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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정치 패러디물의 미학적 가능성과 한계

온라인 정치 패러디물의 미학적 가능성과 한계

이광석
(@txmole)


<요약>
 

이 글은 인터넷 누리꾼들이 중요한 표현 매체형식으로 이용했던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가능성과 한계를 관찰한다. 특히, 2003년의 대선 정국, 2004년의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만두파동, 그리고 서울시장의 ‘서울시 봉헌’ 발언 등에 반응해 대중이 생산해냈던 정치 패러디물들을 중심에 놓고 본다. 당시 시사정치 패러디물에 힘입어 여론이 형성되거나, 그 중 일부는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았던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글은 먼저 한국사회에서 이렇듯 영향력을 행사했던 패러디물이 급격하게 대중화하다 왜 갑자기 쇠퇴했는지를 최근 몇 년의 패러디 발전 과정을 통해 살펴보고,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물들을 중심에 놓고 그들이 지닌 정치 미학적 특성과 함의를 살핀다. 본 연구는 이를 통해 누리꾼들의 대중적 창작 행위 증가, 디지털 기술에 의한 매체 표현의 다면성, 그리고 아마추어 작가들의 등장에서 정치 패러디의 긍정적 의의를 찾는다. 하지만, 이들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패러디 작품들의 영향력이 대단히 단발적이고 휘발성을 지녔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단순히 영화포스터 등 오락미디어 문화의 상징적 이미지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패스티쉬(혼성모방)의 정치 미학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이것이 결국 정치적 앙가주망의 도구로써 패러디의 창조적 역할을 약화시켰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주요어> 패러디, 패스티쉬, 정치 미학, 다다, 전유, 전용, 포토몽타주, 콜라주


1. 앙가주망과 패러디     
 
   2002년 미선·효순 사건, 2004년의 노무현 전임 대통령의 탄핵 국면을 계기로 성장한 누리꾼들의 온-오프라인 정치 경험들, 그리고, 2008년 이후 촛불 정국에서 만개했던 온라인 대중 정치는 그 공과를 떠나 우리에게 누적된 온/오프 미디어 표현 형식의 실험들을 남겼다. 이 글은 바로 온라인 대중 실천의 경험 가운데 크게 영향력을 미쳤던 많은 표현 형식들 가운데 중요한 형식 실험으로 정치 패러디를 선택한다. 패러디는 특히 권력의 억압적 상황 (강화된 훈육과 대중 선전)이 지배적일 때 적합한 저항의 담론 형식이자 전술 형태이다. 그것의 미학적 형식 또한 단순한 이미지에서부터 음악, 동영상, 플래시, 게임 형태 등 다양하다는 점에서 소구방식 또한 대단히 유연하다. 패러디는 유쾌발랄하면서도 권력의 비린 곳을 적절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스타일 정치의 전형이다. 역사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때에 큰 힘을 발휘했던 표현 형식이기도 하다. 누리꾼들에게 정치 패러디란 표현 방식이 새롭게 정치 지수를 상승시키는 표현 방식으로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패러디는 여론을 일으키는 힘 또한 지닌 것이 사실이다. 특히, 온라인 게시물 형태의 패러디물은 한번 알려지면 순식간에 확산되어 권력 집단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시간적으로 즉각적인데다 사회적 영향력과 파급력에서 탁월하다.


정치 패러디는 보통 현실, 특히 퇴행적 정치 상황 (혹은 일상의 정치‘쇼’)에 대한 냉소에서 비롯한다. 거대 권력들, 특히 정부, 기업, 언론에 대한 조롱과 냉소는 이를 지켜보는 수용자들에게 심리적 경멸의 자족적 헛웃음과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패러디는 절차상의 민주주의나 상식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더욱 힘을 발한다. 비상식의 사회상과 정치적 낙후성이 주는 현실의 각박함이 오히려 충만한 패러디와 해학을 생산할 수 있는 원천이기도 하다. 20세기초 파시즘이 성행하던 시절에 베를린 다다가 ‘포토몽타주’(fotomontage)를 이용하여 권력을 조롱하는 새로운 예술 기법으로 창안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억압적인 정치 현실일수록 정치 패러디의 사회비판적 능력이 대단히 중요해져간다.

 

샤르트르식으로 보자면, 누리꾼들이 최근 몇 년간 보여줬던 정치 행위들은 구조화된 사회악과 결별하고 자유로운 개인 삶을 긍정하는 정치 참여로써 ‘앙가주망’(engagement)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앙가주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불가능한 논리이자, 억압의 구조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들의 적극적 정치적 입장 표명이다. 이 점에서 삶을 강제적으로 유린하는 힘을 드러내고 권력에 대한 희화화와 반전을 꾀하는 정치 패러디는 중요한 대중의 표현 형식이다. 이로써 대중이 아마추어적이지만 작품 생산의 주체가 돼가고 정치 미학을 형성하는 창의적 주체로 떠오른다.  

 

이 글은 국내 온라인문화 속에서 누리꾼들의 패러디물을 통한 사회 참여적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반(反)권위주의와 아마추어리즘에 기댄 누리꾼들의 창작 행위가 건강한 정치적 표현 형식으로써 가능한지를, 그리고, 정치 예술 미학의 발전 양쪽에서 어떤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글의 순서는, 먼저 이론적으로 정치 미학의 현재적 가능성과 그 표현 형식으로써 패러디의 개념에 대해 논구한다. 그 다음 국내 온라인 문화사 속에서 패러디 발전의 경과를 짧게 되짚어보고, 실제 당시 유행했던 대표적 패러디물을 시기별로 살펴본다. 방법에서는, 다른 표현수단 보다 월등히 많은 누리꾼들의 사진 패러디들을 생산해왔던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작품과 2천년대 초반부터 정치 현실과 관련해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 패러디물을 뉴스기사 검색을 통해 찾아들어가는 방식을 취했다. 무엇보다 누리꾼들의 작업 방식을 대중화 요인, 정치 미학적 효과, 예술 생산 방식의 대중적 전환이라는 범주로 묶어, 패러디물의 정치 미학적 성과를 따져보고 있다.    

 

 미리 결론을 요약하자면, 정치 패러디를 통한 누리꾼들의 증가된 사회적 발언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만들어낸 작품의 효력이 빠르게 잊혀진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이 글은 영화포스터 등 오락미디어 문화의 상징적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이를 혼성모방(패스티쉬)하는 방식이 문제라 본다. 오히려 이와 같은 혼성모방의 패러디 방식은 앙가주망의 도구로써 정치 패러디의 가치를 약화시켰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적어도 개념적 탈취 개념인 전유와 베를린-다다와 상황주의의 실천 개념이었던 ‘전용’(détournement)의 예술 미학을 통해서 누리꾼들이 지닌 정치 미학적 한계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2. 패러디의 정치 미학

1) 패러디 기원과 그 조건들

옥스퍼드 어원사전(1996년 판)에 보면, 패러디란 말은 16세기말경 그리스어 parōidia에서 나왔다. 어원상 ‘아울러’, ‘곁에’ 혹은 ‘대응의’ par-와 ‘노래’를 의미하는 -ody가 결합되어 생긴 말이다. 이를 합치면, 다른 이의 원작을 이용해 풍자하여 부르는 노래 형식쯤 된다. 중세 때 구전을 통해 노래처럼 부르던 시구절을 연상하게 만들 듯이, 패러디는 중세에 ‘타인의 시 스타일을 모방해 자신의 창작에 이용하는 시 형식’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물론 어원적 의미에서 ‘모방’이란 말은 흔히 말하는 원본 베끼기가 아닌 새로운 표현을 위한 재해석적 행위로 봐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동양에서는 ‘용사’(用事)라는 개념이 있다 (정끝별, 1997, 36쪽). 용사는 과거 경험의 권위를 현재 문맥에 확장시켜 얻는 시적 효과를 지칭한다. 패러디든 용사이건 우리는 둘 다 그 어원이 시나 노래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고, 큰 천재적인 재능 없이도 인민의 정서와 함께하면서 대중적 창작 행위의 일부였던 미학 장르가 패러디임을 또한 엿볼 수 있겠다.


유추해보면 패러디는 앞선 것을 재조합해 현실의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의도적 모방인용이라 할 수 있다. 패러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원본의 텍스트, 패러디를 수행하는 패러디스트, 모방인용의 새로운 패러디 텍스트, 그리고 이를 읽는 독자가 개입돼 있다. 패러디의 창작 완성도는, 모방인용의 정밀함보다는 원작에 일부 기억을 이용해 비정상성에 기댄 현실을 비틀고 조롱하는 능력에 달렸다. 다른 한편, 독자의 해석 능력과 과정이 패러디스트의 감각적 패러디 생산 능력만큼이나 중요하다. 만약 독자가 패러디를 전혀 이해못한다면 그 영향력은 유명무실하다. 즉 원텍스트와 패러디, 그리고 이를 지칭하는 현실을 독자가 제대로 이해를 못한다면 패러디의 효과는 반감하거나 상실된다.

 

구체적으로 패러디가 작동하는 조건을 보면, 첫째, 원텍스트의 ‘전경화’(前景化, foregrounding)'를 필요로 한다. 인용과 모방은 바로 패러디를 위해 원저자의 텍스트로부터 가져온 이미지, 음원, 영상, 시구절 등에 의해 구성된다. 이들이 전경이며, 이는 패러디스트의 작품이 이미 가져온 것(원텍스트)에 의해 구성된 패러디라는 것을 독자에게 일깨우는 구실을 한다. 또한 ‘전경’은 원텍스트의 이미지가 패러디 창작의 전제 조건임을 뜻하나, 새로운 패러디물을 압도해 주인 행세를 하면 곤란하다는 점을 말한다.

 

둘째로, 가져온 것(원텍스트)과 패러디 텍스트는 상호 교류하고 대화한다. 원텍스트가 당대의 사회적 문맥에 의해 수용되고 공인되었던 방식이 패러디 텍스트가 쓰여진 현실에서 다시 여과되어 재해석되는 단계를 거친다. 대개 패러디는 원작에 대해 경애를 표하거나 조롱하는 것에 만족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원작의 힘을 빌어 패러디를 수행하는 시점의 현실과 사건을 풍자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후자의 경우에, 원저와 패러디간을 매개하는 역할은 패러디 대상화된 현실의 소재나 사건에 의해 맺어진다. 일반적으로 원텍스트의 맥락을 기억에 담아 오늘날 정치 현실을 조롱하려는 미학적 형상화 작업이 대개 패러디의 메커니즘으로 보면 된다. 패러디스트가 예술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현실 비판을 매개로 원텍스트와 자신의 패러디 텍스트를 대화하게 하는 창의적 능력 때문이다.

