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두꺼비-1

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20/09/30
    [번역]마이클 뷰라워이 <체념을 제조하기>
    두꺼비-1
  2. 2014/02/24
    2014/02/24
    두꺼비-1
  3. 2014/02/05
    그곳에 여전히 머무름에 대하여
    두꺼비-1
  4. 2009/12/05
    촛불집회
    두꺼비-1
  5. 2009/12/04
    폐기왓장이 담으로 변신하다
    두꺼비-1
  6. 2009/12/03
    창문 만들기
    두꺼비-1
  7. 2009/11/18
    미원리에 사시는 할머니 목욕시켜드리다
    두꺼비-1
  8. 2009/11/17
    교원대 박물관 지하에 나무 마루판을 깔다
    두꺼비-1
  9. 2009/11/16
    브라질에 샤시를 보내다
    두꺼비-1

[번역]마이클 뷰라워이 <체념을 제조하기>

[마이클뷰라보이(web)(web).hwp (434.50 KB) 다운받기]

교수가 공장에 대한 연구를 위해 노동자로 취업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4/02/24

수유너머n/대처리즘의 문화정치/2014.2.24.19:00/윤민진 1부. 우파의 새로운 도전 2. 거창한 우경화 쇼 실로 급진적 우파의 부상을, 전적으로 대처 여사와 대처가 보수당 고위직에 끌어들인 개성 강한 측근들이 정당 간의 내기에서 승리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광부들과 다른 집단들이 도중에 저지시킨 것은 바로 이 히드식의 반격이었는데, 이는 그 나름대로 오싹할 정도로 반동적인 유령이었다. 노동당은 의회에서 세력을 잃게 되자 우파의 이데올로기 영토로 깊숙이 표류해 들어가, 우파가 방금 버린 진지 중에서 상당수를 과시적으로 차지하기 시작했다. 진짜 경제적인 세력들이 절대적인 결정성을 발휘해 이 모든 이데올로기적 허상들을 증발시켜 버릴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면 된다. 즉 1917년은 매우 독특한 역사적 상황으로서, 이 때 절대적으로 상이한 흐름들, 절대적으로 이질적인 계급 이익들, 절대적으로 상반된 정치적, 사회적 노력들이•••••• 놀랄 정도로 조화로운 방식으로 결합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예외적인 자본제 국가 형태가 등장하게 되었는가 하는 바로 그 점을 우리는 설명해야 한다. -유기적 위기라고?- 우리는 위기의 '유기적' 측면과 '국면적' 측면을 적절하게 연관지어야 한다고 그람시는 주장했다. -경제적 위기- 따라서 위기 관리와 봉쇄 전략, 즉 점차 개입주의적으로 바뀌어 가는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자본제 생산과 재생산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 개입하는 방식에 의해 국내 정치는 지배되었다. 급진적 우파의 핵심적인 주제 중 상당수는 경제적 침체의 측면들이 전면적으로 드러나기도 전에 뚜렷이 나타났다. -급진적 우파- 그러므로 대처리즘은 은밀히 확산되는 사회주의 뿐만 아니라 히드 분파가 변명을 붙이면서 추진한 국가 주도의 집단주의와 직접 대결함으로써 이 공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대처리즘은 10년 이상 정치 현장을 지배하고 안정시키는 구실을 한 합의 정치의 바로 그 근간을 집중 공략한다. -사회 민주주의 내부의 모순- 그러나 일단 집권하고 나면 사회 민주주의 역시 자본의 핵심적 분파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위기 해결책을 반드시 찾아내려 한다. 이 공간 내부에서는 어떤 특정한 노조의 어떤 특정한 무책임한 노사 협상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조직화된 노동의 바로 그 토대에 대한 공격이 구축되고 있다. -반집단주의- 새로운 급진적 우파의 철학에서 밀접하게 연관된 흐름 중의 하나는 반집단주의와 반국가주의의 주제들이다. 그러나 사회적 시장 가치 담론에서 대처리즘은 경제적 교의를 경험과 도덕적 명제, 상식의 언어로 옮겨 놓을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발견했으며, 이리하여 더 넓은 의미의 철학, 즉 보살피는 사회의 윤리를 대체하는 대안 윤리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반향이 큰 유기적 토리주의의 주제들(국가, 가족, 의무, 권위, 규범, 전통주의)과 부활된 신자유주의의 공격적인 주제들(개인의 이익, 경쟁적 개인주의, 반국가주의)을 결합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이 유기적 토리주의와 융합하는 자유시장ㅡ강한국가라는 이 모순된 지점을 중심으로 대처리즘의 진정한 언어는 농축되어 나타났다. -대처리즘의 레퍼토리- 즉 민중을 권력 블록과 대립된 세력이 아니라 공조 관계로 끌어 들여 영국을 다시 한 번 위대한 국가로 만들자면서 거창한 국가적 십자군 운동을 추진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과 동맹 관계를 맺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처 여사 자신의 다음과 같은 레토릭의 바로 그 구조 내에서 이른바 대처리즘과 국민 사이의 이 