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번역] 하비, 범지구화란 문제설정

David Harvey, 1995 (Winter), "Globalization in Question," Rethinking Marxism(Vol.8, No.4), AESA. 범지구화란 문제설정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이광석 옮김, "범지구화의 문제설정", {공간과 사회}(1999, 12호) '범지구화'(globalization)는 우리가 지난 20여년 간에 걸쳐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사고를 형성하는데 핵심적 단어로 자리잡았다. '범지구화'가 우리들 한가운데로 들어온 이유와 그 이동의 방식은 꽤 흥미로운 주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이같은 사고 방식이 출현하는 것과 관련한 그 이론적, 정치적인 함의에 초점을 두고 있다. 나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두 개의 일반적인 논제로 시작하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다수의 사회주의 운동을 포괄하여 서구의 논의틀 내에서 어떤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을 (설령 그것이 현실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조하기 위함이다. (1) 최근 들어 '범지구화'란 말이 왜 스물스물 우리의 논의 속으로 끼어들고 있는가? 누가 그리고 왜 이 용어를 쓰고 있는가?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수많은 '진보주의자'와 '좌파' 사이에서조차, '제국주의', '식민주의', '신식민주의'와 같은 용어를 후미진 곳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사고를 조직화하고 정치적 가능성을 계획하는 방도로서 '범지구화'를 앉힌다는 사실이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가? (2) 범지구화의 개념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가? 이런 식의 용어가 일부 국가, 지역, 지방에 근거한 노동계급 운동의 무기력을 실토하는 신호인가? 범지구화에 대한 믿음이란 것이 지방은 물론이고 일국의 정치적 행동조차도 막아내는 강력한 방해 요인이었나? 국제화된 자본주의하에서 지방의 그리고 일국의 노동계급 운동은 거대한 악마와 같은 글로벌 기계의 하찮은 작은 톱니바퀴 신세이므로, 이제 어디서든 스스로의 정치적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여지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가? 이상에서 범지구화라는 용어 그리고 이와 관련된 내용은 심각한 정치적 대가를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적으로 이 용어를 거부하거나 혹은 포기하기 전에, 우리에게는 그 용어가 사용된 짧은 내력을 통해서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과 그 용어와 결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제대로 천착하는 시각이 유익하다.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시작할 것이다. 즉 '범지구화'를 최근에 출현한 정치·경제적 조건이기 보다는 과정(process)으로 파악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곧 그 과정이 영구적이란 점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한편 그 과정이, 예컨대 아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거나 혹은 그 과정 자체가 특수하거나 "최종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과정에 기반한 정의를 통해서 어떻게 범지구화가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 보다 집중할 수 있다. 1492년 이후에, 그리고 그 이전에도 자본주의의 범지구화 과정은 확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행 과정은 결코 중단됨이 없이, 자본주의 동학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범지구화가 시작된 이래로 그 진행 과정은 자본주의 발전의 필수적 요소였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본의 축적은 항상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문제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지리적 팽창의 고유한 가능성, 공간의 재조직화, 불균등 지리적 발전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벌써 오래 전에 정치경제적인 체제로서의 기능을 중단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 가운데서 이른바 '공간적 조정'(a spatial fix)이라 불렀던 이 영속적인 전환은 일종의 범지구적 자본 축적의 역사적 지형을 만들어냈는데, 이 지형의 특성은 잘 숙지할 필요가 있다.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점을 강조한다. 그들이 적은 바처럼 현대의 산업은 단지 세계 시장을 창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시장을 확대하려는 욕구 또한 "부르주아지를 전 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하여야 하고, 도처에서 연계를 맺어야 한다." 이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세계 시장의 개발을 통해서 모든 나라들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중략) 오래된 민족적 공업은 파멸되었고, 또 나날히 파멸되어 가고 있다. 이 공업들은, 그 도입이 모든 문명국가의 사활 문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공업에 의해, 즉 더 이상 현지 원료를 가공하지 않고 아주 멀리 떨어진 지방의 원료를 가공하는, 그리고 그 제품이 자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대륙에서 동시에 소비되는 공업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국산품에 의해 충족되었던 낡은 욕구 대신에 새로운 욕구가 등장하는데, 이 새로운 욕구는 그 충족을 위하여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 및 풍토의 생산물을 요구한다. 낡은 지반적 및 민족적 자급자족과 고립 대신에 민족들 상호간의 전면적 교류와 전면적 의존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물질적 생산에서나 정신적 생산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개별 민족들의 정신적 창작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적 일면성과 제한성은 더욱 더 불가능하게 되고, 수많은 민족적이고 지방적인 문학으로부터 단일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1952, 72) 만약 이것이 범지구화에 대한 무리한 표현이 아니라면, 장차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짐작하는데는 냉혹함만이 기다린다. 물론 이러한 분석을 거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범지구적 정언명령으로써 반자본주의적이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을 위한 필수 조건, 즉 "만국의 노동자들의 단결"을 정확하게 이끌어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후로 자본주의가 어떻게 지형을 구조화하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들이 이루어졌다.(예컨대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 룩셈부르크의 자본 축적의 구제 형태로서 제국주의의 적소화(positioning), 계급투쟁에 관한 마오의 주요 모순과 부차적 모순에 대한 묘사.) 결과적으로 이들 해석은 더욱 종합적인 설명 방식으로 보완되었는데, 세계적 규모의 축적(아민S. Amin),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생산(왈러스틴I. Wallerstein), 저발전의 발전(프랭크와 로드니A. Frank and W. Rodney), 부등가 교환(엠마뉴엘A. Emmanuel), 종속이론(카르도소F. Cardoso)이 이에 해당한다. 마르크스의 이념과 정치적 실천이 (계급 투쟁의 범지구화 과정과 같은 방향으로) 전지구에 걸쳐 퍼져나간 것과 동일하게,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침략, 파괴, 의도에 저항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방적/민족적인 해석들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다지 가시적이지 않지만 일군의 광범위한 사상가들과 실천가들은, (생산제력과 사회관계의 양자의 측면에서) 자본주의적 공간내 불균등 지리적 발전 과정의 일부로 기능하는 도시화의 역할과 지방적/지역적 차이들, 그리고 반자본주의 투쟁의 불균등 지리적이고 불균등 사회적인 형태들에 보다 주의를 기울였다. 