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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네트워커에 연재된 사이방가르드 아트에 관한 글들

기술과 생명의 그로테스크한 결합, 피치니니의 생명공학 예술

지난 해 필자의 연재 글을 읽었던 독자들은 생명공학의 (초)현실주의자로 소개되었던 프랭크 무어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에이즈에 걸려, 생명공학을 공부하고, 곧이어 그 근저에 자본주의적 탐욕을 발견하면서 이를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로 소개되었다. 이번에는 무어와 비슷하지만 생명 기술에 대한 시각이 보다 긍정적인 페트리샤 피치니니(Patricia Piccinini)의 예술을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무어와 달리 그녀는 호주에서 예술 학교를 마치고, 여러 작품전을 거치며 국제적 명성을 얻은, 순탄한 인생 경로를 달려 온 유망주다. 이미 국내에서도 그녀의 작품이 소개된 적이 있다. 극적인 예술 인생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작품들에선 미래 기술 현실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이 있다. 항상 곱지않은 시선으로 기술을 보는 듯 하지만, 그도 전부라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예술은 재미가 있다. 말하자면, 삶의 일부가 되고, 삶의 진실이 되가는 인간 보편의 기술에 대한 긍정의 시선도 교차한다. 필자는 피치니니의 여러 작품 계열 중 특히 생명공학과 관련한 그녀의 기술관을 보려한다. 무엇보다 2003년 비엔날레에서 여러 대중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설치 작품, 「우리는 한가족」을 주목한다. 게임보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얼굴은 반백이 지난 얼굴들이다. 고작 내 아들 나이만한 아이들이 한참 ‘삭은’ 얼굴로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은 짐짓 겉만 보면 누구나 소름 돋기 마련이다. 상상하기도 싫은 유전 조작의 돌연변이들이 인간의 애완 동물이 되고 한 식구가 된다. 여자아이는 생명과학의 진보로 인해 얻은 새 생명체와 놀고 장난친다. 그 새로운 과학과 생명의 혼합 속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생명체들은 그들 스스로 생식해 또 다른 가족을 형성하고 젖을 물린다. 조금 오래된 비슷한 다른 작품을 보자. 「단백질 구조」(1994)는 「우리는 한가족」보다 그녀의 자본욕에 대한 경계감이 많이 섞인 작품이다. 맨살의 미녀 모델의 어깨에 인간의 큰 귀를 가진 징그러운 돌연변이 모델이 함께 사이좋게 등장한다. 미녀 모델로 표상되는 자본주의 상품의 교환 논리와 생명공학의 돌연변이가 서로들 재교배한다. 피치니니는 스스로 이 작품을 통해 생명의 상품화를 보려고 했지만, 실지 그녀의 예술관은 무어식의 실랄한 자본 비판이 아니다. 생명공학이 마련한 돌연변이가 우리의 일상이 되는 현실을 무조건적으로 힐난하지 않는데, 그녀의 모호함이 숨어있다. 「단 백질 구조」, 「SO2」(2001), 「과학이야기」(2002), 「우리는 한가족」 등은 생명기술에 대한 그녀의 종합적 시각을 보여주는데, 대체로 기술과 생명의 새로운 조합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듯 하다. 마치 현실 과학자들과 시민운동가들 사이에 생명공학의 사회적 윤리에 대한 대립각이 형성되고 논의가 미궁에 빠지듯, 그의 예술적 입장도 그 둘 사이에서 갈등한다. 징그럽고 낯선 느낌의 돌연변이들에서 관객들은 반감과 수긍의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미리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인 듯 하지만, 왠지 부담스러운 모양새에 독자들은 계속해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어떠면 피치니니는 관객의 갈등을 고의로 유발하는지도 모른다. 