 

셋째로, 진정한 패러디 창작의 힘은 원작과의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획득된다. 원작과 대화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패러디요 용사이지만, 원작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는 반복과 모방이 진정한 창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린다 허천(Hutcheon, 1992, 15쪽)은 “유사한 점보다는 다른 점에 유의하면서 (원작에) 비판적인 거리를 두는 반복형식”을 패러디라 간주한다. 다시 말해 “이전의 예술작품을 재편집하고, 재구성하고, 전도(inversion)시키고, 초맥락화(trans-contextualizing)하는 통합된 구조적 모방” (같은 책, 23쪽)이 패러디다. 쉽게 얘기하자면, 패러디엔 같으면서 다름 혹은 다르면서 같은 이율배반의 미학적 논리가 틈입해 있다. 그래서, 패러디나 용사를 행하는 자(패러디스트)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거나, 가져온 것(원텍스트)의 문맥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해하여 피상적으로 패러디 텍스트에 모방 인용했을 때, 이는 새로운 창작이라 보기가 어렵다. (정끝별, 1997, 36~7쪽) 이 점은 이후에 진술될 누리꾼들의 패러디 정치 미학의 패스티쉬적 한계점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마지막으로, 패러디는 독자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수용성의 영역이 존재하지만, 이 또한 패러디스트의 역할과 합쳐지는 경향이 있다. 근대 미술 시장의 발달은 전문적 패러디 창작의 영역과 독자 혹은 수용자의 해석 영역을 사실상 분리시켰다. 물론 전문적 패러디스트에 의해 생산된 패러디물로부터 당대 독자와 관객들은 반전과 독특한 해석, 그리고 해학으로부터 ‘기대 전환’의 감흥 효과를 얻었다. 물론 이같은 심미적 해독의 즐거움이란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온라인 패러디 생산 구조의 민주화로 일반 독자도 누구나 패러디스트의 범주에 끼게 됐다. 온라인 패러디물을 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생산하고 비슷한 것끼리 대조하고 퍼뜨리는 주체로 패러디스트가 독자가 되고 독자가 패러디스트가 되는 합일이 이루어진다. 더 나아가 이들이 만들어낸 대량생산된 패러디물들은 동일 원본을 차용한 경우 서로간에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 간텍스트성(intertextuality)에 주목하게 만든다. 이는 패러디의 무한복제 문화와 패러디 생산 주체의 민주화에 따른 결과다. 즉 디지털 기술의 덕택에 힘입은 패러디의 집단 생산은 예술주의적 성찰성을 궁극적으로 떨어뜨리는 경향성을 보이나, ‘과잉의 변조’나 간텍스트성에 의해 해석적 균열을 가져오고 대중의 정치적 소통에 에너르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는 이후에 보게될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물의 생산과 관련해 긍정(일시적·즉각적 대량의 패러디 제작을 통한 여론 환기)이자 한계(성찰성의 뿌리가 약한 관계로 인한 휘발성과 이미지 과잉으로 인한 현기증 유발)로 작용한다.

2)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척도  

패러디의 유사어로, 벌레스크(burlesque, 戱作)나 트라베스티(travesty, 서툰 모방), 패스티쉬(pastiche, 혼성모방), 키치(kitsch), 콜라주(collage), 몽타주(montage), 풍자, 인용 등이 있다. 자주 이 유사어들은 패러디와 혼동돼 쓰이는 차라 조금은 구별이 필요하다. 먼저 ‘벌레스크’ 혹은 ‘트라베스티’는 논자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르나 이 둘은 비슷한 의미로 함께 쓴다. 허천 (68쪽)에 따르면, 이들과 패러디의 차이는 전자가 반드시 조롱을 내포하고 있지만 후자는 반드시 조롱을 지향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벌레스크의 장점은 원작의 진지함의 형식이나 내용을 익살로 모방해 표현하는데 있고, 그렇게 보면 패러디의 하위 장르 유형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패스티쉬’를 보자. 패러디가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에서의 변형 혹은 각색이라면, 패스티쉬는 무비판적이고 피상적인 모방이라는 점에서 또한 다르다. 패스티쉬는 차이보다는 전작과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패러디가 거리두기임을 상기해보면, 프레드릭 제임슨식의 표현법으로 이는 ‘무표정한 모방’ (blank parody)이요, 이미지들의 중성적 모방과 혼용에 불과하다. 더불어 패스티쉬가 대중문화의 장르로 확대될 때 이를 ‘키치’로 볼 수 있다. 키치는 현실 풍자의 맥락이 실종된 원본 베끼기의 배설 미학에 다름 아니다. 한편, 콜라주와 몽타주는 파편화된 단편들을 새롭게 재조합하여 새로운 창작물로 동시화하는 기법이다. 각각의 우연적 배열이 전체의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패스티쉬의 동기 결핍의 베끼기와 무질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콜라주와 포토몽타주는 앞서 지적한 허천의 ‘원작에 비판적 거리두기’에 있어 대단히 충실하다. 패스티쉬에 대한 이들의 상대적 미학적 우위는 왜 이 글에서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가능성을 다다나 상황주의자들의 콜라주와 몽타주 예술 기법에서 찾는지에 대한 근거로 봐야 한다.

 

또 ‘풍자’를 보자. 풍자란 원본 이미지에 대한 줄곧 조롱과 해학을 담고 있다. 그러나, 패러디는 이와 더불어 원텍스트나 원작자에 대한 존경의 ‘오마주’(hommage) 또한 포함한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적 패러디가 풍자와 혼용되어 쓰였던 조롱과 경멸의 패러디라면, 오마주적 패러디 혹은 존경의 패러디 또한 패러디 형식의 일부다. 이렇게 따지자면 풍자의 한 형식으로 패러디를 보는 것은 협소한 정의다. 마지막으로, ‘인용’(quotation)은 단순히 전텍스트 혹은 작가와의 사실적 혹은 잠재적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중립적으로 쓰인 경우다. 인용은 전거 혹은 원텍스트의 힘을 억누르고 거리두는 절제의 완성도 높은 패러디에 줄곧 쓰인다.

 

사실상 이들 용어법은 서로를 배제하기 보다는 서로 중첩되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유사 용어와 그 표현들은 패러디와 경계를 긋거나 혹은 패러디의 중요한 표현 형식이 되면서 패러디의 형식적 미학에 힘을 배가하는 근거가 된다. 문학과 인문 영역에서 활발히 정의내려지거나 해석되는 패러디 미학의 근거는 사실상 활자화된 글인 텍스트 패러디에 한정된 측면이 크다. 사실상 이미지나 동영상 등의 영역에서 패러디 미학 구조에 대한 해석이 최근 거의 부재했다. 그나마 거의 유일하게 예술계에선 한상엽(2006)이 시론적으로 패러디 미학의 성찰성 정도를 본 정도다. 그는 패러디 미학의 수준을 세 가지 정도로 나눈다. 수평적 패러디, 수직적 패러디, 인용으로서의 패러디가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세 가지 미학적 완성도에 따른 분류를 응용해 누리꾼들의 패러디 미학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활용한다.

 

우선 ‘수평적 패러디’다. 이는 원본 텍스트의 단순 차용 패러디를 지칭한다. 그 급으로 치면 패스티쉬의 접경에 거하는 혼성모방의 패러디다. 누리꾼들의 일반 작품 형식들에서 많이 관찰된다. 예를 들면, 원작 영화 포스터에 얼굴만 포토샵으로 작업해 대치하는 대량 복제식 패러디물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 수평적 패러디물은 원작의 전경화된 이미지에 좌우되고 그것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전경으로 쓰였던 영화 포스터 등이 누렸던 인지도와 인기에 의해 만들어진 패러디 이미지란 결국 전경의 흥행 기간에 비례해 독자의 기억에 각인되는 처지에 놓인다.

 

‘수직적 패러디’는 조금 격상된 패러디 미학이다. 원작의 전경화가 패러디물에서 즉각적이지 않고 일부 의미론적 연결만을 유지한다. 원작 이미지의 차용과 동시에 덧붙여 색다른 형태의 해석을 가미하는 창작 행위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패러디 차용으로서의 대상 이미지’의 힘이 잔존하지만 그보다는 ‘패러디 목표’(target)로서의 현실 해석에 대한 의지와 강도가 훨씬 두드러진다. 수직적 패러디 이미지는 말하자면 원본에 대한 동일성의 힘보다는 이격의 힘이 좀 더 압도하는 상황이다. 수직적 패러디는 이 글의 실제 분석에서 ‘전유’ (appropriation)라는 말로도 달리 쓰이고 있다. 실제 예들은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군들에서 심심찮게 목격된다. 전유의 미학 개념 또한 기존의 것(원텍스트)을 가져다 맥락을 재해석하는 행위를 지칭하나, 그것의 주요 방점은 대상 이미지와의 동일성 유지보다는 오히려 스텍타클의 과잉 이미지들을 정치적으로 재해석해 현실의 패러디 목표를 조롱하는 문화정치적 실천 효과에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선 수직적 패러디란 용어보다 전유의 미학이 훨씬 더 정치적 동기를 함의한 실천적 용어로 본다.

 

   마지막으로 ‘인용으로서의 패러디’ 혹은 중립적 패러디다. 필자는 이것을 ‘전용’ 혹은 ‘선회’(détournement)의 패러디 방식으로 본다. 둘 이상의 원작 이미지들을 끌어오는 포토몽타주는 인용으로서의 패러디의 대표적 형태다. 기존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혼용하나, 새롭게 창작된 것이 기존의 것에 대한 기억 혹은 전경화가 거의 소멸된 형태의 패러디를 지칭한다. 각각의 합이 완전히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연다는 점에서 인용의 패러디는 전유를 넘어선 전용 혹은 선회의 미학에 가깝다. 이는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패러디 효과의 휘발성을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미학 기제이다. 필자의 주장이 마치 누리꾼들을 패스티쉬와 전유에, 반면 직업적 작가군을 전용에 도달한 것으로 경계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누리꾼이 전용의 미학을 보여줄 수도 직업적 예술가가 그 반대에서 허덕일 수도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아마추어의 몇몇 작품들도 전용과 선회의 미학을 간혹 보여주기도 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개개의 아마추어 패러디 미학을 전용의 미학에 이르도록 독려하고, 집단으로 동시에 제작하는 패러디물들의 과잉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4. 아마추어 정치 패러디물 소사
   
이제 한국의 패러디계로 실제 들어가보자. 2009년 6월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정국과 함께, ‘딴지일보’는 사회 각계의 시국선언에 때맞춰 자신들의 시국선언을 내놨다. 시국선언서의 변에는, “연일 시국선언을 감행하는 측이 청와대와 비교하여 과연 소통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시국선언의 목적이 독백이 아닌 한 결국 청자가 알아들을만한 소리”를 내려면, 다음<표 1>의 내용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쥐가 지껄이는 듯한 ‘찍찌리리릭’ 시국선언에는, 불통의 정치에 소통을 복원하라고 힘없이 외치는 순진함에 대한 풍자 또한 깔려 있다. 한글 서체는 궁서체를 써 시국선언의 옛맛을 살리고, 쥐소리를 흉내내면서 불통의 정치 현실을 묘사한다. 여론의 외면하는 정치 현실을 조롱하는 퍼포먼스 효과이다.