전술적으로 그 효과는, 계급 투쟁의 토양이 꽤 장소 특수적이란 점과, 사회주의가 바라는 보편주의란 서로 차이를 지닌 장소 특수적인 요구, 관심, 열망 모두의 적절한 결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는 점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R. Williams, 1989, 242)가 제안한 바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정치적 토양은 항상 장소 특유의 '정서 구조'(structures of feeling)와 '삶의 방식'(ways of life)에 아로새겨진 이른바 '전투적 당파성'(militant particularism)에 근거한다. 그는 다음 첫 번째 예문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상술하고 있다. 노동계급 자신들의 유일하며 특수한 조직적 특성은... 보편적 투쟁에다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당파적 투쟁을 연결한다. 일종의 운동 형태로 볼 때, 철저하게 함께 모인(properly brought together) 당파적 이익의 방어와 향상이 사실상 보편적 이익이라는 특수한 주장이 현실화하게 되었다.(1989, 249; 하비의 강조)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길 꺼릴 수도 있는, 보다 폭넓은 함의는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의 새로운 이론은 이제 그 중심에 장소(place)를 포함시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을 유산 계급으로부터 차별화하는 요인, 즉 그들이 어떠한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관해 상기하라. 그렇지만 장소는, 국제 경제의 폭발과 과거 공동체에 대한 파괴적인 탈산업화 효과로 인해 ― 아마도 자본 소유계급보다는 오히려 노동계급을 ― 서로 묶는 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요소임이 입증되고 있다. 자본이 계속해서 이동할 때, 장소의 중요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242) 본인의 의도는 자본주의 발전과 계급 투쟁의 공간적, 지리적 측면을 다루었던 광대한 문헌 모두를 논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러한 작업이 실행 가능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본 축적과 계급 투쟁의 지리적 역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마르크스 전통 내부의 일련의 긴장, 그리고 종종은 불유쾌한 타협에 관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레닌과 룩셈부르크가 민족 문제로 충돌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국내(혹은 심지어 한 도시내) 사회주의의 가능성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 중 제 2인터내셔널이 민족주의와 타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코민테른 스스로가 국제주의를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 동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계급 투쟁의 지형학과 자본 축적의 지리적 동학을 이해하는데, 결코 정확하거나 만족스럽게 진전시켜 나가지 못했다. [공산당 선언]의 내용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 딜레마의 핵심적인 근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선언]의 인용구에 따르면 부르조와지의 계급 지배에 대한 탐색이 매우 지리적 사안이란 점이 분명한 반면에, 놀랍게도 거의 그 내용에서는 순전히 시간적이고 통시적인 설명만으로 그 즉시 전도되기 때문이다. 시간은 "공간이 용인하고 대등해지는 지점을 배제하고 복속시키므로, 시간이 변증론자의 특권적 범주"(Ross 1988, xxx)라고 생각했던 포이에르바하를 따르는 수많은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자를 제외한다면, 공간에 대해 변증법적이지 못했던 듯 싶다. 본인이 주목하건대, '역사적 유물론'이란 용어조차도 지리적 중요성을 삭제하고 있으며, 그리고 내가 지난 수년간을 싸워서 '역사-지리적 유물론'의 개념을 고취시켰다면, 그것은 우리가 후자의 개념으로 이동하는 것이 범지구화와 불균등 지리적 발전 과정의 계급적 중요성에 대해 보다 유연하게, 그리고 희망컨대 보다 적절하게 볼 수 있도록 준비하자는데 있었다. 그리고 최근 내 저술(Harvey, 1996)을 통해 공시성(spatiotemporality)의 변증법에 관해 분투하고 있는데, (그리고 본인은 이 합성어가 그 자체로 보아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는 우리가 정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해석 내부에 근본적인 이중의 긴장 상황을 풀지 못한다면 한결 나은 이해 방식이 필요할거라 보기 때문이다. 그 긴장 상황이란 (이제 역사의 종말을 표명하는 부르주아지의 목적론적 계급 신봉주의에 의해 거의 부정되는) 계급 신봉주의의 목적론적 시간성으로, 혹은 겉보기에 뿔뿔이 흩어지고 통제 불능 상태인 계급의 지리적 분열로 종종 퇴보하는 것과 자본주의 세계 모두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투쟁의 또 다른 형식들로 가는 것, 그 두 가지를 일컫는다.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도, 통시적 계급 투쟁의 해석은 대개 주요 관심사가 그 해석이 기반하는 지리적 분할 영역들의 정당한 평가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영토적으로 경계를 확정짓는다. 그래서 우리는 영국, 웨일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카탈로니아, 남아프리카, 남한 등에서의 노동자계급 형성이란 수많은 설명을 접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이들 국가를 자연적인 지리적 실체로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어떤 둘러싸여진 공간 내에서의 계급 발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좀 더 가까이에서 관찰해보면, 그 공간이란 그 자신의 특성을 지닌 수많은 작은 공간으로 구성된, 자본, 노동, 정보 등의 국제적 흐름의 공간내에 위치한다는 점이 분명하다. 예컨대, 우리가 에드워드 톰슨(E. Thompson)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의 고전적 해석에서 묘사된 내용을 잘 관찰해보면, 이는 종종 공간에 느슨하게 결합된 일련의 고도로 지역화된 사실들이 존재함을 입증하고 있다. 포스터(J. Foster)가 {산업혁명 시대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 in the Industrial Revolution)}이라는 자신의 저술에서 다소 기계적으로 그 차이들을 과대하게 묘사했는지 모르겠으나, 본인 생각에는 영국의 올덤(Oldham), 노르탬턴(Northampton), 사우스 쉴즈(South Shields) 지역(프랑스의 콜마르 Colmar, 렐 Lille, 산타티엔느 St. Etienne 지역, 혹은 미국의 미네아폴리스 Minneapolis, 모벨 Mobile, 로얼 Lowell 지역을 참조하라.)의 계급 구조, 계급 의식, 계급 정치가, 대개 인정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는 국민국가 내부에서 지리적 차이를 형성하면서, 꽤 다르게 구성되고 구조화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적인' 지리적 실체에 가정한 무비판적인 사고 방식은, 마치 지금 자본주의의 범지구적 공간 경제 내부에서 서로 경쟁을 하는 모든 국가들, 즉 독일, 영국, 일본, 미국, 스웨덴, 싱가포르, 브라질 등의 서로 다른 버전들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때로는 이탈리아, 브라질, 영국... 내부의 남과 북처럼 보다 지역화된 형태로 나누어진) 것처럼 여기게끔 하는데, 이는 자본의 (특히 '조절이론'에 자극받은 부류들인) 네오마르크스주의적 해석에서 영속화 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전통 내부에는 분명한 긴장선이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적 발전을 순전히 시간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비공간적이고 지리적으로 무차별적인 해석(우리가 아직은 비록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버전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의 주된 이론적 경향)이 존재한다. 계급투쟁은 일차적으로 다른 계급에 의한 한 계급의 착취의 문제로 제시되며, 그리고 역사는 그 투쟁의 산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에서는, (종종 레닌이 노동조합적 의식의 한계성으로 비난했던 것에 의해 특징화되는 노동 계급을 포함한) 하나의 계급동맹이 (아마도 대리인으로서의 매판 부르주아지와 함께) 여타 다른 장소들의 계급동맹을 착취하기 위하여 어떤 장소들에 형성하는 것에 관한 지리적 해석이 존재한다. 