심적인 측면만을 부각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첫 번째 것은 공장의 생산과정들에 대한 지식과 외부세계와의 이것들과의 관계, 즉 사회적 총노동과 개인적이지만 생산적인 소비의 영역들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장과 사회 사이의 관계들과 분리에 대해 제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다면, 총노동의 직접적인 사회적 조직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거나 거의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차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번째로 언급하고자 하는 측면은 정당마르크스주의와 국가마르크스주의와 저와의 관계입니다. 저는 초기에 레닌(과 그리고 트로츠키)의 전통 속에서 노동계급에 사회주의적 의식을 전파하고, 그들의 혁명적 이식을 “부여” 하고자 (이것은 전혀 역설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는 사명감에 충만해 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자체적인 판단에 따른) 마오주의자였습니다. 임금노동과 자본, 즉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화합할 수 없는 계급적 적대성에 대한 필연성과 착취자들을 없애고 무계급 사회의 실현을 위해 중앙에서 관리되는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이를 위해서는 폭력이 혁명에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경쟁관계에 있던 마오주의, 트로츠키주의 그리고 전통적인 공산주의 조직들과 그 선전대들의 활동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껴안고자 했던 혁명적 주체가 실제로는 자칭 대리주체의 대상에 불과했으며, 이들이 비록 자발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노동자들임을 인정하더라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위해 이들의 자발적인 행동을 통해 전통적인 대리자의 지배권을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점은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현장 동료들도 대부분 이점을 곧바로 감지했습니다. 외관상 낙후되어 있고, 개량주의에 물들어버린 노동자들이야말로 이들 분파들 모두 보다도 100배나 많은 현실감각과 역사의식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이야말로, 마오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제아무리 사회제국주의와 관료주의와 구분 짓고 진정한 사회주의를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경험상 기껏해야 아무짝에 쓸모없고, 경찰에 의해서 통제되는 국가경제체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모험을 따르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현장 노동자들은 그와 같은 이유에서 계급투쟁에 대해도 상당히 실용적인 관계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본 측과, 때에 따라서는 총파업이란 형태를 통해 정부와도 진정으로 힘겨루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제 스스로 깨달아야 했던 것처럼, 개별 자본이든 총자본이든 자본이 파멸에 이르거나 탈주하거나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가 위험에 빠질 만큼 투쟁을 고조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대했습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더더구나 기존의 질서가 새롭고 더 나은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계급은 없을 것입니다. 임금노동자로서의 역할에 집착하는 것이 일상의 경험이나 극좌파가 아니었다면 노동자들이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돌이켜보건대, “공산주의 세계운동”의 몰락을 막고자 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은 하나의 에피소드이자 이와 같은 몰락의 징후 자체였으며, 정당사회주의와 국가사회주의 시대에 대한 짧은 송가였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이에 대해 미소 짓거나 웃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만심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앞으로 그 이유가 규명되어야 하겠지만, 정당과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100여 년간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지배적인 인식이었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존하고 있는 정당마르크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오늘날에도,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 사이에서도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노동과 자본의 적대성에서 혁명적이며, 해방을 갈구하는 의식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은 신화입니다. 또한 관념적인 것이 되어버린 전위주의도 정치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신의 손을 더럽힐 수 있는 그러한 위험이 없는 전위주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전위주의는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부정적인 자본비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예찬으로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 2003년 11월 “무계급사회를 추구하는 여성친구들”이 배포한 유인물의 한 구절을 인용할까 합니다.

“사회적 부는 국가에 의해 분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혁명적으로만 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산하는 여성과 남성의 자유스러운 협동체가 자본주의적 강제관계를 대체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의 필요에 대해서 단지 구매력을 갖춘 수요로만 관심을 갖는 시장만을 위한 맹목적 생산이 아니라, 기업의 경제성과는 전혀 다른 합리성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생산이 이루어 질 것이다. 오늘날의 경쟁은 전 세계적 협력으로 대체될 것이다. 임금노동은 폐지될 것이며, 화폐는 박물관에나 전시될 것이다. 필수적인 노동은 최소화되어 의식적으로 분배되고 부차적인 것이 될 것이다. 마침내 능력과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활동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향유의 세계를 살게 될 것이며, 마침내 후회나 상시적인 결핍감에 떨지 않고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인간이 상호 협력하는 관계는 더 이상 강제적인 것이 아니며, 기아나 배제에 대해서도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혁명의 의미는 오늘날 인간을 국가의 품으로 내몰 수밖에 없는, 인간이 사실은 가장 두려워해야만 하는 그러한 불안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가족, 국가, 민족과 같은 모든 비합리적인 집단 등을 비롯하여, 구 사회에 의해 강제된 모든 인간관계의 형태들은 해체될 것이다. 미래의 혁명은 또다시 국가를 정복하고자 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혁명의 과정에서 전혀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미래의 세대들은 언젠가 인간이 과거 국가와 같이 어리석은 것을 가져야만 한 것에 대해 웃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미래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하게 될 것을 혹은 어때야만 하는가를 사전에 결정하거나 규정하는 월권행위만이 아닙니다. 생산자들의 협동체를 전제하는 그러한 발전을 간과하고, 실천을 중재하며, 이 모든 그럴듯한 예언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실천의 주체가 불명확성, 그리고 예언주의로 나타나고, 불확실성과 공허함을 “투쟁에 나서서, 그들에게 전쟁을 선포하자! 임금노예제를 폐지하자!, 국가를 전복시키자! 세계혁명 만세”라는 호전적인 문구 뒤에 감추어버리는 실천의 주체에 대한 불명확성이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말로만의 급진주의 따위가 개량주의적 사회국가론에 대한 자기 과시 외에 어떤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와 정반대인 혁명주의적 외침도 제게는 공허한 메아리처럼만 들릴 뿐입니다.