자본, 생명, 기술, 인간 요인들이 뒤섞이며 만들어낼 수 있는,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음울한 미래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피치니니에게 「단백질 구조」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알몸의 여성이나 인류 생명의 구원자인 유전자 돌연변이나 질적 가치에 있어선 평등하다. 하나는 상품 물신에 의해 재조합됐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찬란한’ 기술에 의해 거듭났기 때문이다. 상품 물신이 자본주의의 지배적 정서가 되었듯, 돌연변이 애완식구들이 인간의 벗이 되는 생명공학의 물신이 오지말란 법은 없다는 얘기다. 물론 그 아래 깔린 정서는 한층 음울하다. 필 자는, 요즘에 주말 이른 아침에 홀로 거실에서 비디오 게임을 몇 시간이고 집중해 하는 일곱살배기 내 아들을 보고 흠칫 놀라곤 한다. 자꾸만 피치니니의 게임하는 늙은 얼굴의 아이들이 떠올라서다. 하지만, 그런 아들의 모습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 체념한다. 내 아이의 새로운 놀이를 수긍하곤 하지만, 왠지 한쪽 마음이 무겁다. 피치니니는 우리의 그러한 불편한 심기를 더욱더 뒤흔든다. 페트리샤 피치니니의 웹페이지 http://www.patriciapiccinin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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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그리는 삽화가들 셋, 하퍼, 드루커, 그리고 사트라피

이번 호 지면에는 현재 활동도 그렇지만, 앞으로 주목받을만한 아나키(anarchy) 계열의 두 인물과, 이 둘과 약간 거리가 있지만 일상 속에서 정치를 그려내는 한 여성을 한 묶음으로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아나키’라 하면 흔히 무정부 상태의 혼돈을 뜻하는 말로 오해하는데, 여기선 의미의 긍정성을 따져 권위와 집중을 헤치는 힘으로 이해한다. 물론 아나키즘을 현실적 대안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 목표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인간 관계가 가능한 소규모 공동체(코뮨)의 구상에 있다. 아나키의 목표의 근사치에 서 있던 인물은 영국의 아나키스트 삽화가, 크리포드 하퍼(Clifford Harper)다. 그는 이미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다. 13살 때 북부 런던의 학교로부터 쫓겨난 뒤로, 60년대 빈민운동에 앞장서 도시 빈집점거(squatting)와 코뮨 운동으로 실천 활동을 넓히고, 70년대 제도교육 없이 삽화가의 계열에 오른 독특한 인물이다. 『계급전쟁 코믹스』(1978), 『급진기술』(1974) 등으로 자신의 아나키즘에 대한 초기 의식을 그림으로 옮기다가, 『아나키』(1987)에선 아나키즘의 역사에 대한 에세이와 삽화를 통해 그의 시각을 정리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가 지닌 펜의 질감에선 목판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강렬함과 날카로움, 부드러움이 동시에 감지된다. 코뮨의 이상을 그릴 경우 부드러움이, 억압과 비참에 대한 저항에선 강렬함이 온전히 살아 있다. 50대 중년을 넘긴 그는 아나키스트 책박람회를 조직하고, 소규모 독립출판업 운동을 주도하고, 영국의 진보일간지 ‘가디언’에 정기적으로 그림을 싣는 등 아직도 예술과 실천 활동에 여념이 없다. 그 와 살아온 배경이 다르긴 하나, 도시 빈민, 빈집점거 등 현실 실천운동에 개입하며 삽화 창작을 해온 뉴욕의 젊은 작가가 하나 있다. 에릭 드루커(Eric Drooker)가 그인데, 「홍수!」, 「피의 노래」가 그의 대표작이고 현재 ‘더 프로그래시브’ 등에 삽화를 연재한다. 드루커의 주무대는 권력, 비인간성과 소외로 점철된 맨하턴 도시 한복판이다. 넝마꾼, 동냥꾼, 거지, 노숙자, 굶주린 아이,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흑인, 방독면 쓴 전경들과 곤봉 든 경찰,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 경찰견,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 끝없이 내리는 비, X-레이에 비춰진 뼈들로 표현되는 소외된 인간군상들,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자본주의의 거대한 몸살을 앓고 있는 어두운 현실로 표현된다. 