다른 계급에 의한 어떤 계급의 착취와 동등하게 다른 장소에 의한 어떤 장소의 착취를 관찰하는 태도의 이론적 정당성은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공간 해방의 투쟁(예컨대 민족 해방의 투쟁)에 대한 가정은 계급 투쟁의 의미에서 진보적이지만, 그 역의 논리로 아주 찬찬히 살펴보면, 이는 동등한 자격으로 맞설 수 없다. 사실상 후자의 논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투쟁의 수많은 여러 사례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혼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인이 생각하기로는 현재 '범지구화'란 용어의 적용이 의미하는 것들 중 하나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지리적 재조직화라고 본다. 동시에 범지구화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궤도가 진행하는 '자연적인'(natural) 지리적 단위들에 대한 (만약 그 가정들이 이전에 존재했다면) 수많은 그 가정들을 점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지형이라는 건드리기 어려운 것을 움켜잡기 위한, 그리고 자본 축적과 계급 투쟁의 역학 내부의 본질적 계기로써(그리고 그 역학에 의해 파생적으로 구성되는 어떤 것에 대응하는 형태로써) 공간의 생산을 바라보기 위한 역사적 기회에 직면해 있다. 이는 불명료한 힘을 통해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정치 양자의 논리를 지배해왔던 (그리고 자주 혼동케했던) 감춰진 공간성의 속박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기회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계급 투쟁과 장소간 투쟁 서로를 혼동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그 투쟁의 지리적 분할과 지리적 법칙을 통해서 계급 투쟁을 억압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힘에 맞서도록 한다. 게다가 우리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공간·시간적 모순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보다 나은 입장에 서서 가장 약한 고리를 유리하게 이용함으로써, '창조적'이라 하나 폭력적 파괴를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실로 소름끼치는 경향을 분쇄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론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 모두에서 이와 같은 문제 의식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변화하는 공간성과 재영토화의 이론적 함의를 수용하는 여러 연구물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들뢰즈와 가따리(G. Deleuze and F. Guattari)의 {앙띠 오이디푸스(Anti-Oedipus)}의 경우,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영토화와 재영토화가 진행 중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많은 해석들에서 보여주는 바처럼, 이들 논의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사고의 재공간화라는 효력이 (이론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 모두에서) 마르크스적 정식과 부분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확실하게 단절하는 대가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필연적으로 중심 명제를 폐기하지 않으면서 마르크스 이론과 실천에 공간성을 통합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설사 그 통합의 과정에서 이론과 실천 양자에서 일종의 부분적인 수정이 제기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런 주장에 기반하여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요약해볼 수 있다. 나는 우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명제들로 시작해볼까 한다. 거기에는 자본의 순환 과정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 내부에 깊이 새겨진 이중의 긴장이 존재한다. 이 긴장은 역사-지리적 모순의 강력한 계기들로써, 주기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폭발한다. 첫째, 자본주의는 회전 시간을 가속화하기 위한, 자본 순환의 속도를 증가시키기 위한, 그리고 결과적으로 발전의 시간대를 혁명화하기 위한 추진을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예컨대 생산, 소비, 교환, 커뮤니케이션 등을 위한 정교하고 안정된 기반 하부구조뿐만 아니라 건조환경과 같은) 장기투자를 통해서만이 달성될 수 있다. 게다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주요 전략은 (예컨대 경기 침체 시기에 국가가 시행하는 그 유명한 '공공 사업'과 같은) 장기 프로젝트에서 과잉축적된 자본을 흡수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본의 회전 시간을 단축시킨다. 결과적으로 일련의 특이한 모순들이 존재하는데, 그 모순은 서로 다른 자본들이 기능하는 시간대라는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어떠한 예외도 없이, 이러한 긴장 상황은 일차적으로 (회전율이 현재는 거의 즉각적인) 화폐와 금융자본을 한편으로, 그리고 상업, 제조, 농업, 정보, 건설, 서비스, 국가 자본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이 양자의 모순관계를 통해서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모순 관계는 (예를 들면, 통화와 증권 시장간에, 혹은 토지 경작인과 투기꾼간의) 분파들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서로 다른 시간대와 리듬으로 전개되는 자본의 동학들을 조정하기 위한 모든 종류의 기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아주 강력한 금융 부문의 시간대를 최근에 붕괴함으로써 창출된 회전 시간과 시간성의 불균등 발전은 자본주의 국가에 깊게 각인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본의 다른 분파들에게 긴장을 크게 야기하는 환영받지 못할 시간의 압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월스트리트가 창출한 시간대를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재생산 체계의 시간성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적응시킬 수 없다. 그리고 금융 시장이 창출한 빠른 회전 시간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고용조건과, 그들의 숙련도 등), 그리고 사회적·생태학적 재생산의 생활세계에도 더욱 심대한 긴장을 조성한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다. 둘째,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적고있는 바와 같이 "시간을 통해 공간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모든 공간적 장벽을 제거하려고 추진 중이지만, 이는 오로지 고정된 공간의 생산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차후에 축적을 원활하게 만드는 지리적 조망을 단지 파괴하거나 재구축하면서, 역사의 특정 시기에 그 자신의 축적의 동학에 적합한 (공간 관계의, 영토적 조직의, '범지구적' 노동 분업과 연계된 장소 체계의, 그리고 기능의) 지리적 조망을 생산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여러 특징적 측면들이 존재한다. 1) 공간 이동의 비용과 시간 감소는 지속적으로 기술혁신의 초점이 되어 왔다. 유료 고속도로, 운하, 철도, 전기력, 자동차, 항공과 제트 수송은 원거리 마찰의 속박으로부터 상품과 사람의 이동을 점차 자유롭게 하였다. 이와 동일한 방향에서 우편 체계, 전신, 라디오, 텔레커뮤니케이션, 월드 와이드 웹(WWW)의 혁신은 이제 정보 이전비용을 거의 제로에 육박하게 만들었다. 2) 이와 같은 움직임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생산, 교환, 분배, 소비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고정된 물리적 기반 하부구조의 구축은 지리적 경관에 대해 꽤 차별적인 힘을 발휘한다. 