이데올로기적 상호 동맹의 구축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이상의 포퓰리즘적 구축물이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합리적 핵심과 그것들의 진짜 - 허위가 아니라 - 물질적 토대를 모두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 노동당식 사회 민주주의가 왜 국가주의라는 비난에 취약했는지, 또 그러므로 반국가주의가 왜 그렇게 효과적인 포퓰리즘적 구호 구실을 했는지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노동당 정부가 보기에 분명히 사회 계약은 노동 조합 운동에게 혜택을 주고 사회적, 경제적 규율을 사들일 수 있는 유일한 형태에 해당했다. 대중 계급이 책임 있는 지도와 리더십의 범위를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큼 노동당 지도자들의 평정심을 흔들어놓는 일은 실로 없을 것이다. 현실을 현재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노동당이며, 대처 여사는 이 사회를 뿌리에서부터 뽑아내 급진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교육- 오늘날 진보주의는 완전히 인기를 상실했으며, 이 노선으로 널리 알려졌던 모든 학교들(윌리엄 틴테일 학교와 그 후 생긴 학교들)은 말하자면 도중에 중단된 채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다. 첫째, 논쟁이 진행되는 근거가 되는 지형이 이 새로운 논리를 중심으로 너무나 철저하게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변화의 큰 물결을 거스르기가 어려움을 깨닫게 된다. 둘째, 노동당 자신도 상반된 교육 목표들 사이에 늘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대논쟁- 이렇게 해서 사회 민주주의가 벌여야 할 대논쟁의 의제는 실로 급진적 우익 성향의 사회 세력에 의해 설정되었다. 그러나 교육적 불이익의 흐름을 돌리기 위해 추진한 사회 민주주의 정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법과 질서- 이 주제들은 보수당 회의에서 연례적으로 늘 등장하는 것들이며 도덕 운동 집단들과 이들을 인용하는 편집자들의 수많은 포퓰리즘 캠페인의 원천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좋은 편 대 나쁜 편, 문명과 비문명의 기준, 무정부와 질서 사이의 선택을 구분하는 거창한 구문론적 법칙은 바로 여기서 세상을 끊임없이 둘로 쪼개 각자 지정된 위치로 분류 • 배치한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고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순진한 사람들을 잘 속였기 때문이 아니라 진짜 문제, 진짜 생생한 체험과 진짜 모순들을 다루면서도 이것들을 우익의 정책이나 계급 전략과 체계적으로 일치시키는 담론 논리 안에서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농축된 모순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상이 아니라 사회적 투쟁의 특정한 실천, 즉 이데올로기적 • 정치적 계급 투쟁이다. 3. 사회 민주주의의 작은 시저들 사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노선이 중도로 새롭게 집결하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대응해야 할지를 놓고 좌파는 분명히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것들은 많은 언론 분파들의 중도파 지향적인 본능에 영합하여, 통화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독단적 교리에서 자유로우면서 현실성 있는 중도파라는 바로 그 환상을 투사하도록 모두 계산된 것들이다. 최근의 기억에 의하면, 그렇게 대략적이고 의례적인 강령을 토대로 삼아 결성된 어떤 정치집단이, 다수당이 없는 의회에서 결정적 요소가 될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기대한 적은 매우 드물다. 더구나 교조주의적인 우익의 이탈(CSD는 중도화를 전투적일 정도로 밀고나가지 않으면 존재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은, 신성함과 거리가 먼 노동당 사회주의의 혼합체에서 지금까지 다른 흐름들과 공존해오던 어떤 정치적 요소들이 분리된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것들이 독립된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정치적 대의 체제에서 위기와 단절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기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회 민주주의가 단지 하원에서 의석 분포의 재배열에 불과한지, 아니면 정치 세력의 재정렬이라는 더 심층적인 과정의 일부인가하는 것이다. 