하지만, 희망의 메시지는 날아오르는 비둘기, 중간 중간 삽입되는 인간 태초의 전경과 원주민, 여성과 자연, 앙상한 인간들의 뼈 속에 감춰진 심장, 그리고 권력에 저항하는 도시 빈민들의 분노로 겹쳐진다. 흥미롭게도 드루커는 전미 지역을 돌아다니며 순회 공연을 매년 정기적으로 갖는다. 필자도 한번 구경했던 그의 공연에서, 드루커는 그림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며, 입으로는 연사처럼 한 쪽에서 이야기를 풀고, 배경음악이 필요할 때는 여러 악기를 연주하며 한껏 분위기를 띄운다. 한마디로 온천지 동네를 돌며 구전을 전하는 입담꾼의 역할을 자처한다. 구경꾼들은 그의 슬라이드 시연에서 소외와 억압에서 인간이 희망하며 살아가는 이유를 확인한다. 드 루커와 하퍼의 정치적이고 아나키적 만화와 성격은 다르지만, 최근 이란 태생의 사트라피(Marjane Satrapi)라는 여성을 주목하고 싶다. 그녀는 프랑스에 살면서 그 곳에서 4권의 『페르세폴리스』란 책을 연재하고, 이를 영어판 2권으로 묶어 일약 스타가 된 여성이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삽화가로 활동하던 그녀가 정치 만화가인 쉬피겔만의 영향을 받고 자신의 성장기를 만화로 그린 것이다. 영어판 1권은 어린 유년시절 겪은 이란 혁명과 이란과 이라크 전쟁 시기를 다루고, 2권은 유럽의 유학 생활과 고국에서의 결혼과 이혼 생활을 그린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유년 시절의 눈과 마음으로 권력을 바라보고, 역사와 혁명을 보고, 이란의 남성주의를 대한다는 점이다. 전혀 실천가라고 할 수 없는 사트라피의 유년 성장기에서, 독자는 수없이 많은 뉘앙스와 모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란의 검열사회 속에서 웃지 못할 행태들, 남성의 위선들, 거리에 즐비한 혁명전위대들의 검열들(화장, 머리에 쓴 검은 천과 옷모양새), 파티의 검열, 밤늦은 군인들의 습격과 고문, 총살, 가두시위, 그리고, 종교 사회 속의 미국 소비문화 등이 일상 속에서 흥미롭게 진술된다. 사트라피의 책은 이론을 얘기하고 실천의 대의를 주장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살면서 겪었던 한 소녀의 느낌 그대로다. 앞의 드루커와 하퍼의 강한 남성적 그림에 비교하면, 그녀의 만화에는 겉보기에 단조로운 일기식의 여성적 문체 외에는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가 적고 있는 것은 그저 일상의 서술로만 읽히지 않는데 그 매력이 있다. 독자들은 그녀의 글에서 아랍의 얼룩진 정치 문화, 인간의 허울과 욕망, 뿌리깊은 남성성 등을 뼈저리게 배우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흔히들 독자들에게 삽화가라 하면 작가 다음의 서열로 인식되는 느낌이 많다. 이들 셋처럼 자기의 독자적 글을 내 성공하기 전에는 전혀 인지도가 없기 마련이다. 이들은 삽화의 지위를 글 이상의 반열에 올렸고, 게다 만화를 통한 정치 학습에 크나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이다. 비록 이들 셋은 언어 코드가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틀리지만, 당대 사회의 억압과 모순과 부조리에 강하게 반응하고 그 속에서 흔들릴 수 없는 인간의 희망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잡지를 보다 발견하는 그들의 그림들은 대안이 불투명한 우리네 현실을 비추는 조명처럼 환하다. 관련 페이지 Clifford Harper : http://www.agraphia.uk.com/home.html Eric Drooker : http://www.drooker.com/ Marjane Satrapi : http://www.randomhouse.com/pantheon/graphicnovels/satrap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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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매트릭스(VNS Matrix), 사이버페미니스트 예술 동맹

