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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1/05
    [번역] 사이버공간과 문화의 글로벌화
    두더지-1

[번역] 사이버공간과 문화의 글로벌화

*우연치않게 발견한 글입니다. 제 번역글을 다른 사람이 곱게 보관하고 있을 줄이야... 사이버공간과 문화의 글로벌화 - 존 스트래튼 J. Stratton, "Cyberspace and the Globalization of Culture", in D. Porter (ed.), Internet Culture, London: Routledge, 1997, pp.253-275. 사이버공간과 문화의 글로벌화 존 스트래튼 (이광석옮김) -------------------------------------------------------------------------------- 윌리엄 깁슨은 1984년 {뉴로맨서}란 그의 소설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들의 광범위한 상호접속망으로 매개되는 인간과 기계간의 근본적인 변형을 묘사하기 위해, '사이버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한다. 로버트 애드리언(R. Adria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깁슨의 뉴로맨서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케이스)은 네트에 '빨려들어간다'(jack in). 그는 단순히 이용자도 아니며, 정보고속도로로 쾌속 질주하는 데이터 자동차의 바퀴 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는 네트로 사라져 데이터 흐름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깁슨은 자신의 상상력을 성차에 대한 열망과 정체성 구축의 장소인 신체의 상실에 집중한다. 네트워크나, 깁슨이 명명한 '매트릭스'로 빨려들어가는 카우보이나 쟈키는 남성적이다. 그 명칭이 보여주는 것처럼, 매트릭스 그 자체는 여성적이다. 동시에 매트릭스는 어머니이며 연인이다. 이 매트릭스의 이미지 안으로 자궁과 질이 합해지며, 그리고 신체를 뒤로 한 채 매트릭스로 사라지는 그 남자(케이스)는, 프로이트가 언급하듯 여성의 생식기를 신비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그 욕망을 채우는데 성공한다. 곧이어 그는 '고향'으로 귀환한다. 이같은 욕망 실현의 대가는 신체의 상실이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인터넷 이용자들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신체상실의 가상 정체성과 결합되어 느끼는 쾌감과 열망은 이같은 매트릭스의 이미지 안에서 억압받는다. 하지만 어머니/연인으로서의 사이버공간 이미지를 압도하는 또 다른 주제가 있다. 어머니/연인으로서의 매트릭스는 재생산의 장소이다. 그러나 무엇을 재생산하는가? 간단한 답은 자본주의이지만, 그 내용은 보다 뒤얽혀 있다. 마르크스는 {그룬트리쎄}에서 "순환시간은... 노동생산성에 대한 장벽이 된다"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잇는다. (자본)은 장소간 이동에 소요되는 최소시간을 줄이는 등, 시간을 통해 이 자본(순환) 공간을 괴멸시키려.... 애쓴다. 자본이 더욱 더 발전할수록, 그에 따라 자본이 순환하고, 자본 순환의 공간적 범위를 형성하는 시장도 더욱 확장된다. 동시적으로 자본도 더욱 더 시장의 가일층 거대한 확장을 위해서, 그리고 시간에 의한 공간의 더 큰 소멸을 위해 애쓴다. 순환시간을 줄이려는 자본의 대안은 하비가 간명하게 얘기했던 '공간적 조정'(spatial fix)이다. 이 간결한 용어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리적 공간으로의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확장이란 원재료, 새롭고 값싼 노동 재원, 그리고 새로운 시장을 찾으려는 의도에 있음을 얘기한다. 본인이 주장하고자 하는 사이버공간은 단지 1980년대 후반기에 형성되어 등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사이버공간은 자본의 순환 시간을 가속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19세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 공간은 소비지향 자본주의의 글로벌화와 공간적 조정 가능성의 종결로 새로운 중요성을 담당하게 되었다. 사이버공간의 시작을 고대하면서 찾은 가장 비옥한 지점은 19세기 전반에 발명된 전신에서였다. 제임스 케어리(J. Carey)의 유명한 통찰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신 발명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중대한 점은 '수송'과 '커뮤니케이션'의 결정적인 분리가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내 생각으로는 사이버공간의 생산을 알리는 시발은 컴퓨터 도입에 있다기 보다는, 메시지가 일정 거리를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송·수신자가 체험하는 무시할만큼의 시간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거리를 극복하는 커뮤니케이션 속도의 증가에 있다. 지리적 공간을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듦으로써, 우리는 은유적으로 지리적 공간이 아주 다른 비지리적 하이퍼공간으로 탈맥락화되고 대체된다고 말할 수 있다. 케어리가 설명한 바처럼, 그 공간내에서 "상징은 지형과는 독립적이 되며, 수송활동보다 더욱 빠르게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달리 말하면 이 공간은 우리가 컴퓨터시대에 당연히 여기게 된 정보를 물신화하는데 있어서 그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여기서 전신 도입의 또 다른 측면이 있음을 관찰해야 한다. 케어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전신의 효과는 아주 단순하다. 즉 전신은 공간내 시장들을 균등하게 한다. 전신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교역 목적을 위한 동일 장소에 있게 된다. 전신은 지형을 무관하게끔 한다. 전신은 모든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조건이 가격결정에 관계맺도록 한다. 고전적 의미에서 완전한 정보소비의 실현은 아주 미미한 예외를 제하곤 여기저기서 자의적인 가능성을 제거한다. 케어리는 여기서 전신이 자본주의적 교환에 복무한다고 여긴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바처럼, 만약 화폐가 보편척도라면, 그 이유는 상품이 거래될 때 모든 상품의 비교 가능한 교환가치로 기능하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전신은 모든 지역 시장들을 단일의 하이퍼마켓으로 해소하는 과정을 시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개 거래가 지리적 공간에 걸쳐 정보 전송의 무능력을 드러낸 지점에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하이퍼공간내에 동질화된 하이퍼마켓을 만들어내고 있다. 20세기 후반기, 특히 1970년대 초 이래로 화폐 스스로가 상품으로 물신화되었을 때, 이 하이퍼공간의 시장은 화폐 그 자체만을 거래하는데 이상적이다. 이 과정은 실질상 금본위제를 벗어난 글로벌 운동과 결합되나, 점차 금융자본의 중요도가 증가한다는 점이 이러한 과정의 가장 분명한 사실이다. 화폐와 생산은 이제 직접적으로 연계하지 않으며, 이 화폐는 (세계) 주식교환, 환차 이익을 노린 투기, 혹은 고금리 추구를 통해 훨씬 많은 돈을 만들어내는데 이용된다. 