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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정치 패러디물의 미학적 가능성과 한계

온라인 정치 패러디물의 미학적 가능성과 한계

이광석
(@txmole)


<요약>
 

이 글은 인터넷 누리꾼들이 중요한 표현 매체형식으로 이용했던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가능성과 한계를 관찰한다. 특히, 2003년의 대선 정국, 2004년의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만두파동, 그리고 서울시장의 ‘서울시 봉헌’ 발언 등에 반응해 대중이 생산해냈던 정치 패러디물들을 중심에 놓고 본다. 당시 시사정치 패러디물에 힘입어 여론이 형성되거나, 그 중 일부는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았던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글은 먼저 한국사회에서 이렇듯 영향력을 행사했던 패러디물이 급격하게 대중화하다 왜 갑자기 쇠퇴했는지를 최근 몇 년의 패러디 발전 과정을 통해 살펴보고,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물들을 중심에 놓고 그들이 지닌 정치 미학적 특성과 함의를 살핀다. 본 연구는 이를 통해 누리꾼들의 대중적 창작 행위 증가, 디지털 기술에 의한 매체 표현의 다면성, 그리고 아마추어 작가들의 등장에서 정치 패러디의 긍정적 의의를 찾는다. 하지만, 이들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패러디 작품들의 영향력이 대단히 단발적이고 휘발성을 지녔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단순히 영화포스터 등 오락미디어 문화의 상징적 이미지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패스티쉬(혼성모방)의 정치 미학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이것이 결국 정치적 앙가주망의 도구로써 패러디의 창조적 역할을 약화시켰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주요어> 패러디, 패스티쉬, 정치 미학, 다다, 전유, 전용, 포토몽타주, 콜라주


1. 앙가주망과 패러디     
 
   2002년 미선·효순 사건, 2004년의 노무현 전임 대통령의 탄핵 국면을 계기로 성장한 누리꾼들의 온-오프라인 정치 경험들, 그리고, 2008년 이후 촛불 정국에서 만개했던 온라인 대중 정치는 그 공과를 떠나 우리에게 누적된 온/오프 미디어 표현 형식의 실험들을 남겼다. 이 글은 바로 온라인 대중 실천의 경험 가운데 크게 영향력을 미쳤던 많은 표현 형식들 가운데 중요한 형식 실험으로 정치 패러디를 선택한다. 패러디는 특히 권력의 억압적 상황 (강화된 훈육과 대중 선전)이 지배적일 때 적합한 저항의 담론 형식이자 전술 형태이다. 그것의 미학적 형식 또한 단순한 이미지에서부터 음악, 동영상, 플래시, 게임 형태 등 다양하다는 점에서 소구방식 또한 대단히 유연하다. 패러디는 유쾌발랄하면서도 권력의 비린 곳을 적절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스타일 정치의 전형이다. 역사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때에 큰 힘을 발휘했던 표현 형식이기도 하다. 누리꾼들에게 정치 패러디란 표현 방식이 새롭게 정치 지수를 상승시키는 표현 방식으로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패러디는 여론을 일으키는 힘 또한 지닌 것이 사실이다. 특히, 온라인 게시물 형태의 패러디물은 한번 알려지면 순식간에 확산되어 권력 집단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시간적으로 즉각적인데다 사회적 영향력과 파급력에서 탁월하다.


정치 패러디는 보통 현실, 특히 퇴행적 정치 상황 (혹은 일상의 정치‘쇼’)에 대한 냉소에서 비롯한다. 거대 권력들, 특히 정부, 기업, 언론에 대한 조롱과 냉소는 이를 지켜보는 수용자들에게 심리적 경멸의 자족적 헛웃음과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패러디는 절차상의 민주주의나 상식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더욱 힘을 발한다. 비상식의 사회상과 정치적 낙후성이 주는 현실의 각박함이 오히려 충만한 패러디와 해학을 생산할 수 있는 원천이기도 하다. 20세기초 파시즘이 성행하던 시절에 베를린 다다가 ‘포토몽타주’(fotomontage)를 이용하여 권력을 조롱하는 새로운 예술 기법으로 창안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억압적인 정치 현실일수록 정치 패러디의 사회비판적 능력이 대단히 중요해져간다.

 

샤르트르식으로 보자면, 누리꾼들이 최근 몇 년간 보여줬던 정치 행위들은 구조화된 사회악과 결별하고 자유로운 개인 삶을 긍정하는 정치 참여로써 ‘앙가주망’(engagement)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앙가주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불가능한 논리이자, 억압의 구조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들의 적극적 정치적 입장 표명이다. 이 점에서 삶을 강제적으로 유린하는 힘을 드러내고 권력에 대한 희화화와 반전을 꾀하는 정치 패러디는 중요한 대중의 표현 형식이다. 이로써 대중이 아마추어적이지만 작품 생산의 주체가 돼가고 정치 미학을 형성하는 창의적 주체로 떠오른다.  

 

이 글은 국내 온라인문화 속에서 누리꾼들의 패러디물을 통한 사회 참여적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반(反)권위주의와 아마추어리즘에 기댄 누리꾼들의 창작 행위가 건강한 정치적 표현 형식으로써 가능한지를, 그리고, 정치 예술 미학의 발전 양쪽에서 어떤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글의 순서는, 먼저 이론적으로 정치 미학의 현재적 가능성과 그 표현 형식으로써 패러디의 개념에 대해 논구한다. 그 다음 국내 온라인 문화사 속에서 패러디 발전의 경과를 짧게 되짚어보고, 실제 당시 유행했던 대표적 패러디물을 시기별로 살펴본다. 방법에서는, 다른 표현수단 보다 월등히 많은 누리꾼들의 사진 패러디들을 생산해왔던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작품과 2천년대 초반부터 정치 현실과 관련해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 패러디물을 뉴스기사 검색을 통해 찾아들어가는 방식을 취했다. 무엇보다 누리꾼들의 작업 방식을 대중화 요인, 정치 미학적 효과, 예술 생산 방식의 대중적 전환이라는 범주로 묶어, 패러디물의 정치 미학적 성과를 따져보고 있다.    

 

 미리 결론을 요약하자면, 정치 패러디를 통한 누리꾼들의 증가된 사회적 발언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만들어낸 작품의 효력이 빠르게 잊혀진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이 글은 영화포스터 등 오락미디어 문화의 상징적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이를 혼성모방(패스티쉬)하는 방식이 문제라 본다. 오히려 이와 같은 혼성모방의 패러디 방식은 앙가주망의 도구로써 정치 패러디의 가치를 약화시켰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적어도 개념적 탈취 개념인 전유와 베를린-다다와 상황주의의 실천 개념이었던 ‘전용’(détournement)의 예술 미학을 통해서 누리꾼들이 지닌 정치 미학적 한계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2. 패러디의 정치 미학

1) 패러디 기원과 그 조건들

옥스퍼드 어원사전(1996년 판)에 보면, 패러디란 말은 16세기말경 그리스어 parōidia에서 나왔다. 어원상 ‘아울러’, ‘곁에’ 혹은 ‘대응의’ par-와 ‘노래’를 의미하는 -ody가 결합되어 생긴 말이다. 이를 합치면, 다른 이의 원작을 이용해 풍자하여 부르는 노래 형식쯤 된다. 중세 때 구전을 통해 노래처럼 부르던 시구절을 연상하게 만들 듯이, 패러디는 중세에 ‘타인의 시 스타일을 모방해 자신의 창작에 이용하는 시 형식’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물론 어원적 의미에서 ‘모방’이란 말은 흔히 말하는 원본 베끼기가 아닌 새로운 표현을 위한 재해석적 행위로 봐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동양에서는 ‘용사’(用事)라는 개념이 있다 (정끝별, 1997, 36쪽). 용사는 과거 경험의 권위를 현재 문맥에 확장시켜 얻는 시적 효과를 지칭한다. 패러디든 용사이건 우리는 둘 다 그 어원이 시나 노래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고, 큰 천재적인 재능 없이도 인민의 정서와 함께하면서 대중적 창작 행위의 일부였던 미학 장르가 패러디임을 또한 엿볼 수 있겠다.


유추해보면 패러디는 앞선 것을 재조합해 현실의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의도적 모방인용이라 할 수 있다. 패러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원본의 텍스트, 패러디를 수행하는 패러디스트, 모방인용의 새로운 패러디 텍스트, 그리고 이를 읽는 독자가 개입돼 있다. 패러디의 창작 완성도는, 모방인용의 정밀함보다는 원작에 일부 기억을 이용해 비정상성에 기댄 현실을 비틀고 조롱하는 능력에 달렸다. 다른 한편, 독자의 해석 능력과 과정이 패러디스트의 감각적 패러디 생산 능력만큼이나 중요하다. 만약 독자가 패러디를 전혀 이해못한다면 그 영향력은 유명무실하다. 즉 원텍스트와 패러디, 그리고 이를 지칭하는 현실을 독자가 제대로 이해를 못한다면 패러디의 효과는 반감하거나 상실된다.

 

구체적으로 패러디가 작동하는 조건을 보면, 첫째, 원텍스트의 ‘전경화’(前景化, foregrounding)'를 필요로 한다. 인용과 모방은 바로 패러디를 위해 원저자의 텍스트로부터 가져온 이미지, 음원, 영상, 시구절 등에 의해 구성된다. 이들이 전경이며, 이는 패러디스트의 작품이 이미 가져온 것(원텍스트)에 의해 구성된 패러디라는 것을 독자에게 일깨우는 구실을 한다. 또한 ‘전경’은 원텍스트의 이미지가 패러디 창작의 전제 조건임을 뜻하나, 새로운 패러디물을 압도해 주인 행세를 하면 곤란하다는 점을 말한다.

 

둘째로, 가져온 것(원텍스트)과 패러디 텍스트는 상호 교류하고 대화한다. 원텍스트가 당대의 사회적 문맥에 의해 수용되고 공인되었던 방식이 패러디 텍스트가 쓰여진 현실에서 다시 여과되어 재해석되는 단계를 거친다. 대개 패러디는 원작에 대해 경애를 표하거나 조롱하는 것에 만족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원작의 힘을 빌어 패러디를 수행하는 시점의 현실과 사건을 풍자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후자의 경우에, 원저와 패러디간을 매개하는 역할은 패러디 대상화된 현실의 소재나 사건에 의해 맺어진다. 일반적으로 원텍스트의 맥락을 기억에 담아 오늘날 정치 현실을 조롱하려는 미학적 형상화 작업이 대개 패러디의 메커니즘으로 보면 된다. 패러디스트가 예술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현실 비판을 매개로 원텍스트와 자신의 패러디 텍스트를 대화하게 하는 창의적 능력 때문이다.

 

셋째로, 진정한 패러디 창작의 힘은 원작과의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획득된다. 원작과 대화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패러디요 용사이지만, 원작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는 반복과 모방이 진정한 창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린다 허천(Hutcheon, 1992, 15쪽)은 “유사한 점보다는 다른 점에 유의하면서 (원작에) 비판적인 거리를 두는 반복형식”을 패러디라 간주한다. 다시 말해 “이전의 예술작품을 재편집하고, 재구성하고, 전도(inversion)시키고, 초맥락화(trans-contextualizing)하는 통합된 구조적 모방” (같은 책, 23쪽)이 패러디다. 쉽게 얘기하자면, 패러디엔 같으면서 다름 혹은 다르면서 같은 이율배반의 미학적 논리가 틈입해 있다. 그래서, 패러디나 용사를 행하는 자(패러디스트)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거나, 가져온 것(원텍스트)의 문맥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해하여 피상적으로 패러디 텍스트에 모방 인용했을 때, 이는 새로운 창작이라 보기가 어렵다. (정끝별, 1997, 36~7쪽) 이 점은 이후에 진술될 누리꾼들의 패러디 정치 미학의 패스티쉬적 한계점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마지막으로, 패러디는 독자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수용성의 영역이 존재하지만, 이 또한 패러디스트의 역할과 합쳐지는 경향이 있다. 근대 미술 시장의 발달은 전문적 패러디 창작의 영역과 독자 혹은 수용자의 해석 영역을 사실상 분리시켰다. 물론 전문적 패러디스트에 의해 생산된 패러디물로부터 당대 독자와 관객들은 반전과 독특한 해석, 그리고 해학으로부터 ‘기대 전환’의 감흥 효과를 얻었다. 물론 이같은 심미적 해독의 즐거움이란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온라인 패러디 생산 구조의 민주화로 일반 독자도 누구나 패러디스트의 범주에 끼게 됐다. 온라인 패러디물을 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생산하고 비슷한 것끼리 대조하고 퍼뜨리는 주체로 패러디스트가 독자가 되고 독자가 패러디스트가 되는 합일이 이루어진다. 더 나아가 이들이 만들어낸 대량생산된 패러디물들은 동일 원본을 차용한 경우 서로간에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 간텍스트성(intertextuality)에 주목하게 만든다. 이는 패러디의 무한복제 문화와 패러디 생산 주체의 민주화에 따른 결과다. 즉 디지털 기술의 덕택에 힘입은 패러디의 집단 생산은 예술주의적 성찰성을 궁극적으로 떨어뜨리는 경향성을 보이나, ‘과잉의 변조’나 간텍스트성에 의해 해석적 균열을 가져오고 대중의 정치적 소통에 에너르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는 이후에 보게될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물의 생산과 관련해 긍정(일시적·즉각적 대량의 패러디 제작을 통한 여론 환기)이자 한계(성찰성의 뿌리가 약한 관계로 인한 휘발성과 이미지 과잉으로 인한 현기증 유발)로 작용한다.

2)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척도  

패러디의 유사어로, 벌레스크(burlesque, 戱作)나 트라베스티(travesty, 서툰 모방), 패스티쉬(pastiche, 혼성모방), 키치(kitsch), 콜라주(collage), 몽타주(montage), 풍자, 인용 등이 있다. 자주 이 유사어들은 패러디와 혼동돼 쓰이는 차라 조금은 구별이 필요하다. 먼저 ‘벌레스크’ 혹은 ‘트라베스티’는 논자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르나 이 둘은 비슷한 의미로 함께 쓴다. 허천 (68쪽)에 따르면, 이들과 패러디의 차이는 전자가 반드시 조롱을 내포하고 있지만 후자는 반드시 조롱을 지향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벌레스크의 장점은 원작의 진지함의 형식이나 내용을 익살로 모방해 표현하는데 있고, 그렇게 보면 패러디의 하위 장르 유형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패스티쉬’를 보자. 패러디가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에서의 변형 혹은 각색이라면, 패스티쉬는 무비판적이고 피상적인 모방이라는 점에서 또한 다르다. 패스티쉬는 차이보다는 전작과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패러디가 거리두기임을 상기해보면, 프레드릭 제임슨식의 표현법으로 이는 ‘무표정한 모방’ (blank parody)이요, 이미지들의 중성적 모방과 혼용에 불과하다. 더불어 패스티쉬가 대중문화의 장르로 확대될 때 이를 ‘키치’로 볼 수 있다. 키치는 현실 풍자의 맥락이 실종된 원본 베끼기의 배설 미학에 다름 아니다. 한편, 콜라주와 몽타주는 파편화된 단편들을 새롭게 재조합하여 새로운 창작물로 동시화하는 기법이다. 각각의 우연적 배열이 전체의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패스티쉬의 동기 결핍의 베끼기와 무질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콜라주와 포토몽타주는 앞서 지적한 허천의 ‘원작에 비판적 거리두기’에 있어 대단히 충실하다. 패스티쉬에 대한 이들의 상대적 미학적 우위는 왜 이 글에서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가능성을 다다나 상황주의자들의 콜라주와 몽타주 예술 기법에서 찾는지에 대한 근거로 봐야 한다.

 

또 ‘풍자’를 보자. 풍자란 원본 이미지에 대한 줄곧 조롱과 해학을 담고 있다. 그러나, 패러디는 이와 더불어 원텍스트나 원작자에 대한 존경의 ‘오마주’(hommage) 또한 포함한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적 패러디가 풍자와 혼용되어 쓰였던 조롱과 경멸의 패러디라면, 오마주적 패러디 혹은 존경의 패러디 또한 패러디 형식의 일부다. 이렇게 따지자면 풍자의 한 형식으로 패러디를 보는 것은 협소한 정의다. 마지막으로, ‘인용’(quotation)은 단순히 전텍스트 혹은 작가와의 사실적 혹은 잠재적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중립적으로 쓰인 경우다. 인용은 전거 혹은 원텍스트의 힘을 억누르고 거리두는 절제의 완성도 높은 패러디에 줄곧 쓰인다.

 

사실상 이들 용어법은 서로를 배제하기 보다는 서로 중첩되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유사 용어와 그 표현들은 패러디와 경계를 긋거나 혹은 패러디의 중요한 표현 형식이 되면서 패러디의 형식적 미학에 힘을 배가하는 근거가 된다. 문학과 인문 영역에서 활발히 정의내려지거나 해석되는 패러디 미학의 근거는 사실상 활자화된 글인 텍스트 패러디에 한정된 측면이 크다. 사실상 이미지나 동영상 등의 영역에서 패러디 미학 구조에 대한 해석이 최근 거의 부재했다. 그나마 거의 유일하게 예술계에선 한상엽(2006)이 시론적으로 패러디 미학의 성찰성 정도를 본 정도다. 그는 패러디 미학의 수준을 세 가지 정도로 나눈다. 수평적 패러디, 수직적 패러디, 인용으로서의 패러디가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세 가지 미학적 완성도에 따른 분류를 응용해 누리꾼들의 패러디 미학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활용한다.

 

우선 ‘수평적 패러디’다. 이는 원본 텍스트의 단순 차용 패러디를 지칭한다. 그 급으로 치면 패스티쉬의 접경에 거하는 혼성모방의 패러디다. 누리꾼들의 일반 작품 형식들에서 많이 관찰된다. 예를 들면, 원작 영화 포스터에 얼굴만 포토샵으로 작업해 대치하는 대량 복제식 패러디물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 수평적 패러디물은 원작의 전경화된 이미지에 좌우되고 그것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전경으로 쓰였던 영화 포스터 등이 누렸던 인지도와 인기에 의해 만들어진 패러디 이미지란 결국 전경의 흥행 기간에 비례해 독자의 기억에 각인되는 처지에 놓인다.

 

‘수직적 패러디’는 조금 격상된 패러디 미학이다. 원작의 전경화가 패러디물에서 즉각적이지 않고 일부 의미론적 연결만을 유지한다. 원작 이미지의 차용과 동시에 덧붙여 색다른 형태의 해석을 가미하는 창작 행위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패러디 차용으로서의 대상 이미지’의 힘이 잔존하지만 그보다는 ‘패러디 목표’(target)로서의 현실 해석에 대한 의지와 강도가 훨씬 두드러진다. 수직적 패러디 이미지는 말하자면 원본에 대한 동일성의 힘보다는 이격의 힘이 좀 더 압도하는 상황이다. 수직적 패러디는 이 글의 실제 분석에서 ‘전유’ (appropriation)라는 말로도 달리 쓰이고 있다. 실제 예들은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군들에서 심심찮게 목격된다. 전유의 미학 개념 또한 기존의 것(원텍스트)을 가져다 맥락을 재해석하는 행위를 지칭하나, 그것의 주요 방점은 대상 이미지와의 동일성 유지보다는 오히려 스텍타클의 과잉 이미지들을 정치적으로 재해석해 현실의 패러디 목표를 조롱하는 문화정치적 실천 효과에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선 수직적 패러디란 용어보다 전유의 미학이 훨씬 더 정치적 동기를 함의한 실천적 용어로 본다.

 

   마지막으로 ‘인용으로서의 패러디’ 혹은 중립적 패러디다. 필자는 이것을 ‘전용’ 혹은 ‘선회’(détournement)의 패러디 방식으로 본다. 둘 이상의 원작 이미지들을 끌어오는 포토몽타주는 인용으로서의 패러디의 대표적 형태다. 기존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혼용하나, 새롭게 창작된 것이 기존의 것에 대한 기억 혹은 전경화가 거의 소멸된 형태의 패러디를 지칭한다. 각각의 합이 완전히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연다는 점에서 인용의 패러디는 전유를 넘어선 전용 혹은 선회의 미학에 가깝다. 이는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패러디 효과의 휘발성을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미학 기제이다. 필자의 주장이 마치 누리꾼들을 패스티쉬와 전유에, 반면 직업적 작가군을 전용에 도달한 것으로 경계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누리꾼이 전용의 미학을 보여줄 수도 직업적 예술가가 그 반대에서 허덕일 수도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아마추어의 몇몇 작품들도 전용과 선회의 미학을 간혹 보여주기도 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개개의 아마추어 패러디 미학을 전용의 미학에 이르도록 독려하고, 집단으로 동시에 제작하는 패러디물들의 과잉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4. 아마추어 정치 패러디물 소사
   
이제 한국의 패러디계로 실제 들어가보자. 2009년 6월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정국과 함께, ‘딴지일보’는 사회 각계의 시국선언에 때맞춰 자신들의 시국선언을 내놨다. 시국선언서의 변에는, “연일 시국선언을 감행하는 측이 청와대와 비교하여 과연 소통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시국선언의 목적이 독백이 아닌 한 결국 청자가 알아들을만한 소리”를 내려면, 다음<표 1>의 내용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쥐가 지껄이는 듯한 ‘찍찌리리릭’ 시국선언에는, 불통의 정치에 소통을 복원하라고 힘없이 외치는 순진함에 대한 풍자 또한 깔려 있다. 한글 서체는 궁서체를 써 시국선언의 옛맛을 살리고, 쥐소리를 흉내내면서 불통의 정치 현실을 묘사한다. 여론의 외면하는 정치 현실을 조롱하는 퍼포먼스 효과이다.

<표 1> 딴지일보의 시국선언문 내용

찍찌리리리릭(시국선언문)

찌~~~익 찌리리리찍 찌리리 찍찍 찍찌리리리리리~~~~~~~찍찍 찍찌찌리릭
찍찌~~~~~~~~~~~~~~~~~~익 찍찍찍찍찍 찌리리리~~~~~~~찍 찌찌찍
찌~~~익 찌리리리찍 찌리리 찍찍 찍찌리리리리리~~~~~~~찍찍 찍찌찌리릭
찍찌~~~~~~~~~~~~~~~~~~익 찍찍찍찍찍 찌리리리~~~~~~~찍 찌찌찍
찌~~~익 찌리리리찍 찌리리 찍찍 찍찌리리리리리~~~~~~~찍찍 찍찌찌리릭
찍찌~~~~~~~~~~~~~~~~~~익 찍찍찍찍찍 찌리리리~~~~~~~찍 찌찌찍


찍찌찌리리~~릭 (2009년 6월 17일 딴지 편집부 일동)

딴지일보는 1998년 7월에 문을 연다. 거의 국내 인터넷 문화의 초창기 시절이다. 당시 청년 실업자였던 총수 김어준은, 적절한 비속어와 농을 섞어 권위를 뒤틀어 표현하는 정치 풍자·패러디 사이트를 개설한다. 딴지일보는 사실상 인터넷 채팅에서의 언어파괴 현상과 형식주의 붕괴에 힘입은 바 크다. 무엇보다,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이라는 창간 선언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딴지일보의 패러디 문법은 문어체 언어 형식의 파괴와 비속어 사용이었다. 그것은 당시 신세대, X, N세대 논쟁과 맞물리면서 사회를 관통하는 엄숙주의에 대한 나름 청소년들의 재기발랄함을 선도하는 디지털 문화로 각광받는 계기가 된다. 형식은 황색 잡지 저널리즘의 틀을 빌렸으되, 내용은 크게 현실 참여적이었다. 딴지일보의 창간 목적에도 나오듯, “우끼고 자빠진 각종 사회 비리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는 것을 임무로” 삼아 뉴스와 사진 패러디물들을 올리면서, 누리꾼들의 호응은 물론이고 언론의 주목을 받아가며 성장한다.  


딴지일보의 힘은 영상을 통한 새로운 의미 전달도 있었지만, 언어 사용의 자유로움과 파괴였다. “유일한 경쟁지는 썬데이 서울”이요 사회 권력의 비리 저 안 ‘똥꼬 깊쑤키’ 들여다보고 비웃고 조롱하는 쾌감의 언어들에 누리꾼들은 쉽게 감응했다. 딴지일보는 정치적으로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과 김영삼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인터뷰 기사와 사진 패러디로 누리꾼들의 호응을 얻으며 크게 이름을 알린다. 그러나, 한일 월드컵 전에서 쇼비니즘에 편승하고 스스로 기업화하면서, 그리고 딴지일보로부터 분리해 새로운 패러디 사이트들이 하나둘 분리해 등장하면서, 원조 사이트로서의 이름도 차츰 퇴색해져갔다.

 

정치 패러디는 2000년 16대 총선 당시 간헐적으로 모습을 보였다. 이후 딴지일보에 의해 2001년 1월쯤에 연재를 시작했던 이회창 등 대선 후보들에 대한 ‘일망타진 이너뷰 시리즈’ 등으로 그 형식적 재미를 주다가, 2004년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그리고 당시 이명박 서울 시장의 ‘서울 봉헌’ 발언 등의 정치 현실에서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딴지일보 중심의 날 것 그대로의 언어를 통한 정치 패러디에 집중했던 2002년과 달리, 2004년부터는 그 형식에서 디지털 이미지 합성으로 전환한다. 단순히 드라마, 영화 포스터의 이미지들과 카피 문구들을 포토샵 등으로 재가공하는 형태의 정치 패러디물이 폭발했던 시점이라 볼 수 있다.

 

이후 딴지일보의 뒤를 잇는 계보엔 ‘디시인사이드’가 있었다. 이미 디시인사이드는 1999년 디지털 카메라 동호회 사이트로 출발하여 숱한 디지털문화 현상들 (예를 들어, 2002년 디지털 폐인들의 ‘아햏햏’ 문화와 2008년 촛불 정국아래 정치적 토론장으로서의 ‘아고라’의 위력을 보여줬다)의 본산으로 커가는 중이었고, 디시인사이드의 시사 갤러리는 당시 정치 패러디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누리꾼들의 창작 공장쯤이 돼갔다. 어찌보면 디시인사이드는 다른 온라인 공간과 달리 게시글에 이미지를 올려야 글이 게시된다는 성격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패러디 이미지와 동영상의 성장을 도왔던 측면도 있었다.

 

독특하게도, 국내에서 온라인 패러디는 정치적 여론 형성이나 변화에 미치는 역할이 대단히 컸다. 언론에 기사로 소개되거나 언론 스스로 패러디를 차용함으로써 그 대중화를 가속화했다. 특히, 시기적으로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국면에서 패러디의 힘이 컸다. YTN 의 ‘돌발영상’은 탄핵 정국의 주요 장면만을 모아 패러디해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누리꾼들은 그들대로 영화 <살인의 추억>을 패러디한 ‘탄핵의 추억’, 탄핵 가결일의 모습을 풍자한 ‘망국기 휘날리며’, ‘탄핵 대장금’ 등 유명 영화나 드라마 포스터를 따와서 탄핵정국을 비난하거나 국회의원들의 비상식적 행태를 알리는 패러디물들을 제작해 순식간에 인터넷상에 퍼뜨렸으며, 이 패러디물들은 탄핵반대 촛불집회 등 반대여론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우리는 무적의 투표부대’ 패러디 시리즈는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투표를 독려하는 캠페인 소재로 활용되었다. 당시 디시인사이드와 라이브이즈 등에는 수많은 합성물과 패러디물이 등장했다. 누리꾼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복귀를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개혁적 대통령 이미지) 혹은 <효자동 이발사> (소박한 대통령 이미지)에 빗대 만듦으로써, 이제까지의 희화화하거나 부정의 미학 혹은 풍자의 미학에 근거한 정치 패러디물 제작 패턴에 긍정의 패러디란 정반대의 미학적 흐름을 세우기도 했다.    

 

이라크 파병 반대와 반전 작품으로 공을 세웠던 현실 참여적 미술작가군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과 총선 정국에서 누리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패러디 이미지의 기세에 눌려 사실상 부진을 면치 못했다. 당시에 몇몇 아방가르드 정치 미술인들이 탄핵 정국과 관련 온라인 전시 기획을 통해, 프리첼 카페 ‘아트시월’, ‘알통닷컴’, ‘아트무브’ 등에서 누리꾼들과의 만남을 시도했으나 별 호응을 받지 못했다. 누리꾼들은 자신들의 디지털 카메라로 찍거나 기존의 이미지들을 바로 손쉽게 포토샵 등으로 자체 편집을 시도하고 (일명 ‘포샵질’) 단번에 게시판에 올려 명성을 얻으면서, 오히려 직업적 작가군들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2004년의 정치 현실은 이렇게 아마추어 누리꾼들의 패러디 창작이 만개하면서 정치 패러디 사이트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시기였다.

 

그 맘쯤 패러디의 인기를 등에 업고 비즈니스 전업의 신생 사이트들이 속속 등장한다. 시사 패러디물 ‘대선자객’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2003년 12월 말 정치 시사 사이트로 출발한 ‘라이브이즈’(liveis.com), 딴지일보 출신 일부가 독립해 만든 ‘미디어몹’ (mediamob.co.kr), 서울시 버스정책과 CJ 만두파문 패러디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풀빵’ (pullbbang.com) 등이 새롭게 총아를 받았다. 문제는 패러디 사이트들 중 대부분이, 상업적 포털들마냥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정치 패러디를 콘텐츠 서비스 개념으로 접근해 패러디 자체를 소비재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상업적 동기를 지녔던 많은 사이트들이, 정치 패러디물을 누리꾼들끼리 보고 키득거리는 배설의 공간에 밀어넣고 온라인 콘텐츠 서비스 사업을 벌이는데 골몰했다. 검색엔진의 패러디 코너에도 영상 합성을 활용한 탄핵 풍자물들이 즐비해져갔다. 예를 들어, 검색 포털인 다음은 ‘디시 인 총선’ 메뉴를 만들어 패러디 포스터 등 누리꾼들의 기발한 창작물들을 모아 게시했고, 야후는 ‘총선 VJ’라는 이름으로 시민기자들이 현장에서 취재한 동영상과 뉴스를 ‘그들의 변신은 무죄’, ‘동상다몽’ 등의 제목을 달아 제공했다. 네이버, 마이엠 등의 사진갤러리도 선거 관련 패러디 사진들로 대체됐다.

 

당시 누리꾼들의 패러디 문화를 흡수하려던 상업적 포털들에 의해 정치 패러디의 연성화와 패러디의 가십화가 비약적으로 늘게 된다. 게다가 패러디 대상이었던 정치권이 역으로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 기법을 정치 선동과 상대 비방의 장으로 활용하는 경향도 이즈음 크게 증가해 패러디의 현실 저항적 성격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의 좋은나라닷컴은 정치에 오락을 가미한 ‘폴리엔터테인먼트’를 표방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 패러디물을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 중앙선관위조차도 당시 정치 포털과 연동해 총선 사이트(vote2004.nec.go.kr)를 운영하면서, ‘투표용지 휘날리며’ 등 유명 영화를 패러디한 각종 포스터를 게시할 지경이었다. 정치 패러디의 난맥상은 ‘패러디 정쟁’으로 여야 대결 구도까지 형성되면서 극에 달한다. 실제 패러디 정쟁은 <그림 1>에서 처럼, 청와대 홈페이지 초기화면에 올렸다가 내려진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패러디 사진이 시발이 됐다. 영화 <해피엔드> 포스터의 여배우 얼굴에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의 얼굴을 넣은 패러디물이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올라 파문이 일었다. 정사를 마친 듯 침대에 앉아있는 불륜의 연인 중 남성을 조선과 동아 일보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여성을 박근혜에 비유했다.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며 분격해 노대통령의 알몸 패러디와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사진에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해 ‘희대의 민생파탄범’으로 이름붙인 패러디 사진을 좋은나라닷컴 패러디 사진 코너에 게시하며 반격했다.

 

<그림 1> 패러디 정쟁의 대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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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홈피의 박근혜대표 패러디// 좋은나라닷컴의 노전대통령 패러디
 

멱살잡이와 난투극이 난무하는 우리의 정당정치 현실에서 보자면 이도 그리 큰 사건이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제도권 정치 비판의 수단이었던 패러디가 오히려 의회내 정쟁의 도구가 됐다는 측면에서 보면, 패러디 문화의 발전에 꽤 부정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 정치인들간 패러디 정쟁으로 말미암아 패러디가 특정 정파를 비난하고 선동하는 도구적 역할로 후퇴했고, 이후에 계속해서 비열한 정쟁의 도구로 등장한다. 물론 2008년 촛불 정국에서 스티커, 짤방, 플래카드, 풍선, 카메라 등 다양한 소통의 매체 역할에 더해, 정치 패러디는 계속해서 누리꾼들의 중요한 사회참여와 표현의 수단으로 쓰인다.


2009년에 또 한번 패러디는 그 정치적 급진성을 상실한다. 정부 홍보의 적극적 수단으로 도입되는 국면을 맞이한다. 반전과 해학을 통한 풍자의 미학이 사그러들고 이제 패러디는 정부 정책의 중요한 홍보 수단으로 떠오른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은 드라마 ‘꽃보다 남자’(KBS 2TV)의 인기에 편승해 당 홈페이지에 국정핵심과제 관련 특위 활동을 ‘꽃보다 경제’로 패러디해 게시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변인은 손담비의 노래를 빗대어, ‘박담비, 같이 미칩시다’ 패러디를 만들어 당 기초의원 결의대회에서 선전용으로 제작해 퍼뜨렸다. 또한 박희태의 말말말 게시판에 또 한번 오른 ‘우리도 연아처럼’에서는 피겨선수 김연아 선수 옆으로 그가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을 합성해 올렸다. 김연아처럼 세계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자는 메시지를 첨언한다. 패러디의 홍보 수단화는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을 패러디하면서 사실상 절정에 이르렀다. 김인식 야구감독의 얼굴을 대신한 이명박 대통령이 야구단 감독의 얼굴로 합쳐져 등장하고, ‘당정청 드림팀이 되자’는 문구로 패러디물을 완성했다.


대부분 패러디의 정부 홍보 수단화에 누리꾼들의 야유가 쏟아졌는데, 사실상 콜라주나 포토몽타주의 역사를 본다면 이도 그리 크게 욕먹을 짓은 아니었다. 사회주의 건설기에 콜라주나 포토몽타주가 정치 과잉의 선전 도구로 이용됐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주들 또한 심심찮게 이들 기법을 이용해 물건을 팔아왔기에 정부 홍보용 패러디물이란 외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요 결과일 수 있다. 문제는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누리꾼들의 전유물이자 정치 풍자의 대표적 수단으로 각광을 받았던 패러디 수단이 정당간 정쟁이나 홍보용 수단으로 재개념화될 때였다. 노무현 탄핵정국 패러디물들을 빼곤 사실상 정책 홍보 등 긍정의 패러디가 오히려 누리꾼들의 반감을 사거나 대부분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음을 보여준다. 정치인들의 패러디 오용이 문화정치적 표현 수단으로써의 효과를 상당히 희석시켰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요약하면, 정치 이슈가 나올 때마다 누리꾼들은 새롭고 기발한 그래서 정국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정치 패러디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동시에 패러디는 정치권의 정쟁과 홍보용으로 그리고 온라인 포털들과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전문 상업 패러디 사이트들을 위한 돈벌이로 전락하면서 그 정치적 호소력을 점점 잃기 시작한다.


5. 정치 미학적 표현으로써 패러디의 가능성    

이제까지 국내 인터넷 패러디의 발전을 딴지일보에서 출발해 최근의 정치 패러디 발전까지 그 특징들을 훑어보았다. 2004년을 정점으로 놓고 패러디 문화의 대중화와 이후 쇠퇴 국면을 살펴보면서, 그 쇠락의 요인들로 업체들의 패러디의 상업적 서비스화, 패러디의 정쟁 도구화, 정부 홍보용 패러디 생산을 들었다. 이제부턴 좀 더 미시적인 패러디 생산 미학 자체에 눈을 돌려서, 누리꾼들과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이 직접 디자인해 올렸던 몇몇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 그들의 작업 방식을 대중화 요인, 정치 미학적 효과, 예술 생산 방식의 대중적 전환이라는 특징에 착안해 패러디물의 공과를 따져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방법에서는, 다른 표현수단 보다 월등히 많은 누리꾼들의 사진 패러디들을 생산해왔던 디시인사이드 갤러리(http://gall.dcinside.com)를 중심에 두고 그 하위 디렉토리인 ‘패러디 갤러리’ 작품들을 주로 살펴보았다. 2003년부터 개설된 패러디 갤러리의 게시물들을 재열람하면서, 다양한 패러디 게시물 가운데 주로 정치적 사안과 연관된 목록들을 열람하는 방식을 취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들에 이뤄졌던 패러디 창작과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들을 함께 감상하기 위해, 디시인사이드 외에 구글, 네이버, 야후 검색(예를 들면, 이명박 패러디, 정치 패러디, 노무현 탄핵 패러디, 박근혜 패러디 등)으로 관련 이미지들을 여러 경로를 통해 찾아들어가는 방식도 썼다.


