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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과 고세훈의 민주주의 복지국가론




 
 
 고세훈의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와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읽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최장집의 문제의식은 한국 정치의 정치 체계가 냉전반공주의라고 하는 협소한 이념적 틀을 기반으로 구성되었고, 그 결과 사회 경제적 구조를 기반으로 한 균열-핵심적으로는 노동과 자본이라는 계급갈등-이 정당을 통해 정치과정에 반영되지 못 한 채, 정치가 보수 엘리트들의 권력획득의 장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사회는 민주화운동을 통해 일정 정도 권위주의로부터의 체제 전화에 성공했지만, 제대로 대표되지 못한 사회의 균열은 지역감정으로 전화되어 민주주의의 퇴행을 가져왔으며, 재벌의 경영은 여전히 권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사회 전체적으로 이전 시대 기득권의 헤게모니가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이 아직 절차적 민주주의의 요건 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합리적' 사회경제적 균열에 기반을 둔 정당이 조직되어 사회의 갈등을 폭넓게 반영하는 것이다. 요컨대, 정당정치의 발전과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위상의 강화가 최장집의 주장이다. 

 고세훈의 복지국가론은 최장집의 논의를 기반으로 하여 나올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적 성격을 갖고 있다. 최장집과 마찬가지로 고세훈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고 하는 기반 위에서도 국가는 독립적인 변수로 기능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세계화를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수용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의 건설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 사회투자국가론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나 "노사정 협의회" 구성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에서 복지는 기술교육에 기반한 노동 유연화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고, 정부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동반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와 더불어 고세훈은 이해관계자 복지라는 모델을 제시한다.  유럽 사민주의 모델이 시장의 구조에는 큰 압력을 가하지 않은 채 국가의 민주화를 기반으로 하여 복지제도를 구축했는데, 신자유주의의 복지 위기담론에 맞서기 위해서는 시장의 민주화를 공세적으로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업을 그 이해관계자인 종업원들도 경영에 참여하는 체제로 개편하고, 시장을 시장 외부에 있는 사회의 이해관계자와 매개시켜 파악하는 것이 이해관계자 복지이다(...같다-_-;). 이를 위한 실천적 방안은 최장집의 주장과 거의 유사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실질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노동자의 이익이 정당을 통해 정치에 폭 넓게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세훈의 글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복지국가 발전에 대한 우파와 좌파의 접근을 분석한 것이었다. 복지국가의 발전에 대한 우파적 관점은, 복지란 경제가 발전하면서 발생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복지를 가능케 하는 힘은 경제발전이기 때문에 경제발전은 근본적으로 우선권을 갖는다. 좌파적 관점은, 복지가 자본이 축적의 위기를 겪게 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를 통해 마련된 장치라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자본 축적의 안정적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산물로서,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에 봉사하여 혁명적 전화를 늦추는 장애물이 된다. 고세훈은 좌파와 우파의 접근이 그 지향은 다르더라도, 둘 모두 복지를 기능주의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똑같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이론적으로는 좌파가 복지정책을 매우 무관심하게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복지정책을 가장 강력히 지지해 온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뜨끔하다. 복지를 위한 투쟁은 맑스주의에서 '경제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늘 폄하되었고, 오직 그것이 정치적 이행을 위한 맹아적 투쟁이라는 조건-간단하게는 그러한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훈련되고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투쟁 속에 혁명적 전화를 위한 요소들이 뒤섞여 발전할 수 있을 때-하에서 긍정되었다. 따라서 초점은 언제나 투쟁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젠가 도래할 혁명에 맞추어져 있었고, 당연히 당면한 문제에 있어서 투쟁 이외에 사회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제공할 것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일찍이 맑스주의의 문헌들을 통해 사고가 정향되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생각은 아닐까? 감정적으로는 한없이 잘 되길 바라면서도, 막상 맑스주의적 사고의 틀에서는 달리 보태줄 것이 없는. 

