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시네큐브 매표소 불친절, 불쾌함

2014/12/27 16:07

 

어제 영화를 보러갔는데, 광화문 시네큐브 매표소 직원과  할인문제로 실랑이하고나니,

힘이 빠져서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가' 라고 했다가 그다음에는 '나' 라고 했다가  하면서 뭐가 잘못됬는지 알지도 못하고

자기 착오였다는 말도 할 줄 모르는 무례한  직원- 20대 초중반밖에 안되어보이고 안경끼고

화장안한 얼굴에  뭔가 무지해보이면서도 순진해보이는 그 사람을 보니 ,

마치 학교 다닐때 애들 따돌리고나서 ' 난 쟤가 하라는 대로만 했어요. ' 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응대하는 아이가 생각났다.

 

하긴 당신도  저녁에 여기 근무하면서 뭐가 즐겁겠냐, 얼마나 돈 많이 받는다고 친절하고

싶겠냐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제대로 업무를 숙지하지 않는 사람도 감정노동자라고 이해해

줘야 하나? 싶었다. 하긴 그 회사에서  제대로 교육을 안했겠지.

그래도 대형 영화관의 정확한 설명한 설명과 싹싹함이 편안한 나 자신에게 묘하고

아이러니하게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광화문 시네큐브가 영화나 시설은 그럭저럭 호평인데 매표소 직원의 불친절 문제

는 꽤 오래 된 모양.

앞으로는 미로스페이스나 스폰지 하우스 등 다른 곳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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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것

2012/03/27 11:21

 

 

 

 

대학때는 이기주의라 말할 수 있는 양태를 숱하게 보았고,  그 숱한 이기주의가 싫어서

 

 그 와 반대되는 공간을 찾으려애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허한 마음을 채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결국 남의 도움을

 

 입어도 나 스스로 성장해야만 해결 되는 것임을..

 

 

  내가 내것만 잘챙기지 않고 남의 것을 챙기려고 애쓰는 것도 결국 내가 결핍된

 

 만큼 남이 결핍되어 불만을 가질까봐 미리 넘겨짚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때문에  나를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여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러나 내가 남에게 이럭저럭 감정적 호의를 제공 한다면

 

  (글쎄.... 니가 도대체 뭘 베풀었냐, 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그건 그 사람이

 

  좋아서..... 인 경우도 있기는 하나 습관적인 요소, 또는 내가 바라보는 어떤 이상적인

 

   인간관계의 상이 투사되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 

 

 

 

 

   .............

 

 

  대학원에 들어가고 나니 생각만큼 낯설거나 혹은 사람들이 냉랭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럭저럭 챙겨주려고 노력하는 (나보다 나이는 연하지만) 선배인

 

 동료들이 고맙기도 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술을 물처럼 마시는 사람'으로

 

 찍히기도 하는 인상을 남기며 (;;)  나는 그럭저럭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들과 나는 다르지만, 우리사이의 마음의 벽은 조금씩 붕괴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비록 맨날 같이다니고 붙어다니는 사람이 없더라도 오히려 난 그냥... 서로 자주

 

만나거나 자주 얘기하지 않아도 마음에 벽이 없고 호감이 있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원 생활 동안 목표로 하는 것은

 

나와 가치관이 다르거나 혹은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맞지 않더라도 그저 물흐르듯

 

모든 것을 그 존재자체로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여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한다. 여대에서 여대로 오고 또 환경이 바뀌면서 

 

여성들의 모습이 다양한 것을 발견하고, 석사박사를 하고 집까지 유복해도

 

모든것을 남이 (주로 남자가)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여성들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도 일 잘하거나 공부를 잘 해서 배울 점이 있거나  아니면 자기가

 

많이 가진만큼 남한테 베풀줄도 알거나 성격이라도 좋으면  된다.

 

근데 그것도 아니면 뭐지, 인형인가?

 

싶다.

 

 

 

 

 

한숨쉰다.   여성과 여성사이의 관계가 중요한데 그 가치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배우고 있나?

 

하긴 나도 사람에 대해서 고지식하고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별로 그렇게 잘하지는

 

못한다.

 

얼마쯤의 허망함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본질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이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서로 못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겉으로나마

 

좋은 말도 할 줄알고,  밥도 잘사고, 후배도 잘 챙기고 그런 여성들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별로많지는 않지만) 괜찮다는 생각이든다.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나도 그런 사람을

 

그냥 남이 뭘 해주기를 기다리면서 가만히 있는 여성보다는 훨씬 좋게 보게 된다.

 

 

 

나도 요즘 가치관에 혼란이 많다. 이정도는 보통이라고 생각되기도 하면서도.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장땡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맘껏하고, 그렇게 하면서 오히려 남들이 어떤

 

행태를 보이든 상관없이 내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한 사람이다.

 

 

 

도통 나한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질 못하고 시행착오만 하고

 

 살아오다가, 한 몇개월전부터

 

나한테 도움이되는 방식으로 조금씩 살아오고 있다.

 

더욱더 나에게 집중해야만 남에게 베풀 것도 생길것이다.

 

 

 

그리고 나한테 가장 많은 에너지를 부여하고, 나에게 모든것을 집중해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좋은 세계를 만들수 있도록...

 

사람들은 다들 결국 각자가 볼 수 있는 세계를 보면서

 

그 세계를 이루려고 살아가는 것 아닐까.

 

자기가 가장 행복하리라고 생각되는.

 

남보다는 나의 그 생각을 지지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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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2

2012/03/22 08:38

1.  선거

 

  통합진보당은 건전하지 못함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난 유시민 별로 안좋아한다.

 

  글타고 진보신당을 다시 찍는다고 해도 좀 마뜩찮은 기분. 어제도 홍세화아저씨가

 

 당원들에게 남긴 음성 들으면서 참 마음 약해지고... 내가 아직 탈퇴를 못한게 우연이 아니었나

 

 싶고.....  대한민국에는 내가 지지할 당이 없나보다.

 

 

  마뜩찮고 못미더운 진보신당에게 결국 비례대표를 줘야하나보다.

 

 

 

 2. 순간 에너지가 넘칠때가 있는데, 이런 때 생각해보면 내가 마음껏 말하고 마음껏

 

   표현해도 모자란다는 생각이 든다.  버럭소리를 지르진 않아도 마음껏 주장을 펼칠

 

 

   자리가 한 두개 더 있어도 모자라다. 얌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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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0

2012/03/20 10:39

 

 

 

 

 

 1.

 

 자기 발견이라는 말은 있어도, 자기 관리라는 말은  내겐 없다.

 

 2. 

 

 나를 지금보다 더 치유할만한 환경의 조성은, 舊 옛날부터 오래 알던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 가깝게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학교에 있는 동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3.

 

  학교에서 늦게나와  차를 놓쳐서 성북역에서 내려서 청량리까지 택시 합승을 했다.

 

 합승한 사람은 나보다 좀 어린 남자인것 같은데,  합승하자니까 말없이 승인했다.

 

 차 안에서 잔돈이 있냐, 없냐 얘기를 서로 나누었으니 확실히 승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난 합승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택시 아저씨 한테도 '합승해도 되죠?'

 

 라고 큰 소리로 물었더니 그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난 그 말을 승인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근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택시 아저씨가 돈을 각자내라는 것이다.

 

 

 이 때 난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 성격 같으면

 

 그냥 냈을수도 있지만 깡다구가 생겼는지

 

 " 아까 제가 합승되냐고 여쭤봤잖아요? 된다는 얘기 아니셨어요-"

 

  하고  항변하였다. 

 

 

 

  택시기사님 입장에서는 합승을 ' 같이타되 돈은 둘다내는 것' 으로 해석했을

 

  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서는 승차하기전에 다른 승객과 (무언으로) 합의했고, 아저씨도

 

 합의했으니 1인요금을 내는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승객끼리 같은 목적지를  합의하고 가는 경우에 요금을 어떻게 하는지,

 

 택시를 잘 안타서 법 상,   관행 상 어떤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승객의 의도상 '합승하겠다'  라는 의미를 아저씨도

 

 

 요금을 둘다 낸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럴거면 뒤에 택시 줄줄이 많은데 뭣하러 그 차타나.

 

 어쨌든 이러한 오해들이 있었고,  기사님은 의외로 나의 한마디에

 

 반값만 내라고 수그러들었다.

 

 

 근데 그 어린 남자가  내가 택시아저씨와 실랑이 할때  ' 제가 낼께요" 그러는 것이었다.

 

 그 남자분은 내 택시비를 내줄 이유가 없는데 자기가 내준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소리냐고 내가 낸다고 하고 반값을 냈다.

 

 그리고 내가  택시에서 내리니까 공손하게  " 죄송합니다"

 

  하는 것이다.

 

 그 어린 남자분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근데도 저렇게 돈도 내준다고 하고 미안하다고

 

 하는 거보니 뭐랄까.  착한사람 나쁜사람 개념이라는게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택시기사님이 안받아도 될 2인요금을 받은 것이라면 (물론 상황상  계약

 

 내용이 명확하지 않은점도 있다.) 잘못한 것이다. 그치만 고단한 운수노동자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맞는 방향으로 해석한 것이야 뭐 그럴수도 있는 것이고,

 

 그건 자기 보신이지 악이라고 보기는 좀 그렇다.

 

 

 어린 남자 승객은... 아마 마음이 좀 후한 사람이니까 자신이 돈을 내준다고 했겠지.

 

 심지어 택시안에서도 내가 거스름돈이 없어서 당황하니까 괜찮다고 다 자기가 낸다고 했다.

 

 

이건 분명히 기분좋은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을 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주어진 처지와 환경에 따라서 사람은 이렇게 달라지는데 착하다, 나쁘다 를 말하는 것도

 

매우 표면만 포착하는 어리석음같다 . 타인한테 엄청난 해꼬지도 아니고 요만한 케이스에서.

 

 

 

 

그러나 또한 돈이 있건 없건 남에게 무언가를 할애하려는 것 자체를 발견하기

 

 어려운 세상이기에   나는 그냥 남한테 조금이라도 희생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무조건 반갑다.   가끔은 퍽퍽  기대고 싶은 생각도 있다.  돈이 없으면서 밥 사준다고

 

 뭐 준다고 하는 선배를 안쓰럽게 생각하고 막 거절하지만 솔직히 가끔은 내가 마음편하게

 

 누가 해주는 걸 받고 싶기도 하다.  오랜만에 만날때마다 자기가 한번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고맙다.  정말 안사도 되지만 그런 마음 자체가 좋다는

 

 것이다. 