정치 패러디의 성장과 발달이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시기들과 대체로 일치하지만, 2003년의 대선 정국을 시작으로 2004년의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만두파동, 그리고 서울시장의 ‘서울시 봉헌’ 발언에 대응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다, 촛불 정국 시기에 다른 표현 매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춤하는 소강 국면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정치 패러디 발전의 이와 같은 국면 변화에 대한 해석을 주로 이 때 생산되어 높은 조회수를 누리며 유명세를 탔던 패러디물들을 관찰해보며 그 근거 이유들을 찾고 있다. 즉 정치 패러디가 문제시됐던 시점들(주로 정치 선거 시즌들)과 연계된 정치 패러디물에 대한 기사 자료 수집은 뉴스기사 전문 검색 사이트인 카인즈(http://www.kinds.or.kr)를 통해 추가로 병행했다. 기사화됐던 누리꾼들의 패러디에 대한 소개를 참고로 다시 관련 이미지를 검색하는 방식도 취했다. 덧붙여, 정치 패러디 갤러리로 유명한 ‘미디어데일리’, ‘풀빵닷컴’, ‘미디어몹’, 그리고 ‘야후’와 ‘다음’2의 사진 이미지 갤러리 등을 참고가 필요할 경우 열람했다. 패러디물 내용에 대한 미학적 평가는 앞서 이론적으로 살펴봤던 패러디 미학의 세 가지 부류들, 즉 수평적 패러디 혹은 패스티쉬의 미학, 수직적 패러디-전유의 미학, 인용의 미학-전용 혹은 선회의 미학이란 기준을 통해 해석을 시도한다.

 

1) 정치 패러디의 대중적 생산 방식과 파급력

이제까지 대중과 언론의 조명을 받아 소개됐던 국내 정치 패러디물의 형식을 보면, 대부분 그 내용들을 국내ㆍ외 영화나 드라마 포스터에 크게 의존해왔다. 단순히 포스터에 나온 배역 얼굴만을 바꾸고 카피 문구를 적절히 고치는 ‘포샵’ 수준의 패러디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 올라와있는 패러디 게시물들을 살펴보면, 2003년부터 사회적으로 쟁점화됐던 사안들과 관련해 거의 대부분 영화 포스터들을 원본 이미지로 차용했다. 콜라주 형식으로 다른 이미지들을 여럿 합성한 작품은 오히려 2천년대 초반에 잠깐 등장하고 곧 사라진다. 사회적 논쟁이 있던 시점에 만들어진 패러디물들은 대부분 포스터 이미지의 틀을 그대로 갖다 쓰는 방식이었다. 그것도 대중적으로 관객이 많이 들었던 영화나 드라마 작품들 중 정치적 사안이 터진 시점이나 바로 전에 제작된 포스터 이미지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누리꾼들 스스로 혹은 보는 이들의 기억 능력에 소구하기 위해서 최근 1, 2년간 쓰였던 영화포스터들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보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세월이 지나서보면 당시 패러디의 정황과 맥락이 뭔지에 대해 보는 이의 기억에서 가물가물하기 십상이다. 즉 패러디 작품에 대한 누리꾼들 스스로의 기억과 패러디물 자체의 생명력이 짧아진다. 이는 다음에 볼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한계 상황을 만드는데 일조하는데 반해, 다중에 의한 창작물의 대량 생산을 허용해 여론을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크게 기여한 측면이 있다.

<표 2> ‘미디어데일리’ 시사 패러디 연재물
 

 패러디 연재 제목

연재 일자

원본 출처

·'타임머신' MB와 함께 떠나는 과거여행!

09. 6. 30.

미국영화: 타임머신, 2002

·황석영의 '잘못된 만남' 중도실용주의??

09. 6.  8.

국내영화: 잘못된 만남, 2008

·'바보' 노무현 당신의 미소가 그립습니다.

09. 5. 25.

국내영화: 바보, 2008

·'황씨표류기' 황석영 '사는게 다 그런거지!'

09. 5. 15.

국내영화: 김씨표류기, 2009

·'마더' 건호야! 엄마가 지켜줄께!

09. 5. 13.

국내영화: 마더, 2009

·'킬빌' 강한 박근혜가 돌아왔다!

09. 5. 12.

미국영화: 킬빌, 2004

·2009 외인구단

09. 5.  6.

MBC드라마: 외인구단, 2009

·'박풍(朴風)'의 신라의 달밤!

09. 4  30.

국내영화: 신라의달밤, 2001

·4.29 뺏지대전!

09. 4. 24.

중국 영화: 적벽대전 2, 2009

·우리집에 왜 왔니?

09. 4. 22.

국내영화: 우리집에 왜 왔니?, 2008

·신해철의 '사랑'

09. 4. 21.

국내영화: 사랑, 2007

 

누리꾼들 누구든 쉽게, 있는 포스터 이미지들을 가져다 변형하여 사안에 따라 대량으로 제작해 게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누리꾼들이 완성한 패러디물 아래 흔히 달아놓는 “하룻밤 꼬박 날 새서 만들었어요”란 누리꾼들의 덧붙이는 게시글은, 이들이 패러디 제작에 투여한 상대적으로 손쉬운 작업 난이도를 뜻한다. 최근의 이미지 패러디 제작 방식을 봐도 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일례로, <표 2>의 ‘미디어데일리’(www.mediadaily.co.kr)의 정치 시사 패러디물의 연재를 봐도, 그 제작 특성이 잘 드러난다. 표의 우측 칸들은 원본 이미지의 출처를 국가명, 제목, 제작년도 순으로 필자가 정리해본 것이다. 이를 보면 대부분이 흥행에 성공해 잘 알려진 국내ㆍ외 영화 포스터를 이용해 재미를 주는, 거의 만평과 비슷한 연재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연재물조차도 매주에 한편씩 작가가 아닌 전문기자가 패러디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본 포스터에 기대서 누구나 제작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됐음을 의미한다. 물론 패러디 생산 미학의 수준에서 보면, 대개가 단순히 포스터 캐릭터와 정치인의 얼굴 이미지를 뒤바꾸는 것들이어서 패러디의 완성도와 영향력이란 면에서 단순 차용의 ‘수평적 패러디’에 해당한다.

 

<그림 2> 서울시 버스노선 패러디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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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인사이드 패러디 갤러리의 게시물들과 앞서 패러디 쇠락의 전반적 역사를 보면, 단연 2004년 탄핵 국면, ‘서울 봉헌’ 반발, 그리고, 같은 해 6월 ‘쓰레기’ 만두 파동 시기에 누리꾼들의 패러디 창작이 최고점에 달했다. 창작물 생산의 당시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컨대, 탄핵 국면에서 국회의원들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국회해산’ 등을 외치는 사이버시위에 자연스레 정치 패러디가 합세해 힘을 실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기각했을 때 또한 노대통령의 복귀를 환영하는 포스터 이미지 혹은 플래시로 제작한 패러디물이 봇물을 이루었다.

 

2004년 7월경에는 당시 이명박 서울 시장의 ‘서울 봉헌’ 논란과 교통 체계가 바뀐 것에 대해 비판 패러디들이 디시인사이드 등을 가득 메운 적이 있다. 특히, 이 때 제작된 패러디물 가운데 서울 버스를 구분한 알파벳 표기 G, R, Y, B를 ‘지랄염병’의 약자라 빗대어 보면서, “이젠 버스를 타면 살아 숨쉬는 지랄염병을 체험할 수 있다”는 내용의 패러디가 등장해 크게 주목을 끌었다. 버스 노선 패러디는 이제까지의 대중영화 포스터의 패러디 합성 방식과 미학적 완성도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나쳐보면 이미 존재하는 버스 이미지에 단순히 문자를 바꿔놓는 효과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버스와 문자가 색감 효과를 발휘하면서 뛰어난 타이포그래피 효과까지 함께 거두고 있다. 그림에선 흑백으로 보이지만, 각각의 버스는 위로부터 파랑, 빨강, 노랑, 파랑 색이고, ‘지/랄/염/병’의 네 글자가 버스 색깔과 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흥미롭게도 색감과 타이포그래피의 앙상블은 육두문자 네 글자와 대비되면서 그 색감의 정교한 질서를 여지없이 희화화하고 박살내는 재미를 준다. 미학적 수준으로 본다면, 아마추어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용으로서의 패러디’ 혹은 ‘전용’의 미학에 이른다.

 

같은 해 만두 파동에서도 패러디물의 위력은 강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사안은 기업의 도덕성 문제였다. 무엇보다 일명 ‘쓰레기 만두’ 생산과정과 관련해 식품업체 1위 CJ 등이 책임 회피 등 비도덕적 모습을 보이다 누리꾼들의 공분을 샀다. 결국 누리꾼들이 분풀이로 제작해 배포했던 패러디가 여론몰이를 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만두파동의 책임 논의가 불거지던 당시 한 누리꾼의 기업 윤리 질책에 대한 CJ 직원의 면피용 답 메일이 공개되면서 공분을 샀다. 이 때 <올드보이> 영화 속 장면을 이용해 CJ 직원을 비판하는 다양한 패러디들이 등장했다. 당시 패러디물들은 먹거리와 관련해 대기업의 비윤리적 속성을 알리는데 상당히 큰 힘을 발휘했다.

 

결국, 효과면에서 누리꾼들이 제작한 패러디 하나하나가 가진 이미지의 힘보다는 여럿이 한번에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제작하여 뿌리는 그 이미지들의 합해진 힘이 외려 컸다. 2004년 당시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사이트에만 하루에도 수백건의 정치 패러디 게시물들이 올라왔던 점이 그 예이다. 다시 말해, 작품으로서 콜라주나 혹은 포토몽타주처럼 패러디 이미지가 지니는 미학적 완성도에 의한 심미적 감흥보다는, 사회적 이슈와 적절히 맞물리면서 누리꾼들이 퍼뜨렸던 풍자 이미지들에 압도당했던 특정 시기의 정황이 효과 측면에서 더 컸다. 누리꾼들의 활동은 패러디를 생산해 인터넷 곳곳에 터뜨리는 게릴라전에 가까워보인다. 패러디 생산 방식에 있어서 쉽고 대중 친화적인 특성이 단기간에 파급력이 컸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이는 개개의 패러디 이미지들이 쉽게 잊혀지고 생명력이 짧은 근거로 작용했다.    
 

 

2) 매체 표현 방식의 다층성

2008년 촛불 정국하에서, 미국의 힙합 래퍼 에미넴(Eminem)의 음원(Lose Yourself)에 반주를 맞추고 이명박 대통령의 연설 내용을 샘플링해 제작한 랩곡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에미넴을 패러디해 일명 닉네임이 ‘핼시오네라(Halcyonera)’라 알려진 누리꾼이 만든 ‘Cease Yourself’란 싱글 곡이다. 이대통령의 육성을 대부분 역진술해 끊어 이어서 가사를 만들었는데, 샘플링의 편집이 상당한 수준이다. 음원 샘플링을 통한 정치 패러디 기법은 또한 동영상 이미지와 합쳐지기도 한다. 즉 가수들의 노랫말에 맞춰 연설하는 정치인들의 입모양을 편집하여 립싱크하는 동영상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떠오르는 정치 패러디의 일종이다.

 

2004년 탄핵 국면에서 등장했던 각종 플래시, 카툰, 풍자만화 등도 이미지, 캐리커처, 동영상, 음악 등을 혼성해 쓰면서 사이버공간을 스타일 정치의 표현 무대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레떼닷컴(www.lettee.com) 등에서는 패러디 플래시물들이 등장했고, 게임 사이트에서는 게임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듯 ‘탄핵반대’를 외쳤다. 게임 내러티브 자체가 정치 패러디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노 전대통령 탄핵에 가담했던 국회의원들을 기생충에 비유해 총으로 쏘아 잡는 ‘국회 기생충 박멸게임’이 개발되어 유행한 적이 있다. 청와대를 배경으로 ‘193마리의 기생충을 잡아라’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날개 달린 국회의원들의 얼굴을 총으로 쏘아 떨어뜨리는 게임이다. 임무 수행을 다 끝내지 못하면, ‘민주주의 오버’라는 메시지가 창에 뜬다. 또한 경매 사이트 옥션(www.auction.co.kr)에서는 네티즌들 간에 탄핵을 찬성했던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붙인 물건들을 헐값에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방식은 다 다르지만 다양한 매체 수단을 응용한 정치 패러디의 양상들이다.


2008년 촛불 정국에서도, 광화문 앞 광장 한복판에 펼쳐놓은 컨테이너 박스들 (일명 ‘명박산성’)에 망연자실해 하면서 수많은 누리꾼들이 다양한 패러디들을 제작했다. 형식은 광화문 사진 이미지였으나 내용은 온라인 게임 베틀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게임 전술 화면들을 합성하여 구성하는 재치를 보여준다. 마치 조선 시대의 운문체 글을 떠올리게 하는 ‘명박산성’(明博山城)이란 <표 3>의 시구절을 보라. 이 또한, 한자어 고유의 소리와 말뜻을 서로 달리할 수 있음을 살려서 패러디를 재치있게 구성했다.  

    

명박산성(明博山城)

 

광종(狂宗) (연호:조지) 부시 8년(戊子年)에 조선국 서공(鼠公) 이명박이 쌓은  성으로 한양성의 내성(內城)이다.
 성(城)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당시 육조거리에 막아놓은 기대마벽(機隊馬壁)이 백성들에 의해 치워지매, 그에 대신하여 보다 더 견고한 철궤로 쌓아올린 책(柵)에 불과하다.
 이는 당시 서공(鼠公)의 사대주의 정책과 삼사(三司:조선,중앙,동아) 언관들의 부패를 책하는 촛불민심이 서공의 궁(宮)으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 만든 것이다. (후략)


 [출처: 불명]    


 <표 3> 광화문 컨테이너 박스의 패러디 시구절
 

20세기초 나치에 대항해 다다이스트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도 다양한 오브제들을 사용해 이미지 콜라주의 패러디 정치 예술을 보여줬던 것처럼, 인터넷 누리꾼들은 반전과 풍자를 끌어올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 기법과 수단들을 통해 패러디 창작을 한다. 물론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효과는 다다의 20세기초 상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예컨대, 다다의 포토몽타주가 지금까지 미학적 차원에서 뛰어나고 그것이 마치 르뽀 사진의 효과를 낼 정도로 정교한 합성 효과를 뽐내어도, 사실상 아마추어 누리꾼들이 하루 밤을 새서 만드는 패러디물에 비해 실재감을 구현하는데 오히려 경쟁에서 밀리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게다가 포토몽타주를 위해 쓰였던 재료가 인쇄된 책이나 신문임을 고려하면, 1차원 평면적 이미지 합성을 넘어서는 디지털 이미지의 다양한 효과와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시각적 표현이라 하더라도 훨씬 다차원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지한 사진에 운동성을 줄 수도 있고, 하나의 이미지 바탕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주는 것도 가능하다. 디지털 기술은 이렇듯 표현의 시간과 공간 배치의 모든 부분에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2008년 촛불 정국하에 어느 누리꾼에 의해 만들어진 ‘엠비콕’이란 작품을 보자.

 

<그림 3>은 헐리우드 영화 <행콕>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15장 조합(예서는 그 중 3장 발췌)의 연속으로 움직이는 이 사진은 마치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콜라주들의 중첩 효과를 내고 있다. 한 누리꾼에 의해 제작된 이 이미지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던 촛불 시위를 각 지역별로 ‘엠비콕’의 고글 안경 위로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다. 기본 얼굴 이미지와 주요 하단 문구들은 바탕으로 고정돼 있고, 시간에 따라 고글 안경 위로 전국에서 벌어지는 촛불 시위 현장들의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변해간다. 동시에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 시위에 반응하는 답글이 만화식 말풍선을 통해 점멸한다.
 

<그림 3> 영화 <행콕>의 패러디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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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보면, 15장의 조합된 사진들 각각이 하나의 움직이는 사진 이미지의 콜라주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가만 들여다보면, 15장 사진조각들 각각에 또 다른 콜라주들의 시·공간적 배열과 배치 효과를 합해놓고 있다. 어찌보면 이는 비슷하게 변화하는 이미지들을 여러 겹으로 중첩시키는 플래시 등 디지털 표현의 아주 단순한 미학적 효과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흔히 볼 수 있었던 영화포스터 배역의 얼굴을 정치인의 것으로 대체하는 1차원적 사진 병합의 패스티쉬 방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흔히 고착된 공간성을 지닌 콜라주나 포토몽타주에 비해서, ‘엠비콕’과 같은 이미지 변형은 시간적 축을 이용하여 콜라주 이미지들의 공간 편성의 변화까지도 함께 꾀하는 작업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는 기법의 다양성과 표현 방식을 한층 시공간적으로 유연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엠비콕’은 현대 누리꾼들의 문화, 특히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반응하는 새로운 패러디 형식 실험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학적으로 보면, 디지털 시대의 기법들을 창의적으로 전유한 ‘수직적 패러디’로 봐도 좋다.

 

상황과 토픽에 따라 이처럼 매체적ㆍ시각적 특성을 종횡하며 새로운 표현방식들을 다매체적으로 결합하는 능력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물론 영화 포스터의 원본 이미지에 너무 기대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 또한 영화 포스터라는 오브제의 아우라에 의존함으로써 이 또한 패러디의 생명력을 짧게 만들고 있다.     
 

 

3)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의 탄생

국내에서 누리꾼들의 패러디물 생산은 정치적 동기에서 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디지털 이미지들의 얼굴을 장난삼아 바꾸는 행위로 출발했다. 그들 주위의 친구들, 친지, 가족, 연애인 등이 콜라주의 대상으로 나오다, 사회적, 정치적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로 차차 그 사진의 내용이 대체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디시인사이드 패러디 갤러리를 봐도 이와 비슷한 패러디 내용 변화의 패턴을 읽을 수 있다. 갤러리에 등록된 게시물 가운데, 2003년 10월쯤 되서야 게시 목록에서 본격적으로 영화 포스터를 이용한 패러디물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소재는 누리꾼들 주위의 친한 인물들이었고, 서서히 정치성(주로 쇼비니즘에 기댄 주변국들 비난)을 띤 게시물들이 같은 해 7월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 시기와 맞물리고 이후 시기로 접어들면 정치인들의 패러디물들이 대거 늘어난다. 그 와중에 한-일 월드컵, WBC 야구, 독도 문제, 2008 베이징 올림픽 패러디 등에서처럼, 스포츠계 인사들과 선수들이 패러디물의 소재로 떠오르기도 한다.


불과 십수년전만 해도 전문 작가들의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실험예술이 대안으로 떠올랐던 적이 있다. 작가와 수용자의 대화를 위해 수용자를 직접 작품 생산 과정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예술 활동을 일컫는다. 허나 이 상황에서도 수용자는 어디까지나 작품의 소비자였다. (예를 들어 강명구, 1987 참고). 하지만, 이제는 수용자가 작가가 된다. 이들의 작업 소재도 신변잡기에서 사회 참여적 이슈로 옮아가는 추세다. 오늘날 누리꾼들의 작품은 대개 사안의 정황을 기막힌 반전을 통해 얼마나 풍자적으로 묘사했느냐에 따라 커뮤니티 내부로부터 평가받는다. 그것의 현실태는 조회수와 ‘펌질’이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서만 봐도 잘 만들어진 패러디의 경우 조회수 1만건을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리고, 명성을 얻은 패러디는 누리꾼들에 의해 다른 장소로 무섭게 퍼진다. 이는 예술 작가들이 화랑이나 미술관을 통해 명성을 쌓는 방식보다 즉각적이다. 인정 투쟁의 방식에서, 프로급 예술가들의 성장이 폐쇄된 인적 회로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 것에 비해, 누리꾼들의 클릭수와 펌질은 더 공개적이며 연예인 스타제조 방식의 스타덤 구조와 비슷하다.

 

정치 패러디물이 홍수를 이루던 2004년은 이렇게 누리꾼들에 의해 인정받는 스타급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이 급부상하는 시기다. 예를 들어, ‘하얀쪽배’라는 아이디로 잘 알려진 신상민(당시 27살)은 그 해 17대 국회의원 선거 시기 24건 정도의 패러디물을 올려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아마추어 작가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 패러디물 아래에 아이디를 삽입해 넣을 정도로 나름대로 프로 작가의식이 있었다. 방식은 다른 이들의 것과 비슷하게 영화 포스터물의 이미지 변형 수준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사진 이미지들을 이용해 전문적 패러디 작업을 수행했다. 당시에 워낙 정치 패러디물로 선거사범들이 늘어나면서, 그와 비슷한 몇몇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연대’를 결성한다. 총선을 거치면서 패러디 사범이 1천여명 이상 입건된 것을 보면, ‘하얀쪽배’류의 스타 작가가 나오는 것이나 이들의 권리를 사수하는 모임 결성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얀쪽배’와 아마추어 작가들이 당시 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과연 패러디가 창작이냐 아니면 ‘해적’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냐는 논쟁도 일었다. 방석호는 한 언론 대담에서, 패러디를 직접/간접으로 구분하고, 수준높은(직접) 패러디의 경우 창작이 개입돼 저작권 위반 혐의가 적고, 단순히 얼굴 정도 바꿔치는 수준의 저급(간접) 패러디의 경우 창작 수준이 떨어져 엄격한 저작권법 적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누리꾼들이 만들어내는 패러디물이 대체로 간접 패러디에 집중해 직접 패러디를 생산할 수 있는 여력이 적었고, 직접과 간접 패러디를 구분짓는 판단 자체가 사실상 자의적일 수 있어서, 그의 접근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질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저작권법 제25조의 ‘비평을 위한 인용’으로서 정치 패러디를 인정한다면,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한 패러디 작가들의 작품들은 저작권 침해와 무관한 사회 비평을 위한 인용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2004년 국회탄핵 시기까지 ‘하얀쪽배’나 ‘첫비’ 등 아마추어 작가들은 크게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나, 이후 많은 패러디 작가들은 정치 패러디 제작 일에서 손을 떼고 일상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는 저작권법과 선거법 위반 등 법적 판단에 의해 그들의 창작 활동이 크게 위축된 정황이 컸다. 아마추어 정치 패러디 작가들의 위축에 이어서, 최근에는 정치적 맥락을 거세한 연예 오락전문 패러디 작가들이 오히려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의 패러디는 소재 자체가 연예물이어서 그런지 법적 소송 압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오히려 온라인 서비스업계는 패러디를 오락산업의 아이템으로 만들어 이들을 오히려 포획하는 추세다. 아마추어 작가들은 대체로 정치성을 거세해 패러디가 주는 재미만을 특화하여 연성화해 누리꾼들의 입소문으로 이름을 얻으면 연예계에 작가로 데뷔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008년 패러디 제작 전문작가로 발탁된 ‘김여사’란 이는 ‘드라마 리폼’을 연재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또한 이재수라는 이는 원래 서태지의 노래 ‘컴백홈’을 패러디하며 이름을 알렸던 패러디 전문 가수인데, 최근 패러디 전문 영화감독으로 돌아서면서 나홍진 감독의 영화 <추격자>를 패러디한 ‘추경자’란 작품을 만들어 재미를 봤다.

 

정치 패러디의 전반적 흐름에서 보자면, 아마추어 작가군 생산의 맥이 이처럼 정치, 사회 이슈에서 연예 오락에 봉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소수 엘리트들에 전유되던 창작 활동들이 누리꾼들 누구나 참여하는 창작의 민주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인터넷 패러디의 발전이 생산 주체의 다변화에 큰 돌파구가 된 셈이다. 전통적 정치 예술이 그렇게 벗어나려했으나 실패했던 지점은, 예술의 자기함몰적, 엘리트주의적, 그리고 선동주의적 자세였다. 예술에서 엘리트주의는 일반 대중이 해독하기에 어렵고 이해 불가능한 수준의 작품들로부터 빚어진다. 아무리 정치 미학이 뛰어나더라도 대중의 동의나 이해력을 얻지 못하면 창작의 힘을 잃고 외면을 받을 수 있다. 비록 아마추어적이었고 이제는 시들해졌지만, 창작의 대중화란 점에서 누리꾼들로부터 패러디 작가군의 배출은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4) 패러디 정치 미학의 한계점들

앞서 세 가지 수준(대중적 파급력, 다매체 결합력, 창작의 대중 친화력)에서 정치 패러디의 가능성들을 살펴봤다. 이제부턴 누리꾼들이 지녔던 정치 패러디 미학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먼저 패러디란 표현 방식은 기본적으로 그 미학적 완성도란 측면에서 보면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다. 그 까닭은 창작 기법에 있어 원본 이미지의 차용이 반드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손쉬운 제작을 가져오지만, 그만큼 창작의 수준을 원본 이미지의 기억에 매달리게 만드는 단점을 지닌다.


원본의 기억에 크게 기대는 누리꾼들의 패러디 생산은 패스티쉬로 전락하거나 전유에 머무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패스티쉬의 퇴행성과 달리 지배 문화와 지배 담론의 언어를 바꾸어서 대중의 것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을 일컬어 ‘전유’라 지적했다. 그나마 전유는 소비문화를 통해 생산된 대중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재구성해 역으로 지배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한다. 뉴-/디지털 미디어 예술은 ‘전유’의 창작 방식을 북돋고, 아마추어 누리꾼들을 손쉽게 작가의 스타덤으로 이끈다. 이때 전유는 인용, 샘플링, 콜라주 등의 기법을 동원하며 그로 인해 브랜드 가치를 보호하는 저작권 체계나 초상권, 명예 훼손 등과 항상 적대 관계에 놓인다. 통칭해, 이는 ‘전유 예술’ (Harold, 2008)이라 불릴 정도다. 이제까지 살펴봤던, 영화 포스터 등 원본 이미지를 합성하고 그것의 아우라를 이용해 누리꾼들이 정치 풍자를 한다고 하면, 이는 어디까지나 원본의 기억에 기대서 작업한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이 전유보다는 패스티쉬에 가깝다. 전유의 강점은 원본이 패러디에 미치는 것보다 강한 현실에 표적을 맞춘 비평의 힘에 있다. 그러나, 전유의 방식 또한 패스티쉬만큼이나 자본주의의 브랜드 기호나 권력의 약호를 재배치하거나 변형하는 행위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자연히 전유의 이미지들 또한 수많은 스펙터클한 다른 기호들에 효과없이 파묻히거나 자본주의 광고 등에 역으로 활용되면서 많은 부분 포획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1) 소구 방식의 동일성

실제 패스티쉬적 모방이나 전유에서 멈춘 채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가질 않는 누리꾼들의 문화 행동은 아마추어 패러디의 미학적 맹점으로 작용한다. 인터넷 정치 패러디의 가장 큰 문제는 이용되는 소재가 다양한데 소구 방식이 동일하다는데 있다. 국내외 영화와 드라마 포스터 등 소구 방식의 동일성은 대개 관객과 독자를 지치고 무디게 만든다. 낯익은 포스터들로부터 반복되는 패러디의 지루함은 의도했건 아니건 정치적 학습을 방해할 수 있다. 패러디는 처음에는 배를 잡게 만들고 여러 생각을 주다가도 계속해 볼수록 흥미를 잃게 만드는 마취제와 같은 효과가 있다. 이것은 누리꾼들이 주로 패러디 수단으로 사용하는 극장 포스터와 드라마 홍보용 사진에 대부분의 수용자가 진력이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주로 깊이 없는 퍼포먼스와 미장센과 인물 변화에만 호기심을 갖고 즐거워한다. 수용자 대부분은 역사적 상황과 맥락에 대한 패러디스트의 비평적 표현보단 사진 속에 극적으로 표현되는 재미에만 관심을 둔다. 즉 초기의 충격 효과는 비슷한 사진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지루함을 유발하고 어떤 통찰의 기회도 주지 못한다. 모든 게 오락이고 쇼가 된다.

 

실지 패러디란 다름아닌 언어나 이미지 형식의 냉소적 비틀림을 통해 “일상의 장막을 걷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깨임과 열림을 만들어내는 것” (백욱인, 1999), 즉 사물의 본질에 이르는 성찰의 힘을 이끄는데 있다. 그러나, 전유 이상의 지점에 이르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현실 패러디는 갈수록 허망하다. 엄밀히 따지면, 누리꾼들은 패러디 원본의 형식에 매여 말하고자 하는 전달 내용이 무엇인지 아리송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리꾼들이 만들어내는 패러디물의 효과란 영화나 방송 포스터의 원본 이미지들에 대한 대중의 기억에 철저히 의지한다. 독자가 원본의 이미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그 효과 또한 반감한다. 또한 패러디를 한번 봤더라도 쉽게 기억으로부터 잊기 십상이다. 설사 원본 이미지에 대한 연상 작용을 하더라도 대중적 포스터들의 전유 방식은 깊이 있는 정치 분석을 가로막는다.

 

같은 이미지 또한 끊임없이 전혀 다른 소재, 맥락, 대상을 갖고 재활용되는 것도 문제다. 자연히 의미는 대단히 제한적이고 해석의 지평은 낮다. 결국은 소비 사회의 이미지들과 다름없이, 누리꾼들의 패러디 또한 지배적 스펙터클의 이미지들 속에 파묻힐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패러디가 순간의 ‘클릭’ 혹은 ‘포샵질’에 의거해 제작되고 유통되면서,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한 패러디물들이 이제는 차고 넘쳐 누구에게도 감흥을 주기 어려운 이미지 공해가 되가는 것이다. 정치 패러디의 상품 광고 도용도 흔한 일이 됐다. 패러디의 연예오락화 경향으로 말미암아, 정치 패러디가 지닌 상징성은 사라지고 그것 자체가 다른 콘텐츠들과 함께 하나의 서비스 장르화하는 경향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풀빵닷컴같은 온라인 기업이나 포털 서비스업체들의 경우에 누리꾼들의 모든 패러디 생산물들은 수익 모델을 지탱하는 콘텐츠 이윤원이 된다. 누리꾼들이 제작하는 패러디물의 가치가 그저 새로운 재미를 찾아 헤매는 인터넷 유저들의 심심풀이용 콘텐츠가 됨으로써, 패러디는 날이 무뎌지고 자본의 상업적 포획을 막기가 어려워진다.

 

(2) 이미지 차용의 패스티쉬화  

정치 패러디는 이제 유명 영화나 드라마 등의 한 장면을 따와 제품을 홍보하는 카드회사의 패러디 광고와 전혀 다르지않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림 4>에서 보이는 것처럼, 일반 누리꾼이 제작한 디시인사이드의 패러디물(글만 바꾸는 경우나 얼굴 이미지를 대체하는 단순 작업)에도, 현대카드 M에서 소비자들을 경품으로 유혹할 때도,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만두 파동과 관련해 비윤리적 기업을 비꼴 때조차 다들 한결같은 이미지가 쓰인다. 모두들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을 원본 이미지로 쓴다. 그림에서 보이는 3편의 사진들은 정치와 광고, 그리고 일상과 오락간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을 보여준다. 카드사 상품광고 패러디=CJ 만두파동 패러디=일반 누리꾼들의 스타일 패러디 내용이 동일한 원본을 인용함으로써, 더 이상 보는 이들에게 전달받는 메시지 내용은 중요해지지 않는다. 오직 수용자들에게 그저 배우 최민식의 들이민 수첩 장면이 머릿속 잔상에 떠오를 뿐이다. 영화의  인상적 장면만이 남으면서, 결국 개별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미지들의 과잉 연출로만 기록된다. 원래 만두파동으로 소비자의 공분을 샀던 한 기업의 비윤리성을 지적한 패러디 이미지가, 비슷한 류의 원본이미지를 차용한 패러디들의 과잉으로 비평의 정치적 차원과 미학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말 그대로 그것이 다 그것처럼 보이는 패스티쉬 이미지들의 잔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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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시인사이드 누리꾼의 패러디 // CJ 만두파동 패러디  // 현대카드 M의 패러디  

 

 <그림 4> 영화 <올드보이>의 패러디물들   

 

비슷한 예로 영화 포스터 <웰컴투 동막골>의 패러디물들을 들 수 있다. 이 원본 영화 포스터도 수많은 누리꾼들에 의해 패러디 오브제로 애용됐던 경우다. <그림 5>에서 보는 것처럼, 영화 포스터 내용은 누리꾼들에 의해 얼굴 이미지들이 바뀌면서 새로운 패러디들을 제작하는데 이용된다. 우선 ‘웰컴투 스미골’이란 패러디는, 원래 배역들을 영화 <반지의 제왕> 출연진으로 대체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패러디의 예이다. 원 영화의 등장인물 순박한 처자 ‘여일’(강혜정 분)이 졸지에 ‘스미골’(골룸)이 됐다. 재미있는 예는 진보 정당이 지방선거를 위해 홍보용으로 제작한 ‘웰컴투 진보정치’와 광우병 파동 기간에 만들어진 ‘웰컴투 미친소’란 두 편의 패러디물이다. 전자는 선거 홍보를 위해 정치 패러디를 만들었다. 반면 후자는 미국 부시대통령과 성조기를 이마에 붙힌 젖소를 원이미지에 대신해 넣음으로써, 정부 정책 불신에 기반한 반전 효과를 얻기위한 비판적 패러디로 작성됐음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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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패러디 // 이명박-부시 대통령 패러디 // 민주노동당 패러디

 

<그림 5>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패러디물들

 

이 둘의 사례는, 앞서 <그림 1>의 여야간 흠집내기용 정치 패러디의 부정적 쓰임새와는 사뭇 다르다. 앞서 <그림 1>에서는 여야가 패러디를 정쟁의 도구화함으로써 어떻게 정치 비판 기능적 의미가 희석화됐는가를 살펴봤다면, <그림 5>는 아예 동일한 원본 패러디에 기댐으로써 어떻게 패러디 과잉과 남발이 생기고 오히려 이것이 진보/보수 정치의 구호상의 구별을 무위화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웰컴 투 동막골>의 포스터에 맞춘 스미골=민주노동당의원=미친소의 등식은, 부정, 긍정, 그리고 코미디의 미학이 뒤엉켜 서로의 정치 미학적 효과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정치 패러디의 이용은 많다. 대표적으로 <옹박>이란 영화를 이용해서, 완전히 서로 다른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모습을 다뤘던 것도 패러디원본 이미지로 인한 폐해의 일종이다. <그림 6>에서 보면, 한 쪽은 한나라당 홈페이지에 실렸던 패러디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을 “박정희의 뒤를 잇는 강력한 대권 후보”로, 다른 한쪽은 “졸속행정과 무대뽀” 후보로 묘사한다. 이 또한 동일한 이미지를 전혀 맥락을 달리해 이용함으로써 누리꾼들에게 부정/긍정의 상호 혼동을 주고 사실상 제대로 패러디 효과를 못살리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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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영화 <옹박>의 패러디물
 

누리꾼들은 이렇듯 기존의 소비문화의 스펙터클 이미지들 (영화, 드라마, 제품 선전 등)에 기초해 손쉽게 패스티쉬적 패러디물을 만들어왔다. 그것들을 쉽게 가져오는 대신에, 그 편리함이 누리꾼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의 ‘새로움’을 표현하는데 발목을 잡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패러디물은 고작해야 원본 이미지의 홍보 역할만 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연예오락 문화산업에서 생산된 이미지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으로 인해 영화 포스터 등을 마구잡이로 이용하면서, 이미지 소비 주체들에겐 그것이 누리꾼들 자신을 위한 유희와 배설의 동기이건 국가 정책 비판이건 진보 정당의 홍보 패러디건 그닥 차이없는 이미지 과잉으로 느껴지게 된다. 결국, 혼성모방의 패러디 제작 방식이 아마추어 패러디꾼들의 한 차원 올라서는 정치 미학적 도약을 막고 있다고 봐야한다.
 

 

(3) ‘전용’의 미학적 결핍

아마추어 패러디의 패스티쉬와 전유에 기댄 정치 미학은 이렇듯 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치명적으로 패러디 작품의 비평적 생명력을 약화시킨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쓰면서도 그 원본의 기억을 멀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기법을 이미 우리는 ‘전용’의 미학 혹은 ‘인용으로서의 패러디’라 봤다. 패스티쉬, 전유, 전용간의 차이는 결국 미적 생산물의 미학적 완성도에 따른 구분이지만, 패러디물 개개의 심미적 영향력과 직결된다.


날조된 소비주의의 스펙터클 안에 갇힌 채 유희와 욕망의 명령을 따르는 인간에게 지향성을 갖고 맞서라한다면 이는 ‘전용’ 혹은 ‘선회’라 할 수 있다. 전유가 이미지의 차용에 의한 냉소에 머무른다면 전용 혹은 선회는 성찰성에 기반한 반대다. 이상향에 대한 비전이 있다면, 전용과 선회의 힘은 배가된다. 소비자본주의의 스펙터클 이미지를 도용하면서도 그 원본 이미지의 흔적을 온전히 떨어내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방식이 선회요 전용이다. 전유 행위가 아마추어 누리꾼들도 가능한 창작의 영역이라면, 선회나 전용은 예술로 표현하자면 숙련과 미학적 재능을 요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베를린 다다의 구성원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처럼, 각각의 차용된 이미지들이 지녔던 과거의 흔적이 완벽히 사라지고 콜라주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부분들로 자리매김하고 각각이 모여 새로운 의미로 형상화할 때 전용과 선회의 의미가 살아난다. 반면, 대개 누리꾼들의 패러디는 전용에 이르지못하고 패스티쉬에 젖거나 전유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결국, 대안의 추상적 지점을 고민할 때, 전용 혹은 선회를 통한 미학과 저항의 방법이 그 적절한 예이다.

