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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22
    아프간 피랍 자기책임론: 일본의 경우 (4)
  2. 2007/07/22
    아프간 피랍: 자기책임론을 걷어버리자 (4)

아프간 피랍 자기책임론: 일본의 경우

2004년 4월, 일본이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병했을 때 이라크에서 5명의 일본인 자원봉사자가 납치당했다. 일본 정부는 이 납치에 대해서, 철군할 의사가 없다는 강경한 방침을 내세웠으나 다행히 이들은 이라크에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납치와 관련한 일본 여론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인질들 중에 좌파 활동가가 있었고, 이들이 모두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던 탓에 납치 초기부터 자작극이라는 설이 돌았던 것이다. 특히 산케이와 같은 보수적인 신문이 이와 같은 소문을 묘하게 조장하는 기사를 실어댔다. 사건이 발생하고부터 민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다녔던 가족들은 온갖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납치된 이들이 돌아오자 자작설은 '자기책임론'으로 바뀌었고, 피랍자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귀환한 인질들은 '다시 이라크에 들어가 재건활동을 돕고 싶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부가 유감표명을 한 것은 물론이요 비난 여론이 들끓었음도 말할 것도 없다.

'자기책임론'을 이와나미 서점에서 발행하는 시사잡지 [세계]를 통해 처음 접했을 땐, 보수화 하는 일본사회의 극단적인 면모를 봤다는 생각에 아연했었다. 3년이 지난 후 한국에서 똑같은 논쟁을 보게 될 줄은 정말로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자기책임론'과 관련해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그와 관련된 책까지 출판된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살펴 보는 것은 지금 한국의 논쟁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옮길 글은 일본의 비평가 아사다 아키라의 '이라크 인질문제를 둘러싼 긴급발언'(http://dw.diamond.ne.jp/yukoku_hodan/20040416/index.html)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글에서 아사다 아키라는 일본이 미국을 쫓아 파병을 감행한 것을 비판하고, 이를 위해 국민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국가 최대의 목적을 내팽개치는 것이라고 한 후, 자기책임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에서 자기책임론의 분출에 대해서, 
일본 사회의 전근대성이나 전체주의의 출현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자기책임론을 흥미롭게 다뤘던 서방언론도 이 일을 일본사회의 '집단주의'와 연결시킨 바 있다. 일본의 경우, 피랍자들의 가족들이 한 사과나 사회로부터의 차가운 시선은 어느 정도 '왜 사회를 시끄럽게 하느냐?'는 식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한 논쟁에서 사회계약론이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자기책임론은 한 편으로 근대 군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연결시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위험한 줄 알면서 아프간에 가지 않았느냐는 말은 비정규직인 줄 알면서 취직하지 않았느냐는 말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히는데 이는 결국 국가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고립된 개인의 총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자기책임이라는 용어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수입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라는 점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일본에서는 피랍 사건보다 앞서 노숙자 자기책임론이 제기된 바 있다. 자기책임론 논의의 신자유주의적 맥락과 관련한 상세한 논의는 http://www1.odn.ne.jp/~cex38710/jikosekinin.htm 에서 읽을 수 있다). 자기책임론이 신자유주의적 사회관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은 아사다 아키라의 논의에서도 등장하는데,  그는 피랍자들에게 구출비용을 징수하자는 주장에 대해서 국가가 '민간경비회사'냐며 반문하고 있다. 자기책임론은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 대한 사고와 맞닿아 있다. 한국에서도 자기책임론이 이렇게까지 여론의 우위를 점하는 것은, 점점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의 영향일 것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경우는 상당히 다르다. 봉사와 선교라는 목적의 차이가 존재한다. 콜린 파월의 인터뷰(원문의 일부를 여기서 읽어볼 수 있다: http://www.janjan.jp/government/0404/0404173329/1.php)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민간 차원의 봉사활동은 현지에서 봉사자들이 온 국가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하기 때문에, 현지의 군사활동에도 도움을 주니 정부차원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모스크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일(이들이 한 것인지 다른 선교단체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은 현지에서의 선교일행마저 위험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서 한국이 일본보다 양심적이라고 자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한국군이 이라크에 파병되었던 초기에, 파병에 반대해 열성적인 활동을 해 왔던 사람이 납치되었다면 여론은 어땠을까? 