하비는 이 새로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972년 이후 시기에 특별한 점은 금융시장의 예외적인 융성과 변형이라는데 있다. 거기엔 금융자본이 자본주의 내부에서 최고의 (하지만 제한되게) 중요한 지위를 점한 듯 싶던 시기―예컨대, 1890년에서 1929년의 시기―와 같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국면이 존재했었고, 오로지 뒤이어 오는 투기성 자금의 붕괴에서만 그 지위를 상실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 국면에서 전지구적 규모의 고도로 복잡한 금융 조정시스템의 도래와 맞물려서 진행되는 새로운 금융장치와 시장의 폭발만큼이나, 주요 금융기관의 권력집중은 그리 크지 않다. 이 고도로 복잡한 글로벌체계의 번영은, 점차 복잡해져가는 컴퓨터의 발전과 일국을 막론하고 국제적으로 각각의 지점들을 연결하는 자동화되고 디지털화된 텔레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의 결합으로 가능해졌다. 정보와 동일하게 화폐의 상품화로 인해 우리는 다시끔 전송체계로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재구성하게 된다. 우리는 거리가 소멸되고 순수 이동이 장소와 외연을 대체해버린 하이퍼공간을 통해 이 새로운 상품들을 전송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교환체계 내부에서 지리적 공간이 생산 (그리고 소비)의 장소로 바뀌고 식민화되었다면, 하이퍼공간 그 자체는 자본주의 맥락안에서 발전된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산물일 뿐이다. 사이버공간의 영역은 근본적으로 탈영토화되어 있다. 들뢰즈(G. Deleuze)와 가따리(F. Guattari)는 [앙띠오이디푸스Anti-Oedipus]란 책에서 어떻게 자본주의가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가를 묘사하면서 장소의 역사를 구성한다. 로버트 영(R. Young)은 이들이 주장하는 부분을 잘 정리해 놓았다. 생산과 노동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을 추상적인 화폐 가치로 변화시키기 위해, (자본주의는) 흐름을 해독하고, 사회성(socius)을 '탈영토화' 한다. 자본주의는 교환의 보편형식을 손에 넣기 위해, 곧장 재영토화한다.―지역, 국가, 가족과 같은 '모든 종류의 잔여적, 인공적, 상상적, 혹은 상징적 영토성을 세우거나 탈환한다'. 영은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앙띠오이디푸스}를 재인용하고 있다. 이중의 운동이 존재하는데, 그 하나는 해독과 탈영토화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적이고 인위적인 재영토화에 관한 것이다. 자본주의 기계가 흐름을 해독하고 공리화하여 이것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면서 탈영토화를 거듭하면 할수록, 정부 관료, 사법권, 질서 등의 종속장치들은 그 과정에서 잉여가치의 훨씬 큰 몫을 흡수하면서 재영토화를 위해 더욱 매진한다. 영은 이같은 묘사가 '서구' 산업화의 역사에 적합할뿐더러 '서구의' 식민화 과정에 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의 교환은 새로운 공간조직을 생산하는데, 이 공간은 교환과 함께 투영되고 판옵티콘적인 관심사로 구성된다.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투영되고 판옵티콘적 공간과, (그 공간에서는 '객관적' 권력의 실체에 대한 모든 고전적인 분석과 밀접한 도덕가설만 잔존한다.) 그런 연유로 인해 스펙타클적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비록 그가 과장되게 스펙타클 세계의 종말을 선언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정보초고속도로로써 사이버공간을 재개념화하려는 시도는 자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그리고 국민국가간을 연결하고자 하는 향수를 보여주고 있다. 상호작용적 인터넷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민주적 유권자와 '수동적' 청중―후자는 현대 민주국가 내부에서 전통적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그 결과물로서 작동한다―간에 이루어져온 균형 상황이 깨져 나갈 것이다. 사이버공간의 개막은 현재 자본주의의 교환체계 내부에서 하이퍼 탈영토화의 새로운 운동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이버공간의 나날의 새로운 표현, 즉 인터넷은 맥켄지 워크(M. Wark)의 용어인 일종의 벡터(vector)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자본과 군사력 양자 모두는 벡터와는 일정한 간격이 있다. 즉 벡터는 장소, 문화, 영토, 전통 등의 특수성에 해당하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이를 추상화하는 기술이다. 벡터의 가속적 발전은 예외없이 모더니티와 동질적이며, 군사력과 기업의 결합된 이해가 그 후원자이다. 2차대전 이후의 역사에서 나타난 경제 국제화의 맥락하에서 볼 때, 우리는 이 새로운 형태의 하이퍼 탈영토화를 자본주의의 글로벌화의 일환으로 진행된 공간적 조정의 확대로 해석할 수 있다. 애퍼듀라이(A. Appadurai)가 주장하는 바처럼, "우리는 신글로벌 문화경제를 중층적이고 이접적(離接的, disjunctive)인 질서로 이해해야만 하며, 이러한 질서는 더 이상 현재의 중심-주변부 모델로는 (다중의 중심과 다중의 주변부로 설명하는 모델조차도) 설명될 수 없다." 애파듀라이의 강조점은 글로벌 자본주의가 이원적 위치성보다는 흐름의 견지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데 있다.그는 '글로벌 문화흐름'의 다섯 가지 차원―에스노스케이프(민족적 영역), 미디어스케이프(미디어 영역), 파이넌스케이프(금융 영역), 이데오스케이프(이데올로기 영역)―을 확증하는 구조물을 제안한다. 그는 들뢰즈와 가따리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다섯 가지 문화흐름이 점차 사람, 이미지, 상품, 돈, 이념의 탈영토화나 본인이 앞서 얘기한 하이퍼 탈영토화로 이끈다. 그는 인터넷―1994년 약 3천만의 인터넷 이용자들 가운데 대략 2천 5백만이 미국인이며, 모든 사람들은 컴퓨터, 전화, 정보 공급업자에 액서스하고자 한다―접속에 관한 중대한 한계를 인정한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은 애파듀라이가 묘사한 글로벌 흐름의 강화에 있어서 중요한 벡터이다. 애퍼듀라이의 중심-주변부 모델에 대한 메타포는 17세기 식민주의의 확산으로부터 전개된 글로벌 질서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메타포는 '서구'에 대한 주변부의 관계가 일차적으로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기능하는 것을 상정하면서 펼치는, 궁극적으로 현대의 '선진'국들로 구성된 유럽과 미국의 핵심부에 반대한다. 이와 같은 국민국가의 개념은 '서구' 모더니티 수출의 가장 성공적인 것 중 하나였다. 사실상 서구의 국민국가 내부에서, 그리고 그 국민국가를 통해서 그 초점을 맞추는, 포상 관계(emplaced relations)의 개념은 중심-주변부 모델에 중요하다. 애퍼듀라이는 어떻게 이 관계들이 전화되었는지를 얘기하고 있다. 문화의 글로벌화는 문화의 동질화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화는 동질화의 다양한 장치들(군비, 광고 테크닉, 언어 헤게모니, 의류 스타일 등등)의 사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역의 정치·문화적 경제는 이 동질화의 장치들을 흡수하며, 단지 주권, 자유기업, 근본주의 등과 같은 이질적 대화로 귀환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국가는 글로벌 흐름의 완전 개방화라는 점차 미묘한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완전 개방을 막음으로써, 중국 신드롬 등의 폭동이 국민국가를 위협하며, 그리고 국민국가는 미얀마, 알바니아, 북한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낸 민족적 단계를 벗어난다. 