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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4/28
    4월 29일 토요일 당신을 초대합니다(2)
    토닥
  2. 2006/04/28
    <희망의 노래- 꽃다지>에 대해(2)
    토닥
  3. 2006/04/28
    극단 <한강>에 대해(6)
    토닥
  4. 2006/04/28
    [SHOUT-25]기획안(6)
    토닥
  5. 2006/04/22
    [SHOUT-24]제목, 제목...(4)
    토닥
  6. 2006/04/22
    재원아(1)
    토닥
  7. 2006/04/12
    W-불현듯 4월공연 안내
    토닥
  8. 2006/04/12
    [SHOUT-23]어떻게 구성할까(7)
    토닥
  9. 2006/04/04
    [SHOUT-22]명함(3)
    토닥
  10. 2006/04/02
    [SHOUT-21]4월 작업계획
    토닥

4월 29일 토요일 당신을 초대합니다

인천 만수동 향촌마을에서...

오후 1시에..

철거촌 투쟁중 돌아가신 신현기씨의 49제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고인은 현재 인천의 어느 공동묘지에 안치되어 계십니다. 고인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의혹을 안고 가셨지만 국과수에서는 고인이 자살한 것으로 판명하였습니다. 고인이 돌아가신 것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그것이 중요하겠습니까? 이 사회가 고인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남아있는 철거촌 동지들은 아직도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고인을 기억할 것입니다. 긴 인생중 짧게나마 함께 한솥밥을 먹었고 국가에서 내몰아간 자신의 보금자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순간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남아있는 철거촌 동지들은 1퍼센트의 희망을 가지고 아직 이 질긴 목숨 유지하고 있습니다. 고인의 가시는 길이나마 평안하소서.

 

 

향촌마을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송내역 하차 만수시장가는 버스 타시고 만수시장역에 내려

시장안으로 쭉 들어가시면 철거촌이 보입니다.

철거촌 입구에 바리케이트로 꽁꽁 싸맨 건물 한 채가 보입니다.

이곳이 철거촌 동지들의 공간입니다.

 

- 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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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노래- 꽃다지>에 대해

 http://www.hopesong.com/ 에서 발췌

 


박향미가 활동했던 노래패 <희망의 노래, 꽃다지>



1. 꽃다지가 태어나기까지 (88년부터 92년까지)

 

  87년 7,8,9월 전국을 뒤흔든 역사적인 노동자들의 함성으로 운동의 중심축이 학생과 지식인에서 노동자로 바뀌었다. 노동자들은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부를 자신들의 노래를 원했다. 이 때 노동자노래단(이하 노노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이하 예울림)이라는 두 단체가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노래를 창작하고 보급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2. 꽃다지 창립! (꽃다지 원년 1992년)

 

  노노단과 예울림 두 단체는 <희망의 노래 꽃다지>라는 이름으로 통합, 창립 후  92년 8월초 <민들레처럼><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고귀한 생명의 손기로><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등이 수록된 1집 음반(비합법)을 제작하고, 9월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좌표 1992"라는 제목으로 올리게 되었다.



 

3. 시련의 고개를 넘어 (92년 대선부터 93년까지)

 

  92년 겨울, 대선 후의 패배감과 조직의 분열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동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에 대한 반성,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심정을 노래로 만들어 비합법 2집을 준비했다. <전화카드 한 장><바위처럼><창살 아래 사랑아><통일이 그리워><꽃다지3> 등이 수록. 93년 9월에 음반발매기념공연 "동지"를 올렸다. 이때까지도 공연의 형식은 대형무대에서의 집체극 형식.


