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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네트워커에 연재된 사이방가르드 아트에 관한 글들

론 잉글리쉬의 '팝파겐다'

39호(200611) 사이방가르드 소비 문화형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한 괴물 그리기, 론 잉글리쉬의 '팝파겐다' 국내에서도 한 시민단체의 활동가에 의해 다시 시도되었던 <나를 뻥튀겨줘 Supersize me>란 다큐멘터리를 기억하시는가. 그 미국 영화감독은 몇 달 동안 맥도널드의 패스트푸드 음식으로 연명하며 얼마나 몸이 빠르게 망가질 수 있는지를 그 스스로 온 몸으로 느끼며 실감나게 표현했다. 그 다큐를 주의 깊게 본 사람이라면, 내용 마디마디에 매번 등장했던 음습한 화제 전환용 미술 작품들을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간해선 잊혀질 수 없는 투실투실 살이 쪄 무서워 보이는 로널드 맥도널드 인형들, 그리고 삐에로 얼굴과 복장을 하고 담배를 뿜어내며 정면을 빤히 쳐다보는 기괴한 아이들이 기억날 것이다. 이 얼굴들은 분명 아이들이었으나, 어른들의 놀이를 이미 모두 탐독한 아이들이었다. 술 마시고, 담배를 피고, 펩시콜라를 마시고, 어른들의 옷을 입고, 카드 패를 바에서 돌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른을 흉내낸다기 보다는 문화 소비가 이미 어른 수준에 도달한 애늙은이들의 그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자본주의 소비문화로의 오염 혹은 전염에 가깝다. 론 잉글리쉬(Ron English)란 작가는 이렇듯 그로테스크하고 비정상적으로 오염된 아이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표현한다. 자본주의의 기괴한 괴물의 모습을 닮은 아이들을 통해 형상화하고 비꼬는 지점에서 잉글리쉬의 작품들은 충분히 선동적이다. 물론 미국 소비문화의 다양한 캐릭터들을 이용해 이를 미술에 응용한다는 점에서 그의 예술은 팝아트의 기본 요건을 갖추고 있다. 하여 그의 작품은 팝아트와 프로파겐다의 혼합어인 '팝파겐다(popaganda)'로 불린다. 예수를 대신해 십자가에 매달린 디즈니, 마를린 먼로의 탐스러운 가슴 대신 매달린 디즈니 얼굴, 이상하게 구역질이 날 것만 같은 캐릭터 '파워퍼프 걸'의 속옷 입은 모습, 그리고 해적, 카우보이, 선술집 주당들과 삐에로 분장을 한 아이들 등은 자본주의 상품문화가 만들어내는 비정상성의 기괴한 모습을 극대화한다. 그러니 대개 잉글리쉬의 작품을 처음 접하면, 왠지 엽기적인 듯싶고 섬ㅤㅉㅣㅅ하고 슬슬 무섬증까지 나기 마련이다. 마를린 먼로의 맨 가슴이 만지고 싶고 빨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듯, 잉글리쉬가 그린 그녀의 가슴에 매달린 디즈니 캐릭터는 현대 아이들과 그 세례를 받고 자란 어른들에게 또 다른 욕망의 실체다. 철마다 제작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시청하고, 그것도 부족해 디브이디와 관련 비디오 게임 타이틀을 구입하고, 개봉에 맞춰 만들어지는 디즈니 캐릭터 장난감을 사서 놀아보지 않은 아이들이 거의 없다. 잉글리쉬의 탐욕스럽게 살이 찐 로널드 맥도널드도 아이들을 유혹하는데 국경을 초월하고, 당연 계급에 준해 그 대상을 찾는다. 그 본산인 미국에서 맥도널드는 흑인과 히스패닉 등 하층 서민 가족들이 한 끼 식사를 때우고 살을 불리는, 그리고 디즈니 캐릭터와 같은 저질의 장난감으로 아이들의 문화 소비욕을 일시적으로 무마하는 곳으로 애용된다. 이런 현실에서 자란 아이들의 얼굴은 정상일 리가 없다. 아이들의 유전자에 전이된 쓰레기 소비문화는 그들의 형상을 무섭게 일그러뜨린다. 어른처럼 행동하는 아이들. 소비의 욕구만은 이미 어른의 수준에 이른 아이들. 잉글리쉬가 그린 아이들은 대개 모두들 시장에 내걸린 모델처럼 분장을 하고 폼을 잡고 정면을 응시한다. 허나 어느 아이의 얼굴에서도 순진함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팝아트의 작품 말고도, 잉글리쉬는 일찌감치 길거리 대형 광고판을 이용해 걸프전, 부시행정부, 기업 문화 등에 관한 시사 풍자를 지속해왔다. 그는 거리를 가득 메우는 상품 광고의 진열 방식에 되먹임을 놓는 방식에 있어서 길거리 대형 광고판을 불법 점유하는 것 이상 좋은 방법은 없다고 본다. 미국 내 하위문화의 갈래 중 '광고판 해방전선 (the Billboard Liberation Front)' 그룹이 꾸준히 거리 문화를 전복하려 노력했듯, 그의 창작 방식만큼이나 광고판 점유 시도는 길거리 소비문화를 역전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잉글리쉬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자본주의의 비정상성에서 비롯하는 풍자적 표현들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기 보단 심각함을 드리우고 왠지 모를 거북스러움을 안겨준다. 