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다보다는 대화가 좋다. 사실 수다가 좋다고 생각될때는 별로 안된다.
수다를 잘 떨지 못해서, 많은 이들속에서 속해있는 것이 어색하다.
나에게 있어서 수다는 언제나 대화를 전제한 전초전일 때에만 마구 재밌다.
이것도 좀 병인것 같다.
2.
내 가장 가까운주변에 공부를 업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 이라면
언니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언니의 삶은 그렇게 많이 건강하지 못하다.
항상 자신이 공부에 있어서 부족하다는 압박에 짓눌려있고, 뛰어난 사람을 보면 열등감
을 느끼며, 실력에 있어서 타인의 평가 하나하나에 민감하다.
이러한 특성을 언니는 당연히 대학원생이라면 가지는 특성이며, 자신만 그런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마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을 떠나서 나는 언니가 느끼는 주관
적 행복감을 봤을때 생각보다 그리 높지 못하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알고보면 겉보기보다
훨씬 우울하고 냉담하며 진솔한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 자신의 잘못이나 감정에
대해서 허심탄회하지 못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언니에게 근본적으로 고찰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실력으로서 업그레이드 되어서 불편한 인간관계에서 우위에서고, 처세
에 있어서 손해보기 싫으므로 자신의 대인관계를 좀더 적극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직장에서는 업무로 평가받듯이 학문하는 곳에서는 실력으로 평가받으니 민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야 당연하겠으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녀가 한결 더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거 같다. 아무튼 새삼스레 양육되어온 환경에서부터 현재까지 우리 자매는
자기 있는 그대로도 스스로 좋아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늘 부족한 사람이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데서 씁쓸한 공통점이 있다. 내가 언니 얘기를 주저리
주저리 쓴 것도, 언니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 내가 그녀를 걱정해줄만한 입장도 아니며,
본인이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왔고 큰 문제없이 살것이다.)
그녀를 통해서 나의 불안이 투사되는 것 같다. 내가 언니처럼 산다면 무척 불행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나를 찾기위한 아주 집중적이면서도 동시에 작위적이지 않은 노력을 해나가야만
나는 타인의 삶을 보고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것 같다.
나로 말할것 같으면, 이제는 열등감을 에너지의 원천으로 해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은 전혀
효과가 없다. 결코 자기기만적이지 않은 자기긍정과 그것으로 인해서 편안해진 마음으로
훨씬더 행복한 삶도, 좋은 결과물도 낳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내 삶에서 내가 재미를 느끼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코드와 방식이 분명히 있는데 잘하지도
못하는 방식의 공부를 하려고 스스로 지나친 압박을 하기보다는, 적절히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자기통제 안에서 배움의 결과물을 쌓아가는데에 집중하고 싶다. 한 마디로
실전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배움을 하겠다는 얘기다. 그러다보면
어차피 더 공부가 깊어지고, 즐거워질 거라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공부가 되고, 흥미로워
질 것이다.
난 어차피 모범생도 아니고, 이미 머릿속에 지식의 절대량도 적으며
그냥 배움으로써 유의미한 자신의 길을 만들어나가는데
집중하지 그것으로 인정받거나 자격을 갖추려는데에 의도적으로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겠다. 나에게 그건 너무 피곤하고 소모적인 인생이다.
3.
상담이 내가 최고로 좋아하고 잘 할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담에 내가 좋아하고 기쁨을 느끼는 코드를 충분히 녹일 수는 있을 것 같다.
상담을 잘 하기 위해 수련받는 과정에서 내가 즐거움을 느끼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조형물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런 공부를 할만한
배움의 기관, 무료 집단 상담 장소도 물색해놓았다.
개별적으로 일대일의 관계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방식에만 집중하면, 나는 그런 공부에 정말 카타르시스를 느낄정도로 큰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한다. 개인이 혼자서 사유를 통해서만 삶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헤어져있어도
유대감을 갖고 있다고 느껴질만한 그 무엇안에서 같이 생산해내고 노력하는 것이 나에게
는 건강한 삶의 방식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