4. 노동가요의 지평을 넓히며 (93년 가을부터 94년 봄까지)

 

  노동가요로는 최초의 합법음반 제작을 시도했다. 설문을 통해 15곡 가량을 심의에 넣었는데, 공윤은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가사 내용을 문제삼아 반려처리를 해버렸다.이런 과정 중에 사단법인화된 민예총의 세종문화회관 입성투쟁의 성공과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 등이 같이 이루어지면서 공윤은 끝내 모든 노래를 한 글자의 수정도 없이 모두 통과시켰고, 94년 5월 31일 시청앞 마당세실극장에서 합법음반 발매기념콘서트 "민들레처럼'을 올리면서 문화관련 제도개선투쟁은 1단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5. 창작의 어려움에 봉착하다.(94년 가을에서 95년까지)

 

  94년 10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판굿 꽃다지 공연과 95년 3월 연대노천극장의 노래판굿 꽃다지 재공연, 그리고 95년 4월 말 노동가요 공식음반 발매와 민주노총 출범을 기념하는 꽃다지 콘서트 "한 걸음씩"을 하면서 박향미, 윤미진, 김미정 등이 결합하게 되었다. 꽃다지는 창작의 문제가 엄청난 질곡이었다. 그간의 꽃다지 음악을 정리하고 또 재평가하고 새로운 음악장르에 대한 연구도 하면서 공동작업을 1년간 진행, 그 성과로 95년 12월 신촌 창무포스트 극장에서 17일간의 장기공연을 올렸다.

 

6. 누가 뭐래도 (96년)

 

96년부터 솔로가수도 배출하고 총괄 관리하는 구조로써의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 그러나  96년 사업의 세부계획이 수립되기도 전에 대표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민중가요 노래책에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수록했다는 이유로 출판사 사장과 꽃다지 대표를 구속한 것. 탑골 공원 앞에서 50일간 "국가보안법 철폐! 구속문화예술인 석방! 완전한 예술창작표현의 자유 쟁취!" 라는 구호를 내걸고 선전공연을 했고, 밤에는 민예총 사무실에서 농성을 했다. 그 결과 대표는 50일만에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7.우리는 지금보다 강하게 (97년부터 지금까지)

 

97년의 노동법 개정을 위한 총파업을 발로 뛰어다니며 시작. 3년만에 2집 음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발매하고, 음반발매기념 콘서트를 하였습니다. 노동가요계 최초의 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룰 제작하고 또 대선투쟁에 결합했다. 98년 11월에 새로운 체계로 정리. 가창팀, 연주팀, 기획실로 구성되었던 팀체계와 대표제와 직급제를 폐지하고 업무담당체계로 바꾸고 9명이 남았다. 99년 가을, 합법3집음반 "진주"를 발매. 이후 꽃다지 역사상 가장 단촐한 식구들이 남았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지속적인 음악작업을 한 결과, 2000년 가을에 두번째 싱글인 통일테마음반 "오라"를, 2001년 봄에는 세번째 싱글음반 "반격"을 발표했다. 지금 이들은 세 명의 기획자와 네 명의 가수가 새로운 꽃다지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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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한강>에 대해

 


이란희, 송연수, 최금예가 활동했던 극단 <한강>



1986년 대학의 연극반, 탈반 출신들이 모여 민족극연구회 산하 극단 천지연을 결성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연극운동을 주도해 온 마당극과 서구 무대극의 이상적인 결합을 시도하였고 진보적인 리얼리즘 정신을 연극이념으로 삼았다. 그후 1988년 2월 극단 '한강'으로 창단되어 직업적 연극단체로 출발하였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소외된 이들의 삶을 진실하게 다루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활동해왔다.


한강의 작품은 1개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창작품이다.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창작 방식이었으며 93년도부터 그 방식을 과학화, 체계화시켜 극단 '한강'의 연극론으로 정립했다. 또한 비연극인, 관객과의 연극놀이를 통해 또 다른 연극 운동을 의욕적으로 펼치다가 최근 많은 민중문화예술단체들이 그러하듯이 활동반경이 축소되었으나 현재 인천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창단 공연 <대결>을 비롯하여 <밝은 햇살>, <마지막 수업>, <골리앗 그보다 더 높이>, <노동자를 싣고가는 아홉대의 버스>, <한겨울밤의 꿈>, <산타 히로시마>, <잠적/토템>, <사람, 사물, 장소, 이념>, <청춘>, <나마스테>, <반쪽 날개로 날아온 새>, <노동자를 싣고가는 아홉대의 버스 2>, <교실 이데아>, <산재>, <교실이데아 2>, <단장곡>, <교실 이데아 3>, <교실 이데아 - 꿈 이야기>, 연극 <전태일>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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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25]기획안

앞부분만 공개

등장인물 소개와 세부구성안 등은 거의 소설에 가깝기 때문에

민망해서 도저히 못올리겠고 기획의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제작지원 기획서에 관한한 엄청나게 무식한 나에게

다양한 조언과  도움을 주신 이마리오 감독에게 감사를!



