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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2
    스티커(by 새얀)
    깜깜
  2. 2009/02/12
    부시 모욕하기
    깜깜
  3. 2009/02/12
    고양이 위령제
    깜깜
  4. 2009/02/12
    방문
    깜깜
  5. 2009/02/12
    섹스와 공간
    깜깜
  6. 2009/02/12
    고시원에 대한 짧은 문답
    깜깜
  7. 2009/02/12
    어느 게이의 신경질(1)
    깜깜
  8. 2009/02/12
    텔레파시 소개(4)
    깜깜
  9. 2009/02/11
    비바! 레볼루션!
    깜깜
  10. 2009/02/11
    제로와 제로가 만나면2
    깜깜

스티커(by 새얀)

재미없고 마음에 안드는 어느 곳이든, 인쇄해서 낼롬 붙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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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모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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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위령제

고양이 위령제

 

평소에 고양이를 싫어 했지만

사람보다 더 잉여 스러워 싫어 했지만

 

정말로 맞춤법을 맞추기 힘들 정도로

술에 취한 새벽에

고양이의 주검을 본다

 

걔는

흰털에 바큇 자국의 때를 입고

바둑이 갔다

이내 하지만 고양이지

 

세미나 하고 내가 친구 고양이 괴롭힌게 생각나서

숙연해진다

 

내가 그에게 무엇을 할까

할까? 할 게 없어

가방 측면에서 나의 디스 담배를 꺼낸다

 

디스를 고양의 주검에 물리려다

고양님의 턱이 벌리지 않음을 느꼈다

 

고양님의 한은 그만큼 벌어지지 않나보다

 

나는 그 고양님의 턱에다 담뱃불을 붙히네

 

편의점에서 요구르트를 사고나서도

그 불 잘 붙어 있다

 

고양이는 무슨 한이 있어 담배를 피나

차에 치어서 그러나

 

나는 무슨 한이 있어서 담배를 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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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엄마는 다소 충격에 휩싸인 듯하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결혼할 마음도 없이 남자와 한 집에서 살고 있는 내가, 엄마 눈에는 문자 그대로 '미친년'으로 밖에는 안 보인다는 반응이다.

 

이미 현관에 발을 들여 놓은 상황에서, 이미 완벽하게 우리 둘을 위해 짜여진 이 공간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절제하는 것 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일을 꽤나 잘 해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의 반응은 채념과 인정. 그리고 다시 그녀의 틀 속으로 나를 끌어다 맞추는 일. 엄마는 졸업한 후에 곧장 '머리를 올릴' 것을 협상안으로 내놓았다. 어쨌든간 지난 수원 방문 때 합격점을 받은 남자친구랑 그냥 결혼해서 살았으면 하는 심산이다. 이미 한남자랑 '살을 섞고' 동거한 경험이 있는 여자는 (그 남자랑 결혼하지 않는 한) 평생 불행해질 것이라는 게 엄마의 지론이다.

 

연애만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발언은, 그야말로 엄마한테는 미친 소리, 한심한 소리, 세상 모르는 소리(이건 맞는 말이다)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아빠의 반응은 훨씬 호의적이다. 하지만 이건 놀랄 일은 아니다. 이십여년의 결혼생활 동안, 수십차례의 외도로, 그러니까 수십차례의 로맨스로 엄마를 울리고 본인은 웃었던 아빠는, 엄마에 비해선 연애의 기쁨을 좀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수십차례 중의 한 번, 더이상 참을 수 없이 분노한 엄마와, 엄마에 대한 의리, 아빠에 대한 증오와 경멸로 다듬어진 우리 남매는 어느 차가운 겨울날의 새벽에 집을 나왔다. 그리고 아빠는 원래의 '우리집'에서 5분도 안되는 거리의 원룸에 그 때 '당시' 사랑에 빠져있던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그 집은 곧 동네 사람들의 입을 거쳐 엄마에게 발각됐고, 엄마는 그 집 문을 따고 들어가 이불이며 옷가지를 모두 찢어버렸다. 복받치는 설움과 악, 그리고 묘한 쾌감으로 그 공간을 발기발기 찢어버린 것이다. 그 때 나는 충실한 공모자의 역할을 했다.

 

어쨌든 엄마에게, 혼외(성)관계는 모두 '악'이다. 그리고 이 기준은 묘하게도(실은 당연하게도) 여자에게 더욱 가혹하다. 외도를 하고, 가족을 불행하게 했던 것은 여자인 자신이 아니라, 남자인 아빠였음에도 말이다. '몸을 함부로 굴린 여자'의 끝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 엄마는 심지어 자신이 아빠를 만나 한평생을 고생한 것도, 어느정도는 '처녀성'을 지키지 못해 스스로의 몸값을 낮춘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여기에 대해선 아무리 열을 올리고 싸움을 걸어봤자 시멘트 벽에다 바늘을 꽂는 격이다.

 

아빠는 '그 녀석'이 내 속을 썩이면, 자기가 술의 힘을 빌어 단번에 해결해 주겠다고 괜한 장담을 한다. (정말이지, 너나 잘하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은 순간이다. 그리고 아빠와 나의 애인은 실로 아무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덧붙여, 나보곤 열심히 살림을 배우란다. 그래도 명색이 사내라면 여자가 지어주는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거다. 본인이 그러했듯이.

 

둘의 방문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엄마는 오전 내내 정성껏 만들어서 깔끔하게 정리한 반찬들을 내려놓고, 공간을 탐색하고, 놀람과 당황스러움과 분노와 절망과 채념과 인정과 부끄러움 등의 감정을 오갔다. 아빠는 그 짧은 동안에도 냉장고에 조금 남은 술병을 찾아내고, 술을 마시느냐고 나에게 묻고, 그 술을 비우고, 장롱에서 튀어나온 나사못을 찾아내 '사내녀석'의 부주의함을 힐난한다.

 

집까지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말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도착해보면 알테니까 조금만 미루자는 심정으로. 학교구경도 할 겸 반찬도 실어다 줄 겸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엄마 아빠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거절하지 않은 건, 어쩌면 그냥 알아버리길 바랬던 나의 욕망 때문이었을거다. 잘못을 하지 않았으니 감출 것도 없다는.