이는 <21세기 사이버페미니스트 선언문>의 일부 내용이다. 1991년 호주에서 네 명의 여성 예술가들이 남성주의에 도전장을 내며 ‘비너스 매트릭스’를 결성한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비너스’는 사랑의 여신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매트릭스는 ‘어머니’와 여성성의 태생적 공간을 의미한다. ‘비너스 매트릭스’는 사이버공간의 남성성의 초월적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여성의 지위를 되찾고, 이의 정치적 가능성을 제고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한다. 조세 핀 스타, 줄리앤 피어스,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가명: 요코 인형), 그리고 버지니아 배럿, 모두 넷으로 구성된 비너스 매트릭스는 여성주의 이론가인 사디 플란트와 함께 90년대초 ‘사이버페미니즘’이란 용어를 널리 알린 예술가 그룹으로 꼽힌다. 정보화 시대의 여성과 기술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이들은, 사이버공간 내에서 범람하는 마초 담론의 통제 아래 억눌리고 타자화된 여성들의 인권 회복에 관심을 둔다. 이전까지 기술에 대한 여성주의적 관심이 주로 형식적인 인구통계학적 분포로 본 여성의 정보통신 기술직 진출 정도로 사회 참여를 논하는 수준이라면, 이들은 기술 그 자체 디자인이 갖고 있는 마초적이고 권위적 질서들을 뒤바꾸려는 정치 예술운동에 한발 다가서고 있다. 선언문에 노골적으로 묘사된 음핵과 음부 등 여성 성기의 표현은 현대 기술문화에 대한 여성의 공개적 도전을 강조하기 위한 도발의 의미로 읽히고, 이를 통해 남성 권력의 핵심인 기술 결정체, 매트릭스를 여성화하려는 정치 선언으로 봐야 한다. 현대 정보기술이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남성성에 기댄 합리화와 계몽 기획에 전면 포섭되었다는 전제 아래, 그 억압적 본성을 사이버페미니즘에 의해 역전시킬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들의 가장 잘 알려진 씨디롬 게임인 “올 뉴 젠”(All New Gen)은 초국적 군산 복합 제국인 ‘빅 대디’ 컴퓨터 본체를 물리치는 여성 전사들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내용 중 음부와 가슴에서 광선을 뿜으며 마초들이 일궈낸 기술 체계를 박살내는 서사 구조 속에서 이들의 적극적인 정치 지향성이 드러난다. 더구나 게임에서 우스꽝스런 3차원의 착탈식 남성 ‘자지’가 핸드폰으로 변환 가능하고, 이 폰이 마초 매트릭스의 본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독점적 권한을 가지지만, 결국 여전사들의 음부에서 발사되는 광선에 무력화되고 음핵에 의해 이는 재전유되는 최후를 맞는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게임 수행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밀접한 관계를 인식하고, 그러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남성성의 억압적 통제가 구성되는지, 그것이 얼마나 기괴한 모습을 띠는지, 그리고 여성주의를 통해 이 억압구조를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파악하도록 돕는다. 게임의 패러디 효과와 현실 학습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1996년 비너스 매트릭스는 활동을 접는다. 하지만, 97년과 99년 ‘사이버페미니스트 인터내셔널’ 국제 행사의 결성을 돕고, 이후 ‘올드 보이즈 네트워크’란 이름으로 사이버페미니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비너스 매트릭스의 예술 경향은 미디어 행동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글, 그림, 게임, 옥외광고 등 각종 미디어들의 활용과 행위 예술 등을 통해 컴퓨터 문화에 각인된 성적 편견을 비웃고 조롱하고 뒤집는 작업을 다각도로 펼쳤다. 