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만한 글들

2008/08/14 14:50

 

 

 

 

 

 

 

뭔가 좀 읽을만한 글들을 정기적으로 올리는 블로그나 홈페이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진보넷 블로그의 글들이 읽을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다른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들보다 너무 읽을 필요가 커서 탈이다.

 

 

다만 내 머릿속이 지금은 편한 위로를 원하기 때문에, 그리고

 

 

정세적 사안들에 대해서 많이 무지해져있기 때문에

 

 

 그저 일상속을 살아가면서 벌어먹고 사랑하고 갈등하고 위로하며 사는 글들을 담담하고

 

 

 상세하게 적어주는 따뜻한 글들이 있는 블로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실 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서,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편안한 어투로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크게 거슬리지 않는한 

 

 

 블로그의 글들을 가끔이나마 읽어보는 편인데 요즘 나의 지인

 

 

 들은 사는게 바빠서인지 아무도 거의 글을 안올린다.  그리고 진보넷에는 내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  친밀감이 호기심을 만들텐데, 실제로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심각하게 쓴 글들을 잘 안읽게 된다는 얘기다. 이것도 다 머릿속이 누전된 이후로 바보가 됬기

 

때문이겠지.

 

 

 가끔 머리식히고 싶을때 읽을 블로그를 하나쯤은 더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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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리우스 2008/08/14 15:42

    그때 그 홍차각 선인장이 지금은 두배로 자랐답니다....
    리우스는 머리 식히고 싶을 때 동네길 산책하는 거 좋아요... 읽는게 아니고 여러가지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읽는 건 골치 아프니 머리가 식을 수가 없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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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비디아 2008/08/18 01:39

    뭐하고 살아요? 블로그 통계를 보다가 한 번 들렀다 간 것 같아 글 남겨요.물론 나도 종종 여기 마실오긴 하지만서도... 후훗. 조만간 티스토리에 구축중인 블로그로 옮길지도 몰라요. 그러게 된다면 소식 전하죠. 건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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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비디아 2008/08/26 19:09

    블로그를 이전했습니다. www.zzacnoon.net으로 종종 놀러오셔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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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오징어땅콩 2008/09/01 20:52

    리우스/ 홍차각 선인장을 아직도 잘 키우고 계시다니 기쁘네요...(전 그게 사실 홍차각 선인장인지도 몰랐답니다) 저는 머리식힐때 사실 여러가지 상상을 하는데, 그러다보니 현실과 상상속의 자아가 분열되는 것 같아서 좀 걱정되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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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오징어땅콩 2008/09/01 20:53

    비디아/ 블로그에 한번 들린건아닌데. 근데 누가 남겼는지 자국이 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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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비디아 2008/09/02 15:48

    오징어땅콩이 들르지 않았다면 아마 이 블로그에 왔던 누군가가 클릭을 해서 내 블로그로 들어왔기 때문에 흔적이 남는 거겠죠. 통계란 것이 있는데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고... 어느 블로그나 어떤 검색어로 들어왔다 정도만 알 수 있어요. 네이버에서는... 그냥 심심할 때 한 번씩 들여다 보다가 우연히 봤어요. 뭐 암튼 이제 네이년은 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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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소년가장 2009/02/23 11:56