그 거북스러움은 일그러지고 중독증을 유발하는 소비문화의 치부를 들춰내기 때문일 게다. 이는 상품 문화의 수많은 오염물들이 인간과 비정상적으로 배합되는 무의식 관계를 적절하게 드러내는데 있어서, 그의 의도가 꽤 잘 먹혀들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새로운 작품 활동이 더욱 기대된다. 참고 할 것들 론 잉글리쉬 웹페이지 http://popaganda.com/ 론 잉글리쉬의 책 Popaganda : The art and subversion of Ron English, 2004, Last G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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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그러들지 않는 한 혁명가의 아이콘, '유비쿼터스' 체 게바라

올 여름에 옥스퍼드에 갈 일이 있어 그 곳을 경유해 런던을 방문했다. 런던에 가자마자 빅토리아와 알버트 박물관이란 곳을 찾았다. 7, 8월 두 달여 동안 체 게바라의 특별 전시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10평 남짓한 곳에 마련된 체의 전시관은 생각보다 규모가 아담했다. 이곳에서 혁명가의 이미지를 새겨놓은 다양한 아이콘들을 볼 수 있었다. 체의 이미지가 새겨진 쿠바산 시가, 포스터, 티셔츠, 사진, 버튼, 인형, 문신, 가방, 벽화, 화폐, 맥주, 시계 등이 다채롭게 전시돼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60년대 활동했던 한 혁명가의 이미지가 이토록 전 세계 대중의 뇌리와 각종 상품과 신체에 깊게 각인된 적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혁명가 체의 대중적 이미지는 국적을 뛰어넘고, 동성애자와 원주민 등 소수자 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예수의 희생과 존 레논의 평화주의에 비교되고, 선동 예술의 아이콘으로 등극하고, 길거리 패션의 약호로 쓰여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의학을 전공하고, 과테말라에서 저항을 조직하다 탈출해 55년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운명적으로 만나고, 59년 쿠바혁명의 성공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홀연히 모든 관직을 훌훌 털고나와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 등지로 떠돌며 공산주의 게릴라 운동을 조직하고, 결국 볼리비아에서 군부에 맞서다 미 CIA의 정보력과 미국에서 훈련받은 2천여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쫓기다 부상을 입고 잡혀, 허름한 학교건물 안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전사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39살의 나이로 마감했으니, 한창때에 갔다. 체의 베레모, 강인한 눈빛의 응시, 굵은 얼굴선, 가죽 외투, 그리고 흐트러진 수염 등은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자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2000년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꼽힌 데는 그 자신이 벌인 끊임없는 권력에 대한 자기부정과 평생을 업으로 삼았던 게릴라 투쟁 말고도, 이상하리만치 전 세계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그가 지닌 특유의 이미지가 한몫했다. 실지 체의 아이콘이 모두에게 각인된 데는 60년 3월 <체, 게릴라 영웅>(Che, Guerillero Heroico)이란 제목으로 찍은 알베르또 디아즈 구띠에레즈(그의 사진 작업실 이름을 따서 흔히 알베르또를 '코다'로 부른다)의 사진 작품이 계기가 된다. 코다(Korda)는 피델의 전속 사진사였으나, 그가 찍은 체 사진들이 오히려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체를 대중문화와 예술계의 중요 상징으로 부각시킨다. 2001년 그가 파리에서 죽기까지 코다는 사진집과 전시회를 통해 쿠바혁명과 체 특유의 이미지를 전 세계에 알렸던 인물로 기록된다. 