점점 자본주의적 성장 궤도를 가로막는 지리적으로 조직화된 자원구조와 '제 2의 자연'(second nature)을 만들어내는, 토지에 고정화된 자본, 즉 토지자본 형태로 진행하면서, 더욱더 자본은 공간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하룻밤 사이에 도쿄-요꼬하마, 또는 뉴욕시의 도시 기반 하부구조를 얼마간 해체하려는 생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새로 세우려는 생각은 바보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이러한 하부구조 구축의 효과는 자본주의의 지리적 경관을 더욱 더 시간에 의한 병리적 경화(硬化) 상태로 몰아감으로써, 점증하는 이동의 자유와 주요 모순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 경향은 특정 장소의 건물들이 강하게 접합되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장소 충실성(과 장소 특유의 성질)이 정치 행위의 중대한 요인이 되는 정도에 따라 더욱 두드러진다. 3) 세 번째 요소는 영토 조직의 구축이며, 이는 (이것이 유일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우선적으로 주권 영토적 (그리고 가끔은 부가영토적) 의지에 따라 동의와 폭력의 수단을 독점화하고 화폐, 법, 정치를 조절하는 국가 권력의 구축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국가에 대한 수많은 마르크스 이론들이 있는데, 그 이론들 가운데 대부분은 마치 가봉과 라이베리아와 같은 국가들을 미국 또는 독일과 동등한 것처럼 다룸으로써, 그리고 세계의 대부분 민족적 경계들이 1870년과 1925년 사이에 만들어졌음을 (그리고 이 국가들 경계의 절반 정도가 단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그어졌음을) 깨닫는데 실패함으로써, 역사와 지리로부터 해로울 정도의 추상화로 빠져들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1945년 이후가 되서야 독립이 되었고, 그 대다수 국가들은 그 이후로 줄곧 국가를 찾기 위한 작업을 계속적으로 벌여왔다. (하지만 이는 최근 나이지리아나 르완다에서 만큼이나 역사적으로 45년 이후의 프랑스와 멕시코에서 국가를 찾기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각 국가들이 타국가의 자율과 영토 보전을 인정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독립 주권국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공존할 수 있는 당위적 원칙을 세운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 원칙에 따르는 자본주의 세계의 영토 조직을 범지구화하는 과정까지 가는데는 (상당한 폭력을 수반하면서) 수 세기가 걸렸다. 현재 몇몇 논평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실제로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가적 조직체들과 국민국가 내부의 지역 자치운동들이 스스로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 만큼이나, 그 체계를 낳는 범지구화 과정들은 쉽게 주권국의 원칙들을 해소시킬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범지구화/영토화의 불안정한 과정들을 통해 국가 형성과 해소의 과정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지형에 대한 지속적 작업속에서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의 과정을 보게 된다. (이는 들뢰즈와 가따리가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지적했던 근본적 요점들 중의 하나였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영토화와 관련한 개념들에 무게를 실어준다면, 불균등 시간적·지리적 발전의 생산과정으로서 범지구화에 대해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영토화의 관련 개념들로 가는 것이, 범지구화란 전능한 과정의 더욱 억압적이고 제한적인 언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면서, 다소 유익한 정치적 결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본인은 이를 염두에 두면서, '범지구화'란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왜 그 용어가 새로운 유혹의 역할을 담당하는지, 왜 그 용어가 최근에 그리 중요하게 취급되는가의 문제로 되돌아 갈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중요하고 두드러진 이동이 존재한다. 1) 금융 자유화는 1970년대 초 미국에서 그 당시 내부적으로 일고 있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강제화된 반응으로써, 그리고 (대개 유럽달러 시장의 제어하기 어려운 성장으로 말미암은) 국제 무역과 교환에 대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에 따른 강제화된 반응으로써 시작되었다. 내가 볼 때, 금융 탈규제의 물결이 자본에 의해 고안된 의도성이 짙은 전략적 사고라기 보다는, (비록 일부 자본 분파가 다른 자본에 비해 더욱 특혜적 입장에 서있는지는 몰라도) 현실이 주는 특권이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브레튼우즈는 범지구적 체제였으며, 정말로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하에서 일어난 사실은 (위계적으로 조직되고, 대개 미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통제되는) 범지구적 체제로부터 자본주의의 금융 조건들을 훨씬 변덕스럽게 그리고 훨씬 불안정하게 만드는, 시장을 통해 더욱 분산되고 공동의 조정이 가능한 또 다른 범지구적 체계로의 이동이었다. 이러한 이동을 동반했던 수사는 미덕으로서의 '범지구화'란 용어의 선전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 더 냉소적으로 보자면, '범지구화'가 국제 금융체제에서 필사적으로 필요한 조정을 하기 위한 새로운 선전의 고안물이었다면, (내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이 용어를 어떤 새로운 것이라고 사기쳐 믿도록 한 것이 다름아닌 금융 압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현재의 금융 압박이 금융시장들(분명한 권력 블록으로 존재하는 일본 공영 영역, 나프타, 유럽연합)에서 진행중인 지역화를 더욱 강조하게 만든다는 점이며, 그리고 자본주의의 압박 시기에 범지구화의 지지자들조차도 범지구화에 대항한 "반발"(backlash)이 (대개는 다양한 인민민족주의의 형태로)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범지구화는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와 동일하게 될 위험에 처해있다고 경고한다.(Friedman 1996, A 19) 2)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른바 정보혁명은 전적으로 새로운 요구와 수요에 대한 개념 변화와 함께 생산과 소비 조직의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최종적인 '공간의 탈물질화'는 군사적 장치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나, 그 즉시 다국적 자본과 금융기관에 의해 점유됨으로써 즉각적으로 공간에 걸쳐 그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 효과는 이른바 탈물질화된 사이버공간을 형성하는데, 그 공간 내에서는 일종의 중요한 거래(일차적으로 금융거래과 투기거래)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텔레비전에서 생중계되는 혁명과 전쟁을 시청하게 되었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공간과 시간은 미디어 권력의 독점화가 (인터넷의 경유를 통한 자유주의적 민주화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문제시되고 있는 세계에서 내파(內破)하고 있다. '정보혁명'의 이념은 최근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으며, 정보사회가 최고의 자리로 군림하면서 범지구화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여명으로 간주되곤 한다. 이것은 너무도 많은 것을 수월하게 이루도록 도왔다. 그 새로움 모두가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만, 철도와 전신, 자동차, 라디오, 전화가 태동했던 시기에 있어서도 그 새로움의 인상은 동일했다. 이 초창기의 기술적 사례들은 교훈적인데, 그 이유는 이들 각각이 그 나름대로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 생산과 소비가 조직되고 정치가 실행되는 방식, 그리고 사람들간의 사회 관계가 광범위한 규모의 사물들간의 사회 관계로 전환되는 방식 등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정보 기술에 반응하여 작업장에서의, 문화 형식들 내에서의 노동과 생활간의 관계가 매우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미국내 우익의 정치적 안건에 핵심적 구성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뉴트 깅그리치(앨빈 토플러가 그의 자문을 맡고 있으며, 토플러의 우익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는 전적으로 '제 3 물결'의 정보혁명 이념에 의존한다.)