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올해의 나쁜 책, 사당동 더하기 25

[사고들]

몇 개월만에 글을 올린다. 지난 주 진보넷에서 알고 지내는 님들과 모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글을 쓰는 동기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프레시안에서 2012년 올해의 책에서 선정한 요 기사, <사당동 괴담, "아무리 노력해도 잘살 수 없다!"> 때문이고, 둘째는 지난달에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있었던 저자 조은의 다큐멘터리 상영행사 때문이다. 기억이 맞다면, 이 행사에서 저자와 다큐는 마치 시대의 진정한 사표로 제시되었다. 셋째는 두 어달 전에 <사당동 더하기 25>를 보고 아직도 가시지 않은 불편함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 이유도 있는데, 조은 선생이 정년 퇴임하면서, 제도권 문화사회학자들의  모임인 <문화사회학회>에서 기념 행사를 치룬, 어처구니 없는 일 때문이다. 왜 어처구니 없냐는 이 책이 잘 보여주니깐 조금만 참으면서 읽어달라(저 학회 성원들의 계급적 성격과 탈계급적 문화연구라는 입장을 이해하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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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해서, 이 책이 마냥 엉망인 건 아니다. 오히려 제법 괜찮아서 탈이다. 특히, 저자의 말대로 주택 문제가 해결되면 빈곤이 재생산되는가, 라는 질문을 한 가족 3세대에걸쳐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빈곤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사회과학적 글쓰기에서 연구문제를 끈질기게 잘 논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필요한 교육용 서술이 많아 글 자체는 산만하고, 과연 빈곤의 재생산 문제를 25년 동안 추적한 만큼 잘 보여주고 있는지는 의무인다.  

 

사실 이 책은 조은과 조옥라가 공저한 <도시빈민의 삶과 공간>(서울대출판부, 1992)의 수정 증보판 성격의 글이다. 이 책은 아직까지도 단행본 분량으로 국내에서 나온 '전통적인' 현장연구, 보다 정확히는 인류학적 문화기술지 연구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책이니다 <사당동 더하기>를 찬찬히 읽어보면, 빈민문제나 가난의 재생산 문제를 다루는 내용을 떠나서, 충실한 문화기술지가 어떻게 진행되고 글쓰기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과 이를 가능하게 했던 현장연구들)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국내의 질적 연구를 한 단계 높이는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딱 여기까지다. 차라리 <사당동 더하기>는 나오지 말아야 했다. 

 

일단, <사당동 더하기 25>는 프레시안에서 이권우의 말 마따나, '학자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하지 않을까. 예민한 촉수에 걸려든 문제 상황을 해결하려 집요하게 탐구해 그 문제를 사회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라는 평을 들기에는 한 참 모자란다. 조은 선생은 '성실'하긴 하다. 솔직히, 누구나 25년 동안 동일한 문제를 끌고가는 건 매우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조은 선생'만'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그리고 사실상 '성실'이란 표현은 연구 기간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엄밀히 말해, 저자가 표명한 성찰적 작업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다지  '성실'하지도 않고 오히려 읽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떨쳐 내지 못 할 정도로 불성실하다. 특히, 그 예민한 촉수는 빈곤의 재생산이나 빈민의 삶게 다가 간다기 보다는 오히려 저자 자신에게 가있다. 

 

이 책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 가운데 두 가지만 언급하자면, 우선 하나는 저자가 이중의 착취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착취 가운데 하나는 연구 '대상'을 착취하고 있다. 저자는 연구에 참여한 대상들이 공동의 지적 생산자라는 입장에서, '연구 참여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들'과 '자신'의 거리감을 저자가 인식하지만 거리를 끝내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왜 생기는지에 대해, 저자가 자기 말대로 성찰적 작업을 했더라면 좋을 법했지만, 반대로 자기 방어적으로 얼버무리고 있다. 원래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그래도 나는 이걸 알고 있다고 말이다. 이른바 두터운 글쓰기나 행위자성(대충 당사자라고 하자)을 중요시 하는 좀 올드한 문화기술지에서도 이러한 입장은 멀리해야 하는 태도 아닌가? 그런데, 이에 충실하거나 이를 넘어서겠다는 작업을 저자가 표명함에도, 반대 방향으로 가는 까닭은 뭘까? 아마도 짐작컨대, 이 책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그냥 저자의 자기 정체성을 방어하려는 동기가 아닐까?  

