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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러와 과학의 언저리에서 태어난 불운한 괴생명체들

빛바랜 SF영화로 디지털미래 읽기 2

 

호러와 과학의 언저리에서 태어난 불운한 괴생명체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본 격적으로 SF영화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호러 공포영화와 SF 공상과학 영화의 경계에 서 있는 장르와 그에 출현하는 괴물들을 어찌 다루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영어에는 괴물의 두 가지 구분법이 있다. 호러영화에 출현하는 인간을 닮은 괴물은 말 그대로 '괴물' (the monster)인 반면 SF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 괴수나 외계인같은 인간 외의 괴물은 보통 '그들' (them) 혹은 '괴생명체' (the creature)로 불린다. 영화를 보다보면 한 가지 장르에 담기 어렵고, 그래서 이게 괴물인지 생명체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호러 장르 같기도 하고 SF 장르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초창기 미 영화사에서 SF와 호러의 언저리에 서있는 특이한 괴생명체, 과연 무엇이 존재했을까?     


호러속 괴물

영화학 교수 수전 소벅Susan Sobchack은 호러와 SF 영화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호러의 괴물이 신과 자연의 질서를 깨는 혼란의 근원이라면, SF 영화의 괴물은 인간이 만든 기성 사회 질서의 혼란을 상징한다. 그럴 듯한 얘기다. 예를 들어 <프랑켄쉬타인 Frankenstein (1931)>에서 프 랑켄쉬타인 박사가 만들어낸 흉측한 괴물은 조물주가 주재하는 생명 탄생의 유일한 권한에 도전한다. 이 인간 계율을 깨는 시도는 한 작은 이름없는 유럽 마을로부터 시작된다. 프랑켄쉬타인 박사와 곱사등이 조수 프리츠는 죽은 시체들의 일부를 이곳저곳에서 훔쳐 그 시 체 조각을 꿰매고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될 기괴한 괴물에 전기를 흘려 생명을 불어넣는다. 예로부터 서구 유럽 의학에선 흐르는 전기를 생명의 에너지로 보았던 선례를 고려하면, 인간 닮은 괴물의 탄생은 그리 허황된 상황 설정만은 아닌 듯하다.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음산한 장면들과 그 침침한 배경, 미친 과학자의 광기와 계속된 살인 현장 등 으스스한 배경 요인들은 <프랑켄쉬타인>을 SF 보단 호러의 고전으로 보게끔 한다.

   다른 특징을 보자. 프랑켄쉬타인 사건의 발단이 이름 모를 지구촌 변두리라 하였다. 괴물 탄생의 비극은 대단히 지엽적이고, 그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 바로 종료된다. 괴물은 게다가 인간을 빼닮았고, 인간이 될 수 없는 그의 비극적 현실을 보여준다. 허나 SF 영화속 괴물이 미치는 효과는 전 인류의 파국처럼 크나큰 재난의 경우가 많다. SF영화의 '그것' 혹은 '그들' 또한 호러의 괴물과는 좀 다르다. SF 영화의 괴물은 대체로 사람이 아니다. 파충류나 곤충, 혹은 인간 아닌 외계 생명체가 대부분이다. 괴물이 사람을 닮아 보이면 아무래도 영화에서 관객이 느끼는 현실 감각이 증가하나, 사람 아닌 괴물에는 관객이 감각이 무뎌진다. 핵 재앙처럼 도시를 재난으로 몰아넣고 비행접시를 몰고 레이저 빔으로 인간과 건물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려도 관객은 이를 스펙터클로 볼 뿐 게서 그리 공포를 느끼질 않는다. 이것이 호러와 SF의 차이이다.


SF 영화속 '그들' 

개미, 파리, 거미, 벌, 사마귀, 바퀴벌레 등 곤충들은 언제나 거대 괴물들이나 외계인을 그리는데 있어서 그 상상력의 근원이다. <그들이닷! Them! (1954) >은 거대 곤충 괴물을 거의 최초로 다룬 SF작이다. 영화는 2차 대전이래 핵 실험지로 쓰였던 뉴멕시코 사막에서 시작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수년간 핵에 노출되어 돌연변이로 점점 몸이 거대해진 사막 개미들이 더 큰 먹이감을 찾아 급기야 주위의 인간을 습격하게 된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폐허와 인간들의 실종만 남는다. 사건의 수습은 사막 속의 개미집을 불태워버리는 일로 종결되는 듯 했다. 지하의 개미 동굴에서 아기집과 유충을 화염방사기로 태워죽였으나 (이 장면은 이후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의 <에이리언 2 Alien 2: Aliens (1986)>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다), 상황은 이미 날개를 가진 여왕 개미와 수개미들이 이미 미 전역으로 날아가고 난 뒤다. 로스엔젤레스를 끝으로, 생존 파악이 된 거대 개미들이 군인들에 의해 전멸된다.