는, 새로운 기술이 고유의 해방적 속성을 지녔지만, 정치적 속박으로부터 이 해방력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제 2 물결'의 산업 사회의 모든 제도들― 정부 규제, 복지 국가, 임금 단체 교섭의 관행 등등 ―을 해체시키는 일종의 정치적 혁명을 추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얘기한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생산제력의 변화가 사회 관계와 역사를 추동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통속화한 형태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아마도 마가렛 섀처의 "어떠한 대안도 없다"라는 그 유명한 선언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이 우익적 수사의 강한 목적론적인 논조 또한 무시해서는 안된다. 3) 또한 주기적으로 자본주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그 각각의 상품과 사람의 이동 비용과 시간은 단계적으로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생산, 소비, 인구 등의 입지들을 보다 빠르게 조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전의 공간적 속박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활동들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범지구화 과정의 역사가 기록될 때,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이 단순한 이동이 이른바 정보혁명 그 자체(per se)보다 (실제로 둘 다 중요하지만) 훨씬 중요하게 간주될 것이다. 범지구화 과정에서의 세 가지 이동축은 여러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수반했는데, 아마도 이는 일차적으로 노동 인력에서 파생된 것에서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다. 1) 상품과 정보 이동을 축소된 비용으로 풍부히 이용할 수 있도록 (수많은 소규모의 기업들 또한 새로운 기회를 잡았으나, 특히 다국적 자본의) 생산과 조직 형태들이 전환되었다. 1960년대에 시작한 현지 법인생산(offshore production)이 갑자기 더 한층 일반화되었다. (일본의 경우 최근 현지 법인에 의한 생산이 더욱 강하게 확산되고 있다.) 종종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합병, 인수, 혹은 합작 생산협정을 통해 기업의 집중력이 증가하는 도중에도, 생산 체계, 노동 분업, 과업의 전문화란 형태로 지리적 분산과 파편화가 계속되었다. 더더욱 기업의 변덕스러움에 개별 공간들이 취약해지면서, 기업은 공간을 통제하는데 훨씬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범지구적 텔레비전, 범지구적 자동차는 정치·경제적 삶의 일상적 측면으로 자리잡았다. 어떤 장소에서의 생산 중지와 어떤 다른 장소에서의 조업 개시는 친숙한 얘깃거리가 되었다. ― 지난 20년 동안 꽤 대규모의 생산 공정들의 이동이 과거에 비해 네 배 혹은 다섯 배로 증가했다. 2) 전세계의 임금 노동은 채 20년도 못되어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급속한 인구 성장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나, 점점 더 전세계의 인구 중, 예컨대 구소비에트 연방, 중국과 함께 남한, 대만, 아프리카에서의 임금 노동력(특히 여성)이 유입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범지구적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사회주의자의 눈에 희망이라는 강한 섬광을 확고하게 심어야만 했던) 이전 그 어느 때 보다 훨씬 거대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이 계급은 극도로 여성화되고 있다. 또한 이 계급은 지리적으로 분산되어 있으며,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연유로 단일화된 운동으로 조직화하기가 훨씬 어렵다. 3) 인구이동 또한 범지구적 규모로 진행 중에 있다. 미국은 1920년대 이후로 현재 자국의 외국인 출신 비율이 최고치에 이르렀으며, 외부의 인구를 억제하려는 모든 종류의 시도가 이루어진 반면 이민 인구의 엄청난 유입을 막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국가간 경계는 사람과 노동 보다 자본에 있어서 더 허술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경계는 전반적으로 허술한 편이다. 런던, 파리, 로마는 이전 보다 훨씬 더 이민 도시화되고 있으며,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어떤 때보다 이민 유입이 (노동 운동권을 포함하여) 전세계의 핵심적인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심지어 도쿄에서조차도 이와 같은 과정에 있다.) 또한 인구이동이란 동일한 표상을 통해서 보자면, 이것에 의해 야기된 중요한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에 직면하여 사회주의 운동이 노동을 조직화하는데 쉽게 해결책을 찾기가 어려운 특수한 문제점들을 종종 드러내고 있다. 4) 도시화는, 특히 1950년 이후 전세계 인구의 공간 조직 측면에서 중대한 환경적,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혁명의 창출을 가속화한 도시화의 국면과 함께, 점차 초도시화(hyperurbanization)로 옮겨가고 있다.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이 전세계적으로 30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났으며,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상상도 못할 것으로 여겼던 엄청난 규모의 인구 집중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1870년대에 맨체스터나 시카고에서 계급 투쟁을 조직한다는 것은, 2천만 이상 내지는 이에 근접하는 인구를 지닌 현대의 상 파울로, 카이로, 라고스, 샹하이, 봄베이 등의 도시에서 계급 투쟁을 조직하는 것과는 (혹은 대의 민주주의제도를 발전시키는 것과는) 꽤 다른 문제였다. 5) 단지 냉전의 종결로 인해서 전세계의 영토화가 변화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아마도 국가의 변화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했는데, 국가는 자본(특히 금융과 화폐자본)의 이동성을 통제하기 위한 전통적 권력을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상실했다. 그 결과 국가 운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폐자본과 금융에 의해 더욱 강도높게 제약을 받았다. 구조조정과 재정긴축이 국가가 벌이는 게임의 상징이 되었고, 다소 유리한 기업 풍토를 증진하기 위한 방도들을 추구하는 역할로 국가의 지위가 격하되었다. 현재 일본에서조차도 본국의 기지로부터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비교적 값싼 여러 노동지역으로 생산공정들을 신속하게 이동시키는데 분주하다. 여기에서 '범지구화 테제'는 사회주의자들, 복지국가론자들, 민족주의자들 등을 때려눕히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수단이 되었다. 강제로 긴축정책을 수행하려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영국 노동당이 굴복당했을 때, 이는 재정 정책에 대한 민족적 자율성에 제한이 가해진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981년 이후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상황에 처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빈자를 위한 복지는 대개가 자본에게 넘겨주는 공공 보조금으로 대체되었다. (최근 메르세데스-벤츠는 자신의 자사를 유치하기 위해 설득 작업에 나선 알라바마주로부터 2억 5천만 달러의 일괄 보조금을 지급받았다.) 재영토화는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경제, 환경, 정치의 범지구적인 관리제도들(나프타와 유럽 연합 등)은 지역 블록들과 동일하게 민족을 초월하는 규모로 증식하고 있으며, 동시에 강력한 분산화 과정이 (때로는 지역 자치를 위한 ― 일부는 극단적으로 분리주의적인 ― 정치 운동을 통해서, 혹은 미국에서처럼 연방체계 내부에서 각 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현재 국가 조직은 시·공간 압축과 범지구적 상품화에 직면하여 인종적, 문화적 정체성과 환경적 특성을 방어하기 위한 핵심적 수단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국가는 범지구화에 대항하여 인민민족주의에 호소하는 '반발'의 근원적 장소로 간주된다. 6) 개별 국가들이 자신의 권력 일부를 상실한 반면, 내가 명명한 지정학적 민주화(geopolitical democratization)란 점에 있어서는 새로운 기회를 창출했다. 핵심부 권력이 여타 권력들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주변부 권력들 스스로가 자본주의의 경쟁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 보다 수월해지고 있다. 화폐 권력은 "평등주의적이고 냉소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바로 그 때 강고한 모순이 야기된다. 