<표 1> 딴지일보의 시국선언문 내용

찍찌리리리릭(시국선언문)

찌~~~익 찌리리리찍 찌리리 찍찍 찍찌리리리리리~~~~~~~찍찍 찍찌찌리릭
찍찌~~~~~~~~~~~~~~~~~~익 찍찍찍찍찍 찌리리리~~~~~~~찍 찌찌찍
찌~~~익 찌리리리찍 찌리리 찍찍 찍찌리리리리리~~~~~~~찍찍 찍찌찌리릭
찍찌~~~~~~~~~~~~~~~~~~익 찍찍찍찍찍 찌리리리~~~~~~~찍 찌찌찍
찌~~~익 찌리리리찍 찌리리 찍찍 찍찌리리리리리~~~~~~~찍찍 찍찌찌리릭
찍찌~~~~~~~~~~~~~~~~~~익 찍찍찍찍찍 찌리리리~~~~~~~찍 찌찌찍


찍찌찌리리~~릭 (2009년 6월 17일 딴지 편집부 일동)

딴지일보는 1998년 7월에 문을 연다. 거의 국내 인터넷 문화의 초창기 시절이다. 당시 청년 실업자였던 총수 김어준은, 적절한 비속어와 농을 섞어 권위를 뒤틀어 표현하는 정치 풍자·패러디 사이트를 개설한다. 딴지일보는 사실상 인터넷 채팅에서의 언어파괴 현상과 형식주의 붕괴에 힘입은 바 크다. 무엇보다,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이라는 창간 선언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딴지일보의 패러디 문법은 문어체 언어 형식의 파괴와 비속어 사용이었다. 그것은 당시 신세대, X, N세대 논쟁과 맞물리면서 사회를 관통하는 엄숙주의에 대한 나름 청소년들의 재기발랄함을 선도하는 디지털 문화로 각광받는 계기가 된다. 형식은 황색 잡지 저널리즘의 틀을 빌렸으되, 내용은 크게 현실 참여적이었다. 딴지일보의 창간 목적에도 나오듯, “우끼고 자빠진 각종 사회 비리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는 것을 임무로” 삼아 뉴스와 사진 패러디물들을 올리면서, 누리꾼들의 호응은 물론이고 언론의 주목을 받아가며 성장한다.  


딴지일보의 힘은 영상을 통한 새로운 의미 전달도 있었지만, 언어 사용의 자유로움과 파괴였다. “유일한 경쟁지는 썬데이 서울”이요 사회 권력의 비리 저 안 ‘똥꼬 깊쑤키’ 들여다보고 비웃고 조롱하는 쾌감의 언어들에 누리꾼들은 쉽게 감응했다. 딴지일보는 정치적으로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과 김영삼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인터뷰 기사와 사진 패러디로 누리꾼들의 호응을 얻으며 크게 이름을 알린다. 그러나, 한일 월드컵 전에서 쇼비니즘에 편승하고 스스로 기업화하면서, 그리고 딴지일보로부터 분리해 새로운 패러디 사이트들이 하나둘 분리해 등장하면서, 원조 사이트로서의 이름도 차츰 퇴색해져갔다.

 

정치 패러디는 2000년 16대 총선 당시 간헐적으로 모습을 보였다. 이후 딴지일보에 의해 2001년 1월쯤에 연재를 시작했던 이회창 등 대선 후보들에 대한 ‘일망타진 이너뷰 시리즈’ 등으로 그 형식적 재미를 주다가, 2004년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그리고 당시 이명박 서울 시장의 ‘서울 봉헌’ 발언 등의 정치 현실에서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딴지일보 중심의 날 것 그대로의 언어를 통한 정치 패러디에 집중했던 2002년과 달리, 2004년부터는 그 형식에서 디지털 이미지 합성으로 전환한다. 단순히 드라마, 영화 포스터의 이미지들과 카피 문구들을 포토샵 등으로 재가공하는 형태의 정치 패러디물이 폭발했던 시점이라 볼 수 있다.

 

이후 딴지일보의 뒤를 잇는 계보엔 ‘디시인사이드’가 있었다. 이미 디시인사이드는 1999년 디지털 카메라 동호회 사이트로 출발하여 숱한 디지털문화 현상들 (예를 들어, 2002년 디지털 폐인들의 ‘아햏햏’ 문화와 2008년 촛불 정국아래 정치적 토론장으로서의 ‘아고라’의 위력을 보여줬다)의 본산으로 커가는 중이었고, 디시인사이드의 시사 갤러리는 당시 정치 패러디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누리꾼들의 창작 공장쯤이 돼갔다. 어찌보면 디시인사이드는 다른 온라인 공간과 달리 게시글에 이미지를 올려야 글이 게시된다는 성격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패러디 이미지와 동영상의 성장을 도왔던 측면도 있었다.

 

독특하게도, 국내에서 온라인 패러디는 정치적 여론 형성이나 변화에 미치는 역할이 대단히 컸다. 언론에 기사로 소개되거나 언론 스스로 패러디를 차용함으로써 그 대중화를 가속화했다. 특히, 시기적으로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국면에서 패러디의 힘이 컸다. YTN 의 ‘돌발영상’은 탄핵 정국의 주요 장면만을 모아 패러디해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누리꾼들은 그들대로 영화 <살인의 추억>을 패러디한 ‘탄핵의 추억’, 탄핵 가결일의 모습을 풍자한 ‘망국기 휘날리며’, ‘탄핵 대장금’ 등 유명 영화나 드라마 포스터를 따와서 탄핵정국을 비난하거나 국회의원들의 비상식적 행태를 알리는 패러디물들을 제작해 순식간에 인터넷상에 퍼뜨렸으며, 이 패러디물들은 탄핵반대 촛불집회 등 반대여론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우리는 무적의 투표부대’ 패러디 시리즈는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투표를 독려하는 캠페인 소재로 활용되었다. 당시 디시인사이드와 라이브이즈 등에는 수많은 합성물과 패러디물이 등장했다. 누리꾼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복귀를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개혁적 대통령 이미지) 혹은 <효자동 이발사> (소박한 대통령 이미지)에 빗대 만듦으로써, 이제까지의 희화화하거나 부정의 미학 혹은 풍자의 미학에 근거한 정치 패러디물 제작 패턴에 긍정의 패러디란 정반대의 미학적 흐름을 세우기도 했다.    

 

이라크 파병 반대와 반전 작품으로 공을 세웠던 현실 참여적 미술작가군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과 총선 정국에서 누리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패러디 이미지의 기세에 눌려 사실상 부진을 면치 못했다. 당시에 몇몇 아방가르드 정치 미술인들이 탄핵 정국과 관련 온라인 전시 기획을 통해, 프리첼 카페 ‘아트시월’, ‘알통닷컴’, ‘아트무브’ 등에서 누리꾼들과의 만남을 시도했으나 별 호응을 받지 못했다. 누리꾼들은 자신들의 디지털 카메라로 찍거나 기존의 이미지들을 바로 손쉽게 포토샵 등으로 자체 편집을 시도하고 (일명 ‘포샵질’) 단번에 게시판에 올려 명성을 얻으면서, 오히려 직업적 작가군들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2004년의 정치 현실은 이렇게 아마추어 누리꾼들의 패러디 창작이 만개하면서 정치 패러디 사이트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시기였다.

 

그 맘쯤 패러디의 인기를 등에 업고 비즈니스 전업의 신생 사이트들이 속속 등장한다. 시사 패러디물 ‘대선자객’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2003년 12월 말 정치 시사 사이트로 출발한 ‘라이브이즈’(liveis.com), 딴지일보 출신 일부가 독립해 만든 ‘미디어몹’ (mediamob.co.kr), 서울시 버스정책과 CJ 만두파문 패러디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풀빵’ (pullbbang.com) 등이 새롭게 총아를 받았다. 문제는 패러디 사이트들 중 대부분이, 상업적 포털들마냥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정치 패러디를 콘텐츠 서비스 개념으로 접근해 패러디 자체를 소비재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상업적 동기를 지녔던 많은 사이트들이, 정치 패러디물을 누리꾼들끼리 보고 키득거리는 배설의 공간에 밀어넣고 온라인 콘텐츠 서비스 사업을 벌이는데 골몰했다. 검색엔진의 패러디 코너에도 영상 합성을 활용한 탄핵 풍자물들이 즐비해져갔다. 예를 들어, 검색 포털인 다음은 ‘디시 인 총선’ 메뉴를 만들어 패러디 포스터 등 누리꾼들의 기발한 창작물들을 모아 게시했고, 야후는 ‘총선 VJ’라는 이름으로 시민기자들이 현장에서 취재한 동영상과 뉴스를 ‘그들의 변신은 무죄’, ‘동상다몽’ 등의 제목을 달아 제공했다. 네이버, 마이엠 등의 사진갤러리도 선거 관련 패러디 사진들로 대체됐다.