 

 

 난 상담학도니까, 비슷한 처지에서도 무엇이 그 사람의 마음을 여유롭게만드는가

 

 혹은 팍팍하게 만드는가 하는 인간의 심리형성을 생각해야겠지.

 

 

 청량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데 영화 ' 화차' 광고가 보였다.

 

 그 누가 저 영화속의 여자 주인공을 욕할수 있으리.

 

 그 영화속 김민희를 보고 선악 을 얘기한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 영화는 안보련다.  그 영화를 보면 내가 갖고 있는 두려움과

 

 위기의식이 증폭될 것 같다.  내가 힘들어지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어떻게든 변해갈 수 있을것 같은 그런 잠재적인 두려움이 증폭될것 같다.

 

 그런 두려움, 현명하게 해소하는 방법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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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8

2012/03/18 12:02

1.

 

  어제 여성주의 상담 소모임을 하고나서 상담을 받고 밖에서 약간 책을 읽다

 

  들어왔다.

 

 

 

 

 

 

 

 상담분야가 좋기도 하면서  아직도  반신반의 하는 마음이 있다.

 

  

  왜냐면 갑작스런 삶의 모드의 전환이 생소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결과물과 효율을 중시하는 그런 분위기속에 있으면서, 나 역시도 안달복달

 

 하면서 마음을 많이 괴롭혔다.   자신을 의심하는데  에너지를 많이쏟으면서,

 

  이러니까 내가  생산적인데에 마음을 쏟지 못한다고 자책했다.

  

 

  결국 그러다가 흘러 흘러 이렇게 됬는데,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서  효율보다는

 

  순간순간의 느낌과 맘의 여유를 강조하는 이런 삶을 요구받으니 혼란스러울때가 있다.

 

  내가 살아온 삶에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깊이 탐색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접해온 운동사회에서도 그정도까지의 깊이 있는 탐색을 하게 되진 않았다.

 

   자신에 대한 고뇌보다는 일에대한 소신과 대인관계 능력이 오히려

 

   요구되었다고 보인다.

 

 

   저번주에 사례발표회때 교수가 발표자에게 지적하면서 했던 말들이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 뭘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존재하는 거야, 느끼라고요!"

 

   그런데 나는 여전히 저런말들이 좀 남사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정말로 감정이

 

   삶에서 그렇게 중요한가? 대인관계에서도 그렇게 중요한가? 하긴 그러고

 

   보면, 타인이 나에게 해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밥 사주는 것 이상으로 큰 기쁨이

 

   되기도 하니 사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선이고 그 감성에 맞춰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한 이성을 동원하는 것이 맞겠지.

 

   정말로, 감정적으로 내가 타인과 깊은 만남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더 ' 꺼리가 있는 만남'   ' 관점이 맞는 사람들간의 만남'   을 추구하고

 

   또한 어떤 지식을 배울 수 있는 만남을 추구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감정을 깊이 아는 게 정말 중요한가? 상담은 사람에게 깊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이런 점에 나는 아직도 한 조각의 의심을 갖고 있다.

 

 

 

 2.

  

  내가 자기소신이라든지, 중심이  겉으로는 상당히 있어보이는 인간이지만

 

  그런것들이 종교, 혹은 이념 이런것이 내사된 것이지 충분히 자기화

 

  되지 못했다는 느낌을 요즘 강하게 갖게 되면서,  내 주변에 상당히 많은 상황이

 

  변동된다고 하여도 내가 나의 일부로서 가져갈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돌아보게 되었다.   즉 쉽게 말하면, 이를테면 내가  즉 중도좌파

 

   정도의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볼때 이건 많은 것을 의미한다.  권위적인 것을

 

   지양하고 민주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  남녀평등 이상으로 근본적인 차별을 염두에

 

   두는 급진주의 여성주의 지향, 그러나 한편으로는 식자들의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비논리성에 호소하거나 대중적인 흐름에 지나치게 부합하려는 모습을 보면  거부감

 

   을 느끼는 半 식자의 한계, 따라서 실천력이나 현실문제 해결능력은 좀 떨어지고

 

   관념적으로 고민하는 성향이 짙은 것,  말하는 것과 살아가는 삶의 괴리나 모순,

 

   중산층의 계급적 기반위에서 지금 내가

 

   느끼고 믿고 있는 것들을 쌓아왔기 때문에 몇년 후  내 힘으로 살아가는

 

  중저임금 노동자가 되었을때는 지금 이상으로  많은생존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테고

 

   그렇게 되면 내 실존의 위치에서 추구하게 되는 지향점이 어느정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또한 내가 추구하는 많은 가치들 중에서 어느정도의 공동체주의, 자유주의와

 

   급진주의가 복합된 여성주의  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입으로 말하는 가치들은 정말로

 

   내 실존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배척하는 것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빌려온 독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치 자체가 독선이라기 보다는,

 

   내가 나의 방패막으로 삶에서 차용한 것 자체가 자신을 지키기위한 독선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꼴 보수적이거나 꼰대 가부장적인, 그리고 그것들에 기대어 사는 여성

 

  남성들과 대항해야 할때 별로 자기화되지 않은 지식들을, 논리들을 많이 내것처럼

 

  가지고 온다.  타인에게 대항하기 위한 일시적인 정체성들이었는가, 그리고 그

 

  중에 많은 것들은 사상누각이 아닐까 하는 위기감을 많이느낀다.

 

 

 

  31살이 되어 이제서야 이런 고민들을 진지하게 정말 진지하게 할 정도로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오지 못했던가,  하는 막막함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하듯이, 나도

 

  대단히 체제 순응적인 인간에서 한발 나아가서 그것에 반격하는 양태로 발전했고,

 

  이제는 반격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자체로 나답게 자기 화 된 삶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저항이 되는 단계로 발전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행

 

  하는 단계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 나는 왜 이렇게 형성되어왔는가'

 

  그리고 ' 나는 무엇을 원하는 가'   궁극적으로 '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2 단계의 ' 반격하는 삶'  은  ' 무조건 체제순응적인 삶' 보다야

 

  주체적이기는 했지만 남들평가, 남들 눈치보는 것, 내가 권위를 부여한 것들의

 

  승인에 의존하는 삶이 었다.  그리고 난 내가 그렇게까지 남들 눈치에 연연하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남들 눈치에 연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

 

 지 못할만큼 나는 내 입맛에 맞는 사람들과 공간만 찾아다니며 그들과 서로

 

 부둥켜 안았고, 그게 안되면 진짜 망망대해에 혼자 떨어진 것처럼 막막

 

  했지만 그래도 30년의 삶에서 어떻게 어떻게 그런것들이 충족이 됬다.

 

 

  눈치에 연연한다기보다는 내 소신이라고 생각할만큼 내 입맛에 맞는

 

  것들을 취사선별할 수 있었던 삶이었다. 입맛에 맞는 사람에게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고 그 과정에서 눈치에 연연하기도 하지만 결국

 

  관계가 잘 맺어지게 되면 내가 눈치에 연연했다기보다는 서로에게 맞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계에서 난 주체적이지 못했다. 적극성을 띄었지만

 

  주체적이지  못한 것, 결국 관계를 타인이 주도하는대로 열심히 눈치보며 따라가

 

  며 살았다는 것이다.   내 블로그에 쓴 글의 80% 이상이 관계로 인한 고민의 글이다.

 

  그만큼 남일에 머리쓰는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관계를 예측하려고 하고 타인에게

 

  부응하려고 하고 그러기 위해서 머리를 더 많이 이해하려 했다.

 

 

 

  내가 원하는 삶은 그래도 그 과정속에서 알아가는 중이니 그 세월은 당연한 과정이었다.

 

 자랑스럽진 않아도 부인할 필요 없이 너무나 필요한 과정이었다.

 

 근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진짜 내가 기뻐하는 것이 뭔지 잘 알고 싶다.

 

 확실치는 않아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뭔가가 있을 것 같다.

 

 

 나는 배우는 것, 그리고 타인의 성장을 돕는 것, 어떤 일이 일어난 배경과 논리적 흐름

 

  에 대해서 탐색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젊음을 많이 누리고 기뻐하고

 

  활발하게 얘기하고 싶고 그 활발한 대화가 서로 감정을 주고받으며 배운다는

 

  느낌이 있는 것이면 좋겠다. 그리고 내 맘에드는 옷을

 

  사입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주말에 삼청동을 산책하고 싶다.  풋풋하게 젊지는

 

  않아도 내가 예쁘다는 느낌을 느껴보고 싶다. 학문적인 결과물을 낸다는 것은 너무 장기간

 

  의 목표이고 또한 내가  가진 능력이나 여건상의 한계가 매우 크지만 그래도 자기발견이 되고

 

   상담계에 도움이 되는 논문을 쓰고 싶다. 어설프게라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약간이나마

 

   있다는 것도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느낌이 진짜 그렇게 까지 중요한

 

  것인지, 정말 ' 느끼고 ' 싶다. 자기 느낌과 만나지 못하고 노동을 계속 하게 되면

 

   피로하다. 이글을 쓰는 중간중간에도 내 느낌과 만나지 못하고 쓰는 순간들이 있었다.

 

    느낌을 정말 많이 접하게 되면 내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인간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알고 싶다. 공허하거나 막막하거나 외로운 순간들이 줄어드는지 알고 싶다.

 

 

   위에 나열한 것 말고는 내가 잘하는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분명하게 말하기가 힘들다.

 

   아무튼 진짜 나와 만나야 할 것 같다. 진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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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일& 물음표로 남는 일

2012/03/13 14:21

 

 

 

 

 

 

 

 

요즘 기쁜 일과  그리고 물음표로 남는 일이 있다.

 

 

기쁜 일은  내가 녀성주의 상담연구실에서 만난 언니와 토요일에 차 한잔을 했다.

 

그녀와 차 한잔을 하게된 계기는,  그녀의 치료 연구소를 친구에게 상담받으라고

 

 

 소개시켜줬는데,

 

그 과정에서  연구소가 재정난에 있다는 걸 알고 나도 소액을 후원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연구실에 놀러오라고 했고, 나는 누구한테  놀러가서 넉살좋게 수다떠는 걸

 

잘 하는 인간이 아니기에 좀 긴장한 마음으로 갔다.

