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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4/28
    4월 29일 토요일 당신을 초대합니다(2)
    토닥
  2. 2006/04/28
    <희망의 노래- 꽃다지>에 대해(2)
    토닥
  3. 2006/04/28
    극단 <한강>에 대해(6)
    토닥
  4. 2006/04/28
    [SHOUT-25]기획안(6)
    토닥

4월 29일 토요일 당신을 초대합니다

인천 만수동 향촌마을에서...

오후 1시에..

철거촌 투쟁중 돌아가신 신현기씨의 49제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고인은 현재 인천의 어느 공동묘지에 안치되어 계십니다. 고인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의혹을 안고 가셨지만 국과수에서는 고인이 자살한 것으로 판명하였습니다. 고인이 돌아가신 것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그것이 중요하겠습니까? 이 사회가 고인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남아있는 철거촌 동지들은 아직도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고인을 기억할 것입니다. 긴 인생중 짧게나마 함께 한솥밥을 먹었고 국가에서 내몰아간 자신의 보금자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순간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남아있는 철거촌 동지들은 1퍼센트의 희망을 가지고 아직 이 질긴 목숨 유지하고 있습니다. 고인의 가시는 길이나마 평안하소서.

 

 

향촌마을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송내역 하차 만수시장가는 버스 타시고 만수시장역에 내려

시장안으로 쭉 들어가시면 철거촌이 보입니다.

철거촌 입구에 바리케이트로 꽁꽁 싸맨 건물 한 채가 보입니다.

이곳이 철거촌 동지들의 공간입니다.

 

- 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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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노래- 꽃다지>에 대해

 http://www.hopesong.com/ 에서 발췌

 


박향미가 활동했던 노래패 <희망의 노래, 꽃다지>



1. 꽃다지가 태어나기까지 (88년부터 92년까지)

 

  87년 7,8,9월 전국을 뒤흔든 역사적인 노동자들의 함성으로 운동의 중심축이 학생과 지식인에서 노동자로 바뀌었다. 노동자들은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부를 자신들의 노래를 원했다. 이 때 노동자노래단(이하 노노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이하 예울림)이라는 두 단체가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노래를 창작하고 보급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2. 꽃다지 창립! (꽃다지 원년 1992년)

 

  노노단과 예울림 두 단체는 <희망의 노래 꽃다지>라는 이름으로 통합, 창립 후  92년 8월초 <민들레처럼><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고귀한 생명의 손기로><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등이 수록된 1집 음반(비합법)을 제작하고, 9월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좌표 1992"라는 제목으로 올리게 되었다.



 

3. 시련의 고개를 넘어 (92년 대선부터 93년까지)

 

  92년 겨울, 대선 후의 패배감과 조직의 분열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동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에 대한 반성,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심정을 노래로 만들어 비합법 2집을 준비했다. <전화카드 한 장><바위처럼><창살 아래 사랑아><통일이 그리워><꽃다지3> 등이 수록. 93년 9월에 음반발매기념공연 "동지"를 올렸다. 이때까지도 공연의 형식은 대형무대에서의 집체극 형식.


4. 노동가요의 지평을 넓히며 (93년 가을부터 94년 봄까지)

 

  노동가요로는 최초의 합법음반 제작을 시도했다. 설문을 통해 15곡 가량을 심의에 넣었는데, 공윤은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가사 내용을 문제삼아 반려처리를 해버렸다.이런 과정 중에 사단법인화된 민예총의 세종문화회관 입성투쟁의 성공과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 등이 같이 이루어지면서 공윤은 끝내 모든 노래를 한 글자의 수정도 없이 모두 통과시켰고, 94년 5월 31일 시청앞 마당세실극장에서 합법음반 발매기념콘서트 "민들레처럼'을 올리면서 문화관련 제도개선투쟁은 1단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5. 창작의 어려움에 봉착하다.(94년 가을에서 95년까지)

 