실지 우리가 보는 그의 친근한 이미지들은 코다가 만들어낸 사진의 변형물들이다. 어쨌거나 혁명의 세월이 흘러 이제 체가 그토록 싸웠던 자본주의의 물신화된 가치 행태에 그 스스로가 상품 아이콘이 되어 팔리는 현실이 됐다. 젊은이들은 체 가방을 매고, 길거리 야시장에서 체 셔츠를 사 입고, 체 문신을 팔뚝에 새기고, 체 '빤쓰'를 입고, 체 맥주를 마신다. 일부 그의 아이콘이 자본주의 상품화의 경계를 넘나든다고는 하나, 멕시코 농민군들의 라깡도나 정글에 새겨진 빛바랜 그의 벽화와 빈민들의 삶터에 그려진 체의 모습, 소수 저항의 패러디로 그려진 게이 모습의 체, 예수의 얼굴로 핍박받는 체, 경건해야할 수녀의 젖가슴 위로 새겨진 체, 미국 달러 위에 그려진 체, 그리고, 복제되고 새롭게 창작되어 인터넷을 통해 흐르는 수많은 체의 디지털 이미지들은 저항과 자유의 아이콘이 되기에 충분하다. 체는 죽어서도 이렇듯 현대 자본주의의 야만에 들러붙어 게릴라전을 펼친다. 마치 시스템에 경련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처럼, 물신화된 상품들에 들러붙고 옷과 몸에 새겨져 거리 곳곳을 메운다. 이는 단순히 과거 혁명 시절에 대한 향수와는 다르다. 현대인의 자본주의에 대한 잠재된 분노 수위를 따지려면 얼마나 많은 체의 아이콘들이 사방에서 목격되는가를 봐야 한다. 이는 정비례한다. 그들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단번에 터뜨릴 수 없는 답답한 분노의 출구로 체의 아이콘이 종종 선택되는 것이다. 우리 속에 잠재하는 분노의 게릴라전이 승리하는 날이면, 아마도 체 아이콘의 '유비쿼터스'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런던에서의 이번 체 전시회 방문은 필자에게 만감을 안겨주었다. 체는 죽어서 진정 살아있다는 사실만 확인한 채. 관련 주요 전시회 페이지들 빅토리아와 알버트 박물관 체 게바라 전시회 http://www.vam.ac.uk/che 캘리포니아 사진 박물관 체 게바라 전시회 http://138.23.124.165/exhibitions/che/ * 빅토리아와 알버트 박물관 체 게바라 전시회 * 캘리포니아 사진 박물관 체 게바라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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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상품 문화의 은밀한 거래꾼, 마크 에코

마크 에코(Mark Ecko)하면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너무나 잘 알려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과거 언더그라운드 그라피티 예술가로 활동하다, 의류 사업에 뛰어들면서 젊은 층 중심으로 캐주얼 패션을 주도하는 현직 디자이너로 급성장했다. 그는 일곱 개의 패션 브랜드와 잡지 사업을 확장하며 에코기업을 일궜다. 그런 그가 올해 2월에는 비디오게임 유통업체 아타리와 손을 잡고 <궐기: 억압받는 콘텐츠 (Getting Up: Contents under Pressure)>란 게임 타이틀을 전 세계에 출시했다. 이 게임은 국내에서도 18세 이상 등급으로 올 6월에 출시됐다. 국내에선 그저 여러 게임 중 하나로 배급된 것과 달리, 여러 나라들에서 에코의 게임이 청소년 범죄를 충동한다하여 부정적 반응이 거세게 일었다. 게임의 배급을 막으려는 조직적인 노력도 이뤄졌다. 예컨대 뉴욕 시장 블룸버그는 그 비디오게임 출시에 맞춰 이뤄진 에코의 맨하튼 시내 기념행사를 저지하려 했고, 로스앤젤레스와 플로리다 주에선 아예 이 게임의 유통을 금하자고 정치인들이 발 벗고 나섰다. 영국에서도 이 게임을 막기 위한 필사적 노력이 경주된 적이 있다. 호주는 아예 그 유통을 막아버렸다. 에코의 게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도 여러 국가들에서 한사코 손사래를 쳤을까? 무엇보다 게임의 주제가 문제였다. 여러 도시나 국가들에서 에코의 게임이 사전 검열을 받았던 첫 번째 이유는, 그 게임이 청소년들에게 그라피티를 학습시킨다는 이유였다. 그라피티하면 한국말로 벽낙서 정도로 해석된다. 스프레이, 페인트, 스텐실, 스티커 등을 이용해 권력의 장소나 건물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거나, 그도 아니면 동네 담벼락에 남몰래 그려진 익명의 이미지들을 지칭한다. 이미 물리적 그라피티의 흔적들을 박박 지워 없애는데, 한 해 런던 시예산만 하더라도 260만 달러가 소요된다고 한다. 그러니 로스앤젤레스, 파리, 런던, 뉴욕 등지에 도시 행정당국자들의 청결한 도시 위생을 위한 노력에서 보자면, 그라피티는 시 예산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좀도둑질과 같았다. 