 

 

그녀도 처음부터 말이 많거나 엄청난 붙임성을 자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솔직하게 나를 개방할수록 그녀와 할 얘기가 많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따뜻하고 성숙한 사람이었다.  조금 외롭고 추우면서 사랑을 필요로 하는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나이 마흔에 너무 충만하고 안정되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 내가 춥기도 하다'  라고 말하는 그녀가 더 인간적이었다.

 

그 언니는 타인에게 많이 베풀고 싶은, 사회적 엄마로 살고 싶어하는

 

그리고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다.

 

나도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다.

 

여성주의와

 

그녀가 연구소에서  여성들과 함께 하면서 행복해하고 삶의 깊은 의미를 찾는 것을

 

지지하고 싶었다. 그 연구소가 계속 됬으면 싶었고, 돈때문에 문닫지 않았으면 싶었다.

 

 

 

타인과 나를 하나로 바라보는 삶, 나와 타인 사이를 가르지 않는 삶, 타인안에서

 

나를 발견하기에 적대할 일도 이해하지 못할일도 없는 그런 삶을 어느정도는

 

살고 있는 것 같은 그녀가 내공있어 보였다.

 

 

 

 

 

한편으로는 비혼여성이면서 괜찮은(?) 수입이 없는 여성의 삶이 힘들게 느껴

 

졌다.  아무리 훌륭한 정신이 있어도 배고픔이 오래지속되는 것은 힘든일이다.

 

비혼의 삶은 멋진데...돈이 없는 것이 힘들단 말야

 

계란만 먹고 살고 싶지는 않은데.... 돈이 없음으로써 서로에게 팍팍해지고

 

어떤 가능성을 꿈꿀수도 없게 되는 상황, 그게 난 참 두렵다.

 

최대한으로 이 방면에 있어서 실질적인 능력과, 버틸 수 있는 내공을 가져야겠다.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할때 재정난에 처하지 않을 일은 없을테니까...

 

 

내 주변에도 은근히 그녀가 하는 표현예술치료라든지 타로라든지

 

사이코드라마에 관심있을 사람들이 (소수지만)있는....내가 좀더 내공이

 

쌓이면 여성주의 상담에 대해서 나와 친구가 하고 있는 소모임과

 

그쪽과 뭔가 연계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뭔가 실마리를 하나 잡은 것 같았다.

 

 

 

근데 한편으로는 그녀 앞에서 내가 (예전보다는 덜 하지만)  뭔가 그녀가 마음에

 

들어할만한그리고 그녀를 편안하게 해줄만한 말들을 찾기위해서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내 얘기를 다 했을때 그녀가 ' 00 씨 참진솔해'

 

이렇게 평가하기를 바라는 방향으로 이끈다고 해야되나....

 

난 진솔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상대가 나를 진솔하게 보지 않는다고 해도

 

나 스스로 진솔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점점 더 진솔해지고 싶다.

 

아직은 타인앞에서 타인의 취향에 맞추려는 기질을 버리지 못한 자신을 확인했다.

 

이것에 대해서 마음편해지고자 의식적으로라도 마구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하고

 

왔는데, 그녀는 역시 상담자니까 나의 억압된면, 다각적인 모순된 마음을 얼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이다.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그녀가 전해 받을 수

 

 

있었던 메시지가 '당신에 대해서 호감이 있소,  더 진솔해지고 싶소'  로 정확히

 

 

전달되었다면 충분하다.

 

기쁜일은 썼는데 물음표로 남는 일은 다음에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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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3

2012/03/03 09:55

 


 

 

 

1. 좋아하는 음악

 

 시네이드 오코너 라는 내 취향에 맞는 뮤지션 발견

 

 한동안 내가 그 언어를 못알아듣는데서 나오는 몽환적인 느낌이 좋아서 남미의 여가수

 

 들을 즐겨들었으나, 나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 느낌이 물리는 것이 있더라.

 

 

 

 소리지리는 락음악 말고, 너무 사랑과 이별 일관하지 않는 그런 좋은 노래 없을까?

 

 그 예로 우리나라 가수로 One more chance 라고 정지찬이 만들었던 그룹이 있다.

 

 그 그룹의 '자유인'  이라는 노래가 참 좋았다.

 

 

 그리고 요즘은 ' 옥상달빛'  이니 '제이레빗' 이니 하는 여성뮤지션들도

 

 너무 약한척 센치한 척 하지 않고 인생을 읊조리는 것 같아서 좋다.

 

 

 성깔있지만 소심한  여성들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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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2

2012/03/01 23:52

알바 다녀와서

 

빈둥빈둥 먹고 놀고 언니네 집 다녀오고...

 

마지막 휴일을 이렇게 완전한 휴식도 아닌 그렇다고 알차게도 아니게 보냈다.

 

연우진이 나오는 그 드라마 스페셜 보고 싶었는데 못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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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커피한잔과 여유로운 아침

2012/02/19 09:16

 

 

 

 

 

1.

 

 아침에 애기커피 (보리로 만든 무카페인 커피인데,  우리조카도 즐겨마시기에 애기커피라고 한다 )

 

 한잔에 이렇게 여유롭게 블질이나 하고 있다. 

 

 어젯밤에는 알바가 끝나고 나서 석촌역의 까페에 앉아서 슬슬 책을 읽었다.

 

 제목은 ' 감정노동' 이라는 책. 구구절절 어찌나 공감이 되던지.

 

 

 "... 감정을 관리하기 위한 행위들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법칙에 따라

 

상호교환의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p.35)

 

 

 

 

" 요즘 새로워진 것이라면,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개인적인 목적에 따라 감정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본능적 능력에 관련해서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감정에 관해 도구적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과, 대기업이 개인의 이런 거리두기를 구성하고 조종한다는 것이다" (p.37)

 

 

 

 

" 그렇지만  '나' 와 내가 짓는 표정사이의 , 또는  '나' 와 내 감정사이의 단절을 소외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외부맥락 outer context이라는 또 다른 요소에 따라 달라진다.

 

연극계에서는 무대위에서 기억과 감정이라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존경받을만한

 

기술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그 정도는 덜하더라도 이 두자원을 활용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손익 계산을 따지는 세게에 들어섰을 때나 회사가 감정노동에 드는 심리적 비용을

 

인정하지 않을때, 우리는 충분히 유용할 수도 있었을 ' 나' 와 내 표정, 내감정사이의 단절을

 

잠재적인 소외로 보게 된다. "   (p.57)

 

 

 

 

 

" 느낌이 없는 사람이 불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처럼, 감정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기가 힘들어진다. 자기 이익 self interest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상태다.

 

사실, 감정은 ' 합리적 사고' 를 위한 잠재적 통로다. 게다가 감정은 우리에게 세강을 바라보는

 

방식을 알려줄수도 있다"  (p.49)

 

 

 

 2.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이렇게 사회현상을 의미있게 이론화 한 책은 세상을

 

 정말 바꿀 수 있는 힘을 주겠지만

 

 

 사실 나라는 사람이 하려는 상담은, 과연 얼마나 세상을 좋게 만드는데 기여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상담이 ' 부적합한 (사실은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감정'  을 '완화'하고 '교정'

 

 해야한다는 입장으로 접근하게 된다면,  인간은 그나마 그 ' 불순한'  감정들이

 

 ' 없어' 져서서 개인적으로 편안해질 수 는 있겠지만,  체제에 더 ' 순응적'

 

 이고 '비판의 시선을 상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그 감정이 있었기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고, 합리적 사고로

 

  가는 길을 일깨울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지나칠정도로 병리적인 심리 문제들에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상담을 통해서 자신의 방어기제를 탐색하고....어린시절에 대상관계가

 

 이루어진 방식을 탐색하고.... 자신의 잘못된 인지도식을 수정하고....

 

 새로운 대응방식을 학습하고....  하면서

 

 

 자신이 가진 좀 ' 괴이하기는 하나'  '독특하게' 세상의 병폐를  바라보았던

 

 시선을 잃어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주의 상담이라든지 이런입장으로 자신이 가진 증상 (이를테면 분노)

 

 에 대해서 ' 병리' 가 아닌  ' 건강한 적응방식' 이라고 해석하면서

 

 '개개인이 가진 그대로의 삶의 방식을 존중, 역량강화'

 

 하면서, 한마디로 불만많은 인간들의 역량을 강화해주면서 그사람들이

 

 자기 자리에서 소신껏 목소리 내고 살게 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변화의 움직임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구시대적인 운동의 도식에서 못벗어 나는 인간인지

 

 그게 운동이구나, 변화구나, 하고 마음에 확 와닿지가 않는 것일까?

 

 

 이건 지적인 문제라기보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 변화구나, 운동이구나'

 

 하는 감동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 삶에 정말 근본적인 애착이 부족해서인가,  다른 사람이 발버둥치면서

 

 살아가는 '모든 코드'  가 다 가슴으로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공감능력이

 

 어쩔때는 매우 뛰어난데 어쩔때는 아얘 통로가 막혀버린 것 같다.

 

 

 어떤 사람한테는 ' 그냥 넌 불행한대로 살아. 불행하든지 말든지'

 

 하는 시선인데 어떤 사람한테는 꼭 그 일이 나의 일인 것처럼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과도한 책임감을 갖는다. 감정이입해서 달려든다 해야될까.

 

 이건 자연스럽기보다는 좀 .... 뭐랄까. 공정하지 못한 수준에까지

 

 다다를 수도 있는 문제이다.  세상이라는 곳에 제대로 발디디지 못한 나라는 인간이

 

세상의 문제를 폭넓게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는 걍 내가 서핑보드처럼 한발로 딛고

 

서 있는 그 위태위태한 그 접촉면만 보면서 울고 웃고 공감하고 한다는 것이다.

 

 

고로 세상에 ' 대체로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  ' 세상에 별다른

 

불만이 없는'  ' 불만이 있어도 그걸 개인적인 지위의 상승을 통해서 없얘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얘 완전히 냉소적이다.  '너의 부모 너의자식하고만 잘먹고 잘

 

살고 기본적으로 세상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 변화의 일부로서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

 

하지 않다면,  내가 왜 굳이 당신에게 애써서 도움을 주냐' 이런 생각이다.  (내담자라면

 

 돕고 싶은 직업의식이 어느정도 생기겠지만, 내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 말이다.)

