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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자본주의를 둘러싼 논쟁

 빛나는전망 실천총서1. [세계혁명- 당, 평의회 노동조합] 중에서

 

                                 국가자본주의를 둘러싼 논쟁


  러시아 혁명 이후의 소련체제를 두고 가장 먼저 그 체제 성격에 논쟁을 벌인 세력은 유럽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초기에 사용하다가 코민테른 2차 대회 이후, 그리고 레닌에 의한 신경제정책이 추구되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노동자평의회체제의 몰락을 목도하면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였고 그 이후 스탈린체제가 들어서면서 반혁명세력으로 비판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레닌은 유럽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은 볼셰비키의 우 편향 하에서 “국가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지적을 놀랍게 받아들이면서 국가자본주의가 일보 전진이라는 것, 6개월 내에 그것이 확립된다면 성공이며, 1년 이내에 사회주의가 영구적인 굳건한 보루를 획득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역시 국가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를 혼용해서 사용한다. 이어서 그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의 경제학적 오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1)

 

  첫째,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와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어떠한 종류의 이행인가를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둘째, 소부르주아적 요소가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적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소부르주아적 심리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셋째, ‘국가자본주의’라는 도깨비를 만들어 내면서, 그들은 소비에트 국가가 경제적 기초에서 부르주아 국가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레닌은 국가자본주의가 소비에트 경제체제보다 우월하다는 것, 노동자와 무산대중의 권력이 보장되는 소비에트권력에게 국가자본주의는 두렵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독일의 국가자본주의를 연구하고 모방하여 그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독재적 방법을 채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몇 구절을 더 인용하기로 한다.

  

“사회주의는 최소의 현대 과학의 발전에 기반을 둔 대규모 자본주의적 기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의 지배자가 아니라면 사회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1918년 국제제국주의라는 하나의 알 껍질 속에, 아직 부화되지 않은 두 마리 미래 병아리들처럼 나란히 존재하고 있는 일관되지 못한 사회주의의 반쪽들을 낳았다. 1918년 독일과 러시아는 한 편으로 사회주의를 위한 경제적, 생산력적, 사회경제적 조건의,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조건의 물질적 현실화를 가장 두드러지게 갖추게 되었다.”2)

“현재 러시아에서는 소부르주아적 자본주의가 만연하고 있는데, 그것을 대규모 국가자본주의로 혹은 사회주의로 이끄는 것은 양자 모두 동일한 과정이며, 또한 이 과정은 생산과 분배에서의 국가적 계획과 통제라는 완전히 동일한 중간 역을 거친다.”3)


  우리는 레닌의 글 속에서 이미 정치혁명에 성공한 러시아가 국가를 통한 계획과 통제로 후진적 자본주의를 국가자본주의체제로 재편하여 프롤레타리아트독재로 나아갈 수 있다는 단계론적 사고와 경제적 토대에 조응하지 않는 정치권력의 선도성에 기반하고 있으면서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상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 한계를 발견하게 된다. 국가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를 등치시킨 것은 국가에 공통점이 있을 뿐 경제적 토대의 강제적 변화와 혁명건설과 완성의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국가라는 장치에 예속시킬 수밖에 없는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물론 맑스의 견해대로 완전하게 발전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혁명의 전제 조건이라면 부르주아혁명과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두 단계를 한꺼번에 뛰어 넘는 것은 후진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가능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농민에 기반을 둔 혁명은 전통 부르주아지를 분쇄하지만 사회관계로서의 자본을 분쇄하지 못한다.


 폴 마틱(Paul Mattick)은 국가자본주의를 자본의 집중, 독점, 소유와 직접 통제가 분리된 기업의 부상, 재정, 금융 조작 등의 혼합 경제 속에 국가와 자본이 내키지 않은 통합을 한 체제로 보면서 자본주의적으로는 저 발전된 국가에서의 반봉건적 사회관계 아래에서는 착취와 억압이 영속화 된다고 보았으며 러시아와 중국 혁명을 국가자본주의 혁명으로, 맑스주의는 수정된 자본주의체제를 정당화시키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4) 물론 마틱은 레닌 이후 50년간의 소련체제에 대한 검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1918년, 1920년에 이루어진 논쟁의 틀 속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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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혁명 차례

 

빛나는전망 실천총서 1.

 

                           

                            세계혁명

                     당, 평의회, 노동조합


역사적 비교 고찰을 통한 변증법적 관계와 세계혁명의 전망

 

                                                     사회주의정치연합(준)

 


차례

 



1. 들어가며 : 기본적 문제의식 

 

2. 세계혁명의 역사 속에서의 인터내셔널, 당, 평의회  그리고 노동조합 

 

   2-1. 파리 코뮌 

   2-2.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에서의 맑스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들 

   2-2-1. 러시아와 유럽의 공산주의 운동의 연대와 대립의 개관 

   2-2-2. 맑스주의에 대한 철학적 이해의 차이 

   2-2-3. 국가자본주의를 둘러싼 논쟁  

   2-2-4. 당, 평의회, 노동조합에 대한 레닌과

          유럽 좌익공산주의자의 논쟁 

   2-2-5. 러시아 혁명 전후의 당, 평의회, 노동조합 

   2-2-6. 독일 혁명 전후 당, 평의회, 노동조합 

   2-2-7. 러시아와 유럽 : 총괄분석 

   2-3. 1920년 이후 역사 속에서의  당, 평의회, 노동조합

   2-3-1. 동유럽의 경우 

   2-3-2. 1968과 유럽 

   2-3-3. 제3세계 국가 (사회주의 국가 포함)의 경우 

   2-3-4. 주변부자본주의 국가의 경우 

   2-3-5. 기술 분업, 노동자통제 

   2-4. 한국 : 815 해방 이후 노동계급의  공장자주관리투쟁과 조선공산당, 전평   

   2-4-1. 조선 노동계급의 공장자주관리투쟁  

   2-4-2. 조선공산당과 전평    


3. 세계 공산주의 운동 세력의 입장 :

   당, 평의회, 그리고 노동조합에 대하여  ∙  


4. 글을 맺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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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평의회]에 대한 간단한 서평

노동자평의회에 대한 서평

 

 

톤 판네쿡의 『노동자평의회』는 훌륭하고, 견실한  노동계급 문헌이

다.“   -노암 촘스키
 

                 

평의회 운동과 전통적 노동조직들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후자가 부패하고 있는 자본주의에서 자신들의 기능을 상실했고, 사회주의의 구축에 공헌한 일이 없는 반면에, 평의회 운동은 노동계급 행동들 중 유일하게 유효한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주의 사회의 조직적 구조의 맹아적 형태이기도 하다“    -폴 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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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유럽 좌익공산주의자의 논쟁- 당, 평의회, 노동조합

 

 

당, 평의회, 노동조합에 대한 레닌과 유럽 좌익공산주의자의 논쟁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혁명 과정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면서 당, 평의회, 노동조합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우선 유럽 좌익공산주의 운동의 입장을 밝힌 판네쿡의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1920.3.)과 좌익공산주의 운동을 비판한 레닌의 「좌익공산주의 : 유아적 무질서」의 총체적 비교를 개괄적으로 하고 쟁점이 되는 의회주의, 노동조합주의, 당관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우선 판네쿡의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에 나타난 그의 입장을 기술하기로 한다.1)


대중이 지적으로 공산주의를 이해하기 전, 세계전쟁과 급속한 경제 몰락은 혁명을 객관적으로 필요하게 만든다. 서유럽에서 혁명의 발전은 주로 두 가지 힘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하나는 자본주의경제 몰락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의 사례였다. 왜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빨리 그리고 쉽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는 부르주아지의 취약, 농민과의 동맹, 그리고 혁명이 전쟁 중에 일어난 사실 등이었다. 유럽에서는 혁명의 필요성과 분위기의 성장과 함께 공산주의자 전위가 발전할 수 있었고, 그 전위는 목표를 명확히 인식하고 코민테른에서 재집단화 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명확히 구분된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눈앞에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질서의 원칙을 밝혀냈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독재, 새로운 민주 형식으로서의 소비에트, 그리고 산업, 농업, 교육의 재 조직화였다. 독일 제국주의가 1918년 11월 무너졌을 때 노동계급은 권력 장악에 대한 완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독일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보다 러시아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노동자평의회는 자발적으로 사회민주당 지도자와 민주적 의회에 그들의 권력을 이양하였다. 병사로 무장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장해제하였고 백군에 의해 분쇄되었으며 부르주아지는 무장된 시민군대로 편성되었다.