메타포의 변화를 통해 나타난 글로벌 자본주의의 재조직화는 국민국가의 체험을 변경시키고 있다. 중심-주변부 축을 따라 조직된 자본주의 세계는 공간, 특히 국민국가와 그 국민국가의 식민지적 부속국들로 조직된 지리적 공간에 의해 지배된다. 글로벌 흐름은 국민국가의 자본주의적 역동성이 발휘된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이 흐름은 강제적으로 과거의 국민국가적 현실을 자명하게 드러낸다. 다른 어떤 것도 인터넷만큼이나 이를 분명하게 드러내진 못하고 있다. 전신·전화의 등장으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즉시성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국민국가를 묶는데 일조하고 있다. 첫째는, 이 두 가지 기술은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동질화하려는 맥락에서 이용되고 있다. 이 기술이 국가의 관료적·관리적 시스템 내부에서 이용되고, 기술과 시민과의 직접적 연계와 이 기술들이 군사력과 경찰 통제력을 제어하도록 하는 권력의 집중화 경향, 이 양자 모두는 이 국가간 결합의 과정을 강화한다. 둘째는, 국민국가 내부에서는 이 기술들을 우선적으로 이용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새로운 텔레커뮤니케이션 기술은―예컨대 위성의 이용을 포함하여― 국제 전화 통화를 더욱 값싸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시민 이용자들에게 보다 분명해졌다. 케어리의 주장을 재정리한 워크는, "철도와 더불어 전신과 전화의 벡터는 국가간 커뮤니케이션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논평했다. 케어리는 "어떤 의미에서 철도와 운하가 시장을 지역화했다면, 전신은 그 시장을 국제화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통신기술들은 내적 동질화로의 경향, 즉 국민국가의 주요 테마 중 하나이다. 이용자가 하이퍼공간을 정적이고 포상된 공간으로 인지한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순간적으로 기능한다는데 있다. 정보와 화폐―다른 상품과 달리 이 두 가지는 그 자체내에 사용가치를 지니지않으며 단지 교환기능만을 지닌다―모두의 질적 특수성은 인터넷의 벡터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순화된다. 이 특수성은 그 두가지 상품이, 특히 중요하게는 다른 국민국가로 "단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떠보면서, 더욱 더 "다른 쪽 세계에 거주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경우로 바꾸고 있다. 국민국가는 스스로를 다른 국민국가들과는 차별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동질화를 꾀하려 한다, 과거의 예로 봐서, 국가는 타국들과의 차별성을 국민국가의 경계와 그 경계에 의해 구획지어진 내부에 공간적으로 한정되었으며, 물질적이고 문화적 환경으로 표현하였다. 사람들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국제적으로 사용했을 때, 수송으로부터 커뮤니케이션의 분리가 의미하는 것은, 특유의 지리적 공간성으로 표현된 국민국가의 민족 의식이 감소되었다는데 있다. 이러한 전망에서 볼 때, 인터넷의 하이퍼공간은 민족문화의 권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국민국가의 지리적 공간편성을 제거해 버렸다. 일본과 싱가포르같은 수많은 국민국가들이 그들 국가내의 시민들이 인터넷에 접속 가능해지는 것에 대해 주저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이유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민국가들이 국제 전화 통화의 일대일 상호작용성에 대한 통제력의 결핍을―아마 내부의 폭동의 시기를 제외하곤―기꺼이 허용할 채비를 갖춘 반면, 인터넷은 증가된 커뮤니케이션의 질적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고로 논리상 현재 인터넷을 장악한 국민국가내 시민들은 인터넷 기술을 보다 덜 위협적으로 느끼게 되며, 역으로 그러한 장악이 자신의 문화적 통합성을 위협한다고 느끼는 국가들은 더욱 적대적 반응을 보여줄 것이다. 이는 영어의 보편화와 로마식 알파벳 문자의 사용뿐만 아니라, 사이버공간을 지배하는 여러 유용한 정보와 문화적으로 특수한 상호작용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컨대 최근 중심적으로 논의되는 자유, 검열, 인권의 수사학. 하지만 인터넷의 글로벌 흐름에 대한 미국의 지배가 지속되리란 보장은 없다. 여기에는 실제로 아이러니가―혹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내 모순으로 묘사했던 것이―숨어있다. 현재 미국은 인본주의적 사명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프로젝트, 즉 '글로벌 정보하부구조'(GII)를 구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떠맡고 있다. 미부통령 앨 고어는 1994년 일본 쿄토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GII를 구축하려는 노력은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부여하므로써, 전세계의 모든 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 갈 수 있는 하부구조를 제공한다는 공통의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 정보하부구조를 이용함에 따라, 개별 경제단위를 원조하고, 보건·교육·환경보호·민주주의를 증진할 것이다. 보건·교육·환경을 끼워넣은 의미는 경제적 목표와 정치적 목표에 대한 이중성을 크게 강조하는 것이다. 고어는 인터넷이 부여한 정보접근의 '자유'가 권위주의적 국민국가들 내부의 민주화 운동과 절대적으로 상관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미국은 경제적(그리고 이데올로기적)우위를 지키기 위해 GII를 촉진하고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많은 비미국인들과 비영어권 사람들이 그 대열에 합류했을 때, 인터넷 사용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가 좀 더 강하게 지속되고 있다. 경제질서와 인터넷의 결합은 국제전기통신협회(ITU)이 GII에 적용했던 5가지 원칙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는 '사적 투자, 시장중심의 경쟁, 유연 규제체계, 비차별적 접근, 그리고 보편적 서비스'이다. 앞의 세가지 원칙은 GII의 구축, 소유권, 그리고 경영에 대한 자본주의적 형식을 강조한다. 나머지 두가지 원칙은 시청자에 관한 내용이다. 후자의 내용은 전세계의 시민을 일종의 시청자로 구성한다는 취지 혹은 부여받은 유토피아적 특성, 이념이다. 여기서 우리가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완전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어가 행한 인터넷에서 정보초고속도로의 수사적 이동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이 연관성에 주목한다면, GII의 구축이란 무한 팽창의 미디어기업들에게 인터렉티브 상품 전달시스템의 기초를 제공에 다름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이 시장자본의 꿈이 성취될 것인가? 