 

 실제로 저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조력하고자 노력했을때 나에게 보람이 주어지는 것은 없었고

 

 소진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치만 나의 이런 냉소적 시각 자체가 별로 떳떳하진

 

 않다.  기본적으로 내가 마음으로 배제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가지게 될 직업은 그렇게 마음으로 배제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

 

  매우 단점이되는 직업이다.

 

 

 

 

내 무의식속에는 가족에, 학교에, 직업세계에 속하고자하는 강한 욕망과 컴플렉스

 

  가 있는 것일까.  학교나 직업세계는 의식적으로도 그렇지만, 가족과의 관계도

 

  얼른 앙금을 풀고 해결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세상에 좀더 침투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정신병원에서

 

 인턴을 하던지, 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던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지경에

 

 놓였다.  나의 관심사는, 인간의 아픔에 대한 공감은 편협한 수준이다.

 

 

 그러나 이건 기본적으로 사람을 많이 접하면 해결될 문제이다.

 

 나는 타인의 삶에 깊이 침투하면 관심을 대체로 갖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라는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정체성

 

자체가 희미해지는 위기에 놓인시점..... 더는 미룰 수 없다.

 

 

상담가라는 직업과 내가 가진 관점, 시선

 

이것을 통합하는 일이 혼란을 가져오지 않을리가 없다.

 

상담에서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건강한 애착을 강조하면서 만일 인생초기에 그런 애착이

 

없었다면 시간이 지나서라도 무의식속에있는 부모와의 갈등을 의식으로 끄집어내어서

 

인지하고, 상대에게 표현하고, 감정으로 분출하여 건강해지라고 한다.

 

이렇게 가족관계의 건강함을 강조하는 조언들이 나에게는 낯설다.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가족이라는 단위에 얽매이지 말고 새롭게 만나게 되는 뜻을 나누는 사람들과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상상해온 나로서는.... 가족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별로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현실에서 부모에게 겉으로 보이는

 

최소한의 도리를 하면 되는 것이지,  가족은 아얘 진심을 나눌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온지 오래였다.  이런 나, 이제는 변화되어 바뀌어야 하는가?

 

 

 

내가속한 사회의 어떤면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라고 달려드는 마인드 속에

 

어쩌면 깊은 컴플렉스가 추동이 된것일게다.

 

그 컴플렉스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나중에가서야 자신의 왜곡된 컴플렉스를 보상받는 방식의 하나가 운동이었을 뿐

 

자신원래   타인이 행복해지는데에 깊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은 이미 기이하게 동지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자기

 

욕망을 채우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을 못느낄 정도로 망가져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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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인터뷰

2012/02/17 08:28

재밌다 ㅎㅎ

 

 

다른 사람의 삶의 양식에서 배울 것이 있다.

 

비록 진중권처럼 지식을 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이 되지 않을것이라고 해도.

 

 

 

대한민국을 불편하게 하는 남자, 진중권
‘과성숙’과 ‘미성숙’의 절묘한 동거

 

넘치는 패거리주의, 부족한 자유의 공간에서 난숙한 지성, 편 따지지 않는 도발로 혹은 찬사받고 혹은 경멸당해온 ‘빨간 바이러스’ 진중권. 그에 대한 식자층의 ‘조울증적 반응’은 그의 궤변 탓인가, 그들의 반칙 탓인가.

 

말을 퍼뜨리는 자는 무섭다. 아니, 말 퍼뜨릴 자유와 능력과 제대로 된 수단을 가진 자는 무섭다. 예를 들어 저널리스트가 있다. 작가가 있고 학자가 있다. 꼭 무슨 짓을 해서가 아니다. 그냥 세상에 얘기를 퍼뜨린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무섭다. 뭘 어떻게 떠들지, 뭐라고 내 말과 행동을 평할지 알게 무어란 말인가.

그런데 요즘은 세상이 더 무서워졌다. 인터넷 때문이다. 이제 도처에 말 퍼뜨리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감시. 만인에 대한 ‘선택받은 소수’의 감시보다야 얼른 봐도 합리적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말 퍼뜨리는 자들 사이에도 급이 있다. 그 중 진중권(42)은 단연 ‘슈퍼 울트라 급’이다. 우선 이 자는 자유롭다. 특정 조직에 속해 녹 먹는 바 없기에 걸리적거릴 것이 없다. 그러나 말 퍼뜨리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진짜 무서운 건 ‘내 편’이다. 이미 형성된 전선에서 적을 ‘씹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 어설픈 공격으로 심한 부상을 입는다 해도 위생병이 달려올 것이다. 상이군경으로 등록돼 훈장을 타고 노후 보장까지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자는 종종 아군을 씹는다. 그가 말 퍼뜨리는 자로 활동한 수년 동안, 적지 않은 별 셋, 별 다섯짜리들이 ‘아군’인 그의 비판과 조롱 앞에 스타일을 구겼다. 그의 말 자체가 파괴적인 경우도 있었고 공격당한 울분을 참지 못한 그들 스스로 자해를 한 사례도 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도무지 이 자의 진짜 아군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의 ‘좌파적 사고’와 ‘당파성’, 또는 ‘인간적 친분’을 이유 삼아 그를 내 편이라 자랑했던 많은 이들에게 그는 유리알처럼 감정 없는 눈으로 ‘배신’의 쓴잔을 내밀었다.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세상에, 우리편이 아니었다니. 진중권의 이 방자한 자유로움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진중권을 말 퍼뜨리는 자 중 단연 돋보이게 하는 두 번째 것은, 누가 뭐래도 놀라운 그의 재능과 직관이다. 그는 글을 잘 쓴다. 매체와 대상의 성격에 맞게, 찰지게, 재미있게, 배꼽 빠지게, 때로는 무겁게, 유장하고 가슴 떨리게. 발상은 신선하고 공격은 매몰차다. 다양한 철학적 문제 의식을 지금 여기의 구체적 상황과 맥락 속에 끌어들여 예기치 않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항용 철학한 자는 숭고하지 않은 것들과는 대거리를 꺼린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이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니콜라스 푸생의 유화를 앞에 놓고 난숙한 미학이론을 펼치다가도, 몇몇 사이트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주저없이 가차없이 한 마리 ‘개’가 된다. 풍자와 되받아치기에 능통한, ‘모든 우연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시니시즘(犬儒主義)의 참여정부형 버전. 진중권의 철학은 그의 ‘철학함’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에게 말 퍼뜨리는 자의 막강한 힘을 선사한 세 번째 것은 수많은 매체들이다. 여러 신문과 잡지, 방송과 출판사가, 각종의 인터넷 사이트들이 그의 글을 기다린다. 물론 꼭 잘해 보자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때릴 놈’이 없어 그를 찾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가 뭘 쓰면 자꾸 말이 나고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니 이 아니 좋은가. 그는 말 퍼뜨리는 자다. 진중권의 무엇이 이 계산 빠른 지식의 도떼기시장에서 도무지 그를 소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었는가.

감정을 비운, 언뜻 무서운 눈

진중권은 경기도 김포의 아파트촌에 산다. 어머니와 그, 두 식구 살림이다. 방학이 되면 독일에 유학중인 일본인 아내가 돌아온다. 세 살 난 아들은 아내와 함께 있다. 그의 집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아무래도 가볍지 않다. 말 퍼뜨리는 자(기자)가 훨씬 더 왕성히, 열정적으로 말 퍼뜨리는 자를 헤집으려 가는 길 아닌가. 말 퍼뜨리는 자는 폭발하는 말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안다. 참고로 그는 자·타칭 ‘빨간 바이러스’, 남다른 전염력과 파괴력을 지닌 말의 다이너마이트다.

그런데 평범한 30평 아파트 거실에 마주앉은 그는 폭탄 노릇하기엔 좀 말랐다 싶다. 하얀 얼굴, 얌전한 음성, 가지런히 돋은 이.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을 실감케 한다.

그런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것저것 잘 챙겨주고 대답도 성심성의껏 하는데 왠지 모를 불균형이 느껴진다. 말을 하긴 하는데 안 하는 게 있다. 일부러 감추는 게 아니라 그냥 말이 되어지지 않는 무엇. 말이 되어지지 않음으로써 그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그 무엇. 분명 두 사람인데 그는 혼자 있는 듯하다. 튀지도, 거칠게 구는 것도 아니련만 무리 속에 섞여 있는 그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장난스런 눈은 아무 감정도 담지 않아 언뜻 무섭고, 입가의 미소는 순진함의 표상인지 노회함의 가장인지 가늠키가 난망이다.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그는 매우 예의 바르다.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웃는다. 손톱은 보이지 않는다. 이빨도 없다. 그저 이렇게 되묻는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당연한 걸 모르죠?” 그는 자기 세계 안에서 한없이 차분하고 명쾌하다. 문득 부신 햇살 아래 홀로 소꿉놀이하는 아이가 떠오른다. 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엘리트 목사였던 아버지

 

진중권은 김포 언저리에서 태어났다. 2녀2남 중 셋째. ‘클래식 오디세이’를 쓴 음악평론가 겸 방송인 진회숙(49)씨가 큰누나, 독일에서 활동하는 세계적 작곡가 진은숙(43)씨가 둘째누나다. 아버지는 목사였고 서울사범학교 출신의 어머니는 피아노 교습을 했다.

-글을 읽으며 기독교적 세계관에 밝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요. 부친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충청도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중앙대 법학과를 다녔답니다. 그마저 생활고 때문에 불가능해지자 등록금이 면제되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셨대요. ‘목사님’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는 분이었어요. 날카롭고 지적인 스타일에 자존심도 강했죠. 동네에서 영자신문을 읽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간혹 근처 미군부대에서 영어 설교도 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유신체제 홍보 책자 같은 걸 보내오면 화를 내며 찢어버렸어요.”

-종교적 강압이랄까, 그런 것은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아버지는 합리적인 분이었어요. 방언(종교적 황홀경에 빠졌을 때 터져나오는 독특한 언어) 같은 것을 높이 치지도 않았구요.”

-생활은 안정적이었나요.

“개척교회 목사 수입이란 게 많지가 않아요. 어머니의 피아노 교습이 중요한 생활수단이었죠. 신도가 100명은 넘어야 겨우 먹고 살만하다던데, 우리 아버지는 꼭 그 때쯤 돌아가셨어요.”