  유럽에서 혁명 발전의 느린 속도는 갈등하는 전술 흐름의 충돌을 가져왔다. 빠른 혁명 발전의 시기에는 전술적 차이는 행위로 재빠르게 극복된다. 공산당이 약하고 패배만을 경험할 때 전망은 갈라지고 새로운 행동 경로, 새로운 전술적 방법이 모색된다. 이 때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말과 행동으로 인민의 마음을 혁명화하고 명확하게 하여 결국 옛날의 개념과 대조적인 새로운 원칙을 찾는 것이고 두 번째는 대중을 실천 행동의 변두리로 몰아넣고 차이보다는 동의의 장점을 강조하게 된다. 첫 번째는 대중 사이의 명확하고 날카로운 분리를 추구하게 되고 두 번째는 통일을 강조한다. 첫 번째가 급진적 경향이고 두 번째가 기회주의적 경향이다.

  제2 인터내셔널의 역사는 기회주의 정책의 보기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은 코민테른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사회주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비사회주의 노동자 집단 또는 계급의 지원을 추구하는 것이다. 혁명은 소규모 혁명당에서 뿐만 아니라 대규모 대중정당 또는 노선이 다른 당의 담합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대중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당에 의해 촉발된 행위가 방아쇠를 당길 수도 있지만 결정적 힘은 대중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있는 심리적 요인, 그리고 세계정치의 위대한 사건 속에 있다.

  혁명당의 기능은 앞장서서 명확한 이해를 선전하고 대중을 통하여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들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의 과정에서 당은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대중이 올바른 것으로 인식하는 계획, 슬로건, 그리고 지시사항을 제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가장 적절한 형태로 그들 목적을 표현하고 그 목표를 가장 정확하게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혁명에서의 지도력은 분명한 원칙에 서있는 세계혁명의 힘에 의해 공산당에게 주어진다.

  유럽에서의 혁명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지가 러시아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부르주아 멘탈리티(mentality)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몰락한 이후에도 그들 손으로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회복시켜주었다. 부르주아 문화의 지배를 경험하지 않은 동구(러시아 포함)의 경우 대중의 멘탈리티와 내적 성격은 전혀 다르다. 자본주의가 동구에 들어왔을 때, 전혀 다른 물질적 조건과 전통에 직면했다. 동구는 대규모 토지자산, 가부장적 봉건제, 촌락 공산주의를 가진 원시적 농업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 있었다.

  유럽의 주요 특징은 개인주의이다. 이는 노동의 초기 성향인 소부르주아와 농민 유형의 기원을 가지고 점차 공동체의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감각을 갖고 그 규율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앵글로색슨 국가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수 세기동안의 물질적, 지적 교류에 의해 오락, 예술, 부르주아 문화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각인되었고 피상적 국제주의보다는 무의식 속에 깊이 박힌 민족 단결의 감성을 유발시킨다. 인텔리겐챠(목사, 교사, 문학인, 언론인, 예술가, 정치가)는 다수 계급을 형성하고 부르주아 문화를 선전하고 자본의 헤게모니와 대중의 이해 사이에서 중개자로 행동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가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명확한 전위인 공산당이 정치적 통제를 승계하는 오직 한 가지 과업만이 남아 있다. 모든 가능한 수단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약점의 원천을 제거하고 그를 강화시켜 미래를 보장하는 혁명적 투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대중 스스로 주도권을 잡고 자신감을 증진시켜 활동하게 하여 그들 스스로 그들에게 주어진 과업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의회 활동과 노동조합 운동은 제2 인터내셔널 시기의 투쟁의 두 가지 원칙이었다. 목소리를 높이고 정당사이의 갈등에 참여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변인으로 부르주아지의 중심에 있는 의회에 들어가는 것은 중요하다. 의회 제도는 왜 그것이 대중을 위한 지배체제로 부적절하고 따라서 소비에트체제로 나가야 하는가에 관심이 없는 것이 문제이고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투쟁 수단으로 의회를 활용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대중이 그들 편에서 개입하고 행동하고 의사결정 하자마자 의회 투쟁의 약점은 극복된다. 의회주의는 필연적으로 혁명이 요구하는 대중에 의한 자발적 활동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의회주의는 대중에 대한 지도자의 지배를 강화하는 반혁명적 효과를 지닐 뿐만 아니라 그 지도자들 스스로 부패하게 만든다.

 

 의회에서 당은 혁명적 목적을 위하여 그 뒤에서 전 계급을 집단화하는 전위 대신에, 다른 당과 동일한 법적 지위를 가지는 의회 당이 되고 그들과의 싸움에 끼어들면서 새로운 깃발 아래 낡은 사회민주주의라는 형식을 가지게 된다. 본질적 적대가 없을 경우 혁명적 노동계급과 공산당 사이에는 내부 갈등이 없다. 왜냐하면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명쾌한 계급의식과 그 통일 사이를 종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회 활동은 이러한 통일을 흔들고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계급의 통일을 이루는 대신 공산주의는 그들의 당 지도부를 가지는 의회 당이 된다.

  러시아 혁명이 위대하고 공산주의적인 것은 대중 스스로의 활동을 일깨우고 새 사회를 건설하고 지향하는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를 점화시켰다는 점이다. 1918년 11월 새로 창건된 독일공산당이 의회를 보이콧한 것은 빠르고 쉬운 승리에 대한 미성숙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의회 대표에게 실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스스로 해방되어야 할 필요에 의해서이다. 자율적 활동의 길이야말로 평의회체제를 선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의회 활동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으로 분할되고 진정한 국제주의적 개입이 불가능해지며 국제 자본에 대항하는 대중 행동에 있어서 민족 분할로 나아간다.

  의회 활동이 노동 대중에 대한 지도자의 심리적 장악을 구체화시키듯이 노동조합 활동은 그들의 물질적 권위를 실현시킨다. 자본주의의 아래에서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재조직화를 위한 자연스러운 조직을 형성한다. 맑스도 처음부터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발전된 자본주의, 나아가 제국주의 시대에서 노동조합은 이전의 부르주아 국가와 같이 동일한 발전 경향을 갖는 거대한 단체가 되었다. 그들 속에는 관료 계급이 생기고, 그 관료주의는 자금, 언론, 경영 등 모든 조직의 자원을 통제한다. 따라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주인이 되었으며 그들과 조직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국가의 공개적 법적 지지자가 되고 국가에 의해 인정되며 ‘혁명전(前) 경제 확장’이라는 구호를 만들고 결국 자본주의 유지에 복무하게 된다.

  국가가 조직하는 방식은 민주적 형식에 불과하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맑스와 레닌의 주장은 노동조합에게도 적용된다. 노동조합의 반혁명적 잠재성은 인사의 변화나 급진적, 혁명적 지도자로의 대체로 파괴될 수 없다. 혁명은 그 조직을 파괴함으로써만 성공할 수 있다. 소비에트는 국가관료주의를 뿌리 뽑고 분쇄할 뿐만 아니라 노조관료주의도 분쇄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의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조직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조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새로운 조직 형식은 혁명 과정 속에서, 그리고 노동자들이 혁명적 개입을 함으로써만 수립될 수 있다.