I. 가능한 미래는 지금의 현실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소망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래의 사회의 모습에 대해 미리 결정하려고 들거나 규정해 버리려고 하는 그러한 미래의 모습들에 대해서는 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래를 위한 실천과 그에 상응하는 주체성의 발전이 모호하고 혁명이라는 비법을 통해 가려버리는 그러한 것이라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 대신 제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임금노동자인 생산자들의 가능한 실천과 실현 조건들을 현재의 관계들에서 출발하여 타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능한 미래는 지금의 현실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발전시키는 것이며, 아니면 소망에 머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현실, 즉 자본주의를 단지 악마의 소행이나 “개 같은 세상”이라고 치부하기만 할 때, 현실의 가능한 부정은 현실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없어도 무관하다고 여기는 혁명적 비판자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현실을 사악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과 공산주의적 미래를 예찬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 그렇게 가능한 미래는 오지도 않을뿐더러 현실을 증오하게만 할 뿐입니다. 가능한 현실부정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기존의 것에 대한 이해는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정을 실질적이며,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현실 자체를 실질적인 개념, 사회적 실천의 특정한 형태나 사회성의 특정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회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질적인 것입니다. “이론을 신비화해버리는 모든 신화들은 인간의 실천과 이러한 실천에 대한 이해에서 합리적인 해결을 찾을 수 있다.” 맑스의 포이에르 바흐 테제의 8번째 항목인 바로 이것을 그의 모든 자본 비판의 동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실천을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천에 의해 의식이 결정되는 것이고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배적인 실천, 여기서 의미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우리의 의식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질적인 관계들을 물적인 형태, 노동 생산물의 사회적 관계들, 혹은 그 특성으로 표현하는 치명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의식 형성에 미치는 일상적인 실천의 효과에 대해 비판적 사고는, 익숙하고 따라서 지배적이 되어버린 사고방식과 범주를 무너뜨려 버리고 이러한 것들이 특정한 형태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관념적 반영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는 앞서 이미 인용했던 유인물을 통해서 확연해집니다. 국가좌파에 대한 투쟁에 대해 유인물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세계를 상품과 화폐, 임노동과 자본, 국가와 법률로 구성하는 것은 불가피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들의 실질적인 토대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유인물을 작성한 여성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본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질적으로 무었을 의미하고, 어떻게 정당화되고, 무엇이 어떠한 목적으로 관련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스스로 증대하는 화폐로서 자본을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현실적으로 해체할 수 없습니다. 자본을 스스로 증대하는 화폐로 규정하는 것 역시 이것의 진정한 해소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본은 스스로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형태로 나타나는 가치 그 이상을 생산하는 노동력의 사용을 통해 이룩되는 것이다.” 하지만 가치란 것이 무엇입니까? 부르주아지 경제의 근본적인 범주는 규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인물의 작성자들은 자본을 자본이라고 지칭하고 화폐와 국가에 대해 각각 진부하고 불합리한 것이라는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마치 이를 통해 모든 것을 말하고, 개념에 대한 고집이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라는 듯 말입니다. 이는 사적인 생산수단 소유자와 노동력의 소지자로 구성된 사회에 있어서 화폐와 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자신들의 몰이해를 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II. 자본의 개념과 그 부정의 일반적 형태

그렇다면, 사회적 참상의 진정한 원인인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토대는 무엇입니까? 여성친구들은 “여전히 자본으로부터, 그것이 주식회사든 개인 소유든 간에, 생산수단을 박탈해야 한다고 답합니다. 모든 죄악의 뿌리는 생산수단이 자본의 손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홀러웨이가 표현한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 즉 자본과 자본가를 등치시키는 것이 가장 큰 불명확성과 혼란의 뿌리입니다.

생산수단은 자본이 소유하거나 그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자본이라는 점입니다. 즉 생산수단은 - 이점이 바로 개인의 손에 있는 것에 대한 진짜 설명입니다만 - 주식회사든, 개인기업이든, 종업원이든 간에 사회적 노동의 특정한 형태를 지배하고, 즉 생산을 통해 교환과 화폐의 형태로 구현되는 노동시간의 등가물의 교환에 대해 지배하기 때문에 자본으로 기능하는 것입니다. 교환을 위한 모든 종류의 사용가치의 사적 생산, 사회적 노동의 이와 같은 특정한 형태, 혹은 사회성의 특수한 형태야말로 생산물에 생산물의 가치 특성으로 사회적 노동이 표현되는 가치의 형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와 같은 특정한 사회적 형태의 노동에 의해서만, 즉 사적인 노동이 일반적으로 집단적으로 구매한,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것 이상의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력에 의거할 때, 생산물로 실현된 노동이 재차 임금노동자들에 자신의 노동력과 그들의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한 이질적인 권력으로 등장할 때, 생산수단이 자본,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가치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교환을 위한 기업의 사적인 생산이라고 하는 사회적 형태는, 그것이 임금노동자들 자신과 좌파 자본주의 비판자들 모두로부터 특정한, 즉 역사적으로 형성된, 따라서 유한한 형태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큼 간단하고, 기초적이며, 친숙하고, 외형상 당연한 것입니다. 자유, 자유시간, 혹은 자유로운 활동의 미명 하에 노동을 비판하는 것은 이와 같은 형태에 대한 무지의 표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회적 불행으로부터의 탈출구는 따라서 그와 분리되고 분리하는 형태로부터의 사회적 노동의 해방에서가 아니라 노동에서의 해방에서, 그리고 가능한 모든 개인적 자유를 특기하는 대안적 활동에 대한 개념적 맹세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소외되지 않은 사회적 생산의 유일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노동강제”로부터의 해방과, 노동이 “부수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공산주의적 자유의 제국과 등치시키는 무계급 사회의 여성친구들에게도 바로 그렇습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사회적 형태에 대한 지배적인 맹목성은 통상적으로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에 대한 축소된 개념과 그리고 그로 인한 생산수단에 대한 축소된 개념과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한 예가 앞서 인용한 유인물에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공장점거들은 “혁명적 쟁취, 즉 재산제도의 부정과 생산의 장악의 전조”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재산제가 부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소유자가 부정되었고, 공장의 집단적 소유자로서 직원들에 의해 대체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생산 자체는 교환을 위한 사적인 생산으로 남아 있고, 따라서 기업의 생산수단과 직원들의 노동력도 생산물과 화폐와의 교환을 통해 재생산되어야 하고 확대되어야하는 사유재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소유자와 비소유자를 분리시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적 소유자 상호간의 분리와, 따라서 자체적인 지휘 하에 작업하는 직원들을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리는 직원들이 기업 내의 지금까지의 사적인 지휘를 자체적인 지휘로 대체했을 때도 여전히 그대로 존재합니다. 이와 같은 것이 경미한 것이 아닐지라도, 모든 사회적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의 전유와 교환에 대한 강제의 해체를 전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쯤 머물러 계속 교환을 위해 생산하는 한, 그것은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건물, 기계, 사유재산과 같은 기업의 생산수단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생산에 필요한 원료, 반제품들, 에너지, 부품, 소모용품 등, 지속적으로 소비되는 생산수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와 같은 것들도 사유재산, 즉 화폐와의 교환을 취득해야만 하는 타인의 사유재산입니다. 그리고 또한 남아있는 기업의 생산수단도 기술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소임을 다하고 다른 사유재산 소유자의 손에 있는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교환을 위한 생산에 기초하여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사회적 소유를 수립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교환이란 투여된 사적 노동 가치의 대치를 통해 생산물의 소유자가 바뀌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기업들이 직원 소유일 때도, 그들의 노동은 임금노동의 형태를 유지하고,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동시에 재생산되는 가치의 크기일 뿐만 아니라 판매되어야 하는 가치의 크기를 나타냅니다. 즉 자본으로서 기능합니다.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는 바로 사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동시에 그 반대, 즉 사물, 생산물과 생산수단에 의한 인간의 지배입니다. 생산수단의 소유는 전반적으로 독립적인, 실제 상호 독립적인 부분 노동자와 사적 노동자들로 사회적 노동이 분리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상품생산의 이와 같은 기본모순은 인간이 자신들의 공동의 총노동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물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가 숙명적으로 생산물의 가치적 성격과 자본의 성격으로 비쳐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계급 사회를 추구하는 여성친구들의 글에는, 아르헨티나 공장 점거자들의 행동이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서 계속 시장을 위해 생산하고, 그로 인해 시장의 변동과 강제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제한된 해방시도의 온갖 모순들에 사로 잡혀 있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엄청나게 사실을 축소한 것입니다. 시장의 변동 상황들과 강제와 더불어 그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온갖 강제와 모순에 노출되어 있으며, 특히 자신들의 재생산을 위해, 생산수단의 개선된 재생산을 위해, 그리고 이윤을 유통부분과 국가와 분배하고 유상 노동과 무임노동을 확대하고 전자를 위해 후자의 확장을 강제 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들이 시장에서 퇴출되기 때문 입니다.

