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R는 나무 심는 것?(한겨레21)

[제996호] CSR는 나무 심는 것? : 표지이야기 : 뉴스 : : 한겨레21

 
 
탕! 탕!

인도차이나반도에 다시 총성이 울려퍼졌다. 반도 위쪽 끝자락에 위치한 방글라데시의 남부 항구도시 치타공. 경찰의 난데없는 총격에 한국수출가공공단(KEPZ)에 있는 영원무역의 신발 제조공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노동자 5천여 명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총알을 맞아 병원으로 실려간 스무 살 여성노동자의 심장은 끝내 다시 뛰지 않았다. 월급날 “수당이 깎였다”며 항의하던 와중에 벌어진 유혈 사태였다. 그날은 1월9일. 반도 반대편 캄보디아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던 노동자 5명이 총에 맞아 숨진 날로부터 엿새 뒤였다. 방글라데시의 최저임금(월 66달러)은 캄보디아(월 80달러)보다도 낮다. 두 나라에서 숨진 노동자들은 모두 봉제공이었다. 이들이 만든 옷과 신발은 갭·노스페이스 등 유명 상표를 달고 세계 곳곳으로 팔려나간다.

잊힐 만하면 반복되는 소식

타닥! 타닥!

같은 날인 1월9일 새벽, 베트남 북부 타이응우옌성 삼성전자 휴대전화 공장 건설 현장에 큰 불이 났다. 현지 보안서비스 업체 소속 경비가 출근 시간에 늦어 출입구를 뛰어넘으려는 노동자를 전자충격봉으로 구타한 게 불씨가 됐다. 격분한 노동자 4천여 명이 돌을 던지고 컨테이너와 오토바이 수십 대에 불을 질렀다.

그로부터 또다시 엿새 뒤인 1월15일, 이번엔 인도에서 한바탕 불이 붙었다. 인도 오디샤주에서 포스코가 건설을 추진 중인 제철소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화형식’을 연 것이다. 제철소 부지 가운데 하나인 파타나 마을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만모한 싱 인도 총리, 포스코에 개발허가를 내준 비라파 모일리 환경산림부 장관을 대신한 인형이 불태워졌다. 포스코는 2005년부터 사업을 추진해왔지만, 이주를 거부하는 주민 2만여 명과의 갈등, 환경 훼손 논란 등에 휘말려 아직 첫 삽도 못 뜬 상태다. 9년 동안 계속된 반대 시위 과정에서 주민 4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삶의 터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주민들에겐 인도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포스코 문제 해결’을 강력히 요구한 한국 대통령은 ‘침입자’일 뿐이다.


2014년 새해가 밝은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 네 번째다.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얽혀 있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잇따라 현지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날아 들어왔다. “직원들이 바뀐 임금체계를 오해한 탓”(영원무역), “경비업체의 과잉 대응이 빚은 해프닝”(삼성), “주민과의 갈등은 인도 정부의 몫”(포스코)이라고 한국 기업 관계자들은 해명했다. 변명인지, 설명인지 떨떠름했다.

떨떠름한 뒷맛이 낯설지 않다. 해외 진출 한국 기업들의 인권침해 소식은 잊힐 만하면 반복된다. 이번에 논란이 됐던 해당 기업들만 봐도 그렇다. 영원무역의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난 건 처음이 아니다. 2010년 12월에도 임금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 노동자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여 3명이 숨졌다. 당시엔 현지 공장 관리자가 조업 중단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구타·감금했다는 의혹까지 일었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 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생산하는 영원무역은 방글라데시에만 총 19개의 의류·신발 제조공장을 갖고 있다.

‘책임’이란 ‘연루’되지 않을 책임

베트남에선 우발적인 충돌로 마무리됐지만, 삼성은 지난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2건의 재판에 회부됐다. 노동자 착취가 문제였다. 브라질 노동검찰은 삼성전자를 상대로 2억5천만헤알(약 1210억원)을 정신적 피해 보상금으로 청구했다. 마나우스 공장의 노동자들이 휴식도 없이 하루 10시간씩 서 있거나, 32초당 1대씩 휴대전화를 조립하는 등의 무리한 노동으로 인해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린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이 현지 국가 사법기관의 조사를 받은 건 처음이다. 프랑스에선 시민단체 3곳이 “삼성이 윤리적인 기업인 것처럼 광고하며 소비자를 속이고 있다”며 소송을 냈다. 미국의 시민단체인 ‘중국노동감시’(CLW)가 2012년 조사한 결과, 중국의 삼성전자 협력업체 공장에서 16살 미만의 아동노동이 발견됐다는 사실이 프랑스 시민단체의 심기를 건드렸다. 삼성은 “자체 조사 결과 아동노동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지만, 이후에도 아동노동 추가 의혹이 불거지는 등 논란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해외 언론이나 국제민주연대 등 국내외 시민사회단체를 통해 알려진 해외 진출 한국 기업의 인권침해 사례만 헤아려봐도 100건이 훌쩍 넘는다. 기업은 인권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 국내든, 해외든 마찬가지다. 국제법상의 의무는 아니지만, 1976년 채택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이나 국제표준화기구가 발표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지침’인 ISO 26000, 유엔 권고안인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 등에선 기업에 인권 보호를 요구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인권침해에 ‘연루’되지 않을 책임을 포함한다. “연루는 사업관계에 있는 다른 사업체, 주재국의 정부에 의해 일어나는 부정적인 인권 영향을 유발하는 데 기여한 경우를 말한다.”(2013년 국가인권위원회 용역보고서 ‘해외 진출 한국 기업의 인권침해 실태조사 및 법령제도 개선방안 연구’) 예컨대 기업이 직접 노동자를 향해 총을 쏘거나, 주민을 내쫓지 않았다고 해서 인권침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는 뜻이다. 캄보디아·방글라데시·베트남·인도에서 한국 기업은 모두 잠재적인 공범자였다.