  노동조합 안에서 혁명적 반대세력을 묶어세워 다수를 점하고 혁명화 시킬 수 있다는 가설은 공허하다. 왜냐하면 첫째,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총연맹의 경우, 그 반대 세력이 뚜렷해지기 전에 그들을 다루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고 둘째, 혁명이 순조로운 계획에 따라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재건은 공산당의 주요 과제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이 그들의 지적, 도덕적 잠재력을 개발할 때 그들 스스로 그것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주요 임무는 이 잠재력을 일깨우고 촉진시키는 것이다. 공산주의 헤게모니는 생산이 완전하게 공산주의 질서에 기초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비교적 장기간의 과정 이후에 가능하다. 오히려 노동계급이 공산주의를 향하여 생산체제를 의식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적 노동조합주의자인 생디칼리스트는 소비에트를 프롤레타리아 노동자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지 않고 노동계급에 기반 하여 건설된 정치가와 지식인의 체제로 본다. 그들의 목적은 공산주의의 목적과 다르다. 금융, 은행, 농업, 식민 자본으로 조직된 전체로서의 세계자본에 대항하지 않고 오직 산업자본의 형태로만 인식된 노동조합 투쟁이라는 제한된 이념에 기초하고 있다. 착취기제로서의 생산을 바라보는 맑스주의 경제학에 기초하지만 더 깊은 맑스주의 이론인 역사유물론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서유럽의 경우, 정치경제적 구조는 부르주아지가 그 궁극적 쇠퇴의 이행기를 형성한 반면,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시도했다는 점이 다르다. 즉 서유럽의 경우,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시기를 형성한 반면,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경제 확장의 시기로 나아갔다. 서유럽은 쇠퇴하는 문화이고 러시아는 새로운 문화이다. 러시아에서는 우호적 환경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이 가능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약하고 통일되지 않았으며 농민 대중 속에 삼켜져버렸다. 경제적으로 낙후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잠정적이고 전진만 할 뿐이다. 새로운 공산주의 세계의 심장과 힘은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전한 영국, 독일, 미국과 같이 새로운 생산양식의 기초를 가지는 곳에 있다.

  새로운 나라, 대중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지 않고, 산업 발전의 시작이 공산주의의 단결의식으로부터 일어나는, 원자재가 자본주의로부터 유래한 가장 발전된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 억압이 투쟁에 의해 촉발된 새로운 길을 만드는 곳, 그러나 강력한 부르주아지의 힘이 약한 곳, 그 곳이 새로운 공산주의의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다. 중국과 인도를 들 수 있다. 러시아는 유럽의 동쪽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서쪽이다. 지리적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러시아 혁명은 영국에 집중된 서유럽자본에 대항하는 아시아에 의한 위대한 혁명의 시작이다. 자본주의 폐절의 강고한 투쟁은 서유럽과 미국의 노동자가 아시아의 거대한 인민과 함께 손잡고 성취할 공동 과업이다. 우리는 이 과정의 시발점에 서 있다.


  이제 레닌으로 가본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좌익공산주의 : 유아적 무질서」는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보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을 빗겨가는 대응의 수단으로, 전략과 전술의 변증법적 관계를 은폐하고 잘못된 전술을 합리화하려는 수단으로, 유럽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몰이해를 가리려는 수단으로 인용되어 왔다. 진정한 공산주의의 원칙에 서있지도 않으면서 반대파를 종파주의로 몰아세우는 스탈린주의적 책략으로 사용되었다. 레닌의 글 가운데 유럽과 비교되는 몇 가지 중요한 전술을 인용하기로 한다.2) 이러한 레닌의 입장은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공식화되었고 유럽 공산주의 운동과 결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 어떤 의미에서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의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

역사적 현시점에서, 모든 나라에 가깝고도 불가피한 그들 미래의 어떤 것, 그것도 무척 본질적인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러시아 모델이다.

 

  2. 볼셰비키가 성공한 근본적인 한 조건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규율은 어떻게 되는가? 그 규율은 어떻게 검증되는가? 그것은 어떻게 강화되는가? 첫째,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의식성에 의해서, 그리고 혁명에 대한 그들의 헌신, 곧 전위의 끈기와 자기희생 및 영웅적 행동에 의해서다. 둘째, 일차적으로는 가장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대중들과 뿐만 아니라 비 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대중들과도 연결을 갖고 가장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며, 그리고 당신들이 원한다면 어느 정도 융합할 수 있는 전위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셋째, 이 전위가 발휘하는 정치지도력의 올바름에 의해서, 곧 전위의 정치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에 의해서인 바, 이것은 가장 광범한 대중들이 자신들의 경험으로서 그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을 인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볼셰비즘은 1903년 매우 굳건한 맑스 이론의 토대 위에서 생겨났다. …풍부한 경험이라는 면에서 세계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15년간의 실천 역사(1903-1917)를 거쳐 왔다. 왜냐하면 이 15년 동안 어떤 나라에서도 혁명적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갖가지 운동 형태들 - 합법형태와 비합법형태, 평화적인 형태와 폭풍적인 형태, 그리고 의회적 형태와 테러적 형태 - 이 그토록 급속하고 다양하게 교차하면서 나타났던 것과 엇비슷하기라도 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3. 볼셰비즘은 노동운동내의 어떤 적들에 대한 투쟁에서 발전되고 강화되고 단결되었는가?

볼셰비즘이 무정부주의의 냄새가 나거나 무정부주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오며 그리고 모든 본질적 문제에 있어서 일관성 있게 프롤레타리아적인 계급투쟁의 조건들과 요구들에 부합하지 못하는 쁘띠부르주아혁명주의에 대한 오랜 투쟁 속에서 모습을 갖추고 발전, 단련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20년 오늘 날, 모든 서유럽 정당들 중에서 독일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가장 훌륭한 지도자를 배출해내었고 다른 누구보다도 더 빨리 회복하여 새로운 힘을 얻어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스파르타쿠스단이나 독일독립사회민주당의 좌익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에서 모두 보이며… 카우츠키파, 힐퍼딩파, 레데부르파 및 크리스핀파의 기회주의와 줏대 없음에 대해 줄기찬 투쟁을 벌이고 있다.

 4. 독일의 “좌익”공산주의, 지도자-당-계급-대중

레닌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 지명 그룹”이 발간한 「독일공산당의 분열(스파르타쿠스 동맹)」이란 팸플릿을 비판에 대한 근거로 삼고 있다. 불행히도 아주 특권적이고 아주 안정된 합법성이라는 전통과 조건을 가진 한 조그만 나라에 태어나서 합법에서 비합법으로의 전환을 결코 본적이 없는 네덜란드 공산당의 몇몇 당원들이 혼란에 빠져서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두 개의 공산당(지도자당과 대중정당)의 대립을 당독재와 계급독재로 대비시킨 것)을 하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당 원칙과 당 규율의 거부 - 이것이 반대파가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키는 것과 똑같다.…공산주의 관점에서 볼 때, 당 원칙을 거부하는 것은(독일의 경우)자본주의 붕괴의 전야로부터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가 중간 단계가 아니라 가장 높은 단계로 건너뛰는 것을 뜻한다.

  투쟁 속에서 단결된 철의 당 없이, 일정 계급의 모든 정확한 사람들의 신뢰를 누리는 당 없이, 대중의 분위기를 지켜보고 그것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당 없이, 그와 같은 투쟁은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5. 혁명가들은 반동적인 노동조합에서 활동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지도자-당-계급-대중의 관계 및 노동조합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 당독재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곧 독재는 소비에트들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하고 이 프롤레타리아트는 볼셰비키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데 최근 당 대회(1920년 4월)의 자료에 따르면 볼셰비키 공산당의 당원은 61만 천 명이다. 자신의 활동에 있어서 당은 직접적으로 노동조합에 의존하는데 지난 대회(1920년 4월)의 자료에 따르면, 이 노동조합은 지금 400만 이상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형식적으로 비당파적이다.

  우리는 독일 좌익들의 거만하고 매우 박식하며 겁나게 혁명적인 지껄임, 곧 공산주의자들은 반동적 노동조합에서 활동할 수 없고 활동해서도 안 되며, 그러한 활동을 거부해도 좋으며 노동조합으로부터 탈퇴하여 썩 쾌활한(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은 매우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발명한 참신하고 순수한 “노동자 동맹”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는 따위의 지껄임을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허튼소리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당에서 잊지 말아야할 것은 노동조합이 필수불가결한 “공산주의 학교”이자 프롤레타리아트독재 수행을 위한 예비 학교로서 나라의 전 경제생활의 운영을 (개별 직종들이 아니라)노동계급에게, 다음에는 모든 근로인민에게 점진적으로 이양시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불가결한 조직이며 오랫동안 계속 그렇게 남으리라는 사실이다.