 

올 때는 아빠가 운전을 했으니, 갈 때는 엄마 차례다. 아빠는 다음번엔 애인과 함께 내려오라고 하고, 엄마는 제발 혼자오라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나에게 미운건 아빠고, 가엾고 존경스러운건 엄마다. 둘은 창문 안에서 뭔가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신림동의 골목을 빠져나간다. 홀가분함과 허무함과 왠지 모를 씁쓸함, 그리고 나의 가족사. 여러가지 감정과 기억이 스멀스멀 머릿속과 가슴속을 스쳐간다. 이제 점심 먹을 시간이로군. 담배 한대를 빼물로 얼른 집으로 뛰어들어간다.



by 새빨간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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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와 공간

섹스와 공간   

     

     적지 않은 20대들이 섹스를 하며 살아간다. 섹스 파트너를 어떻게 구하는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고 취향에 따라 다른 문제겠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20대들의 공통의 고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공간의 문제이다. 물론 당신이 방음이 잘되는 원룸에서 살고 있다면 그다지 문제될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이 아직 부모님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거나, 기숙사 혹은 자취방처럼 옆방 사람의 핸드폰 진동소리까지 들리는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고 있다면 이는 크나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을 거다. 섹스를 하기 위해선 한 평 이상의 아늑한 공간이 필요한 법인데, 상상력도 주머니도 빈곤한 나에게 이 곳 서울은, 진심으로 나의 즐거움에 도움이 안 되는 곳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급한 놈이 우물을 파는 수밖에. 지난 1년 동안 나와 애인은,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섹스를 위해 엉덩이 누일 곳을 찾느라 적지 않은 고민을 했더랬다. 그리하여 결국은 몇 개의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하게 됐는데, 물론 여기엔 주변 이들의 조언과 각종 매체들의 도움이 있었으며 그래봤자 크게 새로울 것은 없는 공간들이다. 그래도 혹시 이런 정보가 누군가에게는 지푸라기가 되어 한 번이라도 더 오선생을 모시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에 몇 가지 장소와 비법(?)을 공개하려 한다.


1. 뻔뻔해져라

     방음이 안 되는 자취방이라면, 그냥 그 상태를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물론 옆방 사람을 배려해서 최대한 ‘사운드’는 자제해야겠지만.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가족들이 집을 비운 때를 노리는 것도 좋다. ‘섹스’라는 활동과는 거리가 멀게 꾸며졌을 당신의 방에서 가족들의 귀가시간을 염두 해 두고 섹스를 즐기는 것은 나름의 스릴과 색다른 기분을 안겨줄 것이다. 다만 조심할 것은, 자취생의 경우 옆방 사람의 성격에 대해 조금 알아 둘 필요가 있겠다. 나의 경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애인 옆방에 사는 할아버지가 뛰어나와 거세게 문을 두드리며 욕을 한 적도 있다. 물론 부모님의 집을 이용할 경우에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가족들에게 확인 전화를 해본다거나 문을 잠궈 둔다거나 하는 식의 준비가 필요하겠다. 


2. 돈이면 안되는 게 없다

     역시나 서울에선 돈이면 해결 안 될 문제가 없었다. 도심 곳곳에 있는 모텔들이 다 괜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 모텔의 최대 미덕은 방음이 완벽하다는 점이다. 방 안에서 무엇을 하든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대신 몰래카메라는 신경 써야 할지도). 그 외에도 숙박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많이 쓰이는 공간인 만큼 다양한 시설들이 잘 갖춰져 있어서, 아무런 준비 없이 ‘몸만 가도’ 될 정도다. 하지만 화장대에 놓여있는 로션의 경우엔 향이 정말 별로이고 상표도 미심쩍으므로 여행용 화장품을 들고 가는 게 좋겠다. 콘돔의 경우에도 평소에 즐겨 쓰던 걸 챙겨가는 경우가 더 많더라. 모텔 중에서도 입소문을 통한 별 다섯 개짜리들이 있는데, 이런 곳은 정말이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가주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이건 그저 ‘마음’에 그칠 수밖에 없는데, 모텔 숙박료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보통 하룻밤 묵어가는 데에는 4-6만원이 필요하고, 네 시간 대실의 경우에도 그것의 절반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대학생이 모텔에 맛들이면 등이 휜다고.


3. 색다른 장소 찾기

     그 외에 우선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장소는 비디오방이다. 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이용하고 있는 곳이겠지만. 비디오방 역시 시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정도의 방음은 되는 곳이고, 조명 또한 나쁘지 않다. 반쯤 누운 자세가 가능한 소파도, 어떤 면에선 침대보다 낫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과 적절한 영화를 선택해 더욱 에로틱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도 비디오방의 미덕이다(단, 너무 과한 영상은 피할 것). 항상 어두운 곳이라 위생상태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고, 체위에 따라서 문에 있는 작은 창문으로 밖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칠 위험도 있지만, 이쯤은 극복할 수 있을 만큼 비디오방은 매력적인 곳이다.


     비디오방은 식상하다, 더 색다른 장소가 필요하다 하시는 분들은 다양하게 고민해 보시길. 안타깝게도 카섹스는, 차가 없는 본인은 시도해보지 못했으므로 생략하겠다. 대신 사람이 없는 우등 고속버스에서 오럴섹스를 한 적이 있는데, 이 또한 매우 추천하고 싶다. 물론 여기에서 포인트는, ‘사람이 없는’이다. 최소한 ‘사람이 적은’이어야 한다. 아직 시도해보지는 못했지만, 야외 공간이나 강의실 등도 후보에 두고 있는 곳이다. 포르노와 실제 상황은 다르므로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함은 당연하다.