하루 12시간을 꼬박 일해도, 월급은 9500원. 옷 원단에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로 콧속은 늘 까맸다. 공장 안의 공기가 좋지 않아 자주 아팠다. 어느 나라 봉제노동자의 이야기일까?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정답은 한국이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역사를 꼼꼼히 기록한 <청계, 내 청춘>에 나오는, 1975년 서울 청계시장에서 근무하던 견습공의 생활은 그랬다. 견습공의 월급은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투쟁 등으로 1977년 2만원, 1978년 3만원으로 올랐다. 최근 전해져오는 동남아시아 의류 제조업 노동자들의 현실은 1970년대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 각종 부당노동행위, 그리고 터뜨리면 당장이라도 터질 듯 고조되는 노동자들의 억압된 분노, 이에 이어지는 대규모 시위.

고스란히 이식된 부끄러운 이름

망각은 차라리 속 편하다. 한국은 40년 전, 저임금 노동력의 장시간 노동을 밑돌 삼아 성장한 기억을 까마득히 잊었다. 1960~70년대 ‘메이드 인 코리아’ 의류는 싼 맛에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점점 인건비가 오르면서 국내에서 설 자리를 잃어갔다. 기업들은 중국·필리핀으로 공장을 옮겼다. 국경은 의미가 없었다. 그곳의 인건비가 오르자 다시 캄보디아·버마(미얀마) 등으로 옮겨가고 있다. 봉제공장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캄보디아 월 150달러, 버마 월 110~120달러로 중국·베트남(월 250달러)보다 훨씬 낮다. 지난해 캄보디아와 버마를 방문조사했던 김인수 한국섬유산업연합회 부장은 “이들 나라도 매년 10%씩 임금이 오를 전망이어서 현재의 생산성으론 2~3년 정도만 버틸 수 있다고 한다. 현지 섬유업체들의 모임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막기 위한 대정부 로비를 하는 것도 그래서다”라고 귀띔했다.

어린 여공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화장실 갈 시간도 허락하지 않으며 노동을 착취하던 악덕 사장들은 청계천에서나, 동남아에서나 여전했다. “아시아 다른 나라의 기업 감시 활동가들을 만나면 ‘유독 한국 기업만 심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기본적으로 한국 기업들이 군사독재 시절의 전근대적 노무관리 방식, 이에 뒤따른 경제성장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 최미경 국제민주연대 사무국장의 해석이다. ‘노동탄압국’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해외 공장에도 고스란히 이식하고 있는 꼴이다.

2013년 4월,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인근의 ‘라자플라자’ 의류공장이 붕괴되면서 노동자 1127명이 숨지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앞서 2012년 11월에는 의류공장 화재로 112명이 죽거나 다친 터였다. 국제사회에서는 방글라데시 의류산업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의류산업에서의 공정생산을 주장하는 운동단체인 ‘클린클로즈 캠페인’은 외국계 의류업체들이 ‘방글라데시 공장에 대한 화재 및 건물 안전 협정’에 가입하도록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고, 자라·H&M 등 유럽 의류업체들은 “안전기준에 미흡한 공장과는 거래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월마트·갭 등 북미 의류 브랜드들은 ‘방글라데시 노동자 안전을 위한 연합체’를 꾸려 노동환경 개선에 나섰다. 이 가운데 한국 기업의 이름은 없었다.

‘유독’ 한국 기업이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다. 베트남노총(VGCL)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2010년 베트남에서 일어난 외자기업의 파업 가운데 한국(32.15%)이 대만(37.76%)에 이어 2위인 것으로 나온다. 한국이 베트남의 3순위 투자국이고, 중공업·건설업·제조업 등의 생산기지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불명예스런 기록인 것은 분명하다. “베트남만이 아니라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는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삼성이나 현대차 같은 대기업도 국내에서 무노조 정책을 펴거나 불법 파견을 일삼는 등 기본적인 노동법을 안 지킨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이건희 삼성 회장도 ‘인권’을 말하지만 ‘노동권’에 대해선 침묵한다. 인권과 노동권을 분리시키는 거다. 하물며 한국에서 자수성가해 외국에 공장을 차린 사람들은 어떻겠나.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한테 인간적인 시혜를 베풀 리 없지 않나. 한국 내부의 근본적인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해외에서도 개선은 난망하다.” 윤효원 인더스트리올(국제제조업노조연합체) 자문위원은 이렇게 꼬집었다.