워크는 군사적·기업적 용어를 사용하여, "더욱 빠르고, 더욱 값싸고, 보다 유연적이고, 훨씬 광대역의 벡터들을 통해서, 이 벡터들에 전략적 우위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자본들이 어떻게 무장하는지"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애드리언은 전화가 지닌 부가가치 서비스의 성장 전망의 한계성을 유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역폭의 증가가 미치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전화 공간은 대역폭의 증가로 상업 선전에 적합해진다. 즉 정보오락 상품들이 그 공간을 점유하고, 쇼핑몰로 뒤바꾼다. 이 기업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인터렉티브 케이블 TV이다. 이 케이블 TV는 케이블상에 거의 어떠한 공간도 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 상호작용성은 일종의 경품처럼 제시되는 온라인 쇼핑, 비디오게임, 전화를 통한 유료 영화 등으로 한정된다. 이처럼 한정된 의미의 정보고속도로는 온라인으로 구입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생산, 서비스, 정보, 오락의 전시장일 뿐이다. 앞서 기업들이 이념적으로 상호작용성을 제한하고자 한다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전화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비교해서 대중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진전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전화는 탈중심적이고 인터렉티브하다. 전화와 동일한 통신기술에 기초한 인터넷은 전자우편이나 '대화'와 같은 일대일 상호작용, 그리고 동시적이고 다발적인 상호작용의 유즈넷, 리스트서브 리스트(LISTSERV lists), 인터넷 릴레이 채팅(IRC)와 같이 매우 다양한 일대다 상호작용을 행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현대 국민국가의 조직과 함께 전개된 라디오와 텔레비전 기술방식과는 그 기능적 연관성에 있어서 대조적이다. 앤더슨(B. Anderson)은 현재를 적절하게 드러낸 이미지란 점에서 국가를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y)로 묘사했다. 그는 일련의 신화와 지식의 공유가 국민적 정서를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문이 신화와 지식의 공유를 발생시키는 한 수단으로 출발했다고 주장한다. 앤더슨은 남미에 관해 서술하면서, 신문의 전신으로 다음의 내용을 실은 가제뜨(gazette)를 언급하고 있다. 가제뜨는 식민지에 대한 정치적 임명권, 그리고 중심도시들에 관한 뉴스―선박이 입·출항할 때, 어느 항구에서 어떤 상품들을 가지고 얼마에 거래되었다는 따위의 상업적 뉴스―와 나란히, 부자들의 결혼 등도 다루고 있다. 달리 말해서 이 곳에서는 선박, 저 곳에서는 결혼, 그리고 이 곳에서는 주교, 저 곳에서는 가격을 얘기하는 것은 바로 식민통치와 시장체계, 그 자체내 구조를 보여준다. 이러한 식으로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의 신문에 실린 선박, 교량, 부교, 가격 등은 특수하게 모인 비슷한 독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들 사이에 상상된 공동체를 창출했다. 앤더슨은 신문의 '뉴스'적 측면이 발전됨에 따라, "신문 그 자체의 개념으로 인해 '세계의 사건들'이 각 지방의 독자들에게 특수한 상상의 세계로 굴절된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신문의 '발명'과 국민국가의 등장간의 연관성 속에서 또 다른 두 가지 발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현대 공론장의 형성과 대중 시청자의 형성이다. 하버마스는 현대 공론 영역의 등장에 대한 영향력있는 논의를 통해서, 부르조아적 발전이 자본주의 시장의 확산이라는 맥락하에서 발생했던 것처럼 공론장 또한 이 맥락 속에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론장을 민주주의의 기능에 핵심 요소라고 본다. "정치영역의 기능 요소로서 공론장이, 시민사회의 욕구에 따른 국가권력과 함께 시민사회의 자체 접합을 위한 일종의 기관처럼 규범적 지위를 얻었다"고 그는 제안한다. 인쇄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신문 문화에 기초한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은 민주사회의 주된 정치적 논쟁장이다. 이 점에서 신문은 일차적으로 공개된 논쟁을 모사하거나 보조한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신문의 역할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앤더슨은 신문이 독자에게 정보를 알림으로써 국민국가내에 상상된 공동체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후에 등장하는 대중매체인 라디오와 텔레비전처럼, 신문 또한 상호작용적이 아니라는데 있다. 신문의 국가내 상상된 공동체 구성은 침묵하는 대중을 구축하므로써 이루어진다. 존 하틀리(J. Hartley)는 공론장 구성에서의 대중매체의 역할에 대해 훨씬 비판적 관점을 강조하면서, 앞서의 접근 방식을 한 단계 높이고 있다. 하틀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상황과 현대적 상황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늘날에는 물리적인 공론 영역이 부재하며, 정치는 '민중적'이지 않다. 동시대의 정치는 두 가지 의미에서 대리적이다. 즉 선택된 소수만이 시민을 대표하며, 정치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거쳐 공중에게 제시된다. 대리적 정치공간은 말 그대로 영상들로 이루어지며, 그 영상들이 공론 영역을 구성한다. 공론장의 구성을 영상들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 공론장은 (신문의) 인쇄물이나 (라디오의) 음성도 포함하고 있다. 하틀리는 공론장의 발생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토마스 홉스가 현대의 정치 국가를 이론화한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의 최초 시도로 회귀하여 살피고 있다. 리바이어던이 한치의 에누리없이 완전하게 대표자의 권력을 승계하여 생명을 얻는 바로 그 때..., 이제부터 시민 주체들(사적 개인들)은 리바이어던이 그 주체들에게 '위임하거나' 양도한 것들을 수행한다. 간단히 말해 공중은 자신의 주권을 리바이어던에게 이양하며, 그런고로 리바이어던은 공중의 창조자가 된다. "종종 절대군주제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초강력 국가, 즉 리바이어던은 이제 민주주의가 가능한 정치적 조직체가 되버린다. 이는 정치 참여가 공중의 사라짐이라는 표상으로 전화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공중이 시청자로 전화되었다. 이엔 앙(I. Ang)은 대중매체 시청자의 광범위한 구성을 논하면서, 기본적으로 시청자 구성을 두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즉 텔레비전의 분화가 상업서비스 형태와 공공서비스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을 반영하여, 이른바 시장형 시청자(audience-as-market)와 공적 시청자(audience-as-public)로 나누는 것이다. 