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

 

1. 전쟁이 불러일으킨 환멸

 

개인 간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서 문명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행동규범을 따라야했다. 이는 국가 존립의 태도로 간주되었다. 국가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규범을 지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생각을 전면 부정하는 현실이었다.

과거 전쟁은 세력 간의 힘의 우위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한정되었다. 따라서 그 이상의 행위는 필요치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전쟁 중에도 의료진에 대한 면책특권,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배려 등이 확립되어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전쟁 이후에도 국제적인 유대관계의 질서는 유지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달랐다.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분하지 않은 유혈이 있었고, 전쟁이후 유대관계의 회복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 전쟁은 적대감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서로를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어났다. ‘국가가 개인의 범죄를 금지한 것은 범죄를 근절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소금이나 담배를 독점하듯 범죄를 독점하고자 해서라는 생각이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전쟁에서 국가는 국민들에게 최대의 복종과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지나친 비밀주의와 엄격한 검열로 국민을 어린애처럼 취급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집단들을 묶어놓는 도덕적 관계가 느슨해지는 것은 개인의 도덕에 영향을 미친다. 양심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불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두 가지 환멸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중 하나는 대내적으로는 도덕규범의 수호자인 척하는 국가가 대외적으로는 저급한 도덕성을 보여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들이 최고 수준에 이른 인간문명의 참여자로서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잔인성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후자부터 살펴보자면, 정신분석학은 인간성의 가장 깊은 본질이 원초적 성격을 가진 본능적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충동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충동이 인간 공동체의 욕구 및 요구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선과 악으로 분류된다. 이 충동들은 억제되고 뒤섞인다. 이렇게 반동형성을 통해 충동의 내용이 변화되는 기만적인 형태를 취한다.(양가감정) 이런 본능의 변천이 모두 끝난 후에 성격이 형성된다. 따라서 사람의 성격을 선/악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악한 본능을 변화시키는 것은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내적요인과 외적요인이다. 내적요인은 에로티시즘이 악한 본능에 행사하는 영향력이다. 에로틱한 요소가 혼입되면 이기적 본능은 사회적 본능으로 바뀐다. 외적요인은 가정교육이 행사하는 압박이다. 가정교육은 문화적 환경의 요구를 나타내며 성장한 뒤에는 그 환경의 직접적인 압력이 계속해서 외적 요인을 이룬다. 문명은 본능만족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것이고, 문명 세계에 새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것을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이렇게 개인이 평생 살아가는 동안 외적강박은 끊임없이 내적강박으로 대치된다.

이렇게 에로티시즘의 영향으로 이기적 충동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문화에 다한 감수성이라고 부른다면, 이 감수성은 선천적인 부분과 후천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사회는 문명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규제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동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각 개인 또한 마음 속의 이기적 성향이 이타적 성향으로 바뀌지 않더라도 문화적 의미에서 선하게 행동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이런 성과에 고무되어 문명은 도덕기준을 최대한 엄하게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구성원들은 자신의 본능적 기질에서 더한층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본능을 억제하기 가장 어려운 의 영역에서 신경병이라는 반동 형성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세상에는 진정한 문명인보다는 문화적 위선자가 훨씬 많다.

다시 전쟁에 대한 환멸을 돌아본다면, 이 환멸은 환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애초에 타락을 전쟁이 보여주는 타락을 우려할 만큼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있다. 문화에 대한 감수성은 본능의 변화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이 변화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여러 가지 충격 때문에 영구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취소될 수도 있다. 정신발달은 과거의 모든 발달단계가 사라지지 않고 거기에서 생겨난 후기의 단계와 함께 살아남기 때문이다. 전쟁의 영향은 분명 그런 퇴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이다. 현재 비문명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문명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사람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으며, 좀 더 평화로운 시기에는 그들의 본능이 다시 고결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놀라운 일은 최고의 지성들이 불확실한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믿는 증세다. 그러나 필요한 통찰이 감정적 저항에 부딪히면 가장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현명한 사람이 갑자기 천치처럼 멍청하게 행동하지만, 그 저항을 극복하면 지적능력을 완전히 되찾는 사례는 거의 날마다 볼 수 있다. 이는 감정적 흥분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

민족은 개인의 발달과정을 재현하고 있는데, 더 발달한 통일체를 조직하고 형성하는 과정에서 아직까지는 지극히 원시적인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민족들은 아직도 이익보다는 열정에 더 복종하는 것 같다.