지금처럼 국익을 논하며 피랍자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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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다치고, 이 일주일간, 2ch 을 중심으로 고통을 당한 3명의 인질과 가족에 대한 공격(Bashing)은 추악 그 자체였다. 우리들은 항상 그런 미디어가 있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다. 치쿠시 테쯔야가 인터넷의 게시판은 ‘화장실 낙서’라고 말했을 때도, ‘화장실 낙서’가 뭐가 나쁘냐, 오히려 져널리즘이란 것은 그런 것으로부터 발생해 온 것이 아니냐고 했었다. 하지만 그런 장소에서는 어디까지나 마이너리티로서, 이른바 마이너리티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발언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기는커녕, 자신들이 흡사 정부고관이라도 된 것처럼 과대망상에 빠져서, 마구 ‘국익’ 따위를 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피권고가 나와 있는 이라크에 자기책임으로 갔으니까 살해당해도 어쩔 수 없다, 이만큼 국익에 손해를 입혀서 폐를 끼쳤으니까 대처비용도 부담해야만 한다, 그러기는커녕 가족이 인질해방을 위해 자위대철수를 요구하는 것은 웃기는 일에도 정도가 있다 라며, 그런 식으로 ‘자기책임’을 휘두르는 녀석이, 자신이ㅡ 발언에 ‘자기책임’을 지느냐 하면, 반론의 여지가 없는 안전지대에서 익명으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물론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10번 이상 대피권고를 내렸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가는 민간인까지 돌봐줘야 한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철수권고가 나와 있어도, 현지의 사람들이 지켜주는 형태로 착실하게 부흥지원을 진행하는 NGO 도 있고, 귀중한 정보를 보내주는 프리 져널리스트도 있다. 이번 3명은 경솔한 판단으로 위험한 지역에 무심코 들어가 버렸지만, 나이브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선의’에서 행동한 것이니,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애초에 국가가 시민을 보호할 때, 그것이 어떤 인간이냐는 관계없이, 모든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구출비용을 청구하다니, 정부가 민간경비회사인가? 해방된 인질이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 것에 대해, 고이즈미는 ‘이만큼 많이 정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출을 위해 침식을 잊고 노력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까요.’라며 불쾌함을 표현했었다. 마치 이라크지원은 자위대에서 한다는 것이 국가의 의지이기 때문에, 국가의 대피권고를 무시해서 이라크에 간 민간인이 국가에 폐를 끼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듯이. 하지만, 그들의 일부는 자위대 파견 전부터 이라크에서 활동을 해 왔었고, 미국이 이라크를 무정부사태에 떨어뜨려, 일본이 미국의 뒤를 쫓아 자위대를 파견했을 때야말로, 그들에게 큰 폐를 끼쳤던 셈이다. ‘그래도 이라크인이 싫어지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라크에서의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라며 그들이 알 자지라의 인터뷰에서 말한 것은, 그 지역에서 일본인이 이미지를 좋게 하는 데에 자위대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조차, 일본이나 이탈리아가 자위대나 군에 대한 철수요구에 굴하지 않았던 것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위험한 지역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자신이 감수할 위험을 이해하고 있어야만 하지만, 누구도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으면 세계는 전진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은 자위대가 이라크에서 활동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을 알면서 좋은 목적을 위해 이라크에 들어간 시민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만약 인질이 되었을 때도 위험을 감수한 당신들의 잘못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물며 가족이 처음부터 ‘우선 저희 가족이 폐를 끼친 것을 사과 하고 싶다’ 라며, 오히려 지나치게 ‘일본적’이라고 할 만큼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쓴 발언이 눈에 띄어, 익명으로 비방의 메일이나 편지를 받게 된 것은 정말로 최악의 사태이다. 결국, 사죄나 감사로 계속 머리를 숙이고 다닌 만큼 인질과 가족을 몰아붙이니까, 마치 전근대의 무라(村)사회이다. 아니, 인질과 가족을 일본으로 이송하는 비행기에서, 기장을 설득해서 그들이 있는 구역을 출입금지로 하고, 보도진이 드나드는 것을 금하다니, 무라(村)사회의 실내감옥(座敷牢: 미친 사람을 감금해 두기 위해 집 안에 마련해 놓은 감옥)이 아니라면, 한 세기 전 구 사회주의권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인질에게 트라우마를 만드는 것은, 유괴범 이상으로 이런 일본정부나 일본사회의 이상한 대응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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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피랍: 자기책임론을 걷어버리자