자본주의에 의한 상품생산의 보편화로 인해 자본관계, 그리고 그와 더불어 무임노동에 대한 강제가 더 이상 계급관계에만 매어 있지는 안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비록 이것이 역사적으로 관철된 형태이고 오늘날에도 전 지구적으로 계속 관철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과거 공장주들이 잉여노동을 사회적 규범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고 한다면, 오늘날에는 시장에서의 경쟁과 기술적 진보의 강제적 자동주의, 그리고 임금노동자인 생산자들의 노동과 생산적인 임금노동자들이 실질자본의 축적 이외에도 모든 사적인 그리고 국가적인 소비의 90% 이상을 충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자본관계가 이미 독자적인 강제관계가 벌써 되어 버린 것을 깨닫기 위해 특별히 아르헨티나의 상황에 눈을 돌릴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자들이 동시에 기업의 생산수단의 소유자이며, 자본관계가 외부의 자본가들이 없이도 재생산되고 있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수천 개의 종업원회사들과 협동기업들이 입증하고 때문입니다.

자본의 사악함을 자본가의 사악함으로 몰아버리는 것이 간편하고도 인기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본관계는 오직 가치관계, 즉 교환을 위한 생산과 함께만 폐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문제는 자본주의적으로 생산하는 종업원들을 포함하여 자본가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임금노동자들에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자들이 -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실천입니다. - 노동력의 판매자로서 교환과 생산이 당연한 생존조건이고, 자신의 노동력을 개인적인 생존의 수단으로 (일반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축재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유재산가로 스스로 이해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본가의 강제가 없이도 상응하는 등가물과의 교환을 통해서만 작동될 수 있는 사유재산처럼 자신의 노동력을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부정적인 자본비판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단순한 형태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그것의 내용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즉 타인을 위한 사용가치의 생산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형태가 분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무관한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쌓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본이 점차 모든 사회적 노동과 심지어, 과학, 예술, 오락에까지 이와 같은 형태를 강제함으로서, 즉 상품생산을 보편화함으로서 인간적 사회와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인류의 물질적 관계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가 사회적 분업과 더불어 노동을 이 생산양식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사회적 노동으로 발전시킵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단순한 형태와 단순한 내용이 일상적으로 감지되지 못하듯이 그 상호 관계도 파악되지 않습니다. 노동의 형태와 내용은 이미 단순 상품생산에서도 수시로 충돌하고 있고, 실현해야 하는 생산물의 교환가치는 타인을 위한 교환가치와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쟁성은 자본주의 생산에 있어서 상시적인 갈등이 됩니다. 왜냐하면 노동의 형태가 이미 그 내용과 목적을 걸맞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상의 걸림돌이 되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며, 내용이 형태를 옥죄는 족쇄가 됩니다.

전통적인 자본비판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제된 이와 같은 갈등을 두개의 서로 다른 생산양식의 외적인 적대성으로 해석함으로써 완화시켰습니다. 이윤 대신 필요를 충족시키는 생산이 바로 그 구호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전도되고, 왜곡되고 비사회적이든 간에 모든 이윤 생산도 항상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킵니다. 이윤생산과 필요의 충족 사이의 갈등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외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생산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표출되는 위험스러운 모순, 즉 가치실현과 노동과정, 노동의 질과 양, 노동력, 생산수단, 생산물의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모순입니다.

이와 같은 갈등에는 사회적 파괴력이 내포되어 있지만 동시에 이를 억제하는 수단도 담겨 있습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형태는, 오직 그 사회적 내용이 다른 합당한 형태를 관철시키려고 할 때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인간에 의해 설정된 목적입니다. 그것을 실제화 하는 인간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지 스스로 수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자본의 생산대리인이 생산을 목적을 설정하거나 또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발적 운동을 집행합니다. 그리고 생산에 굴레는 씌우는 것은 생산 외적인 사회적 기구들, 즉 보편적인 법령을 제정하고 통제기구를 구비한 국가, 환경운동, 소비자 운동, 기술검사소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생산자인 임금노동자들은 이제까지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교환가치를 설정하는 고루한 사적 형태에 맞서, 사회적인 즉 모든 인간에게 유용한 생산 목적을 관철시키고, 그러한 사적인 생산형태를 지양하는 것, 교환을 위한 사적 생산을 개인적 소비와 생산적 소비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공동생산으로 대체하는 것은, 오직 임금노동 생산자들의 힘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사회적 노동의 지배적 형태를 불만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경험하며, 때문에 이를 지양하고자 하는 사회성 혹은 사회적 주체성을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회적 주체성이란 사회적 생산자의 자신감과 책임감이며,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리고 자신의 객관적 지위를 천한 임금노동자 혹은 “종속적인 고용인”이기를 거부하고, 그런 것을 자신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기는 그러한 주체성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발전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문제는 이 강연의 마지막 부문에서 다루겠습니다.