그라피티로 인한 재정 부담에 한참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다, 청소년들의 낙서 욕망을 더욱 부채질하는 비디오 게임이 등장하니 각국 시정부들이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에코의 <궐기>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그라피티 혁명가, 트레인(Trane)을 대리하여 게임을 수행한다. 트레인은 가공의 부패한 도시를 배경으로 자신의 영역을 그라피티로 표시하며 확장하고, 그를 막으려는 도시의 악덕 시장과 폭력적인 경찰당국에 대항해 싸운다. 에코의 게임에는 이렇듯 정의와 부패의 대당 구조가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정의는 트레인과 같은 영웅과 그를 돕기 위해 출현하는 가상의 인물들, 그라피티 예술가들이다. 실지 이 게임에는 트레인을 훈련시키는 실존 그라피티 영웅들이 등장한다. 80년대부터 뉴욕 지하철 페인팅으로 이름을 날렸던 코우프(Cope)2, 티-키드(T-Kid), '복종'(Obey) 시리즈 스텐실 판화의 대가 씬(Seen) 등과 같은 전설적인 그라피티 예술가들이 출현한다. 반대로 부패는 가공의 도시를 장악한 시장과 경찰서장의 폭력적 지배에서 나온다. 비록 가공이긴 하나 거의 뉴욕시를 연상시키는 게임의 무대는 당연히 블룸버그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초반부터 시 당국은 과격한 '정치적 행동주의'를 유도하는 에코의 불순한 게임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필자도 미국 언론을 통해 익히 그 비디오게임 내용의 선동성에 대한 논란을 접하고, 자못 궁금증이 생겨 최근 비디오 게임 가게에서 엑스박스용 타이틀을 구입해 놀아본 적이 있다. 그러나 놀아보니 사태는 상당히 다르다. 이미 게임에 몰두하다보면, 플레이어는 그라피티를 배우고 정치적 자각을 하는 것에 무감각해진다. 시 당국의 우려와는 달리, 조이스틱의 반복 버튼을 통해 주먹 휘두르고 발길질하고 벽타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비디오게임의 규칙은 크게 다를 게 없다. 큰 틀에서 에코의 게임은 단지 게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코는 영리하다. 우탕클랜의 리더인 RZA나 MC 라킴과 같은 강성 레퍼들에게 배경 음악을 부탁하고, 그라피티의 영웅들을 캐릭터로 집어넣고, 적절히 정치적 맥락을 자신의 게임에 가미시키고, 이용자가 직접 그려 넣는 그라피티의 예술적 묘미와 그 정치적 급진성을 부각시켰다. 아이러니하게 게임이 출시되기도 전에 보여준 시 당국자들의 흥분은 에코에겐 광고 없이 거저 게임의 이미지를 고양시키는 기회가 됐다. 그의 새로움은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엔터테인먼트 사업과 결합하여, 전자의 위치를 주변문화에서 대중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능력이다. 반면 그의 위험성은 이를 통해 소위 언더그라운드 저항의 가치를 현대 자본주의의 상품체계 안으로 쑤셔 넣는데 있다. 일전에 소개했던 영국의 스텐실 그라피티 예술가인 뱅씨(Banksy)는 그의 정치적 작품들이 주류 예술계에 크게 알려지면서 소위 전시예술에 의해 포섭되고 박제화될 위험성을 보여주었으나, 반대로 에코는 철저하게 장사꾼의 길을 걸으면서 급진적 저항의 기획을 돈벌이로 각색하는 일에 천착한다. 하지만, 에코의 이번 시도가 상당히 좌파예술가들에게 자극제가 돼야한다고 본다. 헐리웃 담론과 거대 자본에 의해 휘청거리는 비디오 게임의 질과 수준을 고려하면, 이처럼 청소년을 교육하는 정치 학습의 게임들이 재고될 필요가 있다. 소비를 조장하고 폭력의 배설을 자극하는 에코 게임의 부정적 면모를 걷어낸다면, 정치를 학습하고 저항을 기획하는 '신나는' 게임을 기획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 마크 에코의 게임 홈페이지 * 마크 에코의 게임 논란 기사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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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권력을 등치는 영리한 악동들, 예스맨