비록 그 두 가지가 본질적인 측면에서 구분되나, "두 종류의 제도가 불가피하게 정복 대상으로서의 시청자에 관한 도구적 관점을 강화한다.... 두 가지 경우에 시청자는 구조적으로 단선적이고 일방향적인 과정의 끝에 수동적으로 놓인다"고 그녀는 지적한다. 시청자는 이 지배적인 시청자의 광범위한 구성으로 인하여 집중하고, 대량화하고, 수동적으로 된다. 앙이 텔레비전에 집중하여 저술하고 있지만, 그녀가 천착한 시청자에 대한 이해란 현대의 국민국가내 공론장의 보편화된 특성일 뿐이다. 앤더슨은 어떻게 국가의 탄생이 시청자로 하여금 상상된 공동체로 전화하여 국가의 성원들을 구성하는가를 묘사한다. 하틀리는 유사하게 민주주의 국가의 통제 과정을 제시한다. 하버마스에게는 신문의 역할, 그리고 공론장의 퇴보를 가져온 새로운 시·청각 매체간에 불연속성이 존재한 반면, 하틀리는 이 시·청각 매체를 신문이 항상 그 일부가 되어 동일한 과정을 연속하는 것으로 본다. 하틀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 왜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집중화된 커뮤니케이션 전달체계로 발전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간단히 말해 국민국가의 상상된 공동체, 그 국가의 공론장, 그리고 그 국가의 시청자는 관념적으로 공통의 경계에 서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구나 여러 포럼 가운데에서 자신의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인터넷의 보편적 상호작용성은 (저널리스트적인 객관성 개념에 전형적인) 공공 정보, 그리고 민주주의적 국민국가의 상상된 공동체 형성에 중심적 특성, 즉 개인 견해간 차이에 위협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 수 년간에 걸쳐 대중매체와 시청자 형식을 재구성하기 시작한 미디어 발전의 두 경향이 존재한다. 첫째는 케이블 TV의 확산으로 채널 다양화로의 이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내로우캐스팅과 '대중매체'라는 범주에 대한 의문을 보편화시켰다. 둘째는 보다 확대된 상호작용성으로의 이동이다. 이는 VCR의 사용에서 페이퍼뷰까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시청하길 원하는 프로그램을 주문할 수 있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인터넷은 이 두 가지 발전에 대해서 질적인 이동을 촉진한다. 앙에 의해 묘사된 수동적인 미디어 시청자는 인터넷의 경우에 (상호)능동적이 되며, 완전하게 미디어 생산물의 제작에 참여한다. 그것은 '정보초고속도로' 개념을 향한 수사학적 이동의 중심부에 있는 또 다른 대중매체 전달체계로 인터넷을 '재형성하려는' 시도이다. 전통적인 대중매체의 시청자가 이미지를 소비한다면, 정보초고속도로의 잘 은폐된 목적은 대중매체의 수동적이고 수신만 하는 시청자를 능동적이고, 소비하는 시청자로 전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청자는 단지 이미지들뿐만이 아니라, (댓가를 지불하고) 온라인상에서 유용한 광범위한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한다. 시민들이 형식상 국민국가의 물질적이고 규율적인 표현물에 의해 규정되는 일상생활의 생산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미셸 드 세르토(M. de Certeau)의 {일상생활의 실천The Practice of Everyday Life}의 급진적 내용에서, 그는 "주변성(marginality)이 오늘날 더 이상 소수집단으로 제한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적이고 침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해서, "주변성이 보편화되고, 주변 집단은 이제 침묵하는 다수가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드 세르토가 얘기한 내용은 앤더슨, 하틀리, 앙이 표현한 과정들을 이어받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논의는 탈대중화와 상호작용성에 의해 위협받음으로써 표현되며, 이 두 가지 특성은 모두 과거 대중매체로 인해 침묵하는 대중의 '공론적' 주장으로 여겨지고, 대중매체의 현대 형식내에서 인터넷의 액서스 구조에 중심이 된다. 멕시코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인 치파스와 같이 소수의 침묵이 강요된 집단이 인터넷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 있으며, 누군가 그들의 의견을 뉴스그룹을 통해 강력히 알린다면, 미디어 조직과 시청자의 구성뿐만 아니라 단일의 특수적인 상상된 공동체(규율적이고 그 규율에 따르는 공론장)의 형성과 국민국가 그 자체의 이해 방식도 바뀌어간다. 인터넷은 글로벌 흐름내에서 하나 이상의 벡터로 기능하면서, 국민국가의 수사학을 동질성에서 다문화주의로 이동시키고, 국민국가의 정치를 계급 중심에서 이익 중심으로 이동시켰다. 우리는 이제 처음에 고어가 인터넷에서 정보초고속도로로 수사(와 물질 형태)를 바꾸는 것에 대한 관심사와 함께, 완전하게 겹쳐있는 필연적인 두 번째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적 고려점에 더하여 인터넷이 현대 대중매체 보다 훨씬 나은 것으로 재구성하며, 그리고 인터넷이 장차 국민국가의 제도형태에 덜 위협적인 것으로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과거의 '시청자'가 자신의 관점을 능동적으로 제시하게끔 하는 매우 새로운 공론장 개념과, 공동체 개념 사이를 주의깊게 구분해야만 한다. 특히 미국의 인터넷에 대한 논의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이 통합되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으로 현대 공론장 개념은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 사이의 구별에 따른다. 공적 생활영역인 공론장은 현대에는 공유된 지식 공간과 정치 공간에 해당한다. 앤더슨과 하틀리는 18세기 이래로 전개된 전통적인 신문의 여러 정보가 현대 공론장 형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본인은 앞서 시민/시청자는 현대의 공론장내에서 침묵하기를 강요받는다라고 제안했다. 이 상황은 실제 조금 더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18세기 런던의 살롱문화(coffee house)에서 오늘날 사무실내 차마시는 시간의 토론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 진행된 문제 설정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문제 설정이란 대중매체에서 제시한 정보로 제한받으며, 미디어와 시청자의 구조적 관계는 미디어 조직 내부의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와 토크 라디오의 표현 이외에는 거의 어떠한 응답이나 다른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인터넷은 시청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포럼을 제공한다. 제이 웨스톤(J. Weston)은 "구자유와 신기술-공동체 네트워킹의 진화"이란 논문에서, 인터넷의 잠재력을 매우 분명하게 제시한다. 인터넷은 대체로 사람들 스스로의 발언대를 구하는 것과 관련되며, 공적인 방식으로 서로가 발언하고, 서로간에 전달되는 내용은 중요성에 있어 분절적이고 심지어 이차적이다. 대중매체는 (개인의) 존재를 확인하지도, 확인할 수도 없다. 시청자의 시장은 존재하지만, 독자, 청취자, 혹은 관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웨스톤의 논문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그는 시민이 공론장에서 발언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대중매체의 전개에 의해 제한받았던 일종의 '구자유'라고 믿는다. 