즉 질적으로 "화폐는 그 효력에 있어서 어떠한 한계도 없는" 반면에, 개인 (그리고 국가)의 수중에서 화폐의 양적인 한계는 이 둘(개인과 국가)의 사회적 권력을 중대한 방식으로 제한하거나 증대시킨다. 예컨대 금융의 탈규제가 주어진 상황에서, 일본이 주요 금융 권력으로서의 영향력 행사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별 국가들은 더욱 더 자국의 경쟁력(범지구화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된 하위주제)에 관심을 가져야했다. 경쟁적 국가들만이 범지구적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 ― 그리고 대개 이는 강한 노동 규율을 가진 저임금 국가들이 여타 국가들보다 우위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노동 통제는 범지구화를 옹호하는 진영에서 사회주의적 주장을 수세로 밀어넣는데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현안이 되고 있다. 기업주의적 원칙하에 조직된 권위주의적이고,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 싱가포르, 홍콩, 대만과 같은 ― 영토들은, (현 자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명명한다면) '자유시장의 스탈린주의'(free-market stalinism)가 자본주의적 범지구화 과정에서 더욱 더 규범이 되어가는 시대에 상대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 경향들에 관해서 두 가지의 폭넓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현재 진행중인 양적인 변화 과정을 인정하더라도, 우리가 진짜 논의해야만 할 사안은 이 양적 변화 과정이 (우리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이론적 개념들과 정치적 장치들에 대한 급격한 수정을 요구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질적 발전의 새로운 시대를 향해 우리 모두를 함께 데려갈 수 있을 정도로 이러한 변화들이 아주 거대하고, 충분한 시너지를 일으키는가이다. 이에 대한 이상적 개념화는 우리 주위의 모든 '포스트류'(posts)(예컨대, 포스트산업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가장 먼저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양적인 이동에 의해 구성된 질적인 전화가 과연 이루어졌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내 자신의 답변은 조건부를 단 "그렇다"이다. 실지 생산양식과 이와 관련된 사회관계에 어떠한 근본적인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만약 실제로 어떤 질적인 경향이 있더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본 축적의 기본 동학과 관련하여 전세계 인구의 대부분을 영구적으로 과잉화하면서 자본의 세력권내로 모든 사람들(그리고 교환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끌어당기는 21세기적 취향과 딱 어울리는 19세기초 자본주의적 가치를 다시 재탕하는 경향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국제 자본이 동시대의 범지구화란 강력한 이미지를 지닌 채 공포심을 유발함으로써,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가 활동하게 되는 지점이다. 우리가 이러한 한계 혹은 단서를 수반하는 질적인 이동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이론과 정치 모두를 어떻게 재공식화할 것인가에 있다. 그리고 내가 제출한 '범지구화'로부터 자본주의의 '불균등 시·공간 발전'으로의 언어 이동이 이 지점에서 제안되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불균등 지리적·시간적 발전의 조건들이 특수한 어려움을 노정함과 동시에 정치 조직화와 정치 행위의 풍부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어려움들을 이해하는 것은 정치의 적절한 정식화에 있어서 중요하다. 좌파에게 있어서 이 모든 변화들의 일차적 중요성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이 상대적으로 누리는 특권적 지위가 나머지 세계의 노동 조건에 더욱 더 좌우된다는 점이다. (이 변화는 대체로 지난 20년을 넘게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에서 산업 조직의 기본 형태인 착취공장들이 재출현하는데서 관찰할 수 있다.) 이차적 중요성은 선진 자본주의내에서 삶의 조건들이, 지방의, 지역의, 그리고 민족의 경제적 전망에 대해서 극도로 즉흥성을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 능력의 완전한 공세에 놓여 있다는데 있다. (올해의 호황 도시가 내년에는 빈곤 지역이 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정당화는, 가능한한 어떠한 국가의 개입도(그리고 여기에 신자유주의자들은 ― 대개는 그들이 독점에 대해 운위하지 않지만 ― 독점력을 덧붙여야만 한다) 배제한다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두의 이익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 효과는 풍요와 과시적 소비를 상징하는 특수한 기술이 일련의 열망들을 지닌 가능성으로써 즉각적으로 전세계에 걸쳐 연결되는 동안에, 불균등 지리적 발전의 폭력성과 창조적 파괴(예를 들어, 생산의 지리적 재조직화를 통해)가 여타 다른 장소와 똑같이 자본주의의 전통적인 중심부에서도 널리 감지된다는데 있다. 범지구화의 홍보자들조차 여기서 반발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다루고 있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못된다. 최근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과 끌로드 스마쟈(Claude Smadja)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경제적 범지구화는 임계(臨界)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이 범지구화의 효과에 대항해 그 반발의 수위가 높아짐으로써, 특히 산업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수많은 국가들의 경제 활동과 사회 안정에 매우 파괴적 충격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 민주주의 국가들의 분위기는 일종의 무능과 불안인데, 이는 질적으로 새로운 대중적 정치인들의 등장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 분위기는 쉽게 봉기로 전환될 수 있다.(Friedman 1996, A19에서 인용.) 사회주의 운동은 물론 이러한 혁명적 가능성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주의 운동은 지역화된 파시즘의 노골적 호소로 에워싸인, 여러 형태의 다양한 우익 인민민족주의적 경향에 타격을 가해야만 한다. 운동은 사회적으로 정당한,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민감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계급 투쟁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운동은, 조직화를 너무나도 불안정하게 만들며 극히 어렵게 만드는 불균등 시·공간 발전의 엄청나게 강력한 조류들과 결합해야만 한다.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여 부르주아지의 범지구화와 투쟁해야 한다는 필연성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계급이 공간에 유연하게 대처했던 바로 그만큼 공간의 이론과 그 정치적 실천의 유연한 방식을 탐색해야만 한다. 본인은 이러한 운동의 단초를 제공하는 유용한 길이 있다고 믿는다. 먼저 어디서 반(反)자본주의적 투쟁이 벌어지는가를 질문하라. 본인은 그 답이 모든 곳이라 생각한다. 전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노와 불만이 표출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일부 장소에서의 반자본주의 운동은 나약하기 보다는 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지방의 '전투적 당파성'(그리고 본인은 의도적으로 레이몬드 윌리암스의 문구로 돌아가려 한다)은 미시간 삼림의 국민군 운동(militia movement, 이 운동은 대개가 인종주의적이고 배타적인 동시에 반자본주의적이고 반기업적인 폭력성을 갖고 있다)에서부터 나프타, 세계 은행의 개발 계획 등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멕시코, 인디언, 브라질 농부들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 축적의 핵심부내에서 조차 수많은 계급 투쟁이 진행 중에 있다. (1995년 가을 프랑스에서 벌어진 엄청난 전투성의 폭발에서 1996년 초 뉴욕의 사무실 청소부들의 파업에 이르기까지 계급투쟁의 사례는 다양하다.)