 

다른 하나의 착위는 공동 연구자들, 특히 대학원생들의 착취이다. 조은 선생은 자신의 솔직함을 이 책에서 고백조로 풀어내고 있지만, 현장연구를 해 본 적이 있거나 대학원에서 생활해본 사람들이라면, 이른바 연구책임자나 지도교수가 대학원생을 어떻게 부려먹고(?) 있는지, 이 책에서 쉽게 알아 챌 수 있다. 이는 언급되지 않거나 오히려 고백조로 정당화되고 있다. 나는 이들의 자발적 동의를 받았거나, 그들의 나름의 목표를 프로젝트를 통해서 실현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내가 이들의 무급 노동을 착취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학자로 코스프레 한다고 해서, 착취가 아닌게 아니지 않는가? 가령, 현장에서 떨어져서, 조교들에게 일주일마다 작업 지시를 내리는 식의 작업방식을, 연구책임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모두' 전유하는 게 과연 윤리적으로 바람직할까? 그것도 25년 동안 내내 그렇게 했다! 아마도 25년 동안, 수많은 연구인력들이 무급봉사나 학위논문을 댓가로, 아니면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 때문에 노동력을 '자발적'으로 제공했을 것이다(과연 '자발적'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자는 이마저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죽 그렇게 해왔다고. 그런데, 이걸 나중에라도 알았으면 그때부터라도 나름대로 다른 방식의 연구방식과 글쓰기, 혹은 다큐제작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시종일관 나는 그랬다고 고백만 줄창 하고 있다. 이런 걸, 문화기술지 가운데 아마도 '메타' 문화기술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면 구제 불능 자뻑 아닌가? 이런 속물 근성은 자본가가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있고, 힘든 걸 아는데 그래도 착취한다고 하는 태도와 뭐가 다를까. 

 

다음으로, 이 책의 논조에서 저자의 순진무구함(? 오히려 불성실함)에 놀랄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것도 역설적으로 저자가 솔직하게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파악할 수 있지만, 저자는 끊임없이 상층 엘리트 부르주아 여성으로서, 그리고 정치적 중간자적 입장을 끊임없이 정당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 책의 논조인 '고백'체다. 왜 고백일까? 우선 이 책이 염두에 둔 독자 탓이 클 것이다. <사당동 더하기 25>는 빈민을 위한 책, 활동가를 위한 책이 아니라, 학생들과 일반 교양층, 그리고 동료 학자들을 위한 책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빈민과 활동가들에게 이 책의 내용은 별로 심층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은 학생 등등에게 연구는 이렇게 하는 거고, 나는 꽤 괜찮은 연구자야, 라는 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가령, 저자는 자기 정체성을 곳곳에서 던지듯이 언급하고 있고, 연구 참여자(혹은 대상)와의 교류에서 끊임없이 깨닫게 되는 차이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나는 이만큼 깨어 있다'는 식의 서술방식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야매'를 한 번도 해본 적인 없어서, '야매(야미)'를 신기해 하는 삶 말이다. 이는 진짜를 열망해보지 않아 짝퉁을 한 번도 구매하지 않은 삶 아니겠는가? 또한 저자는 인터뷰를 하고 있는 가족의 할머니와 자신의 어머니가 동년배이고, 그 할머니의 아들이 자신과 동년배이고, 그 자녀들이 자신의 자녀들과 동년배임을 최근에 와서야 깨달았다고 한다(그리고 그러한 자각이 왜 뒤늦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어떻게 이를 수 있을까? 나는 그게 오히려 신기하다. 이 나라 상층 부르주아들의 관점 말이다. 좀 이해를 해주자면, 저자의 자전적 소설인 <침묵으로 지은 집>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 이데올로기적으로 양극화된 한국적 정치 지형에서, 중간자적 입장을 견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좋게 이해해서, 그러한 미묘한 중간적, 양심적 노선을 이해해 주자. 