나는 본질적으로 이것이 전혀 구자유가 아니라, 실제로 현대국가의 존재 방식인 민주주의가 현존하는 자유의 환상 가운데에서 구축되었다고 보고 싶다. 공동체 논의는 현대―서로간에 얘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에 대한―인터렉티브 커뮤니케이션 개념의 공론장 논의와 일치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 서구에서 '공동체'는 한편으로 향수적인 내용을 함축하여 전한다. 공동체는, 현대의 기초적 변화―통속화, 도시화, 자본주의, 산업화, 그리고 물론 국민국가의 출현―로 인해 대인간 상호작용의 분열과 당연한 도덕 질서의 상실이 발생하기 이전에, 생활양식이 신비적인 방식으로 이해되는 근본적 '공유감'에 속한다. 미국내에서 현대 이전 시기의 공동체에 대한 이 향수적 신비화는 '소규모 마을'의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다. 루스 로젠(R. Rosen)은 그 근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835년 초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대리적 공동 생활을 제공하는 광범위하게 결합된 네트워크를 구성하느라고 분주하다고 지적한다. 도시가 팽창하는 것처럼, 아직도 미국인들은 아득히 지나쳐 버린 소규모 마을을 슬퍼한다. 미국인들이 강제로 익명성이나 도시 생활에 맞닥뜨리도록 강요받을수록, 그들은 안정성, 면대면 면식, 공유 가치들, 마을의 도덕적 책임성을 더욱 더 신비화했다. 20세기 초의 수십년간 그러한 신비화는 진보당의 개혁자들이 미국 도시를 소규모 마을로 새롭게 고치려는 시도에 자극을 주는 만큼이나 더욱 강화되었다. 하워드 레인골드(H. Rheingold)의 {가상공동체-컴퓨터화된 세계에서 연결하기}(1994)란 책은 아마도 가장 널리 애독하는 인터넷 입문서이다. 레인골드의 책 제목은 그가 바라보는 인터넷의 이용의 전제 조건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WELL에 대해 언급한다. 현재 인터넷에 연결된 WELL은 "중규모의 컴퓨터 컨퍼러싱 공동체"이며, 그는 이 가상공동체의 성원이기도 하다. 수년전의 가상마을과 구별되는 여러 특성들을 지닌 통일체로서, WELL은 소규모 마을이지만, 이제는 네트의 활발하고, 윙윙거리는 혼돈으로 인해 그 마을 입구가 개방된 채로 유지된다. 여기서 WELL은 소규모 마을과 닮은 어떤 것이기 보다는, 바로 그 소규모 마을로 묘사된다. 인터넷의 WELL은 비교적 도시에 가까운 것 같다. 레인골드는 이 가상 '도시'안에서 비슷한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가상공동체내의 일원이 되는 것을 가능케 한다. 흥미롭게도 로젠의 주장대로라면, 레인골드는 그 연결점을 멜로드라마에서 찾고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특이한 가상공동체의 변화를 지켜본다는 것은 자신만의 인류학적 스릴과, 그 공동체는 관객을 배역과 분리시키는 어떠한 경계도 지니지 않으면서, 끝없이 아마츄어적인 멜로드라마를 훔쳐보는 흔하디 흔한 관음증 증세를 갖게 한다. 인터넷의 미국적 체험에 있어서, 공동체 이미지의 중요성은 개인적 회상을 통해 얘기될 수 있다. 1994년 11월 19일, 피터 맥더모트(P. F. McDermott)는 CPSR-GLOBAL LISTSERV의 질문에 대한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질문인 즉슨, "누군가가 왜 인터넷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미국내에서 그토록 대중적이 되었는가를 물었고, 여타 동일 수준의 선진국들과 미국이 다른 어떤 특별한 이유가 존재하는 지도 묻고 있었다." 맥더모트는 인터넷을 찾아 다니고, '공동체 의식'에 잠기는 그 자신의 즐거움을 묘사한 후, 계속해서 그는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그 공동체에 대한 근거들을 깊이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종류의 미국문화가 공동체 의식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해 내 스스로 놀란다. (그렇다, 우리는 바로 이 공동체 기반 위에서만이 우리 자신의 문화를 지닌다.) 나는 지난 2,30년간을 거치면서 미국내 공동체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놀란다. 나의 부모가 어른이 되가면서, 부모세대의 가족들 모두는 이웃과 알고 지냈다. 하지만 나는 내 친구들이 이제 거의 어떠한 이웃도 알지 못하며, 동네에 사는 다른 가족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수도 없이 들었다. (이와 같은 것이 내가 단지 상상하는 것들이 아니라면)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상실이며, 공동체에 대한 대응적 모색이 바로 미국에서 인터넷이 대중화되는 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맥더모트는 이 의미심장한 설명을 통해서 부모 세대와 자신의 세대 사이에 '공동체' 파괴가 자리하고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인터넷은 그에게 그의 부모가 속해있던 현실 공동체에 대한 가상 대체물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내 삶의 질이 하락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으며, 인터넷에서 구성된 가상공동체가 그 균형을 되찾는데 일조하리라 여긴다. 우리는 그와 유사한 관점을 CPSR-GLOBAL에 베른트 프로만(B. Frohmann)이 쓴 메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만은 유럽적인 시각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수사적 질문을 던진다. "사이버동료들(Cyber-buddies)의 공동체 개념의 매력성이, 미국내 공론장의 퇴보에 직접적으로 비례하여 그 힘을 획득하고 있으며, 공론장이 쇼핑 몰과 디트로이트의 르네상스 센터와 같은 거대 기업본부 등의 사적 공간으로 대체된다." 프로만은 계속해서 미국 도시와 유럽의 수많은 도시들의 건조환경과 비교하고 있다. 나는 최근 그라즈의 회의석상에서 동료들에게 말을 건넸을 때, 그들 중 대부분이 미국의 사이버공동체에 대한 전형적인 자만심을 어리둥절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당신이 확대된 공론장을 지닌 도시안에 거주하며, 그리고 도시안의 사람들이 (공적으로 유지되는) 공간에서의 교류에 실제적 기회와 장소들을 갖는다면, 그들의 반응은 이해할만한 것이다. 결국 당신은 사람들 사이의 의미있는 연결 장소로써 '정보초고속도로'에 대한 선전이란 조금은 웃기는 짓이라 여기기 십상이다. 단지 하이퍼공간에 존재하는 가상공동체가 인간 서로간에 지리학적 간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라면, 프로만의 오류는 현실 공동체와 가상공동체를 글자 그대로 동등하게 다루는데 있다. 하지만 그가 유럽과 미국 도시의 물질적 형식을 비교하면서 지적하는 바는 시사적이며, 그의 지적은 신비적 공동체를 향한 미국 문화의 특별하게 진전된 갈망과 같은 것으로 그 의미가 보충될 수 있다. 결국 유럽도시는 광장들로 구성된 현대 이전의 센터들이 조성되어 있는 반면에, 미국의 모든 도시는 현대적이며 자본주의적 교환, 특혜 사업, 그리고 지금의 쇼핑몰의 요구에 따라 형성되었다. 현재 미국의 소규모 마을에는 공공 특수기관, 교회, 마을 사무소 혹은 우체국까지도 있다. 소규모 마을과 같은 미국의 공동체 이미지는, 그 동일한 이미지를 이용하여 이른바 커뮤니티 네트워크, 혹은 프리넷(Freenet)을 기획하게 되었던 실제 근거이다. 