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의 불균등 시·공간 발전의 틈새를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현실의 들끓어오르는 저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항세력의 전투적인 면모에서 불구하고, 이 저항은 종종 당파적으로 남아 있으며(때로는 너무나 극단적인 당파성으로까지 나아가며), 그리고 항상 배타적이고 인민민족주의적인 정치 운동의 외곽에서 이와 유착하려는 위협을 지닌다. 저항이 반자본주의적이라 하여, 꼭 친(親)사회주의를 일컫거나 어떤 자본주의적 대안이 필요로 하는 이해 지점에 다가서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광범위한 기초위에 놓인 반자본주의 운동은, 반자본주의적 대안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얘기할만한 응집력과 구체적 전망이 결여돼 있다. 또한 방향성이 결핍되어 있다. 즉 어떤 요소의 운동이 다른 요소의 운동을 혼동케 하고, 때로는 억제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본 계급의 관심사를 위해 지배의 분할통치 형식의 유지를 보다 수월하게 한다. 간단히 말해서 반자본주의 운동은 어떻게 서로 다른 투쟁이 결합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반자본주의의 범지구적인 안건을 형성할 것인가에 대해 이해할만한 합의된 틀거리가 결여돼 있다. 마르크스 운동의 역사적 강점들 중 하나는, 서로 나뉘어지며 다수의 목적들을 지닌 다양한 투쟁을 범지구적 목적을 지닌 보다 보편적인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종합(synthesis)하려는 지속적인 헌신에 있었다. 이제 본인은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얻은 유산을 통해 특히 현재의 위기 상황에 적합하게 여겨지는 수많은 논의들 가운데 그 핵심만을 간추려내고자 한다. 투쟁 범위와 영역은 자본주의의 동학, 그리고 범지구적 조건들이 변화함에 따라 영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반자본주의적 종합으로 나아가는 전(全) 과정 또한 지속적이어야 한다. 이 마르크스적 전통은 종합으로 나아가는 전 과정에 있어서 매우 막대한 공헌을 하는데, 그 이유는 마르크스적 전통이 다중성과 차이들 내부에서 일반성을 발견하게 하는, 그리고 착취와 억압의 제 1·2·3차적인 조건들을 확인하게 하는 도구들을 개척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레이몬드 윌리암스가 언급한 "철저하게 함께 모인 당파적 이익의 방어와 향상이 사실상 보편적 이익"이란 문구를 상기하면서, 제기된 중요 임무로써 "철저하게 함께 모일"(1989, 249)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내용은 다시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현재 (엄청난 자기파괴, 평가절하, 도산을 내용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궤도뿐만 아니라 점차적으로 다운사이징, 실업, 서비스의 붕괴, 삶의 지표와 환경의 질적인 저하 등의 폭력 상황에 취약해진 대중의 영역 내부에 현존하는 불균등 시·공간 발전과 그 강력한 모순의 생산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특수 상황을 뛰어넘어서 이와 같이 계속되는 손상의 질적 체계와 양상(pattern)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양상은 범지구화를 통해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을 간파하므로써 가장 최선의 답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러한 분석을 외부로 돌려 다양한 계열의 문제들로 확대하여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에이즈, 지구 온난화, 지역 환경의 훼손, 지역 문화전통의 파괴와 같은 문제들이 얼마나 고유의 계급 문제를 드러내는지, 그리고 사회 행위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에 걸쳐 계급투쟁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억압의 조건들을 크게 경감시킬 수 있는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다원주의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우리가 지닌 광범위한 계열의 반자본주의적 관심사의 계급적 내용을 밝혀내려는데 있다. 이 주장은 급진적 좌파 내부에서 저항에 부딪힐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계급의 정식화에 관한 주장이 (학계에서 한물간 퇴물로 거부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과거의 전위적 부류에서 나타나는 순수 분파주의로 물러나는 사태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자본주의적 투쟁에서 "하나를 위한 모두, 그리고 모두를 위한 하나"는 계속해서 어떤 정치 행위의 효과적인 중심 슬로건이 되고 있으며, 이 문구는 일종의 계급 정치를 내포하고 있다. 이 종합에 이르는 전 과정은 그렇지만 일상 생활의 유기적 조건하에서 그 과정 자체를 다시 공고히 해야만 한다. 이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긴 추상적 개념들을 포기하지 않고 대중투쟁에 몰입하므로써 발생하는 이 개념들을 재유용화하고 재평가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일부 투쟁들에서는 전통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개념, 제도, 실천, 정치등 그 자신에 각인되고 고정화된 자본과 투쟁해야만 하는 이론적 경화의 경향을 지니는데, 이 고정화된 자본은 한편에서 뛰어난 자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의 도그마적인 장벽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우리는 유용한 것, 그리고 우리의 지식과 정치 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으로 고정화된 자본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때론 포기할 것과 유지할 것에 관해 격렬한 논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아직도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제는 시작되어야만 한다. 예컨대 본인이 서두에서 꺼낸 전통적 마르크스의 범주들―제국주의, 식민주의, 신식민주의―은 너무나 단순화하여 등장함으로써 불균등 시·공간 발전의 복잡함을 포착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 범주들은 여전히 그렇게 단순화한 형태로 등장하겠지만, 특히 지난 30년간에 걸쳐 자본주의의 재영토화와 재공간화로 말미암아 이 전통적 범주들이 너무나도 조야하게 됨으로써, 현재 계급투쟁이 나타나는 지정학적인 복잡성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와 반자본주의 운동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범지구화'란 용어가 앞서 제기한 범주들과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수사에 대항한 역의 논리로 정치적 주도권을 다시 쥘 수는 없다. 설사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란 용어가 갖는 정치적 함의가 범지구화란 용어 보다 뛰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서 나는 또 한번, 극복될 과업을 판단하며 결합될 필요가 있는 다양한 전투적 당파성의 정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불균등 시·공간 발전(혹은 보다 단순하게 불균등 지리적 발전) 개념이 유익하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 가지 다른 조직적 관점을 들고자 한다. 마르크스적 개입의 전통적인 방법은 전위적 정치 정당을 거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의적 목적들을 지닌 반자본주의 운동에 있어서 단일의 목표, 하나의 목적, 단순한 지향점을 상위에 놓는데 어려움이 야기되었다. 마르크스적 전통내에 많은 비판자들이 지적했던 바처럼, 마르크스주의의 해방적 추진력은 그 자신 속에 부정(negation)의 위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적 발전에 있어서 인류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차이들을 억누르기 보다는 차이들 사이와 차이들 내부에서의 논쟁 영역을 개방화하는 것을 포함하여, 차이의 생산을 개방화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근본주의로의 우익적 회귀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는 때로 우익이 주장하는 류의 것이다. ― 비록 우익이 이를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우익적 주장에서의 힘을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상품화된 문화적 일탈에 대응하는 실제적 일탈의 생산은 반자본주의적 투쟁의 한 가지 목표로 쉽게 놓여질 수 있다. 