-그게 언젠대요.

“1977년,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요.”

-학교는 어디서 다녔나요.

“전 계속 이쪽 동네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학교는 서울로 갔죠. 공항동 송정초등학교를 다니다 5학년 때 정동 덕수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중동중학교,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했구요.”

-일종의 유학인 셈인가요.

“집에서 버스 타고 다녔으니 그건 아니고…. 어쨌거나 좋은 학군 찾아간 건 맞지요.”

-공부를 잘했나봐요.

“덕수초등학교로 전학 간 첫 학기에 올 미(전과목 미)를 받았어요. 아버지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매를 맞았죠. 전 서울 애들 실력이 워낙 좋아선 줄 알았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나봐요. 중학교 1학년 들어가 첫 시험에 1등을 했고, 2학년 땐 좀 놀다, 3학년이 돼서는 얼굴에 버짐이 피도록 공부했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했나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 성문종합영어랑 1학년 수학을 다 뗐으니까요.”

‘에레베스트’와 ‘에베레스트’

-부친을 잃은 것이 한 계기가 됐겠군요.

“그랬죠. 1학년말에 돌아가셨으니까. 2학년 때는 충격 때문에 성적이 많이 떨어졌어요.”

-어쩌다 돌아가셨는데요.

“연탄가스를 마셨어요. 보통 그런 일을 당하면 2년 후쯤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랬죠. 그 2년 동안 사고 후유증으로 아버지나 식구들이나 고생이 많았어요. 뇌에 이상이 생겼는지 아무나 막 잡고 울고 방에 연탄화덕 피워놓고 문 잠그고. 때로는 폭력도 행사해, 내가 막 힘이 세져 막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했지요.

하지만 돌아가셨을 땐 굉장히 슬펐어요. 상실감도 컸구요. 저랑 아버지는 잘 맞았어요. 말이 통했죠. 뭘 자꾸 사주고 그런 분은 아니었는데, 고궁이고 공장이고 데리고 다니며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트럼펫 연주도 할 줄 아시고, 감각이 예민한 분이었죠. 아버지의 죽음이 제게 굉장한 자유와 해방을 주었다는 건 나중에야 생각한 일이에요.”

-책 읽기나 글 쓰기를 즐겼나요.

“책은 뭐, 큰누나가 읽던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것 좀 보고, 문고판 소설 읽고 그랬어요. 중3 때는 공부한답시고 영문판 소설도 봤구요. 글 쓰기는 싫어했어요. 학교에서 작문 숙제 내 주면 앞만 대강 쓰고 뒷부분은 여기저기 것 짜깁기해 베껴내곤 했어요.”

-중학교 때는 어떤 아이였나요.

“그냥 조용했어요. 근데 누가 틀린 말을 하면 그건 꼭 고쳐줬어요. ‘에레베스트가 아니라 에베레스트다, 잠수함을 움직이는 건 프로펠러가 아니라 스크루다’ 하는 식으로.”

-친한 친구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아, 한 명 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던 애 하나. 그 친구가 참 무던했거든요. 다 받아주고 이해해 주고. 근데 죽었어요, 몇 년 전에.”

-내가 좀 별난가보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저 별난 애 아니었어요. 특별하지도 않고, 남다른 재능도 없었구요.”

-남이 보는 나랑 내가 생각하는 나가 참 다르다, 그렇게는 생각지 않나요.

“그건 그런 것 같애요. (나는) 당연히 다 알 거라 생각하는 걸 남들이 모를 때 깜짝 놀라죠.”

-고등학교 때도 그저 얌전했나요.

“그 땐 완전히 달랐어요. 인생관이 바뀌었거든요. 범생이 생활 안 하겠다 마음먹었고, 일단 놀고 보자 생각했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너무 공부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학교 생물반에 들어갔는데 아주 골 때리는 서클이었어요. 깡패 짓 비슷하니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정학을 세 번 맞았는데 한 번은 폭행, 두 번은 흡연이었어요.”

-책은 뭘 읽었는데요.

“‘씨의 소리’ ‘해방 전후사의 인식’ ‘8억인과의 대화’ 같은 것들. 타임지에 난 DJ 기사를 구해다 친구들과 돌려보기도 했어요. 소설은 그 때부터 안 읽었어요. 사회과학서적에 판타지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죠.”

여기까지가 1982년 서울대에 입학하기까지 진중권이 걸어온 길이다.

 

유리잔처럼 無感한, 드러나지 않는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재미있는 게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할 때, 특히 글 쓰기를 업으로 삼는 경우 나름의 ‘구성’을 하게 마련이다. 묻지 않아도 가장 아팠던 일, 독특한 이력, 강렬한 체험 같은 것들이 말머리로 풀려 나온다. 과거를 자주 곱씹는 류의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진중권에게는 그런 게 없다. 묻는 말에 답할 뿐, 시간과 사건들은 같은 상자에 담긴 똑같은 모양의 유리잔처럼 무감(無感)하고 매끄럽다. 그러고 보니 그의 글에 간혹 등장하는 ‘체험’들은 대부분 공적인 것이었다. 사적 영역이라 해도 뭔가 공적인 문제의식을 자극하는 테마들이었다. 왜일까. 그만큼 정제된 인간이란 뜻인가, 아니면 ‘나’와 ‘상황’ 사이에 범부에겐 없는 어떤 미지의 완충막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그도 아닐진대 그저 말재주가 없을 뿐인가. 어쨌거나 그의 얼굴에선 친절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는 서울대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왜 하필 미학이었나요.

“이름이 예쁘잖아요. 누나한테 ‘김지하도 미학과 나왔다, 너도 잘 어울릴 거다’ 그런 말도 들었구요.”

-누나들 말을 잘 듣나봐요.

“우리 형제는 그렇게 친하지 않아요. 일년에 한두 번이나 볼까말까. 만나면 괜히 짜증나니까. 그저 그런대로 친한 친구 사이 정도라고나 할까요.”

-입학하자마자 시위부터 했겠군요.

“1학년 겨울방학 때까지는 조용했어요. 친구들이 뭐라 그러면 니체 갖고 딴지 걸구요, 시니컬하게. 그러다 친구 하나가 하도 권해서 ‘공산당선언’이랑 ‘정치경제학 원론’을 봤는데, 아 눈이 확 트이는 느낌이더라구요. 마치 세상을 엑스레이로 찍어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2학년이 되면서 지하 서클에 들어갔죠. 책 읽고 시위에도 참가했어요.”

-열성적인 편이었나요.

“그 때는… 운동 그 자체보다 지식에 끌렸던 것 같아요. 선배들이 참 똑똑하잖아요. 뭘 물어도 답이 척척 나오고. 저도 그렇게 되고 싶었어요. 영문판 ‘자본론’을 구해다 읽고 그랬죠. 근데 갈수록 고민되데요. 시위하고 감방 가고 현장 들어가고, 그게 어떤 공식 같은 거였는데 전 감방 갈 자신이 없었거든요. 상상도 못 했어요. 얘기 들어보니 주거환경이 상당히 안 좋더라구요(웃음). 제 미래, 그러니까 학문에 대한 꿈, 안락함, 어떤 가능성, 그런 것들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어요. 갈등이 클밖에요.”

-어떻게 해결했죠.

“결국 군대로 도망갔죠. 4학년 때요. 끝나면 현장이 아닌 대학원에 가겠다, 그래서 이론으로 봉사하겠다고 결심했어요.”

-비겁하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했죠. 그런데 전 뱅가드(전위·선봉)는 아니었거든요. 그저 선진적 대중, 그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거랑은 별 상관없는 얘기지만, 전 MT 가서도 남들 운동가 부를 때 빌리 조엘 노래 부르고 그랬어요.”

-튀고 싶었나요.

“아뇨, 정말 좋아하는 노래니까.”

-감옥과 현장을 피했다는 것이 어떤 열등 의식으로 자리하고 있진 않나요.

“그런 건 없어요. 회색이었던 친구들이 지구전에는 오히려 강하잖아요. 아주 열심이었던 사람은 확 피었다 가라앉고. 일종의 역할 분담이라 생각해요.”

-대학 때는 뭘 잘했나요.

“어학이요. 대학원 다니면서는 영어, 독어, 불어, 일어, 러시아어를 했어요. 몇 개는 능통한 편이었고 나머지도 읽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죠.”

-군대 생활을 어땠어요?

“마초가 다 됐죠. 욕이 막 나오고. 처음 3일 동안은 아주 죽겠더니 곧 적응이 되더라구요. 거기서 ‘현장’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어요.

군대 가서 인간이 얼마나 드러운가를 알게 됐어요. 김치 쪼가리 갖고 싸우잖아요. 뭐 먹을 거 사면 절대 안 나눠주거든요. 첨 훈련받을 때 전 빵을 사면 옆의 놈한테 꼭 나눠줬는데, 제 돈 다 떨어지고 나니 그 친구는 자기 돈으로 빵 사 먹으면서 나한테 한 번도 안주더라구요(웃음).”

견딜 수 없는 것, 무식·타락·촌티

-그러고 보니 그 때쯤 운동 진영에 NL(민족해방)이니 PD(민중민주)니 하는 갈림이 생겨나기 시작했겠군요.

“복무중 한 여학생을 소개받았는데 김일성 신년사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거예요. 무슨 종교집단도 아니고. 또 막 대학 들어간 동생이 제게 ‘김일성장군항일무투사’라는 책을 내밀며 이제 토론할 때는 형제끼리도 존댓말을 쓰자 하데요. 너나 하라 그랬죠.”

대학 시절 정통 마르크시즘과 독일 고전 철학에 대한 폭넓은 교양을 쌓은 그에게 민족, 품성, 신심을 강조하는 NL의 주장이 먹혀들 리 없었다. 대신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소련식 사회주의, 그러니까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습에 몰두했다. PD 라인이 된 것이다.

“교조적이었죠. 일종의 강령이니까요. 하지만 그 때는 그런 게 중요치 않았어요. ‘운동’을 해야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에 사회주의 혁명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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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밖에 내지는 못했죠. 조직에서 전 하나의 톱니바퀴일 뿐인데요. 아닌 것 같은데 안 갈 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할 수 없이 끌려가는….”