III. 개관적으로 가능한 실천으로서의 공동생산

그렇지만 이에 앞서 공동 혹은 공산주의적 생산의 객관적 조건들을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실천적인 가능성은 상품생산 노동의 일반적인 사회적 형태의 논리적 부정이라는 사실 자체로만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적 생산 경험을 통해서 자본주의 생산 속에 이것의 지양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고 구체화 시킬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내재되어 있음(내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발전시키는 것)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적인 사적 노동 조직의 기본형태인 기업이 사회적 생산의 자연스러운 형태이며, 교환, 생산물의 화폐화가 기업과 소비자, 그리고 기업들을 연결시켜주는 필수적인 형태라는 것이 사회적 인식입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사회적 생산의 일반적인 필요성으로가 아니라 사유재산제를 타부시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교환은 일찌감치 생산과 소비의 매개 형태에서 그것의 외적 조건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적 노동의 가치상의 대체와 타자의 생산물의 소비와의 매개는 생산물들의 교환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일치됩니다. 생산물과 화폐를 교환할 때, 더구나 기간 내 지불약속인 신용을 통해 교환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것들은 분리된 과정들이 됩니다. 생산을 개인과 생산적 소비와 매개하는 대신, 교환은 이와 같은 매개를 오히려 끊임없이 교란시키며 위기에 빠뜨릴 만큼 방해합니다.

동시에 화폐의 무소불위성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드러납니다. 모든 개인과 개별 기업은 자체적인 생산물로 직접 지급할 수 없으면서도 타자 노동의 생산물에 종속되어 있고, 반대로 개별 생산업체는 다른 업체, 즉 사회적 요구에 따라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상업적인 신용, 즉 상품의 인도와 서비스의 제공과 이에 대한 즉각적인 지불의 분리는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사회적 관계, 생산의 사적인 형태를 부정하는 관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교환이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는 필수적인 형태나 조건이라면, 모든 사회생활은 벌써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영리사회가 항상 무상의 가사노동과 양육, 그리고 수많은 자원봉사 활동에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교육이나 재해구호처럼 교환을 통해 간접적으로 운용되는 (즉 세금을 통해서) 무상의 공공 서비스와 기관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만도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가 생산과 소비의 비교환적 매개를 - 모든 분업관계에 있는 사기업 내에서 -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야에서는 분리된 강제교환 없이도 직접적인 협력, 다양한 생산절차들과 단계들 사이의 기술적 조율을 통해 매개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것이 항상 통제권을 행사하고 독촉하는 위계적 압력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 자체가 사적 노동의 직접적인 사회적 조직을 통해 원초적으로 자본의 지양의 기본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적 노동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교환적 협력이 부르주아지적 사고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회적 생산 전체가 하나의 유일한 공장에서처럼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본 자체가 사적 노동의 경계를 뛰어 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미지의 시장을 위해 임의의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단순한 생각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대부분의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것, 그리고 개인과 특히 공적인 소비를 위한 수단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것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명확히 특정화된 수요에 맞추어진 생산으로, 발주자와 시행자 사이의 사전 조율과 협약이 전제되고 지속적인 품질검사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즉 생산과정의 사적인 형태를 부분적으로 지양하는 그러한 협력 형태인 것입니다. 그밖에도 수많은 산업부분에서 기업간의 수평적 수직적 협력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공동의 생산품 개발과 계획에까지 확대되기도 합니다. 자동차산업에 있어서 완성차업체들과 부품공급업체들 간의 관계, 금융계열사들 간의 관계, 대규모 건설 분야의 원청과 하청기업들 간의 관계들이 그 예입니다.

자본은 사적 노동을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과 개별적이 사적 노동들 간의 협력적 관계로서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국가적, 초국가적, 전 지구적 수준에서 사적 노동들 간의 사회적 매개, 혹은 총노동의 간접적인 사회화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적당한 비율로 다양한 사적 노동으로 사회적 총노동이 배분되어 있지 않는다면, 모든 순환적 교란과 위기, 그리고 파열로 인해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 분업과 그에 수반되는 모든 기술적 토대가 생산관계 자체에 의해 구조화되고, 제한되며, 왜곡된 소비에 맞춰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공동생산으로의 이행이 그 목적과 수단을 건드리지 않는 단순한 생산 형태의 전환이 아닌 것처럼, 총노동을 사회의 진정한 수요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완전히 새롭게 발명해내야 하는 것이고 중앙의 계획에 따라 실행에 옮겨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타당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분업의 복합성 때문에 총노동을 사회적 통제 하에 두는 단 한가지의 길만이 있습니다. 즉 상호 협력하는 생산자들이 주어진 관계를 스스로 장악하고 단계적으로 변화시키는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 이것이 사회적 분업에 대한 이해 없이는 쉽게 이해되지 않으며, 시장경제든 계획경제든 간에 혼란에 빠뜨리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 생산자들이 부분노동들의 직접적인 관계들을 지배하게 될 때, 비로소 사회적 총노동을 동시에 공동으로 지배하게 됩니다. 대대적인 규모의 공동 생산이나 혹은 직접적인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총노동은 항상 필수적인 구체적 부분노동의 총합일 뿐 직접적인 계획의 대상 자체는 결코 아닙니다.

