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래그 미 투 헬>과 <스턱>, 두 호러의 대가가 전하는 피범벅 시대정신

 

 

* 이글은 영화 연대의 영화단상 게시판에 게시한 글이다. 매우 짧은 시간에 끄적거린 것으로 모호하게 서술한 부분이 많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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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피상적 호러의 범람 속에 <스파이더 맨>트릴로지를 만들었던 샘 레이미의 호러로의 귀향은 매우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2007년에 먼저 공개된 스튜어트 고든의 <스턱>이다. 내가 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과 스튜어트 고든의 <스턱>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이 두 대가와 그들의 최근작이 의외로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은 물론이고 굉장히 비슷한 감성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영화는 각각의 여주인공이 특정한 형태의 죽음에 도착하게 되는 동일한 결말의 처절한 여정이다. 아주 많이 다른 길을 걸었던 두 명의 호러 대가들이 비슷한 시기에 이토록 비슷한 결과물을 공개하게 된 것은 어떤 동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사회성, 보다 정확하게는 구조적인 계급분화에 따른 계급간 긴장과 허위적 부르주아 프라이버시의 도덕적 혼란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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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그 미 투 헬>과 <스턱>이 비추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분화와 중산층 노동계급

 

  두 영화는 절대로 정치적이지 않다. 또한 당연히 이 둘은 켄 로치마이클 무어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 호러 두 편은 지극히 사회적이다. 레이미와 고든은 이 두 편의 영화에서 본능적으로 계급을 능수능란하게 가시화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드래그 미 투 헬>의 주인공 크리스틴(알리슨 노먼)은 은행의--이 얼마나 자본주의적 특수성이 선명한 직업인가--대출계 담당직원이며 자신의 업무에 애착을 가지고 헌신한다. <스턱>의 주인공 브랜디(미나 수바리) 역시 노인 요양병원에서 정성을 다해 노인들을 돌보는--크리스틴과 마찬가지로 브랜디의 직업 역시 복지국가가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 국가모델이라는 측면에서 은행원인 크리스틴 만큼이나 자본주의적 특수성에 기인하는 직업을 가졌다--간호조무사이다. 이 둘은 모두 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소위 중산층 노동자이다.

 

  영화의 발단은 이런 상황에 존재하는 두 주인공에게 발생하는 특정 사건에서 직면하게 되는 주인공들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크리스틴은 이민자 노파에게 대출상환연장을 구구 절절히 간청 받게 되고--우리는 크리스틴이 일방적으로 정보에 접근이 용이한 전문적 은행원이라는 것, 그리고 이민자 노파는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녀는 크리스틴과는 달리 자신이 합법적으로 대출상환연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또한 브랜디는 클럽에서 술을 마신 뒤 운전하던 중에 홈리스 남성 토마스를 차로 치게 된다. 바로 여기서 두 주인공들은 형식적으로 자유로우나 실제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선택에 마주하게 된다. 크리스틴은 도덕적으로 노파를 돕고 싶으며 합법적으로 노파의 대출상환연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은행의 입장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 더구나 크리스틴은 목전의 승진을 두고 괜히 상사의 눈치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다. 브랜디 역시 도덕적으로 자수를 하고 자신의 차에 꽂혀 죽어가는 토마스를 병원으로 이송하면 그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은 음주운전으로 범죄자가 되고 승진은커녕 해고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부르주아적 삶과 신분상승을 지향하는 이 두 중산층 노동자계급의 주인공들이 경험하게 되는 이민자도시 빈민이라는 각각의 사회적 소외계층과의 특수한 접촉 속에서 자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지점들로부터 죽음이 수반되는 피할 수 없는 저주가 발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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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의 도덕적 혼란과 영화의 동력

 

   두 영화는 관객을 묘한 감정 상태로 몰아간다. 그것은 일종의 도덕적 혼란이라고 할 만하다. 크리스틴과 브랜디는 분명히 이기적 선택--그것이 분명 자신의 이익과 심지어 생존을 위한 선택일지라도 분명히 이기적인--으로 악을 행한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주인공을 일방적으로 증오할 수 없다. 그들은 악역이 아니며--물론 크리스틴과 브랜디가 상황적으로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다--이 두 인물은 근본적인 악인이 아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구조에게 계급적으로 요구받고 있는 “비도덕적” 선택을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고 충성스럽게 했을 뿐이다. 본 홈페이지의 “영화읽기”에 게재된 “<드래그 미 투 헬> 옹졸하고 슬픈 저주의 화살”에서 gipsymoon님이 세밀하게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크리스틴이 집약적으로 우리의 현실을 소개하는 인물이라고 서술한 까닭도 사실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들의 비도덕적 선택이 현대사회에서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맥락속에 관객들은 정말 쉽고 편하게 크리스틴과 브랜디에게 자신을 대입시킬 수 있다. 범법자라는 전제에서 비교적 관객이 더 증오하기 쉬운 브랜디에게 느끼는 감정도 일방적인 악감정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씩씩하게 위기의 해결을 모색하는 크리스틴 보다 주변에 의존하고 괴로워 하는 브랜디가 더 측은하다. 브랜디는 크리스틴에 비해 지극히 나약하고 가부장적 관계에 의존하는 여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두 영화에서 관객들은 현실적으로 부도덕한 주인공들을 수긍하기 때문에, 즉 관객들은 이 두 주인공과 동시대적 계급동질성을 느끼기 때문에, 또한 위기에 처하게 된 참극이 발생한 원인도 크리스틴과 브랜디 자신들의 몫이기 때문에 당연히 측은하게 여길 뿐, 전적으로 증오할 만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다만 공포에 이를 지경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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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렇다면 도덕적으로 혼란스러운 이 영화들의 남은 동력은 무엇일까. 이 부분이 두 영화가 가진 차이점이다. <드래그 미 투 헬>의 동력은 저주에 기인하는, 일종의 테러라고 할 수 있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공포이며(이것에 대해서는 gipsymoon님의 “영화읽기”에 게재된 “<드래그 미 투 헬> 옹졸하고 슬픈 저주의 화살”을 참고하면 되겠다) <스턱>의 동력은 불안이다. <스턱>의 관객들은 브랜디의 행위가 발각될까봐 불안하며 아무 죄 없고 불쌍한 토마스가 비참하게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역시 불안해해야만 한다.

 

  흥미로운 단상을 개진하려면 분명 추가적으로 서술해야할 부분이 남아있으나 그것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게 된다. 이 두 영화는 정말 괜찮은 호러필름이다. 호러에 있어서 스포일러는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매우”치명적이기 때문에 이쯤에 단상을 마무리 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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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6 21:07 2010/04/26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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