점점 더 강고해지는 남성주의의 신화와 인류 기술의 미래까지 좌우하는 마초 문화의 지배와 독단성을 감안하면, 그만큼 비너스 매트릭스와 비슷한 성향의 페미니즘 정치 예술 동맹체들이 복제되어 쉼없이 전염/파될 것으로 보인다. <관련 사이트> - VNS Matrix. http://lx.sysx.org/vnsmatrix.html - Old Boys Network. http://www.obn.org/ - VNS Matrix Manifestos. http://www.obn.org/reading_room/content.html <참고문헌> - Galloway, Alexander R. (2004). Tactical Media. Protocol: How control exists after decentralization, Cambridge, MA: MIT Press. - Kay Schaffer (1996). The Contested Zone: Cybernetics, Feminism and Representation. http://www.lamp.ac.uk/oz/schaffer.html - Sofoulis, Zo?. (2004). Cyberquake: Haraway’s Manifesto. Prefiguring Cyberculture: An intellectual history, Cambridge, MA: MIT Press. - Steffensen, Jyanni. (1994). Gamegirls: Women Working With New Imaging Technologies. MESH: film/video/media/art #3, http://www.experimenta.org/mesh/mesh03/3steffe.html - Electronic Gender: Art at the Interstice, SWITCH(Issue 9), http://switch.sjsu.edu/web/v4n1/toc.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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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자유의 아트 행동주의, 네거티브랜드

흔들릴 것 같지 않던 음악 저작권 진영에도 균열이 오고 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기반해 유명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조건없이 무료로 배포한다. 강한 저작권의 법적 논리없이도 예술 창작자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보다 많은 창작의 자유를 위해 시장에 군림하는 저작권에 도전하는 기술적 (일대일 파일교환 시스템), 문화적 (개인간 정보공유 문화), 제도적 (정보공유라이선스 개발) 모델도 등장한다. 저작권자들이 이제까지 두려워하던 정보 자유의 문화가 현실화되는 데는 1980년부터 줄기차게 음반 저작권자들을 괴롭혔던 예술가 그룹, 네거티브랜드(NEGATIVLAND)의 공이 크다. 문화 아나키스트 그룹인 네거티브랜드는 음반 제작, 공연, 라디오 방송, 비디오와 책 제작 등을 통해 자본주의 저작권 체제에 대항한 음반 창작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무엇보다 저작권자들이 네거티브랜드에 치를 떠는 근거는 이들의 음원 “샘플링” 기법에 기인한다. 기성의 저작권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음원의 불법 꼴라쥬나 무단 전유에 해당하는 이들의 음반 창작 활동은 그 근저에 안티-저작권의 강한 반감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원 샘플링은 2차대전 당시 아방가르드 전위예술의 선봉이었던 다다이즘의 존 하트필드나, 혹은 국내에서 작업하는 박불똥의 몽따쥬 기법과 비슷한 이치다. 마치 신문, 잡지, 사진 등 기성 이미지들의 꼴라쥬가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전달하는 창조적 예술 작품으로 거듭나듯, 네거티브랜드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 음악가들의 음원, 그 외 다양한 청각 이미지를 조합하고 변형해 새로운 음반 창작을 시도한다. 네거티브랜드가 정보 자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불러오게 된 계기는 1991년 발매된 싱글 패러디 앨범 “U2: 아직 내가 찾는 걸 구하지 못했어”의 파장이었다.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었던 록그룹 U2와 이 밴드와 공생하는 저작권 진영과의 한판 싸움에 의해 네거티브랜드는 저작권 위반 혐의로 거의 4년간 법정 소송 싸움을 벌인다. 