모든 기업은 생산에 필요한 수단들(기계, 에너지, 연료 등)과 물자들 (원자재, 반제품, 부품 등)을 공급해 주는 사회적 총노동과 다양하게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분업과 그 발전에 기업이 종속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날 상품가치에서 선수금과 감가삼각비가 차치하는 비중이 꾸준히 증가하는 데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기업들, 즉 제 I부문의 생산품들은 다른 기업의 생산적 소비에 투입되고, 제 II부문 기업들의 상업적 유통 채널들을 통해 개인과 공공 소비와 직간접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와 같은 관계들은 내용적으로 직간접적 추정에 의해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결정되는 외부적 수요와 그와 함께 결정되는 생산수단에 대한 자체 수요에 따라 구성됩니다. 오늘날 사유재산의 형태로 지불 능력이 있는 수요로 제시되는 그러한 수요만이 사회적으로 인정된다고 해서 사회적 수요가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만 제시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 무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생산과 (개인적이건 생산적이건) 소비의 직접적인 매개는 따라서 특별히 정보와 소통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 전제는 단지 생산자가 모든 생산수단들에 대한 공동의 전유와 통제의 토대위에서 통합되고 무수한 개별 노동력이 자체적으로 책임감 있게 그리고 계획적이며 유연하게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발휘되는 것입니다.


IV. 사회적 주체성의 발전 가능성

교환의 토대 위에서 사유재산, 상품생산, 임금노동의 종속성, 가치법칙의 지양을 프로그램으로 설정하고자 했던 프랑스의 지구화 비판자들과 한 논쟁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스케치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유토피아처럼 보일지 몰라도, 임금노동자들이 작업장을 점거하고 자신들의 주도로 생산을 조직하게 되는 초국적인 대중운동에 대해 생각해보자. 작업장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노동자들을 서로 고립시키고, 부분적으로 현장을 서로 분리시키는, 자본으로부터 넘겨받은 그러한 조직과 교류형태를 고수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사회적 분업은 실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작업장 수준에서 생산물을 화폐와 교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사회적 수준에서 생각해 보자. 노동에 대한 사적인 권력을 영구화하고 증대시킬 뿐인 사유재산제의 편협한 계산과 기업이기주의, 그리고 화폐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하자. 공급과 구매 관계에 있는, 그리고 지금까지 경쟁관계에 있는 작업장들의 노동자들과 직접적인 협력 관계를 조직해보고, 개인 소비자들과 연대하고, 일반적인 사안들을 (에너지, 교통, 교육, 건강 등) 조정하기 위해 공동의 자치기구들을 구성한다고 하자. 이 모든 것들은 총 생산을 사회적 효용성과 필요에 맞추고, 인도주의적이고 친환경적인 기준들에 따라 재편하기 위한 것들이다. … 모든 생산수단의 공동 점유에 기초하여 소비자들과 연대한 협동적인 생산자들에 의해 꾸려지는 사회적 노동의 자치조직은 사적인 노동과 교환의 지양, 그리고 생산물의 상품형태, 임금노동, 가치법칙을 지양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생산물들의 독자적인 국가적 특수형태와 기능인 세금, 사회 부담금, 보조금, 사회보장 혜택들,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연명하는 관료기구들의 종말을 가져 올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나리오는 한 가지 논리적 맹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대적인 국제적 점유운동이란 아마도 생산자들이 어떻게 공동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공동의 생산을 하기 위해 통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최소한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임금노동자들의 주요한 부문에서라도 사전에 존재할 때 비로소 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실천이 의식을 결정하듯이 다른 가능한 실천, 사회적 생산의 다른 형태에 대한 의식이 어떻게 발전한 수 있는가가 문제로 남습니다.

이러한 의식이 임금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임금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비타협적 이해 대립을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위협이 전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를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적대성의 딜레마는 한 쪽이 다른 한쪽을 배제하면서도 다른 한 쪽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적대성은 양측의 지양을 통해서 제거되는 것이지, 한 쪽 만의 지양을 통해서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 나머지 한 쪽이, 계속되는 교환관계에 기초한 공장 점거에서처럼 동시에 다른 쪽을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버립니다. 임금노동자 계급이 단지 자본과의 적대성에 의해 정의되는 한, 전자는 자신들이 수행한 과거의 노동에 대한 적대성으로 정의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사회의 나머지와의 긍정적인 관계로 정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의식적으로 임금노동자 계급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자로서의 이들의 공동의 지위에 의해 공동의 계급이해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을 오직 임금노동자로만 이해하는 한, 그들은 임금노동의 포로, 그리고 그 전제인 자본의 포로, 또한 임금노동자들에게 산업노동자, 상업과 은행자본, 공공부문, 개별 가정의 임금노동자로서 사회적 노동의 지배적 구조를 자본의 이해로 부과하는 그러한 기능들과 소득원의 포로로 남아있습니다. 임금노동과 자본의 적대성이 시스템 파괴적인 힘을 갖는다는 신화는 임금노동자들의 모든 다른 이해들을 상대화시켜버리는 지배적인 이해가 작동하는, 즉 성공적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자본에 종속된 것이고, 이러한 종속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확연하게 깨집니다. 이는 수백만 번 입증된 사실입니다. 임금노동과 자본의 이해들 간의 비타협적 적대성이라는 것은 점점 더 이들 간의 강요된 이해 공동체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본가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묶는 것은 이들을 서로, 그리고 임금노동자들과 분리시키는 사유재산의 유지입니다.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지양하기 위해서 임금노동자들은 자본에 대해 “자체적으로” 밖에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즉 스스로를 더 이상 임금노동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정부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회적 필요성을 제기하고 자신들의 노동을 이를 위해 제공하는 사회적 생산자, 그리고 사회적 관계와 자신의 노동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조직하고자 하는 그러한 생산자로 이해할 때 계급으로서 하나가 됩니다. 노동 운동사를 살펴보면, 예외적인 경우라 할지라도,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이 이와 같은 전망을 직접적으로 깨닫고 이에 열광했던 사례들이 이었습니다. 1920년대 토리노의 공산주의 운동이 그 한 예입니다. 당시 토리노에서 발간되었던 신문인 신질서(Ordine nuovo)의 편집자였던 그람시가 쓴 이 운동에 대한 한 보고서가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의 잡지인 인터내셔널에 게재되었고, KW 48/1999 자료집에 재인쇄되어 있습니다. 그람시에 따르면, 토리노의 노동자들은 노동력의 판매자, 혹은 직종에 따라 정의된 “금속 노동자”로 스스로를 이해했던 것이 아니라, 자본관계와 이와 더불어 계급 적대성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인생의 중심점이 아니라 떨쳐버리고 싶은 짐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을 사회적 총 노동자의 일부로 이해했습니다.

