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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생명'

 

  경향신문 5월9일자, 여적 _ 김택근 논설위원

 

  "아무도 환경파괴의 심각성을 몰라요. 위정자들도 환경은 지엽적인 걸로 치부하고 말아요. 하지만 환경은 본질입니다. 지구는 지금 큰 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 늙은이는 그걸 체감하고 있어요. 땅덩이에 열이 있어요. 원주 이곳에도 백일홍이 피고 감나무에 감이 열려요. 이건 머나먼 남쪽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요. 물질 위주의 생활이 환경을 죽이고, 환경은 우리 정신을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주질서를 어기고 있단 말입니다. 우주와 싸우려 합니다. 어림없는 일이지요.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건 문명에 대한 과신(過信)입니다. 자연에 대한 우월감입니다. 우리는 지구를 하나의 생명 연합체로 봐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우주가 들어있습니다. 인간만을 위한 삶은 결국 다른 생물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 우주를 파괴하는 겁니다. 인간이 뭇생명들을 다 죽인 후에는 그 총구를 어디로 돌리겠습니까. 바로 인간입니다."

 

  2001년1월2일, 눈 내리는 날, 박경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에도 선생은 노작가였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새 천년의 지혜를 얻으러 간 기자에게 선생은 절망이라고 일렀다.

 

  "절망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엔 절망하는 사람이 의외로 없어요. '어떻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삽니다. 희망, 희망하는데 그거 무책임한 말이에요. 불확실한 가짜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면 분명 벼랑 끝에 서 있고 절망뿐인데도 인간들은 좋은 쪽으로 자위합니다. '다 죽어도 나는 살겠지'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어요. 차라리 썩음이 가속화되어 모든 것이 정리된 후에 다시 출발하는 것이 빠르지 않으냐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담배를 피우며 창 밖을 바라보던 선생을 잊을 수 없다. 그의 표정에서는 절대고독이 묻어나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렸다. 눈발을 보며 그를 유배시키고 우리만 돌아간다는 느낌과 선계(仙界)에 그를 남겨두고 우리끼리 지옥으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 뒤엉켰다. 오늘 작가 박경리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를 유폐시켰다기보다 그를 묻고 우리끼리 지옥에 남아있다는 느낌이다. 생명이 생명을 죽이는 시대에 생명을 지킬 이 누구이고, 말(言)이 말을 삼키는 시대에 절망을 가르칠 이 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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