저작권 소송 진행과 함께 이들은 창작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대중을 각성시키는데 큰 교육 효과를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네거티브랜드는 U2와의 소송의 일지를 담고 있는 “정당한 이용: 문자 U와 숫자 2의 이야기”란 제목의 27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과 72분여짜리 씨디 프로젝트를 완성하기도 했다. 네거티브랜드는 정보 자유의 철학을 따른다. 전통적 의미에서 “오리지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설사 다른 창작자들의 음원을 샘플링해 쓴다해도 이는 단순 짜깁기가 아니라 변형에 의한 새로운 창작물로 거듭남을 강조한다. 랩이나 힙합에서 종종 이용되는 샘플링도 저작권 위반이 아닌 새로운 음악 창작의 기법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다른 창작자의 음원을 이용하는 것을 범죄화하기 보다는 폭넓게 다른 이들의 창작욕을 자극할 수 있는 정보의 공개와 공유 문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마크 호슬러와 돈 조이스를 비롯해 네거티브랜드의 구성원들은 U2에 이어 다시 디스펩시(Dispepsi)란 앨범에서 다국적 자본 시리즈 광고물의 음원을 샘플링해 패러디를 시도했다. 펩시 회사의 광고 음원을 샘플링해 다국적 기업 광고의 숨겨진 의도를 조소하고 드러내는 새로운 창작 작업을 선보였다. 이를 통해 네거티브랜드는 음악의 본질, 이에 개입하려는 통제와 소유권의 문제, 다국적 광고의 프로파겐더 등을 대중 스스로 재고하는데 일조했다. 단순 음악 제작의 창작 행위뿐만 아니라, 현재 네거티브랜드는 파일 공유, 저작권을 포함한 지적 재산권 문제, 디지털 시대 예술의 진화와 소유권 문제 등 광범위하게 자본의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 초기 샘플링을 통한 음반의 제작이 음악 저작권자와 갈등을 유발하면서, 이들은 서서히 정보 가치를 독점화하려는 거대 자본의 힘과 이런 불합리한 자본의 통제가 예술가들의 창작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지각한 듯 하다. 최근 들어 저작권에 직접 관련된 글들의 저술과, 정보 공공 영역에 대한 대안적 관심이 늘고 있음은 이를 반증한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예술가들의 창작은 저작권의 벽에 부딪혀 좌초하거나, 네거티브랜드처럼 불합리한 저작권 체제에 눈을 뜨고 아예 직업적 투사가 되는 두 가지 매서운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이들은 애초에 반저작권 행동주의자로 나서기 보다, 창작에 매진하는 전문 예술가로 남길 원했다. 하지만, 음원 샘플링을 통한 이들의 음반 제작 방식은 저작권 극대론자들에 의해 자의반타의반 저작권의 적으로 몰린 경우다. 자연히 이들에게 저작권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창작의 자유를 꿈꾸는 예술가의 지위가 그리울 법하다. 현대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음원 샘플링의 방식을 대중화시켰고, ‘오리지널’ 저자의 소멸을 극대화하고 있다. 더 이상 소수에 의한 독점적 정보 소유의 근거가 희박해지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다양한 음반 제작을 통해 창작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대중에게 독점적 저작권의 허상을 깨는데 근 25년의 세월의 공을 들인 네거티브랜드의 행보가 앞으론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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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의 (초)현실주의자, 프랭크 무어