 

다다이스트 하트필드의 <독일의 자연사: 변이 Deutsche Naturgeschichte: Metamorphose (1934)>와 80년대 민중미술 진영의 작가이자 사진 콜라주 작업을 계속해왔던 박불똥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1990)>란 작품을 보자. 이 둘은 기성의 사진 이미지들을 합쳐 놓았지만 그들 각각의 의미는 작품 속 전체에서 전혀 새로운 맥락과 미학적 의미를 생성한다. 즉, 두 사람의 포토몽타주에서는 애초 각각의 차용된 이미지들이 지녔던 과거의 흔적은 사라지고 콜라주를 통해 각각이 모여 새로운 의미로 형상화한다. 먼저 박불똥은 80년대 한국사회의 구성체 논쟁을 사진 콜라주로 표현했다. 사회과학의 개념인 토대와 상부구조를 연관없는 그림조각들 (돈다발을 에워싼 공권력으로써의 전투경찰, 미국기가 걸린 총포 등)로 이어붙여 형상화한다. 콜라주의 작품 속에 대한민국의 심층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박불똥은 프로답게 대한민국의 권력 매커니즘과 사회구조적 질곡을 잡아서 그 특징적 측면을 이미 존재하는 사진들을 오려붙여 새로운 의미로 생성한다. 콜라주로 도입된 각각의 이미지 파편들의 기억들이 죽은 자리에 작품 속 전체의 생명이 전용의 힘으로 되살아난다. 이들의 작품은 수직적 패러디를 넘어서는 인용의 패러디요 전용의 미학인 셈이다.

 

한편, <변이>에서 하트필드는 독재자 히틀러의 출현과 파시즘의 계보를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하는 생물학적 변이 과정에 빗대어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면,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유충 에베르트가 죽음의 우두머리 나방인 히틀러로 부화한다. 에베르트 아래 자행됐던 스파르타쿠스단 학살과 피비린내나는 전쟁에서 하트필드는 나치즘의 징후를 읽고, 그 변이 과정의 최종적 완성이 히틀러 출현 (히틀러 나방으로 형상화)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대 사회 현실의 권력 구조와 파시즘의 기원을 밝히는데, 그의 포토몽타주는 여러 말보다 더 강한 여운과 깊이를 남긴다. 이 또한 전용의 효과다.  

 

전용이란 이처럼 어떤 대상을 최초 용도나 경로로부터 이탈시키는 과정이다. 이제까지 본 것처럼, 아마추어 정치 패러디는 미학적으로 전용에 이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아마추어가 어찌 직업적 작가들의 창작 수준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도 있을 수 있겠다. 이 점에서 왜 오히려 2004년을 분기점으로 정치 패러디의 힘이 심하게 꺾였는지를 곰씹어봐야 한다. 어느 누가 이미지 변형을 시도하던지 간에 결국 원본 이미지의 잔상만 떠올리게 만드는 패러디 방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외로써 소개됐던 몇몇 사례들, 서울시 버스 노선 패러디, ‘명박산성’ 패러디 시구절, 에미넴의 샘플링 패러디, ‘앰비콕’ 패러디 이미지들은 박불똥이나 하트필드가 가졌던 전용의 미학에 비해 절대 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들도 바로 당대 사회 이면의 맥락을 드러내는 해학과 풍자의 힘으로 전용의 미학을 표현했다. 결국, 누리꾼들이 레디메이드(기성) 이미지들을 통째로 쓰는 방식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정치 패러디의 긍정적 효과를 지켜내기가 어렵다고 봐야 한다. 누리꾼들의 패러디가 기성 정치인들의 홍보 수단화나 상업적 포털의 콘텐츠화로 전락하는 현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6. 맺음말        

이 글은 프로 세계의 직업적 예술 미학이란 잣대를 가지고 무작정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아마추어 패러디 작품들을 섣불리 재단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글의 서두에서 지적한 바처럼, 이 글은 한국 사회에서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가 지닌 기술적, 매체적, 대중적 가능성과 한계를 최근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2004년을 정점으로 이후 정치 패러디가 왜 그 미학적이고 질적인 완성도 면에서 지속적인 문제들을 노정했는지를 살펴봤다. 특히, 패러디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정치인들의 홍보물로 삼거나, 상대 비방의 정쟁 도구화하거나, 패러디 긍정과 부정의 미학이 하나의 이미지에 동시에 모순적으로 동원되거나, 패러디 자체를 사업 수단으로 삼아 연예오락화화거나 할 때 문제점들이 발생함을 보았다. 즉 패러디가 오용되면서 작품의 생명력이 사그러들고 패스티쉬화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았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점점 위축되어가는 아마추어 패러디를 살리는 방법으로 하트필드와 박불똥의 포토몽타주의 예를 들었다. 이 속에서 패러디 미학의 세 가지 구분 중 ‘전용’의 정치 미학을 누리꾼들이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학적 완성도의 수준은, 작품에 인용된 원본 오브제나 사진들의 맥락을 완전히 탈각시키고 이를 패러디할 대상에 맞춰 정치적으로 미학화하는데 달려있다고 봤다. 가져다 쓴 원본의 기억을 지울 때만이 완성된 콜라주 속에서 현실의 질곡을 드러내고 뒤트는 힘이 배가된다고 봤다. 지금과 같이 기존의 기성 이미지들의 기억들을 통째로 가져다 쓰는 방식은 전거의 예를 차리는 오마주의 미학은 고사하고 외려 수많은 공해의 패러디물만을 양산하기 십상이다. 결국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한 패러디라도 전용의 정치 미학을 담으려 노력한다면 지금의 침체된 정치 패러디의 문화를 크게 살릴 수 있다. 그 아이디어는 물론 전용의 미학으로부터 얻어야 한다.

 

사실상 패러디는 전유가 됐건 전용이 됐건 기존의 이미지를 ‘훔쳐야’ 한다. 2004년을 정점으로 괜찮은 정치 패러디들이 점점 줄고있는 이유 중 하나에는 누리꾼들이 자유롭게 콜라주를 위해 써야할 소재 접근권에 점점 큰 위협을 받고 있는데 있다. 누리꾼들의 패러디 생산 작업을 위협하는 것은 정치적 표현의 억압도 있지만, 점점 더 현실적인 억압은 저작권 위반과 초상권 침해 소송에서 시작한다. 하트필드와 다다의 포토몽타주는 적어도 저작권이나 초상권으로 나치 법정에 서는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현대에는 정치 패러디들이 종종 저작권 보호 대상의 저작물들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절도 예술’ (Lütticken, 2002)의 길을 걷는다. 누리꾼들은 저작권과 초상권 등에 의해 보호받는 이미지, 음원, 영상 등을 이용함으로써 그들이 행하는 창작으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는다. 즉 풍자와 패러디 생산의 출처와 자원들이 권력이나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보호받는 영역에 놓여 있다. 2004년 당시에도 몇몇 아마추어 작가들이 저작권으로 고생했지만, 오늘날 패러디는 점점 더 저작권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면 예술품도 정치 패러디도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과 같은 디지털 리믹스(remix) 시대에 행해지는 다양한 콜라주, 샘플링, 인용 등을 이용한 아마추어 창작자들의 정치적 패러디물은, 처음부터 창작의 자유를 막는 저작권과 소비자본의 횡포에 대항하고 통치 권력에 대한 정치적 조롱을 함께 전하는 스타일의 문화정치 행위라 볼 수 있다. 저작권, 명예훼손, 선거법 위반 등 정치 패러디의 위협 요건에 대한 개선이 없는 한 프로건 아마추어건 미래 패러디 창작의 자유는 요원하다.

 

 

참고문헌

강명구 (1987) 「권두논문: 영상이미지의 사회적 소통과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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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 (Vol. 8, No.1), pp.4-15

*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의 적용을 받지못합니다. 이미 이 글의 판권을 지닌 Info 저널이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정보 이용 측면에서 읽으시고 다운받는 것은 가능하지만, 다른 곳에 업로드는 카피라이트 위반에 걸립니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에 대한 글을 썼는데 카피라이트의 권한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다니 참 아이러니하군요.
From underground cult to public policy for citizens: democratizing an open source artifact at a policy level in South Korea

Kwang-Suk Lee

The Authors

Kwang-Suk Lee, Doctoral Student in the Department of Radio-TV-Film at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Austin, Texas, USA.

Acknowledgements

The article was presented at the International Communication Association Conference (division of Communication Law and Policy), 25-30 May 2005, New York. The author wishes to acknowledge Philip Doty, David Phillips, and Laura Stein of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for their assistance in the preparation of this paper.

Abstract

PurposeThis study aims to explore the feasible use of free and open source software (FOSS) at a policy level in South Korea, which is reacting against being locked into only one technology company, Microsoft.

Design/methodology/approachBased on participatory democratic theory, this paper suggests that the normative role of the state is as a public mediator in the development of an information technology (IT) infrastructure, encouraging greater freedom of choice and the establishment of an electronic environment – such as the community-based use of software technology – for citizens to use easily and freely.

FindingsSouth Korean policymakers have explored FOSS as a kind of a political metaphor: at the international level, FOSS offers a rare opportunity to free the country from its technological dependence on transnational software vendors. At the national level, it is an engine for technological innovation and for market competition. However, the market or business paradigm has dominated most discussions of FOSS in Korea. As a result, the economic paradigm of FOSS is vulnerable and could easily surrender to the proprietary logic of the software market.

Originality/valueThis study describes how the Korean government must maximize the societal benefits of FOSS within the public sector in order to reduce reliance on proprietary software and open the developmental path to alternative technologies.

Article Type: Research paper
Keyword(s): Open systems; South Korea; Computer software; Public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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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 8 Number 1 2006 pp. 4-15
Copyright © Emerald Group Publishing Limited ISSN 1463-6697



Introduction

The “free and open source software” (FOSS) movement is no longer considered a “cult” in the computer world. Linus Tovalds, who developed the kernels for the Linux operating system, has become a guru well known in both the underground world of hackers and the business market (e.g. Tovalds is featured on the cover of the November 2003 special edition of Wired, a techno-utopian magazine). Microsoft's top executives consider Linux, whose total users were estimated at 18 million as of May 1, 2004 (see Linux Counter, http://counter.li.org), a significant adversary. Popular open software programs like Linux, Apache (a web server application), Perl (a programming language), and Sendmail (a mail handling program) have grown robust enough to compete with Microsoft software.

In recent years, the discussion surrounding FOSS has focused almost exclusively on the success of FOSS in the capitalist marketplace. In South Korea, most policymakers considering FOSS have been uninterested in its social and public implications and have reduced its value to that of merely a market incentive for business upturn. Although FOSS has recently been regarded as competitive software for reviving national or international markets, Korean officials have not seriously considered reducing dependency on Microsoft technology or adopting FOSS for the purpose of improving the social welfare of citizens and reducing the digital gap in a significant way. Notably, no economic approaches to FOSS in Korea have explicitly embraced direct subsidies or government intervention to support open source software developers. The neo-classical idea of a neutral government presupposes that policies favoring FOSS over proprietary software would disrupt the software ecosystem, and that government, therefore, should always be neutral, except in cases of radical market fluctuation (see Hahn, 2002). Those who argue for removing the public role of government, however, would in practice favor the monopolies and the private property of the rich over publicly-based equal access to the information society.

Given these conditions in Korea, the purpose of the present study is twofold: one purpose is to explore policies of the Korean government that could support FOSS and avoid the market failure caused by vendor dependency on Microsoft; and the other is to emphasize the social and public implications of FOSS, rather than its new market benefits, which may be wholly concentrated on megacorporations. In essence, I argue that FOSS should be considered as a public resource for encouraging citizens' social freedom, a resource that confers new choices on software users, who have been entirely alienated from the software development process.



The philosophy of freedom in FOSS

The concept of “free software” was shaped by the philosophy of Richard M. Stallman, a founder of the Free Software Foundation. His term “free software” was not meant to denote lack of cost, but rather lack of restriction (Pavlicek, 2000, p. 19). Stallman puts the emphasis on freedom from control by another; his standard explanation is “free as in free speech, not free beer”. This use of the term “free” refers to four kinds of freedom for users of the software: the freedom to use, to modify, to redistribute, and to release modifications to the public. To enjoy these freedoms, access to the source code is a precondition (Stallman, 2002, p. 41).

One misunderstanding concerning FOSS is that it is not protected by copyright and that it falls in the public domain. The actual licensing mechanism of the FOSS lies under the market system and its legal authorities. As an intentional contrast to the concept of copyright, Stallman (2002, p. 89) calls his method for making a program free “copylefting”. Instead of putting software in the public domain uncopyrighted, free software is copylefted, because if the software is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without protection, it could be misappropriated for developing a proprietary product.

The free software movement has given rise to a movement based on “open source” software. In contrast to Stallman's philosophy, which is based on the moral and ethical imperative of producing free software, the open source movement focuses on the pragmatic benefits that sharing code can provide for creating better software as well as for escaping the risk of so-called “lock-in” associated with a single-company technology such as that of Microsoft. Popularized by Raymond (1999), the concept of open source software stresses aspects such as the high reliability, quality, and flexibility of the resulting programs as the primary motivation for developing such software. Raymond's open source initiative is seen as a more business-friendly concept than the free software movement, which is closer to the political idea of challenging a proprietary counterpart that produces closed software and embeds its own bells and whistles in its versions of the software.

The popular view of FOSS as a market-based initiative has emerged from the relative prominence of the open source concept over the free software concept. Raymond's (1999, pp. 27-78) market-centered approach is seen in his use of the terms “cathedral” and “bazaar”. He metaphorically equates the cathedral model to the closed proprietary world and compares it with the bazaar model, the Linux world of open communities. The term “bazaar” not only indicates the intellectual collaboration involved in an open process, free from any external control (Roberts, 2001, pp. 21-3), but also expresses the desire to influence the business market and thus to forge FOSS in a way responsive to market mechanisms.

As shown in Table I, both the free and the open source concepts would restrain the dominant proprietary trends on both the societal and the economic policy levels. If the radical idea of free software is applied well in the public sector, it could increase transparency and public rights to information. The application of free software should increase the ability of the government's information systems to interoperate and ensure the continued availability of information (Seiferth, 1999, p. 57). Meanwhile, the market-friendly idea of open source software could be used as an efficient stimulus to support a competitive software market by removing market barriers to software ventures. The market-driven open source model, however, is still vulnerable to attack by the oligopolistic software companies, which are based on closed software code.

Comparing the real world differences between the two methods of licensing, it is clear that Stallman's idea of copylefting by means of a General Public License (GPL) is closest to the model of information as part of the public goods. It is also based on the public domain approach – the non-proprietary principle that the source code of program cannot be owned. Raymond's open source initiative, as evidenced by the open license to the Apache server, has a much weaker protection of the public domain than the GPL (Fugetta, 2003). A GPL requires that modified versions of the original software also be made available to other users on the basis of the unlimited openness of source code and thus encourages authors to voluntarily give up their private rights on the copyright of software. In contrast, Raymond's open source license allows individuals or corporations to close and privatize the modified part of source code of software.

The two different kinds of software licenses are clearly distinguished by different levels of “openness” of the source code. It is natural, therefore, that Stallman criticizes Raymond's open source license as creating “semi-free programs” and even some “proprietary programs”. He worries that the imperfect openness of the modifiable source code will allow the big software vendors to appropriate source code in the public domain and privatize it by modifying and copyrighting it. Obviously, the open source license model of Raymond has significant implications not only for promoting new competitive values within the market, but also for building a collaborative ethic of customers and content producers in the creative process. Yet the intellectual property system could incorporate the upsurge of new alternative licenses within the boundaries of the market. It is very clear that open source software can easily be used for proprietary purposes and that the open source concept as a market incentive or ethic needs to be redesigned using a socially conscious approach to free software.



Signpost to an alternative path: the “1-24 Computer Disaster”

In South Korea, FOSS policies have only emerged in the last few years. Momentum to consider making FOSS government policy was generated by the “1-24 Computer Disaster” in 2003. South Korea was the nation most affected by the January 24 virus attack. The virus that crippled the internet system, dubbed the “Slammer”, exploited a security flaw in Microsoft's web server software. The vulnerability of Microsoft's software provoked harsh criticism, and since then the government has begun to consider alternatives to Microsoft software. At that time, despite the availability of patches, Microsoft made it difficult to keep track of its security alerts, so the alerts did not get through. In the end, software users could not contain their anger toward self-contained, monopolistic software technology, and an influential Korean civil rights group, People's Solidarity for Participatory Democracy (PSPD), launched a lawsuit for damages related to the Slammer virus. Named in the suit are information service providers, the Ministry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MIC), and Microsoft. The suit was brought on behalf of internet users and commerce companies.

Following this incident, the Korean government announced a plan to spend 21.5 billion won (US $18.7 million) by 2007 to replace Microsoft's Windows operating system and Office suite with open source alternatives. Thousands of computers in ministries, government-linked organizations, and universities – comprising 20 percent of desktop software and 30 percent of server software – will be changed to open source software (Myung, 2003). Since the computer virus disaster, the MIC seems to have changed direction from dependence on Microsoft towards accepting open source software. To government officials, FOSS has gradually become more appealing due to the economic incentives it offers both to expand the scale and scope of the software market and to reduce acquisition, maintenance, and support costs. The promotion of FOSS in the domestic market has also been praised as a kind of patriotism that will help liberate the country from a long-term software dependence on other countries.

Nevertheless, implementing FOSS policies in Korea remains a complicated problem. The domestic software market is estimated as being up to $16 billion, the equivalent of a 2 or 3 percent share of the world software market. The Korean software market, along with others, has been making a rapid upturn. The profitable software market has led the transnational software monopolies to intervene in national IT policies more aggressively. For this reason, the introduction of FOSS at the government policy level is a controversial and sensitive issue for all the stakeholders involved. The MIC is caught in an ambivalent position between skeptical users of Microsoft and the international pressure of software monopolies. The ambivalence comes from the vulnerable international status of the Korean government, which feels its policies must respect the interests of Microsoft and other global vendors[1]. The government's uncertainty as to whether it is a proponent of FOSS or a collaborator with international software vendors could easily become a handicap because the opaqueness of its FOSS policies could lose the trust of its citizens.



Software policy in South Korea

Korea's political and legal conservatism has become a crucial factor in determining national information policy. Because of this, in the near future government policy based on the market-driven philosophy of information and technology may promote a limited vision of FOSS development aimed simply at increasing the market value of computer software industries by using the open source concept. In the end, Korean FOSS policies may succumb to the ideological agenda of government and powerful private interests which together promote a patriotic discourse of escape from dependency on international vendors and at the same time more privatization, leading to a domestic market dominated by proprietary vendors.



International constraints

At the international level, Microsoft and several leading transnational vendors have dominated not only the national software market, but also most information systems in government institutions[2]. National software policies are largely determined by the World Trade Organization (WTO) Agreement on 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TRIPS), or by the agreements of the 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 (WIPO), or by other unofficial trade pressures. The US Government, in particular, on behalf of its software, music, and film industries, has been pressuring newly industrialized economies to enforce international treaties that protect copyright and patent (Lee, in press). In Korea, no system of intellectual property can escape the pressure of legal copyright agreements involving international institutions. The domestic copyright system has succumbed easily to official and unofficial pressure from the USA for global commerce (Lee, 2005). As a result, the Korean government has not yet considered FOSS as a public policy model for all of its citizens.

Nevertheless, since the 1-24 Computer Disaster Korea's heavy dependence on transnational vendors has gradually diminished. The market-friendly logic of FOSS has allowed policymakers to consider FOSS to be the next generation of software that will vitalize the national IT business. In part, the Korean Government's shift to a policy that favors FOSS has been fed by the nationalism springing from the anti-American sentiments of younger Koreans. The political motivation of citizens has roused national policymakers to review European and other Asian FOSS policies. Motivated primarily by a market-driven initiative similar to Raymond's idea of open source software, some government officials have begun to focus on the restoration of competitiveness to the global market.

Yet even though the technological benefits of FOSS are apparent, domestic policies are swayed by the market dominance of transnational vendors. For example, at the public hearing on FOSS policy in March 2003, Microsoft harshly criticized the software policy of the Korean government[3], arguing that, on the principle of laissez-faire economics, the government should not be in the position of picking industry winners (Evans, 2002). That logic presupposes that only the marketplace can satisfy actual market needs (see Smith, 2002; Evans and Reddy, 2002). Microsoft has made explicit its opposition to the spread of FOSS programs within Korean government institutions, and thus the only area in which FOSS can be applied is the small portion of the public sector that will not cause friction with leading international software vendors. Unfortunately, if FOSS fails to gain market share within the domestic software market because of Microsoft's campaigns of discount, donation, and investment, the proprietary model may become the only realistic alternative for software policies.



Governmental policy constraints

For the decade following August 1995, when the parliament passed the Framework Act on Informatization Promotion (FAIP, Act No. 4969), the Korean government's basic policy has been oriented toward setting up economic “efficiencies” in the national and global market rather than toward citizens' information welfare and community-based IT development. The Act has been used to provide economic momentum to allow the bigger IT businesses to increase their market share with the formal sup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The FAIP thus meant that the government would directly intervene at the policy level into the nascent market of IT industries and force them to restructure themselves toward IT competitiveness in both the local and the global knowledge market. The ostensible purpose of the FAIP is to improve Korean quality of life and to contribute to the development of the national economy, thereby promoting informatization and achieving an advanced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industry infrastructure.

The business-oriented goal of FAIP was further developed in the second policy plan, “Cyber Korea 21” (CK21), issued in March 1999. According to the Informatization White Paper 2002 (NCA, 2002, p. 79), the policy goal of CK21 is to create a “knowledge-based society”, improving “national competitiveness” and “the quality of life to the level of the more advanced nations”. CK21 increased policy support for the IT businesses and encouraged policy goals for advanced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economies by setting forth planned guidelines for IT growth. Moreover, according to CK21, the quality of life would be improved by the rapidly increasing opportunities derived from connection to the commercial broadband internet made possible by the implementation of major electronic networks for e-commerce. It is apparent that the government's policies have overemphasized business-oriented growth policies based on values such as “efficiencies”, “competitiveness”, and “productivities”, to the detriment of values such as “sustainability”, “public commons”, and “equal opportunities” for the public welfare.

The market-initiative has culminated in the most recent version of the government's IT policy, “E-Korea Vision 2006” (EKV06). In the Informatization White Paper 2003 (NCA, 2003, p. 10), EKV06 states that its goal is both to promote the “information society” at the national level and to gain “strong ties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toward the global information society”. To do this, EKV06 declares that the government itself must “create a smart government structure with high transparency and productivity” (e-government) and should encourage private corporations “to strengthen global competitiveness by promoting the informatization of all industries” (e-business) and enable citizens “to enhance their ability to utilize information and technologies” (e-eduction).

While the policy visions set forth in the e-government and e-business areas can be read as expanded and concrete provisions of the previous market-oriented IT policies, EKV06's addition of e-education for citizens seems to be a distinct shift from the policies of CK21 or the FAIP. It is notable as the first instance of the Korean government considering at a national policy level such public issues as the “information gap” between the information-rich and information-poor and between information-alienated regions and information-centered ones. As is typical of the bureaucratic approach to the citizenry, the government has restricted its role to inconspicuous tasks, such as supplying computers or promoting commercial internet access, as well as the routinizing and rationalizing of electronic services for citizen requests for official documents. The focus is on a quantitative approach that emphasizes outward appearance and growth, as seen in the dramatic growth of the IT industry, rather than on the “soft” aims of improving the cultural ability of citizens to access, use, and recreate information without restraints.



Relevant legal issues

In Korea, computer software is protected for 50 years after its release date, according to the “Computer Program Protection Act” (CPPA) enacted in July 2000 (Program Deliberation & Mediation Committee, 2002, Ch. II, Art. 7, No. 3). The protection period of 50 years for computer software has a very different significance than it does for most other copyrighted material. Since the lifecycle of a given software version is only two or three years at best, the protection period of 50 years translates to an unlimited time, since, practically speaking, the software will never fall into the hands of the public. It is clear that the CPPA is biased towards the rights of authors rather than of users and this bias is embedded in the market-driven protection of private rights:

The purpose of this law is to protect the rights of software program authors, to assist in the just use of programs, and to promote the related industries and technologies in order to contribute to the healthy development of the national economy (Program Deliberation & Mediation Committee, 2002, Ch. I, Art. 1, emphasis added).

Increasingly, software companies depend on prohibitive contractual provisions to assert and arguably even expand their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in their attempts to gain market dominance. Contract law offers a potential conduit through which copyright holders can bolster the protection of rights that are unavailable under copyright provisions, and thus the CPPA is a result of negotiation between policymakers and software vendors that enables vendors to gain a more stable status in the commercial distribution of software. The CPPA can be seen as a policy decision to alleviate both the international discontent about the illegal duplication of software and the domestic request for a new law to promote the Korean software market.

In the CPPA there are a small handful of exemptions for such activities as encryption research, reverse engineering, and security testing (Program Deliberation & Mediation Committee, 2002, Art. 12, No. 6). It seems miraculous that the “reverse engineering” provision survived despite continuing US pressure, including pressure through international organizations such as the WTO, ever since the launch of the initiative for a sustainable domestic software market. For the Korean government to promote the domestic software industries and to compete with the global vendors, the provision needed to be defined in the Act. In newly industrialized economies, this kind of controversial provision is always caught in a vulnerable position between the multinational forces seeking to expand their monopolies and the national goal of promoting the domestic software market. In any case, Article 12 of the CPPA does not allow users a wide array of legitimate activities through such safety valves as fair use, the distinction between idea and expression, and third party innovation. Instead, the policy goal is to legitimate what would otherwise be illegal software research and development by allowing reverse engineering as a legal incentive to nascent or established domestic software companies – not to promote users' rights to fair use.

In sum, in Korea FOSS is regarded as nothing more than a technological means of promoting market efficiencies and competitiveness. With policy being driven by international and domestic pressure to protect intellectual property as market-centered policies, it is difficult to pursue the alternative path of FOSS independent of market-driven desire. To domestic policymakers, the public value of software is negligible or even incompatible with their market-driven initiatives.



The power structure of FOSS stakeholders

In December 2002, the Korea IT Industry Promotion Agency (KIIPA, 2002) published a working group report entitled A Policy Report for Open Source Software in South Korea [4], which was sponsored by the Korean MIC. The MIC also held a public hearing on FOSS policies in March 2003 to collect the opinions of major stakeholders. The MIC planned to show examples of the national FOSS project selected from government institutions, local congresses, and universities. As regards software acquisition for government institutions, the MIC announced that the previous discriminatory policy favoring Microsoft Windows and the Officeware suites over FOSS would be eliminated (Kim, 2003). Three Northeast Asian countries – South Korea, China, and Japan – signed a deal to develop a FOSS system to replace Microsoft Windows (Yang, 2003), marking a major joint step forward for the three economic heavyweights in the region. At the same time, a government project was announced to partly replace Microsoft with FOSS in government institutions by 2007. During December 4-7, 2003, the MIC also successfully opened a FOSS market exhibition called “SoftExpo 2003”. Taken together, these events reflect the rapid change of Korean government policy towards the software industry and show that the government has begun to consider FOSS as a significant engine for software development.

Nevertheless, the Korean government, and specifically the MIC, has shown an ambivalent attitude towards FOSS, allowing dominant global vendors to exert direct or indirect pressure on domestic software policies. For example, the Secretary of the MIC ordered the general use of MS PowerPoint software for public briefings of government officials, which evoked anger from the anti-Microsoft front. More disturbing, in June 2003, despite the protest of civil rights groups, the government appointed a controversial figure who had been CEO of Microsoft Korea as the director of the KIIPA, the MIC agency responsible for national software policies. These two episodes indicate that the Korean government has no coherent principles for establishing FOSS policies. One serious problem the government has is that it depends entirely on a market-driven policy. The ambiguity of government policy is likely to continue as long as the Microsoft platform is the dominant power in the national market and in government institutions. Meanwhile, anti-MS vendors such as IBM and Sun Microsystems, which have led the way in the commercialization of and investment in FOSS, have gradually grown in strength. Although these anti-MS vendors will not be able to replace the MS market share with theirs for some years, they have already become influential stakeholders who can intervene in domestic policy formation.

Another noticeable stakeholder is the Korea Linux Council, which consists of members of governmental research centers, industry, and universities. Originally planned as a market-friendly think-tank, the Council has withered away because it has been in conflict with the KIIPA's Assistance Center for Open Source Software, which supports FOSS developers, ventures, and distributors. The conflict arose over the question of who has the priority in implementing government policies for FOSS business.

The remaining stakeholders, those who have emphasized the public development of FOSS, have so little political power that it will be difficult for them to challenge either the current ambiguous government policies towards FOSS or the business model of FOSS. They have not yet sufficiently developed their own policy alternatives for FOSS. The stakeholders in this group are GNU Korea (a Korean branch of the Free Software Foundation), the active FOSS program developer or user groups, electronic civil rights groups such as the People's Solidarity for Participatory Democracy, and the Jinbo Network Center, which is the internet network for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and has directly supported citizens' rights. In short, in the power balance among FOSS stakeholders, the business or market model holds a dominant position over the application of FOSS to the public and nonprofit sectors in building domestic software policy in Korea (see Figure 1).



Learning from others' experiences

An article in The New York Times (Schenker, 2003) reveals that the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 arm of the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 is advising governments that want to move to open-source software on how FOSS could become the foundation for local software development. It would appear that FOSS is now a general trend. The Times cites the opinion of Samuel Guimaraes, Executive Secretary of Brazil's Ministry of Foreign Affairs, that “open-source, or free-to-share, software was crucial for the developing world because it would permit poorer countries to develop their own technology instead of having to import it” (Schenker, 2003, Ch. 4).

This comment by an influential Latin American official implies both that FOSS will rescue the developing countries from the mire of underdevelopment and that FOSS is an engine for the growth of the underdeveloped economy. Such implications should be viewed with caution, because the passionate desire for “development” has often furthered unequal relationships between nations. It is a mythical logic that never wants to consider a negative outcome in which the winner takes all. FOSS is only technology, despite its revolutionary and democratic potentialities. The idealistic concept that FOSS has its own independent path should be rejected, because technology is malleable, transmuting its form and substance at the command of human beings.

If a government is capable of understanding the ambiguous nature of such a technical artifact as FOSS, Guimaraes' comment can be more than just a dream for a developing country. Increasing technological self-reliance and decreasing dependence on international vendors' monopolies depends wholly on exploring a sustainable path of policy implementation, beyond the bounds of the privatized software model of an advanced country. This independence will be assisted by a two-pronged public policy: one prong is the community-based use of FOSS; the other is the use of free software for government departments and public sector entities. These two tactics will increase the popular use of FOSS. We can see how this works at the local in the “telecenter project” in Sao Paulo, Brazil. The aim of the telecenter project is to provide marginal neighborhoods with free access to computer networks. To achieve the policy goal of a low-cost technology alternative and a high quality service, open source operating software such as Debian Linux was adopted as the underlying infrastructure technology. The city of Sao Paulo operates a total of 128 centers directly and each center provides free service to about 3,000 users (Dravis, 2003, p. 13). This kind of community-based policy model has been gradually increasing around the world.

Meanwhile, at the level of government and the public sector, the European Union, whose software industry has not lagged far behind that of the USA, has a different concept about developing FOSS as its own business model. For instance, a well-known policy report entitled Free Software/Open Source: Information Society Opportunities for Europe? written by the EU's Working Group on Libre Software (2000) centers around the anticipation of enormous economic profits. Although policies supporting FOSS can improve the software market, more significant, once again, is the establishment of a strong policy to implement FOSS in public and nonprofit sectors such as public administration, education, public health, defense departments, and so on (Forge, 2004). That the FOSS market policy “has sold its soul to the devil” can be seen in the evolution of open source-inspired networks accepted by technology vendors: over time, as de Laat (2004) notes, the application of the earlier FOSS model in industry has been displaced by the closed and limited model of corporate networks. For this reason, market-driven policy promoting the commercial use of FOSS may be more vulnerable to the control of proprietary companies than the policy of promoting FOSS use for public sector entities.

To escape these dominant discourses of pursuing a business model of FOSS, the Korean Government needs to investigate international experiments in FOSS policies, especially those of some advanced European governments that focus on the philosophy of free software for the public good. Powerful FOSS policies in public sector entities are well developed in Germany and France, while FOSS policies are increasing in England and Spain, and are marginal or just starting in Austria and Belgium. In particular, we should look at the German “BerliOS” project. This project, sponsored by the German Ministry of Economy and Technology (Bundesministerium für Wirtschaft und Technologie), is a web-based FOSS service network that helps the German government to set up favorable conditions for FOSS users, developers, service providers, and small- to mid-sized manufacturers. The German government actively intervenes in the raising and investing of FOSS funds for the development and release of educational open source programs and for the revision of intellectual property laws to assure FOSS licensing within the copyright system. These various policy experiments of using free and open software at each level of government – central government, government departments, local authorities, and local communities – demonstrate the kind of public policy that is necessary in order to promote software use as a public good both to the economic system and to the public sector.



Some suggestions for a desirable FOSS policy

Germany's application of FOSS suggests two directions in which the Korean government needs to move: First, the Korean Government must be relatively free from international market conditions and from pressure from multinational software vendors; although a smaller power is typically accustomed to letting larger powers lead at the international level, the Korean government needs to assert its independence in the public policies related to international software trade. Second, as seen in the telecenter project in Brazil, FOSS policy should be based on encouraging the public welfare of the citizens. If the Korean government is willing to consider FOSS as a significant software policy, it must focus on the philosophy of free software rather than the market-driven idea of software.

It is disheartening that the primary interest in Korea's information policy so far has been in promoting the private market while relegating the public rights of citizens to the lowest priority. Desire for survival and competition within both local and global markets has induced policymakers to embrace a restrictive and exclusive view of owners' property rights, rather than to find a middle ground of policy that balances various stakeholders' interests. The government initiatives and legal structures surrounding information policy, which are closely related to the development of the domestic software scene, should not be skewed towards encouraging private rights under the banner of national informatization; and public rights to information should not be displaced by an emphasis on the rapid increase in the number of citizens using the new communication technologies. Such market-oriented policy decisions spring from the liberalist ethic that growth in the market will cure social problems in a “trickle-down” manner. The current FOSS policy is bound by the market-driven approach, and if the open source idea of intellectual collaboration is mainly used for remodeling business organizations to result in more monopolies, the new FOSS policy will just be another market incentive for protecting proprietary profits. It is instead vital for public policy to reduce the impact of the dominant software vendors that threaten the public welfare and to support legally and financially technological development for the citizens based on a participatory democratic model.

FOSS policy is an exceptionally important experiment to see whether the Korean government can handle a controversial technical artifact so as to promote social justice or simply the interests of the monopolies. The strong point of FOSS is that it is an immature technology newly introduced in society. An emerging new technology may have a relative “degree of freedom” (Hughes, 1987, p. 54) before reaching the later stage of “closure”, the stabilization of an artifact or its solidification (Pinch and Bijker, 1984). The malleable stage of technology is an intervention point where, in opposition to current neoclassical market policy, citizens could encourage government to regulate the brutal market mechanism embodied in the law of the jungle that “bigger is better”. Once the policy is solidified, it will be difficult to change. If citizens want to intervene in the power structure that is embedded in a technical artifact, this malleable stage of FOSS policy is the best time to embed social values in it before it falls into private hands once again.