     섹스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놀이일진데 결혼한 부부가 아닌 경우엔 ‘합법적’ 내지는 ‘건전한’ 장소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때로는 괜히 죄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화사하고 깨끗하면서도 저렴하고 접근하기 쉬운 공간을 원하는 것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 걸까?

by 새빨간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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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에 대한 짧은 문답

“고시원? 여긴 고시공부 하는 데잖아?...그러나 우리가 미쳐 몰랐던 중요한 사실은 이미 그 무렵부터 세상의 고시원들이 여인숙의 대용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민규, <갑을 고시원 체류기> 중에서)

 

 아마도 몇 달 전, 고시원에서 불이 나 인명피해가 꽤 발생했을 때였다. 언론에서는 안전의 사각지대라며 고시원 성토에 나섰을 뿐 새로운 주거형태로 자리잡은 고시원에 대해 심오하게 다룬 보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평지마다 아파트가 들어서는 걸 보면 이 땅에 사람 하나 누을 수 있는 곳이 없진 않을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고시원은 날로 늘어난다.

 학교 주변에 늘어 선 고시원을 보면서 저기엔 대체 누가 살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름대로라면 각종 국가고시생들이 모여 젊음을 불태울 테지만, 어쩐지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고시원에는 고시생이 없단다. 대신 대학가 고시원에는 자취방을 못 얻은 대학생들이, 노량진 학원가에는 수험생들이, 도심 주변에는 실업자 노숙인 이주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들이 고시원을 채우고 있다. 

 학교 앞 고시원에서 매 학기 숙식을 해결하는 친구 하나를 꼬셔서 다짜고짜 고시원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이 녀석이 건축학을 3년 째 공부하니, 뭔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고시원에 대한 이 친구의 생각은 나로선 ‘의외’였다. 얘기를 마칠 때쯤엔 나름대로 고시원을 겪어 보고 싶었는데, 철없는 생각인 걸까.

 

건축학과는 원래 그렇게 바쁜거야?

학기 시작하면 정신없어. 스튜디오에서 밤도 많이 새고. 하여튼 개강총회도 못할 정도로 정신없어.


밤새 과제하면서 통학하려면 정말 힘들겠네. 자취하는 애들 많겠네.

그래서 고시원 사는 거지. 근데 뭐 지금은 적응 돼서 아무렇지도 않아. 엄마는 고시원 사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는데, 2시간을 통학하면서는 내가 견딜수가 없으니까.


고시원 사는 거 어때?

살만해. 나도 말로만 듣다가 1학년때 처음 고시원 가봤어. 같은 과 언니와 친구들이 학교 근처 고시원에 살아서 공강 때 잠깐 그 언니 방에서 쉬어가고 그랬지. 방은 1평 조금 넘을 만큼 좁았는데 그래도 왕복 4시간씩 지하철로 통학을 했던 때라 부러웠어. 그래서 고시원을 친구랑 들어왔지.


“그것은 방이라고 하기 보다는 관이라고 불러야 할 사이즈의 공간이다. 도저히 다리를 뻗을 수 없는 공간에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다. 그곳에서 공부를 한다. 그러다 졸음이 온다. 자야겠다. 그러면 의자를 빼서 책상 위에 올린다. 그 속으로 다리를 뻗고 눕는다. 잔다.”


1평 남짓한 데서 친구랑 같이 살아? 힘들 것 같은데.

 처음부터 고시원에서 아주 살려고 했던 게 아니니까. 돈도 아낄 겸 해서 1인실에서 둘이 함께 사는 거야. 처음엔 창문 없는 방에서 살았었는데 꼭 새집을 장만 한 것처럼 방 꾸미고 정리하고 했어. 창문이 없어서 아침이 와도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안가니까 일어나기가 힘들고 그 좁은 침대에서 둘이 잠을 자니까 똑바로 누운 그 자세 그대로 뒤척이지 않고 자야되고, 밥도 일일이 챙겨먹어야 하고, 가끔 옆방의 여자 우는 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다니까. 불편한 건 둘째치고, 완벽한 독립은 아니었지만 괜히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묘한 책임감도 들더라. 그러다가 얼마 후에 운 좋게 창문 있는 방으로 옮겼어. 그 방으로 옮긴 후 첫 아침에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는데, ‘빛을 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더라. 몇 달만에 아침햇살 맞으며 눈을 뜨고 나서 친구랑 너무 좋다고 오랫동안 누워서 뒹굴고.


창문 하나에 기분이 정말 달라지지.

맞아. 창문 하나에 살아있는 걸 느끼는 것 같고. 창문 있는 방이 왜 더 비싼지 이해가 되더라.


“시간이 흐르자 고시원의 사람들과도 꽤나 안면을 트게 되었다. 하지만 마주친다 해도 대개가 가벼운 눈인사에 불과했고 대화를 하거나 따위의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의외로 씩씩한 것은 여자들이었다. 세면장 겸 화장실에서 마주쳐도 여자들은 언제나 당당했고 자신의 볼일을 척척 다 보고 서로의 방을 오가며 소곤소곤 환담을 나누기도 하고, 함께 장을 보러 가는가 하면 그 좁은 옥탑방에서 몇몇이 어울려 즐겁게 식사를 하고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아니, 웃었다! 그곳에서 웃는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희귀한 일이었다.”


 박민규 단편 소설 중에 <갑을 고시원 체류기>를 보면 고시원 살면서 옆방 사람이랑 잘 말도 안하고, 굉장히 서로 모른 척 하면서 사는 걸로 묘사되던데. 넌 어땠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근데 난 나름대로 재미있고 좋았어. 1학년 때보다 더 힘들고 바빴는데 일찍 과제가 끝나면 고시원 사람들하고 모여서 족발이나 보쌈을 시켜먹고 그러면서 꽤 친해졌어. 다른 과 친구랑 외국인 친구도 친해지고. 같이 쇼핑도 하고 시험기간이나 과제를 할 때 깨워주고.


의외인데? 처음부터 고시원이 너한테 맞았어?

처음에, 고시원을 들어가서 여기가 내 집으로 잘 살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 엄청 답답해 보이고, 합판 같은 걸로 칸만 나눠놓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파트 사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지. 어떻게 보면 마지막 선택으로 고시원 온 거니까. 그런데, 사람에 따라 다른 거라 그런지 여기다 정을 붙이고 내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되겠지 싶었어.


그래도 몇 년을 살지 모르는 곳인데, 고를 때 어떤 기준 같은게 있진 않았고?

