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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13
    8월 9일(3)
    yull
  2. 2006/08/13
    8월 4일
    yull
  3. 2006/08/13
    쓸쓸함
    yull
  4. 2006/08/13
    인식의 모서리
    yull
  5. 2006/08/13
    글쓰기의 시작(3)
    yull

8월 9일

또 다시 포항.
태양의 빛깔이 조금은 기울었다. 정신이 또렷하다.
이미 부검결과가 나왔는데도 어떤 발표도, 어떤 언론보도도 하지 않고 있다.


저들에게 치명적이어서이다. 그런것이다.
8시간을 노동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흙먼지가 안날리는 곳에서 점심을 먹게해달라는 것.
포스코가 설마 그 푼돈을 아끼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06년 건설 노동자가 요구하는 상식은 그토록 치명적인 요구이다.

그런데 노동자가 제대로 인간처럼 살겠다는 주장이 이 나라 정권에게 그리도 위험스러운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방패에 맞아 죽어야 했던. 꼭 그렇게 정해진 순서처럼 개죽음을 당할 수 밖에없는 이유는 정말 무엇일까.

대체인력 투입을 막기위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우연한 점거가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하늘같이 높은 기업주에게 밑바닥 건설노동자가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이 행동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연간 5조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며 이 나라 철강산업을 떠받치고 있다는 포스코에게 애초부터 건설노동자의 파업쯤은 별 대수롭지도 않은 거추장스러움이었을 뿐이었으리라.
점거와 파업을 압장서서 불법으로 매도하고 지역관공서들의  허접한 사명감을 조작하여 건설 노동자들을 '미친이익집단'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정권이다.  그래서 밥과 의약품을 끊어버리고 그 어이없음을 항의하는 노동자의 가족들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깨놓고 임신한 여성을 발로 짓밟은 광기가 전혀 '비정상적'이지 않았던 현실이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천금같은 아기가 유산되고 성실하게 지켜져왔던 46년의 생명이 한순간에 끝이났다.

그러나 이는 대추초등학교를 단 한시간만에 부수어내고 군대막사를 들판 한가운데 세워내어 할머니를 울분에 기절시키는 저 광기어린 어떤 '통념'의 시각에서 본다면, 지극히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뿐.

이 두가지의 상이한 '자연스러운 상식'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때, 한사람이 죽음을 항의하다가 또다시 100여명이 한꺼번에 머리가 깨져 실려가고 있어도, "하나의 우발적이고 안타까운 사고가 매우 부자연스럽게 발생했을 뿐!"이라는 새로운 통념은 또 저들에 의해 개발되고 있다.

영정의 검은 띠가 끔찍하도록 어색한 하중근을 추모한다는 것,
여기서 '추모'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대체 무엇을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서 반드시 해야만 했던 행동과 그 자연스러운 일상속에서 유독 그 만이 '나쁜 주술에라도  걸려서', 운명적인의 저주와 재앙의 제물이 되어 슬프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뜻인가.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저 폭악스러운 살인정권에게 있어서는 일상적인 '상식'이었을 뿐이다. 
하중근 열사의 울분이 그 스스로에게 꼭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밑바닥 노동자들 그 국민의 대다수가 생의 무거운 짐이 고통스럽다고 호소할때 그것은 '사회통합적인 노사관계'라는 환상에다 대고 요청하라는 노무현 정권은, 포스코가 2000억원이 넘는 손해배상액 청구서를 밑바닥 노동자의 어께위에 자연스럽게도 얹어놓는 것을 가볍게 묵인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미친듯이 그 항의하는 입을 틀어막으려 한다.
매일매일 내 머리통이 깨져나갈 것을 각오하며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집회에 나가야 한다.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 것들이 '자연스러운 상식'으로 통용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국민을 상대로 살인을 자행하는 정권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이제는 정말 끔직하지 않은가.

밤 9시가 되어 깜깜해졌다.
오늘 하루 말복 삼계탕 장사에 손해를 본 식당주인들이거나, 길 가다가 어이없이 방패와 곤봉 얻어맞은 민주노총 조끼를 입지 않은 포항시민들이 경찰앞에 몰려가 항의하고 있다.
무엇이 시민들을 저리도 분노케했는지 그 진상은 잘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포항 시민들'이라니 어쩌지도 못하고 허공에 소화기만 뿌려대며 고심하고 있는 전경의 들썩거림에 나는 조금 움츠려들었지만.  런닝셔츠바람의 한 아저씨는 맨 앞줄 젼경의 방패 아랫부분의 고무바킹이 없이 날카롭게 갈린 것을 직접 손으로 만지면서 호통을 치고 있다.
"이걸로 니네가 사람죽인 거 내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또 죽일려고 고무 빼고 나왔노! 엉?"
아이를 데리고 맨 앞을 떠날 줄 모르는 아줌마의 몸짓도 무척 매섭다.