  노동조합의 일정한 반동성은 프롤레타리아트독재 하에서는 불가피하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기본 조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하였음을 뜻한다.

  서유럽에서는 노동조합적인, 편협한, 이기적인, 철면피 같은, 탐욕스런, 속물적인,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제국주의에 매수당해 타락한 노동귀족층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강력하게 형성되었다. …반동적인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거나 후진적인 노동자 대중을 반항적인 지도자, 부르주아지의 앞잡이, 노동귀족, 또는 ‘부르주아 화한 노동자’의 영향력 하에 내버려둠을 뜻한다.

  6.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할 것인가?

주지하듯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와 같은 탁월한 정치지도자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독일의 좌익들은 의회주의를 이미 1911년 1월에 “정치적으로 폐물”이 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 독일(과 네덜란드)의 좌익들은 자신들이 계급정당이 아니라 서클이라는 것을, 대중정당이 아니라 지식인들과 지식인들의 가장 나쁜 속성을 흉내 내는 소수 노동자 집단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의회주의는 “정치적으로 폐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폐물이 된 것을 계급에게 폐물이 된 것으로, 대중들에게 폐물이 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부르주아 의회들이 장기간 존재했느냐 아니면 단기간 존재했느냐가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들이 소비에트 체제를 받아들이고, 부르주아민주주의 의회를 해체할(또는 해체를 허용할)준비가 얼마나(이념적으로, 정치적으로, 실천적으로)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의회는 노동계급의 선진적인 혁명가들에게 아주 가증스런 것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이 악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할 때 이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범죄적이기 조차 하다. …전술은 혁명운동의 경험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특정 나라의(그리고 이웃 나라들과 전 세계 모든 나라의) 모든 계급 세력에 대한 냉정하고 엄밀한 객관적 평가 위에서 수립되어야 한다.

…모든 특정 조건들은 현대 서유럽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와 같은 또는 그와 유사한 조건들이 손쉽게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련의 다른 원인들을 제쳐두고라도 바로 이 때문에 서유럽이 우리가 그랬던 것보다 사회주의혁명을 시작하는 것이 더 어렵다. 혁명적 목적을 위해 반동적 의회를 활용하는 어려운 과제를 뛰어넘음으로써 이 어려움을 피해보려고 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짓이다.

…무엇보다도 의회 내에서 지도자들을 시험해보지 않고서는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 비판 그것도 가장 날카롭고 가차 없으며 비타협적인 비판은 의회주의나 의회 활동에 대해서가 아니라 의회 선거와 의회 연단을 혁명적 공산주의적 방식으로 활용할 줄 모르는 그런 지도자들에 대해서 -활용하지 않으려는 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더- 가해져야 할 것이다.

  7. 어떤 타협도 안 된다?

순진하고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타협 일면을 허용하면 우리가 불굴의 투쟁을 벌이고 있고 벌여야만 하는 사회주의와 혁명적인 맑스주의, 곧 공산주의 사이의 경계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쁘띠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멘셰비키를 포함하여)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부르주아민주주의와 소비에트 체제, 개혁주의와 혁명주의, 노동자에 대한 사랑과 프롤레타리아트독재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동요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올바른 전술이란 이러한 동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다. …어떠한 타협도 없고 어떠한 유연한 대응도 없다는 성급한 결정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자신의 힘을 강화시키는데 방해가 될 따름이다.

  우리가 아니라 분명히 적에게 유리할 때 싸움을 거는 것은 죄악이며, 혁명적인 계급의 정치 지도자가 분명히 불리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 “유연한 대응을 꾀하고 협조나 타협을 할”수 없다면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다.

  8. 몇 가지 결론

이제 노동운동의 역사는 갓 태어났고 강력해지고 있으며 승리로 나아가는 공산주의가 주로 무엇보다도 자신들의(곧 각 나라의) “멘셰비즘” 곧 기회주의와 사회배외주의에 맞서서, 둘째로는 이를테면 그것을 보충하는 형태인 좌익공산주의에 맞서 곧 싸움을 벌여야 한다. 첫 번째 투쟁은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의 싸움처럼 분명히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나라에서 전개되었다. 두 번째 투쟁은 독일, 영국, 이탈리아, 미국(적어도 세계 산업노동자조합과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적 역할의 일정부분은 거의 일반적이고 그리고 거의 공통적으로 소비에트체제를 인정하면서도 좌익공산주의의 오류를 계속 저지르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한때 생디칼리스트들이었던 한 분파가 역시 소비에트체제를 인정하면서도 정당과 의회정치에 대해 보이는 태도)에서, 말하자면 의심할 바 없이 세계적 규모로 나타나고 있다.

  모든 나라의 공산주의 노동운동의 국제적 전술을 종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양성의 제거나 민족적 차이의 소멸이 아니라 공산주의 기본 원칙들(소비에트권력과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을 적용하되, 이런 원칙 하나하나를 올바로 변형시키고 민족 내지 민족적 국가적 차이에 맞게 올바르게 조정해서 적용하는 것이다. 각국이 동일한 국제적인 과제들, 곧 노동운동내의 기회주의와 좌익교조주의에 대한 승리, 부르주아지의 타도, 소비에트공화국과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의 수립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식에서 어느 것이 민족적으로 특이하고 민족적으로 차이 나는 것인가를 추적, 연구, 모색, 예측, 파악하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선진 나라들(물론 선진 나라들뿐만 아니라)이 겪고 있는 역사적 시기의 기본 과제이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다만 방향이 다를 뿐인 똑같은 오류를 더 서둘러 바로 잡고 유기체에 고통이 덜 하도록 더 빨리 치유하기 위해 힘써야만 한다. 우익교조주의 뿐만 아니라 좌익교조주의 또한 오류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공산주의에서도 좌익교조주의의 오류가 우익교조주의(이를테면 사회배의주의와 카우츠키주의)의 오류보다 천배나 덜 위험하고 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좌익공산주의가 아주 어린, 겨우 싹트고 있는 경향이기 때문이다.

  독일과 영국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 하나의, 똑바른 길만을 인정한다고 그리고 유연한 대응, 협조, 타협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보자. 그러면 이것은 공산주의에 아주 심각한 해독을 끼칠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이미 끼쳐왔고, 지금도 끼치고 있는 오류가 될 것이다. 우익교조주의는 오로지 옛 형식의 인정을 고집하였고 새로운 내용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파산하였다. 좌익교조주의는 어떤 옛 형식을 무조건 거부할 것을 고집하고 있으며, 새로운 내용이 온갖 형식을 헤치고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며, 또한 모든 형식에 통달하는 일, 최대한 빨리 한 형식을 다른 형식으로 보완하고 한 형식을 다른 형식으로 대체하며 우리 계급이나 우리 노력으로 생겨나지 않은 온갖 변화에 대해 자신의 전술을 적용시키는 것을 배우는 일이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

  

안톤 판네쿡은 레닌의 글과 코민테른 제2차 대회의 결과를 보고 자신의 글「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의 후기를 덧붙였다.3)


  모스크바의 상임위원회와 지도자들은 코민테른 2차 대회를 지배한 경향의 결과로 완전히 기회주의로 돌아섰다. 이러한 정책은 독일에서 처음 나타났는데 이는 라덱이 이념적, 물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의회주의 전술을 주창하고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고 결국 독일 공산주의 운동을 분열시키고 약화시켰다.

  레닌은 영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의회 선거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제2 인터내셔널의 성원과 반동적 노조 지도자가 포함된 노동당에 참여할 것을 권고했다. 레닌의 팸플릿의 중요성은 내용에 있지 않고 저자에 있다. 왜냐하면 논쟁이 독창적이지 않고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미 사용됐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그것을 시작한 것이 레닌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오류는 서유럽의 조건, 당, 조직 그리고 의회 실천을 러시아와 동일시했다는 점이며 그것이 구체적 정책의 산물로 중대한 때에 나타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의 기본은 소비에트연방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고 콜챡과 데니킨의 반동적 폭동이 러시아 철강 산업의 기초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기계, 기차, 공구가 경제 재건설을 위해 필요했으며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되지 않은 산업이 이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세계 국가들과 평화로운 교역이 필요했고 특히 협상국(영국)과 그러했다. 반대로 그들은 자본주의 붕괴를 막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원자재와 식료품이 필요했다.