 내가 가진 철학이나 기준이라기 보다, 주거 공간이라는 게 원래는 설계할 때 기본적으로 각 부분이 독립되면서도 자유로워야 되거든. 예를 들어서 거실은 독립적인 공간이 되기 위해서 거실을 통과해서 다른 방으로 가게 되면 안되고, 주방의 경우엔 전처럼 창문을 작게 하거나 구석에 몰아넣지 않아야 해. 요즘은 주방도 하나의 방처럼, 거실처럼 입지가 독립적이어야 해. 주방 살림을 하는 사람만의 공간으로 독립성도 확보되어야 하고. 그렇다고 또 너무 열려있거나 닫혀있으면 안 돼. 그리고 이용이 편하고 실용적 이여야지.

 근데 생각해 보면 독립성이니 실용성이니 하는 게 사람마다 다른 거잖아. 예전에는 집을 짓고 거기 들어가 살라는 식으로 사람이 맞추는 공간이었는데, 요즘은 설계할 때부터 사람에 맞게 집을 맞춘다. 요즘 아파트가 많아서 안 그런 거 같지만, 아파트도 입주자에 맞게 변하고 있고 제한적이긴 해도 선택할 수가 있잖아. 어떤 집은 화장실에 문이 없어. 너나 나나 구닥다리 아파트에 오래 살아서 그렇지 집이 생각보다 단순하지가 않아. 틀을 깨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고 설계를 한정할 수가 없어. ‘사람에 맞춘다’는 것이 전체적으로 주거공간을 아우르는 틀이라고 봐야지.


그런데 고시원은?

 고시원은 사람에 맞춘다는 게 없지. 지어놓고 칸막이 해놓고 들어가 살아라, 그 안에서 어떻게 생활하든지 그건 네 마음이다 다만 공공생활은 지켜라 이거야. 죄다 똑같은 구조에 창문이 있냐 없냐에 따라 혹은 화장실 시설에 따라 나뉠 뿐이지. 그리고 고시원이 살아보니까 굉장히 남성중심의 공간이야. 여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최근이라 화장실을 나중에 추가로 붙여서 지은 곳도 많아.

  

그렇게 사람 중심적이지도 않고 남성 중심적인 공간인데 주거공간으로서 안 좋은 거잖아. 

 고시원이 안 좋은 점은 독립성이랑 자유로운 게 조화롭지가 않다는 거야. 아침부터 화장실 쓰는 거 기다리느라 난리치고 같은 곳에 살면서도, 칸막이 그 이상은 내 공간이 아니야. 그 박민규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고시원 사는 사람들이 같은 데 사는 사람일 뿐 같이 사는 사람은 아닌 거지. 그렇지만 나는 한 칸의 고시원 쪽방 이었어도 친구들이랑 같이 어울리면서 함께 사는 공간이라고 느꼈던 거 같아. 집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잖아. 사람이 없으면 집이 아니지.


그렇다면 꼭 내 공간이 내가 사는 집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내 공간이어도 내 집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공간의 처음이 뭐일 것 같아? 보통은 사람들은 움집이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가장 처음은 모닥불이야. 불을 땜으로써 불 주위에 사람이 모이지. 따로 벽이 생기진 않지만 불 주변은 밝고 바깥은 어두우니까 그 사이에 경계가 생기고, 돌을 쌓아서 ‘여긴 내 거’ 라고 하지도 않지만, 사람이 있는 곳에 공간이 만들어지는 거지. 아무리 벽을 쌓아서 막아도 내 공간이 아닐 수도 있고, 그냥 나무 밑도 사람이 있다면 공간이 될 수 있어. 공간의 의미가 넓지.


모닥불 하나로 이미 의미 있는 공간이 정의된다는 게 신기한데.

 왜, ‘데드 스페이스’ 라는 죽은 공간이라는 말이 있거든. 말은 부정적으로 들리는데 데드스페이스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어. 설계자가 집을 만들 때 큰방, 작은방, 거실로 해놓는 건 설계자 마음이지만 거기 설계자가 사는 건 아니잖아. 임의로 정해주는 것, 형태만 잡는 것일 뿐이지. 공간을 만드는 건 사는 사람이 자기 걸 만들어 나가는 거에 달린 거야. 아무리 설계를 잘해도 어떻게든 나중에 보면 데드 스페이스가 생기기 마련인데 거기에다 의자를 놔서 휴식공간을 만들 수도 있고 책을 놔서 조그만 서재를 만들 수도 있겠지.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콘크리트를 바르고 철근을 세운다고 다 집이 아니라는 건데, 좀 원론적으로 들리는데?

<희망을 짓는 건축가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미국 건축가 사무엘 막비랑 루럴스튜디오의 이야기가 나와. 이 건축가와 스튜디오에서는 앨라배마 헤일카운티에 집을 무료로 지어주는 활동을 하거든. 이 동네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이고 소외된 흑인들의 거주지역이야. 사무엘 막비 교수는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가장 최소한의 돈으로 집을 만들어 주는데,  집을 만들 때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지켜보면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보고 집을 만들어 줘. 어떤 노부부가 옥상에서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런 공간을 만드는 거지. 그것도 최소한의 비용으로 폐타이어를 이용할 수도 있고, 방법은 여러 가지야.

 그렇게 만들어 주고 사진을 찍어 놓고 몇 년 후에 찾아가면 처음이랑 다르게 아주 지저분하게 되어있어. 처음 만들어 놓은 대로 깨끗하거나 만든 사람이 생각했던 대로 되어있기를 기대할 수도 있는데, 전혀 달라. 그런데 그걸 꼭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아. 기대는 설계자의 욕심일 뿐이지, 그 공간이 사람들에 의해 지저분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 창고가 될 수 도 있다는 거야. 처음 찍어놓은 사진은 마치 합성사진처럼 ‘집 따로 사람 따로’인 어색한 느낌이 들지만 나중에 찍은 사진은 자연스러워 보여. 그들만의 공간이 되었다는 증거지. 혹 설계자가 지저분하고 망가졌으니까 부수고 새로 짓자고 해도, 거기 사는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는다고 하고 이 집만큼 편한 집이 없다고 해. 절대 무너뜨리지 않겠다고.


