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이름 검색
오늘 여기 진보넷에 글을 쓰려고 들어왔는데, 싸이 검색어에 내 이름이 순위로 올라와 있었다.
김복실' (예를들면) 이런식으로. 죄진사람처럼 깜짝 놀랐다.
물론 그 검색어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축구선수이거나 아님 무슨 창의력전문가 인것
같은데 기왕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가 잠깐 검색해 보게되었다.
청담동 쇼룸 실장, 축구선수, 중학생 , 트롯가수 , 쎄시 표지모델, 나훈아 부인,
ktx부산열차승무지부장, 코 성형 재수술을 하고 싶은(?)이 등등...
기표와 기의의 관계처럼 나의 이름은 나와 달리 지극히 평범하고 여성스런이름으로
중학교때는 나 외에 성말고 이름이 같은 이들이 도합 5명이었다. 그들사이에 별다른
관련성은 없었고 다만 그중에 한 아이 때문에 유독 약간 드세고 자신만만한 이미지처럼
내 이름이 기억되기도 한다. 내 이름을 남의 이미지로 각인하다니 참 우스운 일이지만
내 이름을 누가 부르면 난 흠칫놀란다. 이 이름을 가진 병신과 머저리라는 소설에 나오는
여자처럼 청아하고 남자에게 미련을 남길것 같은 예민하고 복잡한 이미지
역시 나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안에서 내 본질을 약간 숨길수 있다는 점이 반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청아하고 아련한듯한 느낌을 주는 내 이름때문에 상대에게 경계를 풀
고 나에게 자신을 드러내게끔 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고보니 정작 내가 생각하는. 내가 만들고 싶은 나란 사람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란 인간이 형체라는 것이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2. 신림동
의외로 이동네 살기가 좋다.
신림2동은 조용하고 깨끗하고 치안도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
조용한 원룸에 저렴하고 신선한 생과일주스 전문점
모든것이 갖춰져있는 생필품 할인점.
돈만있으면 뭐든지 할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 뜨악하기는 했지만
나도 어제만큼은 내 마음에드는 귀여운 그림이 그려진
연두색의 쟁반과 일본우동집에서 쓸것같은 반짝거리는 단아한 우동그릇을 사며
왠지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리는 것 같은 산뜻하고 포근한 기분을 맛보았다.
아무걸로나 마시고, 아무걸로나 먹고 그렇게 살았었던 시절도 있었다.
냄비하나로 국을 끓인다음 그걸 그릇에 옮기고 거기에 다시 밥을 지었다.
생필품은 디자인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싼것을 사고 빨래건조대 사는
돈이 아까워서 방바닥에 빨래를 널었다. 교과서는 중고시장에서 뒤질만큼
뒤지고나서 정 없으면 새 것을 사고 그랬다. 여름에는 티셔츠 두장 겨울에는
90년대에나 입을것 같은 똑같은 떡볶이 모양코트 이렇게 지냈었다.
어리고 기운좋았던 시절에는 11월에도 반팔을 입었다. 파마하는
돈 몇만원이 아까워 5년동안 파마 염색같은건 한번도 한적 없고
생머리를 고수했다. 심지어 잘 자르지도 않았다.
안경테는 무조건 제일싼걸로 브랜드 가방은 너무 아까워서
학교 뒤 보세에서 별로 더 싸지도 않은 책가방 그나마 제일 싸다 싶어서 샀는데
일주일 지나서 찢어지는 일이 매번이었다. 혹시 몇천원짜리 귀걸이를 사면 벌벌떨었다.
내가 가난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등록금때문에 타박은 들었지만 어떻게 마련할지
고뇌한적 없고 부모님이 내줬으니 참으로 배부른 형편이었다. 그런데 나는 등록금없어서
대출받는 친구들보다 더 안꾸미고 구지레하게 살았다. 나와 비슷한 형편인 친구들은 더
많이 투자하고 더 많이 벌어서 그만큼 누리고 살기위해 지금도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다.