결국 그는 가지 않은 NL의 길은 물론 PD의 노선에조차 완전히 설복되지 못했다. 1999년 3월 그가 ‘당대비평’ 봄호에 기고한 글 ‘지배의 언어, 탈주의 언어’는 그의 대학원 시절 문제의식에 대한 언어철학적 자기해답서다. 그는 이 글에서 두 진영의 인식을 ‘맹목적 추종’(NL)과 ‘맹목적 거부’(PD)라며 거세게 질타했다. 특히 NL에 대해서는 ‘시대의 변화에 초연한 영원한 언어’를 쓴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과학적 논리가 아닌 눈물, 감동, 품성 등 봉건적 언어를 통해 ‘불패의 신화’를 만들고, ‘남한의 식민지성’ 등 비과학적 현상을 ‘증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사실 이 정도 비판은 점잖은 것이다. 다른 글에서 그는 NL에 대해 ‘윤리적으로 타락했고, 지적으로 무식하며, 미적으로 촌스러운 수구반동의 무리’라는 표현을 쓰길 주저하지 않았다. ‘타락했고 무식하고 촌스럽다’는 것은 그가 ‘극우’들에게 자주 던지는 말이다. 그가 보기에 ‘북한체제의 냄새가 나는’ 일부 운동권이나 극우 보수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거기서 거기였을 것이다. 여기서 그를 결정적으로 짜증나게 한 것은 ‘북한’ 체제의 냄새가 아니라 북한 ‘체제’의 냄새였던 듯하다.

-원래 비이성적인 걸 못 참나요.

“골상학으로 유명한 분이 저에 대해 ‘좌뇌가 특히 발달한 경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좌뇌는 논리뇌라고 하잖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전 이해가 안 가는 건 절대 받아들이질 못해요.”

그는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에서 일하며, 하루 두 탕씩 과외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매달 250만원을 벌어 집안 살림을 꾸리고 등록금도 해결했다.

1990년 사회주의권이 붕괴했다.

-다들 충격이 컸죠.

“한 종교로 화한 사회주의에 대해 현실적 검증이 이루어진 거죠. 더 이상 ‘마르크스 가라사대’가 논거가 될 수 없는 상황. 더불어 주변 세상의 변화를 보며 새 답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어요.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쯤엔 못 사는 애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데 대학원 다닐 때쯤, 그러니까 1992년쯤 입학한 애들을 보니 웬만하면 부모가 다 ‘사’자예요. 어느 날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 뭐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되묻더라구요. ‘왜요?’ 상당한 충격을 받았죠. 계급성이라는 것을 느꼈고, 아, 이제 평등의 가치조차 논증을 해야 하는 시대가 왔구나, 확실히 깨달았죠.”

“다시 태어난다면 유럽인 되고 싶다”

소련의 ‘구조기호론적 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새 답’을 찾고자 독일 유학을 계획했다. 독일 정부가 주관하는 장학생 시험을 쳐 1등으로 합격했다. 그런데 막상 베를린에 도착해 보니 그가 점찍었던 교수는 이미 딴 대학으로 가버린 뒤였다. 그로 인해 장학금까지 취소돼 곤란을 겪을 즈음, 저서 ‘미학 오디세이’의 고료가 도착했다. 1990년대 중·후반 ‘책 좀 읽는다는 고등학생은 한 권씩 다 끼고 다닌’ 이 책으로 인해 그의 독일체류는 비교적 평탄했다. 유학 생활을 힘들게 하는 건 돈 문제와 학위 취득인데 그는 이 두 주제로부터 모두 자유로웠던 것이다.

-왜 박사학위를 포기했나요.

“모교에 자리잡을 수 없으리라는 건 유학 전부터 알았고, 어디 딴 데 낑겨 살기도 어렵다는 걸 알았고. 그러니 학위가 중요하지 않았죠. 논문은 그저 쓸 수 있으면 쓰겠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처음 3년은 그냥 놀았어요. 전세계에서 몰려온 애들하고. 걔들이랑 어울리면서 우리 인성이, 삶의 방식이 참 잘못됐다는 걸 알았죠.

우리나라 사람은 외국인을 만나면 먼저 그의 국적, 그 나라의 국민총생산 같은 것을 궁금해하잖아요. 그게 인간 관계를 심각하게 저해하거든요. 또 길에서 한국 차라도 한 대 보면 왜 그렇게 감동하는지. 외국에 오래 살수록 그런 민족주의적 호들갑은 더 심해져요. 전 그런 게 싫거든요.”

-차이 찾기에 능한 것 같네요.

“그런 편이죠. 어쨌든 유럽은 복 받은 땅이에요. 사소하게 피해 끼치는 일들을 거의 하지 않잖아요. 보장제도 탄탄해 사회가 잔인하지 않고, 멘탈리티에 있어서도 우리가 근대적이라면 오히려 그 쪽은 탈근대적인 동시에 전근대적이에요. 다시 태어난다면 전 유럽인이 되고 싶어요.”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연구했다.

-품고 갔던 문제의 답은 찾았나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글들에 보면 자주 언급되는 세 학자가 있는데요,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발터 벤야민이죠? 그들이 바로 답인가요.

“마르크스의 사회분석 틀·정치론·평등의 가치, 비트겐슈타인이 던진 언어철학을 통한 모던-포스트모던 간 대립 극복의 가능성, 발터 벤야민의 감성과 예술적 영감, 그 셋의 결합이지요.”

 

 

마르크스·벤야민·비트겐슈타인

 

-벤야민은 특히 당신의 글 쓰는 자세, 문제 의식, 어법과 접근 방법 등에 총체적 영향을 끼친 것 같은데요.

“그의 글을 읽다 어느 순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게 됐어요. 일종의 ‘다락방 체험’ 같은 거죠. 같이할 수 없는 것들이 모여있는 곳, 가족이 짜증날 때 숨어 들어가는 곳이 다락방이잖아요. 벤야민에게는 그것이 유대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와 깊이 연결돼 있는 건데, 저도 그 비슷한 기억이 있었던 거죠. 구약성서적 이야기들, 상징으로 가득한 종교적 세계. 또한 그는 스타일리스트여서, 비평이란 단순히 텍스트가 아닌 쓰여지지 않은 것들을 읽는 것이라는 걸 알게 해줬어요.”

-바로 그 ‘스타일’ 때문에 당신은 종종 공격당하죠.

“스타일을 타깃 삼는 건 옳지 않아요. 스타일은 곧 그 사람이죠. 현실적 문제들은 거기 접근하는 데에 특정한 철학적 스타일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스타일이란 그저 글의 바깥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진리가 있다는 뜻이에요. 소크라테스가 결코 글을 쓰지 않은 것은 그의 진리는 오직 장바닥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드러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논리, 실천을 공격하는 것과 그의 스타일, 인격을 공격하는 것은 층위가 전혀 달라요.”

그에게 스타일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어떤 대우주도 파괴할 수 없는 소우주의 절대적 권리’인 듯하다. ‘스타일의 독재’를, 그래서 그는 경멸해 마지않는다.

-근데 이상하죠. 당신을 비판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당신이야말로 ‘인격 모독형’ 공격을 한다고 주장하거든요.

“아니요. 전 욕을 하지 않아요. 조롱하고 짜증나게 할 뿐이죠. 설득도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머리가 컸으면 이제 꼬신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그런 글을 쓰는 목적은 공격의 대상을 ‘계도’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읽는 이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서죠. 보세요, 절 그렇게 많은 이들이 비난하지만 지금껏 고소고발 한번 당한 적 없잖아요.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인데 아무리 읽어봐도 걸 것이 없거든요. 저는 비꼬고 되받아칠 뿐 위험한 ‘인물론’은 펴지 않습니다. 사람은 변화하는 존재인데 그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고 칼을 들이대겠어요.”

-음…, 이 부분은 뒤에 다시 얘기하구요, 당신이 일반적 글쓰기에서 비트겐슈타인에 기대고 있는 바 또한 분명한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말이죠. ‘철학적 문제는 문법적 착각의 문제다’.

“이데올로기도 문법적 착각의 문제죠. 예컨대 자유라는 말을 보세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칭하는 공병호씨 같은 사람은 사실 ‘자유지상주의자’죠.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란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무제한적 영업의 자유예요. 그래서 그 자유라는 말로 재벌을 옹호할 수 있는 겁니다. 극우파가 말하는 자유의 반대말이 ‘억압’이 아니라 ‘무질서’인 것도 같은 맥락이구요.

물론 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렇다면 ‘민주’는 뭔가요. 평등의 이념이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따르는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가 서로를 보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완전한 평등을 얘기하지 않되 평등의 이념을 정의(=분배정의)라는 개념을 빌려 제시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자유주의자란 복거일씨나 공병호씨가 아니라 고종석씨인 거죠.”

-그렇다면 마르크시즘에서 살아 남은 것은 오직 방법론과 ‘평등’뿐인가요.

“아니죠. 마르크스는 70% 이상 옳았어요. 그걸 버릴 순 없죠. 제 목표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바탕한 좌파 이론을 정립하는 거예요. 그를 통해 마르크스의 철학을 제대로 논증하는 것이죠.”

-중세시대 ‘신 존재 증명’ 처럼요.

“네, 바로 그것처럼.”

-결혼은 언제 했나요?

“독일에 간 게 1994년 5월이었고 결혼은 1997년에 했어요. 같은 아파트에 살던 유학생이랑요. 자꾸 같이 밥을 해먹다보니 정이 들어서요. 그냥 쭉 동거할 참이었는데 아이가 들어서고 보니 의료보험 혜택이 안되더라구요.”

 

 

열렬한 사랑이었나요.

“우린 그냥 친구 같아요. 전 인생에 큰 기대가 없어요. 행복해질 거란 환상도 없구요.”

그는 1999년 9월에 귀국했다. 그 전에 이미 그는 ‘스타’가 돼 있었다.

진중권이 우리 사회에 본격 등장한 것은 1998년 8월이다. 그 전에도 ‘미학 오디세이’ ‘춤추는 죽음’ 등의 책 발간, ‘문학동네’ 계간 ‘인물과 사상’ 등에 기고한 글들로 꽤 주목을 받았지만 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책은 정치풍자집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다. 책 제목은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씨가 조선일보에 연재중이던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패러디한 것. 그의 날카로운 텍스트 비평, 절묘한 풍자, 글 쓴 이의 논리와 레토릭으로 바로 그를 공박하는 세련된 되받아치기는 실로 우리 지식계가 그제껏 보여주지 못한 무엇이었다. 이 책으로 인해 그는 ‘극우 사냥꾼’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단번에 ‘범 진보진영’의 대표 논객으로 급부상했다.