 

s. H. o. U. t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



기획구성안





내몰고 저버리고 파괴하는 이 세상에서

생산하고 품고 떠받치는 질펀한 땅의 여성성에 대해,

끝없이 밑바닥으로 내몰린 그 작고 약하고 낮은 자들의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고 스스로 가장 낮은 곳에 있으려 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혼의 위안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W 홈페이지 에서-




1. 기획의도



예술하는 거 쉽지 않다.

화려하게 포장된 상업예술도 아무나 하기 힘들지만, 민주주의와 민중의 삶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해 표현하는 예술은 더 고단하다. 그런데 여기 그런 예술을 10년 넘게 맨발로 땀 흘리며 체득하다 모인 사람들이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민중문화예술운동에 앞장 섰다가 연애, 결혼, 출산, 육아의 고비를 넘기면서 가족과 헤어지거나 소통 불능의 아픔을 겪어야했던 그들이 이제는 ‘여성’의 눈과 입으로 우리네 팍팍한 삶을 이야기한다.


  가끔 우리는 되묻곤 한다.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한꺼번에 안겨주었던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며 거리에서 광장에서 집회장에서 극장에서 그렇게나 멋지게 발언하고 분노하고 활동하고 노래하던 그 많던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아무도 보이지 않을까. 그 질문의 이면에는 ‘나’, 그리고 ‘당신’의 현재가 있다. 짧은 한 때, 과거의 나/당신은 그렇게 빛이 났으나 지금의 나/당신은 생존의 덫에 찢겨 나날이 누추해진다는 슬픈 자각이 그 질문 속에 있다. 그들을 닮고 싶어하거나 그들처럼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내 동생들/당신의 후배들이 지금 ‘나’와 ‘당신’을 재회하기 위해 막막한 현실의 어느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그녀들이 있다, 끈질기게 살아있다.

산다는 것은 체념을 배워가는 길이지만 체념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 뚜렷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누구는 오로지 평범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며 대중들 틈에 숨어 한때 거리에 나섰던 제 발자국을 끊임없이 지우고, 누구는 한 때 동지였던 한 남자의 아내이자 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엄마이자 그렇게 형성된 혈연가족의 바람막이가 되기 위해 기꺼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농락당하며 비굴한 생존경쟁을 떠맡을 때, [W]라는 이름을 걸고 모인 그녀들이 있다. 아직은 체념할 수 없어서, 체념해서도 안되고, 체념하고 싶지 않아서... 점점 더 가난해지고 점점 더 소외당하는 ‘민중’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에 ‘더 나은 세상, 다른 세상’을 꿈꾸는 예술은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들이 있다.


다른 세상, 여성의 눈으로 상상한다.

스무살, 그들은 여자도 남자도 아니었다. 노동의 역사와 자본의 음모를 공부하고 분노할 때 그들은 그저 ‘운동권’이었다. 서른살, 그들은 의심했다. 대등하게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늘 무언가를 준비하고 돌보고 뒷수습하면서 후방에 머무는 자신의 모습. 누군가 연애를 걸고 결혼을 권할 때 승락을 강요당하는 순간. 이제와서 ‘여자니까 여자노릇만 하라고?’ 그들은 억울했다. 그래서 여자가 되기 싫었다. 마흔을 앞둔 지금, 그들은 기꺼이 여자로 살아간다. 누구는 혼자 아이를 키우며, 누구는 날마다 시댁의 눈치를 살피며, 누구는 다시 혼자가 된 자신을 스스로 격려하며, 누구는 연극배우였다가 영화감독이 된 자신을 지지하며. 조금 느리고 조금 약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보다 못한 게 아니라는 걸, 오히려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는 걸 깨달았기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