 네가 말한 그 빈민촌도 도시 빈민이나 딱히 갈곳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기 시작한 거잖아. 고시원이랑 비슷한 것도 같은데, 생각해 보면 고시원 같은 곳이 더 소외된 곳이고, 부자연스러운 곳인 것 같아.

 고시원은 좁고 답답하고 인위적이야. ‘거기서 어떻게 살아, 이것도 집이냐?’ 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봐도 그래. 그래서 처음엔 못살 것 같고 답답했다니까. 그런데 막상 거기 들어가 살게 되면 처음엔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던 곳에서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생겨. 남들이 보기엔 위험하고 협소한 고시원일 뿐이지만 그곳에서 쉬어 가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는 거거든.

 당연히, 고시원이 마냥 항상 좋은 건 아니지. 하지만 내 몸이 힘들 때, 씻고 눈 붙일 곳이 필요할 때, 어쨌든 내 공간이 있으니까 좋은 거야. 거기에 내 짐과 물건을 놓고 하는 게 내 방을 나름대로 꾸미는 거 같아. 치장을 한다는 게 아니라, 물건 놓고 정리하고 활동이 이뤄지고 하면서 정이 들어. 그리고 좀 웃기지만 거기 살다 보면 그렇게 좁은 줄을 몰라. 활용하느냐에 따라 넓어 보이기도 한다니까.

 

고시원 살다보면 오히려 프라이버시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내공간이다 싶으려면 사생활이 어느 정도 보호되어야 할텐데 고시원에서는 안 그런 일도 많지 않아?

 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 하는데, 그게 벽을 만들어서 차단한다고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게 아닌 것 같아. 반대로 벽이 없다고 프라이버시가 안 지켜 지는 것도 아니겠지. 예를 들어서 서구 문화에서는 문이 열려있어도 노크를 하잖아. 이건 그 공간을 네 공간으로 인정해준다는 거다. 문 열려있지만 프라이버시 지켜주는 거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구석에 칸막이 쳐서 몰아넣고, 문 잠그고, 그렇게 벽을 쌓고 나서도 정작 문 쾅쾅 두드리면서 문열라고 하는데, 그게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게 아니야. 프라이버시도 일종의 문화야. 프라이버시를 위해 문을 막는다고 해서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건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가두는 거야.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동시에 열어주고, 모이거나 오가는 것을 자유롭게 하면서도 지켜주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 그 선을 지키면서 산다면 반드시 고시원이라고 특별히 나쁠 건 없어.

만약에 고시원 이외의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

 더 넓고 시설 좋은 데 얻어서 들어가겠지. 만약에 처음부터 고시원에 안 살았다면  고시원 안갔을 것 같아. 그런데 나도 좀 이상한게 엄마가 ‘학교 앞으로 이사 갈까?’ 라고 물어보시면 좋다는 말이 선뜻 안나와. 여기 정들어서 그런 거 같아. 여기서 친구들 사귀고 학교도 다니고... 내 생활이 다 있으니까 섭섭해서 못 가. 서울로 이사가는 것 보다 조건이나 주거 환경이 안 좋지만 당장 쉽게 이사가자고 못하겠더라.


그럼 결과적으로 환경에 맞춰진 것 아닌가? 물론 현실적으로 사람이 원하는 공간에 살긴 힘들겠지. 특히 학교 앞이라는 데서는. 그렇긴 하지만 고시원에서 나름 만족했다는 것 자체가 그 공간이 꼭 좋아서가 아니라 살아야 하니까 적응하고 정붙이고 산 거 잖아.

 근데 그게 나쁜가? 그게 나쁜지 모르겠는데. 물론 많은 사람들이 고시원을 거의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하지. 첨부터 고시원을 원한 건 아닐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거잖아. 사람이 있다고 꼭 고시원이 생길 수도 없고, 고시원만 있다고 고시원 족이 생길 수는 없어. 고시원이 있어도 사람들이 들어가 살지 않으면 고시원족이 생기지 않으니까. 그만큼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인 것 같아. 상황이 어찌됐건 건축이 돈과 뗄 수가 없는 것처럼 주거 생활도 항상 돈이 개입되니까. 그리고 살다 보니까 솔직히 좁고 불편하기 때문에 생기는 애정이 있어. 지하철도 그렇고.


지하철에는 정이 가? 1호선은 특히 힘들고 피곤하잖아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건지, 1호선은 술 주정뱅이부터 시작해서 정말 화려하게 최악인데, 그런 게 있어서 사람 냄새가 나잖아. 좁은 공간에 다양한 직업,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서 각자의 목적지로 간다는 게 재밌어. 지하철도 뭐 어떻게 보면 차선의 차선인 수단이지만 싫지 않아. 지하철 나름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차가 생겨도 지하철을 버리지 못하겠지.


맞아. 1호선이 가진 희한한 정서가 있어.

 물론 고시원을 단순히 지하철이랑 비교하면서 둘 다 낭만적으로만 기억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요즘 아파트 광고들에서 나오는 집에 비하면 고시원은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집이 정말 ‘쉼’ 하나로 나한테 고시원 쪽방은 그만한 가치를 가진다고 봐. 새벽에 늦게까지 스튜디오에서 맘놓고 과제하고, 학교에 조금이라도 더 정을 붙이고 한 게 고시원 도움이 컸거든. 그 작은 방 안에서 각자의 삶이 이뤄지고 또 나름대로의 꿈을 키우잖아. 너무 거창한가?


“나는 그 고시원의 작은 밀실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니까 어제처럼, 이제 그것은 먼 옛날의 일이고 나는 비교적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을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 밀실속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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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이의 신경질

게이라도, 바지만 걸친다고 다 덮치지는 않거든?