  94년 10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판굿 꽃다지 공연과 95년 3월 연대노천극장의 노래판굿 꽃다지 재공연, 그리고 95년 4월 말 노동가요 공식음반 발매와 민주노총 출범을 기념하는 꽃다지 콘서트 "한 걸음씩"을 하면서 박향미, 윤미진, 김미정 등이 결합하게 되었다. 꽃다지는 창작의 문제가 엄청난 질곡이었다. 그간의 꽃다지 음악을 정리하고 또 재평가하고 새로운 음악장르에 대한 연구도 하면서 공동작업을 1년간 진행, 그 성과로 95년 12월 신촌 창무포스트 극장에서 17일간의 장기공연을 올렸다.

 

6. 누가 뭐래도 (96년)

 

96년부터 솔로가수도 배출하고 총괄 관리하는 구조로써의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 그러나  96년 사업의 세부계획이 수립되기도 전에 대표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민중가요 노래책에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수록했다는 이유로 출판사 사장과 꽃다지 대표를 구속한 것. 탑골 공원 앞에서 50일간 "국가보안법 철폐! 구속문화예술인 석방! 완전한 예술창작표현의 자유 쟁취!" 라는 구호를 내걸고 선전공연을 했고, 밤에는 민예총 사무실에서 농성을 했다. 그 결과 대표는 50일만에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7.우리는 지금보다 강하게 (97년부터 지금까지)

 

97년의 노동법 개정을 위한 총파업을 발로 뛰어다니며 시작. 3년만에 2집 음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발매하고, 음반발매기념 콘서트를 하였습니다. 노동가요계 최초의 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룰 제작하고 또 대선투쟁에 결합했다. 98년 11월에 새로운 체계로 정리. 가창팀, 연주팀, 기획실로 구성되었던 팀체계와 대표제와 직급제를 폐지하고 업무담당체계로 바꾸고 9명이 남았다. 99년 가을, 합법3집음반 "진주"를 발매. 이후 꽃다지 역사상 가장 단촐한 식구들이 남았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지속적인 음악작업을 한 결과, 2000년 가을에 두번째 싱글인 통일테마음반 "오라"를, 2001년 봄에는 세번째 싱글음반 "반격"을 발표했다. 지금 이들은 세 명의 기획자와 네 명의 가수가 새로운 꽃다지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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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한강>에 대해

 


이란희, 송연수, 최금예가 활동했던 극단 <한강>



1986년 대학의 연극반, 탈반 출신들이 모여 민족극연구회 산하 극단 천지연을 결성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연극운동을 주도해 온 마당극과 서구 무대극의 이상적인 결합을 시도하였고 진보적인 리얼리즘 정신을 연극이념으로 삼았다. 그후 1988년 2월 극단 '한강'으로 창단되어 직업적 연극단체로 출발하였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소외된 이들의 삶을 진실하게 다루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활동해왔다.


한강의 작품은 1개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창작품이다.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창작 방식이었으며 93년도부터 그 방식을 과학화, 체계화시켜 극단 '한강'의 연극론으로 정립했다. 또한 비연극인, 관객과의 연극놀이를 통해 또 다른 연극 운동을 의욕적으로 펼치다가 최근 많은 민중문화예술단체들이 그러하듯이 활동반경이 축소되었으나 현재 인천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창단 공연 <대결>을 비롯하여 <밝은 햇살>, <마지막 수업>, <골리앗 그보다 더 높이>, <노동자를 싣고가는 아홉대의 버스>, <한겨울밤의 꿈>, <산타 히로시마>, <잠적/토템>, <사람, 사물, 장소, 이념>, <청춘>, <나마스테>, <반쪽 날개로 날아온 새>, <노동자를 싣고가는 아홉대의 버스 2>, <교실 이데아>, <산재>, <교실이데아 2>, <단장곡>, <교실 이데아 3>, <교실 이데아 - 꿈 이야기>, 연극 <전태일>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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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25]기획안

앞부분만 공개

등장인물 소개와 세부구성안 등은 거의 소설에 가깝기 때문에

민망해서 도저히 못올리겠고 기획의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제작지원 기획서에 관한한 엄청나게 무식한 나에게

다양한 조언과  도움을 주신 이마리오 감독에게 감사를!