Figure 1 The power structure in the Korean FOSS policies




Table I The concepts of free and open source software

References































Further Reading





Corresponding author

Kwang-Suk Lee can be contacted at: suk_lee@mail.utexas.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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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정보학회 발표문] 하이테크와 일상공간의 결합에 의한 소비문화의 변형

*유학 나오기 전에 발표했던 글인데 정보언론학회 자료실에서 주웠다. 당시 지정 토론자였던 김창남 선배와 함께 언론재단 빌딩에서 담배빨던 생각이 나는군.. Page 1 1 하이테크와 일상공간의 결합에 의한 소비문화의 변형 이 광 석(서울산업대 강사, 언론학) I. 일상 공간의 소비문화적 변용 보드리야르(J. Baudrillard)가 소비사회를 “소비를 학습하는 사회, 소비에 대해 사회적 훈련 을 하는 사회”(1994: 106)라고 언명한 대목은, 소비에 적극적 의미의 매개 행위가 개입함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고도의 생산력은 적극적인 소비 행동에 입각하여 소비자들을 학습 및 훈련시키는 사회화 과정을 삽입하길 원한다. 현대의 소비는 이러한 사회화의 능동 적인 진전 과정에 서 있다. 크게 보면 소비상품의 기술적 적용과 맞물리면서, 유하게는 유행 과 스타일 등의 미학적 견지에서의 소비 자극, 그리고 제도적이고 자본 재생산적인 경제 과 정으로서의 직접적인 소비 강제 등이 소비사회의 학습 과정을 구성한다. 문제는 소비 자극 과 소비 강제가 주고받으며 벌이는 소비 유발의 고리들도 중요하지만, 그 화학작용이 벌어 지는 인프라의 조건들을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소비자를 유혹하는 새로운 소비 공간 의 생성과 변형, 그리고 그 새로운 공간에 대한,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탐구 가 필수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공간은 자본과 노동의 집중 집적에 의해 상대적으로 희소화되며, 자본주의 경제의 등장과 더불어 상품화된다. 추상적 견지에서, 공간 의 성격과 유형이 사회적인 규정을 받으면서 (재)구성된다는 의미다. 과거에 볼 수 없던 것 이 새로 구축되거나, 이미 있던 것이 재배치되는 공간 구성의 변화는 그 시대 시대마다의 특수한 사회적 과정에 특수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특히 자본주의는 사회적 재생산 의 물질적 실천 및 과정을 계속적으로 변화시키는 혁명적 생산양식으로 자리잡음으로써, 그 에 따라 공간의 의미와 그 객관적 성질이 유동적으로 변화해 왔다(Harvey, 1990: 204). 또한 사회적 과정에서 구체화하는 권력들간의 우위에 따라 발생하는 공간의 변형 과정은 그 사회 의 본질과 실세를 드러낸다. 현대 소비공간의 역학 구조를 자본주의 현실에 대해 경험적 관 찰을 통해 보자면, 이는 소비를 조장하고 선전하는 문화산업의 힘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현대인들의 일상 공간은 재생산을 위한 소비활동이 중심을 이룬다. 예컨대 자본주의 도시의 문화공간들인 극장, 영화관, 커피숍, 학교, 음악실, 전시실 등은 모두 상품을 매매하는 시장 이 되어버렸다. 공간은 이러한 단위시장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재)배치시킬 수 있도록, 나아 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최병두, 1994). 유 연적 축적이 관통하는 일상공간의 모든 것이 자본이 가공하는 문화상품들을 소비하는 시장 이 되가는 것이다. 그래서 소비공간의 변동 양상에 대한 관찰은 기업 이윤원의 변화와 소비 자들의 구성과 내용 변화 등을 일단의 ‘흐름’(flow)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해진 다. 이 글의 목적은 삶의 터전 구석구석에 삼투해 들어오는 하이테크 문화상품들이 개인들의 일상 공간에 긴박하게 맞물리는 구체적인 지형을 읽고자 하는데 있다. 이미 서구에서는 70 년대부터 소비사회란 용어가 자본주의의 대용어로 취급되는 현실에서, 인간의 소비와 욕구 Page 2 2 를 극대화하는 새로운 지점들을 찬찬히 독법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글은 80년대 이후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더불어 소비공간의 유형과 내용에 상당한 변 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자본의 새로운 소비 창출의 역학들을 읽어내는데 학계 내부에서 너무 정체되어 있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특히 내가 주목하는 것은 물리적 공간에 디지털 크롬(digital chrome)의 외피를 입힌 하이테크 복합 놀이공간들 이다. 이 90년대식 놀이공간들의 사례를 통해 향후 전개될 새로운 자본의 이윤 전략을 전망 해보는 것이다. 소비공간의 새로운 패턴으로 등장한 게임센터 등의 디지털 소공간, 하이테크 상품의 선전장이자 이벤트홀인 엑스포, 그리고 ‘복합 미디어공간’(Media Complex)인 테마공 원의 특징적 사례를 통해서 하이테크와 일상공간이 결합되어 펼치는 오락산업의 새로운 전 략과 이에 따른 소비공간의 변화들을 전망해보고자 한다. II. 소비공간들의 후기자본주의적 풍경 일상 소비공간의 21세기적 변동은 하이테크 기술에 의한 일상 경험에서의 ‘시 공간 압 축’(temporal-spatial compression) 효과에서 비롯한다. 이는 다양하고 이질화된 도시적 일상 을 압축해 경험해보고자 욕구를 증대시킨다. 현대는 첨단 교통 통신 정보 상품 등의 소비 와 일상의 욕구를 해소한다는 믿음이 비례 상승적으로 가동되는 시기이다. 현대인들은 전자 영상 및 음향 전달매체의 급격한 발전과 보급으로 말미암아 지구촌의 변화와 시공간적으 로 동시화되는 일상 경험에다 스스로를 조율해야만 하는 강박에 시달린다. 한편 물리적 이 동의 초고속과 함께 주어진 혜택은 물리적 장소를 기초로 한 디지털 복합공간들의 탄생이 다. 서울만해도 이곳저곳 거리를 거닐다 보면 새로운 형태의 놀이 공간들과 마주칠 수 있다. 거대한 백화점, 쇼핑몰, 빌딩 등의 요소요소에 박혀있는 작은 임대지들. 소비문화의 거대 프 레임이 순환하는 건축 공간들과 함께 새로운 유형의 소공간들이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기본 조건들을 튼실히 받쳐주고 있다. 전자 오락실, 인터넷 게임방, 인터넷 카페, 전화방, 노래방, 비디오방, 사이버방, 스티커 체인점인 포토제닉류의 실내 놀이공간들이 늘면서 소비문화의 현대적인 변형체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 공간은 일정 정도 각 개인들의 여가 활 동을 흡수하기도 하면서, 개별화된 욕구 배설의 새로운 창구들로 자리잡는다. 쁘띠적 소상인들이 이같이 밀실을 임대하여 전자 오락기 투입구 안의 돈통을 수거하는 방 식이 재래적이라면, 글로벌한 오락산업의 면모는 단연 엑스포(Expo)와 테마파크에서 세련되 게 드러난다. 엑스포가 단일 이벤트적이고 비상시적이며 이동성이 강하다면, 테마파크는 상 시적이고 복합 미디어적이며 놀이 자체만을 지향한다. 그들의 공통성은 거대하고 하이테크 적이라는데 있다. 이들은 미래의 놀이와 산업 경향을 선도하고 결정짓는다. 오락산업의 향배 는 이들 산업이 펼치는 놀이기법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앞서의 디지털 소공간들은 이 거 대 공간들의 틈새로 기능하며, 이들 거대 놀이공간들의 하이테크 기술들을 본받는다. 이처럼 소비를 통한 놀이의 학습장은 규모면에서 다차원적으로 열려있으며, 소비자의 경제적 여건 에 따라 놀이 유형에 대한 선택 가능성의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화폐 경제하에서 놀이의 조건은 제한 시간에 기준한 투입 동전의 양으로 환산하거나, 화폐 지출에 대한 반대 급부로 입장 혹은 이용 티켓 등의 초단기적 유가증권을 발급함으로써 시/ 공간적으로 지정된 틀내에서만 해당 놀이를 허용한다. 결국 디지털상품 전시의 대규모 엑스 포—교외의 거대 테마파크—도시의 게릴라식 디지털방들로 이어지는 핵심 축은 실지로 디지 Page 3 3 털상품의 이벤트화 과정—집단적 소비과정—일상화된 소비의 체득과정으로 진행하는 효과일 수 있다. 소비 효과의 증폭 과정은 이 전체 순환 과정에 특정 하이테크 기술들이 유효한 놀 이물로 적시에 이용자들에게 소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오락산업들은 현대적인 하이테크 기술을 적절히 배합하여 소비욕을 생산방식의 전환과 맞물려 새로운 놀이 패턴을 통해 흡수하려 한다. 컴퓨터 게임 및 오락산업이 놀이의 현대적 변형을 통해 노리는 전략과 그 변형 과정에는 항상 하이테크 기술의 개발과 놀이의 성사라는 문제가 개입되어 있는 것 이다. III. 결연한 하이테크의 시연장: 테크노 엑스포 “만약 대재앙이 발생해 인류의 문화유산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해도 ...박람회에 대한 기록 만 남아있으면 우리의 문명을 되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Panati, 1997: 154) 현대 소비사회는 소비를 성사시키기 위한 배려로 이벤트, 기법, 장소 등을 다종다양하게 활용한다. 매체 광고나 판촉이 그 대표적 예이며, 이를 통해 발휘되는 소비욕의 자극은 보편 화되어 소비자들에게 적극적인 태도 변용을 불러온다. 이벤트나 축제는 소비상품의 판매를 구경거리로 확대시킨다. 박람회(fair) 혹은 엑스포라고 일컫는 이벤트는 특정 대중 동원을 통해, 그리고 깊이없는 구경을 통해 세심하고 의도된 주최자들의 안건(agenda)을 보급하는 장소이다. 엑스포는 달리 보면 신제품의 쇼핑 전시몰이다. 예술관련 전시장의 엄숙한 분위기 와는 달리 엑스포는 부르주아의 상술적이고 카니발식 아우라(aura)가 풍겨나온다. 개별 부스 에 자리잡은 기업들은 제품선전의 카달로그와 멘트를 끊임없이 뿌리고, 늘씬한 도우미들이 별로 유효하지 않는 관련 경품들을 나눠준다. 엑스포의 관객은 입장권을 보상키 위해 어느 덧 소비자가 되어 경품과 카달로그를 받으러 기다란 행렬에 참여한다. 혹은 유명 연예인의 이벤트로 엑스포의 테마 자체를 잊어버리는 관객도 출현한다. 구수한 구래의 장터를 연상하 던 관객들은 어느덧 산업적 가치로 환산된 차가운 은색의 엑스포와 대면하고 곧장 이 향연 에 적응되어 간다. 엑스포는 거대화, 국제화되어 가고 있다. 전세계적 참여를 기본 전제로 하는 글로벌 수준 의 엑스포들이 대거 생기거나, 기존의 범위를 확대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이제 문제는 크기 이다. ‘국제’,‘최대’,‘전세계적’등의 수사들이 전시 광고의 중심에 선다. 최대/국가, 인원, 면 적, 행사, 전시관 등이 엑스포의 질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컴퓨터 그래픽과 인 터랙티브 기술의 국제 최첨단 전시회인 ‘씨그래프’(SIGGRAPH)만 보아도, 96년 뉴올리언스 (New Orleans)에서 열린 대회에 2만여평의 단지, 321개의 전시관, 2만 8,500명의 참가 인원 을, 그리고 97년 LA대회에서는 비슷한 규모에 359개의 전시관, 4만 8,700명의 참가 인원을 자랑한다. 올해 7월말경 올란도(Orlando)에서 씨그래프의 25주년 행사를 기념하는 박람회에 서는 앞서의 통계치들이 또 다시 갱신된 것으로 선전하고 있다. 1 또한 최근에 인터랙티브 오락산업의 가장 성대한 전시회인 ‘전자오락 엑스포’(E3)의 전시 광고도 비슷한 맥락에서 그 들의 행사 규모에 대해 홍보한다. 98년 애틀란타(Atlanta)에서 진행된 E3 쇼는 일반 관람객 1) 씨그래프에 대한 최근 전시회 관련 자료는 [URL: http://www.siggraph.org/]에서 찾아볼 것. Page 4 4 을 제외하고 전세계 80여개국에서 모두 4만 1천명의 게임산업 관계자, 외국인 관람객만 7천 4백명, 6만평 규모의 단지에 1,600여개의 출품작을 자랑하고 있다. 2 규모의 거대화와 국제화 추세와 함께 변화하는 경향은 엑스포들이 세부 영역화 되어가고, 새로운 첨단 엑스포들이 늘어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국내 전시회의 집합소인 한국종합전 시장(KOEX)의 행사 내역을 보면 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표 1>에서는 필자가 편의상 세 영역으로 나누고 있지만, 실지 내용으로 볼 때 하이테크 산업의 영역은 서로가 걸쳐있고 중복되거나 새로운 영역들을 위한 신종 전시회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본의 이 벤트 전략도 대범위 수준에서 중소범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기획함으로써 각 전시회를 통해 참여 인구들을 시장 분할할 수 있는 조건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초의 국제 박람회는 1851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후원으로 런던의 크리스털 궁에 서 열렸다. 이 행사는 지금까지 이어져 1998년 포르투갈의 리스본(Risbon)에서 ‘해양-미래의 유산’이란 주제로 치러졌다. 최근 들어 글로벌 엑스포는 단순한 전시 행사가 아닌 공연에 가 까워지고 있고, 해양이라는 주제를 위해 동원된 각종 첨단 전시기법이 중요한 화제로 등장 하고 있다. 산업시대의 발상과 내용을 지닌 과거의 엑스포가 주로 시각적 효과에 소구했다 면, 새로운 테크노기술을 전시하는 엑스포들은 관객의 오감 모두에 효과를 미치고 있다. 첨 단기술에 의해 몰입을 강요하는 하이테크 시연을 감상하고, 관객 스스로 조작하여 몽환(夢 幻)에 빠질 기회도 갖는다. 이같은 기술적 연례행사는 첨단 영상, 컴퓨터 그래픽 전시장 뿐 만 아니라 일반 전시회나 박람회에서도 전반적으로 채용되는 기법이다. 토플러(Alvin Toffler)식의 표현법을 빌리자면, ‘공장굴뚝시대’의 기업들이 주도하는 대표적인 국제 모토쇼 들도 이제는 화려한 영상과 테크노 기법들을 도용하거나, 아톰들로 구성된 고철에다 첨단 디지털 부가물들을 첨가한 신종 자동차들을 시연하기 바쁘다. 이제는 첨단기술적 특성 중 오락과 놀이에 결합할 수 있는 내용들이 전시장을 주도한다. 모든 엑스포들은 카니발적인 축제의 분위기를 현대적 방식으로, 즉 하이테크 기술의 집합적 아우라로 연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엑스포의 변화하는 특성인 전시의 첨단화이다. 전체 산업 이벤트가 첨단화되는 것과 맞물려, 보다 본질적으로는 관련 첨단기업들의 이벤트가 지속적으로 급증하고 있다. 예를 들 어, KOEX에서 97년부터 98년까지 진행한 전체 행사(210여건) 중 하이테크 관련 산업 전시 회가 약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표 1> 참조.) KOEX의 모든 국제/국내 행사 중 뉴미 디어와 컴퓨터 및 통신 등 하이테크 전문 이벤트만 15%를 웃돈다. 특히 김영삼 정권 초창 기에 고양되었던 ‘세계화’를 통한 국가 경쟁력 제고라는 명분과 이어지면서, 국가 정보화의 여론몰이가 이같은 상시적 이벤트장들의 개장을 거들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축제적 분위기 속에서 놀이를 통해 정보/통신 산업을 적극 권장하는 것이 대민 홍보의 세련된 기법이라면 기법일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국내 엑스포의 내용들이 하이테크 일색으로 돌아서는데는 정부의 정책 향방에 크게 좌우되었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표 1> 한국종합전시장(KOEX)의 하이테크 행사 구성(97˜8년) 3 2) E3쇼에 관한 정보는 [URL: http://www.e3expo.com/] 참고. 3) 한국종합전시장 전시회 및 행사 내용에 관한 페이지([URL: http://www.koex.co.kr/korean/ exhibition/schedule/])를 토대로 표 구성. Page 5 5 주영역 전 시 회 주 최 사 목 적 영 상 미 디 어 (97/ 98) 국제 케이블 TV 및 위성방송 전시회 KOEX 정보/기술 교류, 관련산업 활성화, 산업연관효과 제고, 세계 경쟁력 강화, 정보마인드 확산, 국민 인식 전환, 영상/놀이문화 정착 국제방송장비 음향기기전시회 한국일보사 영상미디어 엑스포 중앙일보사/KOEX 서울멀티미디어쇼 한국경제신문사 국제광학 및 영상기자재전 KOEX/한국광학기기협회 국제광고물 및 기자재전 KOEX/한국광고사업협회 서울 국제만화페스티발 KOEX/SICAF'98조직위 컴퓨터그래픽스/멀티미디어전 KOEX/소프트웨어산업협회 (98) SFX 세계공상과학영화 100년대전 중앙일보사/MBC프로덕션 컴 퓨 터 및 통 신 (97/ 98) 컴덱스 코리아 디지틀조선일보/KOEX 정보 교류, 신제품 개발의지의 고취, 수요기반 확충, 관련산업 활성화, 개발 경쟁력 제고, 대중적 인식 제고, 국민문화생활 향상 국제 컴퓨터/소프트웨어/통신기기전시회 한국경제신문사 국제 정보통신 및 이동통신전 KOEX/E.J.Klause 국제 게임기기 및 어트랙션 쇼 KOEX 윈도우월드 전시회 전자신문사 한국 컴퓨터/소프트웨어전 전자신문사 한국 전자전 전자산업진흥회 (98) 인터넷/네트워크 코리아 중앙일보사/KOEX 산 업 정 보 화 (97) 국제 자동인식산업 및 기기전 (주)경연전람 정부정책 부응, 정보/기술 교류, 우수성 홍보, 수요기반 확대, 국제 경쟁력 강화, 산업발전 도모, 대중적 인식 제고 (97/ 98) 한국 국제공장자동화 종합전 KOEX/(주)첨단 한국산업기술대전 통신산업부/KOEX CALS/EC APEC 한국 CALS-EC 협회 /중앙일보사/KOEX (97) 텔레마케팅 페어 코리아 한국통신/KOEX (98) 한국 소호 엑스포 능률협회/매일경제신문사 스마트 솔류션 페어 삼성전자 하이테크와 결합된 두드러진 특성은 전시의 카니발성이다. 테마별 이벤트와 축제가 가속 도로 급증한다. 하이테크는 전시의 이벤트를 돗보이게 하며,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촉매 역할 을 한다. 엑스포는 그것들이 지닌 다양한 전시명을 통해서도 그 이벤트성을 유감없이 발휘 한다. ‘페스티발’,‘쇼’,‘대전’(大殿) 등의 명칭으로 전시회의 이벤트 기획성 자체를 부각시킨 다. 엑스포 자체의 정기적이고 한시적인 속성은 이벤트의 특성으로 자리잡는다. <표 1>에서 드러나고 있지는 않으나, 97/8년에 지속된 기획전은 거의 비슷한 월별대와 기간 동안에 짜 여져 있다. KOEX 전시장의 이용 편성의 효율에 따라 비슷한 시기에 기획들이 잡혀졌으리 라 추측을 할 수도 있으나, 그 효과는 비상시적 엑스포의 정기적 이벤트에 대한 막연한 기 대감을 관람객들에게 부추키는데 있다. 대체로 엑스포들은 매분기, 반년, 일년, 격년 등의 정 해진 시간 개념으로 짜여져 있어, 특히 급변하는 디지털 신제품들의 수요 창출을 고려한 상 품 생산주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데 민감하다. 엑스포의 세분화된 시분할에 입각한 적시 의 이벤트는 소비시장 형성의 촉매 역할을 자임하며, 그 카니발적 요소로 냉혈한 시장의 의 도를 가려버린다. 철저하게 관리되는 이벤트의 정기성과 함께, 거대 도시들을 따라 개최지를 변경시키는 공간적 이동/기동성은 그 축제적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세계적 엑스포들은 글로 벌 도시들의 지명 이동을 통해 이벤트를 지방성(the local)과 결합시켜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한 복합 시연장으로서의 역할도 행한다. 컨퍼런스 개최, 호텔 숙박, 도시 관광, Page 6 6 경품 추첨, 극장 상연, 쇼 공연 등 다기능적 공간 소비의 장을 마련한다. 이 모두는 현대적 엑스포의 카니발적인 특성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기능한다. 카니발적이고 이벤트적인 특성은 기본적으로 주최사의 수익과 직결한다. 엑스포들이 일종의 수익 사업으로 자리잡는 것을 지 칭한다. <표 1>에서 보면 유난히 국내 특정 언론사들의 참여가 두드러진데, 이는 언론사들 의 사업 다각화라는 측면에서 뉴미디어 영역인 하이테크 이벤트사업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보통 국내 전시회의 일차적 목적은 정부 정책에 부응하여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고 관련 산업전반을 활성화하는데 있다. 관련 기업들을 모이게 하여 그들간에 정보와 기술을 교류하 여 산업연관 효과를 보자는 심산이다. 이러한 목적이 산업 정책과 경제적 관심사의 측면이 라면, 이벤트를 통해 신소비 영역에 대한 마인드를 확산시키자는 목적은 또 다른 중대한 측 면이다. 즉 이벤트의 공통적 특징인 ‘정보마인드 확산’,‘국민 인식 전환’,‘국민 문화생활 향 상’,‘영상/놀이문화 정착’등의 홍보용 선전문안은 엑스포를 통해 신소비 영역을 학습할 것 을 강제하는 문구이다. 대중적 인식의 제고와 학습을 거쳐 이벤트가 의도한 문화를 정착시 키는 것. 대중의 인식을 제고하려면 딱딱한 관전 분위기 보다는 전시회의 카니발적이고 하 이테크적인 속성이 잘 어울린다. 전시회를 놀이로 다룸으로써 새로운 소비 영역에 대한 거 부감을 자연스레 달래는 파급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카니발한 하이테크 시연이 노리는 표 적은 “기술 그 자체보다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을 판매하는 경연장” 4 을 만드는 것이다. ’98리 스본 엑스포의 일본 전시관을 담당했던 한 관계자의 이같은 발언은 장차 전시장의 흐름이 어떻게 갈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물론 본고의 방향에서 본다면 이 일 본인의 인용문 중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이란 말 앞에는 ‘새로운’이라는 접사가 붙어야 할 것 이다. 보다 정확히 얘기한다면 새로운 기술의 선전을 통한 새로운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을 판매하고 선전하는 경연장이 미래 엑스포의 청사진인 것이다. IV. 과잉 생산의 집중된 탈출구: 테마파크 대형 놀이공간들은 엑스포 보다는 훨씬 본격적으로 상시적인 축제, 공연, 어드벤처, 모험, 이벤트가 첨단과학과 결합하여 스펙터클로 등장하고, 관람객들에게 이를 소비(쇼핑)할 수 있 는 즐거움과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꿈을 실현하는 장소로 선전된다. 스펙터클은 특정 목 적을 위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에서 대량생산되고 대량소비되는 이미지이다(이정재, 1994). 실제 스펙터클은 실제적 소유를 보조하기 위한 시각적 전유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면 서 동시에 전유한다는 것을 은폐하는 가시적이고 상징적인 기술이 되며, 이를 복합적으로 구현한 공간들이 바로 자본주의의 대형 테마파크이다. 놀이공간 안에서는 최대의 수익 효과 를 위해 다종다기한 공간 지배장치가 고안되고 동원된다(임석재, 1997). 연쇄적이고 복합적 인 놀이 행위를 통해 공간을 가로질러 관객의 소비 행위를 극대화한다. 이제 이 거대한 복 합 미디어공간은 스스로 ‘스펙터클 주식회사’(Spectacular Inc.)라는 가명을 얻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는 1976년 삼성계열이었던 (주)중앙개발이 용인 자연농원을 개장한 이후 주 로 후진적인 국가들이 여가를 전유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 형태로 동물/식물원 등의 자 4) 한겨레21 , 1998년 8월 6일자, 52쪽. Page 7 7 연 친화적 이벤트를 살리다, 96년초에 자연농원의 국제화라는 기치하에 (주)삼성 에버랜드의 ‘에버랜드’(Everland)로 바뀌면서 첨단 어드벤처 테마공원으로 성장한다. 게다가 96년 7월에 에버랜드 내에 실내외 복합형 워터파크(water park)인 ‘캐리비안 베이’(Carribbean bay)를 개장함으로써, 이 공원은 완벽한 글로벌 복합 공간의 외형을 갖추게 된다. 에버랜드는 93년 에 520만명, 95년 730만명, 그리고 이를 96년까지 누적해 보면 약 6천만명이라는 엄청난 입 장객들을 불러들였다. 에버랜드 외에도 국내에는 서울 도심과 그 외곽에 펼쳐진 대표적인 놀이공간으로, 롯데 그룹의 잠실 롯데월드(Lotte World), 과천시의 서울랜드, 강북의 드림랜 드 등을 꼽을 수 있다. 롯데월드는 단일 실내 놀이공간으로는 세계적으로 가장 큰 테마파크 라고 얘기될 정도로 대단한 규모를 자랑한다. 롯데월드는 건조 당시 롯데그룹에서 약 10억 달러를 투자하였는데, 그 전체 공간은 이제 실내 테마파크인 어드벤처, 옥외 호수공원인 매 직아일랜드, 박제화된 전통의 민속박물관, 실내 수영장, 스포츠센터, 롯데호텔, 5백여개의 전 문 쇼핑몰, 2개의 백화점 등으로 확장되었다. 또한 롯데는 테마파크를 체인화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 98년 2월에는 부산에도 롯데월드를 개장했다. ‘월드’공간을 찾는 한 해 방문객은 약 6천만명으로 추산되는데, 그래서 롯데월드의 마케터들은 롯데월드를 “도심 속에 있는 또 하 나의 도시”로 선전한다. 돈만 있으면 이 안에서 일상의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평생을 보낼 수 있는 성역화된 왕국인 셈이다. 한편 과천의 서울랜드는 에버랜드나 롯데월드에 비해 그 규모면에서 뒤쳐지기는 하지만, 보다 저가로 이용할 수 있는 놀이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서울랜드는 서울의 외곽에 위치하면서도 지하철과 (마을)버스의 운행이 여유롭다는 점에서 강북구에 위치한 ‘드림랜드’처럼 한강 이남의 하층 서민들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중규모의 틈새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입지상으로 서울랜드는 서울대공원, 현대미술관, 경마장을 끼고 있어 종합 레저공간으로의 위상을 다지고 있다. 한편 87년 (주)일우공영이 230억을 들여 만든 드림랜드는 96년 (주)드림랜드로 상호명을 변경하면서 원주 치악산에 체 인으로 향토 동물원을 개원함으로써 현재 본격적으로 공원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아무래도 테마파크의 원조는 소비문화의 첨병인 미국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20세 기초 ‘유원지’(amusement Park)라는 이름의 놀이공간들이 도시 근교에 세워지거나 대중교통 노선에 공원을 연결하여 노동자 가족들이 주말에 재생산 휴식을 취하도록 유도했으나, 60년 대 이후 들어서 새로운 거대 테마파크들이 시 외곽의 한가운데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전 후 미국의 호황으로 소비와 여가를 구가하게된 이들 미국인들은, 이 당시 누구나 할 것 없 이 자동차를 구입하여 주말이면 교외로 나가 노동 재생산의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을 소비와 연결시키는데 귀재였던 그 당시 오락자본들은, 미국 시민들의 일상적 여가 행위를 그들의 세력 범위 안에 묶어두기 위해 거리상으로 도시의 일상적 삶으로부터 확연히 떨어진 장소에다 소비의 터를 제공했던 것이다. 즉 외곽의 테마파크들을 이용하는데 자가용 이 없으면 험난하고 힘든 하루가 되며, 비싼 요금을 치르지 않으면 입장할 수조차 없는 상 황이 테마파크 참여의 전제가 되버렸다(Davis, 1996). 미국적 상황에 비춰볼 때, 국내의 서 울랜드나 드림랜드는 강북과 강남을 텃밭으로 하여 서민층을 끌어모으는 유원지 수준의 놀 이공간으로, 에버랜드는 미국식 모델을 따르는 대표적인 교외 테마파크로, 롯데월드는 입지 상으로 백화점, 몰과 함께 상품 소비욕구를 노골적으로 확장시킨 도시형 복합 소비공간으로 봐야 할 것이다. 테마파크는 종합적인 미디어 공간이자 지리적/물리적 복합 미디어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이 안에서는 대중들의 놀이욕구를 다차원적인 공간에서 주어지는 시각적 소비를 통해 해소 시키며, 이를 통해 다양한 뉴미디어 기제를 개발한다. 샌디에고 대학의 노교수, 허버트 쉴러 Page 8 8 (H. I. Schiller, 1995)는 이러한 미디어 전략을 ‘토탈 혹은 원스톱 커뮤니케이션’(total or one-stop communication)이라고 명명했다. 테마파크는 전체 메시지의 통일성을 얼개로 지니 면서도 풍부하고 다양한 외관, 문화, 역사, 스타일, 텍스트, 건축, 연출을 허락한다. 즉 모든 중심적, 혹은 부차적 요소들이 조화로운 관계 안에서 함께 작동하면서 완결된 단위로 기능 한다. 이 안에서는 개념화 단계에서 최종 생산, 배달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저 미디어자본이 만든 메시지와 이미지를 소비하고, 디지털계급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을 즐기고 배설하는 주체들만을 양산하는 시스템이 작동한다. 테마파크의 스펙터클은 산재하여 있는 “분리된 것 을 재결합하지만, 분리된 상태 그대로 재결합한다”(Debord, 1996: 23). 이른바 차이를 지닌 각각의 놀이들을 통해 자본주의적 질서와 유사한 총체화되고 통일된 공간 논리를 배양한다. 도시 사회학자인 샤론 주킨(S. Zukin, 1998: 49)은 이를 ‘차이의 미학화 과정’(aestheticizing of differences)이라 칭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는 테마파크가 현실 자본주의의 경제 장치들, 특히 오락관련 기업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단기 수익 발생의 근거지이자 생산적인 과정들의 집합이며 뉴미디어의 잠재적인 도입구라는데 있다. 현찰을 통한 회수력의 증대, 생 산-유통-소비 전국면의 빠른 회전, 특히 신기술의 풍부한 실험장으로서 중요한 결절점이 되 고 있다. <표 2> 5대 글로벌 테마파크 5 기업명 테마파크/리조트(미국) 방문객수 (93년) 해외진출 현황 디즈니 매직 킹덤 파크, Epcot, 디즈니-MGM 스튜디오, 디즈니 애니멀 킹덤 파크, 디즈니 크루즈라인 41.4 파리 디즈니랜드(29%), 토쿄 디즈니랜드(로얄티만) 타임워너 씩스 프래그즈 파크 19.2 무비 월드 (뒤셀도르프, 독일) MCA 유니버셜 스튜디오, 헐리웃, 플로리다, 올란도 12.3 * 유니버셜 스튜디오 재팬 (일본 오사카) 바이어컴 킹스 도미니언, 킹스 아일랜드, 그레이트 아메리카, 캐로우윈즈, 레이징 워터스 인 산호세, 스타 트렉: 어드벤처 12.4 원더랜드(Wonderland) (캐나다) 부쉬 엔터테인 먼트사 씨 월드 체인들 18˜20 그랜 티비다보 테마파크 (스페인) 범례: 방문객수 단위는 100만명, * 95년 방문객수 미국에서는 이미 테마파크의 잠재능력을 익히 간파해 온 거대 미디어기업들이 속속 6,70년 대에 세워진 테마파크의 체인들의 대부분을 흡수하여 자사내의 주력 업종으로 통합시킨다. 소위 글로벌 테마파크의 5대 소유주들은 디즈니, 안호이저-부쉬(Anheuser-Busch), 타임워 5) The Nation, June 8, 1998, pp.21˜8., 그리고 (Davis, 1996)의 내용을 토대로 도표화. Page 9 9 너, 바이어컴(파라마운트), MCA이며, 이들 파크에서 걷어들이는 입장비만 기업 수익의 절반 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빅5’는 북미에만 24개의 파크와 1억 200만명(93년 통계치)의 관람객 들의 방문 횟수를 기록한다. 미국과 캐나다 전체로 놓고 보면, 700개 정도의 테마파크와, 93 년 한 해 동안 방문객 수가 2억 5,500만으로 추산된다. 여기에서도 독점의 논리가 우세한데, 상위 50개의 대형 테마파크의 방문객만 약 1억 4,330만명에 이르고 있다(Davis, 1996). 90년대초 5대 미디어 기업들이 테마파크 체인을 지속적으로 매입함으로써, 몇 가지 중요 한 효과가 발생한다. 우선 단기적으로 수익성이 높고, 즉각적인 현금 회수 능력을 발휘하다 보니, 유동 자본이 증대하였다. 예컨대 80년대말에서 90년대초까지 디즈니 파크는 디즈니사 전체의 수익 중 거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빅5’중 거의 모든 모기업들은 파크 수익을 타 산업 부문으로 팽창하기 위한 내부 거래자금으로 활용했다. 특히 계열사 중 영화산업이 불 안정성을 보일 때, 그리고 케이블산업 등 다른 주식들이 새로운 컨텐트의 점증하는 수요에 직면할 때, 테마파크의 자금 동원력이 이러한 계열사들에 큰 영향을 발휘한다. 오락기업들의 입장에서 보면 테마파크는 즉각적으로 엄청난 돈을 낳는 보고였다. 둘째, 투자 영역의 다각 화/다양화 효과. 사업 다각화의 정식화된 목적이 연관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면, 이를 철저히 수행하는 것도 테마파크의 투자 요인이다. 즉 특정 테마파크와 이를 둘러싼 환경은 이 일대 를 ‘왕국’으로 만든다. 그리고 왕국의 위성들인 호텔, 식당, 야영지, 주차장, 선물가게, 요트 장, 눈썰매장, 골프장, 카지노, 수영장 등등. 