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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와 지방선거 - 실천문학 (2010 여름)

트위터와 지방선거 - 실천문학 (2010 여름)

이광석 (@txmole)

작은 아이콘들이 네트를 통해 쉼없이 재잘거리며 말들을 뱉어낸다. 이를 영어말로 ‘트윗’이라 한다. 트윗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물이 ‘트위터’란 서비스다. 말 그대로 재잘거리는 트윗들에게 소통의 자리를 깔아주는 매개자이다. 이 작은 웅성거림이 이제 한 국가에선 혁명을 돕고, 정치 비리를 들쳐내고, 재난 소식을 공유하거나 완화하고, 지구촌 한쪽의 가난을 함께 나서서 해결하고, 누군가의 아픔을 공유하고, 낙후한 선거 정치에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울림으로 전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승 모드에 힘입어 최근 트위터 개발자는 마치 스스로 표현 자유의 투사인 듯 의기양양해서 중국 공산당의 권위주의에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이와 달리 대한민국에서는 트윗조차 권력이 허하는 ‘관용’(tolerance)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정치적 도발 행위로 간주된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리 대한민국 선관위가 불법 선거운동의 일환이라 하여 트위터를 틀어쥐려 한다. 소수의 재잘거림마저 막으면서까지 전세계 유일무이한 트위터 탄압국이 되려는 그 속내를 살펴보자.
 
이바구 억압의 새로운 배출구


한국은 이제까지 특유의 인터넷 문화를 만들어냈다. 누리꾼들은 벙개 모임, 게임방, 블로그, 싸이질, 댓글, 펌, 아햏햏, 포샵질, 유씨씨, 온라인 카페와 클럽 등 새로운 신조어들을 만들고 이를 통해 새로운 소통과 만남의 자유로운 출구들을 만들어냈다. 표현 수단들 각각의 효용값은 다 달랐지만, 이들 각각의 소통로와 문화들은 누리꾼들의 서로 다른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장이 돼 왔다.


불운하게도 현실 정치의 문제는 곧 온라인 공간의 억압으로 연결되어졌다. 인터넷이 점점 단속과 불통의 감옥이 되가고 있다.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주민등록번호가 실명 인증을 위해 쓰이고,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린다. 기술의 디자인이란 한번 만들어지면 고정되고 고착되는 습성이 있다. 이를 이용하는 유저들 또한 그 기술에 익숙해지면 쉽게 그것은 문화가 된다. 실명제 없이도 잘 굴러가던 인터넷에 본인확인의 인증을 위한 절차가 끼어들면, 처음에 유저들이 어색하고 불편해 하다가도 곧 쉽게 적응 단계에 들어간다. 그것이 인터넷 문화의 질곡이다. 

 

98년 봄에 미네르바가 무혐의로 나온 후에도, 여기저기 인터넷 사찰과 감청의 부활로 대한민국 현실이 정신없이 어지럽다. 국정감사 현장에서 속속 들어나고 있는 정보기관들의 ‘패킷 감청’과 함께, 일선 경찰에선 인터넷 사이트의 댓글들과 첨부 파일을 일일이 감시하는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한다. 패킷 감청 앞에서는, 유행처럼 불었던 국내 정보서비스업체에 못미더웠던 이용자들이 해외 서버로 자신의 계정을 옮기는 ‘사이버 망명’이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이용자의 메일 서버가 해외에 있더라도 누군가 가는 길목에 진을 치고 속속 열람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제 트윗은 인터넷 구속과 억압의 신권위주의 정치 상황에 상처입고 답답한 누리꾼들의 이바구에 새 생명을 주고 재잘거리는 숨결을 불어넣는다. 바야흐로 새로운 소통의 배출구 노릇을 시작한다. 이미 실명 공개로 불구화된 댓글 문화에다가 인터넷 주소(IP) 추적으로 험악해진 게시판 환경에 누리꾼들은 말과 논쟁의 생동감을 잃던 차였다. 자신과 생각이 비슷하거나 뜻이 맞는 이들에게 140자로 요약된 말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신나는 일이다. 표현에 억압받던 누리꾼들의 이바구들에 다시 생명의 불꽃이 피어난다. 허나 트윗도 권력의 드잡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선거 국면에 접어들면서 공권력은 정치적 이슈로 재잘거리던 입들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트윗의 기술


일단 트윗팅의 논리를 잠깐 살펴보자. 누군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려면 트위터를 통해 입단 신고를 하고 자신만의 아이콘을 생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본인 확인 인증 절차는 필요 없다.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면 프로필에 적으면 그만이요 싫으면 숨기면 된다. 프로필과 아이콘 이미지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돕기도 혹은 숨기기도 한다. 요 단계까지는 아직 트위터 안의 홀로된 섬과 같다. 이제 누군가와 재잘거리기 위해선 먼저 원하는 상대의 재잘거림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팔로잉’이다. 이를 위해 그리 큰 노동은 없다. 그저 클릭으로 의사를 표시하면 된다. 팔로잉을 통해서 관계를 맺고 말을 트고 재잘거리다보면 자신 또한 수많은 ‘팔로워’가 생겨남을 인지할 수 있다.

