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전근대적 계급관계의 해체(정진상)

 

한국전쟁과 전근대적 계급관계의 해체(정진상)

 

 

*시민전쟁으로서의 한국전쟁은 ‘한국전쟁 축적구조’를 형성.

 

2. 일제하 전근대적 계급관계의 존재형태

 

-해방 직전 식민지 조선사회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됨. 근대적 노동자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지만, 인구의 압도적인 다수가 거주한 농촌 지역의 상품화폐관계에 포섭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지주소작관계로 현상한 반봉건적 생산관계가 유지. 일제하의 전근대적 계급관계는 기본적으로는 농촌의 반봉건적 지주소작관계.

 

1)반봉건적 지주소작관계

 

-봉건파와 자본파의 논쟁

 

성과

비판

봉건파

-지주소작관계가 자본주의적 관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봉건적이라고 보는 점.

-그 근거로 고율소작료, 지대의 현물납, 경제외적 강제 등 현상적 지표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

자본파

-토지조사사업이 자본의 원시적 축적의 기점으로서 농민의 토지로부터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점을 중시한다는 점.

-지주소작관계가 일본 자본주의의 지배하에 있다는 점에서 봉건적 생산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 점.

-지주소작관계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보는 것은 과도.

 

-반봉건적 생산관계: 조선사회는 생산의 개인적 성격과 봉건적 대소유 사이의 모순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전자본주의사회를 지칭하는 보편적 개념으로서 봉건적이라 할 수 있음. 그러나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안에 편입되어 있었음.(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도적 상태.)

-자본주의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

①일제가 원료공급지로 위치지어 지주계급을 해체하고 자본주의적 관계를 발전시킬 이유가 없었음.

②도시에서 자본주의적 공업의 발전이 충분치 않아 자본주의적 농업 경영 자극이 일어나지 않음.

③고율의 소작료.(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에서 이탈된 농민, 양극화된 중농의 퇴적으로 경쟁 치열.)

-지주와 소작농의 대립이 기본적인 계급대립. 이를 유지시킨 궁극적 힘은 일제. 이는 이데올로기적 지배수단을 결여한 것이었기에, 식민지권력이 무너지면 지주의 권력은 자동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었음.

 

2)사회신분제 유제의 존재형태

 

-사회신분제는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의 신분제 폐지운동으로 결정적인 타격. 법제적으로는 갑오개혁을 통해 폐지되지만 일제말까지 ①농촌공동체의 유지, ②반봉건적 토지소유관계로 인해 유제로 잔존.

 

3. 한국전쟁과 농지개혁의 관계

 

-반봉건적 생산관계가 해체된 직접적인 계기는 농지개혁. 한국전쟁 직전부터 시작되어 전쟁 중에 실시되어 한국전쟁과 뗄 수 없는 관계. 다른 과제가 모두 무산된 반면 농지개혁만이 실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1)토지문제를 둘러싼 제 사회세력의 각축과 농지개혁

 

-해방직후 계급관계는 민중, 구 지배계급, 미군정 3자 관계에 의해 규정.

 

(1)농민의 토지개혁 투쟁

 

-전농: ‘일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의 토지는 전부 몰수하여 빈농에게 분배’, ‘조선인 지주 소유토지에 대해서는 소작권의 자의적 이동 금지와 소작료 금납 및 37제로 인하’를 요구. 북한에서 토지개혁 실시된 후 ‘일본제국주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뿐만 아니라 5정보(15000평) 이상 소유하는 자경하지 않는 지주의 모든 소작지의 몰수, 고농과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에 대한 무상분배’ 주장. 그러나 10월 인민항쟁을 기점으로 한국전쟁 이전까지 투쟁은 하향곡선.

-농지개혁의 기본 동력: 북한에서 실시한 토지개혁, 남한의 민중운동.

 

(2)지주계급과 한민당의 대응

 

-지주계급은 일제 식민지권력이 무너지면서 권력을 잃었으나, 미군정의 실시로 회복.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미군정 통치에 참여.

-‘31제 소작료 실시와 대지주 소유지의 유상매각’ 주장. 북한 토지개혁 실시되고 좌우합작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변화. 사유재산제도의 기본골격을 지키면서 농민의 요구를 수용하되 지주계급의 자본가계급으로의 전환을 국가가 보장해주어애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지주이익을 옹호하는 선으로 후퇴한 것.

 

(3)미군정의 토지정책

 

-점령정책에 의해서 규정. 압도적으로 정치군사적인 정책 고려가 우선. 반공의 보루를 구축하는 기조 하에서 당시 남한 내부의 계급투쟁에 의해 규정.