 

당시 누리꾼들의 패러디 문화를 흡수하려던 상업적 포털들에 의해 정치 패러디의 연성화와 패러디의 가십화가 비약적으로 늘게 된다. 게다가 패러디 대상이었던 정치권이 역으로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 기법을 정치 선동과 상대 비방의 장으로 활용하는 경향도 이즈음 크게 증가해 패러디의 현실 저항적 성격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의 좋은나라닷컴은 정치에 오락을 가미한 ‘폴리엔터테인먼트’를 표방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 패러디물을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 중앙선관위조차도 당시 정치 포털과 연동해 총선 사이트(vote2004.nec.go.kr)를 운영하면서, ‘투표용지 휘날리며’ 등 유명 영화를 패러디한 각종 포스터를 게시할 지경이었다. 정치 패러디의 난맥상은 ‘패러디 정쟁’으로 여야 대결 구도까지 형성되면서 극에 달한다. 실제 패러디 정쟁은 <그림 1>에서 처럼, 청와대 홈페이지 초기화면에 올렸다가 내려진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패러디 사진이 시발이 됐다. 영화 <해피엔드> 포스터의 여배우 얼굴에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의 얼굴을 넣은 패러디물이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올라 파문이 일었다. 정사를 마친 듯 침대에 앉아있는 불륜의 연인 중 남성을 조선과 동아 일보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여성을 박근혜에 비유했다.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며 분격해 노대통령의 알몸 패러디와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사진에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해 ‘희대의 민생파탄범’으로 이름붙인 패러디 사진을 좋은나라닷컴 패러디 사진 코너에 게시하며 반격했다.

 

<그림 1> 패러디 정쟁의 대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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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홈피의 박근혜대표 패러디// 좋은나라닷컴의 노전대통령 패러디
 

멱살잡이와 난투극이 난무하는 우리의 정당정치 현실에서 보자면 이도 그리 큰 사건이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제도권 정치 비판의 수단이었던 패러디가 오히려 의회내 정쟁의 도구가 됐다는 측면에서 보면, 패러디 문화의 발전에 꽤 부정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 정치인들간 패러디 정쟁으로 말미암아 패러디가 특정 정파를 비난하고 선동하는 도구적 역할로 후퇴했고, 이후에 계속해서 비열한 정쟁의 도구로 등장한다. 물론 2008년 촛불 정국에서 스티커, 짤방, 플래카드, 풍선, 카메라 등 다양한 소통의 매체 역할에 더해, 정치 패러디는 계속해서 누리꾼들의 중요한 사회참여와 표현의 수단으로 쓰인다.


2009년에 또 한번 패러디는 그 정치적 급진성을 상실한다. 정부 홍보의 적극적 수단으로 도입되는 국면을 맞이한다. 반전과 해학을 통한 풍자의 미학이 사그러들고 이제 패러디는 정부 정책의 중요한 홍보 수단으로 떠오른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은 드라마 ‘꽃보다 남자’(KBS 2TV)의 인기에 편승해 당 홈페이지에 국정핵심과제 관련 특위 활동을 ‘꽃보다 경제’로 패러디해 게시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변인은 손담비의 노래를 빗대어, ‘박담비, 같이 미칩시다’ 패러디를 만들어 당 기초의원 결의대회에서 선전용으로 제작해 퍼뜨렸다. 또한 박희태의 말말말 게시판에 또 한번 오른 ‘우리도 연아처럼’에서는 피겨선수 김연아 선수 옆으로 그가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을 합성해 올렸다. 김연아처럼 세계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자는 메시지를 첨언한다. 패러디의 홍보 수단화는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을 패러디하면서 사실상 절정에 이르렀다. 김인식 야구감독의 얼굴을 대신한 이명박 대통령이 야구단 감독의 얼굴로 합쳐져 등장하고, ‘당정청 드림팀이 되자’는 문구로 패러디물을 완성했다.


대부분 패러디의 정부 홍보 수단화에 누리꾼들의 야유가 쏟아졌는데, 사실상 콜라주나 포토몽타주의 역사를 본다면 이도 그리 크게 욕먹을 짓은 아니었다. 사회주의 건설기에 콜라주나 포토몽타주가 정치 과잉의 선전 도구로 이용됐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주들 또한 심심찮게 이들 기법을 이용해 물건을 팔아왔기에 정부 홍보용 패러디물이란 외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요 결과일 수 있다. 문제는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누리꾼들의 전유물이자 정치 풍자의 대표적 수단으로 각광을 받았던 패러디 수단이 정당간 정쟁이나 홍보용 수단으로 재개념화될 때였다. 노무현 탄핵정국 패러디물들을 빼곤 사실상 정책 홍보 등 긍정의 패러디가 오히려 누리꾼들의 반감을 사거나 대부분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음을 보여준다. 정치인들의 패러디 오용이 문화정치적 표현 수단으로써의 효과를 상당히 희석시켰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요약하면, 정치 이슈가 나올 때마다 누리꾼들은 새롭고 기발한 그래서 정국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정치 패러디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동시에 패러디는 정치권의 정쟁과 홍보용으로 그리고 온라인 포털들과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전문 상업 패러디 사이트들을 위한 돈벌이로 전락하면서 그 정치적 호소력을 점점 잃기 시작한다.


5. 정치 미학적 표현으로써 패러디의 가능성    

이제까지 국내 인터넷 패러디의 발전을 딴지일보에서 출발해 최근의 정치 패러디 발전까지 그 특징들을 훑어보았다. 2004년을 정점으로 놓고 패러디 문화의 대중화와 이후 쇠퇴 국면을 살펴보면서, 그 쇠락의 요인들로 업체들의 패러디의 상업적 서비스화, 패러디의 정쟁 도구화, 정부 홍보용 패러디 생산을 들었다. 이제부턴 좀 더 미시적인 패러디 생산 미학 자체에 눈을 돌려서, 누리꾼들과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이 직접 디자인해 올렸던 몇몇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 그들의 작업 방식을 대중화 요인, 정치 미학적 효과, 예술 생산 방식의 대중적 전환이라는 특징에 착안해 패러디물의 공과를 따져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방법에서는, 다른 표현수단 보다 월등히 많은 누리꾼들의 사진 패러디들을 생산해왔던 디시인사이드 갤러리(http://gall.dcinside.com)를 중심에 두고 그 하위 디렉토리인 ‘패러디 갤러리’ 작품들을 주로 살펴보았다. 2003년부터 개설된 패러디 갤러리의 게시물들을 재열람하면서, 다양한 패러디 게시물 가운데 주로 정치적 사안과 연관된 목록들을 열람하는 방식을 취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들에 이뤄졌던 패러디 창작과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들을 함께 감상하기 위해, 디시인사이드 외에 구글, 네이버, 야후 검색(예를 들면, 이명박 패러디, 정치 패러디, 노무현 탄핵 패러디, 박근혜 패러디 등)으로 관련 이미지들을 여러 경로를 통해 찾아들어가는 방식도 썼다.


정치 패러디의 성장과 발달이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시기들과 대체로 일치하지만, 2003년의 대선 정국을 시작으로 2004년의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만두파동, 그리고 서울시장의 ‘서울시 봉헌’ 발언에 대응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다, 촛불 정국 시기에 다른 표현 매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춤하는 소강 국면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정치 패러디 발전의 이와 같은 국면 변화에 대한 해석을 주로 이 때 생산되어 높은 조회수를 누리며 유명세를 탔던 패러디물들을 관찰해보며 그 근거 이유들을 찾고 있다. 즉 정치 패러디가 문제시됐던 시점들(주로 정치 선거 시즌들)과 연계된 정치 패러디물에 대한 기사 자료 수집은 뉴스기사 전문 검색 사이트인 카인즈(http://www.kinds.or.kr)를 통해 추가로 병행했다. 기사화됐던 누리꾼들의 패러디에 대한 소개를 참고로 다시 관련 이미지를 검색하는 방식도 취했다. 덧붙여, 정치 패러디 갤러리로 유명한 ‘미디어데일리’, ‘풀빵닷컴’, ‘미디어몹’, 그리고 ‘야후’와 ‘다음’2의 사진 이미지 갤러리 등을 참고가 필요할 경우 열람했다. 패러디물 내용에 대한 미학적 평가는 앞서 이론적으로 살펴봤던 패러디 미학의 세 가지 부류들, 즉 수평적 패러디 혹은 패스티쉬의 미학, 수직적 패러디-전유의 미학, 인용의 미학-전용 혹은 선회의 미학이란 기준을 통해 해석을 시도한다.

 

1) 정치 패러디의 대중적 생산 방식과 파급력

이제까지 대중과 언론의 조명을 받아 소개됐던 국내 정치 패러디물의 형식을 보면, 대부분 그 내용들을 국내ㆍ외 영화나 드라마 포스터에 크게 의존해왔다. 단순히 포스터에 나온 배역 얼굴만을 바꾸고 카피 문구를 적절히 고치는 ‘포샵’ 수준의 패러디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 올라와있는 패러디 게시물들을 살펴보면, 2003년부터 사회적으로 쟁점화됐던 사안들과 관련해 거의 대부분 영화 포스터들을 원본 이미지로 차용했다. 콜라주 형식으로 다른 이미지들을 여럿 합성한 작품은 오히려 2천년대 초반에 잠깐 등장하고 곧 사라진다. 사회적 논쟁이 있던 시점에 만들어진 패러디물들은 대부분 포스터 이미지의 틀을 그대로 갖다 쓰는 방식이었다. 그것도 대중적으로 관객이 많이 들었던 영화나 드라마 작품들 중 정치적 사안이 터진 시점이나 바로 전에 제작된 포스터 이미지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누리꾼들 스스로 혹은 보는 이들의 기억 능력에 소구하기 위해서 최근 1, 2년간 쓰였던 영화포스터들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보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세월이 지나서보면 당시 패러디의 정황과 맥락이 뭔지에 대해 보는 이의 기억에서 가물가물하기 십상이다. 즉 패러디 작품에 대한 누리꾼들 스스로의 기억과 패러디물 자체의 생명력이 짧아진다. 이는 다음에 볼 패러디의 정치 미학적 한계 상황을 만드는데 일조하는데 반해, 다중에 의한 창작물의 대량 생산을 허용해 여론을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크게 기여한 측면이 있다.

<표 2> ‘미디어데일리’ 시사 패러디 연재물
 

 패러디 연재 제목

연재 일자

원본 출처

·'타임머신' MB와 함께 떠나는 과거여행!

09. 6. 30.

미국영화: 타임머신, 2002

·황석영의 '잘못된 만남' 중도실용주의??

09. 6.  8.

국내영화: 잘못된 만남, 2008

·'바보' 노무현 당신의 미소가 그립습니다.

09. 5. 25.

국내영화: 바보, 2008

·'황씨표류기' 황석영 '사는게 다 그런거지!'

09. 5. 15.

국내영화: 김씨표류기, 2009

·'마더' 건호야! 엄마가 지켜줄께!

09. 5. 13.

