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들

운동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접할 때 그 대안을 내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있다. 아마도 자신이 하고 있는 운동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명확하게 개념화되어 있지 않더라도 어떤 상태로든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엔 분명 한 쪽을 지지했을 때 다른 쪽을 지지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입장을 당분간 유보할 수는 있어도 양쪽 모두를 지지할 수는 없다. 
물론 예전에 비해 유보적인 경우가 훨씬 많아졌지만, 다양한 공산주의론, 반자본주의론,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등에 대해 접할 때에도 나에겐 어떤 기준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론이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하더라도 그 대안이 모종의 '합리적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난 그 '대안'을 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대안 제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에 대해 고민하면서 기존의 내 생각과 어떻게 부딪히고 맞물리는지를 생각하겠지만. 마찬가지로 국가의 존재는 불가피한 것이라는 주장 등은 내가 지지할 수 없는 것들이다. 결국 운동, 이행, 체제라는 틀에서 유보하지 않는 전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책에서 이미 누구를 다 비판했는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는 태도로 논쟁하는 경우를 보는데, 그 논쟁의 역사가 그렇게 단선적이라면 다들 골치도 좀 덜 아프고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럼 철학사, 사상사, 운동사가 여러번 쓰일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이건 학습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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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9 10:39 2014/01/1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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