누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모르게 갑자기 대오가 일어서 전경앞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물대포와 함께 정말 어이없게도 젓가락과 숟가락이 날아왔다. 포항경찰이 빠지고 서울에서 온 부대가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되자 나와 우리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시작했다. 상당한 거리를 정말로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 그동안 방송차는 빼앗겼고 지도부도 연행되었다.

서울이 아닌 지역의 집회는 확실히 그 지역 특유의 정서와 분위기가 충만해있는 것 같다.
서울에서야 늘 선동하는 사람들의 발언방식과 의례적인 수순이 정해져 있는...소위 '관료적'이라 표현해야 할까?...방식의 선동이 아니었다. 뭐랄까...좀더 '지역시민'이라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진심이 담긴 호소같은 것?..방송차의 선동은 줄곧 귀기울여 듣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상투적이지 않은 결연한 투쟁의지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답게 살겠다는 요구가 방패로 맞아죽어야 할만큼 잘못된 것입니까?"
"포항시민여러분이 두눈을 뜨고 똑바로 보아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어떻게 맞아죽는지 말입니다."
"누가 포항시민입니까? 바로 여기 있는 포스코 건설 노동자들이 포항시민아닙니까"

두 번의 무지막지한 침탈은 그 자리에서의 다소 거친 토론의 장을 만들기도 했다.
분노와 두려움에 상기된 아저씨들이 서로에게 거친 욕을 내뱉으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마치 우리의 후퇴가 옆에있는 동료의 탓이라는 듯. 진심은 그런게 아니겠지만 옆에서 보면 곧 멱살잡이 싸움이 날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지난번 4일 집회에서도 그랬다. 자신의 분노섞인 두려움은 곧 함께 맨 앞줄에 나서지 않는 동료들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 자신의 주저하는 발걸음을 다시 쟁겨보기도 하고...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거친 욕설같았다.

100여명이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그 중 두명이 중태라는 소식, 열 여섯명이 연행되어 이들이 석방될 때까지 형산 로타리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연좌를 하겠다는  또 다른 방송차위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서울로 오는 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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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


하중근의 영정 수십개가 시커먼 경찰병력 앞에 서있다.
작열하는 태양의 이글거림은 마치 울부짓음 같다. 정말 무더운 날씨다.
46살의 건설노동자. 영정의 그 검은 띠가 어색한 사진 속 얼굴.

"앞으로 안 나오이소! 뒤에서 뭐하고 서있노!"
"선배! 동지가 다치고 있지 않습니꺼. 앞으로 나오이소!"
그의 죽음은 동료들에게 분노와 함께 치떨리는 두려움이 되었다.

사람을 죽인 죄를 알고 있는 경찰이 쉽사리 진압을 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들은 앞으로 나서려다 멈칫하고 주저하다가는 다시 영정의 얼굴에 괴로워한다.

몸싸움으로 밀릴대로 밀어내, 정경차가 서있는 바리케이트 끝까지 대오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노는 가라앉을리 없었다. 설사 포스코 정문까지 가서 정리집회를 할 수 있었다 한들.


처음 바리케이트가 있던 곳부터 50미터 정도를 밀어냈다.
무덥고 힘들고 느리게 지속되는 싸움
단지 50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식의 겹겹을 넘어서야 했던가.
시퍼렇게 선 날갈린 방패앞에 서있는 본능적인 두려움.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면 내 머리통도 박살날 수 있다는 공포.
그러나 여전히 인정할 수 없는 영정속의 그 얼굴.
힘을 내어 함께 싸우지 않으면 싸우기 전 그 자리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벼랑 끝의 절망.
그러나 다시 내가 인간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희망.


포스코 정문 앞까지는 아직도 몇키로미터나 더 남아있다.
그러나 50미터의 전진은 너무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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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

쓸쓸하다.
정말 오랜만에 같이 이렇게 함께 있는데..