물론 테마파크 소유주가 이 모든 것을 관리하며, 이를 통해 철저히 외부로 매출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는다. 일례로 (주)삼성 에버랜드의 서비 스표 등록원부의 권리란을 보면 20개 이상의 지정 서비스업종이 나열되어 있는데, 6 이는 바 로 파크에서 원스톱으로 전 업종을 임대, 관리하여 수입원을 다양화하겠다는 의도이다. 셋 째, 생동하는 오락 공간으로써 테마파크는 모기업의 계열사들에서, 혹은 흡수한 기업들로부 터 제작된 교차-촉진적 재화(cross-promote goods)와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이같은 상호 교차적인 판매촉진의 가능성은 거대 미디어들간 매수와 합병을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 나고 있다. 역으로 이는 소비자들의 표적 시장을 넓히고 세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 다. 예컨대 당해에 계열 영화사에서 출시될 영화를 이벤트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방법이다. 또한 영화 캐릭터 상품의 시판은 영화보다 더 높은 수익을 장기적으로 보전한다. 예를 들어, 94년 디즈니가 제작한 <라이온 킹Lion King>이 첫 해에 2억 6,700만 달러를 벌어들였지만, 라이센스 계약을 통한 그 영화의 캐릭터 상품 매출은 거의 4배 가까운 10억불에 이르렀다. 이런 정황만 보아도 공원내에서 일상화된 상영 전야의 이벤트화-영화화-연관 소비 상품화 로 이어지는 효과들이 어떠한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테마파크는 책, 테잎, 비디오 게임, 음반, 영화, 만화 등과 비미디어적 소비재들에 이르기까지 상품 광고를 위한 물리적 장소이 자 출구로, 생산물들의 거대한 판매소로 복무한다. 또한 테마파크는 일종의 물질화된 광고, 전자 영상물과 그 홍보를 구체화하는 수행적이고 동적인 공간이 된다. 마지막으로 테마파크는 향후 놀이공간의 위상과 관련하여 디지털 상품 판매의 구매력을 실험하는 장이 되어가고 있다. 초창기 테마파크들의 전략이었던 식물/동물원 등의 자연친화 적인 전략, 즉 ‘자연의 상품화’ 7 라는 것도 이제는 오락과 첨단과학이 결합되면서 새로운 볼 거리와 체험 영역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즉 뉴미디어 신제품을 선전하는 정돈된 플랫폼이 중심 논리에 끼어든다. 테마파크는 한 곳에 이 첨단적인 모든 것을 늘어놓음으로써 중산층 6) (주)에버랜드의 서비스표 등록원부는 에버랜드의 하위 페이지([URL: http://.../regist/regist.htm])에 서 받아 볼 수 있다. 7) 테마파크들의 ‘자연의 상품화’전략에 관한 내용으로는 (Light and Higgs, 1997: 116˜7) 참고. Page 10 10 의 광대한 대중들에게 다양한 신매체의 생산물들을 소개하고 시장력을 측정하는 등의 실험 을 수행한다. 그래서 최첨단 기업들, 세가, 마이크로소프트, 필립스, 크리스탈 다이나믹 등의 기업들은 테마파크에 터를 잡고 싶어 한다. (최)첨단의 수사에 따라붙는 현대 기술의 보편어 는 3차원, 입체, 시뮬레이션, 그래픽 등이며, 이는 놀이공간 안에서의 게임 형식에 각인된다. 보드리야르식으로 평가하자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소외되거나 수동적인 구경꾼들이 아니 라 ‘인터랙티브한 엑스트라들’(figurants interactifs)” 8 로 승격할 수 있다. 휴가, 방학, 생일, 졸업 등 가족내 일상의 축제는 테마파크의 이벤트와 맞물리면서 파크 나들이를 통해 이제 능동적 소비 의례의 일부로써 기능하는 것이다. 현대 소비사회에서 테마공간은 독점화된 미디어 기업들이 수행하는 다면적인 판촉 마케팅 과 판매책을 위한 자본주의적 공간의 변형태로 굳게 자리잡았다. 9 그들에게 있어서 테마파 크는 이윤 창출과 판촉의 통합적 장소이자 뉴미디어 상품의 실험장이다. 그들은 상시적인 축제와 이벤트, 상품 판촉으로 소비의 거대한 국면을 세련되게 위장하여 과잉생산을 해소하 기 위한 탈출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미국내 테마시장은 테마파크 자체의 공급과잉 으로 인해 과포화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세부적으로 부동산 가격의 상승, 보험 비용의 증 가, 입장객의 한계, 테마기업간 경쟁 등이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미국내 거대 미디어 기업들은 테마공간을 창출하여 소비의 탈출로를 마련했듯이, 그들은 새롭게 신시장의 창출 을 도모하고 있다. 이는 3가지 영역에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첫째, 테마파크의 국제적 팽 창이다. 해외로 미국의 거대 테마파크를 수출하는 것.(<표 2>의 해외진출 현황 참고.) 특히 디즈니는 속속 세계 지도 곳곳에 미키 마우스의 문양을 찍어대고, 전세계 대중들이 서구의 문화를 평등하게 소비할 수 있도록 체인망들을 구성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대중들의 의식상 테마파크가 보편적인 국제 언어가 되가고 있다.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스펙터클을 기억하는 방문객들은 이제는 굳이 멀리나갈 필요없이 자국내에서 동일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둘 째, 보다 작은 형태의 틈새시장인 미니파크나 어린이들의 놀이공간 등이 활성화될 것이다 (Davis, 1996). 마지막으로 거대 테마파크들의 지속적인 개장과 함께 이들 공간들은 하이테 크산업 영역과 보다 밀접한 결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테크노기술의 자원들과 상품들을 외부 로부터 끌어들이는(outsourcing) 이벤트를 상시화하여 시장 가능성을 점치는 작업이 부단히 이루어질 것이다. 아니면 미래적 테마파크의 형태로 공간 전체를 완벽하게 뉴미디어의 복합 무대로 만드는 경향도 출현할 것이다. 일례로 일본의 게임기 회사인 세가는 요코하마와 오 사카에 가장 새롭고 첨단의 기술을 구현한 인터랙티브 테마파크를 개장한 것처럼, 하이테크 기술의 완전한 구현을 통해 미래적 놀이공간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같은 사례들은 테 마공간내 스펙터클의 변화뿐만 아니라, 테마공간 운영 주체와 관련하여 앞으로 뉴미디어관 련 오락산업의 테마파크 진출이 본격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까지 그것이 과장 이라면, 현재 테마파크는 디지털 자본들이 새롭게 생산하는 상품의 유형들을 해소시킬 수 있는 확실한 시장임이 분명하다. 8) Baudrillard, J., “Disneyworld Company”, Liberation, March 4, 1996., trans. by F. Debrix, in Ctheory, [URL: http://www.ctheory.com/e25-disneyworld_ comp.html]에서 인용. 9) 국내 상황은 조금 다르다. 대체로 유원지를 포함한 국내 테마파크들은 토목/건축업자들이 진출한 경우가 다반사이다. 부동산관련 손익계산에 따라 토지개발이 이루어지는터라 이들 업자들에게 유원 지에 대한 마인드란 부재하다. 특히 삼성이나 롯데 등 재벌들이 운영하는 테마파크는 미국과 비교 하여 시설 투자면에서는 뒤지지 않으나, 운영 주체와 관련하여 미디어 독점기업들이 운영하는 미국 의 90년대 토양과는 차이(비전문성과 천민성)를 갖고 있다. Page 11 11 V. 소공간들에 크롬 입히기: 전자 게임방 문화 게임의 성장은 십여년간 MIT대학 등의 기술적 마인드를 가진 소수집단들의 이용을 거쳐, 현재는 급격하고 폭넓게 확산되었다. 게임의 역사로 볼 때, 1971년 미국에서 ‘스페이스 워’(Space War)라는 상업용 아케이드 게임을 시초로, 76년 아타리(Atari)사가 ‘퐁’(Pong, 일 명 핑퐁게임)이라는 게임으로 최초의 사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일반 대중에게 비디오게임이 친숙해지기 시작했다(서경학, 1995). 일명 ‘벽돌깨기’는 76년 일본에서 성공했고, 일본의 타이 토(Taito)사가 개발한 ‘인베이더’는 78년 미국에서 대선풍을 일으키면서 전세계적으로 게임 시장이 급성장하는 도화선이 되었던 중요한 게임들이다. 미국에서는 80년대초 조잡한 게임 타이틀이 시장에 범람하면서 ‘아타리 쇼크’(Atari Shock)가 발생하여, 소비자의 불만 가중과 게임기 판매 하락으로 말미암아 게임기 시장이 침체하게 된다. 일본이 게임기 시장을 제패 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해부터이다. 이제는 세계 전체의 비디오 게임기 시장의 80% 이 상의 점유율을 기록하는 일본과 피씨게임 및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77% 정도의 점유율을 지 닌 미국 시장으로 압축되고 있다. 10 <그림 1> 국내 게임시장의 성장 규모 11 현재 일본의 닌텐도나 소니, 세가의 기술력과 그들의 미니어처식 방 문화가 결합되어 새 로운 유형의 전자 게임방들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전국에 1만 5천개 이상의 실내 전자오락 실과 아케이드내 종합 오락장이 110여개 이상이나 세워졌다. 국내 게임시장 규모는 94년에 약 3,500억원대로 추정되며, 97년에는 5,500억원대에 이르고 있다.(<그림 1> 참고.) 97년 한 해 통계치만 보아도 게임산업은 극영화, 애니메이션, 음반, 비디오 산업 보다도 높은 시장 가치를 보여준다. 12 게임산업 중 업소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그 10) 전자신문 , 1996년 11월 15일자. 11) 기업경제 , 1995년 11월, 126쪽 내용을 토대로 구성. 12) 문화관광부, 통계로 보는 문화산업 , 1998. 범례: 96년은 자료 없음, 97년은 추정치. Page 12 12 비중이 20% 미만인 선진국에 비교해 볼 때 아직까지 가정용 게임기 시장이 크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13 그러나 96년 들어 국내 게임시장에서 피씨게임의 시장 규모가 300억원대(30%의 시장점유율)에 이르렀으며, 비디오 게임기에 비해 피씨 게임이 사용자에게 부여하는 의사결정권과 인터랙티브한 속성, 그리고 업소용 게임기의 지속적인 이용 가격 상 승 또한 조만간 놀이공간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변수로 보인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과도하게 업소용 게임장들이 동네 여기저기에 문을 열었던 것은 아이들이 아직까지 개인적 놀이 욕구의 해소 공간이 부족했고, 피씨나 게임기를 구입 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데 대해 쁘띠 상인들이 밴드웨곤식으로 단기 이윤에 몰려 창업했던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14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80년대초 이래 개인용 피씨 의 광범위한 보급과 함께 아이들이 업소용 게임장들을 찾기 보다는 피씨게임을 즐겨하기 시 작했다. 포레스터 리서치(Forrester Research)사에 따르면, 미국내 온라인 게임 인구만 현재 990만 정도에서 2001년에는 16억불의 수입과 사용 인구가 1,830만명 정도로 늘어날 전망이 고 보면 15 , 앞으로의 추세는 아케이드용 보다는 컴퓨터에 기반한 네트워크 게임산업이 유망 하리라 여겨진다. <표 3> 미스트와 쥬라기 공원의 비교 수 입 액 * 수입액: 생산비용 인원수(완전고용) 개발비용 회복기 미스트 1억 3,000만 달러 260 : 1 6명 12주 쥬라기 공원 3억 5,700만 달러 6 : 1 500명 1주 범례: * 미국내에서 93년˜97년 9월까지의 수입액만을 포함. 미래형 게임산업의 한 장르를 구성하는 라이븐(Riven)과 미스트(Myst)란 피씨게임용 패 키지는 장차 게임산업이 얼마나 고부가가치 영역인가를 입증하고 있다. 최근 와이어드 (Wired)잡지는 미국, 호주 등에서 최고의 판매율을 기록한 미스트와 최대 흥행을 기록한 스 필버그 사단의 쥬라기 공원을 비교하는 기사를 실었는데, 생산비용 대비 260배의 수입액을 올린 미스트의 경이로운 기록은 눈여겨볼 만하다.(<표 3> 참고.) 이는 특히 소프트웨어의 연관효과가 거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미스트는 프로그램의 구성 시나리오를 시리즈 용 책으로 출판되거나, 그 배경음악을 사운드트랙으로 만들어 시판하거나, 마우스패드, 티셔 츠, 가방, 찻잔, 화보 등으로 상품화하여 판매고를 증가시켰다. 16 저렴한 제작비와 소규모 인 13) 뉴스메이커 , 1996년 8월 29일자, 69쪽. 14) 게임장 확대의 또 다른 경제적 요인은 양성화된 슬롯머신 영업장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관리와 관련되어 있다. 이에 대한 유흥업소들의 대응은 소단위의 변칙 영업 형태로 전자 오락실이라는 간 판하에 게임과 도박을 이원화하든가, 음성적으로 숨어들어 개점하는 것 등이었다. 90년대 들어 이 같은 게임방 문화의 개념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오락장’,‘오락실’등 기존의 전자 게임공간을 호칭 하던 간판 글자들의 대부분은 실내 도박장 용도로 둔갑하고, 일반 전자게임 영업소들은 ‘게임피아’, ‘게임센터’,‘게임파크’혹은 오락실 앞에 ‘컴퓨터’,‘두뇌 개발’,‘사이버’등의 수사를 붙여 스스로를 건전한 오락문화로 취급해달라고 호소하는 웃지못할 상황이 연출되었다. 15 ) 인터넷 전문 리서치 기관인 이마케터(eMarketer)의 통계 자료([URL: http://www.e-land.com/estats/ec_hot.html])에서 재인용. 16) Wired, Sept., 1997, pp.126,7. Page 13 13 원 동원, 그리고 전제 조건인 아이디어의 창발성이 제대로 만난다면 동일 영상업종 틀내에 서도 엄청난 이윤을 보장하는 놀이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방들은 엑스포와 테마공원 등 거대 오락문화가 트리클다운(trickle-down)된 소비문화의 하위 지형을 형성한다. 그 혜택은 크게 보아 첨단 기술적인 놀이의 시범을 거쳐 대중적으로 보급된 측면과 소비 내용에 있어서 지출의 상대적 저렴성으로 이루어진다. 하지 만 최근에는 전자 게임공간 자체가 대형화되는 경향이 있다. 전자게임방이 테마공원내의 중 요한 놀이공간으로 자리잡거나, 게임방이 게임센터 등으로 체인화하는 변화를 겪고 있다. 앞 서 세가의 테마공원의 예를 들었듯이, 전자게임만을 위한 90년대식 하이테크 게임센터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3차원(3D) 혹은 가상현실(VR)을 응용한 게임공간 에 대한 기업들의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만도 가상의 오락세계사 (VWE Inc.)가 90년 시카고 일대에 만든 테마공원에 ‘배틀테크’(Battletech)라는 가상현실 게 임센터를 구축했는데, 센터 안에 설치된 14개의 가상현실 캡슐에만 250만불이 투자되었다. 이와 비슷한 게임센터로는 92년 캘리포니아에 개장한 군사 비행용 시뮬레이터, ‘화이터타 운’(Fightertown TM )을 들 수 있다. 그 외 아케이드용 VR 게임기로는 군 산 복합기업인 GM 휴즈 일렉트로닉스사(GM Hughes Electronics Corp.)가 만들어 영국에 1대당 7만 6천 불을 받고 판 ‘코만도’(Commander TM ), 그리고 휴즈사와 루카스 아츠 엔터테인먼트(Lucas Arts Entertainment)가 공동 제작한 ‘미라쥐’(Mirage TM ), VR 개발사인 VPL 리서치사와 MCA의 제휴를 통해 만든 가상현실 극장, W 인더스트리즈(W Industries)가 개발한 수많은 시뮬레이터들이 대표적이다(Hawkins, 1996: 170˜6). 이제 컴퓨터게임들은 빠르게 세분화한 장르나 내용들로 바뀌고 있다. 소프트웨어 상점 진 열장의 게임은 대개 장르별로 배열되고, 소비자들은 그럼으로써 시뮬레이션, 퍼즐, 어드밴처 혹은 롤플레잉 게임을 그 즉시 찾는다. 게임의 장르는 직접적으로 주제보다는 게임 유형으 로 구분되나, 게임의 주제와 유형, 이 둘은 종종 폭넓게 결합한다. 대개 시장규모를 측정할 때는 게임의 유형에 따라 분류하는데, 아케이드 게임 혹은 비디오 게임, 피씨 게임, 네트워 크 게임, 가상현실 게임 등이 이에 속한다. 또한 이용 공간에 따라서는 크게 소규모 오락실, 게임방 등을 포함한 아케이드 공간과 각 가정의 개인 피씨 이용 공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컴퓨터게임만의 특성이라고 한다면 상호작용성을 들 수 있다. 이 특성하에서 사용자에게는 가상세계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력을 지닌 환경이 영화와 텔레비전의 수동성을 대체한 다. 집안에서는 스크린, 키보드, 조이스틱, 스피커 등의 기계장치가 사용자를 에워싼다. 때론 아케이드에서는 사용자가 말 그대로 기계안에 앉아, 앞뒤로 움직이며, 의자에서 흔들리고, 쏟아붓는 소음을 듣기도 한다. 보다 최근 VR 기계를 통해 사용자는 머리에 헬멧을 쓴 채, 그의 신체운동에 반응하여 시각이 따라서 변하는 3D 환경의 완벽한 환상을 체험한다. 현재 시장에 널리 보급되지 않은 데이터 장갑(data glove)과 같은 여타 장치들은 촉각적 피드백 을 제공하며, 소프트웨어의 임의적인 인터페이스 도움없이도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세계와 직접적 상호작용을 외견상 가능케 한다. 그 장비가 무엇이든지간에, 그 목적은 장면에 한정 되지 않고 행동에까지도 환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게임은 보다 많은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 해, 그리고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체험 내부로 사용자를 가둬두기 위해 애쓴다(Stallabrass, 1996: 85,6). 무엇보다도 컴퓨터게임은 반응, 영상, 음향을 연결함으로써, 사용자가 조정하는 분명하고 통일된 현실을 제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완전몰입의 변화무쌍한 체험으로 이끌고 있다. 전자 게임방 문화는 미시적인 소비 경로를 통해 가상의 오락과 놀이를 생활공간에까지 끌 Page 14 14 어들인다. 일상적인 놀이의 체득화 과정에 합류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다른 학습 기제들 과 달리 게임은 체득 과정이 빠를 수밖에 없는데, 이는 앞서 본 게임 기술의 자극과 몰입에 서 주어진다. 이미 게임의 설계와 관련하여 난이도 보다는 자극의 양이 재미와 중독성에 비 례한다는 결과가 나온 상태이다. 17 그래서 게임 디자이너들은 보다 강한 자극과 유사 주체성 의 구성이라는 점에서 게임을 설계하려 한다. 한편 이들은 참여와 상호성을 기반으로 구성 된 게임의 과정이 최고의 개방형 체제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게임에 임하는 역할자가 다양 한 옵션을 통해 게임 원리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 즉 탈신비화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세계 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한다고 주장한다(Friedman, 1995: 81,2). 하지만 역할자의 선 택이란 말 그대로 ‘제한된’옵션에 불과하다. 과정의 개방성은 통제된 개방을 의미하며, 가지 치기된 과정의 종착지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곳이다. 그리고 최초 소프트웨어 설계자들의 편 견으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적 프로그램이란 존재할 수 없다. 게임 생산의 첫 국면에서 이미 설계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현실을 빼닮은 일상의 ‘부호화’(encoding)가 진행되어 버린다. 게임의 설계물이 이데올로기적 구조물이라면, 게임의 실행은 이를 학습하는 주체의 학습기 제로 작용하고, 게임의 주체적 효과란 현실에 대한 신비화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가상 놀이 의 배설 행위를 통해 사회화된 학습을 스스럼없이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닌데, 예컨대 대표적 시뮬레이션 게임인 씸시티(SimCity )의 내용만 보아도 이 사실을 감 지할 수 있다. “씸시티는 당신을 시장이나 도시 계획자로 만들어, 당신의 꿈의 도시를 디자 인하고 세울 수 있도록 돕는다. 당신의 선택과 설계 기술에 의존하면서... 시뮬레이션으로 만 들어진 시민들(Sims)은 주택, 병원, 교회, 가게, 공장 등으로 입주하여 살거나 보다 나은 생 활을 위해 이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ibid., 80). 최적의 도시 건설이라는 씸시티의 프로젝트 는 현실의 모방일 확률이 높다. 전략적 사고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적 논리가 게임의 동학 에도 적용된다. 18 실업과 연금 기금, 교육기관, 공원 등을 확충하면, 시예산이 곧 바닥날 것 이고 파산에 이른다. 파산전 선고는 게임 중 깜박거리는 위험 신호이며, 게임의 충실한 수행 결과는 디지털 화폐를 집행하고 남은 예산 보유고가 곧 점수로 환산될 것이다. 즉 자본의 질서를 그대로 모방한 게임설계를 게임 개발자들은 무의식 중에 인코딩한다. 이를 통한 수 행 과정은 자본주의적 사회화 과정이며, 그 효과는 현실의 학습효과인 셈이다. 이미 현실의 이야기나 영화, 볼거리들이 게임의 텍스트를 구성하면서, “게임의 세계는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픽션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픽션의 세계”(김창남, 1998: 176)를 구성한 다. 게임의 규칙은 현실을 모방하고 은유한다. 물론 게임상품이 노리는 가장 중요한 효과는 재미와 중독성이다. 특히 어드벤처 게임류가 부여하는 자극의 강도는 재미로 통하고, 시리즈 를 지속적으로 소비하게 만듦으로써 연쇄적인 이미지를 소비하는 중독의 효과를 얻고자 한 다. 버전업 되기 전 한계욕망점에 이르면 또 다른 시리즈의 개발을 통해 매 단계마다의 욕 망을 부단히 재생산한다. 실지 게임의 난이도는 자극과 재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한도내에 서만 상승 가능하다. 이제 전자게임은 더 이상 신세대나 남성만을 위한 전유물이 아니다. 전자게임의 태동이 있었던 70년대 중반 이후의 모든 세대들이 그 강력한 소구대상들이다. 이미 전자게임은 여 가 향유의 보편화된 한 계열을 형성하고 있다. 그 중 디지털 소공간들을 통한 놀이문화는 그 저변을 확대하여 일상의 재생산 공간을 잠식하고 있다. 본질적으로는 현실의 모사 환경 17) 김동현, 게임산업의 현황과 과제 , 한국멀티미디어협회 주최 ’97 멀티미디어 산업기술 동향 세미 나, 1997년 10월 29일, [URL: http://www.multimedia.or.kr/tech/9710/semi5-4.htm]. 18) 씸시티를 일그러진 현실의 모사로서 상세하게 관찰한 논문으로는 (Bleecker, 1995: 200˜9) 참고. Page 15 15 을 창출하고 놀이를 통한 상품 소비와 사회적 학습기제를 작동시키는 게임공간들의 항구적 (재)생산 과정이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VI. 하이테크 소비공간의 사적 변형 앞서 본 몇 가지 사례들은 일상공간의 사유화(privatization) 과정에 대한 90년대식 고찰이 다. 소비공간의 현대적 실례들을 통해 오락기업들이 소비문화를 어떻게, 왜 하이테크 변형시 키는가를 살펴보았다. 다양한 소비공간의 창출과 재생산 속에서 유독 이 세 가지 영역을 주 목한 것은, 우선은 이 물리적 영역들이 첨단적 소비의 첨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역들 이 하이테크 소비 과정의 각 주요 인입 지점이자 연결 고리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적한대 로 엑스포는 하이테크 기술의 실험장의 역할, 테마공원은 집단적 대중화의 역할, 전자 게임 방들은 디지털소비의 체득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 각각은 놀이라는 촉매를 통해 (전 시)-실험-운용-정착이라는 고리로 연결되는 과정을 취한다. 이 고리는 실지 각각 소비의 한 국면들이며, 새로운 놀이 기술의 발명과 함께 재순환하는 경로를 따른다. 각 공간 구성의 합 혹은 각 고리의 순환 정도는 그 시대의 소비문화적 농도를 짐작케 한다. 보다 정확히 얘기 한다면 하이테크 소비공간들의 합과 각 고리를 통해 흐르는 상품 연쇄의 회전율이 현대적인 하이테크 소비문화의 농도에 해당한다. 한편 순수하게 하이테크 상품이 각 고리에서 이동하 는 시간의 정도는 오락기업의 창구/연관 효과의 증대와 반비례한다. 또한 소비의 과포화 상 태를 고려하여 각 영역 혹은 고리들은 스스로를 복제하여 확장하거나 이합집산하며, 새로운 하이테크 공간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로써 오락, 게임, 놀이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행한다.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훨씬 기술이 소비문화와 결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과 피씨통신을 얘기하면 의례껏 문화를 떠올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문화는 소비를 전제해왔고, 소비는 문화를 규정해왔다. 특히 급격한 소비 패턴의 변화는 문화와 일 상공간의 형질전환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90년대 들어 가장 큰 소비 패턴의 변화는 소비 의 하이테크화였다. 엑스포, 테마공원, 전자 게임방은 이같은 형질전환의 출발이자 그 심층 이다. 문제는 왜 이렇게 놀이 또는 문화의 방식이 점차 전화하는가인데, 일차적으로는 거대 오락산업들이 짜는 새로운 이윤 확장로의 모색과 관계한다. 현대적 놀이의 표층을 하이테크 기술로 세심하게 (재)포장함으로써 식상한 놀이의 양식을 가상화하여 새로운 이윤원을 창출 하고자 한다. 둘째로는 이미 거대 자본에 의해 물질적 일상공간들이 축소 및 포위되는 지경 에 이르렀을 때, 그 탈출구는 비물질의 사이버공간과 함께 물질의 하이테크 놀이공간을 통 한 가상적 해방감의 일시적 유포일 수 있다. 즉 억압에 대응한 두 욕구 배설로의 첨단기술 로 익명의 소비자들을 호객하고자 하는 것이다. 셋째로는 물리적 공간 이동없는 놀이의 발 굴과 유관하다. ‘보다 빠르고 쉽게’라는 디지털시대의 구호에 어울리게 놀이도 변형되어간다. 붙박힌 자리에서의 놀이, 즉 그 자리에 타고 앉아 돌고, 달리고, 움직이는 것이 최고의 운동 성이다. 프랑스의 도시연구가인 뽈 비릴리오(P. Virilio, 1997: 11)도 동의하듯, 지난 시기가 ‘동적인’(dynamic) 수송 장치들(기차,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 등)의 대중화가 중심이었다 면, 현대의 기술혁명은 ‘행동적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behavioral inertia)의 도래로 특 징지을 수 있는 시청각 장치의 개발이 주도한다. 망막을 흐려 시각의 착란을 일으킴으로써 속도감을 부여하는 것이 주목표가 되며, 이에 걸맞는 소비자의 유형은 터미널에 고정된 인 Page 16 16 간이 된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영위하는 일상의 ‘공적 의사표현’(public expression)과 창의력이 표 출되는 공간만은 자본의 침해를 받지 않는다고 여겨왔다. 이들 공간은 모든 공중이 자유롭 게 참가할 수 있는 공적인 장소이며, 그 공간은 마치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천연자원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일상공간은 노동의 재생산을 위한 휴식의 공간이자 기업이 쉽게 침투 하지 못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일상공간은 자본의 이윤추구라는 원칙과 맞물리면서 사적 공간으로 점유되어 가고 있다. 일상공간에서의 자본형성과 관련한 몇 가지 사례는, 현재의 자본운동이 미치는 공간적 범위의 무제한성을 깨닫게 한다. 예를 들어 거대 기업에 의한 공공 정보자원의 상업화, 기업전시관으로서의 박물관, 새로운 도심가인 교외의 대규모 쇼핑몰에 의해 사유화된 공공 공간, 도시내부에서의 사적인 건조물에 의한 공적 공 간의 축소, 거리의 통제(축제 시위 시가행진 등의 상업화), 상업방송망에 의한 일상공간의 소비주의적 침투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Schiller, 1989: 91˜110). 여기에 자본주 의 사회내 억압적 국가기구들(법 제도 행정 경찰 등)의 일상공간에 대한 사회적 통제력 을 감안한다면 공공 영역의 축소와 사유화 과정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결국 대중의 일상 적 유희 자체도 거대 자본에 의해 수축되고 포위화되는 형국에 이른다. 근원적으로 일상의 이벤트, 게임, 놀이 형식들이 외연을 값비싼 첨단장비로 감싸고 안으로 는 소비문화와 단단히 결합되었을 때 봉착하는 문제는 현실에 대한 저항의 상실이다. 일상 공간을 소비하며 즐기는 대가는 깊이없는 사유와 구체적 현실에 대해 무력해지는 것이다. 즐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 고통을 목격할 때조차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즐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무력감이다. 즐김은 사실 도피다. 그러나 그 도피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듯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남아있는 저항의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오락이 약속해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Horkheimer and Adorno, 1996: 200). 그러나 일면 저항의 복귀를 희망할 수 있는 여지는 하이테크 영상세대들의 문화정치적 활 동에서 움튼다(이광석, 1998). 거대 자본에 의한 하이테크 소비문화의 양성화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소비 주체들은 하이테크 문화를 즐기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재구성하려는 습성을 지 닌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문화산업의 철권적 압도에 숨막혀했던 그 당시 예측과는 달리, 이제는 첨단기술의 자본화 과정에 파산 선고라도 내려는 반대 이용세력들, 즉 디지털 저항 의식체의 결집이 이루어지는 듯하다. 문제는 문화 영역에 있어 힘의 역학관계인데, 자 본의 지배적인 소비 창출을 빗겨가는 식이라면 새로운 이들은 그저 주변부로 내몰릴 수 밖 에 없을 것이다. 더욱 비관적으로 보자면 이벤트, 놀이, 게임의 양식이 굳건하게 거대 기업 의 의도와 밀착되고, 첨단기술로 외피를 감쌀 때, 그 이상 다른 어떤 것을 사유할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하이테크 영상세대가 자본이 사유화하는 영토들을 자신의 자유로운 저항의 기폭 지점으로 활용하기에는 여러모로 힘이 모자란다는 점이다. 오 히려 그들의 개성과 자유가 디지털기업들이 이끄는 스타일 정치문화의 미끼로 이용될 수도 있다. 소비 주체의 욕망을 자극한 하이테크상품의 미끼라는 유혹이 도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자본의 사유화된 영역들에 대한 공개적 점유의 노력들이 중요하며, 깊게 사 유할 수 있는 현대적 놀이공간의 개발이 더욱 필요하다. 이제까지 오락기업들이 추구한 첨 단기술이 소비문화적 변형이었고, 그 이면에서도 공적이고 인간적인 놀이의 요구와 필요에 Page 17 17 도 그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면, 매 순간 저항은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김창남, 1998. 대중문화의 이해 , 한울. 이광석, 1998. 사이버 문화정치 , 게릴라총서 8, 문화과학사. 이정재, 1994. 도시 문화경관 , 문화과학 , 제 5호(봄). 임석재, 1997. 소비사회와 놀이공간 , 리뷰 , 제 12호(가을). 최병두, 1994. 자본주의 도시공간의 정치경제학 , 문화과학 , 제 5호(봄호) Baudrillard, J.(이상률 옮김) 1994. 소비의 사회-그 신화와 구조 ,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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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

