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기업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한겨레21)

[제996호] 악덕기업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 표지이야기 : 뉴스 : : 한겨레21

 
 
2012년 6월, 한국으로 건너온 인도네시아인 두 명이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사조오양’ 앞에 섰다. 1년 전 뉴질랜드 배타적 경제수역(EEZ)에서 조업하던 사조오양 소속 원양어선 ‘오양75호’에서 일하다 집단 탈출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인들로부터 성추행·폭행·폭언·임금체불 등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호소했다. 그해 미국 국무부에서 발간한 ‘2011년 세계 인신매매 보고서’에는 이 사건이 노예노동 사례로 언급되기도 했다.

사건 발생 1년 뒤 조사단 꾸려져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폭행·강제추행, 선원법 위반 등의 혐의로 한국인 선원들과 회사를 해양경찰청에 고소했다. 또한 2011년 6월 미지급 임금 지급 서류를 제출하라고 독촉하는 뉴질랜드 이민국에 사조가 ‘가짜 외화송금확인서’를 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사건 발생 1년 뒤에야 꾸려진 정부합동조사단도,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주장한 성추행·폭행·임금체불, 사문서 위조 등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관련 선원 및 회사 임직원들을 검찰에 송치한다. 2012년 말, 부산지방검찰청은 이 사건에 대해 ‘사조오양 쪽에서 선원들이 관련자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취지의 문서를 제출했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 선원들은 재수사를 해달라며 항고를 제기했다.

다시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지난해 12월 서울서부지검은 가짜 문서를 만들어 사용한 혐의(사문서 위조 교사 및 위조 사문서 행사 교사)로 사조그룹 선박 관리 총책임자였던 이아무개(54) 전 사조산업 대표 등 2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지난해 10월 부산지검은 한국인 선원들의 폭행 혐의에 대해 ‘증거 자료가 해외에 있다’는 사유로 기소 중지 결정을 내리고 일부 사건을 서울서부지검으로 이첩시켰다. 공익법센터 김종철 변호사는 “처음부터 수사가 제대로 됐어야 했는데 사건 발생 뒤 너무 늦게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며 “외국에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있어 이런 비위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많이 물리지만, 우리는 그런 제도가 미약하고 현실적으로 증거 수집이 힘들어 손해배상 소송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국내외에서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대하거나 ‘물량 밀어내기’ 등 불공정 거래를 하는 한국 기업은 여전히 많다. 정부와 공권력은 이 기업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 경영은 아직 먼 나라 이야기다. 제대로 된 지속 가능 보고서를 내는 기업도 손에 꼽기 힘들다. 이러한 가운데 세계 자본시장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책임투자’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책임투자란 기업의 재무적 요소뿐 아니라 지속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비재무적 요소인 ESG, 즉 환경(Environment), 사회적 문제(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도 고려해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투자 방법이다. 2000년 영국 정부는 연금법을 개정해, 연기금을 운용하는 모든 주체는 투자 종목을 선택할 때 환경·사회·윤리 세 요소를 고려했는지 등을 공시하도록 했다. 사회책임투자 컨설팅업체인 서스틴베스트 류영재 대표는 “영국에서는 연금법이 바뀌기 전까지 환경·사회·지배구조를 고려하는 것이, 최대 수익률을 올려야 하는 수탁자 책무에서 벗어나는 것 아니냐는 논쟁이 오랫동안 있었다”며 “ESG 고려가 재무적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투자 패러다임’을 바꾸는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ESG 고려하는 네덜란드·노르웨이 연기금

특히 각국의 공적 연기금은 책임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세계 3대 공적연금인 네덜란드 연기금(ABP) 운용사인 APG(All Pensions Group), 노르웨이 연기금(GPFG)을 운용하는 노르웨이투자관리청(NBIM) 등은 투자 과정에서 각 기업의 ESG를 고려한다. ESG 관련 현안이 있는 기업들과 대화에 나서거나, 유엔 글로벌콤팩트 원칙을 어긴 기업에 대해선 아예 투자를 배제한다. ESG 문제를 고려해 의결권을 행사하고, 그 내용을 공시하고 있다. APG가 2012년 ESG 현안과 관련해 논의를 진행한 351개 기업 중에는 직업병·아동노동 문제가 야기된 삼성전자, 인도 환경파괴 논란을 빚은 포스코 등이 포함돼 있다. 2012년 책임투자 보고서를 보면, 대량 살상을 할 수 있는 확산탄(수십~수백 개의 폭발성 폭탄을 담고 있는 폭탄) 생산을 이유로 한화·풍산 등에 대해선 투자를 배제한다고 밝혔다.

한국 연기금의 책임투자는 이제 시작 단계다. 국민연금기금은 확산탄 제조 업체인 한화·풍산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 원양어선의 인도네시아 선원 인권침해는 국제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됐지만, 국민연금공단의 사조산업 지분 보유율은 6.09%에서 8.12%로 늘어났다.

APG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국민연금공단은 한화·풍산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 연기금의 책임투자는 이제 시작 단계다. 400조원이 넘는 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기금은 2006년부터 위탁운용사에 펀드 운용을 맡기는 방식으로 약 5조5천억원(2013년 3월 기준) 규모의 사회책임투자를 하고 있다. 전체 운용자금의 1.3% 수준이다. 기금 운용 과정에서 기업 환경·사회·지배구조 문제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고 있다. 한국 원양어선의 인도네시아 선원 인권침해는 국제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됐지만, 국민연금공단의 사조산업 지분 보유율은 6.09%에서 8.12%(2013년 9월 기준)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지난해 국회에서 ‘갑’의 횡포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회책임 경영 및 책임투자 확대를 위한 제도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민주당 이목희 의원은 지난해 8월 국민연금 투자 운용 과정에서 ESG 고려 여부와 정도, 고려하지 않는 경우 합리적인 이유 등을 공시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긴 ‘국민연금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더불어 기업들에 사회적 책임 공시를 의무화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사회적 책임 공시 의무화 추진 중

‘악덕’ 기업을 견제할 수 있는 건 한 명의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시민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다른 사람과 사회, 환경을 고려해 소비하는 ‘윤리적 소비’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다. 행복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연기금’ 역시 시민들의 돈이다. 지난해 말 영국 학생들은 ‘엄마·아빠의 연금을 이산화탄소 배출 기업에 투자하는 건 우리 미래를 망치는 일’이라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전쟁없는세상 등 한국의 평화·인권단체들이 모인 ‘무기제로’는 확산탄 생산 기업인 한화·풍산에 대한 국민연금 투자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확산탄은 축구장 서너 개 크기의 광범위한 지역을 초토화시키며, 분쟁 지역에 남은 불발탄은 지뢰처럼 터져 인명피해를 낳고 있다. 한국은 확산탄 세계 2위 수출국이다. 무기제로 박성호 활동가는 “2007년 네덜란드에서는 여러 연기금이 확산탄·지뢰 등 비인도 무기를 만드는 기업에 투자되고 있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면서 국민적 분노가 일어나 확산탄 투자 금지 조처로 이어졌다”며 “지난해 봄 진행한 국민연금 확산탄 투자 철회 캠페인에 2천 명가량이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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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8 14:32 2014/01/2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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