 최장집은 한국의 운동세력과 노동운동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념으로 인해 유효한 현실적 대안을 만들어내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나는 그 사고들을 감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고, 최장집처럼 강력하게 '현실'과 '관념'의 세계를 구분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맑스주의 정치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현실 속에서 당면한 문제에 '유효한' 비전을 제시해 오지 못한 것은 맞는 듯 하다. 맑스주의가 학생운동의 수준에서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던 한국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 속에서 맑스주의의 정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화제를 돌려서, 두 글에서 가장 불편했던 부분은 대의제에 대한 지나친 신뢰와 더불어 거리의 정치에 대한 불신이다. 두 저자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사회의 갈등을 반영하는 정당체제가 설립되면 사회의 갈등은 민주주의라는 과정을 통해 조화롭게 표출되고 합의를 이뤄낼 것이라고, "과격한" 운동의 표출은 줄어들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요구란 기존 대의제 정당체제가 반영할 수 있는 테두리에 국한되는 것이며, 이를 넘어서는 추구란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고세훈에게는 노동과 자본 문제를 제외한 영역의 문제제기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강하게 배척 당한다.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환경에 대한, 여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대체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이 얘기하는 민주주의란 결국, 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수용할 수 없는 닫힌 체계가 아닌가? 최장집은 민주주의에는 수용해야만 할 "게임의 규칙"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겠지. 

 이와 병행하여 나타나는 문제는 사회적 갈등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범주로 환원하고, 이를 정당에 의해 대표될 수 있는 것으로 단순화 해 버린다는 것이다. 고세훈의 글을 보면  계급존재와 계급형성이라는 말을 통해, 사회경제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되는 계급이라는 질료와 의식과 결합돼 실질적인 그것의 주체로의 형성이 구분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최장집에게도 나타난다. 어찌됐든 이처럼 계급구조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니만큼, 사회의 본원적 갈등은 계급을 기반으로 나타나는 경제영역의 갈등이다. 따라서 이들의 논의에는 노동의 정치화라는 대안 외에 다른 담론들에 대한 검토가 결여되어 있다. 정말로 노동 하나면 충분한가? 민주주의라는 바탕 위에서 오히려 환경과 여성이라는 담론이 기존 담론의 틀에 균열을 일으켜 전혀 새로운 갈등 상황들을 창출해 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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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박애의 맑스적 역설

                                                                                  에티엔 발리바르 씨 
                                          (http://myhome.naver.net/skreds/images/Balibar(100x98)89.gif)

 
 발리바르에게는 맑스주의적 사유의 전통을 철학의 언어를 경유해 정리해 내는 정말로 뛰어난 재능이 있는 듯 하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처럼 기존의 철학적 전통과 대별되는 맑스의 주장을 진리인 양 서술하거나, '포스트 모던'하게 반전과 아이러니의 지점을 포착해 내는 데 치중하지 않는다. 발리바르의 서술 스타일은, 맑스의 주장들이 어떻게 새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고, 기존의 지평을 넘어서는 그 새로운 것들이 그 자체 속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있는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맑스의 전복적인 주장들은 한 편으론 마치 진리를 잡은 듯한 생생한 경험을 제공하면서도, 그 서술의 맥락에서 벗어나 사고할 때는 이내 여러 가지 모순들로 가득 찬 것으로 경험되고는 한다. 발리바르의 글에는 논리적 궁지(aporie)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표현을 통해 그는 모순적 경험들을 통일해 내기 보다는 열어둔 채로 놓아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맑스주의에 관하여 최소한 현존하는 최고의 교사라는 평가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정리해 놓은 글은 1989년에 쓰인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이라는 짧은 글로, 19C 혁명의 표어였으며, 근대 정치에 그 이념적 지평을 제공하는 것인 자유, 평등, 박애와 맑스의 사유의 관계는 무엇인지, 맑스가 무엇을 새롭게 도입했으며, 그것이 그 개념들 속에 어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읽은 것을 정리해 볼 요량으로 본문을 거의 긁은 것이라 거칠고 재미도 없지만, 어느 정도는 최근에 이글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페미니즘에서 시작하여 이제 인권과 윤리의 문제로 나아간-의 맥락과도 닿아 있지 않나 싶다.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에티엔 발리바르