 

그렇지만 나는 저러한 자각을 칭찬할 마음이 전혀 들지도 않고 동의해주고 싶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내가 볼 때, 이러한 뒤늦은 자각를 자기방어 기제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다가, 역설적으로 연구자의 '불성실'내지 '비성찰적 태도'를 방어하는 기제에 불과하고, 나아가 오늘날 탈정치적 이론 활동의 징후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와 같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페니스트들에게는 지난 몇 십년 동안의 한국사회는 과잉 정치화 되어 중간 지대가 사라진 곳이었다. 그게 좌든 우든, 정치적으로 회색지대는 요원했을 것이다. 보수우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혁명도 아닌, '개량' 말이다. 요즘은 이를 '개혁'이라 부르고, 속된말로 강남좌파라고도 하지만, 혹은 이론과 실천에서 정치색을 탈각해도 이 또한 넘치는 정치성은 아니더라도 정치적임에 틀림 없다. 상상력을 발휘하자면, <사동동 더하기 25>에서 아무리 찾아도 문화기술지의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 까닭은 아마도 기세등등한 중간자적 입장이 오늘날 나팔을 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어떻게 25년 동안 동일한 현장을 연구를 했다는 사람이, 그리고 비슷한 내용의 책을 십 수년전에 한 번 냈던 사람이 이렇게 아무런 반성없이 연구를 계속했는지, 그리고 자각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과 연구방식을 변화시키지 않았는지,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뭐, 이건 나의 개인적 '편견'이라 해두자. 그래도, 그렇게 오랫동안 현장연구를 했으면서 어떻게 현장에 들어갈 때 정장차림으로 인터뷰를 다니는지는 당최 이해할 수 없다. 정장에 넥타이 하고 김장 담구는 꼴이고 치마 입고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는 꼴이지 않는가? 전체적으로 <사당동 더하기 25>에서, 저자는 가난이란 현상을 '쇼핑'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니깐, 저자는 어린 아이가 백화점을 처음 구경하면서 새로운 상품에 깜짝 놀라면서 신기해 하듯이 글을 쓰고 있다. 이러한 놀라움을 스스로 고백한다고 해서, 현장과의 거리감, 그리고 온정적인 탈계급적 입장이 은폐되지 않는다. 이럴 바에, 그토록 비판하는 양적 연구와가 더 나을 수도 있다. 양적 연구 자체는 아무리 과장한다고 해도 데이타를 검토하면, 그 한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덧 붙이자면, 다큐나 영상 제작의 장점을 저자는 계속 언급하고 있는데, 반대로 그 한계도 명확히 해야 한다. 영상 작업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데다가,장소와 기술적 제약도 상당하고, 편집 과정에서 상당한 노동이 필요하고, 인력도 많이 필요하다. 이에 비해 연구의 질은 그다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다만, 영상의 파급력이 크기 때문에 연구 사후의 효과는 높다고 할 수 있다. 거이 동일한 내용을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영상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하면, 숙련된 연구자가 여전히 종이로 작업하는 논문이나 르포가 깊이나 비용, 시간, 기술, 이동성과 현장성, 생동감 측면에서 더 나아 보인다. 이른바, 두껍게 쓰는 데서 영상 작업은 보이는 것만큼 충실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이 책과 저자를 너무 노골적으로 비판만 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볼 필요가 없다는 건 '전혀' 아니다. 이 책은 한 번씩 볼만하고 세간의 평대로 괜찮은 면이 많다. 오늘날 가난과 과거의 가난이 어떻게 연결되어 반복되는지 살펴보려면, 너무 심각하게 말고, 그냥 가볍게 일독하면 된다. 내가 좀 과도하게 언급한 것은 책 내용이 아니라 저자의 입장과 태도, 글쓰기 방식,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연구방식이 심각할 정도로, 정확히는 '역겨울' 정도로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를 알만한 사람들은 알면서도 언급하지 않기에, 여기에 적어두는 것이다. 정말 저자가 자신의 이중적 착취를 몰랐다면 '순진한' 연구자일뿐만 아니라, 알고도 그렇게 했다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연구자일 것이다. 연구자가 솔직해지려면 그냥 자기 입장에서 솔직하게 글을 쓰면 된다. 변명하지 말고, 꿋꿋이. 그게 누군가에는 문제로 보이더라도 말이다. 여전히, 대놓고 자기 성찰적 작업이라고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페미니즘적 글쓰기를 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유행하는 연구방식이 아니더라도, 양심적인 숙련된 연구자라면 그러한 작업들을 계속하고 있다. '이론과 실천'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이들의 작업을 좀 더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뭐, 따지고 보면 그런 작업들이 학술지 빼고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으니, 이게 더 큰 문제 겠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중도개혁 입장이 판을 치고, 그러한 깃발 아래 자신의 색채를 숨기는 행동이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중도개혁 입장이 좀 더 살아야 보다 좌파적인 사유와 실천이 살아나는 지형이다. 이렇게 볼 때, <사당동 더하기 25>는 시대적으로 매우 징후적인 책이다. 온정적인 중도입장에서 뭔가를 양심적으로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무엇도 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보다 솔직한 계급적 입장으로 뭔가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사당동 더하기 25>의 애매모호한 변호론적 입장이 아니라, 로버트 영이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에서 밝히듯이, 해방적 연구자는 억압받고 착취받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어야한다고 다시 솔직하게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