 

  팔로잉과 팔로워의 숫자와 함께 얽힌 이들의 성향을 보고, 한 명의 ‘트윗터리언’이 관계 맺고 있는 다른 이들의 면면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맞팔’이란 상대가 팔로잉하면 자신도 응대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에 연연하는 이들은 보통 트윗을 자신의 선전이나 홍보 수단으로 삼는 부류가 많다. 이들은 팔로워를 늘리는데 주력한다. 그 반대엔 작가 공지영이나 김연아와 같이 팔로잉이 아예 없거나 적은 이들도 있다. 팔로잉 없이 트윗을 ‘날리니’ 주로 개인 독백이요 방백이 되고, 이를 지켜보며 즐기는 팬들에게 적합하다. 하루이틀만에 수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리는 유명 연예인들이나 잘 알려진 아이돌 스타들도 이 경우다. 이들 스타 중 일부는 적극적으로 팬서비스를 위해 팔로워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언팔’은 팔로잉을 끊는 행위인데, 주로 성향이 다르거나 트윗 공해를 일으키는 이들을 피할 때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리트윗’ 혹은 알티(RT)는 다른 트윗터리언이 올린 글을 다시 올리는 것을 뜻한다. 고재열 기자의 ‘독설’(@dogsul)과 같이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있는 경우, 어떤 이름없는 재잘거림도 독설이 한번 더 리트윗으로 튕겨주면 예상치 못한 파장을 불러오기도 한다. 즉 일종의 도움받기가 가능해지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기회도 획득한다. ‘트친소’(트윗 친구를 소개합니다)가 현실의 인적 관계가 확장되는 측면이 강하다면, 리트윗은 개인의 재잘거림에 주목하여 새로운 트윗터리언을 만나는 방식이라 훨씬 더 우연의 요소들이 많다.

 

   팔로잉한 트윗 글들은 각자의 ‘타임라인’을 통해 시간순으로 배열된다. 다시 말해, 트윗을 맺은 사람들이 내게 재잘거리는 말들의 기록은 각자가 선호하는 바에 따라 서로 다른 ‘타임라인’의 연대기를 만들어낸다. 누구든 트윗의 140자라는 제한된 글자수를 통해 자신만의 재잘거림을 내면서 타임라인에 편승할 수 있다. 몇 줄 안팎의 간결한 단문으로 제한되지만, 중국어나 한국어는 영문 조합에 비해 한번에 보다 많은 의미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이점또한 지닌다.

자유로운 재잘거림을 위협하는 선거법 


자, 속성으로 트윗의 기술을 이제 막 익혀 한번 놀아보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요새 정치판 돌아가는 꼴에 한마디 할까 했더니 선거법 위반이란다. 정치인에 대한 얘기도 금지란다. 선거 때 소통의 자유를 위해 ‘돈은 묶고 말은 풀라’했는데, 자유로운 재잘거림에 이렇듯 족쇄를 채운다. 대한민국 선관위는 트위터를 통한 특정 정치후보에 대한 지지나 비방을 금하겠다 한다. 게다가 선관위 명의(@nec3939)로 허수아비 트윗까지 운영하며 누리꾼들의 재잘거림에 선거 감시의 촉수를 곤두세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할 선거철이면, 선관위는 블로그, 채팅, 게시판, 유씨씨 제작 등 누리꾼들의 정치적 표현에 불법의 철퇴를 내려치기 일쑤다.