 발리바르는 프랑스 혁명을 역사적 단절의 순간으로 이해한다. 혁명은 그것을 "낳았던" 원인들의 축적을 그 효과들 속에서 넘어서는, 역사라는 직물의 단절이다. 이 단절이 제공한 사유와 가능성들의 개방이 닫힌 것은 19C 후반, 제국주의, "사회적 문제"의 제도화의 시작, 일반화된 학교교육 등이 도입되고 나서이다. 이 때가 되어서야 자유, 평등, 박애라는 표현은 안정되고 일의적인 의미를 소급적으로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아직 혁명이 열어 놓은 개방성, "단절의 칼날"위에서 사유하고 있다. 그 가능성 속에서 맑스에게(물론 승리할 부르주아들이 아닌 다른 혁명의 세력들에게도), 자유, 평등, 박애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박애

 박애라는 논쟁적 표어의 채택은, 노동에 대한 권리(droit au travail)가 인간의 권리들과 헌법상의 원칙들에 끼어드는 것(그렇게 되면 그 형식적 안정성은 완전히 흔들리게 될 것이다. 최소한 소유권이라는 쟁점에 있어서도)을 "박애주의적" 시각에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에 대한 권리가 불러 일으킨 쟁점에 대해서는 조앤 W. 스콧의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을 참조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9세기 프랑스 혁명의 전개와 더불어 그 속에서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개념이 어떻게 얽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글이다.  이 책은 여성의 권리라고 하는, 층위의 다양성은 있겠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사고하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주제가, 얼마나 논쟁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박애는 또한 그것의 수행자로서 국가나 한 사회를 상정하는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맑스의 구호는, 박애의 실천적 지평인 국가를 뛰어넘는 것이며, 소유라는 개념이 갖는 균열을 통해 국민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둘로 분할하는 혁명적 주체성을 정초한다. 여기서 인간의 인류애라고 하는 관념이 그 정치적 기능의 폭로 속에서 해체됨과 더불어 여전히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역설이 출현하고 있다.

  자유
 
 자유는 한 편으론, 특권계급을 쳐부수어 주권을 집단적으로 쟁취하고 그리하여 "시민"이 되는 "주체"들의 운동(능동적)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공리주의, 자유경쟁, 그리고 그 결과 노동력으로서의, "상품"으로서의 개인(수동적)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그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품 유통 또는 교환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여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이다. 

 
이 문장을 통해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권의 법적 형식들(자유와 "형식상의" 평등)을 밑받침하는 이데올로기는 상품의 일반적 유통의 형식들 그 자체, 특히 그 나름으로 인간의 "노동"을 합리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형식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단순히 자유라고 하는 것을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다. 임노동 착취가 억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봉건적 군주, 주인은 아니다. 부르주아는 자본의 축적을 방해하는 봉건적 착취의 족쇄를 끊어 버렸으며,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착취 관계를 집어 넣었다. 자유란, 한 편으로는 능동적이며 임노동 관계가 강요하는 불평등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할 수 있고, 한 편으로는 봉건적 관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상품이 '될' 권리를 의미한다.   