    *안녕하세요.
    -저는 소년가장 입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기상! 기상! 아침이다! 빰빠라빠바밤!”
    오늘도 어김없이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알람시계를 잠에서 덜
    깨어 비몽사몽인 채로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껐습니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씻고, 교복을 갈아입고, 밥을 먹고 학교
    갈 준비를 마치면 아침 6시 45분입니다. 학교가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지만 아침 일찍 학교 가는 것을 즐기는 지라 언제나
    저의 등교 시간은 이릅니다.
    아직은 이른 시각이라 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아직도
    꿈나라에 있습니다.
    하지만 전 왜 이렇게 싱글벙글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피곤함이
    없진 않지만 왜 이렇게도 마음이 즐겁고 행복한 지. 그건 아
    마도 지금의 저에게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겉으로는 부유했지만 안으로는 한없이 궁핍한 그런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고급스러운 옷과 장난감들로는 부모의 사랑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언제나 언성을 높이시며 크고 작은 부부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럴 때 마다 언제나 방 한구석 침대 모퉁이에 동생과 함께 머릴 손으로 감싸며 움츠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무섭기만 하였습니다. 두렵기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저는 겁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린 저에게 부모님의 불화(不和)에 내성이 생겼던 겁니다. 그런 저는 마음이 착하고 여린 여동생과는 달리 반항을 하고, 고집을 부리고, 친구를 때리는 등 못된 아이로 모습이 변해갔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고작 9살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가정은 깨어졌고, 저와 남동생 그리고 엄마 이렇게 세 사람만 가정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엄마는 발버둥치며 저희와 살아가려고 밤낮으로 일하러 다니시며 가정을 꾸려나가셨지만, 그게 엄마에겐 큰 무리가 된 것 같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엄마께서는 시름시름 앓으시는 일이 많아지셨고, 누워계시는 날이 많아지셨습니다.
    그 해 11월 병원에선 엄마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위암말기였습니다. “3개월 남았습니다.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엄마 곁에 함께 있었던 저는 담당 선생님께, “그럼 우리 엄마 죽어요? 왜요? 왜 우리 엄마가 죽는데요! 우리 엄만 나쁜 짓 안했단 말이에요! 우리 엄마가 얼마나 착한데 왜 죽어요! 제발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런 저의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시던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는, “얘야 나도 내가 가진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단다. 미안하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너무나 미안하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제가 살리고 싶다고 해서 살고 죽이고 싶다고 해서 죽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느낌을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엄마에겐 죽음도 쉽게 허락되질 않았습니다. 엄마의 투병 생활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암은 위는 물론이고, 장, 간, 이자, 폐 등 모든 몸속의 장기에 전이되어 손을 쓸 수조차도 없었습니다. 독한 항암치료로 인해 밤낮으로 토하고, 뼛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진통으로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하셨습니다. 어린 자식들에게 자신이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계속 저희를 떼어 내려고만 하셨습니다.
    “엄마라고 제대로 해 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면 내가 무슨 염치가 있어요.”
    이렇게 친척들에게 말씀하시며 우셨던 모습을 전 뒤에서 눈물을 삼키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희에게 정을 떼시려고 일부러 모질게 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 해 3월 4일, 유난히도 날씨가 짓궂던 그 날,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 전에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려서인지, 아님 저희 남매끼리 홀로 살아가야 할 두려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는 눈물조차 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저와 동생 둘 만의 생활은 그리 만만치를 못했습니다. 어쩜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12살, 9살 이 어린 두 아이들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기본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유난히 잠이 많은 남매는 일찍 자건 늦게 자건 항상 늦잠을 자서 학교를 지각하기 일쑤였고, 잘못된 식습관으로 탈도 많이 나고, 학업은 늘 밑바닥을 헤맸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흘러 2003년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한 기회를 얻어 어학연수를 1년 동안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소년소녀 가장 세대에게 주는 특별한 기회였지만 1년의 어학연수가 저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없는 1년 동안 동생 미영이는 한 목사님 가정에 위탁되어 생활을 했었는데, 그것을 인연으로 저도 귀국 후에 목사님 가정에 위탁되어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저는 보통 아이들과는 많이 다른 아이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 댁 자녀 어느 아이도 자기주장을 고집 부려가며 내세우는 아이가 없었는데 유독 전 제 주장이 너무나도 강하고 막무가내라 여러 사람들에게 눈물과 상처를 줬습니다.
    그런 저의 단점들을 목사님 사모님께서는 강점으로 다듬어 주셨습니다. 언제나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저를 위해 좋은 멘토들까지 붙여주시며 저를 위해 정성을 다해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 때는 어린 철부지였나 봅니다. 이런 사랑 속에서도 언제나 문제는 제가 일으켰습니다.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인 말투와 이기적인 행동들로 인해 동생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습니다. 전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 어린 동생들에겐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갔었나 봅니다.