"얘들은 아주 쓰레기같은 놈들이지. 요런 놈들에게 자유를 줘선 안돼." 미 부시 대통령을 이만큼 격노하게 만든 악동들이 있다. 바로 '예스맨 (The Yes Men)'이다. 지난 미국 대선 때 부시 선거본부 패러디 사이트를 만들어 부시 후보 진영에 골탕을 먹였던 장본인들이다. 예스맨의 핵심 구성원은 앤디(Andy Bichlbaum)와 마이크(Mike Bonanno)다. 예스맨의 활동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그들의 활동을 담은 같은 이름의 다큐멘터리, <예스맨> (2003)이었다. 마이크는 그리 낯선 인물이 아니다. 지난 사이방가르드문화체험에도 실린 바 있었던, 저항을 사업화하여 자금줄과 활동가를 엮어오던 '아트마크'의 프로젝트들 중에 '바비 해방군' 사업이 있었고, 그 사업에 예스맨의 마이크가 참여했던 전력이 있다. 바비 해방군이라 하면 바비 인형과 미군병사의 목소리를 바꿔치기 하여 미국 아이들의 왜곡된 대중문화를 조롱했던 경우다. YES MEN 예스맨의 영화를 보면, 마이크는 주로 일거리가 생기면 전체 얼개를 짜고 벌일 일거리에 대한 구상을 담당하고, 먹물티가 제법 풍기는 앤디는 학회, 연설 발제, 그리고 텔레비전 인터뷰를 맡는다. 먹이거리가 생기면 이 둘은 작업 구상과 실행을 적절히 분담하여 일을 처리하는 잘 어울리는 콤비다. 예스맨이 크게 사회적 파장을 불러온 것은, 1999년부터다. 당시 그들은 패러디 세계무역기구(WTO) 웹사이트를 개설했고, 이를 잘못알고 오인했던 유럽인들로부터 국제무역법 관련 학회의 초청까지 받는다. 물론 자격은 세계무역기구의 대변인이나 법률자문역이다. 미국에서 오스트리아의 연설장에 당도하기까지 그들은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세계무역기구의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는 파격 제안서, 연설 도중의 이벤트를 위한 엽기적인 의상, 가짜 세계무역기구 신분증과 명함 등 이 모든 것이 하루의 거사를 위해 준비된다. 거사 당일 연극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연설장에 들어서면 관객들 모두는 이들 예스맨을 세계무역기구를 대표하는 전문가들로 믿는다. 관객들은 뭔가 잔뜩 무역법에 관련해 전문가적 식견을 듣길 원하지만, 발표가 시작되자마자 앤디와 마이크는 자신들이 준비한 엉뚱한 연설과 퍼포먼스로 청중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예스맨은 세계무역기구가 이제까지 저개발국에 미친 자본 논리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업적으로 세계의 민주주의가 이룩되었고, 보다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선 나라마다 경매를 해 돈을 가장 많이 건 나라에 모든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자본주의의 흉한 몰골을 선전하다, 세계무역기구의 발전을 위해선 경영자들의 스트레스 지수를 내리면서 언제든지 노동자들을 감시할 수 있는 필수품인 하이테크 맞춤 의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때를 맞춰 마이크가 앤디의 정장을 잡아 뜯어내면, 마치 슈퍼맨처럼 그의 완전히 다른 기괴한 의상이 드러난다. 발표장은 웅성거리고 혼란에 빠진다. 앤디의 아랫도리에선 갑자기 넉자 크기의 거대한 성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그 위에 리모컨과 영상이 갖추어진 플랫폼이 뜬다. 앤디의 퍼포먼스는 벽면에 비춰진 파워포인트의 그래픽 영상과 함께 계속된다. YES MEN 예스맨은 이 하이테크 의상이 세계의 경영자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스트레스 지수를 확인하고 모니터로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데 제격이라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딴 짓을 하거나 게으른 노동자들이 보이면, 경영자의 성기 플랫폼에 진동이 전달되고 이에 즉각적으로 버튼을 누르면 노동자가 전자 충격으로 실신할 수 있는 첨단 원격 시스템이라 선전한다. 청중이 혼란스러워 할 무렵, 이미 앤디와 마이크는 보따리를 챙겨 그 자리를 떠난다. 예스맨의 악동 짓은 끝이 없다. 대학 강당에선 학생들에게 점심으로 맥도널드 햄버거를 돌린다. 그리고선 인류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난한 나라에 인간의 화장실 변기에서 수거된 똥을 잘 정화 처리해 그 건더기를 모아 질 좋은 햄버거 패드를 만들어 공급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잘 만들어진 그래픽 화면이 제공된다. 분노한 학생들은 먹던 햄버거를 뱉거나 던지거나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난다. 또 다른 예로, 세계무역기구 전문가로 나선 앤디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하여 파리의 모텔에 자리를 잡고, 모 텔레비전 원격 시사 토론에 등장해 한 유럽의 시민단체 활동가와 토론을 벌인다. 