  평등 

 따라서 맑스의 눈에 '평등한 권리'란 실제적 불평등을 하나의 공통의 척도로, 형식적 평등으로 환원시키는 속성일 따름이며, 평등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법적 이데올로기 바로 그것으로서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시니피앙이다. 이 맥락에서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란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착취를 위해 피착취자인 노동자를 동원하는 장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로의 계기적 단계들을 규정하며, "평등 노동, 평등 임금", "능력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엥엘스는 평등을 프롤레타리아적인 것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분할하였다. "프롤레타리아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는 계급의 진정한 폐지를 그 내용으로 갖는다. 모든 평등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부조리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선, 이것은 정치 투쟁으로서의 계급 투쟁은 정치의 보편적 언어(시민성의 언어) 속에서만 정식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언어란 단순히 환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다음으로 근대의 정치 속에서 맑스주의적 운동이 갖는 긴장을 형상화 한다고 할 수 있다.
한 편으로 평등의 요구가 계급의 폐지를 위한 집단적 투쟁이 아닌 형태로 나타난다면, 이는 계급투쟁의 현실을 은폐하는 것으로써 비난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평등의 요구가 작업장에서의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축소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개인의 상품으로의 환원을 수긍한다는 비난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갈등은 맑스주의 정치의 역사에서 형태를 달리해서 계속 되풀이 되어 왔으며, 미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엥엘스의 인용문은 평등개념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한 편으로는 개인들의 동일화의 극단들이 있으며, 다른 한 편에는 그들의 차이화의 극단들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맑스주의의 모든 것은 근대 정치에서 대두되었던 이 개념들의 역설적인 해석의 지평 속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 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획을 어떤 식으로든 이어나가고 있는 지금의 정치 현실에도 마찬가지다. 브레히트가 <임시야간숙소>에서 자선 행위를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박애의 정신에 대한 맑스주의적 사유의 결과물이지만, 항공회사에서 스튜어디스를 채용할 때 외모의 조건을 묻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에 대한 공방이 일어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정치 현실에서도 상이한 개념 속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모순은 사실 도처에 널려 있다. 맑스는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개방했을 뿐이다. 지금 권리들이 너무나 '쉽게' 운위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개념에 내재한 모순을 은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력을 갖는 해석의 결과물일 뿐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 윤소영 엮음,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루이 알튀세르 1918-1990], 민맥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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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SF- 에덴과 창공의 상투스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만화방에 다니게 되었다. 예전엔 느끼지 못했었는데 만화방의 매력은,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서 아무 거나 머리에 떠 오르는 데로 뽑아 볼 수 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라면 한 그릇도 덤으로 들어가면 금상첨화. 새로운 즐거움을 자축하는 의미로 어제 만화방에서 재/발견한 매력적인 만화들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보자.



                                        마음에 드는 이미지 찾기가 참 힘들다. 출처는 (http://blog.naver.com/holyslayer

 에덴 1-15
 
 오랜 만에 다시 읽었다. 1권을 처음 손에 쥐었던 것이 99년 무렵이었던 것 같으니 근 8년 만에 다시 보는 셈이다. -물론 그 동안 나오던 신간은 꼬박꼬박 챙겨 보고 있었다- 8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멋진 프롤로그에 가슴이 뛴다. 싸이버 펑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근미래 세계에서,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인간이 죽어버린 섬에서 살아가는 소년과 소녀. 이 섬의 소년과 소녀는 인류가 살아남아 있는 세계로 나가고, 본 편은 이들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전개된다. 


 인류 최초의 낙원에서 소년과 소녀는 살인을 통해 세계로 나아가고, 이들의 아이들은 잔인한 세계에서 삶을 헤쳐 나간다.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이라는 모티브를 가지고, 작가는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어떤 해답을 설정하고 그에 맞춘 이야기를 전개하기 보다는 잘 짜여진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이 점에서 엔도 히로키는 정말로 창의적인 크리에이터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는 계급, 인종, 민족, 종교 간의 갈등과 이를 이용하는 강대국들의 이권다툼 등 현재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는 비극에 싸이버 펑크적인 의상을 탁월하게 입혀 낸다. SF 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현실감이 있는 이 세계가 에덴이 갖는 최대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려진 세계는 철저하게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 철저함이 이 세계를 설득력 있게 만든다. 이는 인간에 대한 온갖 만행이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세계에서, 인물들이 하는 경험에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부잣집 도련님으로 처음에는 그저 착하기만 했던 주인공이 이 세계에 말 그대로 '적응'해 가면서 던지는 질문들은 참 진부하지만 깊은 무게로 다가 온다. - '왜 그저 행복해 질 수는 없는지' '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냥 행복할 수는 없는 건지' 