철학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

-그리고 한 3년 무척 바빴죠.

“2년은 안티조선운동에 매달렸고 1년은 진보정당 편에 섰죠.”

-그 때 ‘조독마(조선일보독자마당)’에서 당신이 벌이는 활동을 보며 혀를 내두르는 사람이 많았어요.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지독하게 싸우냐구요.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가 전투를 치르는 것이 불편하고 괴롭지 않던가요.

“해야 할 일이니까요. 이데올로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어요. 신문 칼럼이나 논문 같은 건 담론이고, 술 먹으면서 그냥 떠드는 게 세론이죠. 담론에서는 누구나 격조를 지키지만 세론은 다릅니다. 본성, 이드가 나오지요. 지금 인터넷이라는 것을 통해 세론이 공개되고 있어요. 세론에는 ‘습속’이라는 것이 녹아 있죠. 몸 속 깊이 박힌 것들. 그걸 그때그때 꼬집어 바로잡지 않으면 자신조차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게 됩니다. 점잖은 얘기만 한다고 파시즘적 이데올로기가 세척되는 것은 아니에요.”

-이론 정립과 정치 활동 사이에는 뭐가 있나요.

“이전에는 그 둘을 전혀 다른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데리다의 ‘법의 힘’을 읽다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마르크스를 처음 만나던 순간의 충격에 비견되는 것이었죠. ‘법의 힘’이라니, 제목만 보면 무슨 법철학서 같잖아요. 아니에요. ‘법의 힘’은 독일의 헌법체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과 독일의 법 정신, 헌법 체계는 전혀 다르죠. 아, 철학이 이렇게 현실에 발언할 수도 있는 거구나. (철학은) 이렇게 써먹어야 되는구나.”

그래서 그는 저서 ‘폭력과 상스러움’의 후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철학으로써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을 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든 것이 너무 ‘고상하고 정신적’이어서 역겨운 시대에 철학은 광대가 되어 지저분한 장바닥에서 질펀하게 쌈박질을 하며 노는 게 낫다. … 이 평범함의 시대에 숭고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아마도 ‘희극적 숭고’, 즉 스스로 바보-광대가 되는 것뿐이리라.’

-지금 당신의 적은 누구이며 동지는 누구인가요.

“적이니 동지니 하는 개념은 낡은 거예요. 비유적 의미로나 쓰는 거지. 보수·진보·중도가 있다면 다 자기만의 맹점을 갖고 있죠. 하나의 입장이 절대적 진리일 수는 없어요. 내가 못 보는 걸 상대는 볼 수 있거든요. 그러니 싸우긴 왜 싸워요.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전쟁적 사고방식은 버려야죠.”

-하지만 요즘 당신이 진보누리(www. jinbonuri.com ; 진보정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적어 올리는 글들을 보면 민주당과 그 지지층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느낌도 드는데요.

“아니지요. 그건 말 그대로 논쟁이에요. 그리고 ‘진보누리’는 대중을 상대로 한 매체가 아니라 민노당원과 그에 관심 있는 자들의 ‘놀이터’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민주당과 관련한 발언에 열심인 것은 지금이 전선을 만들 때이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은 이미 5년을 집권했어요. 노대통령을 보세요. 벌써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잖아요. 이라크전 파병, 새만금 문제, 미국 방문 때의 망언. 상황이 이 정도면 이젠 깰 때도 됐다는 거죠.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 뭐 그리 큰 차이가 있습니까. 안고 있는 결정적 문제가 같고 돈 받아먹는 구조가 같은데요.

이미 민주당을 옹호하던 논객들은 거의 망가지지 않았나요. 강준만 교수는 파병이나 새만금 문제가 불거진 초기,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고(나중에야 동참했지만) 이젠 구주류에 ‘붙은’ 혐의가 짙습니다. 김동민 교수는 SBS의 사외이사가 됐으며, 유시민 의원은 현실 정치인입니다. 노혜경 시인은 아예 오빠부대 수준이죠. 지식인이라면 모름지기 비판적 거리를 둘줄 알아야 해요. 한편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경선 후 전방위 공격을 받아 흔들릴 때 언론에 나서 누가 그를 적극 옹호했나요. 저와 유시민씨였어요. 어쨌든 이제 민주당 논객들은 진보로서의 명분을 상당부분 상실했습니다. 당파성이 남은 것뿐이죠. 물론 이 모든 것이 개인적 문제라기보다 객관적 상황 자체가 확 바뀐 것에 가장 큰 원인이 있겠죠.”

전략가 대 인문주의자?

 

-당신에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의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예를 들면 ‘시민사회의 상식’보다 민노당의 당파성을 우위에 두고 있다는.

“전 민노당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습니다. 할 말은 하지요. 전교조도 비판하고 당 지도부도 비판해요. 또 민노당의 당파성이라는 것이 과연 시민사회의 상식을 배반하는 것일까요. 강령이라고 해봐야 ‘서민대중의 정당’ 수준인데요. 지금이 20:80의 사회라면 우리는 그 80을 대변하겠다는 거거든요.”

-하지만 논객으로서의 진중권과 민노당원으로서의 진중권을 구분해 달라는 것까진 좀 과한 요구 아닌가요.

“그게 당연하지 왜 과해요. 제가 신문에 칼럼 쓸 때랑 민노당 기관지에 글 쓸 때랑은 전제 자체가 다른 겁니다. 글이 실릴 매체의 성격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은 기본적인 자세지요. 글쟁이가 문체가 하나라면 그야말로 치명적 약점 아닌가요. 그런데 인터넷 게시판이나 기관지에 쓴 글을 가지고 신문 칼럼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비판하는 건 문제가 있지요.

또 민노당은 사회당이나 민주당에 ‘상황이 이러하니 후보에서 사퇴하라’ 그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 때 민노당 사이트는 ‘권영길 사퇴하라’는 민주당 추종자들의 사이버 테러로 초토화됐어요. 다른 당에 대해 ‘연대하자’는 제안을 하는 거랑 후보를 내라, 내지 마라 충고하는 건 얘기가 전혀 다르죠.”

서울시장 선거를 중심으로 지난해 봄~여름 진보진영을 뜨겁게 달군 ‘강(준만)-진(중권)’ 논쟁에 대해서는 긴 얘기 하지 말자. 분명한 것은, 진중권이 그의 안티조선 시절 혹은 ‘아웃사이더’ 시절 동료들과 적어도 당파적으로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진중권이 “나와 생각이 비슷하다”고 아직 말하는 이는 출판인 김규항씨와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홍세화씨뿐이다.

그들 사이에 세워진 벽은 여러 구구한 담론에도 불구하고 결국 특정 당을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이다. “지금 현실에선 민주당도 진보”라는 입장과 “민주당은 끝났다, 이제 진짜 진보를 하자”는 쪽의 대립이다. 어찌 보면 전략가 대 인문주의자(혹은 윤리적 이상주의자)의 피할 길 없는 시각 차다.

“그 사진은 쓰지 말았어야 했다”

진중권의 원칙론적 자세는 이외에도 곳곳의 진영에서 격렬한 논쟁의 씨앗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진중권은 미군에 의해 살해된 윤금이 씨 사진을 수업에 사용하는 일부 전교조 교사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미순·효순양 사진을 시위에 사용한 여중생범대위도 마찬가지다.

‘이미 영혼이 떠난 몸, 막 내보여도 된다는 말일까? 그 사진은 두 소녀의 영혼을 무시하고 그들을 한낱 ‘살덩어리’로 격하하고 있었다. …소녀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사고를 낸 미군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보다 덜 중요한 목적일까?’

또한 이미 그는 이전의 한 글에서 치밀한 논증을 통해 ‘운동권 ‘열사문화’의 변태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니 진중권에게 도저히 못 참을 것은 정치적 견해차가 아니라, ‘대의’를 위해 희생되도 좋은 인권은 없다는 나름의 원칙이 훼손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힘의 맹목적 찬미, 이게 좌우익 파시즘’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같은 이유로 그는 오마이뉴스를 비판한다. 조선일보를 닮아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언론이 사설이나 사고를 통해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수는 있지만, 지면을 도배해가며 노골적인 선거운동을 하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요. 또 맘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기사를 활용해 적극 비난하구요. 권언유착은 어떤가요. 기사로 정치 하는 것은요. 지금 오마이뉴스가 참여정부와 친하지 않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타협이나 공조의 폭이 지나치게 좁아질텐데요.

“그렇긴 하죠. 저도 민주당 쪽을 공격하면서 독자의 2/3가 떨어져나갔는걸요. 글 팔아먹고 사는 이에게는 치명적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해요. 옳은 길이 명백한데 차악을 선택하고 미신(지역을 버려선 안 된다, 지방선거는 대선의 전초전이다 등)을 추종하는 건 안 될 일이죠.”

-‘내가 옳다’는 확신은 어디서 옵니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죠. 제가 무슨 신탁이라도 받나요. 하지만 제가 옳지 않으면 비판을 해야지요. 그 비판에 논리적 정합성과 정확한 논거가 갖추어져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제대로 된 반박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비난만 하는 거예요. 반박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죠.”

사민주의·녹색당·아나키

 

-텍스트를 대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텍스트를 읽을 때는 기본적으로 ‘호의의 원칙’에 입각해야 합니다. 되도록 그게 다 말이 되게 엮어 호의적으로 해석해야 하죠. 그럼에도 뭔가 문제가 툭 튀어나오면 비로소 비판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텍스트 밖으로 나가 더 멀리, 더 정교하게 한 논객을 비판할 거면 그가 쓴 글을 되도록 많이, 성심성의껏 찾아 읽어야죠. 그렇지 않으면 강준만 교수가 인물 하나를 정해 완전히 초토화하는 식으로, 대상을 일종의 ‘판오디콘(원형감옥)’에 가둬버리는 꼴이 돼요. 말 하나 따서 비판하면 안 됩니다. 악의적이잖아요.”

-좌파이기 이전에 개인주의자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보다는 차라리 공동체주의자지요. 예를 들어 월드컵 응원물결 같은 건 허구의 공동체입니다. 제대로 된 공동체는 (패거리주의에서) 해방된 개인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유의미한 연대를 맺는 거죠.”