국내영화: 마더, 2009

·'킬빌' 강한 박근혜가 돌아왔다!

09. 5. 12.

미국영화: 킬빌, 2004

·2009 외인구단

09. 5.  6.

MBC드라마: 외인구단, 2009

·'박풍(朴風)'의 신라의 달밤!

09. 4  30.

국내영화: 신라의달밤, 2001

·4.29 뺏지대전!

09. 4. 24.

중국 영화: 적벽대전 2, 2009

·우리집에 왜 왔니?

09. 4. 22.

국내영화: 우리집에 왜 왔니?, 2008

·신해철의 '사랑'

09. 4. 21.

국내영화: 사랑, 2007

 

누리꾼들 누구든 쉽게, 있는 포스터 이미지들을 가져다 변형하여 사안에 따라 대량으로 제작해 게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누리꾼들이 완성한 패러디물 아래 흔히 달아놓는 “하룻밤 꼬박 날 새서 만들었어요”란 누리꾼들의 덧붙이는 게시글은, 이들이 패러디 제작에 투여한 상대적으로 손쉬운 작업 난이도를 뜻한다. 최근의 이미지 패러디 제작 방식을 봐도 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일례로, <표 2>의 ‘미디어데일리’(www.mediadaily.co.kr)의 정치 시사 패러디물의 연재를 봐도, 그 제작 특성이 잘 드러난다. 표의 우측 칸들은 원본 이미지의 출처를 국가명, 제목, 제작년도 순으로 필자가 정리해본 것이다. 이를 보면 대부분이 흥행에 성공해 잘 알려진 국내ㆍ외 영화 포스터를 이용해 재미를 주는, 거의 만평과 비슷한 연재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연재물조차도 매주에 한편씩 작가가 아닌 전문기자가 패러디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본 포스터에 기대서 누구나 제작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됐음을 의미한다. 물론 패러디 생산 미학의 수준에서 보면, 대개가 단순히 포스터 캐릭터와 정치인의 얼굴 이미지를 뒤바꾸는 것들이어서 패러디의 완성도와 영향력이란 면에서 단순 차용의 ‘수평적 패러디’에 해당한다.

 

<그림 2> 서울시 버스노선 패러디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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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인사이드 패러디 갤러리의 게시물들과 앞서 패러디 쇠락의 전반적 역사를 보면, 단연 2004년 탄핵 국면, ‘서울 봉헌’ 반발, 그리고, 같은 해 6월 ‘쓰레기’ 만두 파동 시기에 누리꾼들의 패러디 창작이 최고점에 달했다. 창작물 생산의 당시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컨대, 탄핵 국면에서 국회의원들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국회해산’ 등을 외치는 사이버시위에 자연스레 정치 패러디가 합세해 힘을 실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기각했을 때 또한 노대통령의 복귀를 환영하는 포스터 이미지 혹은 플래시로 제작한 패러디물이 봇물을 이루었다.

 

2004년 7월경에는 당시 이명박 서울 시장의 ‘서울 봉헌’ 논란과 교통 체계가 바뀐 것에 대해 비판 패러디들이 디시인사이드 등을 가득 메운 적이 있다. 특히, 이 때 제작된 패러디물 가운데 서울 버스를 구분한 알파벳 표기 G, R, Y, B를 ‘지랄염병’의 약자라 빗대어 보면서, “이젠 버스를 타면 살아 숨쉬는 지랄염병을 체험할 수 있다”는 내용의 패러디가 등장해 크게 주목을 끌었다. 버스 노선 패러디는 이제까지의 대중영화 포스터의 패러디 합성 방식과 미학적 완성도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나쳐보면 이미 존재하는 버스 이미지에 단순히 문자를 바꿔놓는 효과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버스와 문자가 색감 효과를 발휘하면서 뛰어난 타이포그래피 효과까지 함께 거두고 있다. 그림에선 흑백으로 보이지만, 각각의 버스는 위로부터 파랑, 빨강, 노랑, 파랑 색이고, ‘지/랄/염/병’의 네 글자가 버스 색깔과 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흥미롭게도 색감과 타이포그래피의 앙상블은 육두문자 네 글자와 대비되면서 그 색감의 정교한 질서를 여지없이 희화화하고 박살내는 재미를 준다. 미학적 수준으로 본다면, 아마추어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용으로서의 패러디’ 혹은 ‘전용’의 미학에 이른다.

 

같은 해 만두 파동에서도 패러디물의 위력은 강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사안은 기업의 도덕성 문제였다. 무엇보다 일명 ‘쓰레기 만두’ 생산과정과 관련해 식품업체 1위 CJ 등이 책임 회피 등 비도덕적 모습을 보이다 누리꾼들의 공분을 샀다. 결국 누리꾼들이 분풀이로 제작해 배포했던 패러디가 여론몰이를 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만두파동의 책임 논의가 불거지던 당시 한 누리꾼의 기업 윤리 질책에 대한 CJ 직원의 면피용 답 메일이 공개되면서 공분을 샀다. 이 때 <올드보이> 영화 속 장면을 이용해 CJ 직원을 비판하는 다양한 패러디들이 등장했다. 당시 패러디물들은 먹거리와 관련해 대기업의 비윤리적 속성을 알리는데 상당히 큰 힘을 발휘했다.

 

결국, 효과면에서 누리꾼들이 제작한 패러디 하나하나가 가진 이미지의 힘보다는 여럿이 한번에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제작하여 뿌리는 그 이미지들의 합해진 힘이 외려 컸다. 2004년 당시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사이트에만 하루에도 수백건의 정치 패러디 게시물들이 올라왔던 점이 그 예이다. 다시 말해, 작품으로서 콜라주나 혹은 포토몽타주처럼 패러디 이미지가 지니는 미학적 완성도에 의한 심미적 감흥보다는, 사회적 이슈와 적절히 맞물리면서 누리꾼들이 퍼뜨렸던 풍자 이미지들에 압도당했던 특정 시기의 정황이 효과 측면에서 더 컸다. 누리꾼들의 활동은 패러디를 생산해 인터넷 곳곳에 터뜨리는 게릴라전에 가까워보인다. 패러디 생산 방식에 있어서 쉽고 대중 친화적인 특성이 단기간에 파급력이 컸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이는 개개의 패러디 이미지들이 쉽게 잊혀지고 생명력이 짧은 근거로 작용했다.    
 

 

2) 매체 표현 방식의 다층성

2008년 촛불 정국하에서, 미국의 힙합 래퍼 에미넴(Eminem)의 음원(Lose Yourself)에 반주를 맞추고 이명박 대통령의 연설 내용을 샘플링해 제작한 랩곡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에미넴을 패러디해 일명 닉네임이 ‘핼시오네라(Halcyonera)’라 알려진 누리꾼이 만든 ‘Cease Yourself’란 싱글 곡이다. 이대통령의 육성을 대부분 역진술해 끊어 이어서 가사를 만들었는데, 샘플링의 편집이 상당한 수준이다. 음원 샘플링을 통한 정치 패러디 기법은 또한 동영상 이미지와 합쳐지기도 한다. 즉 가수들의 노랫말에 맞춰 연설하는 정치인들의 입모양을 편집하여 립싱크하는 동영상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떠오르는 정치 패러디의 일종이다.

 

2004년 탄핵 국면에서 등장했던 각종 플래시, 카툰, 풍자만화 등도 이미지, 캐리커처, 동영상, 음악 등을 혼성해 쓰면서 사이버공간을 스타일 정치의 표현 무대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레떼닷컴(www.lettee.com) 등에서는 패러디 플래시물들이 등장했고, 게임 사이트에서는 게임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듯 ‘탄핵반대’를 외쳤다. 게임 내러티브 자체가 정치 패러디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노 전대통령 탄핵에 가담했던 국회의원들을 기생충에 비유해 총으로 쏘아 잡는 ‘국회 기생충 박멸게임’이 개발되어 유행한 적이 있다. 청와대를 배경으로 ‘193마리의 기생충을 잡아라’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날개 달린 국회의원들의 얼굴을 총으로 쏘아 떨어뜨리는 게임이다. 임무 수행을 다 끝내지 못하면, ‘민주주의 오버’라는 메시지가 창에 뜬다. 또한 경매 사이트 옥션(www.auction.co.kr)에서는 네티즌들 간에 탄핵을 찬성했던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붙인 물건들을 헐값에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방식은 다 다르지만 다양한 매체 수단을 응용한 정치 패러디의 양상들이다.


2008년 촛불 정국에서도, 광화문 앞 광장 한복판에 펼쳐놓은 컨테이너 박스들 (일명 ‘명박산성’)에 망연자실해 하면서 수많은 누리꾼들이 다양한 패러디들을 제작했다. 형식은 광화문 사진 이미지였으나 내용은 온라인 게임 베틀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게임 전술 화면들을 합성하여 구성하는 재치를 보여준다. 마치 조선 시대의 운문체 글을 떠올리게 하는 ‘명박산성’(明博山城)이란 <표 3>의 시구절을 보라. 이 또한, 한자어 고유의 소리와 말뜻을 서로 달리할 수 있음을 살려서 패러디를 재치있게 구성했다.  

    

명박산성(明博山城)

 

광종(狂宗) (연호:조지) 부시 8년(戊子年)에 조선국 서공(鼠公) 이명박이 쌓은  성으로 한양성의 내성(內城)이다.
 성(城)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당시 육조거리에 막아놓은 기대마벽(機隊馬壁)이 백성들에 의해 치워지매, 그에 대신하여 보다 더 견고한 철궤로 쌓아올린 책(柵)에 불과하다.
 이는 당시 서공(鼠公)의 사대주의 정책과 삼사(三司:조선,중앙,동아) 언관들의 부패를 책하는 촛불민심이 서공의 궁(宮)으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 만든 것이다. (후략)


 [출처: 불명]    


 <표 3> 광화문 컨테이너 박스의 패러디 시구절
 

20세기초 나치에 대항해 다다이스트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도 다양한 오브제들을 사용해 이미지 콜라주의 패러디 정치 예술을 보여줬던 것처럼, 인터넷 누리꾼들은 반전과 풍자를 끌어올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 기법과 수단들을 통해 패러디 창작을 한다. 물론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효과는 다다의 20세기초 상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예컨대, 다다의 포토몽타주가 지금까지 미학적 차원에서 뛰어나고 그것이 마치 르뽀 사진의 효과를 낼 정도로 정교한 합성 효과를 뽐내어도, 사실상 아마추어 누리꾼들이 하루 밤을 새서 만드는 패러디물에 비해 실재감을 구현하는데 오히려 경쟁에서 밀리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게다가 포토몽타주를 위해 쓰였던 재료가 인쇄된 책이나 신문임을 고려하면, 1차원 평면적 이미지 합성을 넘어서는 디지털 이미지의 다양한 효과와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시각적 표현이라 하더라도 훨씬 다차원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지한 사진에 운동성을 줄 수도 있고, 하나의 이미지 바탕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주는 것도 가능하다. 디지털 기술은 이렇듯 표현의 시간과 공간 배치의 모든 부분에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2008년 촛불 정국하에 어느 누리꾼에 의해 만들어진 ‘엠비콕’이란 작품을 보자.