2005년 12월 29일, [W]는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지켰다. 지켰다고 표현해야 한다. 스스로와의 약속, 그녀들끼리 했던 약속, 올 지 안 올 지 알 수 없었던 관객들과의 약속을 무대위에서 몸으로 보여주었으므로. 이어서 2006년 2월,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환경개선지구 향촌마을에서 2년동안 투쟁해온 철거민들과 연대한다. 이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98주년을 맞아 울산 현대차 노동조합의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주저앉지 마라-박향미의 솔로음반 [붙어]중에서’를 부른다. 4월 8일, W의 멤버 박향미는 평택 미군기지확장이전 저지투쟁이 벌어지는 대추리에서 또 다른 약속을 한다. 끊임없이 당신들로부터 배우겠다고, 많이 배워서 더 힘차게 같이 싸우겠다고. 그리고 4월 26일, 이들은 첫 무대였던 극장에서 닷새동안 관객을 만난다. 더 촘촘하고 더 예민하게, 보일 듯 말 듯 서서히 움을 트다가 와락 푸른 잎을 쏟아내는 봄의 나무들처럼, 집요한 성장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기 위해서.

 

 


2. 제작방향


시간의 교차, 현재는 과거를 성찰하며 미래를 확보한다

이란희, 송연수, 최금예, 박향미는 지난 20년의 단련이 현재를 낳은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과거는 그저 빛나던 시절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기반이다. [W]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일 수 있었던 것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무대에서 만났던 인연에서 비롯된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전국 각지의 집회장에서 감동을 안겨줬던 집체극의 경험은, 이들이 지금 연극과 음악, 영화의 장르혼합을 무리없이 시도하게 하는 원형이 된다.


때문에 영화속에서 시점은 80년대 후반과 2006년 사이를 교차한다. 이 때 시점 이동의 장치는 그 때 그 때 즐겨 불렀던 민중가요, 당시의 극단과 노래패가 보관하는 사진들, 유인물과 손으로 작성하던 악보, 공연 팜플렛, 그리고 투쟁과 공연을 동시에 기록했던 ‘비디오기록’이다. 주인공들의 기억과 증언 사이로 언뜻 언뜻 삽입될 이 자료들은 W멤버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개인 역사의 반영이자, 한국 현대사에서 보수와 진보 그 누구도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한 87년 이후의 역사를 다시한번 곰곰히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감독과 그녀들, 우리가 되다

감독은 이 영화를 기획하고 촬영하는 동안 W의 모든 성원들에게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20대에 비슷한 경험을 가진 채 결혼제도에 편입했다가 일탈한 감독은,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박향미, 시댁과 남편과 아이를 돌보며 시간을 짜내 자기 세계를 간신히 구축해야하는 이란희와 최금예, 홀로 살아가는 송연수에게서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포착한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주목해야할 문제는, [w]라는 프로젝트 문화예술집단이 현재 이 사회의 민중문화예술운동이나 진보진영 내에서 어떤 존재가치를 지니는지 증명하는 게 아니다.

 

박향미, 이란희, 송연수, 최금예가 함께 활동하게 된 계기-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확인’, 그 계기를 ‘구체화하는 과정-공연 기획과 연습’, ‘공연장에서 이들과 여성관객들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지점’ , 그리고 하나의 공연을 평가한 뒤 다음 공연을 기획할 때 ‘일상에서 이들의 발목을 잡는 다양한 덫을 어떻게 돌파하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제작되는 동안 감독은 공연의 내용과 이들의 활동방향에 조금씩 개입하게 되고 자신도 이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춤출 수 있는 날을 희망하게 된다.

 

그것은 감독 개인의 소망을 넘어서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여성들, 혹은 이 영화에 공감하는 모든 관객들의 희망과도 일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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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24]제목, 제목...

5월말에 배너를 슬슬 뿌리면서 이 블로그를 알리고

6월말에 웹자보 1, 2, 3을 적극 올리면서 예고편을 링크할 계획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제목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는데

'노래하는 그녀들' 보다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라고 하면 어떨까

그래서 배너, 혹은 웹자보에 쓸 제목 이미지 시안을 몇 개...