오늘날의 노동운동은 이와 견줄만한 의식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 보입니다. 저는 수년전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무장된, 부르주아지 경제에 대한 비판이 부흥하지 않고는 실천적인 운동에서도 이렇다 할 발전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적 노동과 교환의 강제에 대한 비판을 노동생산물의 형태 분석을 통해서만, 보다 익숙한 방식으로, 사회적 생산을 분리하고 실천의 확실하고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모순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생산물의 형태 분석을 통해서만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이상하고도 심각한 것입니다.

임금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수행하는 구체적인 노동의 사회적 의미와 무의미함에 대해 생각하고,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다른 활용자, 혹은 직접 연관된 사람의 이해를 돌볼 때 이미 이를 위한 첫 번째 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세계를 움직일 만하거나 전복적인 것으로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생산의 영역 밖에서 사회적 참여를 모색하고 조직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손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경영이 이미 자본의 이윤창출을 최적화하기 위한 컨셉으로 고객지향을 발전시키지 않았습니까? 임금노동자들이 생산자로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사회적 효용성에 맞추고 개인적으로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실천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그것은 임금 노동에 억매여 있는 생산자들의 지배적인 역할 분담과 동시에, 노동조합과 정당을 통해 이를 대변해 왔던, 때로는 갈등하게 만든 그러한 전통적 방식을 깨쳐버리는 질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질적인 새로움이 프랑스의 남부 노동조합들에 의해 조직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단지 국가적인 특수성의 결과만이 아니라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전통적인 노동조합 운동의 잠식과 같은 공통된 역사적 조건들의 표현입니다. 자본관계의 지구화가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기에 있어서 임금노동의 종속성은 연대적 관계들의 허위적인 토대 그 이상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토리노의 노동자들은 소비와의 매개를 특수한 문제로 주제화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생산에 대한 공동의 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생산자들의 조직적인 통일을 통해 생디칼리즘의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이와 같은 매개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과 달리 남부 노동조합들은, 생산자의 통합, 혹은 협동이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시대에 자신들이 수행한 노동의 수혜자들과의 연대 속에서 사회적 생산자로서의 자신감을 획득했습니다. 향후 그들의 발전이 이러한 전망에 얼마나 근접하게 될 지는 저로서도 감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마지막으로 제가 2년 전에 쓴, 남부 노동조합들에 대한 지난날의 열광적인 평가를 약간은 상대화하고 프랑스 사회운동의 모순성을 밝히고자 했던 논문("Un syndicalisme diffént": trend online 인쇄판 1호에 재수록)을 인용하겠습니다.

“다른 형태의 사회성에 대한 요구, 실질적인 공동의 삶에 대한 연대적이며, 동시에 자치적인 형태에 대한 요구는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빌리가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한, 그리고 투 앙상블이라는 겉으로는 그렇게 단순해 보이는 구호로 표현된 1995년 12월의 분위기를 각인시켰다. 그것은 모든 형태의 사회적 배제와 차별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이른바 대표성의 위기와 항상 강조했던 사회운동의 자율성과 파업투쟁의 자발적 조직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남부노동조합들과 농민 연합회가 순수한 화폐관계와 순수한 경영상의 계산에 대항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친환경적인 생산을 위한 생산자들의 책임과 생산자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연대에 대해 책임을 관철하자고 했다. 이는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논리를 (그것을 만들어낸 실천이 아니라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도 부르주아적 관계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들, 교환과 교환을 위한 생산, 그와 더불어 사회적 노동이 사적인 영리기업으로의 “분산”과 상품으로의 사회적 생산물의 상품형태의 이중화는 역시 전혀 비판과 성찰의 대상이 아니다. 쉽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하지만 쉽게 이룩할 수 없는 것”(브레히트), 즉 공동의 생산수단에 의한 공동 생산의 가능성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농민연합의 경우, 소농적 사경제의 유지가 조직의 프로그람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남부노동조합들의 경우에도,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나 가치형태, 그리고 그 실질적인 토대인 교환에 대한 문제제기나 비판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대안적 해방론자들을 포함하여 “극단적 좌파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요즈음 인기를 끌고 있는 상품비판(호세 보베Jose Bove: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이 프랑스에서 시작된 것은 이러한 현상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이와 같은 비판은 상당히 모순적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이 비판은 단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논리를 대상으로 할 뿐, 이러한 논리가 등장하는 실질적인 기반인 교환을 위한 사적 생산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즉 자본주의적, 다시 말하자면 이윤지향적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에 대해 독자화한 것, 그리고 사회적 노동의 특정한 일부, 즉 농업과 식품산업, 그리고 공공서비스에 대해서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그 영역에 한해 화해시키거나 혹은 완화시키는데 있다.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오직 공동의 생산을 위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통일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망이 닫혀있기 때문에 유일한 탈출구는 어떠한 형태로든 정치, 즉 국가, 보베가 표현했듯이,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성에 대해 기대는 것뿐이 없다. 실제 농업에 있어서 프랑스 내의 상품 비판은 국가에 의해 보호받는 소농적 상품생산 계획을 지향하고 있으며, 공공부문의 경우 온건한 국가자본주의와 국가재정에 의한 무상교육의 유지에 대한 전망이 전부이다.