  모든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준비하는 공산당 연합인 코민테른은 러시아 정부의 정책에 의해 공식적으로 묶여있지 않아야 하고 러시아와 독립적으로 자신의 과업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분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당면한 경제적 욕구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더 깊은 경제적 적대감이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미래의 혁명을 준비하는 급진적 공산당이 아니라 러시아편을 들고 정부에 의무를 다하는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트 세력이었다. 또한 모스크바는 그 영향력이 결정적인 대규모 노동조직의 전통적 관점과 방법에서 크게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서유럽의 공산주의자 전술을 강조해야만 했다. 그들은 KAPD(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의 급진적 전술을 바라지 않았고 독립파(카우츠키)와 KPD(독일공산당), 그리고 노동조합에 의한 정부를 필요로 했다.

 구별 점은,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파괴하고 자본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외적 혁명과, 대중을 내부적으로 혁명화 시키고 그 안에서 노동계급이 그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공산주의 가설을 굳건히 손에 움켜쥐는 공산주의혁명 사이에 있다. 진정한 투쟁은 지도자 영향을 억제하고 지도자의 힘을 억제시키는 것이다. 기회주의는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고 새로운 헤게모니를 갖게 된다. 코민테른은 옛날 조직과 그 지도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그 헤게모니를 강화하여 혁명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으면서도 “공산주의혁명”의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러시아와 비슷한 정치 체계가 소비에트체제에 기반을 둔 노동자 관료주의에 의해 통제되면서 다른 유럽국가에 존재한다면 세계 제국주의의 권력은 유럽에서 깨어지지만 보존될 것이다. 러시아의 정책에 반대하는 비판적 문제제기는 진정한 공산주의 관점에서 비롯된다. 러시아가 서유럽 노동자 관료주의와 연대하고, 대중에 대한 적대와 부르주아 세계에 대한 적응을 한다면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길로 가는 순간을 없어지게 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노동자 정부”는 공산주의 재건의 힘을 해방시킬 수 없으며,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와 달리,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 대중이 농민과 함께 막강한 힘을 형성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재건의 실패는 반동을 쉽게 불러일으킬 것이고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그 체제를 폐절시키는 힘을 새롭게 키워야할 것이다.

 

 빛나는전망 실천총서1. [세계혁명- 당, 평의회, 노동조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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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평의회]3부 적 - 민족주의

 

 

 

[노동자평의회] 3부 적 - 민족주의

 

 4.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부르주아지의 본질적 신념(creed)이다. 부르주아지가 분리된 인간객체보다 상위에 두는 것은, 약간의 의미가 있지만, 민족, 인민, 조국 또는 국가라는 상이한 이름들로 지시되고 있는 공동체이이다.

  민족과 민족의식은 부르주아지와 함께 출현하고 발전해왔다. 원래 농민들의 삶은 단지 마을과 거대 종족이나 지역(country), 주(canton)라는 공동체만을 알뿐이었다. 부상하던 시민에게 도시는 그들의 공동체였다. 그들의 공통이익은 이러한 작은 영역들을 넘어서지 않았다. 언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달랐으며, 어떤 제한된 지역에서 언어가 유사할 경우 이는 한 왕의 지배하에 결속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하지만 항상 그러한 지배는, 정복과 상속에 의하여 전적으로 다른 언어를 가진 다른 나라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농민들에게 어떤 왕이 어떤 먼 지역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느냐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상업의 성장과 함께 변화하였고, 산업자본의 성장에 의해 더욱 변화되었다. 광범위한 나라들과 바다에서의 상인 무역은 그것을 보호해 주고, 자신들의 경쟁자와 싸우고, 후진 부족들을 정복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필요로 했다. 만약 강력한 권력이 부재할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도시 동맹을 구축했다. 산업가들은 노정에서의 안전, 통일된 법(unity of law), 도시보다 막강한 권력에 의한 보호를 필요로 했다. 영국은 고립된 섬나라로써 왕에 의하여 정복당한 프랑스처럼, 광범위한 지역들이 결합되었으며, 이 통합된 광범위한 지역은 단지 내부로부터 공고화되고 강화될 필요가 있었다. 이탈리아나 독일 같은 다른 경우에는 강력한 국가가 전쟁과 혁명, 부르주아지의 민족주의적 정서의 힘을 통해 근대에 건설되어져야만 했다.

  이는 국가와 민족이 동일하거나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강제와 억압의 물리적 수단을 가진 권력 구조이다. 반면 민족은 내재적 힘에 의해 결합된 공동체이다. 따라서 국가는 민족과 일치하게 될 때 가장 강력한 내적 견고성을 가진다. 하지만 국가는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비록 다른 민족에 속할지라도, 가능한 한 많은 지역과 사람들을 포함하려고 했다. 이는 오래 전부터 이따금씩 이민을 통해 수행되었다. 그래서 덴마크는 이전부터 독일인을 받아들였고, 그 후 독일은 덴마크인과  폴란드인을, 헝가리는 루마니아인, 슬로베니아인, 독일인을 그리고 그 다음에는 루마니아가 헝가리인과 독일인을 받아들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일곱 개의 상이한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결코 하나로 성장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근대적 부르주아지의 성장에 수반되어 나타났던 민족의식의 성장은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피우메1)(Fiume)나 단찌히2)(Dantzig)처럼 상이한 인종과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 있던 항구 도시들의 경우에는 경제적 이해 당사자들이 요구했던 정치적 통합은 민족적 반목에 의해 손상되었다.

  이해 수단으로서 공통 언어는 사람들을 하나의 국가와 민족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러나 이는 민족들이 단지 언어 공동체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위스에서는 다수가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독일인과는 다른 분리된 민족이다. 영국과 미국의 민족은 같은 언어를 쓴다. 스위스 사람은 5세기 동안 이미 여타의 독일어 사용자들과는 다른 자신들의 길을 걸었다. 예컨대 그들은 자유로운 농민들로 살아가면서 기본적 직접민주주의라는 특수한 제도로 스스로를 통치하면서 살아갔다. 반면 독일인은 수백의 작은 압제자들의 멍에 하에서 시달리면서 살아갔다. 스위스인 모두는 그들의 정신을 같은 방식으로 만든 역사적 사건들을 함께 경험하였다. 스위스인은 지속적인 현실적, 정신적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신들의 조상과는 달리 유사한 성격과 사상을 가진 집단으로 성장했다. 단지 그런 식으로 획득된 수동적 특성뿐만 아니라, 같은 생활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상호 소속감이라는 적극적인 의지가 인류를 더욱 민족들로 결합시키거나 분리하거나 하는 것이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영국과 미국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들 각각은 상이한 대륙에서 자신들 고유의 운명을 개척해갔고 때로는 자본가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적대를 일으키기도 하는 등 상이한 역사를 가졌는데, 결국 그들을 다른 민족들로 만들었다. 각각의 민족 내부의 운명공동체, 동일한 역사적 영향들을 겪은 사실 등은 모든 이에게 공통된 각인을 남겼다. 공동이익과 공동의 해방을 위한 공동투쟁은 그들을 하나의 공고한 단일체로 뭉치게 했다. 그것은 민족문화를 구성하는 문학, 예술, 일간신문들로 체현되고, 확장된 단일한 사상 공동체를 생산해냈고, 사상 공동체 그 자체는 민족성의 감각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한 민족 내에서의 계급간의 처절한 투쟁조차도 상호 투쟁의 성쇠의 공동경험의 공동배경에서 발생했다.