‘나 사실 남자가 좋아.’ 한번 상상해보자. 당신의 절친한 친구가 있다. 그는 남자이고, 어느날 당신과 둘이 술을 먹다가, 저렇게 이야기한다. 당신이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일단 놀랐을 것이고, 두 번째로 ‘설마 내 주위에도 이런 사람이..’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에 하나, 당신이 남자라면, 이런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다. ‘뭐야, 그래서 나랑 자고 싶다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오류’다. 당신은 그 순간 친구가 말한 ‘남자’라는 단어를, ‘너’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성애자(異性愛者)들이 동성애자(同性愛者)를 바라보는, 가장 큰 편견 중에 하나는, 게이(GAY)는 모든 남자들과 자고 싶어하고, 레즈비언(LESBIAN)은 모든 여자들과 즐기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즉, 동성애자들이 자신과 같은 성(性)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그게 누구든 그들에게 접근하여, 그들과의 섹스라는 성(性)적인 쟁취를 이룩하고 싶어한다는 오해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성애자들도 눈이 있다. 그 눈은 일반적인 호불호(好不好)에 따라,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만의 취향에 따라 개인적인 기준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게이라고 해서 ‘바지만 입고 있다고 아무하고나 자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실상 게이와 이성애자 남성간의 성적인 교류는 생각보다 훨씬 적다는 것이다. 게이들은, 자신들과 성(性)적인 지향성(志向性)이 다른 이성애자 남성을 ‘건드리는’ 과격한 행위는 거의 하지 않는다. 게이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게이’를 좋아한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남자라면, 레즈비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들과 자고 싶어 안달하는 것보다, 이성애자 여성을 따라다니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고, 성공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말해두지만, 연애와 섹스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가능성 있는 상대가 그 대상이 된다.

 

 

 

다시 당신의 절친한 친구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그가 당신에게 ‘커밍 아웃’을 하는 이유는, 당신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친구로서 당신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설령 그 친구가 당신을 ‘덮칠 것이라는’ 착각은 하지 말자. 일반적인 게이들은 눈이 높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따진다. ‘거울을 보고’ 한번 더 생각한 뒤, 친구의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들어주는 것이, 바로 게이 친구를 둔 이성애자 친구의 미덕이 아닐까. 하지만 혹시나 친구가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건 당신이 친구의 ‘이상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는 겸허하게 자신의 성적 매력에 고마움을 느껴라. 그뿐이면 된다.

 

 

 

 

이 글에 대해 몇 가지 확인해 둘 것이 있다. 첫째, 이 글은 이성애자(異性愛者)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글이다. 둘째, 그 이성애자의 범주는 적어도, 성적소수자(性的少數者)에 대해 초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고, 그들을 지칭하는 여러 가지 용어들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그런 개념들이 명확하지 않다면, 인터넷이나, 기타 매체들을 통해 손쉽게 개념 확립을 할 수 있음을 밝혀둔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남성 동성애자(同性愛者)이다. 즉, 영어로는 게이(GAY)라고 불리는 성적인 지향성(志向性)을 가지고 있다. 고로 이 글은, 모든 성적소수자의 입장을 대변하기보다는, 일부 소수자인 남성 동성애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측면이 강함을 밝혀둔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기본적인 목적은,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에 대해 갖고 있는 ‘무지에서 오는 재수없음’을 어느 정도 줄이기 위함이다. 이 글로 인해 동성애자들을 이성애자와 같이 ‘건전한 연애와 섹스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으로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XXXX대학교 동성애자 모임 ‘XXX’은, 서로의 가운데 놓인 그 ‘재수없음’을 줄이기 위해 다각도로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1 : GAY와 LESBIAN

 

한국어의 동성애자에 해당하는 영어는 HOMOSEXUAL이다. 이는 이성애자를 뜻하는 HETEROSEXUAL과 대비되는 말이다. 하지만 영어의 호모섹슈얼이라는 단어는, 그 안에 어느정도 동성애자에 대한 비하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성애자를 STARAIT, 그와 대비하여 동성애자를 TWISTED라고 칭하기도 한다. 한국어에는 남/녀 동성애자를 명확히 가르는 말이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남녀 동성애자를 구분하기 위해 게이와 레즈비언이라는 영어를 사용했다.

 

 

 

2 : 성적지향성(性的志向性)

 

원래 정신적인 性인 GENDER를 나타내는 말로, 성적정체성(性的正體性)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이는 신체적인 성(SEX)가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적인 성적인 호감이 어느 쪽에 있느냐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본 필자는 성적인 기호는 어느 쪽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남성을 예로 들었을 때, 게이를 10, 이성애자 남성을 0이라 본다면, 그 10과 0에 속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즉, 한 사람의 성적인 기호는 어느 쪽이 조금 더 강하냐에 따라 나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 필자는 정체성이라는 단어보다, 어느 쪽을 지향하고 있느냐는 의미에서 성적지향성(性的志向性)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3 : 커밍 아웃(coming out)

 

커밍 아웃은 원래 'come out of closet'이라는 영어에서 유래한 말로, 동성애자들이 벽장 속에서 나와, 자신의 성적인 기호를 공개한다는 뜻이다. 커밍 아웃에는 자신의 친구나 가족에게 자신의 성적지향성을 알리는 개인적인 커밍 아웃과, 사회적으로 알리는 사회적인 커밍 아웃이 있다. 이와 관련된 말로, outing이 있다. 이는 동성애자들이 타의에 의해 커밍 아웃 당하는 경우를 뜻한다.

 

 

 

동성애자는 선천적이라는 믿음으로 20여 년을 살아온,

 

XXXX대 동성애자 모임 ‘XXX’의 主筆 F씨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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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파시 소개

이런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간혹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과 대화를 하는 것을 보면 가끔씩 놀라곤 합니다. 신기하지 않으세요? 저 조그만 아이와 다 큰 어른이 통할 수 있다는 것이. 이것은 우리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의 일인데,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통한다는 것이 저는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뜻’이 통하고,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낯선 음색에 귀가 홀려 눈물이 나기도 하고, 강렬한 색과 빛에 온 정신을 빼앗기기도 하는 것을 떠올려 보면 인간 존재, 인간 사회가 정말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는 지구별에서 상징체계를 사용하는 종족은 인간종 뿐인 것으로 아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종은 인간종이기에 갖는 어떤 비슷한 원초적 경험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저에게 더 놀라웠던 것은 같은 말을 사용하고, 나이도 얼추 비슷하고, 가까운 공간에서 살아감에도 전혀 말이 안통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개인은 각자의 맥락 속에서 살아온 존재들이기 때문에 모두가 갖고 있는 생각이 다르고 몸짓이 다르고 말투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귀를 막고 자신의 말만 하고 있는 것은 인간종이 갖고 있는 어떤 원초적 경험을 거부하는 일로밖에 제 눈에는 보이지를 않았답니다.