By Frank Biocca & Mark R. Levy, Communication in the age of virtual reality (1995)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 (이광석 옮김) 가상현실의 최종 지향점은 다목적 커뮤니케이션 매체 - 감각 주위를 섬세하게 둘러싼 텔레비전과 전화의 결합체 - 일 것이다. 나사의 과학자인 스티븐 엘리스 (Steven Ellis, 1991a, p. 321) 조차도 "가상 환경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라는 점"을 인정한다. 가상현실 입문서들 대개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역사에 있어서 가상현실은 필연적인 다음 단계로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Hamit, 1993; Rheingold, 1991). 델피 Delphi 패널 조사를 한 결과, 기술의 성숙기에는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이 시장의 60%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Miller, Walker, & Rupnow, 1992). 그런데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이란 무엇인가? 혹자는 가상현실의 모든 응용 부문이 커뮤니케이션 응용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몇 가지 측면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유효하다. 결국 그렇다면 응용의 전 부문은 인간-기계간 커뮤니케이션과 인간대 인간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마도 보다 국한된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오락, 뉴스와 정보, 텔레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가상현실 응용이란 무엇인가? 그 응용은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 그 응용은 어떠한 밑그림을 제시할 것인가? 도입부의 장들에서 지적했던 바처럼, 1990년대 중반은 커뮤니케이션과 컴퓨터 산업의 급격한 변화로 가득찬 때이다. 가상현실의 응용은 이처럼 부글부글 끓는 냄비 속의 활동 가운데에서 형성되고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가장 유효한 증거를 이용하여 몇 가지 중요한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에 대해 그 대강을 제시하고 있다. 시장의 출현 미국내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서비스 지출액은 "커뮤니케이션"에 포함한 내역인 7조 달러에서 11조 달러에 이른다. 또한 세 가지 경향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보다 확대된 상호연결, 커뮤니케이션 지점간의 보다 확대된 정보대역, 그리고 사용자와 인터페이스 사이의 보다 확대된 정보대역, 이 세 가지 경향으로 시장은 점점 확장하고 있다. 첫 번째 경향, 즉 보다 확대된 상호연결은 언제부터인가 계속 진행되어 왔다. 예컨대 지난 10여년간 케이블 텔레비전은 미국 내 300%의 가입 비율로 증가했으며, 결국 미국 가정의 대다수가 시청하게 되었다.(미 상무부, 1992). 한편 커뮤니케이션 확장의 증거는 과거 컴퓨터 업계의 활동을 지켜봄으로써 관찰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 발매업자 협회에 따르면, 1992년에 오락용 소프트웨어의 수입은 29%가, 교육용 소프트웨어의 수입은 47%가 증가했다고 밝혔다. (Gilder, 1993). 동시에 모뎀이 장착된 컴퓨터 판매고는 1,000%라는 놀랄만한 성장을 보였고, 인터넷은 매달 15%의 놀랄만한 성장률을 보이면서 급격히 발전했다. 단지 이는 시작일 뿐이다. 일반 대중의 단지 소수만이 진정으로 이 커뮤니케이션 팽창을 접촉하였다. 반면에 미국의 거의 모든 가정은 텔레비전 (98%)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가정의 40% 미만이 개인용 컴퓨터를 소유한다. 매개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이 모든 성장이 어디로 갈 것인가?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의 변화만을 고려해 보자. 어떤 미디어 환경에서는 대개 지배적인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매체 (인터페이스), 즉 우리가 세계를 보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가장 강력하게 형성하는 매체가 존재한다. 20세기의 신문, 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전 각각은 정상에 이르렀고 천천히 지배력을 잃었는데, 이러한 각 새로운 매체의 상승과 하강 주기는 매우 빨라졌다. (Shaw, 1991). 미디어 기술의 발전은 가상현실이 다음 세기의 주도적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부상할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몇몇 장들(1장 Biocca, Kim, & Levy의 논문; 3장 Steuer의 논문)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미디어의 역사는 각각의 채널에다 증가된 감각의 현실감을 부여하여 감각전달 통로에 더욱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인터페이스의 역사이다. 어떤 점에서는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의 성장에 있어서, 결국 우리는 몰입 가능한 가상현실의 형태가 일반적이고, 가정과 사무실에 기초한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가 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일반적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에 의해, 우리는 대인간 텔레커뮤니케이션, 정보 검색, 그리고 정보 창작에 이용되는 인터페이스, - 일종의 전화, 텔레비전, 그리고 퍼스널 컴퓨터 융합 - 즉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타매체를 계획한다. (Kay & Goldberg, 1977). 마침내 인터액티브 멀티미디어 시스템은 최초로 국내의 각 가정에 도달하고 있다. 이 멀티미디어 시스템은 가상현실 지향의 입·출력 장치와 결합하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예컨대 윈도우형의 그리고 입체의 디스플레이가 이미 시장에서 적정한 가격으로 보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심사라빔 시스템스 Simsalabim Systems, 스테레오그래픽스 Stereographics, 브이렉스 VREX). 일반 가정에서 언제 가정형 리얼리티 엔진을 가지게 될 것인가? 가상현실 기술의 정확한 유형과 확산 정도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고 불확실하다. (11장, Valenti & Biardini를 참조). 하지만 몇 가지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 이미 컴퓨터 게임회사들은 로우엔드 low-end 시스템과 더불어 가정에 근거한 네트워크 계획을 발표했다. 가상현실의 시장 형태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경에는 아직까지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 분야의 시장은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작았다. 1993년에 가상현실의 전 시장 규모는 1억 1천만 달러가 못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Latta, 1993). 혹자는 1997년에 이르러 규모가 5억 5천만 달러로 커지면서 그 시장이 서서히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다른 혹자는 가상현실의 기술과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보다 빠른 비율로 성장할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가상현실의 확산이 커뮤니케이션 응용 분야, 특히 오락적 응용에 의해 추동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가상현실과 놀기 가상현실의 오락 응용이 수위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오락의 궁전, 즉 배치 장소형 오락산업 복합체에서 가상현실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배치 장소형 시장은, 예컨대 디즈니 월드, 라스 베가스, 그리고 다양한 국제 엑스포 등의 국내와 범지역을 포괄하는 오락 복합체들에서의 하이엔드 high-end 오락 체험을 포괄하고 있다. 이들 센터는 소비자가 접근할 수 있고, 다중감각적인 오락 체험을 생산해낸다. 과거에는 다중감각 체험은 수동형, 운전형 시뮬레이터로 이루어졌다. 수동형 시뮬레이터는 360도의 대형 스크린, 혹은 시각 정보를 담은 3차원 필름, 그리고 동작 기구대를 동시화한 고음질의 오디오를 이용한다. 100명중 40명은 거의 10분 이상 지속되는 그 짜릿한 체험으로 들어간다. 매 해 3백만명 중 50만 정도의 사람들은 이러한 여러가지 시뮬레이터를 경험한다. 그 전통적 예로는 1987년에 개장한 디즈니사의 스타 여행이 있다. (6장, Hawkins를 참조). 이 커뮤니케이션 산업 부문은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을 소개하는데 적절한 역할을 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일치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기업들은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여 놀랄만한 감각 체험을 제공한다. 이들을 약간만 열거하면 휴즈 Hughes, 스펙트럼-홀로바이트 Spectrum-Holobyte, 이웍스 Iwerks와 같은 기업이 있다. 이들 기업은 값비싼 가상현실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자본과 기술, 그리고 이 시스템에서 이익을 낼 수 있도록 하는 환경 모두를 갖출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다. 테마 파크의 가상현실 체험이 미국, 캐나다, 일본의 테마 파크에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은 그 지표일 수 있다. (이 책 Hawkins를 참조). 이들 장소에서의 오락은 보다 복잡한 내용을 지닌 체험으로 숙성하여 발전할 것이다. (8장, Meyer 참조). 배치 장소형 오락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초로 하이엔드 가상현실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이다. 가상현실 오락은 주요 여행 장소의 신기함뿐만 아니라 되풀이할 수 있는 체험이 필요하다. 최초 가상현실의 소비자형 응용은 배치 장소형 오락 산업의 저-중범위에 해당하는 부문에서 출현했다. 이들 부문에는 지역의 오락 센터와 대규모 쇼핑몰의 복합건물을 포함한다. 버츄얼 월즈사 Virtual Worlds Inc.의 배틀텍과 버츄어리티 Virtuality의 다양한 게임은 가상현실의 상호작용 개념을 그들 오락에 결합한 최초의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Hamit, 1993; 이 책의 Hawkins; 소비자 반응에 대해서는 이 책 Heeter 참조). 이 시스템하에서 이용자는 운전형 가상현실이나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몰입한다. 이용자는 네트워크화된 가상현실 시스템 내부의 3차원 세계에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린다. 이 시스템에서 이용자는 전투, 탐험, 구출 등의 주제하에서 타인과 경쟁이나 협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한 저-중범위 가상현실 체험(이 책 Biocca & Delaney 참조)은 이용자에게 보다 가까워지고 보다 쉽게 반복할 수 있는 종류이다.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을 완전하게 확산시키는 것은, 주요 가상현실 체험이 가정에 진입하게 될 때, 이미 시작 단계를 넘어섰다. 가정에까지 가상현실이 확산되는데 가장 적절한 역할로 비디오 게임 시스템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초반경에 미국 가정의 30%와 자녀가 있는 가정의 90% 이상이 이미 일종의 컴퓨터 게임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연간 45억 달러에서 50억 달러 이상의 수입액을 기록하는 이 소규모 시장에 얼마나 많은 고려를 할 수 있었겠는가. 가상현실의 몇 가지 개념은 컴퓨터 게임의 여러 가지 새로운 입·출력 장치의 형태에서 도입되었다. 예컨대 1990년대 초에 아브람스-젠틸 엔터테인먼트 Abrams-Gentile Entertainment와 마텔 Mattel사는 VPL의 데이터 글로브 (이 책 Biocca & Delaney 참조)의 미완성된 버전, 즉 파워 글로브 Power GloveTM를 도입하였다. (Rheingold, 1991). 1993년에 컴퓨터 게임기의 가장 큰 제조업체 중 하나인 세가는 단 몇 백 달러밖에 안되는 로우엔드형의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를 발표했다. 이 디스플레이가 보여주는 가상현실 체험은 질적으로 떨어지는 것이며 대개가 1인의 이용자로 제한되어 있지만, 이 기술은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가상현실 기술을 소비자들이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게 하였다. 이들 초기 형태는 새로운 그리고 미래의 소비자에게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에 쉽게 익숙해지도록 하며, 장차 보다 생생한 체험을 하게 만드는 입·출력 장치에 부착된 고품질 컴퓨터 플랫폼이 도래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한다. 가정에 오락을 실현하는 이 시스템은 또한 정보용, 교육용 가상현실 응용 분야에 대한 미래도 전망하게 한다. 실제로 몰입적이고 소비자형의 가상현실 시스템이 보다 넓은 공간에 걸쳐 네트워크화될 수 있다면, 커뮤니케이션 응용은 더욱 더 질적인 도약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이버공간은 "교감적 환상" (Gibson, 1984)에 이르는데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 일부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가상현실"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진정으로 몰입적이고 네트워크화된 가상현실은 가상현실 확산의 후기 단계, 즉 가상현실적이고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의 도래를 최종적으로 알리는 단계에 출현할 것 같다. 나이넥스와 유에스 웨스트 등의 전화 회사에 소속된 연구자들은 가상현실의 이용을 텔레커뮤니케이션에다 적용시킨다. 그러나 네트워크화되고 몰입적인 가상현실은 하이엔드의 케이블 대역이나 전화용 전송 채널이 필요하다. 몰입적, 네트워크화된 가상현실의 일부 예상으로는 각 가정에서의 인터액티브 텔레비전의 폭발적인 대중성과 일단의 강력한 그래픽을 동원하는 멀티미디어 컴퓨터 ("블랙 박스")의 출현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최우선에 와야만 한다. 예를 들어 벨 애틀란틱 Bell Atlantic사는 다가오는 1997년에 이 고성능 가정용 터미널의 수요가 1백만개 이상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Cook, 1993). 일부 대중적인 가상현실용 워크스테이션을 제작하는 실리콘 그래픽스사는 300 달러 미만의 그래픽 워크스테이션의 능력을 가진 스크린탑 블랙 박스를 제공하기 위해 거대 케이블사와 제휴 관계를 맺었다. 이와 같은 예상에 따르면 (예를 들어 Biocca, 1993), 이 강력한 상호작용 시스템은 결국 새로운 입·출력 장치를 "개발하여" 더 한층 네트워크화된 몰입적 체험을 지원할 것이다. 또한 가정형, 몰입형, 네트워크형 가상현실에 대한 가정은 "정보 초고속도로" 형태의 성공적인 시작을 전제한다. 그러한 네트워크는 필수적인 데이터의 광범위한 교환에 대한 골격을 제공할 수 있다. 가정형, 고성능 네트워크형, 완전 몰입형 가상현실의 전국 시스템은 현격하게 차이나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2장, Biocca & Levy 참조)과 전례없는 범위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성공이 비록 배치 장소형 오락시장에서 이루어졌지만, 가상현실의 다소 성공한 커뮤니케이션 응용 분야가 존재한다. 하지만 가상현실 커뮤니케이션 응용에 대한 현재 상황은 단지 도래할 응용 분야에서 제안적 수준에 해당하는 그 대강일 뿐이다. 이렇게 미성숙한 응용 상황은, 1950년대 밀튼 베를러 Milton Berle의 생방송 쇼와 MTV, 혹은 최초의 게임 퐁 Pong과 씸시티 2000 SimCity 2000의 관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성숙기의 응용 상황과 비교하여 차이가 있는가 하면 그 비슷함을 지니기도 한다. 가상현실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사고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난 해의 상업적 성공에 제한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요구한다. 이후의 각 내용에서 우리는 현재의 응용 분야에 스스로를 속박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미래의 보다 성숙한 응용 분야의 외양과 설계 목표를 고려할 것이다. "오래전 그리고 아득한 어떤 장소를 상상해보라..." 오락의 여러 형태는 한 가지 사실이 잘 되길 시도하는데, 이는 전혀 다른 세계로 청취자/시청자/역할자/이용자를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즉 상상의 도달 범위가 훨씬 확대된 원격재현에 빠져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공적인 소설은 당신이 단지 그 매체 내에서만 접할 수 있는 인물들의 의식과 동기를, 혹은 당신으로부터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장소들을 "전달해준다". 고대의 종교적 의식을 지닌 종족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공간은 축조된 사회심리적 공간이다. 그곳은 이용자가 그 속에 들어가 종교적 "불신을 정지시켜야만" 하는 제한된 세계이다. 혼자 아니면 타인과 함께 소설의 청중은 소설, 연극, 영화, 혹은 아케이드 게임의 "믿게끔 하는 세계"의 모사성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러한 응용 분야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종종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에 대해 언급한다. 상상력. 이는 일상의 감각 현실을, 어떠한 매체의 암시에 의해 추동된 이용자의 환상으로 대체한다. 예를 들어 소설가의 글, 동화책의 그림, 액션으로 가득찬 자동차 추적 등등. 환상 공간. 서로간에 인정하여 믿게끔 하는 공간, 즉 "교감적 환상," "오래전 그리고 아득한" 그 곳에서 소설, 게임, 혹은 오락이 일어난다. 이러한 환상 공간에 관해 언급하는 오락 용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 소설 공간, 영화 공간, 연극 공간, 경기장 등등. 이러한 것들은 오래전의 요소이다. 가상현실을 이용하는 오락은 몇 가지 점에서 부족간 전쟁과 관련하여 그 신화를 만들어내는 고대 마술사의 주술을 듣는 것과 동일하며, 혹은 고대 아테네에서 소포클레스 Sophocles의 〈오이디푸스 왕 Oedipus Rex〉이란 최초의 연극을 매우 찬 대리석으로 된 의자에 앉아 보는 것과 동일하다. 소설 공간으로의 몰입은 동일시, 역할 수행, 대립, 그리고 깊게 느끼는 격한 감동과 같은 인간 내부의 심리적 엔진을 자극한다. 가상현실 기술은 새롭지만, 그 감동이란 매우 오래 전에 연출된 것이다. 하지만 보다 오래 전의 미디어와 달리 가상현실은 일부 예술가의 꿈을 실현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는 상상의 창조물들을 보다 사실에 일치해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구절을 여기에 적어보면, 우리들 사이에 시인은 가능성이다 "상상력의" "사실주의자" 오만함과 평범함 위에 서있는, 그리고 시인은 줄 수 있다 자세히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그 안에 실제 두꺼비가 살고 있는 상상의 정원", 만약 우리가 이를 가질 수 있다면. (Moore, 1951) 드라마의 전개에서 "상상의 정원"을 생각해보라. 드라마의 서사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오락의 형식 중 하나이다. 어떻게 설계자는 가상현실에서의 멋진 이야기에 대해 감응을 일으킬 수 있는가? 혹자는 가상현실이 매우 풍부하고 상호작용적인 이야기의 가능성을 열어놓을 것이라고 느낀다. 예를 들어 로렐 (Laurel, 1991)은, 지능 컴퓨터 프로그램에 해당할 수 있는 "상호작용적 극작가"라면 이용자의 행위에 기초하여 "쉼없이" 상호작용적인 서사를 쓸지도 모른다는 점을 추론했다. 가상현실의 상호작용 능력은 이용자에게 대단한 자유의 가능성을 약속하는 듯 하다. 즉 이용자가 가상현실의 이야기 공간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 사실이 제안하는 바는, 이용자가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일 수 있으며, 어떠한 등장 인물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이야기 도중 등장 인물을 바꿀 수도 있으며, 이야기의 사건 전개를 변경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은 가상현실의 줄거리에 있어서 이용자가 단지 그 이야기를 체험하는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까운 미래에 가상현실이 이와 같은 사실을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일부 비관론적 해석자는, 인공 지능에 관한 초기 연구에서처럼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야기 전개에 관한 생각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환경을 프로그래밍하는데 있어서 그 복잡성에 대해 너무 무심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당신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감정적으로 강력한 서사에 이르는 길은 수만개가 아니라 단지 몇 개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8장에서 메이어는 가상 환경 내에서 고전적인 드라마의 서사를 수행하려는 목표에 대해 논의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가상현실의 연출가는 어떻게 가상현실 내에서 드라마의 서사를 연출해내는가? 메이어는 이야기 매체로서 가상현실의 이용이 여러 측면에서 보다 잘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어떻게 드라마 서사 형식이 작동하는가를 생각해보자. 드라마의 서사에 관한 고전 이론들은, 연극 서사의 감정적 힘과 그 효과가 등장 인물의 동기, 줄거리의 구조, 감정효과의 타이밍 등을 통제하는데 의존하는 방식에 그 초점을 둔다. 책과 영화와 같은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의 매체에서는, 이들 요소를 통제한다는 것이 더욱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야영장의 모닥불 둘레에서, 소설책 속에서, 혹은 영화에서 얘기하던지 간에, 이야기 구조, 타이밍, 감정 효과가 어떻게 미스테리 소설에 생명을 불어넣는지를 생각해 보라. 극작가 혹은 연출가는 주의깊게 독자/시청자에게 유용한 양의 정보와 그 서사 형식을 보임으로써 통제한다. 사건의 연속과 타이밍은 사건의 미결 상황을 연출하기 위하여 독자/시청자의 감정적 반응을 주의깊게 자극한다. 이용자가 만약 완전하게 그 이야기의 서사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롭다면, 가상현실에서도 그러한 효과가 연출될 수 있을까? 책이나 영화와 달리 가상현실은 비단선적인 매체이다. 그 설계자는 가상현실 세계의 모든 내용에 대해 여러 유형의 통제를 가하지만, 일련의 사건 연쇄에 대한 통제로만 제한했다. 가상현실의 서사 내에서 자유롭게 거니는 이용자는 수 천 가지 경로의 가능한 사건 연쇄를 발생시킬 수 있다. 인공 지능 (AI) 형태의 이야기꾼은 이 모든 사건 연쇄에서 적절하게 반응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 혹은 가까운 장래에 등장하는 인공 지능형의 이야기 구성 프로그램인가? (이 책에서) 메이어는 초기 인공 지능형 서사 프로그램의 출현에 있어서 그 일부 프로그램의 한계점을 논의한다. 그 프로그램이 항상 다소 반응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대체적으로는 이용자에게 극적인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가상현실의 드라마 서사를 구성하는 제작자는 어려운 균형 관계에 직면하기가 쉽다. 예컨대 이용자에게 너무도 많은 자유를 부여한다면 그 이야기의 균형있는 효과 측면에서 문제가 생긴다. 역으로 이용자가 보다 더 감정적으로 서사 체험에 이끌리게 만들기 위하여 그 구성원의 선택권을 제한한다면, 아마 당신은 가상현실의 잠재력을 평가절하하여 이용하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것이 가상현실의 서사적 모순이다. 일부에게는 인공 지능형 이야기 프로그램이란 다가올 미래에서나 있을법한 것이라 본다. 설사 훨씬 나은 프로그램을 가지고서라도, 항상 그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즉 효과적으로 드라마 내용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사건과 등장 인물을 통제할 필요가 있으며, 가상현실 이야기 내에서 "관객" 구성원이 잠재적으로 자유를 누릴 필요도 있다. 이용자가 이야기의 모든 요소를 바꾸는 것이 자유로울 땐, 그 이용자는 또한 일종의 극작가가 되는 것이다. 근본적 모순이 존재한다. 이용자와 인공 지능형 제작자 사이에는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인공 지능형 제작자가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통제함으로써, 이용자는 내용 전개와 감정 효과의 가장 효과적인 타이밍을 망칠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불만족스러운 드라마의 서사나 비서사적인 사건의 연쇄, 혹은 보다 무정형의 이야기 구조를 이끈다. 아직까지 이것은 서사 형식을 띠고 있지만, 매우 흡족스럽거나 감정적으로 만족할만한 형태는 아니다. 물론 뛰어난 가상현실 이야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미디어의 예술적 세련감을 통해서만이, 가상현실 극작가와 감독자는 가상현실 기술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이해력을 동시에 발전시킬 것이다. 감각의 관리, 변화, 증폭 구미디어의 이야기 전개에 대한 필요성과 가상현실의 이야기 구성에 대한 비슷한 필요성 사이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발전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보다 오래된 이야기 공간에 진입한다는 것은 종종 감각으로부터 수취한 정보를 가로막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조용한 장소에 앉아 글을 읽거나, 혹은 극장의 안락하고 어두운 좌석에 앉아 그 속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행위) 감각의 부정적인 현실감을 제어하는 것은 때론 상상력을 해방시켰다. "이것은 실제가 아니다" 혹은 "이는 단지 이야기일 뿐이다"라는 문구는 관객 구성원을 둘러싼 물리적 현실과 이와 겨루는 가상 이야기의 공간 현실 사이에 놓인 심리적 줄다리기를 드러낸다. 환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에서는, 참여 구성원은 물리적 현실을 무시하게 되고 스스로 그 이야기 공간에다 객체화한다. 코울러리지 (Coleridge, 1817)의 말로 표현하자면, "그 순간만은 불신감을 기꺼이 거두고, 시적인 믿음을 만들어낸다." (p. 87). 물리적 현실로부터 생기는 감각의 영향을 막는 행위는 가장 강제적인 가상현실 체험의 중요한 일부이다. 감각은 가상세계에 몰입한다. 따라서 신체는 리얼리티 엔진에 맡겨진다. 두 눈은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로 덮힌다. 따라서 실제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두 귀는 헤드폰을 쓴다. 따라서 사방을 둘러싼 음향이 뒤덮는다. 양손은 "단지 가상 신체를 접촉하는" 글러브나 받침대 prop로 덮힌다. 가상현실은 구석진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으면서도 공통의 요소를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모든 방향으로 뻗쳐있고, 독자의 감각을 에워싼다. 즉 독자는 책 이야기에 빨려들어간다. 고대의 이야기 공간은 감각을 무시하는 대신에 이를 변화 혹은 증폭하곤 했다. 이는 상상력의 환상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주술적 이야기로부터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까지 그 다양한 형태의 오락은 마약 혹은 술의 소비, 힘이 넘치는 춤 혹은 노래의 의식, 거대한 환호와 빛의 작열을 포함한다. 이를 통해 이용자는 신화, 이야기, 혹은 당신이 갖는 어떠한 형태이건간에 보다 수월하게 환상의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일종의 "마술"의 뿌리 혹은 버섯을 가지고서, 이용자는 신들과 "친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몇 가지 점에서 가상현실은 이 동일한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받고 있다. 가상현실 체험을 화학적이고 기술적으로 확대하려는 수사적 표현은 《몬도 2000》Mondo 2000과 같이 사이버공간을 지향하는 잡지류의 내용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우연한 사례가 아니다. 1960년대 환각제의 일종인 LSD의 주술사, 티모시 리어리 Timothy Leary는, 가상현실 내부에서 그가 과거의 화학 작용에 의한 "미디어"에서 발견했던 일종의 신화형성의 힘을 보았다. (Wooley, 1992 참조). 그가 여타 수단들에 의해 추구했던 체험을 대신하여 가상현실 기술의 가능성에 경외감을 느낀, 그는 초기의 가상현실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공표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 회의는 인류에 의해 열렸던 모임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Wooley, 1992에서 인용). 과학적 발견, 예술가적 통찰, 그리고 종교적 현현은 세계에 대해 우리 감각 관계를 재배치하므로써 발생한다. 가상현실 과학자는 종종 감각 재배치나 지능 증대의 기술에 관해 언급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떠돌이", 티모시 리어리가 그 기술을 환영했던 그 당시를 몹시 혐오한다. 리어리의 자기 중심적인 "기분 전환"을 강하게 기각하고자 할 때, 우리는 정신 기능을 변화시키고자 화학적이고 기계적인 인공물을 이용하는 과거 인간의 전통과 연결된 심층을 놓칠 수 있다. 가상현실 개척자인 쟈론 라니어는 가상현실 체험과 관련한 숨겨진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 체험이 일어나는 곳에서 VPL사의 엔지니어들은 신체 운동과 감각 피드백간의 연관성을 재조직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예술적 효과를 탐구하면서 각 신체의 부위들은 가상현실 내에서 지각 효과를 위해서 각기 다른 비율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신체 운동은 비신체적 활동과 연결되었다. 그는 "동료의 입 안에서 기어가는" 것과 같은 가상현실 안에서나 유용한 비정상적인 감각 체험의 가능성까지도 논의했다. (Lanier & Biocca,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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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하비, 범지구화란 문제설정