진짜 없어서 절박하게 내몰려서 그렇게 소박(?)하게 산것도 아니니 자랑할것도 아니고
그렇게 안살고 싶고 용돈이 부족하면 알바를 할수 있었으니 그건 자신의 선택이고
스타일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그렇게 살면서 은연중에 내가
히피처럼 물질에 신경쓰지않고 소박하면서도 정신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인것
처럼 행동했다. 진짜 가난해본적이 없었으니 그렇게 행동하는 자태는 나름대로 편안하고
멋스럽게까지 스스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면서 친구를 만날때는 밥값도 잘 내고
잘 베풀면서 나자신은 남에게 잘 베풀고 나는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아량이 넓은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 인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내가 없으면 조급해
하는 사람이고 남이 돈낼때 내가 못내면 자존심상해하는 사람이고 ktx탈 돈이 없어서 무궁
화호를 타는 것을 항상 낭만만으로 여길만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세월지나
면서 점점 알게 되었다.
그때는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내 삶이 빛나던
순수하고 한편으로는 비현실적이고 그랬던 시절이라서 그랬었나보다.
왠지 앞으로는 그렇게 한푼두푼 세면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하며 내가 속물다됬나 싶기도하고.
그냥 내가 바라는 건 큰 건 아닌데..... 역시 난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지인가보다 하는 생각도 했지만 동시에 따뜻한 나만의 공간이 정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부엌에서 쓸 행주와 일회용 접시를 고르는 것, 커튼이 없는 창문에서 더울것 같아
바깥창문을 여는 것, 새로산 티스푼으로 커피한잔 타마시는 일, 집에서 싸온 장조림에
밥을 먹는 행위까지도 소소한 행복으로 다가온다는게 놀라운일이다.
저녁에는 s양을 만나서 그리던 인도음식을 먹었다.
너무 기름진 느낌이어서 조금먹고 배불렀지만 s양은 난을 커리에 적시다 못해 닦아가며
끝까지 다 먹었다. s양은 항상 음식이 남는것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는 탄투리 치킨도 한조각 남기지 않고
다먹었다. 인도스타일 휘날리는 쌀이 좋은데 그냥 한국식 쌀을 주어서 조금
그랬지만 아무튼 좋았다.
너무 한국식이어서 인도 고유의 향과 풍취는 사그라든 맛이었지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편안히 이국적인 음식을 맛볼수 있다는 점만해도 안온하게
행복했다. 이런 일상적인 행복이 나에게 크게 다가왔다. 다음에는 진짜 뜨악할정도로
인도 본토의 향이 톡쏘는 인도음식점을 이태원에서 한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ㅎ
조용한 주택가를 걷고 운동하며, 잠깐이지만 이런 포근한 감정이 지속될수있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그것부터 시작이다.
3.죽음에 대해서
언니가 몇번 어울린 아기 어머니 커뮤니티중 한분의 남편이 맞아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평범한, 그리고 안정된 직장을 가진 샐러리맨이었는데, 교통사고도 아니고 자살도 아니고
직장동료와 다투다가 주먹으로 맞아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이미 의식이 없었고 곧 사망했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그 아내는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오열하며
" 이렇게 죽을줄 알았다면 알뜰하게 아끼면서 살지도 말고 하고 싶은것 다 하게
해줄것을" " 착하게 살아봤자 소용없다. 내 자식들한테는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안할것이다" 라고 한을 토해내며 때린 피의자를 무기징역에 처해야 한다고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건실하게 가계를 책임지던 남편의 어이없는 죽음때문에 먹고살길이 막막해지
게 됬다. 첫째는 5살정도, 둘째는 7개월, 아내는 전업주부.
제 3자이다보니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겠지만, 난 왜 그 때린 사람이 불쌍
한지 모르겠다. 자신이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이렇게 엄청난 결말을 낳을줄
정말 몰랐겠지.