장기간의 실망스런 노동당 정권을 두 차례 거치면서 이 노선의 실행 가능성은 서서히 고갈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과로 볼 때 대처리즘은 거창한 포퓰리즘식 모험의 두 번째 과제, 즉 권력 블록 내에서 사회 민주주의의 흔적을 지워 버리고 그 블록을 재구성하여 사회와 경제를 재구조화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이들은 또 하나의 - 아마도 최후의? - 실행 가능한 정치적 대안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사회 민주당과 자유당의 동맹이 맺어졌다고 가정할 때 이 동맹은 유동적이고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낀 유권자 중에서 노동당과 보수당 출신과 거의 같은 슷자만큼의 지분을 끌어들일 것이라는 여론 조사 결과에서 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주장과 연출된 희화화가 아니라 진짜 전략의 측면에서 보면, 최근까지 앙당은 자본제 혼합 경제, 소득 정책, 신케인스주의, 조합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바로 이 신화적인 중용의 위치를 차지하려 오랫동안 애써왔다. 첫째, 파월주의의 저변에 작용하는 포퓰리즘의 흐름, 그 다음에는 광부 파업과 이에 따른 유턴 이전에 히드 씨가 추진한 호황이냐 파산이냐 식의 실험, 그리고 제2의 아담 스미스인 케이스 조셉류의 사설 고문단의 형성, 마지막으로 - 하이예크와 프리드먼의 교리가 토리 촌놈들의 반동적 본능과 연계돌 필요가 있음이 뚜렷해지면서 - 대처당의 형성, 급진적 공세와 총선 승리 등을 들 수 있다. 이 쟁점들을 크루 등이 포퓰리즘적 권위주의라고 부른 쟁점 더미 - 이것들은 인종, 법과 질서, 민간 주도, 자립 등 이른바 도덕적 쟁점들인데, 다른 쟁점에서는 친노동당 의견인 노동당 지지자들도 여기서는 갑자기 뚜렷하게 대처주의자가 된다 - 와 나란히 두게 되면, 원래 중도파 정치를 지향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해진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강력한 카드는 중도를 회복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정치의 틀을 깨뜨리겠다는 좀 더 모호한 위협일 것이다. 언론과 대처 여사가 보기에 민주주의란 이를 통해 말없는 다수가 투표로 좌파를 몰아낼 수 있을 때에만 작동하기 때문에, 이는 분명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혼합 경제의 틀 안에서 건설적으로 일하는 사회주의자는 바로 오웬 박사가 최근 달성하고자 한 이미지이다. 그가 준거점으로 삼은 곳은 스웨덴, 오스트리아, 서독과 네덜란드이다. 그에게 기억할 만한 날들은 1959년 독일 사민당이 바트 고데스베르크 집회에서 개량주의를 받아들인 날, 1960년 노동당 집회에서 일방주의에 따른 결의가 번복된 날 등이다. 사회 민주당은 새로움을 열렬히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어떤 하나의 새 쟁점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치적 지지층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집권 노동당은 부와 권력을 대중 계급들에게 결정적으로 옮겨주는 수단이 아니라 대중 계급들을 정부에서 대변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그러나 대처리즘이 민중과 권력 블록 사이의 적대 관계를 장악해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를 새로운 자유 시장 강령을 옹호하는 (이와 동시에 대처 여사를 권력 블록으로 인도하는) 포퓰리즘적인 국가 통합 운동으로 변형시키려 한 반면에, 사회 민주주의는 모순을 악화시키고 참여 민주주의와 권력 분산 강령을 통해 그것을 변형시키려 한다. 권력 분산이 진짜 권력 원천의 진정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무도 동원하지 못하며 기존의 권력 중심의 해체와 권력 균형의 진정한 이동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러한 권력 분산은 환상에 불과하다. 이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구축하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낡은 것을 복원하는 일, 즉 혁명 없는 혁명이다. 이는 위로부터의(바꿔 말하자면 의회 차원의) 수동적 혁명이다. 노동 운동에 마지막 패배를 안겨줄 수 있는 경제 공간이나 정치적 권력이 대처리즘에게는 없다. 즉 좌파와 사회주의의 재편만이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는데, 시저리즘은 이를 막고 그 대신에 비슷한 노선의 노동당이 낯익은 노선을 따라 스스로 재편되는 데 그치도록 하는 효과를 미칠 수도 있다. 4. 제국의 반격 전 세계 구석구석 수백 군데에서 제국의 국기는 이미 내려졌다. 그러나 이 국기는 집단적 무의식에서 아직도 휘날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제국 연대기에서 보아 너무나 친숙한 이 이야기 - 진짜 역사 - 는 다음과 같이 좀 더 강력한 신화에 의해 대체되었다. 즉 나는 대영 제국 시민이다는 신화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곳에 여전히 머무름에 대하여