여느 때처럼 게서도 자유 시장의 논리를 강변하며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예스맨이 원한 바대로 토론 결과는 시민단체 활동가의 압승이다. 예스맨은 이처럼 전 세계를 주름잡으며 세계 자본주의의 한심하고 잔인한 면모를 풍자하고 다닌다. 발표장의 기괴한 의상은 현대 자본가들의 희화화된 면모를 보여주고, 똥으로 정화 처리된 햄버거는 후진국의 삶을 파먹는 패스트푸드의 잔인성을 고발하고, 텔레비전에선 시민단체들의 주장을 에둘러 후원한다. 자본을 과잉 옹호하며 벌이는 예스맨의 비정상성이 관객과 청중의 반발을 불러올 때, 이것이 이들이 원하는 교육 효과다. 예스맨이 벌이는 자본을 대리한 흉물스런 행동과 말에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 대한 증오심을 배우는 것이다. 예스맨들이 노리는 효과는 대중 교육과 언론 플레이다. 전자는 정해진 극소수가 모인 강연장에서 벌어져 그 효과가 적지만, 후자는 좀 다르다. 여러 언론들은 예스맨들에 관심을 갖고 이들의 활동 이유를 낱낱이 소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스맨의 활동이 사회적 파급력을 갖는 것은 주로 후자에서 나온다. 물론 이들이 벌이는 악동 짓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키나, 국제 무역 조직과 초국적기업에 대한 예스맨들의 자칭 '대변인' 노릇은 또 다른 실천 전술이란 면에서 신선한 시사점을 준다. 억압에 대한 밖에서의 저항이 아니라, 그들 내부의 바이러스가 되는 방식에 대한 고민 말이다. YES MEN YES MEN * 예스맨 공식 홈페이지 * 예스맨 공식 다큐 페이지 * 예스맨 유사 세계무역기구(WTO)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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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언더그라운드 시사 만평의 기수, 앤디 싱어

앤디 싱어(Andy Singer)의 만평을 접한 것은 아주 최근 일이다. 평소에 만화책을 즐겨 보지만, 만평은 그리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과거 보수 꼴통들이 만들어내는 신문들의 어처구니없는 만평들에 질려버린 탓도 있다. 그러다 재밌는 책을 찾아냈다. 테드 랄(Ted Rall)의 <태도 Attitude> 첫 번째 시리즈인데, 이 책은 전복적인 정치 성향을 지닌 미국 내 언더그라운드 화백들을 꼽아 소개하고 있다. 톰 투머로우(Tom Tomorrow) 등 대중적 작가의 이름이 눈에 띄었지만, 유난히 시선을 잡아끈 것은 싱어란 작가였다. 이제 국내 정치 만평의 수준과 시각에서 본다면, 한겨레의 박재동과 장봉군, 미디어오늘의 이용호, 내일신문의 김경수 화백 등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미국 작가 싱어에겐 뭔가 세계에 대한 실존적 자의식과 그만의 독특한 다른 질감이 느껴진다. bush propaganda 랄이 묶어 펴낸 싱어의 작품집, <출구는 없다 No Exit>는 누구보다 절제된 한 컷짜리 만평들로 꾸며져 있다. 그가 지닌 장점은 크게 셋이다. 주제의 보편성, 최소 형식, 그리고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다. 주제의 보편성이라 함은 대개 그의 환경친화적 사고, 반상업주의, 그리고 보수 우익에 대한 냉소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영어권 세계의 독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공감하고 유대를 갖게 만드는 주제들이다. 형식의 간결성은 그의 명료한 상황설명 글과 그림 전개에서 확연해진다. 글은 절제되고, 그림의 세세함은 맥락이 필요한 정도까지다. 글이 어지럽고 하고 싶은 얘기를 꾸역꾸역 잡아넣으면, 독자의 시선은 멀어진다. 싱어의 능력은 비록 간단치 않지만 단순한 글과 그림에 살아있는 현실의 질감을 불어넣는다. 형식의 단순함이 오히려 그가 보여주는 진실성의 값을 상승시킨다. 그 사회와 정치의 맥락이 어떤 이에게 먼 풍경이라 하더라도, 싱어의 그 자체 한 컷의 만평에선 논리적 구조와 소구력이 충분히 구사된다. bush_media trick 무엇보다 싱어는 풍자와 유머를 잘 배합하는 작가다. 권력에 대한 냉소가 어설프면 작가의 자조나 빈정거림에 그치거나 독자의 헛웃음을 유발하기 십상이나, 제대로 그린 만평은 권력을 심히 불편하게 하거나 읽는 이의 눈을 즐겁게 만든다. 싱어는 그런 생생한 유머의 힘이 있다. 만평가로서 그의 색다른 매력은 정치와 문화의 경계에 선 작업들이다. 주류 대중 매체가 아닌 비주류 지역 정치, 문화 잡지에 기고한 경력이 그를 언더그라운드 시사 만평가로 평가하는 첫째 이유일 게다. 