 

사족으로 덧붙이면, 책 날개나 앞 뒤 표지에 '주례사' 논평은 정도껏 하는 게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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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저자에 대한 '헐뜻기'에 불편해 하는 것 같다. 먼저 심심한 유감을 보낸다. 그래도 좀 건방지게 말하면, 여러분의 불편함을 전부는 아니지만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왜냐? 그러라고 쓴 글이기 때문이다. '욕'들어 먹을 만한데, '욕'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욕을 점잖게 하면 안 된다는 게, 요즘 나의 생각이다.점잖게 하면 말귀를 못 알아  듣거나, 무시하더라.

 

그래도, 페북에 올라온 글을, 누가 보내주셔길래 따다 붙인다. 상당히 좋은 말씀^^ 이다. 참고하기 바란다. (평해 주신 분의 허락을 받지 않아서, 지우시라면 지우겠다).

 

제가 이 비평을 본 바로는 외부적 착취(연구대상과의 관계)와 내부적 착취(연구보조원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정리되는데, 제 입장에서 보자면 이 비평가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가의 문제는 직면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프레임(억압자와 핍박자)에 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네요.

 

연구자의 특강과 각종 다큐들을 다 본 이후 인상에 남는 점은 타자화에 대한 연구자의 입장이 잘 정 리되어 있고, 또 연구방법에 대한 연구자의 입장 역 시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야기하긴 너무 길어서 생략) 되레, 비평가 본인의 정치적 견해가 학문적 실증과 분별없이 겹쳐지는게 마지막 문단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되레 이 비평가가 아주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현실에서 정말 그런 단순화된 프레임이 적용되는가? 연구의 질문이 착취자를 투쟁으로 몰아 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가 아니 라,한국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그 현실은 어떠한가가 아닐까요? 맑스의 질문은 '왜 사람들은 가난할 까?'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이 비평가는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인 상이 드네요.

영상에 대한 부분도 그렇습니다. 연구자가 현실을 어떻게 바꿀수 있는 가?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연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연구 를 어떻게 지식으로 정보로 잘 전달하 거나 알려놓아서 논의의 장을 펼치는 일이 전부이겠죠. 그럼 연구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비평은 논의의 장을 펼칠 수 있는 비평 이여야 하지, 물어뜯는 것인 비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비평가는 남의 것을 물어뜯는 것 보 다는 본인의 생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좀 키우고 외부적으로 자신의 연구가 어떻게 현실 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고민하셨으면.

 

살아있는 지식은 삶의 현장 속에 있으 며, 진정 필요한 철학은 일상의 간절함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로서 위와 같은 생각들이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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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1 18:34 2012/12/3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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