지금 아프간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20명의 기독교 선교단에 대해 여론은 대체로 두 가지 수식어를 붙여주고 있다. '멍청이' 또는 '광신도'. 이 수식어들은 '자업자득이니 가서 순교하게 내버려둬라'라는 주장이나 '일단 구출하고 그 다음에 책임을 묻자'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어느 주장이나 '자신들의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위험한 줄 알면서 간 것이니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러한 자기책임론은 기독교의 공세적인 선교정책에 평소부터 가지고 있던 반감이 투영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들이 아프간에 간 목적이 기독교란 사실이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왜 기독교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갖고 있는 국가에 기독교를 선교하겠답시고 가서 저 꼴을 당해 국가에 피해를 끼치는가? 지금 사경을 헤매는 이들을 눈 앞에 두고 벌어지고 있는 자기책임 논쟁은 어느 정도 그들이 기독교도라는 사실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기독교도가 아니고, 따라서 반기독교 정서에 우리가 쉽게 기댈 수 없다면 그 때도 지금처럼 쉽게 자기책임론을 말할 수 있을까?


(1) 인권이란 이름이었다면

911 테러사건 직후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잡겠다며 아프간을 침공해 그들의 화려한 군사기술을 뽐내고 있을 무렵, 언론에 비친 아프간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미사일과 문을 박 차고 들어와 '빈 라덴 내놔!'라고 소리치는 미군에 의해 고통받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미군이 아니라 여성에게는 교육도 못 받게 하고, 문화를 파괴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를 자행하는 탈레반에 의해 신음하고 있었다. 차도르로 눈만 겨우 내 놓은 아프간 여성의 모습 뒤에 이어지는 미군의 미사일은 마치 억압자를 향해 내리 꽂히는 신의 망치처럼 보이지 않았는가? 아프간은 단순히 알 카에다에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간에 '인권'이라는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행해진 것이었다.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물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미국이 탈레반을 몰아내고 집권시킨 북부동맹은 탈레반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이들이었고, 전쟁복구가 미비한 가운데 아프간은 가난과 마약과 정치적 부패로 신음하고 있다. 

만약 피랍된 사람들이 종교인이 아니라 아프간의 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사업을 벌이거나 마약중독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처럼 반기독교 정서가 강한 곳에서 기독교를 선교한 것에 대해 책임을 돌리고, 기독교의 공세적 선교정책을 문화 다원주의를 거스르는 몰상식한 행동이라 여긴다. 하지만 우리의 문명에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식민화된 지역에 찾아가 자신의 삶을 헌신한 백인 영웅들의 이름 또한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앞 문장은 기독교의 행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피랍된 이들의 행동이 인권의 이름으로 비호받을 수 있다면 여론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인권은 기독교보다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얻고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며, 심지어 그래서 미국의 아프간 침공의 공식 이데올로기이자 한국의 파병의 이데올로기로 채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인권 사이에 명확한 위계를 매긴 채 기독교 선교라는 목적을 비판할 수 있는가?



