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상, 인지자본주의의 노동가치론 해석에 대한 비판을 재확인한다

인지자본주의의 노동가치론 해석에 대한 비판을 재확인한다 -조정환의 반론에 대한 재비판

 

전희상

 

-조정환은 물질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노동가치론의 적용범위를 협소화하였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하에서 육체노동을 수행하는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노동가치의 생산을 (경향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분업형태에 종속시켰다. 사회적인 것을 개체들 사이, 그리고 개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섭동 혹은 공통되기의 결과로 이론화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을 초역사적 공통되기에 부과되는 역사적 제약에 대한 비판으로, 즉 도덕적·외부적 비판으로 환원시켰다.

 

1. 물질노동, 비물질노동과 노동가치의 생산

 

-비물질노동은 그것이 새로운 환경에서 어떠한 새로운 종류의 가치를 생산하느냐의 문제와 관계없이, 노동가치에 대해서는 언제나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의 이론적 관심이 무엇이냐와는 무관하게 조정환은 비물질노동이 그 소재적·본성적 특질로 인해 원리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노동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원리와 역사와 본성의 매개를 거쳐 물질노동만이 노동가치를 생산한다는 스미스로 귀결하고 만다.

-조정환은 당시 마르크스가 비물질노동에 대한 자본-노동관계의 침투 정도가 낮아 원리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고려하여 비물질노동을 비생산적 노동으로 간주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자본에 고용되어 수행되는 비물질노동은 노동가치를 생산하지만, 당시에는 (특히 노동행위와 생산물이 분리될 수 없는) 비물질노동에 대한 자본-노동관계의 침투의 규모와 범위가 미미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높은 추상 수준에서의 자본주의의 분석에 있어서는 이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미용노동, 의료노동, 가사노동, 돌봄노동 등의 자본-노동관계로의 편입 정도가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임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주장은 전혀 놀랍지 않다. 하지만 원리의 역사적 현실화 정도가 낮다고 하여 원리의 잠재적 현실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정환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언급을 인용함에 있어 잘못된 한국어 번역을 사용한다. 비물질노동에 대하여 이것이 “‘임금노동하에서만, 생산적 노동이 아닌 임금노동하에서만 다뤄질 수 있다라는 마르크스의 언급을 인용하는데, 이의 올바른 한국어 번역은 임금노동, 이것은 반드시 생산적 노동인 것은 아니다일 것이다. 임금노동은 생산적노동, 비생산적 노동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기 때문에, 임금노동은 생산적 노동일 수도 비생산적 노동일 수도 있다. 비물질노동에 대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지며 사태의 본질상 몇몇 영역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라는 마르크스의 언급을 인용하지만 올바른 번역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지며 보통 몇몇 영역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일 것이다.

 

2. 정신노동(인지노동), 육체노동과 노동가치론의 경제적 해석

 

-산업노동의 전제조건인 구상과 실행, 영혼의 운동과 신체의 운동, 인지노동과 산업노동 사이의 완전한 분리가 가능한지. 상품생산의 기계화가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는 역사적 경향으로 이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로 인해 노동과정에서 노동자가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는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조정환이 적극적으로 원용하는 체화된 인지론에서 인간의 인지행위를 신체의 이용과의 밀접한 연관관계 속에서 이론화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산업노동만이 노동가치를 생산한다는 주장, 그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구상과 실행 사이의 분리가 노동가치생산의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은 그 근거가 불충분하거나 그의 여타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는 노동가치생산의 전제조건이 아니며 도리어 노동가치 생산의 결과로 이론화해야 한다.

-노동가치론은 무엇보다 본질로서의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이를 은폐하는 상품경제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본질적 사회관계가 아니라 일상의 상품 간 교환관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착취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경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교환을 통해 사회적 관계가 형성된다는 전도된 의식을 갖게 된다. 경제적 관계의 원천으로서의 사회적 관계를 사상한 경제이론은 이와 같은 전도된 의식, 즉 상품물신주의의 한 결과이다. 한편 경제적 관계의 분석에 근거하지 않은 사회이론 혹은 정치이론도 잘못된 것은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

의 근본적인 사회관계는 경제적 관계를 필연적인 매개로 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으로, 경제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노동가치론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매우 불안정한, 스스로를 파괴하는 생산양식이라는 주장을 포함한다. 노동가치론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일반균형이론과 같은 균형이론이 아니다. 노동가치론의 옹호가 곧 혁명에 대한 옹호다.