 

한국에서 트윗을 하는 인구는 이제사 걸음마를 떼어 얼추 10만명을 넘긴 정도라 한다. 그도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해 외곽으로 나가면 트윗을 통한 투표 독려와 같은 행동들은 아직은 사치일 수 있다. 그래서, 트윗족은 선도적 신기술 이용 집단으로 통하는 ‘얼리어댑터’들에 해당한다. 실제 이들은 연예, 스포츠, 예술, 정치, 학술, 정보통신 기술, 블로그 등 현실 영역에서 의견을 주도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보면 야당이나 여러 시민단체들에 근친성을 갖거나 비슷한 성향의 트윗터리언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초기 기술 수용자의 정치적 성향이 대체로 상식의 현실 감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트윗 문화는 아직은 건강하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누리꾼들의 재잘거림을 막는 행위는 다름아닌 집권 유력 정당이나 스타급 정치인들 보다는 힘없는 약소 군소 정당의 정치인들이나 주체적 시민들의 말길을 봉쇄하는 효과를 지닌다. 즉, 트윗을 불허한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나름 깨어있는 여론 선도형 집단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엄포에 해당한다.

 

트윗의 재잘거림이란, 확성기로 내는 소리가 아닌 말에서 말로 퍼지는 리트윗과 팔로잉으로 엮어진 자생적인 울림이다. 140자의 형식적 제약 속에 정치적 심각함을 나르고 논쟁을 촉발하긴 어렵다. 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즉흥적 속풀이와 단상들에 대한 공감에 그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자들에 의해 던져지는 다양한 화두와 함께, 하이퍼링크와 이미지, 동영상 등이 자유롭게 단문의 글들 바깥으로 연결되면서 형식적 제약을 거의 무위화하고 있다. 즉 트위터는 정치적 선동이나 광고로서의 면모보다는 다른 어떤 수단보다 간결하고 조용히 움직이나 유연하고 바깥으로 트임이 끝없이 이어져있는 지저귐의 경로를 지닌다.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 규정에 의한 트위터에 대한 처벌 조항은 그래서 대단히 임의적이다. 예를 들어, 선관위는 선거운동 기간 전에 각자의 타임라인을 이용해 특정 정치 후보자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리트윗 행위 자체를 금한다. 트윗을 광고성 집단 이메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포되는 광고 메일과 달리 트윗의 타임라인은 강제적 소구력이 없는 상호 재잘거림의 목록이란 점에서 다르다. 또한 이메일의 개인 정착지적 속성과 달리 트윗들의 흘러간 타임라인은 거슬러 공들여 읽지 않으면 찾기조차 힘들다.

트윗으로 재잘거리며 넘볼 것들


트위터 또한 여타 ‘소셜 미디어’라 통칭하는 부류의 기술이요 수단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세계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아래로부터 선출한 우리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를 되새겨보면, 이제 새로운 기술에 열광하는 일에 신중할 필요가 있음도 느낀다. 그런데도, 필자는 트윗으로부터 다시 한번 일상 혹은 생활 정치에 미치는 긍정의 가능성을 본다. 수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리며 트윗을 날리는 소수 정당의 정치인들을 보라. 4만여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노회찬(@hcroh) 국회의원이 한번 트윗을 띄우면, 적어도 수만명의 팔로워들이 이를 받아 수백건의 리트윗을 올리며 반응한다. 리트윗을 통해 내는 재잘거림의 반향들은, 또 다른 관계망을 타고 거의 대부분의 국내 트윗터리언들에게 전달된다. 선관위 입장에서는 탐탁치 않을 것이요 불법 사전 선거 운동이란 구실로 옭아맬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트윗의 공간에서 이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요, 외려 소수 정당의 정치인이 구사할 수 있는 여럿 중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받아들일 일이다. 이조차 선거법으로 불허하면 소수 정당의 소통 능력을 불구화하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늘진 현실의 질곡과 권력의 힘이 트윗 공간에 자리를 틀 것이 자명하다. 선관위의 트윗에 뻗힌 촉수는 그 중 일부이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더라도 트윗의 재잘거림들이 크게 수그러들긴 어려워 보인다. 수많은 트윗터리언들이 모여, 트윗을 통해 이어받기 소설을 쓰고, 트윗을 통해 모임을 만들고, 선거자금 캠페인을 벌이고, 혹자들은 정치 논쟁을 벌이고, 트윗 단문을 모아 책을 쓰는 세상이 오고 있다. 더군다나 우린 2003년의 대선 정국, 2004년의 총선,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정국, 2008년의 촛불정국 등 중요한 고비마다 누리꾼들이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벌이는 문화 행동과 자율적인 말의 게릴라전에서 새로운 표현 매체의 가능성을 십분 활용했던 경험이 있다. 이 점에서 트위터는 누리꾼들의 풍부한 미디어 경험의 축적이란 연속성 위에 놓여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서, 아니 이를 계기로 그동안 쌓였던 허망함과 분노를 풀 유권자들의 일상의 정치적 의사표현 수단으로 요만큼 실한 물건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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