  그래서 민족은 국가 공동체가 아니며, 언어 공동체인 것도 아니라 (그들의 공통된 사회경제적 실천으로부터 연유된) 운명 공동체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이한 공동체 형태들은 강한 상호의존성을 가진다. 예컨대 언어는 민족을 구축해내는 강력한 담지물이다. 민족성은 국가를 구축해내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또한 그 역으로 정치적 국가권력은 사람들을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거나 또는 운명공동체(운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를 구축하거나 파괴하면서 민족을 만들어 내거나 만들어내지 않는 작용도 한다. 중세 시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언어 차이만큼이나 언어 차이가 컸던 프랑스 남부와 북부는 정복을 통해 하나로 통합되었다. 부르주아지가 부상하는 동안 그들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고, 이후 그들은 하나의 통일체로서 혁명을 경험했다. 동시에 스위스의 산악지대와 마찬가지로 지대가 낮은 국가들은 바다를 경계선으로 삼음으로써 거대한 독일의 영토로부터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구분시켰다. 수십 개의 부유한 상업 도시들은 지역 동맹을 맺음으로써 내륙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했고, 네덜란드의 방언을 자신들 고유의 문학과 문화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독립된 국가를 이루었다. 그들의 특수한 역사는 분리된 민족이 되게 하였다. 플랑드르(Flemish) 사람들은 네덜란드인으로서 같은 언어를 사용했더라도 그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상이한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같은 민족에 속한다고 말할 수 없다. 반면 그들이 왈롱(Wallons)가와 정치적 통합을 이루는 일은 언어의 차이 때문에 방해되었다. 경제적 이해에 의하여 규정되는 정치적 조치들은 점차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영국으로 통합시켜 한 민족이 되게 했다. 반면 같은 정치적 조치에 의해서 아일랜드사람들은 영국과 적대적이며 분리된 존재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

  결국 민족은 역사의 산물이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들, 공통적인 경험, 결정적인 특성, 감정, 문화가 민족성이라는 형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민족성은 과거가 살아 있는 힘으로서 관통된 결과이며, 응고된 역사인 것이다.

  따라서 민족적 특징, 더욱이 민족의식은 사회로부터 자생적으로 성장하며, 민족국가의 내재적 힘을 구성한다. 그것들은 부르주아지에 의해 요구되며, 애국심이라고 칭찬되고, 특수한 조치들에 의해 더욱 깊어진다. 일정한 경계 안에서 차이들은 가능한 한 제거되는 반면, 외부 세계와의 차이들은 강조되고 강화된다. 교제하는데 필수적인 단일한 공통 언어는 모든 영역에서 교육되고, 오래된 방언들과 심지어는 웨일스 게일어(Gaelic)나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어 같은 다수의 사람들이 쓰는 소수언어들은 억압되어 골동품(curiosities)이 되거나 오지 마을에만 남게 된다. 그리고 공통 언어로 쓴 방대한 문학이, 어릴 적부터, 동일한 사상들과 동일한 감정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하도록 작용한다. 의도적인 선동이 이러한 상호 감정을 강화시키기 위해 이용되고, 모든 이국적인 것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의식적으로 만든다. 민족 공동체에 분할 선을 긋는 계급투쟁이라는 교리는 위험한 것으로 비난받고, 심지어는 민족적 통일성을 헤치는 범죄로 박해받는다. 민족주의는 사회의 자생적인 살아 있는 산물이기에 사회 그 자체의 변화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영원한 본성적인 것이자 의무로서 선언된다.

  민족성은 응고된 역사이다. 하지만 역사는 계속되고, 지속적으로 이전에 퇴적된 것에 추가된다. 새로운 경제발전, 자본의 성장, 전쟁과 정복은 새로운 이해를 산출하고, 국경을 바꾸며, 의지와 의식의 새로운 방향을 일깨우며, 사람들을 조합하거나 분리하고 오래된 공동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발생시키거나 한다. 따라서 민족성은 그 심층에서 솟아오르는 힘들과 함께 그 외연과 내용에서 동요하며, 다양한 측면들을 드러낸다.

  거대 자본주의에서도 소규모 교역이 남아 있는 것처럼, 과거의 풍습과 사상과 같은 지방색이 여전히 유지되며, 때때로 그것은 국경을 넘어 확장되기도 한다. 자유무역이 전 세계에 보급되어 자본주의가 상승하던 때, 모든 인류의 국제적 형제애라는 사해동포주의 감정은 부르주아지에서 그 토대를 발견했다. 하지만 경쟁이 보다 격해지고, 뒤이어 세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주의를 더욱 공고화했고, 사해동포주의는 유아기적 환상으로 조롱되고 억압되었다. 자본주의가 단지 이제 막 걸음마 상태에 있고, 원시 경제를 일소하고 낡아빠진 전제정치를 뒤엎기 시작했던 세계의 부분에서 우리는 생성과정에 있는 민족을 보았다. 이윤에 굶주린 사업가들 이외에, 투기적 모험가들, 외국 자본의 대행자와 탐욕스러운 정치가들은 부르주아지의 출발점을 이루었고, 이들은 주로 유럽의 과학과 사상들을 교육받은 지식인들로 이 후 민족주의의 대변자로 나선 사람들이었다. 발칸에서 전쟁은 가끔씩 같은 방언을 쓰는 인접한 계곡들이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민족으로 복속되도록 하는 우연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정신적으로 이미 오래된 문화에 의해 통합되어 있던 상인 및 지주계급들은 서구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의 도움으로 점차 현대적 부르주아지로 발전해갔고, 성장하는 민족주의 정신에 의해 활성화되었다. 인도에서는 본토의 자본주의적 산업에 뿌리를 두고 있을지라도 민족주의의 성장은 진부한 종교들의 다양함으로 인해 심각하게 저해되었다. 아직 부르주아지가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식민지에서 민족주의는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소집단에 의해 선전되었고, 외국의 착취에 대항한 저항의 첫 번째 이론적 형태였다. 다른 한편으로, 수 백 만의 인구가 여러 방언을 쓰는 사람들로 나뉘어져 있는 곳에서, 지식인의 소망이나 변덕으로 민족주의가 제기될 때, 민족주의는 더 큰 단위로의 통합을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민족주의는 부르주아지의 발전에 따라 상이한 형태들을 취해왔다. 시민들이 처음 성장부터 자신들의 도시와 영역의 주인으로 부상했을 때, 그들이 쟁취하고자 했던 것은 자유였다. 시민들은 귀족의 권력과 그 영역에 대한 토지 소유권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위협하는 외세를 물리쳐야만 하였다. 부르주아지가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것은 외국의 봉건적, 절대적, 이전의 지배적인 자본가권력에 대항한 전쟁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한 전쟁들은 해방전쟁이었고, 일종의 혁명이었다. 모든 열정주의, 그리고 고도화된 생산체제의 확립으로부터 발생한 헌신은 민족적 열정으로 나타나며, 민족주의를 고상한 이상으로 고양시킨다. 이와 같이, 16세기에 네덜란드가 스페인 왕으로부터 해방되고, 같은 때 영국이 스페인과 세계 패권을 놓고 싸우고,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싸우고, 영국이 주도하는 유럽에 대항해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19세기에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1870년에 독일이 프랑스에 대항해 일어난 보불전쟁 전쟁 역시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독립국을 설립하고 권력을 구축하려 했던 이러한 해방과 통합을 위한 전쟁은 훗날 부르주아지에 의해 민족 역사의 숭고한 정점으로 고양되었다.

  하지만 그 후 점차 이미지는 변화했다. 자본주의는 착취이고, 지배계급에 의한 착취계급의 지배인 것이다. 스스로를 지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 부르주아지는 새로운 억압을 확립하였다. 외세에 의한 억압으로부터 멍에를 벗어던진 후, 그들 주변에 있는 또는 식민지에 있는 더 약한 사람들에게 그 멍에를 씌웠다. 특히 이러한 상황은 거대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확대되었다. 그리고 항상 민족주의라는 슬로건 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민족주의는 다른 색깔을 가지게 되었다. 즉 해방이 아니라 민족의 위대함이 그 슬로건이 된 것이다. 민족주의는 이제 조력자, 부하, 대변인, 군대관료와 공무원으로서 부르주아지에 복무하고, 부르주아지의 권력에 참여하는 모든 다른 계급들의 자긍심, 권력본능에 호소한다. 오늘날에는 자신들은 선택받은 사람들로서 힘과 미덕에 있어서 우월하고, “위대한 민족”이고 “주인민족”(Herrenvolk)이며 “전 인류 중 가장 우등한 인종”이며 다른 민족들을 이끌고 지배할 운명을 가진 자들로 선언된다. 세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으로서 세계 주도권을 놓고 자본가계급들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은 점점 격렬해졌고, 민족주의는 열병처럼 번져갔으며, 빈번하게 전체 사람들을 생존을 위한 공동투쟁으로 내몰았다. 