폰트나 크기는 디자이너와 의논해서 더 멋지구리하게 변신할 것임

아래 네 가지 보기는 아주 아주 기초적인 아이디어임



 

1)

SHOUT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

 

2)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 - SHOUT

 

3)

  s. H. O. U. t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

 

4)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

     S.H.O.U.T 

 

일단 이 정도...

관련자들, 혹은 방문객들

투표 부탁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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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아

내가 안쓴다고  너도 안쓰느냐

설마 아니겠지  그건 아닐거여

잘 찍어보세  잘 편집하세

짬짬이 일지도 쓰고  짬짬이 놀기도 하고

일할 때는 미친듯이  놀 때도 미친듯이

제정신에 못살 세상  미친듯이 넘어보세

팀블로그 죽이지 말고  똘똘뭉쳐 되살려내세

우리 둘이 힘을 합쳐  다큐 한번 잘 만들어보삼

 

- 이 노래는...

   업뎃이 뜸한 블로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담아

   두번째 다큐멘터리의 향방과 동료를 걱정하며 아침마다 읊어대는 나루의 독백으로서

   지멋대로 방금 새마을 버전으로 편곡해봤습니다

   (SHOUT  FM - 2006 '이제나 저제나' 프로그램에서 발췌)



촬영 전 확인전화 잊지말고

촬영 중 예측못한 상황 발생 시 문자 보내고

촬영 후 프리뷰노트 꼭 만들어주고

촬영 시 추가지출한 교통비나 밥값은 반드시 메모해놓고

테잎이 더 필요하면 즉각 요청하시고

촬영비가 약속한 날 입금 안되었으면 곧바로 다큐나루 사무실로 출동하라

 

할 말이 생기면 참지말고 말하고,

말했다면 반드시 말한 대로 행동하라

 

사랑하는 재원아, 며칠동안 혼자 고생시켜서 미안해

나 없더라도 즐겁게 일하라고 애교 떨고 있어

담주에 꼭 향미랑 같이 만나자...살려줘...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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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불현듯 4월공연 안내

홈페이지:http://www.icgaia.net/

 

공연개요

 

시간 : 2006년 4월 26일(수) ~ 30일(금)
26,28,29일 - 오후 4시. 7시 30분 (2회 공연) / 27,30일 - 오후 4시 (1회 공연)
장소 : 학산소극장
후원 : 남구학산문화원, 인천노동문화연대, 2006 인천문화나눔 사랑티켓
입장료 : 성인 1만원, 청소년 5천원
(사랑티켓 구입시 성인 5천원, 청소년 2천원
문의전화 : 016-316-3502 / 032-866-3993(학산문화원)
오시는 길 : 인하대 후문 성광교회 옆 용현4동사무소 건물 4층
              주안 남부역에서 511번 마을버스 인하부중고 정류장에서 하차

참여작가 : 정윤희, 이란희, 송연수, 최금례, 박향미
 






W를 찾아서 
 
005년에는 뭔가를  2005년에는 뭔가를 표현하고 싶어서,

멋진 공연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습니다.

그래서 신 들린 듯 제 흥에 겨워 어찌 어찌 공연을 했습니다.

해가 바뀌어 다시 그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고 취기에서도 약간 깨어난 듯 합니다.

이번 공연은 제스스로 ‘나’로부터 빠져나와 ‘타인’이 되어

‘나의 내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왜 「대지의 여신」을 상상하고 재현하려고 했을까?

꿈을 놓지 못해서 더 아픈 여자, 아이를 버린 여자,

이별의 아픔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여자아이에게 왜 그리들 집착했을까?

내몰고 저버리고 파괴하는 이 세상에서

생산하고 품고 떠받치는 질펀한 땅의 여성성에 대해,

끝없이 밑바닥으로 내몰린 그 작고 약하고 낮은 자들의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고 스스로 가장 낮은 곳에 있으려 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혼의 위안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무대에는 검붉은 땅을 버티고 선 거칠고 투박한 나무 한 그루 있습니다.