 

<그림 3>은 헐리우드 영화 <행콕>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15장 조합(예서는 그 중 3장 발췌)의 연속으로 움직이는 이 사진은 마치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콜라주들의 중첩 효과를 내고 있다. 한 누리꾼에 의해 제작된 이 이미지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던 촛불 시위를 각 지역별로 ‘엠비콕’의 고글 안경 위로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다. 기본 얼굴 이미지와 주요 하단 문구들은 바탕으로 고정돼 있고, 시간에 따라 고글 안경 위로 전국에서 벌어지는 촛불 시위 현장들의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변해간다. 동시에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 시위에 반응하는 답글이 만화식 말풍선을 통해 점멸한다.
 

<그림 3> 영화 <행콕>의 패러디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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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보면, 15장의 조합된 사진들 각각이 하나의 움직이는 사진 이미지의 콜라주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가만 들여다보면, 15장 사진조각들 각각에 또 다른 콜라주들의 시·공간적 배열과 배치 효과를 합해놓고 있다. 어찌보면 이는 비슷하게 변화하는 이미지들을 여러 겹으로 중첩시키는 플래시 등 디지털 표현의 아주 단순한 미학적 효과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흔히 볼 수 있었던 영화포스터 배역의 얼굴을 정치인의 것으로 대체하는 1차원적 사진 병합의 패스티쉬 방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흔히 고착된 공간성을 지닌 콜라주나 포토몽타주에 비해서, ‘엠비콕’과 같은 이미지 변형은 시간적 축을 이용하여 콜라주 이미지들의 공간 편성의 변화까지도 함께 꾀하는 작업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는 기법의 다양성과 표현 방식을 한층 시공간적으로 유연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엠비콕’은 현대 누리꾼들의 문화, 특히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반응하는 새로운 패러디 형식 실험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학적으로 보면, 디지털 시대의 기법들을 창의적으로 전유한 ‘수직적 패러디’로 봐도 좋다.

 

상황과 토픽에 따라 이처럼 매체적ㆍ시각적 특성을 종횡하며 새로운 표현방식들을 다매체적으로 결합하는 능력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물론 영화 포스터의 원본 이미지에 너무 기대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 또한 영화 포스터라는 오브제의 아우라에 의존함으로써 이 또한 패러디의 생명력을 짧게 만들고 있다.     
 

 

3)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의 탄생

국내에서 누리꾼들의 패러디물 생산은 정치적 동기에서 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디지털 이미지들의 얼굴을 장난삼아 바꾸는 행위로 출발했다. 그들 주위의 친구들, 친지, 가족, 연애인 등이 콜라주의 대상으로 나오다, 사회적, 정치적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로 차차 그 사진의 내용이 대체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디시인사이드 패러디 갤러리를 봐도 이와 비슷한 패러디 내용 변화의 패턴을 읽을 수 있다. 갤러리에 등록된 게시물 가운데, 2003년 10월쯤 되서야 게시 목록에서 본격적으로 영화 포스터를 이용한 패러디물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소재는 누리꾼들 주위의 친한 인물들이었고, 서서히 정치성(주로 쇼비니즘에 기댄 주변국들 비난)을 띤 게시물들이 같은 해 7월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 시기와 맞물리고 이후 시기로 접어들면 정치인들의 패러디물들이 대거 늘어난다. 그 와중에 한-일 월드컵, WBC 야구, 독도 문제, 2008 베이징 올림픽 패러디 등에서처럼, 스포츠계 인사들과 선수들이 패러디물의 소재로 떠오르기도 한다.


불과 십수년전만 해도 전문 작가들의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실험예술이 대안으로 떠올랐던 적이 있다. 작가와 수용자의 대화를 위해 수용자를 직접 작품 생산 과정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예술 활동을 일컫는다. 허나 이 상황에서도 수용자는 어디까지나 작품의 소비자였다. (예를 들어 강명구, 1987 참고). 하지만, 이제는 수용자가 작가가 된다. 이들의 작업 소재도 신변잡기에서 사회 참여적 이슈로 옮아가는 추세다. 오늘날 누리꾼들의 작품은 대개 사안의 정황을 기막힌 반전을 통해 얼마나 풍자적으로 묘사했느냐에 따라 커뮤니티 내부로부터 평가받는다. 그것의 현실태는 조회수와 ‘펌질’이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서만 봐도 잘 만들어진 패러디의 경우 조회수 1만건을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리고, 명성을 얻은 패러디는 누리꾼들에 의해 다른 장소로 무섭게 퍼진다. 이는 예술 작가들이 화랑이나 미술관을 통해 명성을 쌓는 방식보다 즉각적이다. 인정 투쟁의 방식에서, 프로급 예술가들의 성장이 폐쇄된 인적 회로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 것에 비해, 누리꾼들의 클릭수와 펌질은 더 공개적이며 연예인 스타제조 방식의 스타덤 구조와 비슷하다.

 

정치 패러디물이 홍수를 이루던 2004년은 이렇게 누리꾼들에 의해 인정받는 스타급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이 급부상하는 시기다. 예를 들어, ‘하얀쪽배’라는 아이디로 잘 알려진 신상민(당시 27살)은 그 해 17대 국회의원 선거 시기 24건 정도의 패러디물을 올려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아마추어 작가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 패러디물 아래에 아이디를 삽입해 넣을 정도로 나름대로 프로 작가의식이 있었다. 방식은 다른 이들의 것과 비슷하게 영화 포스터물의 이미지 변형 수준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사진 이미지들을 이용해 전문적 패러디 작업을 수행했다. 당시에 워낙 정치 패러디물로 선거사범들이 늘어나면서, 그와 비슷한 몇몇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아마추어 패러디 작가연대’를 결성한다. 총선을 거치면서 패러디 사범이 1천여명 이상 입건된 것을 보면, ‘하얀쪽배’류의 스타 작가가 나오는 것이나 이들의 권리를 사수하는 모임 결성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얀쪽배’와 아마추어 작가들이 당시 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과연 패러디가 창작이냐 아니면 ‘해적’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냐는 논쟁도 일었다. 방석호는 한 언론 대담에서, 패러디를 직접/간접으로 구분하고, 수준높은(직접) 패러디의 경우 창작이 개입돼 저작권 위반 혐의가 적고, 단순히 얼굴 정도 바꿔치는 수준의 저급(간접) 패러디의 경우 창작 수준이 떨어져 엄격한 저작권법 적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누리꾼들이 만들어내는 패러디물이 대체로 간접 패러디에 집중해 직접 패러디를 생산할 수 있는 여력이 적었고, 직접과 간접 패러디를 구분짓는 판단 자체가 사실상 자의적일 수 있어서, 그의 접근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질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저작권법 제25조의 ‘비평을 위한 인용’으로서 정치 패러디를 인정한다면,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한 패러디 작가들의 작품들은 저작권 침해와 무관한 사회 비평을 위한 인용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2004년 국회탄핵 시기까지 ‘하얀쪽배’나 ‘첫비’ 등 아마추어 작가들은 크게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나, 이후 많은 패러디 작가들은 정치 패러디 제작 일에서 손을 떼고 일상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는 저작권법과 선거법 위반 등 법적 판단에 의해 그들의 창작 활동이 크게 위축된 정황이 컸다. 아마추어 정치 패러디 작가들의 위축에 이어서, 최근에는 정치적 맥락을 거세한 연예 오락전문 패러디 작가들이 오히려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의 패러디는 소재 자체가 연예물이어서 그런지 법적 소송 압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오히려 온라인 서비스업계는 패러디를 오락산업의 아이템으로 만들어 이들을 오히려 포획하는 추세다. 아마추어 작가들은 대체로 정치성을 거세해 패러디가 주는 재미만을 특화하여 연성화해 누리꾼들의 입소문으로 이름을 얻으면 연예계에 작가로 데뷔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008년 패러디 제작 전문작가로 발탁된 ‘김여사’란 이는 ‘드라마 리폼’을 연재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또한 이재수라는 이는 원래 서태지의 노래 ‘컴백홈’을 패러디하며 이름을 알렸던 패러디 전문 가수인데, 최근 패러디 전문 영화감독으로 돌아서면서 나홍진 감독의 영화 <추격자>를 패러디한 ‘추경자’란 작품을 만들어 재미를 봤다.

 

정치 패러디의 전반적 흐름에서 보자면, 아마추어 작가군 생산의 맥이 이처럼 정치, 사회 이슈에서 연예 오락에 봉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소수 엘리트들에 전유되던 창작 활동들이 누리꾼들 누구나 참여하는 창작의 민주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인터넷 패러디의 발전이 생산 주체의 다변화에 큰 돌파구가 된 셈이다. 전통적 정치 예술이 그렇게 벗어나려했으나 실패했던 지점은, 예술의 자기함몰적, 엘리트주의적, 그리고 선동주의적 자세였다. 예술에서 엘리트주의는 일반 대중이 해독하기에 어렵고 이해 불가능한 수준의 작품들로부터 빚어진다. 아무리 정치 미학이 뛰어나더라도 대중의 동의나 이해력을 얻지 못하면 창작의 힘을 잃고 외면을 받을 수 있다. 비록 아마추어적이었고 이제는 시들해졌지만, 창작의 대중화란 점에서 누리꾼들로부터 패러디 작가군의 배출은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4) 패러디 정치 미학의 한계점들

앞서 세 가지 수준(대중적 파급력, 다매체 결합력, 창작의 대중 친화력)에서 정치 패러디의 가능성들을 살펴봤다. 이제부턴 누리꾼들이 지녔던 정치 패러디 미학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먼저 패러디란 표현 방식은 기본적으로 그 미학적 완성도란 측면에서 보면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다. 그 까닭은 창작 기법에 있어 원본 이미지의 차용이 반드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손쉬운 제작을 가져오지만, 그만큼 창작의 수준을 원본 이미지의 기억에 매달리게 만드는 단점을 지닌다.