그가 지닌 소재의 다양성 또한 기존 정치 만평의 경계를 넘어선다. 예컨대 환경주의적 시각은 기술 문명에 대한 회의, 지구 온난화, 유전자 변형 생물, 첨단 기술에 의한 인간 소외, 자동차 공해 등 일상 문화의 부정적 토픽들을 통해 드러난다. 일면 그는 부시 행정부에 의해 야기된 이라크전의 비인간성, 전쟁의 명분을 쌓는 대국민 선전전, 뉴욕 테러 이후의 인권 침해 등을 신랄하게 비틀고 조롱하면서도, 일상의 결에서 감지되는 보통 미국 시민들의 문화적 소외와 왜곡된 정신적 공황 상태를 꽤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쇄 매체의 증가하는 숫자와, 동질화하나 일견 파편화된 수많은 구독자수를 고려하면, 미국 내 소위 이름난 정치 만평가들이 대거 포진해 있음은 짐작하고 남을 만하다. 싱어는 그와 같은 스타 만평가들의 이름값에 비하면 아직은 그의 처지가 조촐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파 정론 잡지인 과 <뉴요커> 등을 통해 서서히 그의 만평들을 알리고 있다. 싱어는 상업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 권력의 메커니즘과 모순의 골을 정확히 드러내는데 앞서 있다. 한 컷의 만평에서 사태의 본질을 형상화하는 데는 절대적 시간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피안을 넘어서는 내공이 필요하다. 싱어의 표현은 단순하고 절제하나, 맥락을 정확히 짚어가며 제한된 컷의 공간 내에 현대 권력의 관계와 고리들을 적절히 배치한다. info awareness office 싱어의 정치 만평은 그도 지적한 바이지만, 사르트르와 까뮈의 실존주의에 기초한다. 산 아래로 계속해서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의 끊임없는 반복에서처럼, 현대 권력 체제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인간의 반항이 얼마나 허망함을 알면서도, 싱어는 그 반복된 허망을 견디고 이에 저항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인터뷰에서 특히 까뮈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신이 살기를 택한다면, 모든 전력을 다해 생명을 축복하고 죽음과 싸워야 한다. 나는 살기를 택했고, 그래서 문화와 환경의 자살 행위를 반대한다." 결국 사르트르의 희곡 제목 <출구는 없다>가 싱어의 최근 작품 제목으로 쓰인 연유에는 그 자신이 형상화한 절망의 질곡들에서 희망과 저항을 끌어내려는 자기부정의 실존주의적 몸부림이 깔려있다. 그의 소개글과 작품들 Singer, Andy (2001) CARToons. Car Busters. Rall, Ted (Ed.), (2002). Attitude: The New Subversive Political Cartoonists. New York: NBM Publishing. Rall, Ted (Ed.), (2004). Andy Singer: "No Exit." New York: NBM Publishing. * 앤디 싱어 홈페이지 * 그의 최신 연재 만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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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감시카메라연기단 : 감시 권력 앞에서 벌이는 시원한 부조리극

소위 '유비퀴터스' 논의가 한창 바람이다. 정부의 정보화 정책도 '유-(U)'로 시작하지 않으면 신선도가 떨어질 정도다. 어느 곳에서든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어 연결되고 소통하는 디지털의 '멋진 신세계'의 모습을 어느 누구도 반대할 리 없다. 그러나 공간과 권력의 재생산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직시하면, 모든 것을 연결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디지털의 비전이 그리 달갑지 않다. 소위 '유-'로 얻어지는 '기동성'(mobility)이 공간을 통해 실현될 때는 권력의 통제 욕망이 깊숙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눈에 보이던 권력의 폭력이 비가시적인 디지털 공간의 영역으로 녹아들면, 저항의 개입이 이뤄지기가 도통 힘들어진다. 현대의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시선보단, 곤봉에 얻어맞고 군홧발에 차일 시절에, 분노가 사회적 저항의 비등점에 이르기가 훨씬 빨랐다. 