그 뒤로 찌그러지고 내려앉고 누군가에 의해 동강 난 창들이

뻥뚫린 마음 처럼 객석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대지의 여신」은 그 곳으로 어머니 음성같은 바람의 소리를 몰고 옵니다.

작고 여린 이들의 상처와 절규를 지켜봅니다.

시와 노래를 들려줍니다.

쉬어가라고, 돌아오라고 노래합니다.

아이의 이별의 아픔을 달래주며 함께 길을 걷습니다.

W의 시선이 머물렀던 그 곳에서

파릇파릇한 싹들의 틔움 소리가, 그 여린 아우성이 대지에 아련히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기획 : 김영택 / 구성연출 : 송연수 / 무대감독 : 이란희
포스터디자인 및 홍보 : 한난석 / 무대미술: 김재석 / 조명 : 임혜진
음향 : 박원주, Way audio / 기록 : 노동자 영상패 '씨
진행도우미 : 허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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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23]어떻게 구성할까

쇼킹 패밀리 뒤풀이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줄줄이 이어갈 때

향미가 '나루 언니가 저를 찍고 있는데 왜 찍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해서

충격받았다...^^;;;;

 

그래서 다같이 왕창 술 한번 먹고 엎어지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내가 늘 허겁지겁 살아와서 기회를 만들지 못했으니 할말은 없다

반성하면서 지금이라도 몇 자 적어놔야겠다



 

1. 이 나라에서 예술하는 거 쉽지 않다

   그것도 여자들이, 게다가 돈도 없도 빽도 없는 여자들이 모여서

   같이 예술을 한다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때문에 W라는 모임은 이 사회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다

   이런 사람들을 안찍으면 대체 뭘 찍어?

 

2. 처음에 나는 가수 박향미를 주목했다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지만 그녀가 억척스럽게 활동하는 모습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자극이 되리라고 믿었다

   언젠가 '일다'에서 '그 많던 여자선배들은 다 어디로 갔나'고 되묻는 요지의 기사를 읽었는데

   80년대에서 90년대를 거치는 동안 앞장서서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여성들이

   연애와 결혼, 출산과 육아로 인해 서서히 퇴장하고 이제는 만날 길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길을 가던 동지를 만나 함께 생활하면서 남편은 계속 그 일을 하고 있는데

   자신은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가족의 틀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느라 분주하고

   때로는 돈 못버는 남편을 대신해서 '실질적 가장'으로 일하느라 사라진 그녀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 많은 여자들 중에 내가 있었고

   내가 좋아하던 많은 선배들과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따로 몸따로 힘겹게 살아가는 숱한 나/여자들과 달리

   여전히, 꾸준히, 아직도! 그 길에서 활동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건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 놀라운 현장에 가수 박향미가 있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말이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그녀는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고 그렇게 힘든 상황은 아니야'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야, 누가 연영석 다큐한다니까 너는 박향미냐?'라고 해서 낙담하기도 했지만

   나는 남들이 누구나 공인하는

   '진흙(최악의 상황?)에서 피어나는 한떨기 연꽃(그래서 더 감동적인 결말?)'에는 관심없다

   사람은 누구나 힘겨운 상황에 놓여있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지옥을 딛고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에 나옴직한, 인간극장에 나옴직한, 눈이 확 떠지는 획기적인 이야기는

   거기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가서 찍으면 되겠고

   나는 가수 박향미를 보고 눈이 확 떠졌으니 이걸 열심히 찍으면 되는 일이다

   분명히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나면 당신도 왜 내가 왜 그녀를 주목했는지 알게 될거다

   기다려 보시라

 

3. 그런데 박향미를 만나보니 W라는 모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고

    그 이후의 상황은 제작일지를 하나 하나 읽어보면서 대충 감을 잡으면 된다

    내가 처음 박향미를 주목했던 그 이유, 여전히 그 길을 가는 여자들이

    W에 여럿 모여있었고 그들 모두가 너무나 이뻤다

    그들의 고민과 활동하는 모습과 살아가는 이야기가 다 좋았다

    그래서 박향미와 W, W와 박향미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려고 한다

    사실 나는 아직 박향미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못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만한 여러 가지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보이는 대로 찍고 시간이 허락하면 만났을 뿐이다