돈가방을 챙겨 달아나는 흰 가운의 생명공학자, 그를 따르는 거대한 흰쥐들, 잘려나간 손, 이름 모를 수많은 약품 더미와 무덤들, 그 위를 나뒹구는 실험용 장비들, 누런 돈더미 아래 깔린 희생자들의 피, 생체 실험에 희생당한 환자들과 해골... 이 무시무시한 생명공학의 미래상의 제목은 이름하여 <위저드>(1994)다. 1500년경 히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나 <극락정원>에 비견할 만하다. 현대 의학의 묵시론을 이렇듯 (초)현실주의적으로 그려낸 작가의 이름은 프랭크 무어다. 그는 근 20여년간 현대인간의 생물학적 부산물인 에이즈의 고통 속에서 살다 얼마 전에 작고했다. 에이즈에 걸려 48살의 나이에 스러질 때까지, 그는 몸소 현대 생명과학과 환경파괴의 위험성을 지적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그는 에이즈 환자들의 권익을 위한 시민단체 ‘엑트업’ 산하 ‘비주얼 액트’의 초창기 맴버이기도 했다. 예술분야에서 생명공학은 그리 간단치도, 구미가 별로 당기지도 않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한때 인터넷과 뉴미디어의 기술적 세례와 더불어 디지털 혹은 넷 아트의 붐이 일었지만, 가까운 미래에 현실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생명공학에 대한 비판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무어와 비슷한 초현실주의 계열의 최근 주목할 성과라 하면, 알렉시스 로크만의 <농장>(2000)이나 에바 서튼의 <하이브리즈>(2000), 토마스 그런펠드의 <오誤결합>(1994)과 같은 작품들을 꼽을 수 있겠으나, 생명공학과 예술은 여전히 뭔가 낯선 관계임이 현실이다. 무어는 현대 질병의 고통 한가운데 서 있음에도, 스스로의 비관적 모습에 갇히기보다 그 고통을 초현실주의 미술 기법을 통해 현대의학과 공학의 살벌함을 얘기하듯 화폭에 풀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아마도 이는 그의 유년시절 공상과학SF 소설을 즐기고 생명공학에 관심을 갖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그의 첫 데뷔작이자 생명공학의 문제를 담은 <유전자변형식품(GMO)>을 내놓자마자 그만 에이즈에 걸린다. 우연치곤 너무나 기구한 삶의 여정이다. 그 는 이윽고 유전자 구조에 대한 관심을 확장해, 제레미 리프킨 류의 책들을 섭렵하며 그만의 비판적 사회공학 접근을 키운다. 이 시기에 확고하게 자본과 생명공학/환경파괴의 불가분의 공생 관계를 파악했던 것 같다. 재미있게도 그 당시 그가 생산한 미술 작품들은 뭐뭐 ‘-연구’란 제목과 함께 그가 고민하는 자본과 생명공학, 환경, 인간의 관계들이 무슨 도식처럼 표현돼 있다. 특히, 그가 지닌 의료약품의 다국적자본에 대한 분노는 후반기 그림 곳곳에서 발견된다. <위저드>나 <오즈>(2000)를 보면 항상 누런 황금색 돈더미들이 힘없는 사람들의 희생과 피의 대가 위에 올라선다. 특히 <오즈>에선 자본의 돈더미 위로 유전자 변형의 거대한 식물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쉽게 관찰 할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뜨기 전 2여년 간의 그림들은 90년대 초엽의 활동 작품에 비해 사회 인식의 통찰력을 보다 잘 반영한다. 당시 어느 작품 활동 시기보다 많은 작품들을 그려냈는데, 초현실주의 기법을 통해 다가올 생명공학의 일그러진 단면들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담고 있다. 이는 소위 공상과학 소설가들이 표현하는 미래상의 표현 방식과 비슷한 사회적 맥락의 진지함을 보여준다. 소위 ‘매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그의 장르는 예술 기법이 초현실주의에 기대고 있어도, 보여주는 의미의 맥락은 관람자로 하여금 너무나도 현실주의적인 진지함을 공감하게 만드는데 그 성과가 있다. 2002년 4월 그가 작고하기 전 대담에서 남긴 말이 의미심장하다. “나쁜 환경에서 인간이 건강할 수 없듯, 탐욕과 착취의 나쁜 인간들이 판치는 곳에서 좋은 환경은 없다.” 이렇듯 그의 가치는 자본-생명과학의 불순한 동맹을 붓의 힘으로 강렬하게 전달할 줄 아는 힘에 있다. 작가는 이미 저 세상에 있지만, 작품들이 가질 의미의 생명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질길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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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저작권 예술의 최전선, illegal-art.org (15호)