레이 아취(R. Archee)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프리넷의 주된 철학과 근본적 전제는 커뮤니티 컴퓨터 네트워크에... 힘을 불어넣는 일이다. 이러한 철학과 전제는, 그 네트워크들이 자유롭거나, 혹은 요금을 지불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일반인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 즉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다 하더라도 유효하다. 제이 웨스톤은 캐나다의 내셔널 캐피털 프리넷을 기초로 삼으면서, 이 상호 의사소통의 네트워크들에서 강화되는 힘의 본질을 강조한다. 내셔널 캐피털 프리넷은 개인, 집단, 조직 모두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무언의 플랫폼, 즉 상상된 공론장이다. 그곳에서의 분쟁과 논쟁은 그 공동체 내부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논쟁의 징후로써 발생할 수 있다. ...그러한 공간은 프리넷에 대신한 어떤 공적이거나 사적인 조직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네트에 의해서만 오직 구성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공동체 개념과 광범위한 기초하에 놓인 새로운 상호작용의 공론장 구성이 불투명해지는가를 지켜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터넷이 소규모 마을의 공동체 모델을 (재)창출한다고 여겨지는 반면, 우리는 여기서 캐나다의 내셔널 캐피털 프리넷이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기 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공동체로부터 발생했으며, 이전에 침묵하는 사람들의 발언이 가능해진 가상 공론장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웨스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적인 소속'과 '참여 민주주의'와 같은 표현들은 우리의 수사적 전통에 아로새겨져 있으나, 이 표현들에 대한 자명한 수용은 항상 동일하게, 확실한 접근 무능성을 그 전제 조건으로 하였다. 언제나 우리에게 소속과 참여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을 앞서지 못한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달리 말해 웨스톤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란 전형적으로 민주주의의 실제와 반목하면서, 최소한 공공 미디어의 영역내에 머무른다고 봄으로써 하틀리와 그 주장이 일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인터넷(혹은 프리넷)은 실제 소규모 마을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면, 누가 그 안에 거주하는가? 본인의 이 질문은 누가 현재 인터넷에 실질적인 접근권을 지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이 공동체의 신화를 (특히 미국인들에게) 현실화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리고 공동체 신화가 미국의 소규모 마을에 대한 신화적 이미지의 노스텔지어로 표현된다면, 누가 이 신화적인 소규모 마을의 거주민들인가? 오늘날 정체성의 구체화는 대개 코베너 머서(K. Mercer)가 지적한 이른바 "아주 근친한 '인종-계급-성'에 대한 주문"의 세 가지 구도를 통해 드러나며, 정체성은 점차 서구의 거주민들이 타민족의 정체성과 마주쳤을 때 이를 판독하는 세 가지 표식들을 반영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현대 도시생활의 기호 체험에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기호 현상은 형상과 외관을 필요로 한다. 인터넷의 신화적인 가상의 소규모 마을 공동체에서는 이와 같은 분명한 기호 체험이 부족하다. 인터넷 거주자들이 육체가 이탈된 결과는, '현실' 생활에서 차지하는 내용 보다, 서로 다른 성별, 계급적 배경, 혹은 개인사를 보여주는 이름, 프로필, 목소리 등의 가상 정체성 구축이 가능해지게 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자주 온라인 세계가 스스로의 준거틀로 삼는 전형적인 소규모 마을간에, 얼마나 많은 현실적인 차이점이 실제 조정 가능할 수 있을까? 어쨌든 미국적 견지에서 보자면, 인종적 다양성은 널리 공유된 이상으로 여겨지는 만큼이나 현대 도시에서 진행되는 공동체의 쇠퇴과 붕괴에 대한 완곡한 표현인 듯 하다. 특히 이엔 앙과 본인이 다른 지면을 빌어 설명했던 것과 같이, 항상 미국내 흑인의 인종적 차이는 오늘날 이미 벌어진 간극으로 영구 존재하는데, 이는 미국내 동질적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로젠이 지적한 미국의 신비화된 소규모 마을, 그리고 그 안에 공유된 도덕 질서는 미국내 흑인(혹은 아시아인)이 아니라 유럽태생의 (아마도 대개는 2세대인) 백인 정착자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분명하다. 이 근면한 반(半)-전원의 백인들은 소규모 마을을 도시로 변형시키는 한편, 미국내 부르조아의 구체화된 노동 윤리(개인의 자조를 통한 성공)를 제시하면서, 중산층으로 상향 이동하였다. 그리고 모든 도시의 중요한 공직은 남성들만이 차지했다. 인터넷 그 자체의 순수성과는 별도로, 우리는 미국인이 공동체를 인터넷으로 신비화하는 작업이란, 우선 백인 중산층 남성의 지배와 그들의 문화 소비를 재창하고자 하는 신비화된 초창기의 현대적 공동체에 대한 향수적 꿈을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차이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세워진 이질적 국민국가를 구성하려는 현대의 시도와 무관하게, 소규모 마을 공동체의 이미지는 뒤죽박죽의 동질화된 정치의 도가니속에서 단일의 새로운 미국민의 정체성으로 자리잡는다. 본인이 앞서 지적했던 바처럼, 아직까지는 어떤 미국인도 인터넷이 미국문화에 미치는 위협에 관해 불평하지 않는다. 글로벌 정보하부구조에 대해 고어가 천명한 감춰져있고 순진하기까지한 발상은, 유럽의 계몽주의적 가치들에 기초한 미국 이데올로기가 인터넷 공동체을 향한 동질적 기초를 형성할 것이라는데 있다. 인권, 개인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계몽주의적 가치들은 자본주의의 확산이라는 고어의 또 다른 관심사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인터넷을 정보초고속도로로 전화시키고자하는 이같은 결정은, 현대의 대중매체적 관계로 인터넷을 되돌리고, 작금의 공공 언로에 대한 접근을 차별적인 소비상품에 대한 제한되고 인터렉티브한 선택으로 변형시키고, 그 과정에서 국민국가의 재구성을 둔화시킴으로써, 소수 집단의 액서스란 '문제점들'과 대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미국인의 하이퍼공간에 대한 자본주의적 지배가 계속되거나, 서로 다른 언어, 문화, 그리고 비경제적 관심사가 자리잡는 어떤 공간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같은 대치상황이 온존할 것이다. -------------------------------------------------------------------------------- 미주 1. 이 논문의 출처는 J. Stratton, "Cyberspace and the Globalization of Culture", D. Porter ed., Internet Culture, London: Routledge, 1997, pp.253-275. 2. 그는 커틴 기술대학의 커뮤니케이션과 문화연구학부내 문화연구 상임강사이다. 