나이키, 어린이들 손바느질 축구공 그 뒤

노동권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라도, 무지라도 모두 죄다.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활동이 나무나 심고 학교나 지어주면 된다고 여기면서 “근로기준법 준수도 CSR냐?”고 묻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영선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글로벌CSR사업단장은 “중소기업들의 경우엔 비용 증가를 걱정해 CSR 활동에 소극적이고, 노동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돼서 파업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특히 한국 기업들이 취약한 부분은 협력업체에 대한 리스크 관리, 비정부기구(NGO) 및 이해관계자와의 협력 등이다. 기업과 인권이라는 이슈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최초의 기업은 나이키였다. 1990년대 초,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어린이들이 손바느질로 축구공을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이키는 대대적인 불매운동에 휩싸였다. 나이키 본사가 아니라 협력업체에서 생긴 문제였다. 나이키는 그 뒤 공급망에서 인권침해가 일어나는지를 집중 감시하도록 시스템을 바꿨다. 지속적인 모니터링은 독립적인 제3의 기관에 맡겼다. 협력업체에서 일어난 인권침해는 “우리 회사 일이 아니다”라며 모르쇠하는 한국 기업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나이키의 철저한 감시는 국내 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우즈베키스탄 아동노동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2012년 부산 공장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하던 나이키로부터 거래 중단을 통보받았고, 부산공장을 매각해야 했다. 애플도 하청업체들의 노동·환경 이슈가 논란이 되긴 하지만, 하청업체 조사보고서를 해마다 펴낸다. 2010년 노동자 연쇄 자살사건이 일어나 심각한 부당노동행위 사실이 알려진 폭스콘은 민간 연구원으로 구성된 실태조사단에 공장 문을 열어줬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IBM·델 등이 2004년 시작한 인권 경영을 위한 글로벌 협의체인 ‘전자산업시민연대’(EICC)에도 뒤늦게 가입했다(삼성전자 2008년, LG전자 2010년, SK하이닉스 2013년). 가입 회사는 EICC 행동규범이 요구하는 노동인권·안전보건 등 5가지 사항을 최소한 1차 협력업체까지는 실천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협력업체 정기 조사 결과를 공개하는 등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나이키의 철저한 감시는 국내 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우즈베키스탄 아동노동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2012년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하던 나이키로부터 거래 중단을 통보받았고, 부산공장을 매각해야 했다.

물론 유럽과 북미 업체들이라고 해서 ‘착한 자본’인 것은 아니다. 최미경 국제민주연대 사무국장은 “서구 브랜드들은 한국 기업에 비해 인권침해 개선에 적극 나서고, 나아가 윤리적인 투자까지 관심을 갖는 편이다. 소비자들의 불매운동과 정부의 감시 때문에 외면할 수 없어서다. 하지만 결국 가격경쟁을 부추기는 건 서구 패션 브랜드들이다”라고 지적했다. 동남아 노동자들을 저임금의 덫에 가둬둔 건, 거대 초국적 자본이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14달러짜리 티셔츠를 하나 산다고 치자. 생산기업과 소매상 등이 챙겨가는 이윤, 원재료비 등을 제외하고 노동자에게 온전히 돌아가는 인건비는 0.12달러에 불과하다(그래픽 참조). 이 못지않게 심각한 대목은 정경유착이다.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 정치체제가 불안한 나라에서는, 외국 기업을 붙들어둬서 경제를 키우고 싶은 정부의 욕망과, 파업·시위 등 불편한 상황에서 언제든지 공권력 투입을 요구하려는 외국 기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마련이다. 다국적기업이 그 나라의 민주주의 후퇴를 거드는 모양새다. 군부가 주도하는 버마 가스전 사업에 참여한 대우인터내셔널이 비판받은 이유다.

한국은 문제 생기면 다른 나라로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유난히 노사관계나 인권침해 이슈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앞으로 생길 일에 예방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문제가 터지면 막는 데 능하고 이게 비용도 덜 든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그러다보니 노사 갈등, 임금 인상 등의 문제가 생기면 다른 나라로 탈출하는 식으로 수세적으로 대응한다. 애플이나 나이키가 했듯 현지 지역사회나 시민사회단체와의 네트워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가고, 어느 나라에서든지 통하는 보편적인 규범 기준도 세우지 못한다.” 이장원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기업들이 ‘시대적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지난 1월16일 아시아인권위원회(AHRC)는 캄보디아와 방글라데시 사태 이후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언급한 한국 기업들의 태도를 비판하며 ‘an ill bird fouls its own nest’(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로 끝맺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이젠 부끄러울 때도 되지 않았나.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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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8 14:34 2014/01/2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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