  민족주의는 단순히 지배자들에 의해 대중들에게 부과된 인위적 교리가 아니었다. 모든 사유와 감정체계들처럼, 민족주의는 사회의 심층으로부터 솟아나며 경제적 현실과 필요성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에게 민족은 그들의 번영과 불행이 묶여 있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모든 오래된 공동체 의식의 본능은 자신들의 복무를 다하며 이상주의의 막강한 힘들로 발전한다. 어른들보다는 아직 이기적 이익 추구 정신에 감염되지 않은 젊은이들이 공동체의 요청에 열광적으로 반응하기가 쉽다. 부르주아지에 대항해 싸울 가능성과 힘이 없는 한, 노동 대중들에게는 부르주아지를 추종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 주인 계급에 대해 정신적으로 의존하면, 노동계급은 주인 계급의 사상과 목적들을 어느 정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이러한 영향들은 본능적 자발성의 영역에서 정신적 힘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본능적 자발성에 덧붙여, 인위적 수단들에 의해 자생적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의 필사적인 노력이 추가된다. 학교의 모든 교육과 문학 및 신문의 선전활동은 민족주의 정신을 기르고 고양시키도록 지도된다. 물론, 이러한 인위적 수단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자본의 이윤과 연관은 은폐된다. 착취 계급의 모든 이데올로기에서처럼, 이러한 연관의 명확한 의식은 부재했고, 민족주의와 자본의 이윤간의 연관은 착취당하는 대중들로부터 주의 깊게 억제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다른 원천들, 이전의 사회적 조건들에 기반한 현재 존재하는 전통들로부터 대부분 끌어낸 기만적인 주장들이 찾아져야 했다. 요람이 놓여있었던, 우리의 고향에 대한 사랑, 우리의 유년기의 세상, 마을 또는 도시 구역, 소규모 농민 및 장인들의 생활 공동체들에 대한 회상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외국 권력과 싸우는 민족주의적 국가권력에 대한 집착을 고착시키는데 이용되어야 했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엄격한 객관적 진실들을,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공통성에 대한 의식, 열광, 자긍심과 찬양심, 젊은이들의 마음을 고무하고, 긴장시키고, 경쟁심을 추동시킴으로써, 결국 민족공동체의 내적 강인함을 공고화시키는데 적합한 민족의 삶에서 화려했던 한 측면의 이미지만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과장되고 조작된다.

   민족 이데올로기에 더 큰 연대성을 제공하기 위해, 그것은 때때로 물질적, 물리적 토대, 혈족과 인종에 기반한다. 인류의 인종들은 선사시대의 수천 년에 형성되었다. 우리는 역사의 벽두에, 그리고 주변의 야만국들과 대륙들에서 그 후에 같은 특성을 지닌 집단들이 인종으로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종들은 이주와 정복, 멸종 그리고 원시적 집단들의 혼합을 통해 형성되었고, 더욱 평화로운 시기나 고립된 지역들에서 이 혼합은 특수한 유형으로 진행되었다. 생활공간과 삶의 근원의 점유를 위한 투쟁은 그 후 문명의 역사에서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새로운 생산 형태의 발전으로 인해 생활공간과 삶의 근원을 위한 투쟁은 국가들 및 민족들 사이의 투쟁으로 진행되고 있다. 비록 그 둘은 모두 운명공동체(공통의 운명을 가진)이고 “사람”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표시되지만, 원초적 인종들과 이후 시대의 민족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인종들은 피와 혈족에 의해 결합된 집단이다. 상품 생산의 시대에 형성된 민족들은 공통된 의식, 사상, 경험과 문화라는 정신적 결속에 의해 결합된 집단들이다.

  그 이후 시대의 역사로 기록된 거대한 이주는 현대인들과 민족들의 거의 대부분 상이한 인종들의 혼합을 통해 형성되었는가를 입증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혼합의 과정은 현대적 산업 조건들에서 비록 조용한 형태 일지라도 계속 지속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궁핍한 농업지역으로부터 외국의 산업 도시와 산업지역으로 이주해간다. 예컨대 아일랜드사람들은 영국의 도시들로, 체코인들은 비엔나로, 폴란드인들은 라인지방으로, 유럽인은 미국으로 이주했었다. 대체로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환경에서 언어와 습관뿐만 아니라 사상을 습득하며 그럼으로써 민족공동체로 용해되고 동화된다. 이주민들이 보다 큰 대중들의 한 부분으로 포함될 때, 특히 불같은 민족적 투쟁의 의식에 의해 이미 감화되었을 때 그 동화는 멈추게 된다.