    그러나 이런 저를, 못남투성이인 저를 놓지 않으시고, 모난 네모를 둥글둥글한 동그라미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목사님과 사모님은 정말 많은 시간을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게 두세 달 정도의 시간을 거쳐 저의 마음을 안정시키신 다음엔 떨어진 성적을 다시 올리기 위해 선생님을 붙이는 등 또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첫 성적은 반에서 40명 중에 17등이었습니다.
    정말 바닥을 헤매던 제가 다시 그만큼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다 목사님과 사모님 덕분이었습니다. 언제나 제가 기죽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제 위치를 찾게 되고, 그렇게 서서히 몸과 마음에 평화가 다시 찾길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웃기도 많이 웃고, 울기도 많이 우는 전형적인 또래 남학생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난 지 4년째입니다. 중간 중간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제 뒤에 계시는 두 분으로 인해 잘 헤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위탁이 끝난 상태지만 저희 남매는 여전히 목사님 댁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저를 친아들처럼 귀여워 해 주시고, 지금도 여전히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그 전보다 시간의 여유는 많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많은 대화를 나눠주십니다.
    전 『방송국 PD』라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을 화제로 두 분께서는 언제나 많은 조언을 해주십니다. 이것저것 인간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도리 같은 것들을 지적해 주시고, 세상을 보는 눈과 따뜻하게 사람을 볼 수 있도록 늘 조언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제가 PD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 또한 두 분의 영향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밝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노력하시고,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시는 두 분의 영향으로 저도 방송이라는 매개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밝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고 싶고, 희망찬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PD라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든지 등교 시간은 이르고 하교 시간은 늦을 것입니다. 저 또한 하교 시간이 중학교 때보다 훨씬 늦어졌고, 더군다나 전 학교 독서실이 조용하다는 이유로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있다 보니 자연적으로 집에 늦게 오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두 분의 모습을 볼 때면 한 편으로는 죄송하지만 한 편으로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도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고,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행복해.’
    목사님 가정을 만나기 전에는 저는 이런 것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습니다. 이런 행복이 정상적인 가정의 또래 친구들에겐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제겐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걸 극복하려고 내색하지 않고, 강한 척 했지만 기다려 주는 사람 없는 어두컴컴한 집, 암흑 그 자체의 집으로 들어갈라치면 한없이 작아지고 비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전 행복합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부자라고 해서 꼭 행복하지는 않고, 가난뱅이라고 해서 꼭 불행하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족의 사랑과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작은 것에 만족과 감사가 있다면 아무리 백만장자라고 할지라도 부럽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선 전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높은 성적이 아닌 중간 정도이지만 저에 대한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제가 들어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여 당당하게 제 일을 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제 모습을 두 분께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아직까지 다듬어 나가야 할 부분들이 많지만 지금까지 잘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한 눈 팔지 않고 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저는 반드시 제가 꿈꿔왔던 일이 실현될 것을 믿습니다. 물론 두 분이 제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기에 반드시 꿈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너무 많은 것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받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잘나지도 않은 제 자신이 어떻게 이 많은 사랑들을 받았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몸도 마음도 한 해 두 해 다르게 성장하는 제 모습을 볼 때면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함께 자라나는 마음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감사와 보답이라는 마음입니다.
    받은 것이 너무나도 많기에 또 한 번 감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저이기에 보답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것이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이 세상에 저로 인해 한 줄기 희망의 빛줄기가 비쳐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제가 받았으니 당연히 저 또한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제 마음 속 깊은 곳의 사랑까지도 그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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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저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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