그의 가장 최근 저작은 Writing Sites: A Geneology of Postmodern World(1992)와 The Desirable Body: Cultural Fetishism and the Erotics of Consumption(1996) 이다. 3. Robert Adrian, "Infobahn Blues," CTHEORY, article 21, 1995. ctheory@concordia.ca의전자메일을 통한 접촉도 가능. 그리고 William Gibson, Neuromancer, New York: Ace Books, 1984. 4. 마이클 하임(M. Heim)은 [사이버공간의 에로스적 존재론], {가상현실의 형이상학}, 옥스퍼드출판사, 1995, p.88에서, 깁슨의 매트릭스에 대한 정확한 에로스적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즉 "매트릭스라는 말은 에로스 발생의 근거, 즉 "어머니"란 뜻의 라틴어에서 생겼다"고 지적한다. 5. Karl Marx, Grundrisse, London: New Left Review, 1973, p.539. 6. David Harvey, The Limits to Capital, Oxford: Basil Blackwell, 1982. 7. James Carey, Communication as Culture: Essays on Media and Society, Boston: Unwin Hyman, 1988, p.213. 8. Carey, ibid., p.213. 9. Carey, ibid., p.217. 10. David Harvey,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An Enquiry into the Origin of Cultural Change, Oxford: Basil Blackwell, 1989, pp.192-4. 11. Robert Young, Colonial Desire: Hybridity in Theory, Culture and Race, London: Routledge, 1995, p.169. 12.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London: Athlone, 1984, pp.34-5. 13. Jean Baudrillard, Simulations, New York: Semiotexte, 1983, p.54. 14. McKenzie Wark, "What does Capital Wants? Coparate Desire and the Infobahn Fantasy," Media Information Australia 74(Nov. 1994), p.18의 내용을 Howard Rheingold, The Virtual Community: Homesteading on the Electronic Frontier, Mass.: Addison-Wesley, 1993, p.67에서 재인용. 여기서 레인골드는 인터넷의 기술적 역사를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방성의 DARPA로부터 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15. Arjun Appadurai, "Difference in the Global Cultural Economy," in Mike Featherstone, ed., Global Culture: Nationalism, Globalization and Modernity, London: Sage, 1990, p.296. 16. Appadurai, ibid., p.307. 17. Wark, ibid., p.19. 18. Carey, ibid., p.217. 19. 일본은 인터넷이 일본 문화에 대한 외부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다는데 그 관심을 둔다. 밥 죤스턴(Bob Johnstone)은 Wired 2.2(Feb. 1994), pp.38-42의 "Wiring Japan"이란 글에서 일본이 인터넷과의 연결에 더딘 이유를, "인터넷의 자유롭게 굴러가는 민주주의적 방식이 일본의 가장 권위주의적인 전통과 맞부닥뜨리는 두 문화의 정면충돌" 효과에서 찾고 있다. 싱가폴에서는 최초 관료들의 수많은 주저 이후에, 현재는 일반 대중이 고무되어 인터넷을 싱가폴의 현대화 드라이브의 일부로서 접근중이다. 동시에 아직은 '서구의' 타락상에 대비되는 '아시아의' 도덕적 효과들에 대한 관심이 잔존한다. 20. 1994년 9월 22일, 일본 교토의 국제 전기통신협회(ITU) 주최 전세계 컨퍼런스에서 앨 고어 부통령이 위성을 통해 전송된 연설문. 이 글에서는 뉴스그룹인 LISTSERV CPSR-GLOBAL에서 그 내용을 취하고 있음. 21. Gore, ibid., "Remarks." 22. Wark, ibid., p.18. 23. Adrian, ibid., "Infobahn Blues." 24.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London: Verso, 1983. 25. Anderson, ibid., pp.62-3. 26. Jurgen Habermas,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An Inquiry into a Category of Bourgeois Society, Cambridge, Mass.: MIT Press, 1989, p.74. 27. John Hartley, The Politics of Pictures; The Creation of the Public in the Age of Popular Media, London: Routledge, 1992, p.35. 28. Hartley, ibid., pp.124-5. 29. Ien Ang, Desperately Seeking the Audience, London: Routledge, 1990, pp.31-2. 30. Michel de Certeau,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 p.xvii. 31. 예를 들어, Richard Sennett, The Fall of Public Ma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을 참조할 것. 32. Jay Weston, "Old Freedoms and New Technologies: The Evolution of Community Networking," electronically published in cyberjournal@Sunnyside.Com, Dec. 22, 1994. 33. Ruth Rosen, "Soap Operas; The Search for Yesterday," in Todd Gitlin ed., Watching Television: A Pantheon Guide to Popular Culture, New York: Pantheon, 1986, pp.47-8. 34. Rheingold, The Virtual Community, pp.10-1.(레인골드 책의 부제는 여러 판에서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35. Peter F. McDermott, "US NII for GII," CPSR-GLOBAL LISTSERV, nov. 19, 1994. 36. Bernd Frohmann, "Electronic Communities," CPSR-GLOBAL, nov. 23, 1994. 37. Ray Archee, "The NII and Community Computer Networks: Highway, Tollway or Backroad," Media Information Australia 74, 1994, p.51. 38. Weston, ibid. 39. Weston, ibid. 40. Kobena Mercer, "'1968': Periodizing Politics and Identity," Welcome to the Jungle: New Positions in Black Cultural Studies, London: Routledge, 1994, p.288. 41. Jon Stratton and Ien Ang, "Multicultural Imagined Communities: Cultural Difference and National Identity in Australia and the USA," Continuum 8.4, pp.1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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