 물론 엔도 히로키는 지금의 세계에 그저 사이버 펑크를 덧붙인 것 만은 아닌데, 작가는 초기에 세계를 위기에 처하게 했던 '클로저 바이러스'를 삶에 대한 질문을 풀기 위한 나름의 실마리로써 제시하고 있다. 아직 만화가 진행 중이라 어떻게 진행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불안한 것은 이 클로저 바이러스라는 게, 통합을 통한 갈등의 해소, 통합으로써의 진화라고 하는 굉장히 지겨운 모티브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엔도 히로키는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고, 그래서 이렇게 커다란 주제를 들이대는 와중에도 결코 전개의 긴박감을 줄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에반게리온 이래 너무나 진부한 모티브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앞으로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될 것 같다. 엔도 히로키는 1권 날개에 "에반게리온을 봤을 때 에반게리온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해 버렸다고 생각했다"라고 적고 있는데 그는 혹시 아직도 그 뒤를 쫓고 있는 것일까?



 여담. 엔도 히로키가 에덴을 그리기 시작한 게 거의 데뷔 때 일이라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일찍 이런 원숙한 스타일을 완성해 냈는지 정말 놀랍기 그지 없다. 1권과 15권 사이에 그림체의 차이가 거의 없다니.









 창공의 상투스 1-4

 역시 꽤 괜찮은 SF. 약간의 미래에 우주에서 온 뭔가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해 버린 바다를 탐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SF 라고 해봐야 무늬 뿐인 액션 만화가 많은 상황에서 꽤 괜찮은 정통파라고 생각한다. 에덴이나 문 라이트 마일과 같은 만화들이 현실 세계의 갈등을 SF 세계에 반영하는 데 비교적 충실하다면, 창공의 상투스는 이런 반영보다는 '모험심'이라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이 만화에서 현실적인 알력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알력들을 그리는 데 힘을 쏟기 보다는, 세계의 복잡한 이해 갈등과는 상관 없이 미지의 것에 매료되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모험심'이라는 테마는 비록 현실의 두터운 벽 앞에 가려져 낭만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진지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창공의 상투스의 한 가지 큰 미덕은, 이렇게 그릴 것을 정해 놓고 그것에 전적으로 매진한다는 것이다. 창공의 상투스는 전개가 비교적 빠른 편인데, 이것은 배경 세계를 설명하거나 캐릭터의 디테일을 묘사하는 데 시간을 뺏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많은 만화들이 서사보다는 캐릭터 포장에 더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뚝심 있는 전개는 무척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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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중에서...