    그러니 금례나 연수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사람들에게 '내가 지금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소'라고 해놓고

    별로 해놓은 게 없어서 좀 미안하긴 하지만 초조하진 않다

    내가 그들을 좋아하고, 그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됐다

    큰 기대없이 큰 실망없이 자꾸 만나다보면 뭔가 결과가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한다

 

4. 제작비지원을 아직 받지 못했고 후원자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돈을 벌어가며 다큐를 만들려니 늘 시간에 쫓긴다

   공연마치고 뒤풀이하는 자리에서 한 시간 이상 같이 앉아있어보질 못했다

   슬프다, 엄청 슬프다

   아르바이트라는 것을 올 2월에는 다 정리해버리고 인천에 이사갈 생각도 있었는데

   3월부터 덜컥 고정적인 일거리를 맡게 되는 바람에 그것도 물 건너 갔다

   게다가 감독이라는 사람이 프로젝트니 뭐니 해서 자꾸 일을 벌이는 바람에

   날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다행히 프로젝트는 4월말이면 끝난다

   5월, 그 한달만이라도 W 멤버들한테 딱 달라붙어 있으려고 생각해보니

   중요한 공연은 4월말로 확정되었고 정들면 곧 이별이겠다, 난감하다

 

5. 우쨋든, 3월 울산공연 이후 사진도 동영상도 못올리고 좌충우돌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카메라는 돌아갈 것이고 다큐멘터리는 결국 완성될 것이다

    어떡하든 결론을 내보려고 하니까 4월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한번

    맘 편하게 밤늦도록 이야기 나눌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더 늦어지기 전에, 더 늦어져서 누군가가 또 내게 '근데 왜 찍어요?'라고 묻기 전에...

    만나자, 인천도 좋고 서울도 좋으니 새벽이 올때까지 떠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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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22]명함

재원에게 명함을 전달했다

너무 늦었나

그래도 그걸 잊지 않고 만들어서 전해준 것만으로도

스스로 기특해하면서(내가 몬살아...)

 

열심히 하자, 재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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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21]4월 작업계획

촬영을 5월까지는 해야한다

더 찍고 싶지만 테잎이 너무 많아지면

편집할 시간이 부족해서

완료시점을 내년으로 넘길 지도 모른다

올해 안에 완성, 그것이 지금의 목표



4월 첫주는

여러 감독들과 같이 작업하는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때문에

'난자'의 입장이 되어서 편집하느라 정신이 없을 듯 하고

4월 10일 이후부터 향미와 금례와 연수의 개인적 공간으로

카메라를 앞세운 채 다가갈 생각

그 전에 프리뷰를 다 해놔야 한다

 

4월 20일이 되기 전에

[향촌 사람들]에 관해 한 편 더 촬영, 편집할 것인지

아니면 구체적인 연대를 위해 뭔가 다른 일을 벌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4월 26일~30일, 닷새동안 학산에서 W 의 공연 확정

날마다 갈 것인지, 재원과 나눠서 갈 것인지 의논해야함

 

[돌 속에 갇힌 말]의 포스터를 만들었던 소란과 통화,

웹자보와 포스터를 다시 의뢰하고 싶다고 밝힘

소란도 좋다고 함

5월 이후에 본격적인 이미지 디자인이 시작되겠지만

미리 부탁해놔야 일정을 비워두지 싶어서...

 

첫번째 작업을 할 때

전국 각지, 서울 곳곳에 카메라와 트라이포드를 메고 다니느라

하도 고생을 해서

두번째 다큐멘터리를 작업할 땐

모든 장비를 다 실을 수 있는 튼튼한 차를 몰아야겠다고 결심,

면허도 따고 친구랑 같이 돈 모아서 10년 넘은 고물차도 한 대 장만 했건만

길에 나섰다가 욕만 디립다 먹고 완전 주눅이 든 뒤로는

오랜 경력의 운전자를 섭외해서 몇 번 움직여보다가

기름값도 만만치 않고 해서 다시 지하철 승객모드로 전환했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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