David Harvey, 1995 (Winter), "Globalization in Question," Rethinking Marxism(Vol.8, No.4), AESA. 범지구화란 문제설정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이광석 옮김, "범지구화의 문제설정", {공간과 사회}(1999, 12호) '범지구화'(globalization)는 우리가 지난 20여년 간에 걸쳐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사고를 형성하는데 핵심적 단어로 자리잡았다. '범지구화'가 우리들 한가운데로 들어온 이유와 그 이동의 방식은 꽤 흥미로운 주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이같은 사고 방식이 출현하는 것과 관련한 그 이론적, 정치적인 함의에 초점을 두고 있다. 나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두 개의 일반적인 논제로 시작하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다수의 사회주의 운동을 포괄하여 서구의 논의틀 내에서 어떤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을 (설령 그것이 현실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조하기 위함이다. (1) 최근 들어 '범지구화'란 말이 왜 스물스물 우리의 논의 속으로 끼어들고 있는가? 누가 그리고 왜 이 용어를 쓰고 있는가?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수많은 '진보주의자'와 '좌파' 사이에서조차, '제국주의', '식민주의', '신식민주의'와 같은 용어를 후미진 곳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사고를 조직화하고 정치적 가능성을 계획하는 방도로서 '범지구화'를 앉힌다는 사실이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가? (2) 범지구화의 개념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가? 이런 식의 용어가 일부 국가, 지역, 지방에 근거한 노동계급 운동의 무기력을 실토하는 신호인가? 범지구화에 대한 믿음이란 것이 지방은 물론이고 일국의 정치적 행동조차도 막아내는 강력한 방해 요인이었나? 국제화된 자본주의하에서 지방의 그리고 일국의 노동계급 운동은 거대한 악마와 같은 글로벌 기계의 하찮은 작은 톱니바퀴 신세이므로, 이제 어디서든 스스로의 정치적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여지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가? 이상에서 범지구화라는 용어 그리고 이와 관련된 내용은 심각한 정치적 대가를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적으로 이 용어를 거부하거나 혹은 포기하기 전에, 우리에게는 그 용어가 사용된 짧은 내력을 통해서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과 그 용어와 결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제대로 천착하는 시각이 유익하다.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시작할 것이다. 즉 '범지구화'를 최근에 출현한 정치·경제적 조건이기 보다는 과정(process)으로 파악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곧 그 과정이 영구적이란 점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한편 그 과정이, 예컨대 아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거나 혹은 그 과정 자체가 특수하거나 "최종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과정에 기반한 정의를 통해서 어떻게 범지구화가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 보다 집중할 수 있다. 1492년 이후에, 그리고 그 이전에도 자본주의의 범지구화 과정은 확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행 과정은 결코 중단됨이 없이, 자본주의 동학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범지구화가 시작된 이래로 그 진행 과정은 자본주의 발전의 필수적 요소였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본의 축적은 항상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문제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지리적 팽창의 고유한 가능성, 공간의 재조직화, 불균등 지리적 발전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벌써 오래 전에 정치경제적인 체제로서의 기능을 중단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 가운데서 이른바 '공간적 조정'(a spatial fix)이라 불렀던 이 영속적인 전환은 일종의 범지구적 자본 축적의 역사적 지형을 만들어냈는데, 이 지형의 특성은 잘 숙지할 필요가 있다.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점을 강조한다. 그들이 적은 바처럼 현대의 산업은 단지 세계 시장을 창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시장을 확대하려는 욕구 또한 "부르주아지를 전 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하여야 하고, 도처에서 연계를 맺어야 한다." 이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세계 시장의 개발을 통해서 모든 나라들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중략) 오래된 민족적 공업은 파멸되었고, 또 나날히 파멸되어 가고 있다. 이 공업들은, 그 도입이 모든 문명국가의 사활 문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공업에 의해, 즉 더 이상 현지 원료를 가공하지 않고 아주 멀리 떨어진 지방의 원료를 가공하는, 그리고 그 제품이 자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대륙에서 동시에 소비되는 공업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국산품에 의해 충족되었던 낡은 욕구 대신에 새로운 욕구가 등장하는데, 이 새로운 욕구는 그 충족을 위하여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 및 풍토의 생산물을 요구한다. 낡은 지반적 및 민족적 자급자족과 고립 대신에 민족들 상호간의 전면적 교류와 전면적 의존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물질적 생산에서나 정신적 생산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개별 민족들의 정신적 창작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적 일면성과 제한성은 더욱 더 불가능하게 되고, 수많은 민족적이고 지방적인 문학으로부터 단일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1952, 72) 만약 이것이 범지구화에 대한 무리한 표현이 아니라면, 장차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짐작하는데는 냉혹함만이 기다린다. 물론 이러한 분석을 거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범지구적 정언명령으로써 반자본주의적이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을 위한 필수 조건, 즉 "만국의 노동자들의 단결"을 정확하게 이끌어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후로 자본주의가 어떻게 지형을 구조화하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들이 이루어졌다.(예컨대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 룩셈부르크의 자본 축적의 구제 형태로서 제국주의의 적소화(positioning), 계급투쟁에 관한 마오의 주요 모순과 부차적 모순에 대한 묘사.) 결과적으로 이들 해석은 더욱 종합적인 설명 방식으로 보완되었는데, 세계적 규모의 축적(아민S. Amin),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생산(왈러스틴I. Wallerstein), 저발전의 발전(프랭크와 로드니A. Frank and W. Rodney), 부등가 교환(엠마뉴엘A. Emmanuel), 종속이론(카르도소F. Cardoso)이 이에 해당한다. 마르크스의 이념과 정치적 실천이 (계급 투쟁의 범지구화 과정과 같은 방향으로) 전지구에 걸쳐 퍼져나간 것과 동일하게,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침략, 파괴, 의도에 저항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방적/민족적인 해석들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다지 가시적이지 않지만 일군의 광범위한 사상가들과 실천가들은, (생산제력과 사회관계의 양자의 측면에서) 자본주의적 공간내 불균등 지리적 발전 과정의 일부로 기능하는 도시화의 역할과 지방적/지역적 차이들, 그리고 반자본주의 투쟁의 불균등 지리적이고 불균등 사회적인 형태들에 보다 주의를 기울였다. 전술적으로 그 효과는, 계급 투쟁의 토양이 꽤 장소 특수적이란 점과, 사회주의가 바라는 보편주의란 서로 차이를 지닌 장소 특수적인 요구, 관심, 열망 모두의 적절한 결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는 점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R. Williams, 1989, 242)가 제안한 바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정치적 토양은 항상 장소 특유의 '정서 구조'(structures of feeling)와 '삶의 방식'(ways of life)에 아로새겨진 이른바 '전투적 당파성'(militant particularism)에 근거한다. 그는 다음 첫 번째 예문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상술하고 있다. 노동계급 자신들의 유일하며 특수한 조직적 특성은... 보편적 투쟁에다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당파적 투쟁을 연결한다. 일종의 운동 형태로 볼 때, 철저하게 함께 모인(properly brought together) 당파적 이익의 방어와 향상이 사실상 보편적 이익이라는 특수한 주장이 현실화하게 되었다.(1989, 249; 하비의 강조)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길 꺼릴 수도 있는, 보다 폭넓은 함의는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의 새로운 이론은 이제 그 중심에 장소(place)를 포함시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을 유산 계급으로부터 차별화하는 요인, 즉 그들이 어떠한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관해 상기하라. 그렇지만 장소는, 국제 경제의 폭발과 과거 공동체에 대한 파괴적인 탈산업화 효과로 인해 ― 아마도 자본 소유계급보다는 오히려 노동계급을 ― 서로 묶는 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요소임이 입증되고 있다. 자본이 계속해서 이동할 때, 장소의 중요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242) 본인의 의도는 자본주의 발전과 계급 투쟁의 공간적, 지리적 측면을 다루었던 광대한 문헌 모두를 논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러한 작업이 실행 가능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본 축적과 계급 투쟁의 지리적 역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마르크스 전통 내부의 일련의 긴장, 그리고 종종은 불유쾌한 타협에 관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레닌과 룩셈부르크가 민족 문제로 충돌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국내(혹은 심지어 한 도시내) 사회주의의 가능성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 중 제 2인터내셔널이 민족주의와 타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코민테른 스스로가 국제주의를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 동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계급 투쟁의 지형학과 자본 축적의 지리적 동학을 이해하는데, 결코 정확하거나 만족스럽게 진전시켜 나가지 못했다. [공산당 선언]의 내용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 딜레마의 핵심적인 근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선언]의 인용구에 따르면 부르조와지의 계급 지배에 대한 탐색이 매우 지리적 사안이란 점이 분명한 반면에, 놀랍게도 거의 그 내용에서는 순전히 시간적이고 통시적인 설명만으로 그 즉시 전도되기 때문이다. 시간은 "공간이 용인하고 대등해지는 지점을 배제하고 복속시키므로, 시간이 변증론자의 특권적 범주"(Ross 1988, xxx)라고 생각했던 포이에르바하를 따르는 수많은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자를 제외한다면, 공간에 대해 변증법적이지 못했던 듯 싶다. 본인이 주목하건대, '역사적 유물론'이란 용어조차도 지리적 중요성을 삭제하고 있으며, 그리고 내가 지난 수년간을 싸워서 '역사-지리적 유물론'의 개념을 고취시켰다면, 그것은 우리가 후자의 개념으로 이동하는 것이 범지구화와 불균등 지리적 발전 과정의 계급적 중요성에 대해 보다 유연하게, 그리고 희망컨대 보다 적절하게 볼 수 있도록 준비하자는데 있었다. 그리고 최근 내 저술(Harvey, 1996)을 통해 공시성(spatiotemporality)의 변증법에 관해 분투하고 있는데, (그리고 본인은 이 합성어가 그 자체로 보아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는 우리가 정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해석 내부에 근본적인 이중의 긴장 상황을 풀지 못한다면 한결 나은 이해 방식이 필요할거라 보기 때문이다. 그 긴장 상황이란 (이제 역사의 종말을 표명하는 부르주아지의 목적론적 계급 신봉주의에 의해 거의 부정되는) 계급 신봉주의의 목적론적 시간성으로, 혹은 겉보기에 뿔뿔이 흩어지고 통제 불능 상태인 계급의 지리적 분열로 종종 퇴보하는 것과 자본주의 세계 모두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투쟁의 또 다른 형식들로 가는 것, 그 두 가지를 일컫는다.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도, 통시적 계급 투쟁의 해석은 대개 주요 관심사가 그 해석이 기반하는 지리적 분할 영역들의 정당한 평가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영토적으로 경계를 확정짓는다. 그래서 우리는 영국, 웨일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카탈로니아, 남아프리카, 남한 등에서의 노동자계급 형성이란 수많은 설명을 접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이들 국가를 자연적인 지리적 실체로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어떤 둘러싸여진 공간 내에서의 계급 발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좀 더 가까이에서 관찰해보면, 그 공간이란 그 자신의 특성을 지닌 수많은 작은 공간으로 구성된, 자본, 노동, 정보 등의 국제적 흐름의 공간내에 위치한다는 점이 분명하다. 예컨대, 우리가 에드워드 톰슨(E. Thompson)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의 고전적 해석에서 묘사된 내용을 잘 관찰해보면, 이는 종종 공간에 느슨하게 결합된 일련의 고도로 지역화된 사실들이 존재함을 입증하고 있다. 포스터(J. Foster)가 {산업혁명 시대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 in the Industrial Revolution)}이라는 자신의 저술에서 다소 기계적으로 그 차이들을 과대하게 묘사했는지 모르겠으나, 본인 생각에는 영국의 올덤(Oldham), 노르탬턴(Northampton), 사우스 쉴즈(South Shields) 지역(프랑스의 콜마르 Colmar, 렐 Lille, 산타티엔느 St. Etienne 지역, 혹은 미국의 미네아폴리스 Minneapolis, 모벨 Mobile, 로얼 Lowell 지역을 참조하라.)의 계급 구조, 계급 의식, 계급 정치가, 대개 인정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는 국민국가 내부에서 지리적 차이를 형성하면서, 꽤 다르게 구성되고 구조화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적인' 지리적 실체에 가정한 무비판적인 사고 방식은, 마치 지금 자본주의의 범지구적 공간 경제 내부에서 서로 경쟁을 하는 모든 국가들, 즉 독일, 영국, 일본, 미국, 스웨덴, 싱가포르, 브라질 등의 서로 다른 버전들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때로는 이탈리아, 브라질, 영국... 내부의 남과 북처럼 보다 지역화된 형태로 나누어진) 것처럼 여기게끔 하는데, 이는 자본의 (특히 '조절이론'에 자극받은 부류들인) 네오마르크스주의적 해석에서 영속화 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전통 내부에는 분명한 긴장선이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적 발전을 순전히 시간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비공간적이고 지리적으로 무차별적인 해석(우리가 아직은 비록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버전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의 주된 이론적 경향)이 존재한다. 계급투쟁은 일차적으로 다른 계급에 의한 한 계급의 착취의 문제로 제시되며, 그리고 역사는 그 투쟁의 산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에서는, (종종 레닌이 노동조합적 의식의 한계성으로 비난했던 것에 의해 특징화되는 노동 계급을 포함한) 하나의 계급동맹이 (아마도 대리인으로서의 매판 부르주아지와 함께) 여타 다른 장소들의 계급동맹을 착취하기 위하여 어떤 장소들에 형성하는 것에 관한 지리적 해석이 존재한다. 다른 계급에 의한 어떤 계급의 착취와 동등하게 다른 장소에 의한 어떤 장소의 착취를 관찰하는 태도의 이론적 정당성은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공간 해방의 투쟁(예컨대 민족 해방의 투쟁)에 대한 가정은 계급 투쟁의 의미에서 진보적이지만, 그 역의 논리로 아주 찬찬히 살펴보면, 이는 동등한 자격으로 맞설 수 없다. 사실상 후자의 논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투쟁의 수많은 여러 사례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혼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인이 생각하기로는 현재 '범지구화'란 용어의 적용이 의미하는 것들 중 하나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지리적 재조직화라고 본다. 동시에 범지구화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궤도가 진행하는 '자연적인'(natural) 지리적 단위들에 대한 (만약 그 가정들이 이전에 존재했다면) 수많은 그 가정들을 점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지형이라는 건드리기 어려운 것을 움켜잡기 위한, 그리고 자본 축적과 계급 투쟁의 역학 내부의 본질적 계기로써(그리고 그 역학에 의해 파생적으로 구성되는 어떤 것에 대응하는 형태로써) 공간의 생산을 바라보기 위한 역사적 기회에 직면해 있다. 이는 불명료한 힘을 통해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정치 양자의 논리를 지배해왔던 (그리고 자주 혼동케했던) 감춰진 공간성의 속박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기회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계급 투쟁과 장소간 투쟁 서로를 혼동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그 투쟁의 지리적 분할과 지리적 법칙을 통해서 계급 투쟁을 억압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힘에 맞서도록 한다. 게다가 우리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공간·시간적 모순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보다 나은 입장에 서서 가장 약한 고리를 유리하게 이용함으로써, '창조적'이라 하나 폭력적 파괴를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실로 소름끼치는 경향을 분쇄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론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 모두에서 이와 같은 문제 의식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변화하는 공간성과 재영토화의 이론적 함의를 수용하는 여러 연구물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들뢰즈와 가따리(G. Deleuze and F. Guattari)의 {앙띠 오이디푸스(Anti-Oedipus)}의 경우,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영토화와 재영토화가 진행 중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많은 해석들에서 보여주는 바처럼, 이들 논의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사고의 재공간화라는 효력이 (이론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 모두에서) 마르크스적 정식과 부분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확실하게 단절하는 대가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필연적으로 중심 명제를 폐기하지 않으면서 마르크스 이론과 실천에 공간성을 통합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설사 그 통합의 과정에서 이론과 실천 양자에서 일종의 부분적인 수정이 제기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런 주장에 기반하여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요약해볼 수 있다. 나는 우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명제들로 시작해볼까 한다. 거기에는 자본의 순환 과정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 내부에 깊이 새겨진 이중의 긴장이 존재한다. 이 긴장은 역사-지리적 모순의 강력한 계기들로써, 주기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폭발한다. 첫째, 자본주의는 회전 시간을 가속화하기 위한, 자본 순환의 속도를 증가시키기 위한, 그리고 결과적으로 발전의 시간대를 혁명화하기 위한 추진을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예컨대 생산, 소비, 교환, 커뮤니케이션 등을 위한 정교하고 안정된 기반 하부구조뿐만 아니라 건조환경과 같은) 장기투자를 통해서만이 달성될 수 있다. 게다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주요 전략은 (예컨대 경기 침체 시기에 국가가 시행하는 그 유명한 '공공 사업'과 같은) 장기 프로젝트에서 과잉축적된 자본을 흡수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본의 회전 시간을 단축시킨다. 결과적으로 일련의 특이한 모순들이 존재하는데, 그 모순은 서로 다른 자본들이 기능하는 시간대라는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어떠한 예외도 없이, 이러한 긴장 상황은 일차적으로 (회전율이 현재는 거의 즉각적인) 화폐와 금융자본을 한편으로, 그리고 상업, 제조, 농업, 정보, 건설, 서비스, 국가 자본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이 양자의 모순관계를 통해서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모순 관계는 (예를 들면, 통화와 증권 시장간에, 혹은 토지 경작인과 투기꾼간의) 분파들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서로 다른 시간대와 리듬으로 전개되는 자본의 동학들을 조정하기 위한 모든 종류의 기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아주 강력한 금융 부문의 시간대를 최근에 붕괴함으로써 창출된 회전 시간과 시간성의 불균등 발전은 자본주의 국가에 깊게 각인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본의 다른 분파들에게 긴장을 크게 야기하는 환영받지 못할 시간의 압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월스트리트가 창출한 시간대를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재생산 체계의 시간성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적응시킬 수 없다. 그리고 금융 시장이 창출한 빠른 회전 시간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고용조건과, 그들의 숙련도 등), 그리고 사회적·생태학적 재생산의 생활세계에도 더욱 심대한 긴장을 조성한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다. 둘째,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적고있는 바와 같이 "시간을 통해 공간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모든 공간적 장벽을 제거하려고 추진 중이지만, 이는 오로지 고정된 공간의 생산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차후에 축적을 원활하게 만드는 지리적 조망을 단지 파괴하거나 재구축하면서, 역사의 특정 시기에 그 자신의 축적의 동학에 적합한 (공간 관계의, 영토적 조직의, '범지구적' 노동 분업과 연계된 장소 체계의, 그리고 기능의) 지리적 조망을 생산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여러 특징적 측면들이 존재한다. 1) 공간 이동의 비용과 시간 감소는 지속적으로 기술혁신의 초점이 되어 왔다. 유료 고속도로, 운하, 철도, 전기력, 자동차, 항공과 제트 수송은 원거리 마찰의 속박으로부터 상품과 사람의 이동을 점차 자유롭게 하였다. 이와 동일한 방향에서 우편 체계, 전신, 라디오, 텔레커뮤니케이션, 월드 와이드 웹(WWW)의 혁신은 이제 정보 이전비용을 거의 제로에 육박하게 만들었다. 2) 이와 같은 움직임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생산, 교환, 분배, 소비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고정된 물리적 기반 하부구조의 구축은 지리적 경관에 대해 꽤 차별적인 힘을 발휘한다. 점점 자본주의적 성장 궤도를 가로막는 지리적으로 조직화된 자원구조와 '제 2의 자연'(second nature)을 만들어내는, 토지에 고정화된 자본, 즉 토지자본 형태로 진행하면서, 더욱더 자본은 공간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하룻밤 사이에 도쿄-요꼬하마, 또는 뉴욕시의 도시 기반 하부구조를 얼마간 해체하려는 생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새로 세우려는 생각은 바보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이러한 하부구조 구축의 효과는 자본주의의 지리적 경관을 더욱 더 시간에 의한 병리적 경화(硬化) 상태로 몰아감으로써, 점증하는 이동의 자유와 주요 모순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 경향은 특정 장소의 건물들이 강하게 접합되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장소 충실성(과 장소 특유의 성질)이 정치 행위의 중대한 요인이 되는 정도에 따라 더욱 두드러진다. 3) 세 번째 요소는 영토 조직의 구축이며, 이는 (이것이 유일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우선적으로 주권 영토적 (그리고 가끔은 부가영토적) 의지에 따라 동의와 폭력의 수단을 독점화하고 화폐, 법, 정치를 조절하는 국가 권력의 구축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국가에 대한 수많은 마르크스 이론들이 있는데, 그 이론들 가운데 대부분은 마치 가봉과 라이베리아와 같은 국가들을 미국 또는 독일과 동등한 것처럼 다룸으로써, 그리고 세계의 대부분 민족적 경계들이 1870년과 1925년 사이에 만들어졌음을 (그리고 이 국가들 경계의 절반 정도가 단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그어졌음을) 깨닫는데 실패함으로써, 역사와 지리로부터 해로울 정도의 추상화로 빠져들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1945년 이후가 되서야 독립이 되었고, 그 대다수 국가들은 그 이후로 줄곧 국가를 찾기 위한 작업을 계속적으로 벌여왔다. (하지만 이는 최근 나이지리아나 르완다에서 만큼이나 역사적으로 45년 이후의 프랑스와 멕시코에서 국가를 찾기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각 국가들이 타국가의 자율과 영토 보전을 인정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독립 주권국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공존할 수 있는 당위적 원칙을 세운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 원칙에 따르는 자본주의 세계의 영토 조직을 범지구화하는 과정까지 가는데는 (상당한 폭력을 수반하면서) 수 세기가 걸렸다. 현재 몇몇 논평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실제로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가적 조직체들과 국민국가 내부의 지역 자치운동들이 스스로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 만큼이나, 그 체계를 낳는 범지구화 과정들은 쉽게 주권국의 원칙들을 해소시킬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범지구화/영토화의 불안정한 과정들을 통해 국가 형성과 해소의 과정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지형에 대한 지속적 작업속에서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의 과정을 보게 된다. (이는 들뢰즈와 가따리가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지적했던 근본적 요점들 중의 하나였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영토화와 관련한 개념들에 무게를 실어준다면, 불균등 시간적·지리적 발전의 생산과정으로서 범지구화에 대해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영토화의 관련 개념들로 가는 것이, 범지구화란 전능한 과정의 더욱 억압적이고 제한적인 언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면서, 다소 유익한 정치적 결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본인은 이를 염두에 두면서, '범지구화'란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왜 그 용어가 새로운 유혹의 역할을 담당하는지, 왜 그 용어가 최근에 그리 중요하게 취급되는가의 문제로 되돌아 갈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중요하고 두드러진 이동이 존재한다. 1) 금융 자유화는 1970년대 초 미국에서 그 당시 내부적으로 일고 있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강제화된 반응으로써, 그리고 (대개 유럽달러 시장의 제어하기 어려운 성장으로 말미암은) 국제 무역과 교환에 대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에 따른 강제화된 반응으로써 시작되었다. 내가 볼 때, 금융 탈규제의 물결이 자본에 의해 고안된 의도성이 짙은 전략적 사고라기 보다는, (비록 일부 자본 분파가 다른 자본에 비해 더욱 특혜적 입장에 서있는지는 몰라도) 현실이 주는 특권이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브레튼우즈는 범지구적 체제였으며, 정말로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하에서 일어난 사실은 (위계적으로 조직되고, 대개 미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통제되는) 범지구적 체제로부터 자본주의의 금융 조건들을 훨씬 변덕스럽게 그리고 훨씬 불안정하게 만드는, 시장을 통해 더욱 분산되고 공동의 조정이 가능한 또 다른 범지구적 체계로의 이동이었다. 이러한 이동을 동반했던 수사는 미덕으로서의 '범지구화'란 용어의 선전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 더 냉소적으로 보자면, '범지구화'가 국제 금융체제에서 필사적으로 필요한 조정을 하기 위한 새로운 선전의 고안물이었다면, (내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이 용어를 어떤 새로운 것이라고 사기쳐 믿도록 한 것이 다름아닌 금융 압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현재의 금융 압박이 금융시장들(분명한 권력 블록으로 존재하는 일본 공영 영역, 나프타, 유럽연합)에서 진행중인 지역화를 더욱 강조하게 만든다는 점이며, 그리고 자본주의의 압박 시기에 범지구화의 지지자들조차도 범지구화에 대항한 "반발"(backlash)이 (대개는 다양한 인민민족주의의 형태로)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범지구화는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와 동일하게 될 위험에 처해있다고 경고한다.(Friedman 1996, A 19) 2)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른바 정보혁명은 전적으로 새로운 요구와 수요에 대한 개념 변화와 함께 생산과 소비 조직의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최종적인 '공간의 탈물질화'는 군사적 장치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나, 그 즉시 다국적 자본과 금융기관에 의해 점유됨으로써 즉각적으로 공간에 걸쳐 그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 효과는 이른바 탈물질화된 사이버공간을 형성하는데, 그 공간 내에서는 일종의 중요한 거래(일차적으로 금융거래과 투기거래)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텔레비전에서 생중계되는 혁명과 전쟁을 시청하게 되었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공간과 시간은 미디어 권력의 독점화가 (인터넷의 경유를 통한 자유주의적 민주화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문제시되고 있는 세계에서 내파(內破)하고 있다. '정보혁명'의 이념은 최근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으며, 정보사회가 최고의 자리로 군림하면서 범지구화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여명으로 간주되곤 한다. 이것은 너무도 많은 것을 수월하게 이루도록 도왔다. 그 새로움 모두가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만, 철도와 전신, 자동차, 라디오, 전화가 태동했던 시기에 있어서도 그 새로움의 인상은 동일했다. 이 초창기의 기술적 사례들은 교훈적인데, 그 이유는 이들 각각이 그 나름대로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 생산과 소비가 조직되고 정치가 실행되는 방식, 그리고 사람들간의 사회 관계가 광범위한 규모의 사물들간의 사회 관계로 전환되는 방식 등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정보 기술에 반응하여 작업장에서의, 문화 형식들 내에서의 노동과 생활간의 관계가 매우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미국내 우익의 정치적 안건에 핵심적 구성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뉴트 깅그리치(앨빈 토플러가 그의 자문을 맡고 있으며, 토플러의 우익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는 전적으로 '제 3 물결'의 정보혁명 이념에 의존한다.)는, 새로운 기술이 고유의 해방적 속성을 지녔지만, 정치적 속박으로부터 이 해방력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제 2 물결'의 산업 사회의 모든 제도들― 정부 규제, 복지 국가, 임금 단체 교섭의 관행 등등 ―을 해체시키는 일종의 정치적 혁명을 추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얘기한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생산제력의 변화가 사회 관계와 역사를 추동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통속화한 형태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아마도 마가렛 섀처의 "어떠한 대안도 없다"라는 그 유명한 선언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이 우익적 수사의 강한 목적론적인 논조 또한 무시해서는 안된다. 3) 또한 주기적으로 자본주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그 각각의 상품과 사람의 이동 비용과 시간은 단계적으로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생산, 소비, 인구 등의 입지들을 보다 빠르게 조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전의 공간적 속박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활동들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범지구화 과정의 역사가 기록될 때,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이 단순한 이동이 이른바 정보혁명 그 자체(per se)보다 (실제로 둘 다 중요하지만) 훨씬 중요하게 간주될 것이다. 범지구화 과정에서의 세 가지 이동축은 여러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수반했는데, 아마도 이는 일차적으로 노동 인력에서 파생된 것에서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다. 1) 상품과 정보 이동을 축소된 비용으로 풍부히 이용할 수 있도록 (수많은 소규모의 기업들 또한 새로운 기회를 잡았으나, 특히 다국적 자본의) 생산과 조직 형태들이 전환되었다. 1960년대에 시작한 현지 법인생산(offshore production)이 갑자기 더 한층 일반화되었다. (일본의 경우 최근 현지 법인에 의한 생산이 더욱 강하게 확산되고 있다.) 종종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합병, 인수, 혹은 합작 생산협정을 통해 기업의 집중력이 증가하는 도중에도, 생산 체계, 노동 분업, 과업의 전문화란 형태로 지리적 분산과 파편화가 계속되었다. 더더욱 기업의 변덕스러움에 개별 공간들이 취약해지면서, 기업은 공간을 통제하는데 훨씬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범지구적 텔레비전, 범지구적 자동차는 정치·경제적 삶의 일상적 측면으로 자리잡았다. 어떤 장소에서의 생산 중지와 어떤 다른 장소에서의 조업 개시는 친숙한 얘깃거리가 되었다. ― 지난 20년 동안 꽤 대규모의 생산 공정들의 이동이 과거에 비해 네 배 혹은 다섯 배로 증가했다. 2) 전세계의 임금 노동은 채 20년도 못되어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급속한 인구 성장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나, 점점 더 전세계의 인구 중, 예컨대 구소비에트 연방, 중국과 함께 남한, 대만, 아프리카에서의 임금 노동력(특히 여성)이 유입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범지구적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사회주의자의 눈에 희망이라는 강한 섬광을 확고하게 심어야만 했던) 이전 그 어느 때 보다 훨씬 거대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이 계급은 극도로 여성화되고 있다. 또한 이 계급은 지리적으로 분산되어 있으며,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연유로 단일화된 운동으로 조직화하기가 훨씬 어렵다. 3) 인구이동 또한 범지구적 규모로 진행 중에 있다. 미국은 1920년대 이후로 현재 자국의 외국인 출신 비율이 최고치에 이르렀으며, 외부의 인구를 억제하려는 모든 종류의 시도가 이루어진 반면 이민 인구의 엄청난 유입을 막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국가간 경계는 사람과 노동 보다 자본에 있어서 더 허술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경계는 전반적으로 허술한 편이다. 런던, 파리, 로마는 이전 보다 훨씬 더 이민 도시화되고 있으며,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어떤 때보다 이민 유입이 (노동 운동권을 포함하여) 전세계의 핵심적인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심지어 도쿄에서조차도 이와 같은 과정에 있다.) 또한 인구이동이란 동일한 표상을 통해서 보자면, 이것에 의해 야기된 중요한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에 직면하여 사회주의 운동이 노동을 조직화하는데 쉽게 해결책을 찾기가 어려운 특수한 문제점들을 종종 드러내고 있다. 4) 도시화는, 특히 1950년 이후 전세계 인구의 공간 조직 측면에서 중대한 환경적,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혁명의 창출을 가속화한 도시화의 국면과 함께, 점차 초도시화(hyperurbanization)로 옮겨가고 있다.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이 전세계적으로 30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났으며,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상상도 못할 것으로 여겼던 엄청난 규모의 인구 집중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1870년대에 맨체스터나 시카고에서 계급 투쟁을 조직한다는 것은, 2천만 이상 내지는 이에 근접하는 인구를 지닌 현대의 상 파울로, 카이로, 라고스, 샹하이, 봄베이 등의 도시에서 계급 투쟁을 조직하는 것과는 (혹은 대의 민주주의제도를 발전시키는 것과는) 꽤 다른 문제였다. 5) 단지 냉전의 종결로 인해서 전세계의 영토화가 변화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아마도 국가의 변화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했는데, 국가는 자본(특히 금융과 화폐자본)의 이동성을 통제하기 위한 전통적 권력을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상실했다. 그 결과 국가 운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폐자본과 금융에 의해 더욱 강도높게 제약을 받았다. 구조조정과 재정긴축이 국가가 벌이는 게임의 상징이 되었고, 다소 유리한 기업 풍토를 증진하기 위한 방도들을 추구하는 역할로 국가의 지위가 격하되었다. 현재 일본에서조차도 본국의 기지로부터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비교적 값싼 여러 노동지역으로 생산공정들을 신속하게 이동시키는데 분주하다. 여기에서 '범지구화 테제'는 사회주의자들, 복지국가론자들, 민족주의자들 등을 때려눕히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수단이 되었다. 강제로 긴축정책을 수행하려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영국 노동당이 굴복당했을 때, 이는 재정 정책에 대한 민족적 자율성에 제한이 가해진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981년 이후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상황에 처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빈자를 위한 복지는 대개가 자본에게 넘겨주는 공공 보조금으로 대체되었다. (최근 메르세데스-벤츠는 자신의 자사를 유치하기 위해 설득 작업에 나선 알라바마주로부터 2억 5천만 달러의 일괄 보조금을 지급받았다.) 재영토화는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경제, 환경, 정치의 범지구적인 관리제도들(나프타와 유럽 연합 등)은 지역 블록들과 동일하게 민족을 초월하는 규모로 증식하고 있으며, 동시에 강력한 분산화 과정이 (때로는 지역 자치를 위한 ― 일부는 극단적으로 분리주의적인 ― 정치 운동을 통해서, 혹은 미국에서처럼 연방체계 내부에서 각 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현재 국가 조직은 시·공간 압축과 범지구적 상품화에 직면하여 인종적, 문화적 정체성과 환경적 특성을 방어하기 위한 핵심적 수단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국가는 범지구화에 대항하여 인민민족주의에 호소하는 '반발'의 근원적 장소로 간주된다. 6) 개별 국가들이 자신의 권력 일부를 상실한 반면, 내가 명명한 지정학적 민주화(geopolitical democratization)란 점에 있어서는 새로운 기회를 창출했다. 핵심부 권력이 여타 권력들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주변부 권력들 스스로가 자본주의의 경쟁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 보다 수월해지고 있다. 화폐 권력은 "평등주의적이고 냉소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바로 그 때 강고한 모순이 야기된다. 즉 질적으로 "화폐는 그 효력에 있어서 어떠한 한계도 없는" 반면에, 개인 (그리고 국가)의 수중에서 화폐의 양적인 한계는 이 둘(개인과 국가)의 사회적 권력을 중대한 방식으로 제한하거나 증대시킨다. 예컨대 금융의 탈규제가 주어진 상황에서, 일본이 주요 금융 권력으로서의 영향력 행사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별 국가들은 더욱 더 자국의 경쟁력(범지구화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된 하위주제)에 관심을 가져야했다. 경쟁적 국가들만이 범지구적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 ― 그리고 대개 이는 강한 노동 규율을 가진 저임금 국가들이 여타 국가들보다 우위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노동 통제는 범지구화를 옹호하는 진영에서 사회주의적 주장을 수세로 밀어넣는데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현안이 되고 있다. 기업주의적 원칙하에 조직된 권위주의적이고,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 싱가포르, 홍콩, 대만과 같은 ― 영토들은, (현 자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명명한다면) '자유시장의 스탈린주의'(free-market stalinism)가 자본주의적 범지구화 과정에서 더욱 더 규범이 되어가는 시대에 상대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 경향들에 관해서 두 가지의 폭넓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현재 진행중인 양적인 변화 과정을 인정하더라도, 우리가 진짜 논의해야만 할 사안은 이 양적 변화 과정이 (우리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이론적 개념들과 정치적 장치들에 대한 급격한 수정을 요구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질적 발전의 새로운 시대를 향해 우리 모두를 함께 데려갈 수 있을 정도로 이러한 변화들이 아주 거대하고, 충분한 시너지를 일으키는가이다. 이에 대한 이상적 개념화는 우리 주위의 모든 '포스트류'(posts)(예컨대, 포스트산업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가장 먼저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양적인 이동에 의해 구성된 질적인 전화가 과연 이루어졌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내 자신의 답변은 조건부를 단 "그렇다"이다. 실지 생산양식과 이와 관련된 사회관계에 어떠한 근본적인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만약 실제로 어떤 질적인 경향이 있더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본 축적의 기본 동학과 관련하여 전세계 인구의 대부분을 영구적으로 과잉화하면서 자본의 세력권내로 모든 사람들(그리고 교환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끌어당기는 21세기적 취향과 딱 어울리는 19세기초 자본주의적 가치를 다시 재탕하는 경향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국제 자본이 동시대의 범지구화란 강력한 이미지를 지닌 채 공포심을 유발함으로써,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가 활동하게 되는 지점이다. 우리가 이러한 한계 혹은 단서를 수반하는 질적인 이동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이론과 정치 모두를 어떻게 재공식화할 것인가에 있다. 그리고 내가 제출한 '범지구화'로부터 자본주의의 '불균등 시·공간 발전'으로의 언어 이동이 이 지점에서 제안되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불균등 지리적·시간적 발전의 조건들이 특수한 어려움을 노정함과 동시에 정치 조직화와 정치 행위의 풍부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어려움들을 이해하는 것은 정치의 적절한 정식화에 있어서 중요하다. 좌파에게 있어서 이 모든 변화들의 일차적 중요성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이 상대적으로 누리는 특권적 지위가 나머지 세계의 노동 조건에 더욱 더 좌우된다는 점이다. (이 변화는 대체로 지난 20년을 넘게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에서 산업 조직의 기본 형태인 착취공장들이 재출현하는데서 관찰할 수 있다.) 이차적 중요성은 선진 자본주의내에서 삶의 조건들이, 지방의, 지역의, 그리고 민족의 경제적 전망에 대해서 극도로 즉흥성을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 능력의 완전한 공세에 놓여 있다는데 있다. (올해의 호황 도시가 내년에는 빈곤 지역이 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정당화는, 가능한한 어떠한 국가의 개입도(그리고 여기에 신자유주의자들은 ― 대개는 그들이 독점에 대해 운위하지 않지만 ― 독점력을 덧붙여야만 한다) 배제한다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두의 이익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 효과는 풍요와 과시적 소비를 상징하는 특수한 기술이 일련의 열망들을 지닌 가능성으로써 즉각적으로 전세계에 걸쳐 연결되는 동안에, 불균등 지리적 발전의 폭력성과 창조적 파괴(예를 들어, 생산의 지리적 재조직화를 통해)가 여타 다른 장소와 똑같이 자본주의의 전통적인 중심부에서도 널리 감지된다는데 있다. 범지구화의 홍보자들조차 여기서 반발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다루고 있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못된다. 최근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과 끌로드 스마쟈(Claude Smadja)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경제적 범지구화는 임계(臨界)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이 범지구화의 효과에 대항해 그 반발의 수위가 높아짐으로써, 특히 산업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수많은 국가들의 경제 활동과 사회 안정에 매우 파괴적 충격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 민주주의 국가들의 분위기는 일종의 무능과 불안인데, 이는 질적으로 새로운 대중적 정치인들의 등장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 분위기는 쉽게 봉기로 전환될 수 있다.(Friedman 1996, A19에서 인용.) 사회주의 운동은 물론 이러한 혁명적 가능성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주의 운동은 지역화된 파시즘의 노골적 호소로 에워싸인, 여러 형태의 다양한 우익 인민민족주의적 경향에 타격을 가해야만 한다. 운동은 사회적으로 정당한,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민감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계급 투쟁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운동은, 조직화를 너무나도 불안정하게 만들며 극히 어렵게 만드는 불균등 시·공간 발전의 엄청나게 강력한 조류들과 결합해야만 한다.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여 부르주아지의 범지구화와 투쟁해야 한다는 필연성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계급이 공간에 유연하게 대처했던 바로 그만큼 공간의 이론과 그 정치적 실천의 유연한 방식을 탐색해야만 한다. 본인은 이러한 운동의 단초를 제공하는 유용한 길이 있다고 믿는다. 먼저 어디서 반(反)자본주의적 투쟁이 벌어지는가를 질문하라. 본인은 그 답이 모든 곳이라 생각한다. 전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노와 불만이 표출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일부 장소에서의 반자본주의 운동은 나약하기 보다는 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지방의 '전투적 당파성'(그리고 본인은 의도적으로 레이몬드 윌리암스의 문구로 돌아가려 한다)은 미시간 삼림의 국민군 운동(militia movement, 이 운동은 대개가 인종주의적이고 배타적인 동시에 반자본주의적이고 반기업적인 폭력성을 갖고 있다)에서부터 나프타, 세계 은행의 개발 계획 등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멕시코, 인디언, 브라질 농부들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 축적의 핵심부내에서 조차 수많은 계급 투쟁이 진행 중에 있다. (1995년 가을 프랑스에서 벌어진 엄청난 전투성의 폭발에서 1996년 초 뉴욕의 사무실 청소부들의 파업에 이르기까지 계급투쟁의 사례는 다양하다.)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의 불균등 시·공간 발전의 틈새를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현실의 들끓어오르는 저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항세력의 전투적인 면모에서 불구하고, 이 저항은 종종 당파적으로 남아 있으며(때로는 너무나 극단적인 당파성으로까지 나아가며), 그리고 항상 배타적이고 인민민족주의적인 정치 운동의 외곽에서 이와 유착하려는 위협을 지닌다. 저항이 반자본주의적이라 하여, 꼭 친(親)사회주의를 일컫거나 어떤 자본주의적 대안이 필요로 하는 이해 지점에 다가서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광범위한 기초위에 놓인 반자본주의 운동은, 반자본주의적 대안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얘기할만한 응집력과 구체적 전망이 결여돼 있다. 또한 방향성이 결핍되어 있다. 즉 어떤 요소의 운동이 다른 요소의 운동을 혼동케 하고, 때로는 억제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본 계급의 관심사를 위해 지배의 분할통치 형식의 유지를 보다 수월하게 한다. 간단히 말해서 반자본주의 운동은 어떻게 서로 다른 투쟁이 결합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반자본주의의 범지구적인 안건을 형성할 것인가에 대해 이해할만한 합의된 틀거리가 결여돼 있다. 마르크스 운동의 역사적 강점들 중 하나는, 서로 나뉘어지며 다수의 목적들을 지닌 다양한 투쟁을 범지구적 목적을 지닌 보다 보편적인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종합(synthesis)하려는 지속적인 헌신에 있었다. 이제 본인은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얻은 유산을 통해 특히 현재의 위기 상황에 적합하게 여겨지는 수많은 논의들 가운데 그 핵심만을 간추려내고자 한다. 투쟁 범위와 영역은 자본주의의 동학, 그리고 범지구적 조건들이 변화함에 따라 영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반자본주의적 종합으로 나아가는 전(全) 과정 또한 지속적이어야 한다. 이 마르크스적 전통은 종합으로 나아가는 전 과정에 있어서 매우 막대한 공헌을 하는데, 그 이유는 마르크스적 전통이 다중성과 차이들 내부에서 일반성을 발견하게 하는, 그리고 착취와 억압의 제 1·2·3차적인 조건들을 확인하게 하는 도구들을 개척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레이몬드 윌리암스가 언급한 "철저하게 함께 모인 당파적 이익의 방어와 향상이 사실상 보편적 이익"이란 문구를 상기하면서, 제기된 중요 임무로써 "철저하게 함께 모일"(1989, 249)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내용은 다시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현재 (엄청난 자기파괴, 평가절하, 도산을 내용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궤도뿐만 아니라 점차적으로 다운사이징, 실업, 서비스의 붕괴, 삶의 지표와 환경의 질적인 저하 등의 폭력 상황에 취약해진 대중의 영역 내부에 현존하는 불균등 시·공간 발전과 그 강력한 모순의 생산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특수 상황을 뛰어넘어서 이와 같이 계속되는 손상의 질적 체계와 양상(pattern)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양상은 범지구화를 통해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을 간파하므로써 가장 최선의 답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러한 분석을 외부로 돌려 다양한 계열의 문제들로 확대하여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에이즈, 지구 온난화, 지역 환경의 훼손, 지역 문화전통의 파괴와 같은 문제들이 얼마나 고유의 계급 문제를 드러내는지, 그리고 사회 행위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에 걸쳐 계급투쟁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억압의 조건들을 크게 경감시킬 수 있는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다원주의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우리가 지닌 광범위한 계열의 반자본주의적 관심사의 계급적 내용을 밝혀내려는데 있다. 이 주장은 급진적 좌파 내부에서 저항에 부딪힐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계급의 정식화에 관한 주장이 (학계에서 한물간 퇴물로 거부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과거의 전위적 부류에서 나타나는 순수 분파주의로 물러나는 사태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자본주의적 투쟁에서 "하나를 위한 모두, 그리고 모두를 위한 하나"는 계속해서 어떤 정치 행위의 효과적인 중심 슬로건이 되고 있으며, 이 문구는 일종의 계급 정치를 내포하고 있다. 이 종합에 이르는 전 과정은 그렇지만 일상 생활의 유기적 조건하에서 그 과정 자체를 다시 공고히 해야만 한다. 이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긴 추상적 개념들을 포기하지 않고 대중투쟁에 몰입하므로써 발생하는 이 개념들을 재유용화하고 재평가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일부 투쟁들에서는 전통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개념, 제도, 실천, 정치등 그 자신에 각인되고 고정화된 자본과 투쟁해야만 하는 이론적 경화의 경향을 지니는데, 이 고정화된 자본은 한편에서 뛰어난 자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의 도그마적인 장벽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우리는 유용한 것, 그리고 우리의 지식과 정치 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으로 고정화된 자본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때론 포기할 것과 유지할 것에 관해 격렬한 논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아직도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제는 시작되어야만 한다. 예컨대 본인이 서두에서 꺼낸 전통적 마르크스의 범주들―제국주의, 식민주의, 신식민주의―은 너무나 단순화하여 등장함으로써 불균등 시·공간 발전의 복잡함을 포착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 범주들은 여전히 그렇게 단순화한 형태로 등장하겠지만, 특히 지난 30년간에 걸쳐 자본주의의 재영토화와 재공간화로 말미암아 이 전통적 범주들이 너무나도 조야하게 됨으로써, 현재 계급투쟁이 나타나는 지정학적인 복잡성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와 반자본주의 운동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범지구화'란 용어가 앞서 제기한 범주들과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수사에 대항한 역의 논리로 정치적 주도권을 다시 쥘 수는 없다. 설사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란 용어가 갖는 정치적 함의가 범지구화란 용어 보다 뛰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서 나는 또 한번, 극복될 과업을 판단하며 결합될 필요가 있는 다양한 전투적 당파성의 정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불균등 시·공간 발전(혹은 보다 단순하게 불균등 지리적 발전) 개념이 유익하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 가지 다른 조직적 관점을 들고자 한다. 마르크스적 개입의 전통적인 방법은 전위적 정치 정당을 거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의적 목적들을 지닌 반자본주의 운동에 있어서 단일의 목표, 하나의 목적, 단순한 지향점을 상위에 놓는데 어려움이 야기되었다. 마르크스적 전통내에 많은 비판자들이 지적했던 바처럼, 마르크스주의의 해방적 추진력은 그 자신 속에 부정(negation)의 위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적 발전에 있어서 인류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차이들을 억누르기 보다는 차이들 사이와 차이들 내부에서의 논쟁 영역을 개방화하는 것을 포함하여, 차이의 생산을 개방화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근본주의로의 우익적 회귀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는 때로 우익이 주장하는 류의 것이다. ― 비록 우익이 이를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우익적 주장에서의 힘을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상품화된 문화적 일탈에 대응하는 실제적 일탈의 생산은 반자본주의적 투쟁의 한 가지 목표로 쉽게 놓여질 수 있다. 단일의 동질적인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려는 목표는 결코 현실적이지 않으며, 만약 이러한 목표가 유용하다면 보다 주의깊은 절합을 필요로 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생산해내는 헤게모니적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모든 존재들과 모든 문화적 차이들을 보편적인 상품화된 토대에 단순히 환원하려는 경향은 반자본주의적 여론에 표적이 되어 왔다. 사회주의적 대의는 확실히 어떤 유사한 조건을 창출하려는 것만큼이나 그 느슨한 동질성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대의는, 대조되지 않은 상대주의나 구속받지 않는 포스트모던적 절충주의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일반성/차이(전자는 보편성이며 후자는 특수성)의 관계들에 대한 깊이있는 논의를 호소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사회 관계가 발현되는 방식, 그리고 인간의 잠재 능력이 현실화하는 방식을 위한 대안적 전망으로서 사회주의 그 자체가 개념화 작업의 초점이 된다. 아직 우리는 사회주의적 전위를 몹시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일의 목표를 내놓는 과거 전위 정당식의 형태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데리다(J. Derrida)의 "지위도 없는, 명칭도 없는, 이름도 없는... 정당도 없는, 나라도 없는, 민족 공동체도 없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환상만으로 무장해서는 제 구실을 할 수 없다. 이글턴(T. Eagleton, 1995, 37)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데리다의 주장은 "최후의 포스트구조주의적 환상이다. 즉 그것은 모든 정식화된 담론을 초월한 반대이며, 약속 이행 그 자체를 거스를 수 있는 약속이며, 도래할 것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어떤 것을 행함으로써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편이 훨씬 좋을 수 있었던 메시아에 대해 우리가 영원히 흥분된 채로 지닌 열려있음이며, 그리고 너무 체계적인 것 혹은 아주 단순히 '정통의' 것이 부재한 저항"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이같은 주장을 가능케 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부터 유형화되고 조직화된 정치의 토착성과 역사적·지리적 조건들의 모든 유형화된 감각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순수한 이상주의가 된 데리다 유형의 관계적 변증법과 결별하고, 사회생태적이고 정치경제적인 변화의 역사적 지형에 힘을 부여하는 모든 문제가 사고와 담론으로 환원되는 이른바 '새로운 이상주의'를 산출하는 것에, 그리고 사고의 변증법적이고 관계적 방식에 기초하여 등장한 이 데리다류의 전위적 경향에 반대한다. 우리는 이 특수한 형태의 전위주의를 버려야 하는데, 이 전위주의는 이제 학계에서 너무나 유행이어서 학계의 사고와 이상성의 흐름에 몰입한다는 것 자체가 다소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조직, 제도, 노선, 계획, 형식화된 구조 등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이 것들을 만들어낼 필요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행동들은 인간 행위가 전개되는 구체적인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조건들에 굳게 기초해야 한다. 공산당의 전통적 전위와 이상화된 전위(이른바 데리다의 유령) 사이에는 필사적으로 계몽을 부르짖는 정치조직과 정치투쟁의 영역이 놓여 있다. 이 영역은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여기에는 우리의 주의를 끄는 몇 가지 본질적인 운동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1996년 1월 30일자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의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인간애를 옹호하는 전세계의 모임, 즉 전 범위에 걸쳐 범지구화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대륙간 회의"에서의 글을 상기하라. 그들의 주장은 어떻게 화폐 권력이 도처에서 "존엄성을 해치고, 정직성을 공격하고, 희망을 압살하는가를" 지적한다. "신자유주의로 재명명되고, 특권, 부귀, 면죄부가 모여 이루어진 역사적 범죄는 비탄과 절망을 보편화한다." '범지구화'란 이름은 "압살하고 무시하는" 자본의 "현대전"을 가리킨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인간애 대신에 주식 시장의 가치 지표들을, 존엄성 대신에 범지구적 비탄을, 희망 대신에 공허를, 삶 대신에 국제적 테러를 제공한다. 사빠띠스따는 "우리가 희망의 인터내셔널을 제기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만약 신자유주의적 범지구화의 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함께 모일 수만 있다면,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의 시절이 끝날 때가 머지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균등 지리적 발전의 변화하는 영역에서 반자본주의적 투쟁을 조직화하고 종합하는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이제 어떠한 전위 정치조직을 중심에 놓아야 하는가에 대한 일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작업을 해야만 한다. 자, 이제 그 작업을 시작할 때다! 참고문헌 Amin, S. 1974. Accumulation on a World Scal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Cardoso, F. and Faletto, E. 1979. Dependency and Development in Latin Americ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Deleuze, G. and Guattari, F. 1984.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New York: Viking Press. Derrida, J. 1994. Specters of Marx, London: Routledge. Eagleton, T. 1995.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Radical Philosophy 73: 35-37. Emmanuel, A.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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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서의 가상현실