-조정환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범주이고 가장 추상적인 범주인 가치가 논리적·분석적으로 분업형태에 우선한다는 필자의 주장을 가치 혹은 가치에 대한 노동이론이 특수한 분업형태보다 시간적·존재적·역사적으로 우선한다는 주장으로 잘못 해석한다.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해 나가는 마르크스의 서술은 시간적·존재적·역사적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그는 복잡다단한 구체로서의 총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적인 본질을 파악하고(연구), 이 본질로부터 분석의 추상수준을 높여가며 총체로서의 구성을 재구성해 나간다(서술). 이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새로운 개념들이 도입되며, 경향적 법칙들이 도출되고, 구체적인 역사적 경향의 분석을 위해 역사적 재료들이 분석에 추가된다. 생산의 기계화, 구상과 실행의 분리 등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경향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론적으로 해명되는 것이다.

-가치범주의 역사성이라는 올바른 전제로부터 가치범주가 역사적으로 특수한 분업형태의 산물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3. 삶정치적노동, 공통되기와 사회적인 것의 이론화

 

-조정환에게 있어 개체는 초역사적인 사회성인 공통되기의 노력을 통해 공통적으로 조정된 세계를 만들어나갈 능력을 갖고 있으며, 사회적인 것이 개체들의 공통되기의 결과로 간주된다. 사회적 세계의 구성을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타자와 더불어 공통적으로 조정된 세계를 만들어나갈 능력이 있는 생명적 개체의 미시적

이고 존재론적인 운동”)의 결과로 보는 관점, 그리고 이렇게 초역사적인 생명의 미시적 운동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세계에 대하여 사회형태에 특수한 역사적 제약이 부과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초역사적인 개인적 속성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도출하려는 시도이다. 노동과정 그 자체 혹은 노동과정 일반을 고찰한다는 것과 이것이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을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한 후에 자본주의에서는 노동과정이 동시에 가치증식과정이라고 언급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과정은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노동과정 그 자체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가치증식과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규정이 배제된 노동과정 일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생산일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르크스의 지적과 같은 맥락에서 그렇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근본적으로 내재적 비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과 그 자기파괴성을 자본주의 외부의 기준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현실적 운동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통해 보인다.

-공통되기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활동의 차이. 마르크스는 유적 존재에 대한 논의에서 동물로부터 구분되는 인간의 유적 본질을 논할 뿐 공통되기에서와 같이 사회를 산출하는 생명의 존재론을 다루지 않는다. 유적존재의 활동은 자연과의 신진대사의 과정을 포함하지만 이것은 사회적 세계의 원천으로서의 공통되기보다는 오히려 마르크스의 (사회형태와 무관한) 노동과정에 대한 분석과 유사하다. 노동과정과 마찬가지로 유적 존재를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고찰할 수 있지만, 이것이 유적 존재가 공통되기가 그런 것처럼 사회형태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서의 인간의 노동을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유적 존재로서의 활동, 즉 의식적으로 대상세계를 가공하는 활동으로 고찰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를 이 특수한 사회형태에서의 유적 존재로서의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인간이 특수한 작업에만 종사하게 되고, 비숙련화되며, 그 결과물을 소유하지도 못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을 대입하면 그것은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이다. 시대와 무관하게 유적 존재로 실재하는 인간이 자본주의에서 그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유적 존재가 아이러니하게도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인 것이다.

 

4. 결론을 대신하여: 인지자본주의의 체계화에 대한 몇 가지 논점

 

인간의 노동, 자연, 기계 사이의 상호섭동을 강조하는 공통되기의 관점은 노동, 자본, 자연 등을 동등한 생산요소로 간주하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신고전파 경제학에서는 생산요소들 사이의 질적 차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한계생산이 체감하는 개별 생산요소들은 균형상태에서 생산의 기여분(, 한계생산물)만큼의 수입을 올리는데, 지대, 이윤, 임금은 이러한 동일한 원리로 발생하는 수입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 벤 파인(Ben Fine)은 이렇게 경제이론에서 지대의 특수성이 사라지고 그것이 마치 이윤인 것처럼 다루어지는 경향을 지대의 안락사(euthanasia of rent)’라고 지칭한다. 요소들 사이의 차이점보다는 요소들 간의 공통되기를 강조하는 인지자본주의 이론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주장(이윤의 지대화, 즉 이윤의 안락사)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물론 수입이 생산의 기여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독점에 의해 전유된다는 측면이 강조된다. 하지만 공통되기에 있어 공통되기에 참여하는 요소들 사이의 질적 차이점이 모호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고전파 경제학의 생산이론과 공통되기가 갖는 유사성은 쉽게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공통되기의 요소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들 사이의 질적 차이점에 대한 심도 있는 이론화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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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1 18:28 2014/01/2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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