 

s. H. o. U. t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



기획구성안





내몰고 저버리고 파괴하는 이 세상에서

생산하고 품고 떠받치는 질펀한 땅의 여성성에 대해,

끝없이 밑바닥으로 내몰린 그 작고 약하고 낮은 자들의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고 스스로 가장 낮은 곳에 있으려 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혼의 위안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W 홈페이지 에서-




1. 기획의도



예술하는 거 쉽지 않다.

화려하게 포장된 상업예술도 아무나 하기 힘들지만, 민주주의와 민중의 삶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해 표현하는 예술은 더 고단하다. 그런데 여기 그런 예술을 10년 넘게 맨발로 땀 흘리며 체득하다 모인 사람들이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민중문화예술운동에 앞장 섰다가 연애, 결혼, 출산, 육아의 고비를 넘기면서 가족과 헤어지거나 소통 불능의 아픔을 겪어야했던 그들이 이제는 ‘여성’의 눈과 입으로 우리네 팍팍한 삶을 이야기한다.


  가끔 우리는 되묻곤 한다.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한꺼번에 안겨주었던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며 거리에서 광장에서 집회장에서 극장에서 그렇게나 멋지게 발언하고 분노하고 활동하고 노래하던 그 많던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아무도 보이지 않을까. 그 질문의 이면에는 ‘나’, 그리고 ‘당신’의 현재가 있다. 짧은 한 때, 과거의 나/당신은 그렇게 빛이 났으나 지금의 나/당신은 생존의 덫에 찢겨 나날이 누추해진다는 슬픈 자각이 그 질문 속에 있다. 그들을 닮고 싶어하거나 그들처럼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내 동생들/당신의 후배들이 지금 ‘나’와 ‘당신’을 재회하기 위해 막막한 현실의 어느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그녀들이 있다, 끈질기게 살아있다.

산다는 것은 체념을 배워가는 길이지만 체념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 뚜렷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누구는 오로지 평범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며 대중들 틈에 숨어 한때 거리에 나섰던 제 발자국을 끊임없이 지우고, 누구는 한 때 동지였던 한 남자의 아내이자 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엄마이자 그렇게 형성된 혈연가족의 바람막이가 되기 위해 기꺼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농락당하며 비굴한 생존경쟁을 떠맡을 때, [W]라는 이름을 걸고 모인 그녀들이 있다. 아직은 체념할 수 없어서, 체념해서도 안되고, 체념하고 싶지 않아서... 점점 더 가난해지고 점점 더 소외당하는 ‘민중’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에 ‘더 나은 세상, 다른 세상’을 꿈꾸는 예술은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들이 있다.


다른 세상, 여성의 눈으로 상상한다.

스무살, 그들은 여자도 남자도 아니었다. 노동의 역사와 자본의 음모를 공부하고 분노할 때 그들은 그저 ‘운동권’이었다. 서른살, 그들은 의심했다. 대등하게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늘 무언가를 준비하고 돌보고 뒷수습하면서 후방에 머무는 자신의 모습. 누군가 연애를 걸고 결혼을 권할 때 승락을 강요당하는 순간. 이제와서 ‘여자니까 여자노릇만 하라고?’ 그들은 억울했다. 그래서 여자가 되기 싫었다. 마흔을 앞둔 지금, 그들은 기꺼이 여자로 살아간다. 누구는 혼자 아이를 키우며, 누구는 날마다 시댁의 눈치를 살피며, 누구는 다시 혼자가 된 자신을 스스로 격려하며, 누구는 연극배우였다가 영화감독이 된 자신을 지지하며. 조금 느리고 조금 약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보다 못한 게 아니라는 걸, 오히려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는 걸 깨달았기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