(2) 납치가 일어난 파병이라는 현실

인권이건 신이건 상관 없이 자청해서 간 것이니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피랍자'가 '납치'에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뭔가를 당한 사람이 그 일에 책임이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왕따 당한 사람에 대해서 '저러니 왕따 당할 만 하지'라고 말하는 것 까진 이해할 수 있어도 '니가 그렇게 행동했으니 왕따 당한 건 네 책임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자업자득이니 가서 순교하게 내버려둬라'라는 말은 '왕따 당한 건 네 책임이니 선생님 귀찮게 하지 말아라'라는 말과 똑같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들이 위험한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선택한 것과 실제로 납치를 선택한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당연히 위험에 처한 국민은 국가에게 그들을 도울 것을 요청할 권리가 있다. 이를 저버린다면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물론 자기책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국가가 그들을 무시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국가의 책임을 경감시키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국가가 요구를 수용하지 않아 그들을 구해내지 못하더라도 국가를 비난해서는 안 되며, 국가가 요구를 수용해서 그들을 구출하더라도 이로 인해 발생한 국가의 피해를 그들에게 문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번 피랍사건으로 국가가 어떤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인가?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투입된 인력이나 비용은 원래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한 것이니 피해라고 볼 수는 없다. 요구를 수용했을 때 '테러에 굴복한 약한 국가'라는 이미지가 붙는 것이 피해라고들 한다. 국가 신뢰도도 떨어지거니와 한 번 굴복했으니 이를 노리고 테러범들이 계속 한국인들을 납치할 것이니 실제적으로도 테러위협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테러와 국가라고 하는 것이 모든 맥락을 무시한 채 추상적으로 둥둥 떠다니는 것일까? 테러범들이란 다이하드에서 존 맥클레인이 무찌르는 일당들처럼 허공 속에서 뜬금없이 쑥쑥 솟아나는 이들이며 국가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능력치 항목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아프간과 탈레반이라는 지금 테러의 맥락 속에서 한국이라는 국가의 신뢰도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게는 자신들과 더불어 세계의 패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끔, 적당히 이익을 쫒을 줄 알고 힘 앞에 굽힐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슬람 국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침략하는 더러운 욕망을 의미할 것이다. 국가의 신뢰도라는 일견 중립적인 말은 사실은 강력한 가치를 수반한 말이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이 전쟁이 일어나는 맥락을 고려한 후에, 한국의 아프간 파병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하는 것인가?  

요구수용이 테러의 연쇄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이 주장에는 테러범들의 구체적인 존재가 사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언제나 일관되게 행동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미국이 인권의 이름으로 침공을 정당화 하다가 전쟁에 대한 보도가 시들해지자 그를 위한 노력을 방관하는 것처럼 한국 역시 이번 테러와 다음 테러에서 취할 태도는 완전히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다음 테러'라니? 다음에 테러를 하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캐나다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퀘벡사람들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다음에 또 납치 소식이 들려온다면 아마도 한국군이 침략군의 일환으로 파병되어 있는 이라크에서 일 것이다. 다음 테러가 걱정이라면, 20명의 희생을 감수하며 테러범들에게 강경책을 펴기 보다는 더 빨리 철군을 계획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테러범들은 '악의 집단'으로 추상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존재한다. 다음 테러를 걱정하기 전에, 그리고 테러범들을 테러범이라고 부르기 전에 먼저 한국의 군대 파병이라는 현실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한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우리는 아프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침략국일 미국의 요구를 받아 침략군의 일원으로서 아프간에 갑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인권과 봉사의 이름으로 파병을 정당화했다. 정부의 뒤를 이어 국민들이 신앙과 봉사의 이름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아프간에 갔다. 이들이 국익을 침해했다고? 과연, 이들은 아프간이 결코 한국인들을 반기지 않는 곳이며 한국군 역시 결코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밝혀냈으니 국가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해야 하는 것은, 피랍자들에게 왜 그런 데엘 왜 갔느냐며 문책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게 대체 파병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고, 파병이 대체 어떤 것이었는지를 해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이번 일로 이런저런 마음 고생을 할 게 분명한 국가를 위로한답시고 피랍자들의 책임을 얘기할 게 아니라, 국가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국민을 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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