원본의 기억에 크게 기대는 누리꾼들의 패러디 생산은 패스티쉬로 전락하거나 전유에 머무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패스티쉬의 퇴행성과 달리 지배 문화와 지배 담론의 언어를 바꾸어서 대중의 것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을 일컬어 ‘전유’라 지적했다. 그나마 전유는 소비문화를 통해 생산된 대중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재구성해 역으로 지배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한다. 뉴-/디지털 미디어 예술은 ‘전유’의 창작 방식을 북돋고, 아마추어 누리꾼들을 손쉽게 작가의 스타덤으로 이끈다. 이때 전유는 인용, 샘플링, 콜라주 등의 기법을 동원하며 그로 인해 브랜드 가치를 보호하는 저작권 체계나 초상권, 명예 훼손 등과 항상 적대 관계에 놓인다. 통칭해, 이는 ‘전유 예술’ (Harold, 2008)이라 불릴 정도다. 이제까지 살펴봤던, 영화 포스터 등 원본 이미지를 합성하고 그것의 아우라를 이용해 누리꾼들이 정치 풍자를 한다고 하면, 이는 어디까지나 원본의 기억에 기대서 작업한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이 전유보다는 패스티쉬에 가깝다. 전유의 강점은 원본이 패러디에 미치는 것보다 강한 현실에 표적을 맞춘 비평의 힘에 있다. 그러나, 전유의 방식 또한 패스티쉬만큼이나 자본주의의 브랜드 기호나 권력의 약호를 재배치하거나 변형하는 행위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자연히 전유의 이미지들 또한 수많은 스펙터클한 다른 기호들에 효과없이 파묻히거나 자본주의 광고 등에 역으로 활용되면서 많은 부분 포획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1) 소구 방식의 동일성

실제 패스티쉬적 모방이나 전유에서 멈춘 채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가질 않는 누리꾼들의 문화 행동은 아마추어 패러디의 미학적 맹점으로 작용한다. 인터넷 정치 패러디의 가장 큰 문제는 이용되는 소재가 다양한데 소구 방식이 동일하다는데 있다. 국내외 영화와 드라마 포스터 등 소구 방식의 동일성은 대개 관객과 독자를 지치고 무디게 만든다. 낯익은 포스터들로부터 반복되는 패러디의 지루함은 의도했건 아니건 정치적 학습을 방해할 수 있다. 패러디는 처음에는 배를 잡게 만들고 여러 생각을 주다가도 계속해 볼수록 흥미를 잃게 만드는 마취제와 같은 효과가 있다. 이것은 누리꾼들이 주로 패러디 수단으로 사용하는 극장 포스터와 드라마 홍보용 사진에 대부분의 수용자가 진력이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주로 깊이 없는 퍼포먼스와 미장센과 인물 변화에만 호기심을 갖고 즐거워한다. 수용자 대부분은 역사적 상황과 맥락에 대한 패러디스트의 비평적 표현보단 사진 속에 극적으로 표현되는 재미에만 관심을 둔다. 즉 초기의 충격 효과는 비슷한 사진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지루함을 유발하고 어떤 통찰의 기회도 주지 못한다. 모든 게 오락이고 쇼가 된다.

 

실지 패러디란 다름아닌 언어나 이미지 형식의 냉소적 비틀림을 통해 “일상의 장막을 걷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깨임과 열림을 만들어내는 것” (백욱인, 1999), 즉 사물의 본질에 이르는 성찰의 힘을 이끄는데 있다. 그러나, 전유 이상의 지점에 이르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현실 패러디는 갈수록 허망하다. 엄밀히 따지면, 누리꾼들은 패러디 원본의 형식에 매여 말하고자 하는 전달 내용이 무엇인지 아리송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리꾼들이 만들어내는 패러디물의 효과란 영화나 방송 포스터의 원본 이미지들에 대한 대중의 기억에 철저히 의지한다. 독자가 원본의 이미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그 효과 또한 반감한다. 또한 패러디를 한번 봤더라도 쉽게 기억으로부터 잊기 십상이다. 설사 원본 이미지에 대한 연상 작용을 하더라도 대중적 포스터들의 전유 방식은 깊이 있는 정치 분석을 가로막는다.

 

같은 이미지 또한 끊임없이 전혀 다른 소재, 맥락, 대상을 갖고 재활용되는 것도 문제다. 자연히 의미는 대단히 제한적이고 해석의 지평은 낮다. 결국은 소비 사회의 이미지들과 다름없이, 누리꾼들의 패러디 또한 지배적 스펙터클의 이미지들 속에 파묻힐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패러디가 순간의 ‘클릭’ 혹은 ‘포샵질’에 의거해 제작되고 유통되면서,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한 패러디물들이 이제는 차고 넘쳐 누구에게도 감흥을 주기 어려운 이미지 공해가 되가는 것이다. 정치 패러디의 상품 광고 도용도 흔한 일이 됐다. 패러디의 연예오락화 경향으로 말미암아, 정치 패러디가 지닌 상징성은 사라지고 그것 자체가 다른 콘텐츠들과 함께 하나의 서비스 장르화하는 경향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풀빵닷컴같은 온라인 기업이나 포털 서비스업체들의 경우에 누리꾼들의 모든 패러디 생산물들은 수익 모델을 지탱하는 콘텐츠 이윤원이 된다. 누리꾼들이 제작하는 패러디물의 가치가 그저 새로운 재미를 찾아 헤매는 인터넷 유저들의 심심풀이용 콘텐츠가 됨으로써, 패러디는 날이 무뎌지고 자본의 상업적 포획을 막기가 어려워진다.

 

(2) 이미지 차용의 패스티쉬화  

정치 패러디는 이제 유명 영화나 드라마 등의 한 장면을 따와 제품을 홍보하는 카드회사의 패러디 광고와 전혀 다르지않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림 4>에서 보이는 것처럼, 일반 누리꾼이 제작한 디시인사이드의 패러디물(글만 바꾸는 경우나 얼굴 이미지를 대체하는 단순 작업)에도, 현대카드 M에서 소비자들을 경품으로 유혹할 때도,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만두 파동과 관련해 비윤리적 기업을 비꼴 때조차 다들 한결같은 이미지가 쓰인다. 모두들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을 원본 이미지로 쓴다. 그림에서 보이는 3편의 사진들은 정치와 광고, 그리고 일상과 오락간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을 보여준다. 카드사 상품광고 패러디=CJ 만두파동 패러디=일반 누리꾼들의 스타일 패러디 내용이 동일한 원본을 인용함으로써, 더 이상 보는 이들에게 전달받는 메시지 내용은 중요해지지 않는다. 오직 수용자들에게 그저 배우 최민식의 들이민 수첩 장면이 머릿속 잔상에 떠오를 뿐이다. 영화의  인상적 장면만이 남으면서, 결국 개별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미지들의 과잉 연출로만 기록된다. 원래 만두파동으로 소비자의 공분을 샀던 한 기업의 비윤리성을 지적한 패러디 이미지가, 비슷한 류의 원본이미지를 차용한 패러디들의 과잉으로 비평의 정치적 차원과 미학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말 그대로 그것이 다 그것처럼 보이는 패스티쉬 이미지들의 잔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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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시인사이드 누리꾼의 패러디 // CJ 만두파동 패러디  // 현대카드 M의 패러디  

 

 <그림 4> 영화 <올드보이>의 패러디물들   

 

비슷한 예로 영화 포스터 <웰컴투 동막골>의 패러디물들을 들 수 있다. 이 원본 영화 포스터도 수많은 누리꾼들에 의해 패러디 오브제로 애용됐던 경우다. <그림 5>에서 보는 것처럼, 영화 포스터 내용은 누리꾼들에 의해 얼굴 이미지들이 바뀌면서 새로운 패러디들을 제작하는데 이용된다. 우선 ‘웰컴투 스미골’이란 패러디는, 원래 배역들을 영화 <반지의 제왕> 출연진으로 대체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패러디의 예이다. 원 영화의 등장인물 순박한 처자 ‘여일’(강혜정 분)이 졸지에 ‘스미골’(골룸)이 됐다. 재미있는 예는 진보 정당이 지방선거를 위해 홍보용으로 제작한 ‘웰컴투 진보정치’와 광우병 파동 기간에 만들어진 ‘웰컴투 미친소’란 두 편의 패러디물이다. 전자는 선거 홍보를 위해 정치 패러디를 만들었다. 반면 후자는 미국 부시대통령과 성조기를 이마에 붙힌 젖소를 원이미지에 대신해 넣음으로써, 정부 정책 불신에 기반한 반전 효과를 얻기위한 비판적 패러디로 작성됐음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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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패러디 // 이명박-부시 대통령 패러디 // 민주노동당 패러디

 

<그림 5>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패러디물들

 

이 둘의 사례는, 앞서 <그림 1>의 여야간 흠집내기용 정치 패러디의 부정적 쓰임새와는 사뭇 다르다. 앞서 <그림 1>에서는 여야가 패러디를 정쟁의 도구화함으로써 어떻게 정치 비판 기능적 의미가 희석화됐는가를 살펴봤다면, <그림 5>는 아예 동일한 원본 패러디에 기댐으로써 어떻게 패러디 과잉과 남발이 생기고 오히려 이것이 진보/보수 정치의 구호상의 구별을 무위화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웰컴 투 동막골>의 포스터에 맞춘 스미골=민주노동당의원=미친소의 등식은, 부정, 긍정, 그리고 코미디의 미학이 뒤엉켜 서로의 정치 미학적 효과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정치 패러디의 이용은 많다. 대표적으로 <옹박>이란 영화를 이용해서, 완전히 서로 다른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모습을 다뤘던 것도 패러디원본 이미지로 인한 폐해의 일종이다. <그림 6>에서 보면, 한 쪽은 한나라당 홈페이지에 실렸던 패러디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을 “박정희의 뒤를 잇는 강력한 대권 후보”로, 다른 한쪽은 “졸속행정과 무대뽀” 후보로 묘사한다. 이 또한 동일한 이미지를 전혀 맥락을 달리해 이용함으로써 누리꾼들에게 부정/긍정의 상호 혼동을 주고 사실상 제대로 패러디 효과를 못살리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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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영화 <옹박>의 패러디물
 

누리꾼들은 이렇듯 기존의 소비문화의 스펙터클 이미지들 (영화, 드라마, 제품 선전 등)에 기초해 손쉽게 패스티쉬적 패러디물을 만들어왔다. 그것들을 쉽게 가져오는 대신에, 그 편리함이 누리꾼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의 ‘새로움’을 표현하는데 발목을 잡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패러디물은 고작해야 원본 이미지의 홍보 역할만 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연예오락 문화산업에서 생산된 이미지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으로 인해 영화 포스터 등을 마구잡이로 이용하면서, 이미지 소비 주체들에겐 그것이 누리꾼들 자신을 위한 유희와 배설의 동기이건 국가 정책 비판이건 진보 정당의 홍보 패러디건 그닥 차이없는 이미지 과잉으로 느껴지게 된다. 결국, 혼성모방의 패러디 제작 방식이 아마추어 패러디꾼들의 한 차원 올라서는 정치 미학적 도약을 막고 있다고 봐야한다.
 