-그렇다면 자유주의는 뭔가요.

“그 모든 것의 전제입니다. 목적이 아니라요.”

-결국 사민주의적 사고가 뿌리내리기를 원하는 건가요.

“그렇죠. 우리나라처럼 ‘괴상한 집단주의’와 ‘천박한 이기주의’가 모순적으로 결합된 아수라에서는 개인의 해방이 무엇보다 급하니까요.”

-사실은 아나키스트 아닌가요.

짤막한 답변이 이어졌지만 그가 7월7일 오전 8시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린 글을 인용하는 것이 낫겠다.

“굳이 밝히자면 제 주관적 사상은 외려 녹색당+아나키에 가깝지만(이것이 내가 거울 뒤에 감추어놓은 난쟁이죠), 그건 제 주관적 소망이고, 그 소망에 내재된 가치를 조금이라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도, 즉 우리가 현 실정에서 내걸 수 있는 최대의 정치적 목적은 사민주의 정도가 적합하다고 봅니다.”

-서울시장 선거 때는 민노당 이문옥 후보의 사이버 대변인으로 뛰었는데, 대선 때는 왜 권영길 후보 진영에서 뛰지 않았나요.

“지방선거는 당과 당의 싸움이라기보다 지역 일꾼을 뽑는 것이죠. 그래서 당 공천이란 걸 아예 없애자는 얘기까지 나왔잖아요. 하지만 대선 공간은 명백히 현실 정치예요. 당파성과 당파성이 맞부딪치는 공간이죠. 제가 거기 뛰어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는 누구를 밀어주기 위해 글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에 부합하고, 논리적으로 정합하며,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지만 들어야만 하는 옳은 얘기를 하려고 글을 씁니다. 그 글이 우연히 누구를 밀어주게 되느냐는 별 관심 없습니다. 그건 제 글 쓰기의 목적이 아니라 우연적 결과에 불과하니까요.”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논리에 감명받는 스타일이지요.

“그래선지 누가 저를 막 공격해도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아요. 보통 저에 대한 공격은 세 가지거든요. 싸가지 없다, 애정이 없다, 기분 나쁘다. 어떤 것도 절 논리적으로 감동시키지 못하죠. 그러니 흥분도 되지 않을 밖에요.”

“그들에게 체류형을 내리노라”

-다른 사람을 감정적으로 공격하는 편은 아닌가요.

“아니요. 전 욕 같은 거 안 하거든요. 예의 바르게 써요. 인신공격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인신공격이란 뭐냐, 인간성이 후지다, 그러는 거예요. 그의 글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영혼, 인격을 공격하는 거. 많은 사람들은 논쟁의 방법을 몰라요. 화내고 때리는 건 논쟁이 아닙니다. 흥분하면 곧 지는 거예요.”

-‘인신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데에는 반론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매체가 어디냐, 대거리의 성격이 어떠냐, 말 되돌려주기 식의 풍자냐 아니면 맥락 없이 성격 물고 늘어지기냐, 그런 것들을 봐야지요. 예를 들어 사이트에 올려진 쪽글, 공개된 글이지만 ‘공적’ 글은 아닌 것들을 여기저기서 긁어와, 마음대로 짜깁기해 공격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더러 논쟁의 정도에도 어긋나죠.”

요즘 진중권이 주로 활동하는 사이트는 ‘진보누리’다. 그는 이곳에 거의 매일 새 글을 올린다. 그때마다 수십 개의 댓글이 올라오는 북새통이 벌어진다. 그는 개중 답할 가치가 있다 싶은 비판이 올라오면 지체없이 뛰어들어가 반론을 편다. 그를 씹는 글은 대충 반말이고 그에 대한 진중권의 댓글은 존댓말이다. 용어도 그리 과격하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의 글이 감정을 심히, 못 견딜 만큼 상하게 만든다고 화를 낸다. 이유가 뭘까.

“논리적 허점을 찾기 힘드니까요. 또 원래 풍자라는 게 사람을 무척 짜증나게 하거든요. 하지만 ‘대책 없음’으로 인한 분노까지 제가 고려해야 할 이유는 없는 거죠. 근데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상대가 하는 말이 기본적으로 웃기지 않으면 풍자도 잘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제 글이 재미있으면 재미있을수록 상대는 속이 아픈 거죠.”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건 그의 논리가 아니라 말하는 방식 아닐까. 이에 대해 진중권은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끌어들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노페의 시민들이 그에게 추방형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럼 나는 그들에게 체류형을 내리노라.’”

 

사실 진중권은 견유주의(기성의 풍습이나 세론, 사회 도덕 따위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인생관이나 생활 태도)의 시조랄 수 있는 디오게네스에 비하면 ‘개(犬)’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 그러기엔 지적인 것, 아름다운 것, 윤리적인 것을 너무 사랑한다. 함에도 그는 디오게네스에게 최고의 찬사를 바친다. ‘최초의 자유사상가, 최초의 세계시민, 최초의 변증법적 유물론자, 최초의 사회주의자, 최초의 실존주의자, 최초의 행위예술가, 대왕이 부러워한 개새끼, 디오게네스. 위대한 영혼.’

어쩌면 그는 무엇보다 그 ‘위대한 영혼’에 가까이 가고픈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누군가를 코너로 몰 때 마지막 한 구멍을 열어두는 건 대략 두 이유 때문이죠. 측은지심과 두려움. 당신은 그런 게 없나요.

“왜 틈을 주죠? 근거 없이 봐주는 순간 그건 ‘정치적 판단’이 되는데요. 고립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원체 인간관계라 할 만한 것도 없구요. 하지만 그 때문에 공적 관계를 망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쓸데없이 사적 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문제예요. 사적 조직이 갑자기 시도때도 없이 공적 영역으로 치고 들어오잖아요.”

언젠가 그는 한 에세이에서 대략 이런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보헤미안의 십계명이 있다. 대충 ‘부모 보기를 우습게 알고, 형제 보기를 개떡으로 알며, 친구 배반하기를 밥 먹듯 하라’, 뭐 이런 내용이다. 대책 안 서는 망나니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망이 답답한 구속으로 작용하는 시대에, 그를 대체할 새 관계 유형을 만들어내려면 과감히 ‘개새끼’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이란 사회에서 보헤미안 흉내를 내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욕 먹는 것은 사실 별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짓 했다가 남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데 있다.’

이러니 그에게 “당신은 ‘관계의 감수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대놓고 핀잔주기도 사실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욕망이 당신을 이끌어가죠.

“그저 지금 하는 일을 잘하고 싶어요. 글 쓰는 거요. 글 자체의 완성도가 높을 때,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아요.”

-명예욕은요.

“제게 명예욕이란 ‘욕을 먹지만 나는 지킬 것을 지켰다’, 그거예요. 다른 사람의 판단이란 것은 결국 정치적이라는 걸 아니까요. 진실이나 본질은 언젠가 밝혀진다고 생각해요. 당장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고 나면 밝혀지는 신뢰, 그런 것들을 쌓아가는 게 저의 명예지요.”

-궁극적인 목표는 뭘까요.

“학문적 난제에 독창적 해법을 제시하는 책을 쓰는 거요. 세계에서 500명만 읽어도 좋은.”

-그렇다면 지금의 생활이 소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군요.

“전 조급하지 않아요. 이것도 가치 있는 일이니. 소모전을 해야 진보도 있는 거지요. 언젠가 둘째누나가 그러더라구요. 미친 짓도 10년 하면 인정받는다구요. 저 최소한 10년은 미칠 작정입니다.”

그 아이, 앙겔루스 노부스

-종교가 있나요.

“교회에 다니죠.”

-평소 이미지와 쉬 연결이 안 되네요. 우리가 흔히 ‘교조적’이라고 할 때, 거기엔 종교의 맹목성에 대한 불신 같은 것이 깃들여 있는데요.

“전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굉장히 합리적인 기독교 교육을 받았어요. 설교는 일종의 해석학이며, 불교건 기독교건 이슬람교건 그것이 세계 종교라면 안심하고 믿어도 좋다고 생각해요. 취향에 따라서는 소수 종교를 믿을 수도 있구요. 제 장인어른이 대처승인걸요. 제가 종교에서 가치 있게 생각하는 건 어떤 보편적 신성입니다. 또 믿음, 소망, 사랑 같은 것들이요. 오히려 전 ‘정치’ 가지고 ‘종교’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종교적 욕구는 교회 가서 해소하시고 정치는 맨 정신으로 하라구요.”

-당신은 종교에서 무엇을 얻나요.

“판단이 안 설 때, 개입하고 발언하는 게 옳다 싶지만 불안할 때 시편 23편을 떠올려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람마다 나름의 존재미학이 있다면 제겐 신앙이 그 한 뿌리인 거죠.”

진중권과의 긴 대화가 끝났다. 무척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그는 아직 미지의 사람이다. 왜 그의 눈에선 감정을 발견할 수 없는지, 공감하는 바가 있는데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는지, 무리에 섞여 같이 웃고 우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든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빈 골목, 부신 햇살 아래 혼자 소꿉놀이하는 그 아이는 누구인가.

돌아와 다시 그의 책 ‘앙겔루스 노부스’를 읽는다. 마지막 장, 파울 클레의 그림 ‘앙겔루스 노부스(新天使)’를 소재 삼은 글이다. 그는 클레의 그림을 통해 ‘파라다이스의 들뜬 희망을 참담한 좌절감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80년대 우리들의 슬픈 경험을 처리하려 한다’고 적고 있다.

‘…날개를 펴고 뒤로 밀려 날아가는 신천사처럼 우리의 저항도 우리를 파라다이스에 가까이 가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후진성은 우리를 끝없는 절망에 빠뜨리며 우리 발 앞에 새로운 파국의 폐허를 던져놓을 것이다. 바로 이 위험의 순간에 나는 현재를 구원하고자 “죽은 자들을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다시 한데 모으고” 싶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이 눈에 확 들어온다.

‘저 한 장의 그림은 …나와 존재론적 닮기의 놀이를 하기 원하며 그 슬픈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체, 무력하게 머리만 자란 또 하나의 멜랑콜리커(우울한 기질을 가진 자)다.’

앙겔루스 노부스. 그 아이가 거기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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