   < 그들이닷!>에서 나오는, 괴이한 윙윙 소리를 내며 더듬이와 집게 이빨을 휘두르며 다니는 흉측하고 기괴한 돌연변이 개미가 관객에게 그리 큰 공포감을 주진 못한다. 그저 관객에게 잘 꾸며진 흥미진진한 스펙타클을 보는 재미를 줄 뿐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인간이 야기한 질서의 혼돈이 어떻게 오고 확산되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하는데 있다. 인간의 핵 실험으로 한 지역에서 서식하던 곤충이 돌연변이가 되고 이들이 날개짓해 다른 지역으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그저 관객은 에이즈의 무서운 파급력만큼이나 인간 자신에 의해 초래된 괴물로부터 종말론적 메시지를 읽는다. 지난 호에서 본, 고 질라와 레도사우루스 등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고대 거대 괴수들이 인간의 핵 실험으로 깨어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얘기는 특히 5, 60년대 SF 영화들을 계속 지배해온 주제들이다. 그 점에서 <그들이닷!>의 거대 돌연변이 개미의 경우도 그 정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 하나. 아써 크랩트리Arthur Crabtree 감독의 <얼굴 없는 악마 Fiend without a Face (1958)> 의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뇌덩어리도 같은 태생의 것이다. 이 괴물은 공군기지의 원자로 레이더 실험에 의해 만들어진 기괴한 생물체들이다. 곤충만큼이나 뇌를 이용한 괴물의 형상은 SF 영화의 기본 컨셉 중 하나다. 인간의 몸속을 지배하는 외계 행성의 날아다니는 뇌 괴물이나 뇌수가 밖으로 언덕처럼 툭 튀어 나있는 외계인의 두상은, 당시 SF 영화의 주 단골메뉴였다. <얼굴없는 악마>의 뇌덩어리들은 더군다나 인간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얼굴없는 악마다. 그들은 인간 목 뒷덜미에 들러붙어 뇌수를 빨아먹고 휴지처럼 인간을 구겨 버린다. 잔인한 호러의 성격을 충분히 보여주나, 대체로 인간이 세운 과학의 폐해와 비윤리성을 지적하는 SF 영화의 고전적 스토리가 그 중심이다. 공군기지 원자로 실험지 주변 마을 사람들이 지녔던 불만과 공포, 예컨대 목장의 가축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크지 않거나 알이나 우유를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는 이유가 핵 원자로 때문이라는 상황 설정은 대단히 친환경적이다. 어쨌거나 그 뇌덩어리들의 최후는 원자로 가동을 멈추면서 일단락된다. 영화에선 결국 과학의 오류로 만들어진 핵 원자로를 악마로 탓한다.  `

   

호러와 과학의 잡종, 아가미인간의 비극

앞 서 몇몇 영화들을 가지고 호러와 SF 장르를 달리 나눠보았으나, 이를 항시 구분할 이유가 없다. 혹자는 5, 60년대 미국 영화를 호러와 SF의 혼종의 역사로 보기도 하고, 다른 이는 호러의 아류로 SF 영화를 보는 이도 있다. 그만큼 당시 호러와 과학의 경계가 희미했다. 무엇보다 그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린 작품으로 필자는 '아가미 인간the Gill Man' 3부작 (<검은 산호초의 아가미인간 Creature from the Black Lagoon (1954)>, <아가미인간의 복수 Revenge of the Creature (1955)>, 그리고 <인간 속의 아가미인간 The Creature walks among us (1956)>)을 꼽고 싶다. 3부작에선 아가미 인간이 물밑에서 벌이는 대인간 테러(호러의 요건), 그리고 과학자 집단이 벌이는 비윤리적 면모(SF의 요건)를 함께 볼 수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수억 만년전 사라진 인간과 물고기의 혼종인 아가미인간이 아마존에 다시 나타나 인간들을 습격한다. 그러나, 다 이유가 있는 습격이다. 1탄에선 아가미인간이 자신의 생존 영역을 지키기 위해, 2탄에선 수족관 관상용으로 플로리다로 잡혀온 데 대한 복수극으로, 마지막 3탄에선 아가미와 비늘을 잃고 불완전한 육지 괴물이 된 그를 실험하는데 대한 분노로써 이뤄진다. 그래서, 아가미인간의 폭력은 꽤 정당해 보이고, <프랑켄쉬타인>에서 보였던 관객의 괴물에 대한 '측은지심'이 예서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스릴은 아가미인간이 여주인공들에 대해 보이는 에로틱한 반응이다. 여주인공들의 수중 다이빙에 맞춰  그 아래서 함께 따라 물속을 헤엄치거나 (이 장면이 후에 <죠스 Jaws (1975)>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한다), 혹은 욕실 안에 들어간 여성을 베란다문을 통해 들여다보고 서있는 아가미인간의 모습에서, SF보다 호러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반면 물고기 수면제, 다이나마이트, 작살을 이용해 공격하거나 아마존에 서식하는 아가미인간의 생존 영역을 침범해 선창 밑에 가두고 (1탄), 아마존에서 플로리다까지 끌고와 인간들의 볼거리로 수족관에 넣어두고 (2탄), 실험용으로 그를 감금하는 (3탄), 탐사대원들과 과학자들에게서 SF의 기본 특징들인 반윤리/ 반환경의 인간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천연의 아마존 자연에 서식하던 아가미인간 (환경)과 이를 해하려는 인공적 질서간의 적대에서 승리는 후자에게 돌아간다. 그 불운의 괴물은, 1편에선 인간의 총과 작살에 맞아 아마존 물속으로 사라진다. 다시 2편에서 부활한 그는 비슷하게 군인들의 총에 맞아 깊은 심연 속으로 재차 사라진다. 마지막 3편에서는 아가미와 비늘을 잃어 심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에서 죽음에 이른다. 이렇듯 아가미인간 3부작은 아이들이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개구리 이야기같다는 기분이다. 인간의 과학과 현실에 위협받고 배반당한 아가미인간의 불행한 모습에서 그에 대한 반감보단 관객은 동정을 느낀다. 이 비극적 괴물에게서 겁없는 인간들에게 다칠대로 다쳐 소생불가능한 자연을 본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래서일까, 삼세번이나 벌어지는 물고기인간의 죽임이 더 잔인해 보인다. (따뜻한 디지털세상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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