인간집단인 민족이 평화시에도 서로를 경멸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는지는 확실한 수수께끼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간정을 품게 되면 개인이 그동안 이룩한 도덕적 획득물은 모조리 소멸되고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조잡한 정신적 태도만 남을 것 같다. 이를 조금이나마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발달의 후기단계일 뿐이다.

 

2. 죽음에 대한 태도 변화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죽음을 필연적인 것에서 우연적인 사건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드러낸다. 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는 우리의 삶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생존이라는 도박에서 가장 큰 밑천은 생명 자체다. 이 생명이 내기에 걸려있지 않으면 삶은 빈곤하고 무기력해진다.

현실의 삶에서 잃어버린 것을 허구세계에서 찾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다. 허구세계에서 벌어지는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 뒤에서 현실의 삶은 여전히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은 죽음에 대한 이런 관습적 태도를 일소해버린다. 죽음은 더 이상 부인되지 않는다. 여기서 죽음과 인간에 대한 두가지 관계(선사시대의 원시인이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관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지만 정신의 심층에 숨어 있어서 의식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원시인은 한편으로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것을 삶의 종말로 인정하고, 그런 의미망 안에서 죽음을 이용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부인하고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격하시켰다. 이 모순은 원시인이 타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타도를 취한 사실에서 생겨났다. 원시인의 역사는 살인의 연속이었고 타인의 죽음은 싫어하는 자의 소멸을 뜻했다. 선사시대 이후 인류는 막연한 죄책감을 가지게되었고 일부 종교는 그 죄책감을 원죄의 교리로 농축시켰는데, 이 죄책감은 아마 원시인이 저지른 살인죄의 결과일 것이다. 인류 최초의 범죄는 아버지 살해, 즉 원시인 무리의 첫 조상을 죽인 행위였을 게 분명하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조상의 이미지가 나중에 이상화하여 신으로 변모하였다. 반면 자신의 죽음은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경우 자기가 사랑하는 자기 자아의 일부이므로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이들은 어디까지나 타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그를 기쁘게 했다. 이런 양가감정이 존재했다.(현대에 비해 당시에는 죽은 가족이나 친구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적이나 이방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더 광범위한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상반된 감정의 갈등이야말로 인간의 탐구심을 촉발시켰다. 죽음에 대한 양가감정은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소멸의 의미를 죽음에서 배제하는 타협안을 생각하게 했다. 영혼과 육신으로 인간을 설명하는 것을 생각해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슬픔 뒤에서 은밀하게 증오심을 만족시키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살인하지 말라라는 최초의 윤리적 계율도 등장했다. 이 계율은 점차 사랑하지 않는 타인에게로 확대되었고 마침내 적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문명인들은 적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행동은 속죄의 의식을 치르는 원시인들과 다르다. 이 미신은 원시인들의 유혈살인에 대한 죄책감의 표현으로 문명인이 잃어버린 윤리적 감수성의 한 갈래가 숨겨져 있다. 누군가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을 들어 우리의 본성이 사악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오히려 강력한 금지는 강력한 충동에 대해서만 작용할 수 있다. 오히려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살인에 대한 욕망을 오늘날의 우리 자신도 갖고 있으리라는 점을 확인해준다.

<양가감정>에 따른 갈등은 과거에는 영혼에 대한 교리와 윤리학을 만들어냈지만 이제는 신경증을 낳는다.

전쟁은 우리가 나중에 얻어 입은 문명의 옷을 발가벗기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원시인을 노출시킨다. 전쟁은 우리 스스로를 죽음을 믿지 못하는 영웅이 될 것을 강요한다. 전쟁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무시하라고 시킨다. 그런데 이런 전쟁에 굴복하고 순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죽음에 대한 문명적 태도는 심리학적으로 우리의 분수에 맞지 않게 되었다고 솔직히 고백해야 하지않을까. 물론 이는 퇴행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삶을 좀 더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삶을 견디는 것은 결국 모든 생물의 첫 번째 의무다. 환상이 삶을 견디기 어렵게 한다면 그 환상은 가치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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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0 23:56 2014/01/1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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