2005년 12월 29일, [W]는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지켰다. 지켰다고 표현해야 한다. 스스로와의 약속, 그녀들끼리 했던 약속, 올 지 안 올 지 알 수 없었던 관객들과의 약속을 무대위에서 몸으로 보여주었으므로. 이어서 2006년 2월,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환경개선지구 향촌마을에서 2년동안 투쟁해온 철거민들과 연대한다. 이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98주년을 맞아 울산 현대차 노동조합의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주저앉지 마라-박향미의 솔로음반 [붙어]중에서’를 부른다. 4월 8일, W의 멤버 박향미는 평택 미군기지확장이전 저지투쟁이 벌어지는 대추리에서 또 다른 약속을 한다. 끊임없이 당신들로부터 배우겠다고, 많이 배워서 더 힘차게 같이 싸우겠다고. 그리고 4월 26일, 이들은 첫 무대였던 극장에서 닷새동안 관객을 만난다. 더 촘촘하고 더 예민하게, 보일 듯 말 듯 서서히 움을 트다가 와락 푸른 잎을 쏟아내는 봄의 나무들처럼, 집요한 성장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기 위해서.

 

 


2. 제작방향


시간의 교차, 현재는 과거를 성찰하며 미래를 확보한다

이란희, 송연수, 최금예, 박향미는 지난 20년의 단련이 현재를 낳은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과거는 그저 빛나던 시절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기반이다. [W]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일 수 있었던 것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무대에서 만났던 인연에서 비롯된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전국 각지의 집회장에서 감동을 안겨줬던 집체극의 경험은, 이들이 지금 연극과 음악, 영화의 장르혼합을 무리없이 시도하게 하는 원형이 된다.


때문에 영화속에서 시점은 80년대 후반과 2006년 사이를 교차한다. 이 때 시점 이동의 장치는 그 때 그 때 즐겨 불렀던 민중가요, 당시의 극단과 노래패가 보관하는 사진들, 유인물과 손으로 작성하던 악보, 공연 팜플렛, 그리고 투쟁과 공연을 동시에 기록했던 ‘비디오기록’이다. 주인공들의 기억과 증언 사이로 언뜻 언뜻 삽입될 이 자료들은 W멤버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개인 역사의 반영이자, 한국 현대사에서 보수와 진보 그 누구도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한 87년 이후의 역사를 다시한번 곰곰히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감독과 그녀들, 우리가 되다

감독은 이 영화를 기획하고 촬영하는 동안 W의 모든 성원들에게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20대에 비슷한 경험을 가진 채 결혼제도에 편입했다가 일탈한 감독은,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박향미, 시댁과 남편과 아이를 돌보며 시간을 짜내 자기 세계를 간신히 구축해야하는 이란희와 최금예, 홀로 살아가는 송연수에게서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포착한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주목해야할 문제는, [w]라는 프로젝트 문화예술집단이 현재 이 사회의 민중문화예술운동이나 진보진영 내에서 어떤 존재가치를 지니는지 증명하는 게 아니다.

 

박향미, 이란희, 송연수, 최금예가 함께 활동하게 된 계기-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확인’, 그 계기를 ‘구체화하는 과정-공연 기획과 연습’, ‘공연장에서 이들과 여성관객들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지점’ , 그리고 하나의 공연을 평가한 뒤 다음 공연을 기획할 때 ‘일상에서 이들의 발목을 잡는 다양한 덫을 어떻게 돌파하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제작되는 동안 감독은 공연의 내용과 이들의 활동방향에 조금씩 개입하게 되고 자신도 이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춤출 수 있는 날을 희망하게 된다.

 

그것은 감독 개인의 소망을 넘어서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여성들, 혹은 이 영화에 공감하는 모든 관객들의 희망과도 일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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