  근대 민족이 순수한 하나의 기원을 가진 순수한 인종의 후손이라고 주장될 때, 어떻게 이를 결정할 수 있겠는가? 보통은 불확실하지만, 역사적 증거는 근대민족은 인종들이 매우 심하게 혼합되었다는 점을 지적해준다. 언어 공동체가 결정적인 것도 아니다. 농민 공동체들은 다른 지배적인 언어들에 의해 자신들의 삶과 일이 영향 받지 않는 한 집요하게 그들의 언어에 집착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혼합될 때 승리자들의 언어가 정복자에 의해 채택되는 경우와 더욱 문명화된 주민들의 언어가 보다 덜 문명화된 침입자들에 의해 채택되는 경우 중 어느 경우가 더 많은가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언어공동체는 이후에 민족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힘이 된다. 하지만 언어공동체는 민족이 같은 혈통 공동체(community of descent)라는 점을 확증해주지는 못한다. 게다가 유럽인, 몽골인, 흑인 등의 주요한 집단들 사이에는 피부색, 머리카락 같은 신체적 차이, 신체적 구조와 두개골 형태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 집단의 하위 집단들 사이에서는 그 차이가 작다. 모든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신체적 특성은 다양성을 보이며, 우리를 매우 당황하게 만든다. 특히 독일에 있는 인종학자들은 튜턴족은 중앙 유럽에 사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짧은 두상을 가진 “알프스” 인종과는 달리 긴 두상에, 금발 머리, 파란 눈을 가진 “노르딕” 인종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 유럽에서 긴 두상을 가진 사람들은 노르웨이, 북서부 독일, 네덜란드, 영국에서 지배적인 반면 독일인의 대다수는 짧은 두상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적이며 이는 다음 세기에는 더욱 증가될 것이다. 미국의 인종학자 딕슨(Dixon)은 기존의 오스트리아 제국의 주민들의 신체적 특성과 두개골의 형태와 관련해서 말해보면 거의 동질적이지만, 그들은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7개의 민족들로 나뉘어져있고, 많은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상이한 고대의 방랑자들과 모험가들이 뭉친 사람들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프랑스인들은 신체적으로 볼 때는 가장 상이한 인종적 특성들이 혼합되어 이루어져 있지만, 그들은 하나의 공고하게 동질화된 민족처럼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민족성의 토대로서 인종공동체는 단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고안되고 선전된 공상적 이론일 뿐이다. 독일 민족주의의 힘은 고대 튜턴족의 피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민족주의는 경제, 생산 양식에 그 강력한 실제적 토대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이는 상이한 계급마다 차이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민족주의는 결코 노동계급을 장악할 수 없었다. 민족주의가 생성된 소시민과 농민계급에서 민족의식은 커다란 역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본에 의해 자신들이 착취당한다는 사실은 공동체로 뭉쳐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다른 사고경향을 띠게 했다. 노동계급은 민족주의를 착취자들의 이데올로기이며, 때로는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위선의 한 형식으로 인지하였다. 실업으로 방랑하게 될 때, 노동계급은 다른 나라에서 자신들처럼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 동료들을 발견한다. 실제적으로 노동계급의 투쟁에 의해, 그런 다음에 이론적으로 그들의 의식에서, 그들은 민족을 가르는 분리선을 긋는다. 또 다른 운명공동체인 계급공동체가 노동계급의 감각과 사고를 결정하고 그것은 전 세계로 확장된다. 계급의 분리선은 민족을 가로지른다. 부르주아지의 민족주의적 선전활동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노동자에게 조국이 없다는 언급을 통해 자신들의 삶의 현실을 부정한다. 사회주의 선전활동은 국제주의가 노동계급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하지만 의식적 사고와 공언된 교리들 밑바닥에는, 노동자들의 잠재의식에 여전히, 세계 전쟁의 발발로 밝혀지게 되는 확실한 민족의식이 존재한다. 실제적으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의 규칙을 동의해야 하였으며, 그들의 부하이었다. 실제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자본주의에서 자신들의 위치가 어디인지만을 확인해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상적으로 완벽한 독자성을 획득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부르주아지를 추종할 때, 노동자들은 중간계급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로 남는 것이다. 영국에서 노동계급은 세계 무역, 산업적 독점과 식민지 착취가 부르주아지에게 수여하는 이윤에 참여한다. 독일에서 세계 산업의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에너지는 산업적 권력과 산업적 번영이 노동자들의 이해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래서 노동계급의 민족주의는 개혁주의자들의 동반자였다. 민족주의는 영국에서 보수적인 전통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조용하게 작용했고, 독일에서는 격렬한 경제적 팽창에 의해 추동된 충동적 본능으로 기능했다. 노동계급의 민족주의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부르주아지의 것과는 반대로 항상 평화주의적이었고 소시민적 환상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혁명적 투쟁에 나설 때, 민족주의는 철저하게 추락할 것이다. 새로운 노동자들의 생산 조직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이해관계에서 적대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의 모든 국경에 무관하게 모든 나라들로 확대될 것이다. 사회의 재건설에서 투쟁은 단지 자본가계급에 대항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할 것이다. 이 투쟁에서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전우로서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한다. 전 세계노동자들은 하나의 군대에 속한다. 확실히 그들은 서로 상이한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들은 단지 그들의 사고의 외적 표현들하고만 관계될 것이다. 전 세계노동자들의 본질적 내용, 사상, 감정, 문화는 가장 주요한 생활경험으로서 동일한 계급투쟁, 공동투쟁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고, 운명은 동일하다. 이전의 역사에서 상이한 민족적 영향들에 종속되어 있기에, 수동적 성격과 문화의 차이가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능동적 성격과 의지의 방향에서 그들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룰 것이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새로운 사유 상태는 국적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자유롭고 평등한 민족들의 평화로운 협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민족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은 전 세계 인류의 통합, 생산, 삶, 문화의 공동체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민족성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신체적 특성과 자연적 환경의 모든 차이, 지방언어와 전통적 습관의 차이들은 하나의 거대한 운명공동체로서 전 인류의 상호접속을 확장시키게 될 것이다. 결국 민족주의는 그것을 만들어낸 계급과 함께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는 미래의 일이다. 현재 민족주의는 이 길을 방해하는 강력한 힘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모든 민족주의적 전통을 파괴하는 것뿐만 아니라, 환상을 피하기 위해 적대계급에 있는 민족주의의 강력함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민족주의는 지나간 시대의 전통으로서 현대의 조건 속에서 점차로 사라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투쟁의 한가운데, 적군의 깃발에 서서 비옥한 경제적 토양으로부터 계속해서 자신의 힘을 갱신하는 살아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지난 25년 동안 독일의 역사는 그들의 국가권력이 파괴된 이후에 어떻게 부르주아지가 정신적 힘을 이용해, 즉 민족주의를 통해 부활하여 더욱 강력한 새로운 국가를 구축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1914년의 세계전쟁의 발발은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운동에게는 커다란 재앙이었다. 모든 국가에서 노동계급의 으뜸가는 모범이 된다고 여겨지던 독일의 당과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조직의 모든 권력과 언론 그리고 도덕적 권위를 정부의 손에 넘겨주었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는 모든 자랑스러운 계급투쟁과 국제주의 강령과 슬로건의 붕괴였다. 노동자들은 모든 신뢰와 믿음을 당과 조직에 받쳤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군사력과 당 기구의 압력과 결합된 민족주의 선전활동에 대항하기에는 무력해졌다.

  그리고 독일의 군사력이 붕괴된 1918년이 도래했다. 선원들의 폭동, 주요한 도시들에서 파업과 시위, 노동자평의회와 군인 평의회의 성립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단지 노동계급을 감시하고, 노동계급이 진실한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막는 사람들로서, 노동자들이 장군과 자본가만큼이나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노동대중들은 정치권력이 자신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노동대중들은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노동대중들은 다시 당과 자신들의 지도자들에 믿음을 걸었고, 소규모 혁명적 투쟁가들과 대변인들로 이루어진 전위 집단들이 사회주의자로 자칭하는 지배자들의 명령에 의해 학살당하는 것을 별 수 없이 지켜봐야 했다. 노동대중들은 줄곧 당이 자신들을 사회주의로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오늘날 당은 지배자가 되었고 지도자들은 관리가 되었다. 이제 사회주의가 도래하여야 하였다.

  하지만 노동대중들이 얻은 것은 자본주의였다.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적 소유, 심지어는 귀적들의 토지소유에 대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국민회의를 소집함으로써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즉시 의회를 부활시켰고, 의회는 항상 그들 삶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부르주아지는 조직된 권력의 관료적 중심체를 얻게 되었다. 사회주의자와 민주적 정치가들이 상층을 장악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권력의 환상을 조장해 대중들을 속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 후 사회주의자와 민주적 정치가들은 점차로 쫓겨나고, 자유주의적, 반동적 인물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자본주의는 평상시처럼 작용했다. 즉 대중들을 착취했고, 중간계급들을 수용했으며, 생산수단을 무계획적으로 운영함으로써 경제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으며,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었고, 사회를 실업이라는 새로운 위기에 빠뜨렸다. 그리고 모든 불만족과 분노는 새로운 공화국과 의회의 지도자들에게 돌려졌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는 아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자신들 전투력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조건들에 의해 낙담하고 시달리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 예컨대 승리와 미래의 위대함이라는 높은 희망으로부터 좌절한 중간계급 청년들, 철저히 구태의연한 관념들 속에서 살아가는 패배해 좌절하고 해임된 군 장교들, 한때는 자신들의 독무대였던 정부 관료들의 자리가 이제는 경멸스러운 사회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절망하고 있던 젊은 지식인들, 화폐가치의 하락에 의해 가난해진 모든 사람들, 자신들의 국가가 굴욕 했다는 치욕스러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 다시 한번 세계 패권을 위해 싸우고자 하는 호전적 의지에 추동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결합시켜주는 힘은 불타오르는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평화 상태들을 경멸하며, 외국의 승전국들에 대한 반감보다도, 자신들의 유순한 지배자들의 게으른 민족성에 대한 증오로 더욱 꿈틀거리는 극도의 긴장상태(white heat)로 폭발했다. 그들은 숭고한 민족적 관념들의 잉태자로서 서게 되는 반면, 그들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은 보잘 것 없는 공화국의 가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나 볼셰비키당의 혁명적 감언이설에 대해 만족하는 것에 불과한 자들로 치부된다. 그래서 성장하고 있는 청년들 중에서 가장 활동적인 인자들은 투쟁단체에 결합했고, 불타오르는 민족주의적 교육에 의해 고무되었다. 거대 자본은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선전을 위한 수단들을 제공했다. 1930년 세계 공황이 일어날 때까지 그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로 성장했다. 불구가 된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저항을 위해 노동자들을 무장하도록 주장할 모험을 하지 못했다. “세계-해방”을 기치로 내세운 사회민주주의는 해충 취급당하면서 불명예스럽게 몰락하고 말았다. 오늘날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민족주의는 쉽사리 의회제 공화국을 일소시켜버렸고, 민족의 모든 힘을 세계 패권을 위한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조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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