참 이상하다. 그의 존재가 가까이 있을수록 난 더 쓸쓸함이 가슴깊숙히부터 턱까지 차오른다.
우리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언제 어느때에는 가슴깊숙히에서부터 차오르는 포근함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다.
이제는 가까이 있을수록 더 아프다.

잘 지내고 있는거냐고...말로 다하지 못하는 복잡함을 말하고 싶다. 안부를 묻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보는 얼굴의 무미건조함이 말문을 막히게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또 시간은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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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모서리

내가 인식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가는 사고의 범위는 매우 단편적으로 분절되어 있다.
일상적으로 잡히는 집회와 거리 선전전, 그리고 대규모 커다란 대중적인 투쟁일정들 이것들은 어쨌튼 나를 구성하는 평범한 일상의 잔해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하는 문제란 다른 것이다.
비로서 내 머릿속 운동에 대한 사고는 마치 분업에 의해 지적인 생산수단의 총체성을 빼앗겨버린 프롤레타리아의 그것처럼 일면적이고 또 너무 일상적이어서 그 '한걸음의 진전'의 방법을 터득치 못하고 있었다.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
너무나 익숙한 문제여서였을까. 조직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무엇인가를 나로부터 기획해가는 뜨거움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회의를 통해 우리가 해나가야할 계획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 나의 그 한계적인 인식의 모서리 끝부분에서 한치 앞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때문에 당황스러워한다.

그 끝에서 멈춰버리는 각진 모서리들의 질감이 조금 아프다. 그 경계선 이후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지평의 의식들을 열어제낄 수 있을 것인가의 주저함과 동요, 그러나 새로이 생기는 욕심들.
그러나 그것은 또 적합한 열정일까?


운동은 분명 일정을 공유하고 내 인식이 스쳐지나간 흔적들을 맥락도 없이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운동의 무미건조함과 무력감을 관성처럼 답습해오던 어떤 조각에서 한치도 다르지 않은 통념일 뿐이다. 또한 나는 이제 그 통념만으로 나의 활동과 생활을 지속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고개를 젓는다.

 "환상과 기만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의 이론적 영역을 획득하는 것." 이라고 했다.
  2006년 하반기 투쟁은 분명히 '기획'이 존재해야 한다.
분절된 사고의 조각들의 그 모서리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투쟁을 기획하기 위한 총체성을 목표로 퍼즐을 맞춰가야한다.

대충대충 얼버무리는 인식의 파편들은 환상과 기만의 휘양찬란함일 뿐.
하나의 분명한 인식의 영역을 획득하고 싶다.
특히  대추리 도두리를 사수하는 우리의 지혜와 힘의 결집들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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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시작

쏟아지는 햇살만큼 강렬하게도 시렸던 아픔을 알아보고 나서야, 그리고 절망하며 흘려버리고 말았던 그 농도가 짙은 정념의 습성들을 기어코 어딘가에서 얽히게 하고 나서야.
난 비로서 어딘가에든 '기록'이 필요하고 또한 나 역시 그럭저럭 꾸며진 어떤 '기록'으로
남고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 그건 내 정신과 신체의 아픔이나 행복같은 것을 그냥 망각어딘가로 흘려보내기 싫은 욕구같은 것이리라.
 
난 아마 일기장보다 솔직하거나 적나라하게 몰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글들에 스며들게 될 이색적인 객관성을 당분간은 밀어내지 않겠다. 어떤것도 글을 쓰지말아야 할 문제가 되진 않는다.

어쨌튼 나는 이제 존재해왔던 내부적인 것이 아닌 외부적인 것들과 교통하고 소통하며  내 몸을 구성하는 유기물들을 새롭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분명 흩날리듯 떠다녔다 곧 사라질것만 갇은 나의 존재감을 변화시킬 것 같다.
그 변화로 나는 비로서 땅에 발을 내닫고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몸무게가 딛고 선 대지를 누르는 그만큼의 무게를 느끼며  결코 가볍게 흩어지려하지는 않겠지.

기록.
어차피 온전한 머릿속의 기억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면 얼마간의 위선이든 가식이든 적당히 포장할 수 있는 계기를 활용하여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든 어디에든 전달되기 위한 형태의 물질로 만들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왜 글을 써야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한 천만가지정도의 이유가 있다면 있을 것.

나의 글의 의미는 위안이거나 참지못하는 아픔이거나 혹은 그럴듯하고픈 겉멋, 혹은 마음을 다하는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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