 사실 우리 서구인은 우리의 문화를 하나의 거대한 가상적인 박물관처럼 생각하며 거기서는 모든 삶의 형태와 모든 지적 입장이, 그것이 관조만으로 접할 수 있는 한, 동등하게 환영받는다고 여긴다. 따라서 여러 철학체계 중 하나에 불과한 마르크스주의라면, 기독교 신비주의자와 19세기 무정부주의자, 초현실주의자 및 문예부흥기의 인문주의자들과 더불어 그것에도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식으로 동화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 절대적인 믿음을 일정하게 요구하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종교들 자체도 이미지로 변형되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절충적인 전통 속에 쉽게 병존하고 있는 실정이니까. 그렇다. 사적 유물론의 구조적 독특함은 그것이 사유의 자율성 자체를 부정하는 데, 즉 자기 자신도 하나의 사상이면서도 순수사유가 사회적 행위의 위장된 양태로 기능하는 방식에 역점을 두며 정신의 물질적·역사적 현실을 거추장스럽도록 자꾸 상기시키는 데 있다. 이처럼 하나의 문화적 대상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문화 활동 일반에 적의를 품고 달려들어 그것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그것을 향수하는 데 전제되는 계급적 특권과 여가를 여지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의 정신적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없애버리며 서구의 맥락에서 자신이 참여하였던 문화소비 과정을 파탄시킨다. 그러므로 순수이성이나 관조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이란 바로 사적 유물론의 구조 자체-사유와 행동의 통일, 혹은 사상의 사회적 결정 등의 학설-이며, 서구 중산계급의 철학적 전통은 이를 마르크스주의 체계의 결함으로밖에 보지 못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우리가 그것을 거부한다고 여기는 바로 그 순간 오히려 그편에서 우리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데릭 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창비, 170p)

 




 예전에 이 문장에 매료되었을 때, 나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지적 호사가들을 위한 박물관의 한 자리에 놓여지는 것을 거부한다.' 지금 다시 원문과 비교해보니, 처음 부분과 마지막 부분만을 연결시켜 놓은, 논점을 미묘하게 벗어나버린 기억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이 문장을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에 대한 최고의 다시쓰기라고 평가하고는 감동을 받아서 '그래! 나도 마르크스주의를 소비할 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해야지!'라고 결심까지 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에 공부를 계속하면 닥치게 될 현실적 어려움과 더불어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어떤 사회적 가치를 가질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당시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나도 맑스를 소비할 것이 아니라, 맑스를 갖고 뭔가를 하자! 교양 삼아, 재미 삼아 책을 읽는 녀석들 따위에게 지지 않겠어!'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쥘 정도로 불타 올랐었다. 결국 그 때의 결의의 소박한 실천의 일환으로 블로그를 열 마음까지 갖게 되었던 것이다-_-;; 조금 시간이 흐른 지금은... 일단 '교양'으로라도 뭔가를 나불거릴 수 있을 만큼이라도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늘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을 따름이다-_-


 하여간 좀 어긋난 독해긴 했지만, 저 멋진 구절들은 분명히 마르크스주의가 품고 있는 오래된 정서들을 불러일으킨다.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의 물적인 조건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면서 낳는 효과는 단지 철학의 자율성과 완결성이라는 환상의 해체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시에 그 물적 조건을 가능하게 만드는 경제적 구조, 현재 절대적으로 차별적인 경제 구조를 보여주면서 철학에 그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적어도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에 대해, 그리고 문화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 유려한 문장이 제기하는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장이 갖는 호소력은 사고의 자율성이란 개념과 부르주아적인 '교양' 개념을 연결시키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사상의 자율성과 독립적인 가치는 그것을 삶과 분리시켜 향유할 수 있는 유한 계급에게나 가능했던 것이고, 이러한 교양은 계급을 가르는 중요한 정신적 기초로서 작용해 왔기 때문에 분노와 거부의 대상이 된다. 프레데릭 제임슨이 적은 것처럼, 이런 교양은 이미 '그 편에서' 거부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프레데릭 제임슨이 동일시하고 있는 대상이 거부하는 편이 아니라 거부 당하는 교양, 유한 계급이라는 것이 재밌게 생각된다. 그것은 이 글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독자가, '교양'의 개념 자체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현대적 상황의 새로운 '교양 계층'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사적 유물론적 사고으로부터 초래되는 어떤 악순환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번이 갖는 선언적(선동적) 효과는 그것이 실현되자 마자 그 역으로 전도된다.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발리바르는 11번을 논하며 "앞 문에서 쫓겨 난 철학이 됫 문으로 다시 들어 온다"라고 적고 있는데(불확실;), 제임슨의 문장은 선언이 아니라, 이 문제를 그 자체로 증거하고, 치밀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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