현실의 유무선 장비들, 예컨대, 인공위성 위치추적 시스템(GPS), 전파식별 (RFID) 칩들,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s), 핸드폰 위치추적장비, 유/무선인터넷 등은 현대 권력의 폭력성을 숨기기엔 안성맞춤이다. 이들 디지털 장비들은 일종의 탈중심화된 권력 촉수가 되고, 일단 '유-'로 연결되어 공간 기동성을 부여받게 되면, 나머지 몫은 이들 촉수들을 관리하는 중앙 상황 조정실에 떨어진다. 어떻게 하면 이 감시권력의 촉수들의 가동 능력을 저하시킬 수 있을까? 이는 일상화된 감시 속에 사는 현대인의 고민이자 권력의 수족을 묶는 저항의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권력 감시가 제대로 힘쓰려면, 권력의 촉수들을 시민들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하거나, 아예 감지 못하도록 비가시적 영역에 숨기는 방법이 있다. 거꾸로 이렇듯 일상화되고 숨어있는 감시권력을 뒤집으려면, 권력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방법과 숨어있는 권력을 반대로 드러내고 조롱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전자는 이미 '역기술국(BIT)‘에 의한 사례들(<네트워커> 26호)에서 살펴본 적이 있어서, 이번 호에선 후자의 사례를 볼까 한다. '뉴욕 감시카메라 연기단'(New York Surveillance Camera Players, 이하 '연기단')은 뉴욕이란 거대 도시에서 작동하는 감시 카메라들 앞에서 소리 없는 연극 시연을 펼친다. 이들은 96년 맨하턴 지하철역에서 감시카메라 앞에서 알프레드 자리의 <위비왕 Ubu Roi>을 시연했다. 자리가 부르주와의 퇴폐와 극악한 일면을 당시 부조리극으로 폭로했다면, 연기단은 폐쇄회로 앞에서 감시 권력의 통제 편집증을 신랄하게 조롱하고 비꼰다. 이들 연극은 무언극으로 진행되는 대신, 만화의 말풍선처럼 피켓을 사용해 상황의 극적 집중을 강조한다. 이들의 관객은 모니터를 관찰하는 익명의 권력과 거리를 지나다니는 시민이다. 폐쇄 회로의 촉수를 통해 몰래 행인들을 관찰하던 능동의 감시 권력은 오히려 모니터 앞에 앉은 채 감시단이 시연하는 무언극의 관객이 된다. 그야말로 폐쇄회로 속 권력은 자신을 모독하는 무언극을 봐야하는 고통에 처한다. 한편 지나가던 행인들은 늘상 보아왔던 폐쇄 회로가 늘상 게 있던 것이 아닌, 권력의 촉수임을 점차 부조리극을 통해 깨닫는다. 연기단의 활동은 게서 멈추지 않는다. 이들의 웹사이트로 들어가면 맨하턴 지역의 거의 모든 교통, 공공, 사적 폐쇄회로의 위치를 지도상에 표시해놓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재미난 것은 인터넷 이용자들이 자신이 발견한 맨하턴의 폐쇄회로 텔레비전 위치의 주소를 각자 자발적으로 기입하도록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용자들의 참여에 의해 폐쇄 회로 티브이 위치는 지도위에 매번 갱신되고 추가되며, 권력의 촉수는 누구나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노출된다. 숨어있는 촉수들의 비가시성이 지도상에 좌표로 찍힘으로써 그 은밀한 장비들은 시민들이 주의해야할 권력의 힘없는 지뢰밭으로 변한다. 연기단의 활동 중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이제 폐쇄회로 티브이의 한 곳에 고착된 비이동성이 발 달린 기동성으로 뒤바뀌고 있다는 지적이다. 연기단이 보는 기동성의 배후에는 핸드폰의 영상 기능과 추적 기능의 향상된 기술 현실이 존재한다. 표적 대상을 카메라로 찍거나 전화를 걸어 상대의 위치를 찾고 확인하는 과정은 이제 찰나의 순간에 공간을 타고 이뤄진다. 사회의 '불순물'을 쉽게 제거하는 방법엔 소리없는 '유-' 세상 이상 없다. 삼성의 노동감시 폐쇄회로 카메라가 공장 밖에서 설치고 돌아다니는데, 핸드폰의 '친구찾기' 서비스가 그 날개를 달아주었듯, 현실의 감시 카메라는 이제 더 이상 고착된 촉수가 아니라 움직이는 권력의 촉수와 같다고 본다. 연기단의 활동은 이렇듯 감시 권력 앞에서의 시연을 통해 권력이 가진 통제 편집증을 조롱하고, 일반 시민들과 함께 숨은 권력의 촉수들의 위치를 찾아내 그 기능을 불구화하고, 전자 감시 권력의 새로운 기동성의 위협 요소들을 착목하는데 모아진다. 연기단은 일부 언론이 그들에게 쏟아붓는 피해망상에다 편집증자들의 모임이라는 지적에 다음과 같이 재치 있게 응한다. "뉴욕시 전체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는 사람들이 편집증 환자요? 이를 지적하는 사람이 환자요?" 관련사이트 * New York Surveillance Camera Play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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