 


  의사소통가능성 실험단의 프로젝트 텔레파시는 인간종이 인간종이기에 갖고 있는 이 원초적 경험을 되살릴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요? 아니, 우리에게 소통과 공감의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는걸까요? 우리가 속해 있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사회에는 수많은 ‘주체’들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너와 나, 여자와 남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좌파와 우파, 너희와 나, 우리와 너, 수많은 나와 너. 더 이상 주체라는 개념조차 성립되기가 힘든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이 수많은 경계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모두가 주체가 되고 모두가 주변인이 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에게는 수많은 우리를 연결해줄수 있는, 미약하더라도 존재하는 끈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아직까지는 우리를 인간종으로 여기고 있고 모두가 상징체계를 사용하는 존재들이니까요. 아직 우리에게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 의사소통가능성 실험단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프로젝트 텔레파시는 우리가 과연 어느 지점에서 통할 수 있을지, 어떤 방식을 사용했을 때 소통과 공감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서로가 접고 있던 귀를 펴고 수많은 상대에게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지 머리를 쥐어 짜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번에 선택한 전략과 방법은 바로 우리 모두가 언제나 겪고 있는 일상에 반전을 주고 일상을 새롭게 조합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프로젝트 텔레파시의 창간 준비호는 일상을 조금 비틀어 새롭게 보는 시도를 통해 우리가 어떤 공간에서 살고 있는지, 우리는 생활을 어떻게 영위하고 있는지, 우리는 누구와 살고 있는지를 얘기해 볼 수 있는 ‘꺼리’를 던져볼까 합니다. 텔레파시의 창간준비호를 통한 실험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얼마의 가능성을 확인해 볼 수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일단 한번 재미로 시작한 부분도 없지 않아 그닥 아쉬울 것은 없지만 이 실험을 새롭게 이끌어가고 싶은 분이나 아직 인간종의 소통가능성에 믿음을 갖고 계신 분은 우리의 다음 실험에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왕 같이 살아가는 거 말이 통하면서 살아가면 좋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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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레볼루션!

 

 

영국의 유명한 좌파 코미디언 마크 스틸의 책이 몇 달 전 '바람구두'(!)라는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어찌나 급하게 책을 냈는지 오탈자도 초반부터 마구 발견이 되고 통일성도 좀 떨어지지만, 워낙 글이 유쾌하고 입담스러운 것이 강해 그러려니 하면서 읽게 된다.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마크 스틸의 독설 어린 입담과 비꼬는 문장(아, 왠지 너무나 영국 사람인듯!) 도 너무나 귀엽고, 통쾌하다.

 

이 책은 마크 스틸이 들려주는 걸죽한 프랑스혁명 이야기다.

 

프랑스혁명을 들려주면서 끊임없이 마크 스틸이 개입했다 빠져나가면서 책에서 눈을 못 떼게 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영국 왕실과 그 추종자들을 '까대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고, 온건하기 짝이 없는 영국 정치판을 비웃는 건 기본 옵션이다)

 

그 걸죽함은 가령 이런 식인거다.

 

 "하지만 의회의 결정은 후속 '이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왕실은 여전히 너무나 놀란 나머지 세력화할 틈도 찾지 못했을 즈음이다. 이 인권선언의 발표는 아주 중차대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귀족들은 세금과 10분의 1세, 귀족 집에서의 집안일 돕기 등을 요구할 권리를 잃게 되었다. 이를 오늘날의 입법 속도와 비교해 보시라. 영국 신노동당 정권이 힘주어 약속한 것 중 하나는 여우사냥의 금지였다. 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들은 이걸 어떻게 처리할 지 고심 중이다. 정시닝 똑바로 박힌 정부라면 집권 첫 날에 아마 이렇게 시작하는 법률로 당장 통과시켰을 텐데 말이다. "빨간 승마복을 입고 와선 셰리 포도주를 마시고 들판 가득 개들을 풀어 놓으시겠다? 그리곤 여우 창자를 끄집어내는 거 축하한답시고 나팔을 불으시겠다? 당신 좀 심하게 아프시구만. 치료는 해드릴 테니까, 그딴 짓 아젠 절대 못하실 줄 아쇼."

 

또는,

 

"그런데 자코뱅이 오늘날의 좌파정당과 비슷하게 굴었던 게 한 가지 있다. 새 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를 목전에 두고서 분열한 것이다. 공화국을 지지하는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을 듣고선 절반 너머의 회원들이 모임을 떠나버린거다. 남은 자코뱅들은 가입비를 감액함으로써 이 사태의 해결을 도모했으며, 프랑스 전역에 걸쳐 500여 개의 분점을 열게 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리옹에만 해도 자코뱅 당원이 3천에 달했다. 물론 처음부터 회원이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약이 올랏을 수도 있겠다. 마치 하위리그에 있을 때부터 응원했던 팀이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하자 이렇게 투덜대는 축구팬처럼 말이다. "우리 팀이 개판일 때가 훨씬 좋았어." "

 

"전쟁이 벌어진 뒤 최초로 프랑스군은 전선을 지켰다. 후다닥 파리로 진격하리라 싶었던 브런즈윅공은 충격에 휩싸여 당황했다. 브런즈윅공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군대에는 요한 괴테라는 부대원도 있었다. 훗날 세계적인 문화가 될 바로 그 젊은이가 거기서 그날의 사태를 낱낱이 기록한 것이다. 브런즈윅공은 마치 대사를 까먹어 연기를 망친 배우가 나중에 쟁쟁한 비평가는 다 왓었다는 소식을 전해드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으악, 그 빌어먹을 괴테도 왔다구?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온 거냐구. 베르됭에나 오지 말이야. 거기선 하룻밤에 죄다 휩쓸었는데 말이지.""

 

등등.

 

프랑스혁명의 온갖 사소한 이야기들로 당시의 분위기를 복원해 내는 것도 대단하고, 프랑스혁명의 의미를 계급적 성격으로 찾아내는 일관성도 아주 설득력이 있다.