-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 등 자주적 국가수립 운동 거세, 농민들의 귀속농지 무상분배 요구와 조선인 지주 소유 농지에 대한 소작료 불납투쟁 탄압, 신한공사를 통한 구 일본인 소유농지 장악. 농민들의 요구와 공산당 및 좌파의 주장에는 ‘소작료 31제’로 대응.(개량적인 타협책의 성격)

 

(4)이승만 정권과 농지개혁

 

-미국에 의해 세워진 정권. 미국 독점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

-한민당과의 갈등관계에서도 토지개혁 추진.

-농지개혁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 그러나 지가보상과 상환이 미처 이루어지기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 이는 미국이 북한에 의한 전쟁개시를 유도하면서 미리 이에 대처한 것이라 추정.(장상환)

 

2)한국전쟁 중 점령지역의 토지개혁

 

-북한은 점령 즉시 혁명적 조치를 취하였는데 그 핵심이 토지개혁. 그러나 점령기간이 짧아 실제로 수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격렬한 계급투쟁의 과정은 농촌 내 여러계급에 대해 중요한 경험으로 남았다고 볼 수 있음. 남한의 농지개혁으로 농지를 분배받은 소작농의 경우 스쳐간 에피소드에 불과할 수 있음. 그러나 머슴이나 토지 없는 농민, 천민의 경우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인민군 퇴각 후에도 투쟁의 열기가 내연하고 있을 것이라 추정. 지주의 경우 직접 공격 대상이 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남한의 농지개혁에 의해 이미 분배된 농지를 되찾으려는 생각을 접었을 가능성이 큼.

-남한의 농지개혁은 한국전쟁의 총동원체제를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음. 한국전쟁은 농지개혁을 기정 사실화함으로써 반봉건적 지주소작관계를 파괴. 이는 전쟁과정에서 민중이 성취한 유일한 성과.

 

4. 한국전쟁과 계급구조의 변동

 

1)지주계급의 몰락과 영세자작농체제의 창출

 

-소작지 가운데 73%가 농지개혁 분배에서 누락되어 용두사미로 끝났다는 평가도 있으나, 해방직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동안의 계급투쟁 과정에서 실시되었다는 측면에서 농지개혁 전후의 토지소유관계의 변동은 넓은 의미의 농지개혁 과정이라 할 수 있음.

-지주계급의 완전한 몰락과 소자공의 자작농화 급속도로 진행. 영세농 구조였다는 점에서 취약한 구조. 한국전쟁은 이 취약한 영세 자작농체제에 막대한 전비를 부담시켜 결정적인 타격. ①농지분배를 받은 농민들의 현물 상환곡, ②임시토지수득세를 비롯한 조세수탈, ③미국의 잉여농산물 도입.

-지주계급 몰락의 영향: 자본가계급이 유일하게 지배연합에 포함되어 국가가 정책의 일관성을 기하기가 유리해짐. 농촌 내에서의 계급대립이 기본적으로 해소되어 농촌사회는 국가통제 아래로 들어감. 이후 농촌에서 국가를 통한 자본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기까지 상당한 시간 소요. 농민이 소규모이긴 하지만 토지를 소유하고 소소유자가 됨으로써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계급이 강화.

-농촌에 광범한 과잉인구 퇴적. 산업화 시기에 노동력 공급의 저수지 향성.

 

2)계급 역관계의 변화

 

(1)민중운동의주체적 역량의 궤멸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민중운동의 역량이 궤멸되는 계기

①보도연맹 가입자에 대한 학살

②부역자에 대한 살해와 처벌

③유격대 토벌

④월북

-이 과정을 거치며 해방 직후 형성된 혁명적 계급구조 완전히 역전.

 

(2)반공이데올로기의 고착

 

-신탁통치 반대운동, 좌익의 모험주의적 전술에 대한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의 대응으로 전쟁 전에 이미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음. 그러나 전쟁 이전에는 허구적인 성격으로 인해 내면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반면 전쟁을 거치면서 실체적인 힘을 갖게 됨.

 

5. 한국전쟁과 사회신분제 유제의 해체

 

-한국전쟁은 ①북한이 점령한 당시 실시한 반봉건인민민주주의 혁명과정, ②전쟁중에 일어난 대규모의 인구이동으로 신분제 유제를 결정적으로 해체하는 계기가 됨.

-신분의식이 사라지고 평등의식이 등장. 한국전쟁은 생존경쟁,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경쟁과 같은 가치를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 이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심층을 구성하는 것들.→시민혁명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철저하게 수행.

 

*한국전쟁 축적구조는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해체되기 시작.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2014/01/10 23:34 2014/01/10 23:34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tightrope/trackback/133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