 

(3) ‘전용’의 미학적 결핍

아마추어 패러디의 패스티쉬와 전유에 기댄 정치 미학은 이렇듯 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치명적으로 패러디 작품의 비평적 생명력을 약화시킨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쓰면서도 그 원본의 기억을 멀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기법을 이미 우리는 ‘전용’의 미학 혹은 ‘인용으로서의 패러디’라 봤다. 패스티쉬, 전유, 전용간의 차이는 결국 미적 생산물의 미학적 완성도에 따른 구분이지만, 패러디물 개개의 심미적 영향력과 직결된다.


날조된 소비주의의 스펙터클 안에 갇힌 채 유희와 욕망의 명령을 따르는 인간에게 지향성을 갖고 맞서라한다면 이는 ‘전용’ 혹은 ‘선회’라 할 수 있다. 전유가 이미지의 차용에 의한 냉소에 머무른다면 전용 혹은 선회는 성찰성에 기반한 반대다. 이상향에 대한 비전이 있다면, 전용과 선회의 힘은 배가된다. 소비자본주의의 스펙터클 이미지를 도용하면서도 그 원본 이미지의 흔적을 온전히 떨어내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방식이 선회요 전용이다. 전유 행위가 아마추어 누리꾼들도 가능한 창작의 영역이라면, 선회나 전용은 예술로 표현하자면 숙련과 미학적 재능을 요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베를린 다다의 구성원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처럼, 각각의 차용된 이미지들이 지녔던 과거의 흔적이 완벽히 사라지고 콜라주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부분들로 자리매김하고 각각이 모여 새로운 의미로 형상화할 때 전용과 선회의 의미가 살아난다. 반면, 대개 누리꾼들의 패러디는 전용에 이르지못하고 패스티쉬에 젖거나 전유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결국, 대안의 추상적 지점을 고민할 때, 전용 혹은 선회를 통한 미학과 저항의 방법이 그 적절한 예이다.

 

다다이스트 하트필드의 <독일의 자연사: 변이 Deutsche Naturgeschichte: Metamorphose (1934)>와 80년대 민중미술 진영의 작가이자 사진 콜라주 작업을 계속해왔던 박불똥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1990)>란 작품을 보자. 이 둘은 기성의 사진 이미지들을 합쳐 놓았지만 그들 각각의 의미는 작품 속 전체에서 전혀 새로운 맥락과 미학적 의미를 생성한다. 즉, 두 사람의 포토몽타주에서는 애초 각각의 차용된 이미지들이 지녔던 과거의 흔적은 사라지고 콜라주를 통해 각각이 모여 새로운 의미로 형상화한다. 먼저 박불똥은 80년대 한국사회의 구성체 논쟁을 사진 콜라주로 표현했다. 사회과학의 개념인 토대와 상부구조를 연관없는 그림조각들 (돈다발을 에워싼 공권력으로써의 전투경찰, 미국기가 걸린 총포 등)로 이어붙여 형상화한다. 콜라주의 작품 속에 대한민국의 심층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박불똥은 프로답게 대한민국의 권력 매커니즘과 사회구조적 질곡을 잡아서 그 특징적 측면을 이미 존재하는 사진들을 오려붙여 새로운 의미로 생성한다. 콜라주로 도입된 각각의 이미지 파편들의 기억들이 죽은 자리에 작품 속 전체의 생명이 전용의 힘으로 되살아난다. 이들의 작품은 수직적 패러디를 넘어서는 인용의 패러디요 전용의 미학인 셈이다.

 

한편, <변이>에서 하트필드는 독재자 히틀러의 출현과 파시즘의 계보를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하는 생물학적 변이 과정에 빗대어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면,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유충 에베르트가 죽음의 우두머리 나방인 히틀러로 부화한다. 에베르트 아래 자행됐던 스파르타쿠스단 학살과 피비린내나는 전쟁에서 하트필드는 나치즘의 징후를 읽고, 그 변이 과정의 최종적 완성이 히틀러 출현 (히틀러 나방으로 형상화)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대 사회 현실의 권력 구조와 파시즘의 기원을 밝히는데, 그의 포토몽타주는 여러 말보다 더 강한 여운과 깊이를 남긴다. 이 또한 전용의 효과다.  

 

전용이란 이처럼 어떤 대상을 최초 용도나 경로로부터 이탈시키는 과정이다. 이제까지 본 것처럼, 아마추어 정치 패러디는 미학적으로 전용에 이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아마추어가 어찌 직업적 작가들의 창작 수준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도 있을 수 있겠다. 이 점에서 왜 오히려 2004년을 분기점으로 정치 패러디의 힘이 심하게 꺾였는지를 곰씹어봐야 한다. 어느 누가 이미지 변형을 시도하던지 간에 결국 원본 이미지의 잔상만 떠올리게 만드는 패러디 방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외로써 소개됐던 몇몇 사례들, 서울시 버스 노선 패러디, ‘명박산성’ 패러디 시구절, 에미넴의 샘플링 패러디, ‘앰비콕’ 패러디 이미지들은 박불똥이나 하트필드가 가졌던 전용의 미학에 비해 절대 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들도 바로 당대 사회 이면의 맥락을 드러내는 해학과 풍자의 힘으로 전용의 미학을 표현했다. 결국, 누리꾼들이 레디메이드(기성) 이미지들을 통째로 쓰는 방식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정치 패러디의 긍정적 효과를 지켜내기가 어렵다고 봐야 한다. 누리꾼들의 패러디가 기성 정치인들의 홍보 수단화나 상업적 포털의 콘텐츠화로 전락하는 현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6. 맺음말        

이 글은 프로 세계의 직업적 예술 미학이란 잣대를 가지고 무작정 누리꾼들이 생산하는 아마추어 패러디 작품들을 섣불리 재단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글의 서두에서 지적한 바처럼, 이 글은 한국 사회에서 누리꾼들의 정치 패러디가 지닌 기술적, 매체적, 대중적 가능성과 한계를 최근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2004년을 정점으로 이후 정치 패러디가 왜 그 미학적이고 질적인 완성도 면에서 지속적인 문제들을 노정했는지를 살펴봤다. 특히, 패러디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정치인들의 홍보물로 삼거나, 상대 비방의 정쟁 도구화하거나, 패러디 긍정과 부정의 미학이 하나의 이미지에 동시에 모순적으로 동원되거나, 패러디 자체를 사업 수단으로 삼아 연예오락화화거나 할 때 문제점들이 발생함을 보았다. 즉 패러디가 오용되면서 작품의 생명력이 사그러들고 패스티쉬화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았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점점 위축되어가는 아마추어 패러디를 살리는 방법으로 하트필드와 박불똥의 포토몽타주의 예를 들었다. 이 속에서 패러디 미학의 세 가지 구분 중 ‘전용’의 정치 미학을 누리꾼들이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학적 완성도의 수준은, 작품에 인용된 원본 오브제나 사진들의 맥락을 완전히 탈각시키고 이를 패러디할 대상에 맞춰 정치적으로 미학화하는데 달려있다고 봤다. 가져다 쓴 원본의 기억을 지울 때만이 완성된 콜라주 속에서 현실의 질곡을 드러내고 뒤트는 힘이 배가된다고 봤다. 지금과 같이 기존의 기성 이미지들의 기억들을 통째로 가져다 쓰는 방식은 전거의 예를 차리는 오마주의 미학은 고사하고 외려 수많은 공해의 패러디물만을 양산하기 십상이다. 결국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한 패러디라도 전용의 정치 미학을 담으려 노력한다면 지금의 침체된 정치 패러디의 문화를 크게 살릴 수 있다. 그 아이디어는 물론 전용의 미학으로부터 얻어야 한다.

 

사실상 패러디는 전유가 됐건 전용이 됐건 기존의 이미지를 ‘훔쳐야’ 한다. 2004년을 정점으로 괜찮은 정치 패러디들이 점점 줄고있는 이유 중 하나에는 누리꾼들이 자유롭게 콜라주를 위해 써야할 소재 접근권에 점점 큰 위협을 받고 있는데 있다. 누리꾼들의 패러디 생산 작업을 위협하는 것은 정치적 표현의 억압도 있지만, 점점 더 현실적인 억압은 저작권 위반과 초상권 침해 소송에서 시작한다. 하트필드와 다다의 포토몽타주는 적어도 저작권이나 초상권으로 나치 법정에 서는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현대에는 정치 패러디들이 종종 저작권 보호 대상의 저작물들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절도 예술’ (Lütticken, 2002)의 길을 걷는다. 누리꾼들은 저작권과 초상권 등에 의해 보호받는 이미지, 음원, 영상 등을 이용함으로써 그들이 행하는 창작으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는다. 즉 풍자와 패러디 생산의 출처와 자원들이 권력이나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보호받는 영역에 놓여 있다. 2004년 당시에도 몇몇 아마추어 작가들이 저작권으로 고생했지만, 오늘날 패러디는 점점 더 저작권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면 예술품도 정치 패러디도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과 같은 디지털 리믹스(remix) 시대에 행해지는 다양한 콜라주, 샘플링, 인용 등을 이용한 아마추어 창작자들의 정치적 패러디물은, 처음부터 창작의 자유를 막는 저작권과 소비자본의 횡포에 대항하고 통치 권력에 대한 정치적 조롱을 함께 전하는 스타일의 문화정치 행위라 볼 수 있다. 저작권, 명예훼손, 선거법 위반 등 정치 패러디의 위협 요건에 대한 개선이 없는 한 프로건 아마추어건 미래 패러디 창작의 자유는 요원하다.

 

 

참고문헌

강명구 (1987) 「권두논문: 영상이미지의 사회적 소통과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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