올해도 두꺼비는 온다. 비록 개체수가 줄었지만.

 

예전 원흥이방죽의 모습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곳에 새, 고라니, 쥐, 고양이, 사마귀, 오리, 닭 같은 친구들이 있기에.

 

예전처럼 부는 바람, 내리쬐는 햇빛, 말없이 서있는 느티나무 같은 친구들도.

 

또한 사람들도 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처음부터 나섰거나 중간에 힘을 보탠, 혹은 자의든 타의든 떠난 사람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촛불집회

서원대학교에 전시된 작품이다. 유성물감으로 그린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폐기왓장이 담으로 변신하다

오늘은 청원군 척산리에 가서 목욕시켜드렸다. 옆에선 할아버지가 담을 쌓고 계셨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창문 만들기

홈샤시가 하얀 비닐에 싸여 있다. 녹슨 철제 콘테이너 안에. 저번에 갔던 부강 한화공장에 또 갔다.

겨울나무를 보며 봄에 필 꽃을 생각하듯이 저 샤시도 나중엔 창문틀이 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원리에 사시는 할머니 목욕시켜드리다

오늘은 청원군 미원면 미원리에 사시는 할머니댁으로 목욕차를 몰았다.

저 문을 열고 장선생님과 같이 할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할머니는 내가 목욕을 시켜드리는 줄 아시고 기겁을 하시며 안 하신다고 하셨다.

웃으며 나는 바깥에 있는다고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바깥이 춥다며 방안 아랫목에 이불밑으로 들어가있으라고 하쎴다.

그 말씀이 어찌나 고맙던지...

사회적 기업인 휴먼 케어는 장기요양보험을 드신 노인분들을 대상으로 목욕을 해드리고 있다.

일당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어쨌든 보람차다.

난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목욕차까지 부축해드리거나 안거나 업어서 모셔오는 역할을 맡았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거동이 불편하신 노인분들 목욕은 아들딸이 하는게 맞다.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스스로 씻지 못하는 아기를 부모는 조건없이 씻겨준다.

똑같이 연로하셔서,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돌아가시기 전까지, 당신의 몸을 씻으실 힘이 없으신 부모님을 보살펴드리는 것은 당연히 자식의 몫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녹록치 않은 경우에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

목욕을 마치신 어르신들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수금요일마다 이 일을 하다가 전에 일하던 회사 부당해고 소송비용관련해서 차압이 들어온다면...

과연 선뜻 회사로 빼앗긴 돈을 되찾으러 갈 수 있을지 벌써부터 고민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교원대 박물관 지하에 나무 마루판을 깔다

트럭에 실려있는 것이 나무 마루판이다.

혼자서 바닥을 청소하는 일이라서 외로웠다.

여러명이서 하면 그래도 덜 단절된 느낌으로 일을 했을텐데...

특히 실내 인테리어 기술자 3명이 나만 청소하라고 해놓고 30분을 커피마시러 갔을 때는 정말 괴로웠다.

같이 청소하고 같이 휴식을 취하면 좋을텐데...

두레나 품앗이같이, 누가 돈을 더 받고 덜 받는 것도 없이, 모두가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청소할 때 먼지가 많이 날 게 뻔한데도 방진마스크를 달랬더니 업자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사오셔야겠다고 했더니 자신들도 먼지마시며 그냥 일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누가 먼지마시면서 일을 하냐고 말하며 쓰던 거라도 없냐고 물었다. 결국 바닥에 굴러다니는 걸 쓰고 일을 했다.

마대 자루에 담긴 쓰레기들, 습기조절제 통, 페인트통, 나무조각들, 합판 이런 것들이 내가 작업을 해서 나온 쓰레기였으면 그동안 정(?)도 들고 해서 버릴 때 시원섭섭한 맛이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하루동안 불려가서 쌓여있는 쓰레기를 그것도 혼자서 트럭에 싣고 이동해서 다시 내려놓는 일이 너무도 지겹고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우연이라도 교원대 박물관 지하에 들러서 변한 모습을 본다면 보람있을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브라질에 샤시를 보내다

청원군 부강리 한화제1공장에 갔다.

3개월 전에 갔다오고 오랜만이었다.

저 콘테이너가 브라질로 간단다.

브라질은 다음달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기후변화회담에서 프랑스와 함께 탄소를 절감하겠다고 솔선수

범하는 국가라고 들은거 같다.

또한 요즘 마약거래 갱들이 시내 거리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시민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

난 곳이라고도 들었다. 

브라질은 왜 샤시를 수입할까?

현대 건축물엔 왜 플라스틱 샤시가 들어갈까?

한옥에는 샤시대신 작은 나무틀에 한지를 붙여서 열고 닫을 텐데...

샤시를 다 싣고 나서 떨어진 낙엽을 청소(?)했다.

예쁘기도 하고 벌써 올해도 이만큼 지났구나하고 느꼈다.

내일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육거리 인력사무소에 6시15분까지 가서 기다리면?

일을 나간다면 어떤 일일까?

시국선언을 한 교사를 징계 안 한 경기도 교육감이 어떤 청문회 비슷한 자리에 소환된다고 방금 라디

오에서 들은 거 같다.

교육청에선 교육감에게 징계 명령을 내렸다는 거 같은데...

너무 한다.

하긴 부산 사격장 화재 사고도 너무 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