남자들끼리 호기롭게 때리고 치는 문화에 익숙하게살아왔을테고
군대에서도 열심히 맞고 때렸을것이다. 덩치좋고 힘좋은것 믿고 제 맘에 안드는
직장동료 힘으로 한번 제압하며 분풀어보려다가 정말 인생 망치고 어린자식
과 아내까지 고통의 인생으로 몰아넣게 생겼다. 최소한 5년이상은 감옥에서 썩을
테고, 지금 자신의 철없는 행동때문에 찬 감방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하루하루 한건씩 터질 엄청난 결과들이 두려울 것이다. 재판, 형선고, 주변지인들의
경악, 무엇보다 피해자 가족들의 폭풍과 같은 격분과 원한 그리고 그 뒤에 오는
나같은 인간은 살필요도 없다는 도저히 벗어날수 없는 죄책감.
그는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그리고 피해자의 아내는 그 원한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그의 죄책감과 그녀의 원한을 생각하니 나 역시도 인간의 벗어날수
없는 감정의 굴레에 대해서 무서워졌다.
타인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감정은 정말 자신을 좀먹는 것이다. 증오의 대상보다
증오하는 사람이 훨씬 더 괴롭다. 정말 그 굴레에서 벗어날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스스로의 마음이 힘들고 지쳐 어느날은 다 잊고 용서할수 있을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쿨하고 관대한듯한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만족해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것 같은 마음에 평온해질거다.
그러다가 어느날 또 가라앉았던 분노가 스멀스멀 전혀 변하지 않은 형태로 멀쩡
하게 솟아나올거다. 아주 선명하고 또렷하게. 몇번씩 그 행동을 반복하다보면 마음이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된다. 조금씩 희망을 주었다가 다시 빼앗고, 다시 조금씩 희망을
주었다가 다시 빼앗고 하면서 다시 재활 할수 없게 무기력하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된다. 왠만한 자극에는 희망을 품지도 않게 된다.
그녀가 이러한 과정을 겪을것이라
는 것쯤은 예상할수 있다. 그녀는 피의자가 진정으로 사죄하면 용서할수 있을까?
용서해주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위하여 좋은 일이겠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용서를
강요할수 없다. 그녀가 준비되어 정말 내키게 되었을때 그녀가 가진 권한으로 용서
해야 한다. 그리고 죽인 이는 그녀가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용서를 구해야 할것이다.
진정한 사과란 자신의 죄책감을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피해를 입은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정말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고 부주의하기 때문에 타인을 불행에 몰아넣은 그 때린 이와 같은 이에게 깊이
동조하고 있다. 나도 때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데 교육받은 것이 있어서인지 겉으로
표출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 정말로 격분하게 되는 상황이 있을때 그것을 이겨
내지 못하고 파괴적인 형식으로 표출하지 않을까 하는 잠재적인 두려움이 있다.
어리석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까지 잘못은 아니지만 그 어리석음의 결과는 어리석은 그에게도
너무 엄청나고 잔인하기 때문에 그가 불쌍하다.
그들이 세상을 살고 싶은 의지를 갖고 있다면 비난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만 일을 해결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남편을 실수로 죽인이가 평생감방에서 썩었으면
하는 아내의 마음이 다시 편안해지는 방식이 어떤것이든지,그녀도 그리고 죽인이도 궁극적으로
말살해버리는 방식은 아니기를 바래본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어디서나 예상치 않은 죽음을 맞이할수 있는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다.
죽기전에 마음에 품고 있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참 행복한 일일거다.
거기다 플러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하여 후회나 미련없이 살아왔다고 한다면
더 행복한 일일거다.
이 두가지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일주일후에 죽는다고 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들, 죽을때의 나의 모습은 어떠했으면 좋겠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서
죽음을 맞고 싶은지. 누구와함께 죽음을 준비하고 싶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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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오징어땅콩님, 잘 지내세요? 오랜만이죠? 그냥 간만에 반가워서 덧글 남겨봐요 ^_^;;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m/ 이엠 님이야말로 진짜 오랜만이네요~ 한국에 오셨나봐요? 잠시 쉬러오신건지.. 진보넷에 글올릴 시간도 없을만큼 바쁘셨나했더니 그간 가끔 업뎃하고 계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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