사회운동의 모순성은 모순적인 상품비판에 총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회운동은 한편으로 생산자들의 사회화 혹은 협동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발전시켰으며 (사회적 책임감, 자치조직에 대한 요구, 의회주의적이며 관료주의적인 대의-와 지배구조로부터의 이반), 다른 한편으로는 불가피하게 보이는 교환에 대한 강제의식에 사로 잡혀있고, 그리고 그와 더불어 판매자와 구매자로 갈기갈기 찢겨있는 사회에 대한 환상적인 대안공동체로 국가에 얽매여 있다. 따라서 줄기차게 자유화와 탈규제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과는 다른 것에 대해서도 사회운동은 단지 보수적이며 국가주의적 형태로만 사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순성이 이제 적어도 감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가장 자주 등장하는 구호는 다른 정치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이를 뛰어 넘어 “다른 사회는 (세계) 가능하다.”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것도 단지 간절한 바람이나, 실질적 모습을 갖추지 못한 반항적이고 불분명한 부정에 불과하고, 사회적 이행을 사경제와 공공부분에서의 공동의 총파업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적 대의제가 위기에 봉착했다고 해서 국가에 대한 집착과 맹신에 위기가 닥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사용가치와 유용성에 대한 교환가치의 비판이 교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그러한 위기는 찾아올 수도 없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상품생산에 대한 이론적 비판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제 비로소 시작된 실천적인 발전이 지속되고 보편화되는 것이 아마도 추가적인 조건일 것이다. 남부노동조합들과 농민연합을 통해 구현된 것과 같은 사회적 생산자의 결성이 바로 그러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형의 사회적 생산자가 그 수적인 힘을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하지만, 이들은 임금노동자와 자영업 생산자들 내에서는 보잘 것 없고 상대적으로 고립된 소수일 뿐이다. 남부노동조합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들의 3%만을 대변하고 있으며, 사경제 부문에도 일부 조직화의 움직임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공공부문에 국한되어 있다. 농민연합에는 겨우 프랑스 농민의 2%만이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남부노조원들이 자신들을 통일된 힘으로 자본주의적 세계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사회적 생산자들의 일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농민들도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식품산업, 사료산업, 화학산업 종사자들이 적어도 유용하고 지속적인 생산을 위한 공동 투쟁을 과감히 시도하지 않는 한 임금노동자들을 잠재적인 연대 세력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소비자들과 환경보호주의자들과의 연대 외에 농민들에게는 국가만이 요구조건을 내걸 수 있는 대상이 남게 된다. 이는 “새로운 정치적 대의 구조”(보베)에 희망을 거는 것이 될 것이다. 다른 중요한 생산부문들에서도 점차 임금노동자들이 의식적인 생산자로 조직될 때에 비로소 사회적 부분 노동의 사적인 형태와 교환에 대한 강제가 사회적으로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되고, 공동으로 조직된 직접적인 사회적 생산에 대한 생각이 무르익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은 단지 하나의 가능한 발전이지 당연하거나 혹은 필연적인 발전은 전혀 아니다.”


한노정연 http://kilsp.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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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프링어 제국'의 무너진 꿈

 
    칼럼
'슈프링어 제국'의 무너진 꿈
[정대성의 독일통신](4) - 독일 최대 신문·출판 그룹의 TV 방송 합병 시도 실패
정대성 
독일 '최고'의 일간지는 무엇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취향이나 이념적 성향에 따라 다양한 답변이 가능한 탓이다.

보수언론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온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을 최고로 꼽거나, 범좌파로 분류할 만한 '타게스차이퉁'이나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를 택할 수도 있고, 다양한 기획을 앞세워 발행 부수 면에서 상승 일로를 내달리고 있는 '쥐트도이췌 차이퉁'을 맨 앞에 놓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독일 '최대'의 일간지로 넘어가면 대답은 아주 간단해진다. 매일 약 4백만부를 찍어내는 '빌트'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을 넘어 유럽 최대인 이 '황색지'는 우리말로 '그림'이라는 뜻이다.

슈프링어 그룹의 간판 <빌트>지의 일면. '독일 최초의 오르가즘 전문 의사'가 머릿기사 제목이고, 반라의 여성 사진도 빠지지 않았다
'빌트'는 이름에 걸맞게 기사마다 큼지막한 사진을 곁들이고, 신문 일면에 버젓이 반라 여성의 사진을 싣는 방식을 의연히 고수하고 있다. 다루는 기사도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이른바 쇼킹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독일인의 국민 스포츠인 축구를 앞세운 '너무' 풍성한 스포츠 면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스포츠 신문과 닮았기도 하지만 쟁점이 되는 정치 이야기도 빠지지 않아 대중적인 영향력도 상당하다. 논조는 물론 노골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러면 독일 최대의 신문·출판 그룹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빌트'를 간판으로 보유한 '악셀 슈프링어' 그룹이다. 베를린에 본사를 둔 슈프링어 그룹은 세계적으로 20여 개국에 1만 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명실공히 국제적인 미디어 기업이다. '빌트' 말고도 '벨트'와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 같은 독일의 여러 일간지와 다양한 잡지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많은 신문과 잡지가 이 출판 콘체른의 품안에 들어있다.

슈프링어 그룹의 창시가 '악셀 체자르 슈프링어'와 그의 출판물들
'악셀 체자르 슈프링어'라는 창업주의 이름을 딴 슈프링어 그룹은 2차대전 직후인 1946년에 악셀 슈프링어 출판사로 출발했다. 이후 보수적인 정치권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며 가파른 성장을 거듭했고, 90년대부터는 유럽권으로의 사업 확장을 발빠르게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슈프링어 그룹의 오랜 꿈은 사실 TV 방송계로의 진출이었다. 그사이 라디오 방송까지 보유하게 되었지만 명실상부한 '미디어 제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TV 방송이 반드시 필요했다.

드디어 작년 8월 슈프링어 그룹은 독일 최대의 민영 TV 방송 그룹인 '프로지벤·자트아인스'의 인수 합병 계획을 발표한다. 뒤이어 슈프링어의 언론독점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뉴스 채널이 포함된 5개의 TV 방송이 더해질 경우 슈프링어 그룹의 언론계에서의 독점적인 위치가 '언론의 자유'를 크게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와 더불어 비판적인 여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학생 활동가들에 대한 슈프링어 신문의 공격적인 풍자 만평. 한 신사가 폭도처럼 몽둥이를 든 학생에게 묻고 있다. "축구하러 가도 되나요, 아니면 거기서도 난동을 피우십니까?"
사실, 슈프링어의 언론독점을 둘러싼 논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60년대 말 독일의 정치 지형을 흔들어 놓은 68운동의 주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가 슈프링어의 언론독점과 여론조작 문제였다.

슈프링어 그룹은 이미 당시에 독일 신문시장의 약 1/3을 장악해 '슈프링어 제국'이라 불렸고, 68운동의 주체들은 막강한 대중적 영향력을 보유한 그 신문들의 편파적이고 조작적인 보도가 위험 수위를 넘었다고 판단했다. '제국'의 신문들은 사회의 권위주의와 모순 및 베트남전에 반기를 든 청년 학생들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서 단연 독보적인 활약을 펼쳤다.