 

"프랑스대혁명을 이끌어낸 발상과 사건들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계급'이란 말을 둘러싼 오해를 걷어내는 게 도움이 된다. 예컨대 오늘날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휴대용 컴퓨터와 핸드폰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에게 이런 발명품이 그들의 삶을 보다 편안하게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보다는 출퇴근하는 동안에도 일을 해야하는 사묵직 노동자로 만들었다는 편이 더 옳다. 19세기 방직공장 노동자들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이 퇴근하면서 계속 베틀을 휴대하고 빙빙 돌려야 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대부분의 비제조업 일자리들은 '중간계급'이란 호칭에 어울리지 않는다. 버거킹에 뚜벅뚜벅 걸어가 이렇게 외침으로써 카운터의 직원을 얼떨떨하게 만드시려는가? "당신은 당신이 그건 줄 알지, 응? 이 거만한 중간계급 속물아!" (킥킥)

 

해당 사회가 물건을 생산하는 방식과 한 인물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의해 결정되었을 때의 계급이라야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프랑스대혁명 직전의 수백 년 동안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노동자 계급이라고 얘기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사회의 여러 구성부분들 사이의 차이는 아주 심했으며, 이들은 사회가 물건을 생산하는 방식을 두고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겪곤 했다. "

 

 

출퇴근하며 오며 가는 길에 읽느라 죽죽 보지를 못하는데, 이 책 읽다가 내리는 곳을 지나친 적도 있다.

 

얼마나 이 책이 웃기느냐 하면 무려 캡션을 보다가도 킥킥 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유쾌한 혁명찬가를 읽으면서 드는 느낌은 정말 이렇다.

 

 

그래, 비바! 레볼루션!!

 

이 사회에도 비바! 레볼루션!

 

"파업투쟁이나 시위에 한번이라도 참여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지ㅣ배권력에 도전하는 사건들의 경우, 바로 그 다음날에도 심각하게 왜곡된다는 것을. 그러니, 200년 전 일이라면 오죽하겠는가. 근세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의 경우처럼, 대혁명 관련자들이 근본부터 썩었다는 편견을 일단 걷어내고 나면, 완전히 색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프랑스대혁명이 졸지에, 오늘나르이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둔갑하는 것이다. 우리와 너무 비슷한 보통사람들이 너무나 보통스럽지 않은 대장정에 몸을 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혁명은 우리 시대를 보여주는 지침서이자 영감의 원천으로서 주목해볼 만한 가치를 지닌다. 게다가 대혁명 이야기는 완전 흥미진진하고 진짜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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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와 제로가 만나면2


제로와 제로가 만나면?

 

무한.

 

<소라닌>에서 그랬다. 제로가 제로가 만나면 무한.

 

2주 정도가 지나면 이제 한동안 일을 하지 않게 된다.

 

일을 그만두는 명목은 논문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는데,

올해는 분명 어떻게 됐든 앞으로 몇년간의 삶을 결정지을 해가 될 터다.

 

 

얼마전 한동안 보지 않았던 <소라닌>을 다시 봤다.

 

2년 전 이 책을 봤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긴 했다.

 

학교를 휴학하긴 했는데 여전히 학생 신분인 상황에서 일을 하겠다고 허덕거리고 있었다.

(더불어 지금 생각하면 연애같지 않던 연애도 조금씩 바닥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고, 새로운 사람들에게 적응하고 있지 않을 때이기도 했고)

 

갈피를 못잡고 있을 때 이 책을 봤다.

결론은 '아무렴 어때' 덩어리인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던 거다.

 

 

지금도 비슷하다.

그리고 주인공의 상황과 더욱 비슷해졌다.

 

지향점이 불일치하는 일터, 사소한 사건에도 여전히 예민하고 발끈하고,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데 스스로 규율해 이야기하지 못하게 되고, 예심도 통과하지 못한 아니 주제도 점점 흐릿해 지는 논문을 마무리는 해야겠고.

 

여튼 난 논문 쓸래요! 이러면서 사표를 내긴 냈는데,

실은 다음달 월세, 학자금 등등을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깜깜하다.

 

지금 연애하고 있는 자와 함께 살고는 있지만,

그 자의 앞날도 어찌될지 모르고 그 자에게 내 삶을 책임지라고 우길 수도 없으니.

 

그래도,

마무리 지을 것은 지어야 하고,

여전히 '아무렴 어때' 덩어리인 어른이 되고 싶진 않은 거다.

 

어떻게든 되겠지.

 

"나도 어떻게든 해볼테니까"

 

 

갈림길에 선 청춘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주는 <소라닌>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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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와 제로가 만나면 1 (2년전쯤인듯?)  

<소라닌>을 방금 다 읽었는데, 꼭 <마이제너레이션>을 보고 난 이후의 기분이 든다.

 

마이제너레이션 보다는 좀 더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지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당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시류에 휩쓸려 조금씩 자기를 잃어가는 소라닌의 주인공들의 모습은 20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나'들과 너무 닮아있다.

 

그래도 뭐.

 

제로와 제로가 만나면 무한이라니까.

 

아직은 '아무렴 어떠랴' 덩어리인 어른들이 되고싶진 않거든.

 

 

이들의 노래, 우리의 노래 '소라닌'을 듣고싶다.

 

 

 

[소라닌]

 

서로의 다른 생각은 하늘 저편으로

이별의 연속인 인생이여

아주 희미한 미래가 보이는 듯하니

안녕이라네

 

그때의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의 나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네

 

그 옛날 너와 내가 살던 작은 방은

이미 다른 사람이

너에게 들은 상처의 말도

무의미한것 같았던 하루하루도

추운 겨울의 차가운 캔커피와

무지개빛 긴 머플러와

종종 걸음으로 뒷골목을 빠져나가 기억을 떠올려본다.

 

그때의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의 나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네

 

느긋한 행복이 영원히 계속된다 해도

나쁜 씨가 싹을 틔워

이제 안녕이라네

 

그때의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의 나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네

 

이별이 나쁠것도 없지

어디선가 늘 건강하기를

나도 어떻게든 해볼테니까

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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