By Frank Biocca & Mark R. Levy, Communication in the age of virtual reality (1995)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서의 가상현실 (이광석 옮김) "미디어"? 당신은 종종 이 거대하고, 와이어드되고, 강력한 동물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읽거나 듣는다. 그러나 "미디어"란 말의 대중적 사용은 자칫 우리를 잘못 이끌 수 있다. 우리는 이 문구를 때때로 의사소통하는데 필요한 기술적 도구(예를 들어 점토 clay나 비디오 테이프)뿐만 아니라 매체의 내용물(예를 들어 뉴스, "폭력성" 드라마)과 그 매체를 지원하는 조직체(예를 들어 공중파 네트워크, 케이블 회사, 혹은 "언론")를 뜻하는데 사용한다. 심지어 미디어란 용어는 텔레비전과 같은 전송채널 또는 인터페이스를 둘러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전 체계를 포괄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문제점: 이 용어는 너무 많은 요소를 융합하고 있다. 가 상현실(VR)이란 용어도 유사한 문제점을 지닌다. 사람들은 가상현실의 전망을 논할 때 종종 그 기술의 서로 다른 수준 사이를 넘나든다. 혹자는 부분적으로 인터페이스 하드웨어(예를 들어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그 응용(예를 들어 의학 화상(畵像), medical imaging), 가상현실 산업(예를 들어 가상현실 오락산업), 혹은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면서 등장하는 문화환경(예를 들어 가상소설, 사이버공간, 사이버펑크 등)에 관해 얘기한다. 가상현실이라는 문구는 점차 기술의 일부가 아니라 현재 등장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 여겨진다. 커 뮤니케이션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그림 2.1은 그 시스템의 기본 요소를 설명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 전송 채널, 그리고 조직적 하부구조를 그 내용으로 한다. 각각의 구성요소는 그 자신의 동학과 행위자를 지닌 실제적인 하부체계이다. 그림 2.1을 이용하여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서의 가상현실이 출현하면서 맞닥뜨린 몇 가지 문제를 논의하고, 이 책의 각 개별 장들이 어떻게 가상현실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다양한 측면에 빛을 발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지에 대해 전체적인 개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상현실 인터페이스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 = (물리적 미디어, 코드, 정보) + 감각전달sensorimotor 통로 맥 루한(1964, 1966, 1988)은 신체가 근본적인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이고 물질 세계가 그 신체의 내용임을 분명히 했다. 맥루한에게 있어서 모든 미디어는 "감각의 확장" (혹은 보다 중요하게 감각전달 통로이다. 대다수는 가상현실이 인터페이스 설계에 대한 근본적이고 흥미있는 접근을 구체화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때 가상현실의 초점은 감각의 확장에 맞춰진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메타매체 metamedium의 출현을 향한 텔레비전, 컴퓨터, 그리고 전화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를 총체적으로 혁명화 하기위한 단지 한 측면일 뿐이다. (Kay, 1984; Kay & Goldberg, 1977). 현재 등장하는 메타매체에 해당하는 가상현실의 형태는 전자의 바다에 뛰어들어 탐험할 수 있는 잠수복과 동일하다. 가상현실을 차별적으로 만드는 것은 메타매체의 진보로 나아가는 목적지를 분명하게 구체화한다는 점이다. 1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가상현실은 기술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목적지이다. 가상현실 인터페이스를 설계하는 궁극적 목표는 단지 인간의 감각전달 통로의 완전 몰입을 통해 컴퓨터로부터 생생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시스템에서 신체는 커뮤니케이션으로 감싸여지고 정보로 맥박친다. 미디어는 항상 외부 환경이었다. 다시 말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 두 매체는 그 매체가 이용되는 방들과 그 매체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가상현실의 환경은 인간의 감각들을 에워싼다. 낙관론자는 가상현실이 감각을 둘러싼다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비관론자는 가상현실이 감각을 낚아채어 간다고 말할 것이다. 가 상현실 인터페이스의 논의는 항상 근본적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즉 신체와 그 신체의 감각전달 통로가 확장되는 방식에 대한 문제로 돌아간다. 감각전달 통로가 어떻게 물리적 미디어, 코드, 그리고 가상현실 기술의 정보와 상호작용하는가? 바이오카와 드레이니 Biocca & Delaney가 구성한 4장의 내용은 가상현실의 물리적 미디어, 즉 가상현실의 몰입을 가능하게 하는 입·출력 장치,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공간 오디오 spatial audio, 포지션 센서 등의 장치를 연구한다. 4장은 가상현실에 대해서 서로 다른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논의를 전개하는 기본적인 질문에 답하려 한다. 즉 어떻게 가상현실 기술이 작동하는가? 또한 이 질문을 미래형으로 바꾸면, 어떻게 가상현실 기술이 진전할 것인가?라고 묻게 된다. 4장은 이미 논의된 인터페이스의 정의가 옳다고 여긴다. 4장의 논의는 센서 정보와 각 구성요소가 감각전달 통로의 정보욕구가 어떻게 완전히 일치하려 애쓰는 가에 그 초점을 둔다. 4장에서는 어떻게 가상현실 출력장치가 감각을 깜쪽같이 속이려 하고, 어떻게 입력장치가 이용자의 신체를 가상세계에 보다 깊게 빠져들게 하는데 조력하는가이다. 기술 발전의 경향은 정신지각적 설계의 요청으로 인해 주목받는다. 이 새로운 인터페이스에서 코드는 어떤가? 여기에는 임의적인 센서의 "자극" 그 이상이 있다. 물리적 미디어는, 정보를 내포한 송·수신 패턴을 가지면서, 감각에 대해 일종의 모르스식 코드를 치고 있다. 즉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HMDs), 우리 귀에 정보를 발신하고 소리내는 공간 신호, 손의 역할을 확장하는 직물화된 힘, 가상환경 내부에 부유하는 "지성을 지닌" 형상들이 이러한 신호를 배분하여 내보낸다. 가상세계가 만들어지는데는 회선 뭉치, 액정 디스플레이(LCD) 패널, 컴퓨터 칩보다 그 이상의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유명한 방송기자인 에드워드 머로우 Edward R. Murrow는, 그의 동료들이 만드는 "소프트웨어"가 없이는 텔레비전이 "컬러빛의 상자"일 뿐이라고 말하곤 한다. 컬러빛은 어떤 양식 - 감각의 코드와 우리 문화의 코드 - 을 발산해야 한다는 점이다. 머 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데이터 장갑, 그리고 포스 피드백force feedback은 단지 가상현실의 경험을 정의하는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대개 잡지에 나온 그림을 통해 가상현실의 하드웨어만을 봄으로써 잘못 이끌린다. 1950년대에 우리는 오로지 음극선 주입기, 진공관, 전선을 감싸고 있는 호두나무로 만든 캐비넷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텔레비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단계 - 텔레비전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처럼 - 에서는 공중의 관심의 초점은 하드웨어이다. 이렇게 되는 데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인터페이스 내의 코드와 정보는 더욱 더 큰 주의를 끌게되었다.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들은 인적 요인들의 설계라는 기술 과제에 부응하기 위해서 가상현실의 정신기호적인 측면을 더 잘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스튜어 Steuer는 재현에 관해 기술한 3장에서, 원격재현의 감각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변인들을 살핀다. 다시 말해 정밀한 코드와 과학기술이 가상세계의 정보를 어떻게 구조화하여 그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살핀다. 가상현실의 경험은 푸른 하늘색의 세상, 신비한 모험, 인간과 그 대리격 로봇, 방 크기만한 분자, 도시 블록만한 막대그래프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이란 내용과 세계라는 정보를 반영하여 둘러쳐진 거울이다. 과학철학자인 칼 포퍼 Karl Popper는, 우리가 인간 행위의 영역을 생각할 때 세 가지 세계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첫째, 물질세계가 존재한다.- 물질대상의 영역... 이것을 본인은 ''''제 1세계''''라고 명명할 것이다. 둘째, 정신 상태의 세계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나는 ''''제 2세계''''라고 명명할 것이다. 하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세 번째 세계가 존재한다. 사고 내용의 세계, 그리고 실지로는 인간 정신의 산물인 세계. 따라서 나는 이것을 ''''제 3세계''''로 부를 것이다..." (Popper & Eccles, 1977, p.38). 가상현실과 더불어 포퍼의 제 3세계는 성장의 새로운 단계를 접어든다. 제 3세계는 제 1세계로부터 천천히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수천년간 신체라는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제 1세계, 즉 물질적 본성과 제 2세계, 즉 정신 상태간에 일종의 인터페이스가 되어왔다. 실제로 인간의 신체는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훌륭한 도관(導管) 역할을 하도록 진화되었다. 그래서 신체는 공간을 설계하며, 움직이는 동작을 취하며, 그리고 그 외의 여러 행위들을 취하는 정신을 보조하게 되었다. (Gibson, 1979; Ornstein, 1991). 가상현실을 통해 제 3세계의 환경이 성장함으로써 제 1세계를 위해 설계된 신체를 둘러싼다. 서덜랜드의 가상현실의 최종 디스플레이에서는 제 3세계, 즉 전자적이고 "수리적인 형태의 이상한 나라"에 신체를 완벽하게 몰입시킬 수 있다. (Sutherland, 1965). 우리의 정신을 만드는데 몰입된 감각들이 정상적인 제 1세계를 덮어버린다. 제 2세계의 변화하는 정신 상태와 제 3세계의 감각 경험 사이에는 피드백 고리가 구축된다. 객관화한 정신과 그에 따른 감각 경험 사이에는 피드백 고리가 항상 존재했다. 그러나 이제 이 피드백 고리가 물질 세계의 그 모든 생생함과 주장을 지닐 것이다. 어떻게 이 피드백이 제 2세계의 정신 상태, 혹은 우리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가상현실 설계자들이 제안한 바처럼, 우리가 보다 쉽게 대상화된 문화적 사고의 내용들을 익힐 수 있게 하므로써, 인간이 "좀 더 현명해질" 수는 없는가? (Furness, 1993; Krueger, 1991). 혹은 맥루한이 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이 피드백 고리를 통해서, 매체(제 3세계)의 형태(코드)와 인간의 정신 상태(제 2세계)가 왜곡되고 정신병적인 이종동형(異種同形)으로 합쳐지는, 자아도취적 황홀경에 몰입할 것인가? 아직 우리는 알 수 없다. 여 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떻게 가상현실 인터페이스를 이용하여 최대한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가? 최선의 답은 확실하지 않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곧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가상현실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아직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가상현실 인터페이스는 현존하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코드를 이용할 것이며, (Eco, 1976; Ekman, 1974) 그 인터페이스는 다른 미디어에 장착되었던 기술에 의존할 것이다. 예를 들어 10장에서 팔머 Palmer는 고대의 대인 커뮤니케이션 코드를 관찰하고, 가상환경에서 그 코드를 확장하고 코드의 지형을 그려내기 위한 도전을 논의한다. 하지만 가상현실이 도래함으로써 분명히 어떤 새로운 것이 덧붙여졌고, 의미구성과 의미수용의 과정을 민감하게 바꿀 것이다. 서사구조를 지닌 영화는 극장용 영화의 형식만을 띠지는 않는다. 비록 초기에 제작자들 중 일부는 그러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냈지만 말이다. 영화는 내용 전개와 서사가 전개되는 공간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방식을 낳았다. 아마도 그렇다면 가상현실 내에서 커뮤니케이션 코드의 가장 다양한 이용을 볼 수 있고, 정의할 수 있고, 희망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부분은 오락에서 일 것이다. 이 책 대부분의 장들에서는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이 가상현실의 오락 인터페이스를 위해 설계될 수 있는가를 연구한다. 6장에서 호킨스 Hawkins는 배치 장소용 location-based 가상현실 산업의 성숙과 가상현실 경험의 여러 장르에 대한 그 설계 계획을 논한다. 7장에서 히이터 Heeter는 가상현실의 초기 이용자들에 대해 얘기하고, 배치 장소용 오락시스템의 이용자가 어떻게 폭력적이거나 군사용 유형의 가상현실 경험에 감응하는지 논한다. 8장에서 메이어 Meyer는 이야기 전개 방법에 밀착하여, 고대극의 서사 기술을 가상환경에 적합하게 만드는 방법을 제안한다. 9장에서 가상현실의 음향에 귀기울이는 크래머 Kramer는, 풍부한 정보의 심포니를 연주하는데 가상현실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논하기 위해 청각 코드에 관해 연구한다. 이 네 개의 장을 종합하면 우리는 이용자가 가상현실을 경험하는 방식을 구체화할 수 있는 설계상의 몇 가지 결정적인 문제들에 직면한다. 실 지로 가상현실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설계를 부른다. 즉 타인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그리고 문화 양식, 우리 문화를 구성하는 관습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부른다. 대부분의 초기 가상현실 견본에서 보여주는 정태적 가상환경은 썰렁할 정도로 텅 비어있다. 이러한 가상환경은 한정된 정착자, 황야의 술집, 사이버무법자, 그리고 사명을 지닌 기자에 대한 이야기들을 초대하기 위해 기다리는 유령도시와 비슷하다. 그러한 "배역들"은, 가상현실 내의 회오리치는듯한 기호의 흙먼지 폭풍 속에서 재생되고, 교정되고, 그리고 초월적인 형태로, 과거의 장르들에서 단지 인용된 것이다. 엿보기 좋아하는 자 voyeur는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상마스크가 얼굴을 대체해버린다. 가상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 기술 책략적 연구에 현실적 real 커뮤니케이션을 끼워넣으려는 시도가 진행 중이다. 빈약한 연구소의 가상세계에 대한 견본과 비교하여, 메시지, 형상, 수백만 사람들의 신체가 연결되어 고동치는 가상세계 사이에는 현실적 커뮤니케이션이란 면에서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현실적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우리의 집합적 창조와 이 기술 책략적 연구 artifice의 지배권에 관한, 즉 포퍼의 제 3세계를 세우는 것에 관한 내용이었다. 커뮤니케이션 코드에 대한 탐구는 가상현실 내의 경험과 커뮤니케이션 표현을 탐구하는데, 그리고 대상화된 사고의 대륙과 메트로폴리스, 즉 제 3세계의 가상세계를 세우는데 그 열쇠가 될 것이다. 전송 채널 가상현실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은 몇 가지 점에서 수송에 관한 내용이다. 원격-재현 tele-presence은 원격-비전 tele-vision을 대체한다. 신체의 감각전달 통로는 원거리의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에 연결된다. 경험을 전송하는 것이다. 전송과 수송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어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19세기에 전신과 철로는 미국 서부 개척지의 들판과 숲을 따라 나란히 뻗어 있었다. 이 두 전송 채널, 기차와 전신은 정보를 "수송하기"위해 서로 경쟁적 지위를 누렸다. 아직도 기차, 비행기, 트럭은 종이와 잉크로 구성된 물질적 미디어, 즉 우편, 신문, 잡지에서 처리된 정보를 수송한다. 예컨대 우편 시스템을 상기해보라. 비록 전신이 기차보다 정보 운송의 가용량에서 적지만, 전신은 물리적 수송 채널을 그 속도에서 쉽게 앞지른다. 전신이 갖는 정보유통이 적다고 하지만 기차 화물칸 짐의 정보가 느린 것에 비교할 때 보다 가치있는 것이었다. 정보유통은 이제 다양한 전송 채널, 즉 구리선, 광섬유 케이블, 전자마그네틱 스펙트럼 등을 통해 시·공을 가로질러 이루어지고 있다. 수백만 마일에 걸쳐있는 선들은 거대한 공모양의 실타래처럼 전 지구를 교차하고 감싸고 있다. 이 거대한 공을 에워싼 전자마그네틱 스펙트럼은 수백만 메시지의 노래를 연주한다. 정보의 끊임없는 전송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가상현실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는 때는 전송 채널간에 경쟁이 눈에 띠게 보이는 시기이다. 한 때 전신의 정보유통이 보잘 것 없이 얄팍한 갈대에서 이동했다면, 이제는 거대한 파이프가 정보를 분출하고 있다. 보다 오래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지닌 가용 능력의 한계가 효과적으로 제거되고 있다. 다음 세기에는 결국 전신의 후속물들 - 예를 들어 광섬유 채널 - 이 수백의 기차 화물에 맞먹는 정보를 운반할 것이다. 40 가닥으로 이루어진 광섬유선은 130만의 전화 통화나 1,920개의 텔레비전 채널을 전송할 수 있다. 이것을 1,000의 전화 통화도 동시적으로 전송할 수도 없었으며 단 하나의 채널도 전송할 수 없었던 과거의 꼬여있는 구리선에 비교해 보라. 정보의 가용 능력이 크게 증대하면서, 철로와 같은 대표적인 구채널을 이용하여 정보재를 물리적으로 수송한다는 것은 가면 갈수록 내키지않는 정보 수송 수단이 되기 쉽다. 인적 교류가 물질 공간에서 사이버공간으로 이주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공간에 이르는 가상현실의 길 전기 전송시스템은 이니스 Innis와 맥루한의 용어로 단지 공간을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은 새로운 대응 영역, 즉 사이버공간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사이버공간은 포퍼의 제 3세계의 유연한 형태이다. 사이버공간의 성장은 어떤 결정적 단계 - 새로운 전자 개척지의 개막-에 들어감을 말한다. 이 새로운 개척지에 관해 스카우츠 Scouts는 다음과 같이 일관되게 얘기하고 있다.(예를 들어 Lucky, 1991). "강은 광대하다." (정보압축에 의해 가능해진) 각 전송채널의 전반적 가용력에 증가가 이루어진다. "많은 공간이 존재한다."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범지구적인 정보 가용력에 팽창이 이루어진다. "당신의 차를 떠나 광대한 강에 합류하라." 커뮤니케이션 교통 traffic에서 광섬유와 같은 새로운 전송 채널을 향한 이동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산맥을 따라 이어진 다른 경로가 필요할 것이다." 각 전송 채널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전문화와 적소화 niche building가 이루어질 것이다. 또 한 전자 개척지에 대한 기업측의 전망가들도 존재한다. 2천년에 디지털 금광에서 수십억 달러를 예견하는 그들에게는 그 개척지는 고대할만한 것이다. 예컨대 1993년 미국에서 가장 큰 케이블 회사 TCI와의 합병을 시도했던, 벨 아틀랜틱 Bell Atlantic의 최고 경영 책임자, 래이 스미스 Ray Smith를 들어보자. 전망가적 재능이 번뜩이는 그는 그 현대적 등가물을 지칭하듯 "저 구릉 지대안에는 금이 존재한다"고 발표하였다. "그것은 단지 500개 채널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무엇이든지, 어디서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Schniedawind, 1993, p. B1). 무엇이든지 존재하게 하거나 어디서든 갈 수 있다는, 물질 초월의 꿈은 또 다른 형식을 취한다. 다른 이들은 미소한 차이의 또 다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벨 연구소와 벨코어의 이전 연구 소장, 로버트 럭키 Robert Rucky는 거대하게 확장되는 사이버공간을 주시하면서, 이 사이버공간의 평원뿐만 아니라 거대한 블랙홀도 동시에 보고 있다. 1992년의 시그래프 SIGGRAPH 회의에서, 그는 청중으로 참석한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래머들에게 이 진공을 채워넣을 수 있을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다. 그는 그 진공이 채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오직 집중적이고 "상호작용적인 그래픽의 교통"으로서만이 그 진공을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래픽의 교통이란 오직 네트워크화된 가상현실 시스템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종의 디지털 교통이다. 사이버공간은 광대한 개척지이며, 오직 가상현실만이 그 개척지를 채워낼 수 있다. 사고의 거대한 도관으로서의 가상현실 우 리는 이른바 "정보 초고속도로"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가상현실 인터페이스가 가느다란 광섬유로 이루어진 사이버스페이스의 고속도로를 통해서 그 의식을 이동시키는 전달 수단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보 초고속도로"와 같은 문구가 함유하는 수송에 관한 비유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근원적인 비유 형태이다. 이 문구는 적어도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로크 Locke의 정의, 즉 사고의 전달 수단인 "거대한 도관"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원격 정신작용 telementation -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정보의 수송 - 그 정보는 사고 혹은 캡슐화된 경험일 수 있다 - 은 인쇄된 단어, 이미지, 그리고 혹은 필름 클립와 같은 지나치게 불명확한 코드와 질이 떨어지는 인터페이스에 의해 그 능력이 떨어진다. 정보를 유실하는 것이다. 잡음, 모호성, 그리고 정신적 노력이 전통적 코드와 미디어의 분명치 않은 연막 신호에 의해 나타나는 진공을 채우기 위해 등장한다. 우리는 강제적으로 추상적 코드가 많아질수록 이를 통한 보다 적은 정보를 전송받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모든 전송 채널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 잡음을 모래 위에 휘갈겨 썼으며, 종이 조각 위에 애매모호한 흠집을 내어 왔다. 결국 가상현실이 이러한 모호성을 해결하고, 누군가의 생각으로부터 다른 어떤 누군가에게 그대로 정보를 전달하는 순수한 방식을 선사할 것인가? 사이버공간의 여행은, 특별히 그 정보가 "현실적으로" 보다 많은 감각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와 거대한 전송관을 통해 정보가 보다 순수해질 수 있고, 보다 현실화될 수 있는 개념이다. 보다 적은 잡음으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은 보다 분명해진다. 어쨌든 가상현실을 통해 우리는 추상화된 코드와 상징을 극복할 수 있다. 쟈론 라니어는 우리가 "탈상징적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진입했다고 주장한다. (Lanier & Biocca, 1992). 탈상징적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라니어에 따르면 그것은 사물 그 자체 안에서 거주하는 시대이다. 예컨대 생생한 3차원 주택은 "주택"이란 단어와 같은 어떤 빈약한 상징 대신에 수신자/청취자에게 디스플레이될 수 있다. 라니어는 이와 같은 사실이 커뮤니케이션을 바꾸게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상징은 상징화된 사물에 가까운 어떤 것, 사물 그 자체 thing-in-itself로 대체된다. 그것은 흥미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가상현실의 "감각 리얼리즘"내에서 커뮤니케이션 추상의 문제는 소수 사이버개척자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이미 끝난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문제는 새로운 코드를 통해서 굴절된 형태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만약 로크가 오늘날 사이버공간에 있는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주택의 3차원 모델이 "주택"이라는 단어 만큼이나 모호한 기호임을 지적할 것이다. 기호학자인 챨스 샌더스 퍼어스 Charles Sanders Peirce가 이에 대해 덧붙인다면, 아마도 가상현실 내의 그 주택의 아이콘이 상징보다 우위에 선다는데 찬성할 것이다. 하지만 라니어의 개념이 보여주는 바처럼 결코 탈상징적 아이콘이 곧 탈기호적 아이콘을 뜻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할 것이다. 주택의 3차원 모델이 "주 택"이란 단어보다 더 명확한 어떤 것을 뜻하는가? 비록 주택의 3차원 모델에서 더욱 많은 정보가 전달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택의 의미 -그 의미는 결코 전달되지도 전달할 수도 없다-가 더욱 분명해지리란 보장은 없다. (아이콘 숭배 iconcism와 절대 아이콘 absolute icons의 논의는 에코를 참조; Eco, 1976, 1979).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진짜 사물 혹은 진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군가의 생각으로부터 다른 누군가에게 관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가상현실 안에서 3차원 주택은 단지 대상화된 관념, 즉 그 주택의 경험에 대한 정신 모델을 시뮬레이션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정보를 훨씬 나은 방식으로 코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념 혹은 경험을 전달하는데 "순수하거나 본래적인" 코드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가 "주택"이란 단어를 읽기 보다는 오히려 주택의 시뮬레이션을 전송받길 원한다는 것을 라니어가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올바르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 모델의 그 모든 역동성과 뉘앙스를 담아낼 수 있는 코드와 인터페이스를 원한다. 이는 바로 최대의 대역폭을 가진 코드이다. 감각의 전달 정 보의 원거리 전송 - 특히 감각 정보 - 은 가상현실의 외피를 밀어내려는 거센 소망이다. 공군의 가상현실 개척자이자 선도적 엔지니어링 연구자, 톰 퍼니스 Tom Furness (1993)는 IEEE의 제 1회 가상현실 연례 심포지엄 (VRAIS)의 인사말에서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인류에게 가공할만한 새로운 유동성을 지닌 향상된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감각을 전하는 전송 시스템을 세우고 있다... 이는 우리가 그 공간 내부에 우리 자신의 신체를 집어넣지 않아도 다른 장소나 공간에 갈 수 있다는 놀랄만한 약속이다..." (p. i). 우리는 다시 한 번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초창기 시절로부터 되풀이되는 말을 듣는다. "공간이 붕괴될 것"이란 외침은 최초에 전신의 발명과 더불어 의심없이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Carey, 1988; Czitrom, 1982). 전신 키에 손가락을 조용히 두드림으로써 수 마일의 거리를 붕괴시켰다. 오늘날 이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전신의 기술적 후속물들에 부착되고 있다. 원격재현에서, 가상현실은 경험을 전달하는 과업을 실행하는데 있어 다른 미디어와 결합한다. 가 상현실의 원거리 개척지에 대한 전송이라는 사명에 있어서, 그 유일한 사명은 공간을 붕괴하려는 힘에 있다. 나사 NASA는 외계 행성에 대한 원격재현의 체험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가상현실을 발전시키고 있다. (McGreevy, 1993). 지구상의 인류는 태양계의 험준한 황무지의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대리 로봇을 조정한다. 우리 자신의 감각을 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을 때 왜 인간을 외계 행성으로 수송하는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이것은 우주적 규모에서의 원격재현을 위한 열망이다. 그러나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 아니라 진화이다. 미디어 이론가, 해롤드 이니스 Harold Innis (1951)는 커뮤니케이션을 공간을 통제하기 위한 오래된 시도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현재는 외계 행성을 움켜잡기 위한 시도 단계일 뿐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공간적 규모의 또 다른 목표에는 원자로 둘러싸인 공간에 강제로 감각을 밀어넣으려는 가상현실 시스템이 존재한다. 북부 캐롤라니아 대학의 연구 (Robinette & Williams, 1991)는 가상현실의 인터페이스를 터널식 주사(走査)형 scanning-tunneling 현미경의 목표와 합치시킨다. 원자들은 해변의 핑크빛 모래처럼 보이는 언덕이 된다. 원자는 "만져질" 수 있고 심지어 이동도 가능하다. 핑크빛 모래는 스스로의 형태를 바꿔 새로운 언덕으로 나타난다. 미디어는 무차별로 공간을 붕괴함으로써 물질 세계, 제 1세계의 미시 세계로 확장된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정보 위기 해결 사 이버공간은 광대하다. 이러하 광대함 자체가 사이버공간에서의 위기 근원일 수 있다. 인터넷과 같은 컴퓨터의 범세계적인 상호 연결과 전송 채널 가용능력의 팽창은 그 가능성 뿐만 아니라 문제점도 만들어 낸다. 정보 여행과 정보 여과 filtering의 문제는 정보의 광대한 바다 위에 안개를 피워올린다. 가상현실이 가능한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예에서 그 유사성을 생각해보라. 당신이 거대한 도서관에 갔다가 당신 스스로 어디에 서 있는지 잘 알지 못했던 적은 없는가? 그 긴 서가가 너무나 유사해서, 그 선반에 붙은 분류 기호는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 이것이 고대 이집트인가 아니면 두뇌 화학 작용 brain chemistry인가 - 에 대한 어떠한 안내 역할도 제공하지 못한다. 아마 여태까지 쓰여진 모든 책들이 있다는 보헤스 Borges의 그 유명한 도서관의 규모만큼 거대한 도서관을 이제 상상해보라. 모든 세계의 책들이 저장된 어떤 장소를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 안에는 수백만개의 신문과 잡지 기사, 셀 수 없는 그림, 포스터, 필름 클립, 그리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 도서관의 통로들은 의회 도서관의 수 마일 길이의 복도보다 더 길게 뻗어있으며, 그 도서관은 세계 각국의 도서관을 한 지붕밑에 모이게 한 것보다 더 크다. 당신이 이 거대한 도서관의 마치 굴과 같은 내부에서 멍한 상태로 당황하여 헤맬 때,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당신이 찾고자 하는 정보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사이버공간에서 길을 잃고, 표류한 상태다. 어떤 이에 게 사이버공간의 무정부적 구조 내부에 세워진 정보의 서고는 중요한 공간 여행 navigation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점은 명백하다. 오늘날 인터넷 주위를 맴돌면서 자신의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용맹스러운 정보비행사 infonauts는 아직도 정찰 - 참고 도서, 프로그램, 대리인, 그리고 같은 일에 종사하는 동료를 통한 - 의 수준에 머문다. 사이버공간은 통제 불능이다. 이 공간에서는 도시를 구획하는 법이 존재하지 않으며, 초고층 빌딩과 빈민촌이 어떤 명확한 질서도 없이 난립하는 도시와 비슷하다. 질서는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관계가 있다. 현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산업 체제의 통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출현하였다. 제임스 베니저 James Beniger에 따르면, "상업 혁명이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이로부터 벗어나 자본과 노동에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컨대 산업 혁명은 산업화의 진전으로부터 야기된 문제 - 통제 위기의 끝없는 상승 -에 대응하여 발전한 가장 최신의 기술 혁명이다. 또한 이 기술 혁명은 자본 할당과 재화의 분배를 위한 상업 시스템을 전제로 한다." (p. 15). 이 통제 위기는 물질, 에너지, 정보의 처리 과정에 있어서 그 규모와 속도가 증가하므로써 대두되었다. 이후 현재에 와서 사이버공간을 구성하는 네트워크는 정보의 통제 위기를 처리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제시된다. 예를 들어 1945년에 배니버 부시는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점점 더 어마어마한 연구량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를 꼼작 못하게 하는 증거들이 증가하고 있다... 인간의 경험은 놀랄만한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에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필연적인 미궁을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수단은 횡범선(橫帆船)의 시대에 행했던 것과 동일하다." (Bush, 1945, p. 101-103). 부시는 중요한 정보가 수 십년간에 유실될 수 있는 "대재난"에 관해 경고했다. 그는 정보를 여행하고 정보를 조직화하기 위하여 정보 압축, 새로운 감각 인터페이스, 하이퍼미디어 시스템과 같은 다양한 해결책을 제안했다. (Bush, 1945). 이러한 모든 것들이 충족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부시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착상을 얻은 컴퓨터와 그 네트워크의 성공은 정보 통제의 새로운 수준의 문제를 우리에게 가져왔다. 현재 사이버공간의 팽창은 정보 처리과정의 규모와 속도를 더욱 증가시킨다. 전송 채널의 진전과 함께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통제 위기에 직면할 지도 모른다. 가상현실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이 위기에 응답한다. 사이버공간이 물질 공간의 특성을 떠맡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추상 정보를 포함한 모든 정보가 정차 공간화되고 감각화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우리가 3차원 공간, 음향, 촉감, 냄새, 그리고 움직임의 물질 세계를 거닐 수 있도록 기술은 진전하게 되었다. 당신이 결국 그 정보와 맞닥뜨리는 곳을 거닐거나, 그 정보를 주의해서 볼 수 있거나, 심지어는 그 정보의 냄새를 골라낼 수 있다면, 추상 정보까지 포함하여 정보를 찾는다는 것을 보다 수월하게 한다. 정보는 본체 noumena에서 현상 phenomena으로 전화한다. 정신의 환경, 즉 정보는 육체를 위한 환경이 된다. 정 보 환경을 어떻게 구조화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 박물관과 도서관같은 과거의 정보 통제의 표현물들은 은유적으로 몇 가지 제안점을 보여준다. 베네딕트 Benedikt와 같은 가상현실 건축가들은 사이버공간의 "건조된 환경"을 위한 계획을 제시한다. (Benedikt, 1992). 또 다른 공간적이고 물리적인 시나리오로, 정보의 박물관 벽을 따라 나있는 끝없는 나선형 통로(그 예로는 Benedikt, 1991), 당신도 들어갈 수 있을만큼 거대한 서류함, 포스트잇 Post-itTM의 메모지로 가득찬 벽(그 예로는 제록스 팍 Xerox Parc의 투시벽 시각화 Perspective Wall Visualization), 정보의 가지를 연결하는 지식이라는 나무(그 예로는 제록스 팍의 원추형 나무 Cone Trees)와 같은 모델을 통해 정보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른 어떤 시나리오로 비행 시뮬레이터에서 나온 "이리저리로 날아다닌다 fly over"는 은유는 우리가 정보의 지형을 가로질러 이동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 (그 예로는 실리콘 그래픽스 Silicon Graphics의 내비게이터 Navigator)을 보여준다. (Bylinsky, 1993; Fairchild, 1993의 예시 참조). 사이버공간의 바다에 일어나는 정보의 높은 파도를 통제하기 위한 수많은 제안들이 등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제안들은, 정보를 보다 물질화하는 것 - 이는 보다 감각적 특성을 부여한다 -이 우리가 사이버공간의 거대한 정보 바다를 항해하는데 수월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 정보의 바다를 위에서 내려다 본다면, 우리는 밑바닥에서 정보의 물결이 일어나는 행위 양식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가상현실 시나리오에서, 정보 항해의 문제는 분명한 이동의 자유로움과 그 수월함에 의해 해결될 것이다. 펠리컨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뛰어들 듯, 이용자는 어떤 정보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잠수할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항해사라도 알고있는 바처럼, 당신의 유일한 참고사항이라고 해봐야 그 바다에서만 구별되는 물결의 행위 양식뿐이라면 십중팔구 길을 잃기 마련이다. 가상현실과 전송 채널.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의 성장은 현재 등장하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수많은 전송 채널의 변화 방식과 관련된다. 따라서 양자는 상호 연계하여 발전한다. 가상현실과 관련하여 그 연계성을 요약해보면, 1. 전송 채널의 변화로 사이버공간이 확장될 때, 전송할 정보 재화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있기 쉽다. 이에 따른 공급 부족은 영화와 쇼와 같은 구매체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체험과 관념과 같은 또 다른 새로운 정보 형태의 "컨텐트"에서 일어날 것이다. 공용(共用) 가상환경내의 정보는 이러한 정보의 진공 상태을 채워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사이버공간이 확장되면, 정보의 어마어마한 양과 그 속도로 인해 사이버공간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이 정보 위기는 네 가지 내용을 지닌다. 첫 번째는 정보 조직, 두 번째는 정보 여행, 세 번째는 정보 여과의 문제, 그리고 네 번째는 행위 양식의 감지와 관련이 있다. 이 네 가지를 포함하는 정보 위기는 베니저(1986)가 통제 기술의 위기라 명명했던 그 위기의 현대적 진전 형태라 할 수 있다. 당 신은 수많은 기술 단체와 정부 단체에서의 다음과 같이 얘기를 들을 수 있다. 가상현실 기술의 3차원 인터페이스는 사이버공간의 광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정보를 조직하고, 여행하고, 찾아내는데 도구 역할을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가상현실의 사이버공간 인터페이스를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이어지는 글에서 이러한 정부적, 기술적, 그리고 사업적 하부구조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하부구조의 등장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인터페이스로 가상현실이 등장하므로써, 이 매체에 대한 관심은 연구 네트워크, 즉 조절적이고 재정적인 산출, 그리고 조직의 지원과 결합한다. 가상현실 하드웨어는 이러한 조직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나 사 NASA, 미 공군, 벨 연구소 등의 전문화된 연구소의 조직적 요구는 초기의 선도적 역할을 하므로써 연구의 진행를 추동하는 것이다. (R&D 발전의 간단한 역사에 대해서는Hamit, 1993; Kalawsky, 1993; Rheingold, 1991; Rolfe & Staples, 1986 참조). 군사적이고 우주적 응용과 관련된 3가지 제도적 요구사항은, 몇 가지 향상된 인터페이스의 초기 형태에 대한 그 준거를 제공한다. 1. 군사용, 일반 시민용, 그리고 우주 항공용 산업에서의 비행 훈련은 정교하고 현실감있는 비행 시뮬레이터를 점차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2. 점차 조종실이 복잡해지면서, 비행 조종실의 설계를 통해 선진적 비행 장비에 요구되는 복잡한 인간-컴퓨터간의 정보 교환을 영상으로 처리하며 관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는데, 비행 시뮬레이터 기술을 적용했다. 3. 원격로봇 공학 telerobotics(군사, 핵, 해양학 등의 응용 형태로써 원거리의 로봇 통제)의 초기 시도는 원격재현 시대에 들어와서 초기 인터페이스의 몇 가지 원형이 발전하도록 하였다. 북부 캐롤라니아 대학과 같은 학술 기관은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과학적, 건축학적, 의학적 시각화의 다른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Holloway, Fuchs, & Robinett, 1991의 평론 참조). 이 기관들의 개척자적 핵심집단의 외곽에 놓여있는, 기술지원 조직과 기업 조직은 가상현실의 응용과 가상현실에 기초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출현을 지원할 정도로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그 조직들 중 일부에는 컴퓨터 그래픽스(예를 들어 실리콘 그래픽스), 소재지에 근거한 오락(예를 들어 디즈니)과 같은 핵심적인 연관 산업이 있다. 가상현실의 약속에 대한 이러한 공개와 자극으로 인해 수많은 기구의 재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의 초기 발전에 있어서 연관성이 적었던 일부 커뮤니케이션 기업들(예를 들어 유에스 웨스트 U.S. West, 나이넥스 NYNEX, 세가)이 존재한다. 많은 기업들은 사이버공간의 진입 채비를 갖추고 있다. 전 세계에 걸쳐 학술, 정부, 기업 기관의 가상현실 연구센터가 팽창하는 중요한 시점은 바로 1990년대이다. 각 기관은 가상현실의 기술, 설계, 지원 측면에서 작게 혹은 전적으로 헌신을 다했다. 90년대 초에는 단지 몇 안되는 조직들만이 - 대단히 광의의 뜻을 지닌 - 가상현실 센터로 취급될 수 있을 뿐이었다. 1993년의 명단 내용을 보자면 가상현실의 창출과 확장에 참가하는 400개 이상의 학술 연구소, 정부의 연구기관과 기업을 기록하고 있다.(예를 들어 Panos, 1993). 대부분의 이전 기관들이 빠르게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고, 소규모 기업이 이 분야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군사, 커뮤니케이션, 혹은 가전 회사들은 갑자기 "가상현실의 멋"에 따르게 된다. 소수 방위 산업체의 개편은 가끔 텔레커뮤니케이션, 정보 시각화, 그리고 통제와 같은 가상현실의 커뮤니케이션 응용을 향한 움직임을 의미했다. 가상현실 기업가의 제 1의 물결은 대체로 초소형 기업군으로 구성되었다. 서부 해안에 집중된 이 수많은 기업들은 가상현실 시장의 거대한 물결을 올라타 서핑하기를 바랬다. 많은 기업들은 재정적 지원에 갈망하거나, 거대 기업과의 제휴를 꿈꾸었다. 1993년 주도적인 창업 회사이자 제 1의 가상현실 미디어 대열에 있었던 VPL은 이 기업 전쟁의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마쓰시타 Matsushita와 같은 거대 가전 기업은 VPL과 같은 기업들에 일시적으로 손을 댔으나, 대부분의 기업들은 분주한 가상현실 시장의 등장을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리는 동안 그들 기업의 호주머니에는 엄청난 금이 쌓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모든 기업들, 그리고 기술적 하부구조와 정부의 하부구조에 있어서, 가상현실과 관련된 활동의 증가가 가상현실에서의 정보에 대한 엄청난 열망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못된다. 일군의 기업가, 기술관료, 그리고 사이버해적 Cyberpirates은 소형 망원경을 통해 바로 앞에 놓인 험난한 바다를 개관하는데에 이른다. 이러한 정보 탐구는 산업 회보(예를 들어 《사이버에지 저널》 CyberEdge Journal, 《가상현실 리포트》 Virtual Reaity Report, 《가상현실 뉴스》 VR News와 같은 다양한 발행물), 리서치 저널(예를 들어 《프레즌스》 Presence), 연례 회의(예를 들어 가상현실, VRAIS, Cyberthon 등)에 의해 강화된다. 이 모든 활동의 윙윙거림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제어하게 된 기관과 사회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그것은 등장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조직 하부구조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가상현실에 대한 거대한 양의 공중의 논의에서 보다 이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1장의 가상현실 기사에 관련된 그림들이 이의 실례이다. 이 그림들은 동시에 새로운 기술을 논의하는 수백만의 목소리를 포착한 일종의 사회적 지표일 뿐이다. 미국내에서 보도되는 정보에 대한 조직들의 업청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계속될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바렌티와 바르디니 Valente & Bardini가 11장에서 논의한 제 1의 확산 단계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평가하기에는 이 가상현실 기술을 인지하고 있는 비율이, 커뮤니케이션, 컴퓨터, 그리고 정보 처리과정을 구비한 지역 공동체에서는 그 기관엘리트 중 90% 이상이며, 일반 대중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이 두 비율은 가상현실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정부의 장갑낀 손 18세기에 정부와 법은 결과적으로 신개척지로 향해서 쇄도하는 정착자들을 따랐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정부의 장갑낀 손이 사이버공간에 들어갔다. 정부의 손은 개방적이고 교육적이며, 동시에 규제적이고 인색하다. 18세기의 법률가의 손이 총을 집으려고 했다면, 현대 정부의 손은 규제장치에 해당하는 녹이 슨 통제 패널의 핸들을 조정하려 한다. 미디어 엘리트들, 특히 전송 채널을 통제하는 사람들은 규제 시스템이 재검토되어야만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현재의 규제틀은 희소성 개념하에서 만들어졌고, 이 속에서 주의깊게 규제되어야만 하는 한정된 양의 가용력만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국내의 전 지역과 전세계는 풍부함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앤드류가의 경쟁력에 관한 위원회 회장, Daniel G. Burton, 1994, p. C3). 정 부의 화폐는 가상현실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미국 국립과학재단 (NSF)과 같은 정부의 자금관리 기관은 북부 캘로라이나 대학과 MIT의 대학 연구센터에 많은 작업을 지원했다. 미 공군, 해군, 그리고 나사와 같은 또 다른 형태의 기관들은 초기 의견들에다 다량의 구성 요소들을 첨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정부 관료와 정부 기관은 신용을 얻으려 하는데는 민첩하다. 앨 고어 Al Gore부통령은 광대한 포괄 영역을 지니는 컴퓨너 네트워크 기술에 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진정으로 이 분야에서 맨 선두에 선 발견들 모두는 정부의 지원에서 나온 것이며, 정부는 계속해서 사적 부문의 투자 경계를 넘어서는 첨단 기술에 대한 투자를 독려할 것이다." ("Conversation," 1993, p. 62). 간단히 애기해서 정부 기관은 그 기술이 이미 연구소를 떠나고 각 가정으로 진입하는 때에 산업 관리 혹은 입법에 의한 규제를 추구하기 바란다. 가상현실이 사이버공간에 진입하기 위한 인터페이스가 된다면, 규제 요구는 표준화, 접근의 평등, 그리고 소비자 안전지역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십상이다. 앨 고어 부통령에 따르면 "정부는 촉매 역할을 맡을 것이며, 상호접속, 호환성, 그리고 보편적 접근을 보장하는 표준과 프로토콜을 만들 것이다." ("Conversation," 1993, p. 62). 시뮬레이션 질병 (Biocca, 1992)의 성격과 관련된 건강과 안전 문제는 규제 방식에 있어서 안전 설계를 행하는 쪽으로 유도될 것이다. 아마도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은 가상 소유권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가상 탁자, 가상의 바다 바람, 혹은 모나리자의 3차원 얼굴을 누가 소유하는가? 14장에서 하비 Harvey는 사이버공간 내부에 다중 감각적 체험과 체험의 "소유권"이 증가함에 따라, 몇 가지 법적이고 규제적인 부분의 문제 제기를 시도한다. 가상현실의 시대? 새 로운 지배적 매체의 요소는 다음과 같은데 있다. 전형적으로 다른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 설계, 감각 정보의 새로운 채널, 그리고 새로운 매개 커뮤니케이션 양식. (4장, Biocca & Delaney를 참조). 전송 채널에 있어서 새로운 채널들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즉 증가된 가용량, 그리고 채널을 지나는 증가된 경쟁과 불안정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러한 사실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그 답에 대부분이 긍정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 새로운 시스템을 가상현실 혹은 사이버공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아마도 그렇게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현재 부상하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 근본적으로 다른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으며, 가상현실 인터페이스가 이 새로운 가능성의 본보기임은 분명하다. 이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수많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가상현실의 가능성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설계를 짠다. (Heeter; Kramer; Meyer; Palmer의 각 장들을 참조). 혹자는 뒤돌아서서 가상현실이 가져오는 정신적, 사회적, 문화적 효과의 가능성을 고대한다. 예컨대 12장에서 샤피로와 맥도날드 Shapiro & McDonald는 사이버공간의 "리얼리티"에 관한 이전의 심한 혼란을 바라본다. 혹자는 가상현실 기술의 설계자들에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사회적 구성물을 논의하고 재고할 것을 제기한다. (이 책의 Harvey; Lanier & Biocca, 1992 참조). 13장에서 발사모 Balsamo는 우리에게 현재 사이버공간에서 부상하는 몇 가지 문화적 특징을 소개한다. 많은 이들 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그 실천의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기 쉽다고 믿는다.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종종 커뮤니케이션의 기술 변화로 대체되곤 했다. 이러한 사실은 부분적으로 다소 기술 결정론의 형태를 지닌 일반적인 믿음에 기인한다. 기술 결정론적 개념이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흔해서, 그 개념은 국내의 지도층에 이르는 수많은 보수 엘리트의 사고에 널리 퍼져 있다. "실제적 의미에서 인쇄 매체가 현대의 국민국가와 대의제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고 고어 부통령은 말한다. "인쇄 매체가 그러한 일을 행한 것처럼, 만약 우리 국민이 고용량의 컴퓨터 네트워크가 보급할 수 있는 지식 능력으로 그 힘을 얻는다면, 우리의 국민 정신에 있어서 얼마나 풍부해질 것인가!" ("Conversation," 1993, p. 62). 정보, 교육, 기술의 힘을 변형하고 해방하려는 미국의 전통적인 믿음은 여전히 매우 강하다. 가상현실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모든 가정이 진술되어야 하며 연구 성과물로 제출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부분적으로 가상현실과 같은 신기술의 함의에 대한 일반적 수준의 연구이다. 우리는 어딘가 다른 데에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구조 이동은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들에게 역사적 기회와 도전을 나타낸다고 제시했었다. (Biocca, 1992). 또한 이는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다학문간 접근을 요구한다고도 말했다. (Biocca, 1993) 가상현실은 일종의 배가 되어서, 우리가 광대한 사이버공간의 바다를 항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눈 앞에는 험난한 바다가 놓여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가상현실 시대에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삶)의 징후를 보여주는 수평선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종이 망원경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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