'슈프링어 반대 캠페인'의 선전 포스터. 오른쪽 위에 '슈프링어 몰수'라는 슬로건이 쓰여 있다
'슈프링어 제국'은 반공주의를 '전가의 보도'로 휘둘렀고, 의회외부 반대파(APO)를 중심으로 결집한 운동 세력을 겨냥한 날선 공격은 나날이 선동적이고 원색적으로 변해갔다.

슈프링어 신문들은 68운동 활동가들을 폭도나 미치광이, 심지어는 '나치 돌격대'와 비견하기도 서슴지 않으며 사회질서를 허무는 암적 존재로 몰아갔다.운동의 활동가들은 여론을 선동하는 슈프링어의 무차별적인 공격과 편파 보도에 맞서 '슈프링어 몰수'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슈프링어 반대 캠페인'을 전개한다.

68운동과 슈프링어의 대결은 1968년 4월의 부활절 기간 동안 정점에 달한다. 슈프링어 신문 '빌트'의 애독자인 한 청년이 운동의 걸출한 지도자 루디 두취케를 베를린 백주대로에서 저격한 사건이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그 청년은 '빌트'가 히틀러 같은 정신병적인 선동가로 묘사한 두취케를 암살해 '국민의지의 집행자'가 되려했다고 밝혔다.

1968년 4월 11일 두취케의 암살 시도 후 베를린에서 벌어진 격렬한 시위 장면
서독 전역에서 분노한 수만 명의 청년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슈프링어 암살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슈프링어 신문들의 배포를 막기 위한 '슈프링어 봉쇄'에 나섰다. 결국 사태는 이른바 '부활절 소요'로 불리는 최악의 시가전으로 치달으며 2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68운동의 열기가 가라앉고 나서도 슈프링어 그룹과 그 신문들에 대한 분노는 계속되었다. 1972년에는 적군파가 함부르크의 슈프링어 건물에 폭탄을 던졌는가 하면, 독일의 유명한 소설가인 하인리히 뵐은 1974년에 슈프링어 신문들을 신랄히 비판하는 소설을 내놓았다.

1980년대 들어서는 하버마스와 귄터 그라스 등이 포함된 독일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슈프링어 신문들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조직했고, 비교적 최근인 2004년에는 사민당 정부를 온통 부정적으로 그린다는 이유로 슈뢰더 총리가 '빌트'와의 인터뷰 거부를 선언하기도 했다.

이렇게 슈프링어 그룹은 언론독점과 여론조작 문제를 둘러싼 분쟁의 주역을 도맡아 왔고, 68운동 당시에는 운동의 주요 목표로 설정되어 청년 학생들과 공권력의 극심한 물리적인 충돌을 불러일으킨 역사를 안고 있다.

물론 현재의 분위기는 사회 모순에 대한 총체적인 진단과 저항의 불길이 치솟던 당시와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독일은 법적으로 언론 권력의 과도한 집중을 감시·규제하는 제도를 두고 있고, 슈프링어 그룹이 최대의 민영 TV 방송 그룹을 인수 합병할 경우 40%가 넘는 언론 영향력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는 우려는 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미디어 집중과 독점을 감시하는 연방기관은 이런 사정에 따른 비판적인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고, 지난달 언론독점의 가능성을 들어 슈프링어 그룹이 '프로지벤·자트아인스' 방송을 통째로 인수하는 것을 불허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난항에 부딪친 슈프링어 그룹은 연방기관의 제안대로 알짜배기 방송인 '프로지벤'을 빼는 인수 방안을 꺼냈다가 다시 철회하는 등 갈팡질팡하다가 이 달 초 결국 인수 포기를 선언하고야 말았다.

방송사 인수로 감수해야할 경제적·법적 위험부담과 정부기관의 최종 승인을 얻기 어렵다는 판단이 슈프링어 그룹의 공식 명분이었지만, '제국'이 백기를 든 데는 언론독점에 반기를 든 '비판적 여론'이 한 몫을 했음에 틀림없다. 언제나 그렇듯 비판적 여론의 존재는 언론 자유의 부재를 막아내는 일차적인 안전판인 것이다.

그런데 슈프링어의 이러한 포기 선언을 놓고 정치권에서는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사민당과 녹색당 정치인들이 대체로 합당한 일이라고 평가한 반면, 보수적인 기민당이나 기사당 일각에서는 슈프링어의 방송사 인수 합병 실패에 진한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지난주 기사당 당수인 슈토이버는 해당 방송사가 외국인의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하며 이번 기회에 독일의 언론집중 규제법안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보수 정치인들의 이런 주장은 별 설득력이 없다. 슈프링어의 인수 대상이던 '프로지벤·자트아인스' 방송 그룹은 이미 미국인 사업가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주장은 슈프링어의 방송사 합병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해 철저히 눈을 감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2일자 '프랑크푸르트 룬터샤우'가 사설에서 지적한 다음 대목은 곰곰이 되새겨볼 만하다.

"슈프링어가 프로지벤·자트아인스 방송 그룹의 합병에 성공했다면, 전 독일 인구의 절반이 이 거대 기업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을 것이다. ... 이런 미디어 권력이 오용될 수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물론 그 오용은 가능성으로 존재하지만, 이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것이다. ... 미디어의 힘은 직접 사람들의 머리 속으로 향한다. 사람들의 두려움과 소망, 삶에 대한 가치관, 그리하여 무엇이 옳고 그런지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바로 이 때문에 미디어 권력은 가능한 한 다양하게 분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언론권력이건 정치권력이건 권력 자체의 속성은 사실 위험한 것이다. 형식만 다를 뿐 모든 권력은 '억압'의 본질을 담고 있고, 모든 억압은 '저항'을 불러일으킨다고 역사는 가르쳐왔다.

"거대한 언론권력에 대한 저항이 성공을 거두었다"며 2일자 '타게스차이퉁'은 슈프링어의 TV 방송 인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자축했다. 결국 슈프링어의 꿈은 이렇게 날개를 접었고, 독일은 신문과 방송을 한 손에 움켜쥔 가공할 '미디어 제국'의 등장을 피해가게 되었다.

하지만 슈프링어가 연방기관의 제안대로 중요한 방송 채널 하나를 빼고 TV 방송 그룹을 인수했다면 어땠을까? 그럴 경우에도 과연 언론독점의 가능성은 저지되고 언론자유의 보루인 다양성은 지켜졌을까? 소위 언론 집중과 독점을 '감시·규제'하는 연방기관 스스로가 자문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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