“내 나라는 자본에 영혼을 팔아넘겼고, 소비주의는 종교로 등극했고, 진정한 자유의 의미 또한 잊혀졌다.” 몇 년 전 미 독립기념일 <뉴욕타임즈>에 실렸던 전면광고의 일부 문구다. 광고에는 주식시세표 위로 엄청나게 크고 시커먼 먹점이 반을 뒤덮고, 자본의 제국에서 나라를 구하자는 선언 문구가 나머지를 채우고 있다. 이 광고는 ‘애드버스터’란 좌파 디자인 집단이 마음먹고 벌였던 반자본 예술 운동의 일환이다. 이들 단체는 길거리에 넘쳐나는 거대 기업들의 상표나 관련 상징물에 시커먼 먹점을 매겨 자본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고자 한다. 예술가들의 이와 같은 현실 개입은 지적 재산권에 대한 문제 제기로 확장되는 추세다. 특히 창작이 모방, 인용, 패러디 등을 통해 성장하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더 창작물 표현의 자유를 위해 지적재산권의 횡포에 대한 맞대응이 필요하다고 본다. 뉴욕, 시카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불법예술: 기업 지배하의 표현의 자유’ 전시회는 그 대표적 시도다. 그림 전시, 음악 CD와 DVD 영화 편집 제작, 사이트(illegal-art.org) 개설, 전문가 토론회 등 다방면에 걸쳐 저작물의 불법 사용이란 죄목으로 각종 소송 위협에 시달렸던 문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이트의 운영자이자 불법 예술의 큐레이터인 케리 맥라렌은, 해고 후 백수 생활을 전전하다 홀로 미국문화와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잡지 <스테이 프리(Stay Free!)>를 수년간 발행해온 독특한 인물이다. 그녀가 2002년 가을에 낸 ‘저작권’ 특집 제20호는 본격적으로 불법아트 전시 기획과 맞물려 미 상업주의와 후기자본주의의 사활이 달린 지적재산권의 본질을 파헤치는 결실을 맺는다. 밧줄에 목맨 채 매달린 미키마우스, 허벅지를 드러내고 난쟁이를 유혹하는 백설공주, 매춘녀로 둔갑한 스타벅스 커피의 여신 이미지들, 포케몬 인형에 수음하는 강아지, 바비 인형과 대화하며 이에 빠져드는 한 남성의 광적인 모습, 텔레토비 동산에 아기 햇님을 대신해 등장한 부시대통령, 햇님이 눈에 광선을 뿜으며 텔레토비 동산과 토끼들을 사정없이 초토화시키는 동영상. 한편, 발터 벤야민의 글 <전자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따 만든 다큐멘터리는 영화 상영전 미연방정보국의 무시무시한 복제 금지 문구들만 모아 보여줌으로써 저작권문화의 한심함을 폭로한다. 음악에선 다른 음원들을 무단 샘플링해 문제가 된 네거티브랜드, 비스티보이즈, 퍼블릭에너미, 더 버브(The Verve) 등 유명 가수들의 관련 곡들을, 개설된 사이트를 통해 접할 수 있다. 이들 기발한 ‘불법’ 작품의 공통점은 한가지다. 순도 100%의 오리지널이라고 주장하는 창작물의 권리를 무단 도용한 혐의다. 하지만 표절, 모방, 복제의 낙인은 섣부르다. 사용된 타작가의 작품이나 기업 이미지 등은 패러디되어 주로 정치적 표현의 소구 장치로 쓰인다. 오만방자한 권력의 상징물들을 가져다 재해석한 죄밖엔 없는 것이다. 이는 국내 옴니버스 영화 <묻지마 패밀리>의 ‘내 나이키’ 마지막 대목과 비슷한 정서다. 나이키를 동경했지만 살 능력이 없던 한 아이가 결국은 나이키 상표를 복제하는 법을 깨쳐 집안 식구들 모두에게 나이키 상표를 붙여주던 영화의 마지막은 나이키 권력을 ‘엿먹이는’ 유쾌한 조롱이자 반란이었다. 갈수록 문화계의 패러디와 비판의 영역이 저작권자들에 의해 불법과 표절의 딱지로 취급되고 그 건강성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그녀가 기획한 불법예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미 불법예술에 전시된 기획물들이 수많은 저작권 위반 소송에 시달린 전력을 갖거나 법정 투쟁 중인 것들이 대부분인 점을 고려하면, 젊은 여성 예술 기획자, 맥라렌의 용기가 부럽다. 저작물의 ‘정당한 이용’에 대한 권리, 더 근원적으로 또 다른 창작을 위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작지만 힘있는 맞대응인 셈이다. 사리분별없이 사방에 흉기를 휘두르는 거대 자본들 아래에서 불법예술은 또 다른 자유의 숨구멍이 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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