단일의 동질적인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려는 목표는 결코 현실적이지 않으며, 만약 이러한 목표가 유용하다면 보다 주의깊은 절합을 필요로 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생산해내는 헤게모니적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모든 존재들과 모든 문화적 차이들을 보편적인 상품화된 토대에 단순히 환원하려는 경향은 반자본주의적 여론에 표적이 되어 왔다. 사회주의적 대의는 확실히 어떤 유사한 조건을 창출하려는 것만큼이나 그 느슨한 동질성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대의는, 대조되지 않은 상대주의나 구속받지 않는 포스트모던적 절충주의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일반성/차이(전자는 보편성이며 후자는 특수성)의 관계들에 대한 깊이있는 논의를 호소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사회 관계가 발현되는 방식, 그리고 인간의 잠재 능력이 현실화하는 방식을 위한 대안적 전망으로서 사회주의 그 자체가 개념화 작업의 초점이 된다. 아직 우리는 사회주의적 전위를 몹시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일의 목표를 내놓는 과거 전위 정당식의 형태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데리다(J. Derrida)의 "지위도 없는, 명칭도 없는, 이름도 없는... 정당도 없는, 나라도 없는, 민족 공동체도 없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환상만으로 무장해서는 제 구실을 할 수 없다. 이글턴(T. Eagleton, 1995, 37)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데리다의 주장은 "최후의 포스트구조주의적 환상이다. 즉 그것은 모든 정식화된 담론을 초월한 반대이며, 약속 이행 그 자체를 거스를 수 있는 약속이며, 도래할 것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어떤 것을 행함으로써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편이 훨씬 좋을 수 있었던 메시아에 대해 우리가 영원히 흥분된 채로 지닌 열려있음이며, 그리고 너무 체계적인 것 혹은 아주 단순히 '정통의' 것이 부재한 저항"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이같은 주장을 가능케 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부터 유형화되고 조직화된 정치의 토착성과 역사적·지리적 조건들의 모든 유형화된 감각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순수한 이상주의가 된 데리다 유형의 관계적 변증법과 결별하고, 사회생태적이고 정치경제적인 변화의 역사적 지형에 힘을 부여하는 모든 문제가 사고와 담론으로 환원되는 이른바 '새로운 이상주의'를 산출하는 것에, 그리고 사고의 변증법적이고 관계적 방식에 기초하여 등장한 이 데리다류의 전위적 경향에 반대한다. 우리는 이 특수한 형태의 전위주의를 버려야 하는데, 이 전위주의는 이제 학계에서 너무나 유행이어서 학계의 사고와 이상성의 흐름에 몰입한다는 것 자체가 다소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조직, 제도, 노선, 계획, 형식화된 구조 등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이 것들을 만들어낼 필요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행동들은 인간 행위가 전개되는 구체적인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조건들에 굳게 기초해야 한다. 공산당의 전통적 전위와 이상화된 전위(이른바 데리다의 유령) 사이에는 필사적으로 계몽을 부르짖는 정치조직과 정치투쟁의 영역이 놓여 있다. 이 영역은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여기에는 우리의 주의를 끄는 몇 가지 본질적인 운동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1996년 1월 30일자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의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인간애를 옹호하는 전세계의 모임, 즉 전 범위에 걸쳐 범지구화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대륙간 회의"에서의 글을 상기하라. 그들의 주장은 어떻게 화폐 권력이 도처에서 "존엄성을 해치고, 정직성을 공격하고, 희망을 압살하는가를" 지적한다. "신자유주의로 재명명되고, 특권, 부귀, 면죄부가 모여 이루어진 역사적 범죄는 비탄과 절망을 보편화한다." '범지구화'란 이름은 "압살하고 무시하는" 자본의 "현대전"을 가리킨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인간애 대신에 주식 시장의 가치 지표들을, 존엄성 대신에 범지구적 비탄을, 희망 대신에 공허를, 삶 대신에 국제적 테러를 제공한다. 사빠띠스따는 "우리가 희망의 인터내셔널을 제기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만약 신자유주의적 범지구화의 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함께 모일 수만 있다면,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의 시절이 끝날 때가 머지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균등 지리적 발전의 변화하는 영역에서 반자본주의적 투쟁을 조직화하고 종합하는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이제 어떠한 전위 정치조직을 중심에 놓아야 하는가에 대한 일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작업을 해야만 한다. 자, 이제 그 작업을 시작할 때다! 참고문헌 Amin, S. 1974. Accumulation on a World Scal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Cardoso, F. and Faletto, E. 1979. Dependency and Development in Latin Americ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Deleuze, G. and Guattari, F. 1984.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New York: Viking Press. Derrida, J. 1994. Specters of Marx, London: Routledge. Eagleton, T. 1995.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Radical Philosophy 73: 35-37. Emmanuel, A. 1972. Unequal Exchange: A Study of the Imperialism of Trad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Foster, J. 1974. Class Sttruggle in the Industrial Revolution,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Frank, A. 1969. Capitalism and Underdevelopment in Latin America,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Friedman, T. 1996. "Revolt of the Wannabes," New York Times, 7 January 1996, A 19. Harvey, D. 1996. Justice, Nature and the Geography of Difference, Oxford: Basil Blackwell. Lenin, V. I. 1970. Questions of Natural Policy and Proletarian Internationalism, Moscow: Progress Publishers. Luxemburg, R. 1976. The National Question: Selected Writings,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Mao Tse Tung, 1968. Four Essays on Philosophy, Peking: Foreign Language Press. Marx, K. and Engels, F. 1952.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Moscow: Progress Publishers. Rodney, W. 1981. How Europe Underdeveloped Africa, Washington, DC: Howard University Press. Ross, K. 1988. The Emergence of Social Space: Rimbaud and the Paris Commune, Minneapolis: Minneapolis University Press. Thompson, E. P. 1968.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Harmondsworth, Middlesex: Penguin. Wallerstein, I. 1974. The Modern World System, New York: Academic Press. Williams, R. 1989. Resources of Hope, London: Verso. Zapatista Army for National Liberation. 1996. "A world Gathering Against Neoliberalism and for Humanity," La Tomada, 30 January.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