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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그리고 꾸준한 한걸음을 계속 걸을 때,
미쳐 알수 없는 속도와 감각으로 어느순간 불쑥 와있는 것.
나의 '급소'를 규정지었던 그 뜨겁고 아름다운 열기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열기들을 (재)생성하기도, 한계짓기도, 질식시키기도, 비틀어 왜곡시키기도 했던
나와 가족들과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아주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변화'를 시도해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이 문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서히 '변화'되어와 여기까지 어떻게든 흘러흘러 온 것일 뿐이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지속할 수 없는 내 삶과 활동의 한계와 그녀들의 세상살이가 부딪쳐 충돌한 그저 또 한번의 갈등적 상황일 뿐일 수 있다.
따라서 나도 매번 반복되는 이 '나쁜방향'으로의 변화의 진행과정에서
선택을 하고 판단을 했다.
어쩌면 나의 그 '급소'를 전부걸고 가족들과의 관계변화를 시도해본 일은 최초일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오히려 지금 나의 변화적 행동들이 단지
매번 그래왔던 것같은 가볍고 얕은 봉합책략이 아니라,
나의 그 중핵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진전시켜낼 수 있는,
그로 인해 언니와 엄마, 동생의 세상살이도 변화될 수 있는
그런 묵직하고 뜨거운 어떤 것이었으면 좋겠다.
어리게도 밉고 미웠던 그녀들의 세상살이들을
마음깊이 담아내주는 것. 그러나 객관성을 잃지 않는 시선을 유지하는 것,
이해나 용서, 배려로 제한되지 않는
'공동체'로 적합하게 이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안하고 조직하는 것.
내 곁에 그녀들에게도 일종의 '운동'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내게 기대고 있는 그녀들의 요구라 이해한다.
깊은 터널, 혹은 나의 키를 훌쩍 넘어 출렁이는 심연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
이를 온전히 적합하게 내가 통과해낼 수 있다면
나는 좀더 '활동가' 다워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꼭 그렇게 믿는다.
두려움이 엄습해와 걱정이 쌓이고 쌓일때마다
이렇게 믿고 또 믿기로 했다.
그 길위에서,
새로이 찾고, 또 새로이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너무나도 간절히.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만히
잘
바라보는 것.
단지 그것에 몰두하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쉬운 길.
또는
가장 깊고 푸르게 다가갈 수 있는 길.
아주 가만히..
정말 잘...
바라보는 일
반짝반짝 빛나는 무엇을
오래도록 찾아내는 일
연습중..
돌이킬 수 없는
시간속을 걷는
창백해진 꿈을
차오르는 숨을
고통의 신음과
거짓의 소음을
버텨낼 수 있는
끝없는 믿음을
비난의 채찍과
멸시의 수갑을
외로움의 족쇄와
희망의 해체를
녹이 슨 열정과
망각의 권태를
이겨낼 수 있는
끝없는 용기를
소리없는 울음과
답이 없는 물음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조금 더 기다려줘
뜨겁게 타오를
내 마지막 남은 영혼을 기대해
영혼을 기대해
Promise Me!
-넬-
'절망'과 '걱정'에 대해 무력해지고 싶지 않다.
병원은
희망과 절망이 쉴새없이 뒤섞이고 있는 곳.
주사액들의 형형색색들처럼 환자들의 심경의 뒤섞임들이 오묘한 갈무리를 형성한다.
어쨌건 그 어떤 공간보다 한꺼풀은 분명히 침체된 공기들..
이 만연한 기운을 뚫고
적응을 하고나면,
사실 이 침체된 공기는 불안한 환자의 심리상태에 오히려 도움이되는 듯 하다.
엄마역시 그 수백만가지 상념들의 화학작용의 과정을 거쳐,
불안한 마음을 "병원공기"에 깊숙히 의지하고 있는 중인것 같다.
내 몸이 겪을 문제가 아니라고...
수술을 앞둔 그 불안스런 정신적 고통을 고스라니 내 어깨에 짐지우기를 거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적어도 마주친 이 '문제설정'에 능동적이어야 겠다는 생각이다.
후회없이..
얼마간 고통스럽겠지만,
어쨌건 이 불안한 상황 다음에 이어질 것은 반드시 '절망'만은 아닐것이다.
이는 분명 여러 가능성들 중 단지 하나일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은총이 가득한'느낌의 '평화'와 같은 위안도
그 뒤섞인채로 이어지는 고통 언저리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테니..
물론 최악의 절망...그 과정의 심연의 고통이 얼마나 숨막힐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갑자기 어리둥절해져 또 도망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상황의 낙관성역시 하나의 가능한 경로라면, 그것이 좋은 에너지가 될 수 있도록
기대와 희망을 키워나가는 방법.
즉 상황에 대한 불안함을 통제하는 방식에 대해
터득해야 할 것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절망과 걱정앞에 필요한 것은
'낙관주의'라기 보다는
주어진 문제적 상황에 대한
'적합한 인식' 그 자체인 듯 하다.
Beethven sonata No.23. 1st
내가 어떤 특정한 정념에 빠져있다는 것.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건 이것은 사실이다.
단 한순간도 정념에 빠져있지 않은 경우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상황에 대해 내가 골몰해있는 이유는
이 정념이란, 그토록이나 특별하게도, '사랑'이라부르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빠져있는 정념에 대해
객관성을 부여하고, 비평을 하며
그것으로부터 온전하게 빠져나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어느 한순간 나는 그 정념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생이 무던히도 지속되듯,
연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이 묵직하고 뜨거운 감정들에
나는 대부분 무방비상태로 내던져진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신비적인 환영"...
그리고 이 환상을 지속시켜가는 수많은 이유들..
이 모든 것들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진실로 모순적이다.
결국 그 환영은 과잉된 자기애의 일부일 뿐이고.
상대의 시각에서 보일법한 자신의 형상에 대한 사랑일 뿐이다.
나는 계속에서 내가 허우적대고 있는 이 감정의 이유들에 대해
묻고 따져보곤 했다.
다스리기가 버겁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
여기에는 논리적 근거와 이성적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대상의 본질적 진의 자체가 확인되지 않은 채, 이미 제멋대로 부풀려져서는
과잉된 기대와 환상을 증식시킨다.
그렇게도 어이없는 환영들..
이것들이 인식과 사고의 영역을 물들여가고 있다.
그 끈끈하고 짙은 색감의 액체가 흰색 무명천에 거침없이 번져가듯.
사고의 영역이 짙게 젖어들어간다.
때론 그 물질의 농도가 너무 진하게 엄습해와
가슴이 떨려오게된다.
정말 이상한 설레임...
쉽게 쉽게 웃어버리며 지나쳐보려 노력해도
결코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이유는
삶의 시간이
원래 그리도 엄격한 규칙아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쨌건 내가 '정념'이라 부르는 이것으로부터 온전하게 해방되어
그 '사랑스런' 어떤 대상을 알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려는..
그런 노력의 무망함을 인정하기로 했다.
어쨌건 정념에 빠진다는 것은 혹은 특정 대상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 발휘되고 있는 현상은
연속적인 시간에 있어 "비가역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이제 '사랑'에 빠지기 이전단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과잉된 정념이란 그렇게 결과할 것이다.
나는 분명 지금의 이 감정을 일정하게 경유하면서,
어디로든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대상에 대한 독점적인 소유욕을 극한까지 몰아가
억지스럽게도 그 모든관계들로부터 우위에 있는
"연애관계"를 특권화하는 것으로 결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상에 대한 과잉된 기대와 환상이
그 어느 순간 그 '진의여부'가 드러나게 되어
별안간 모든 환영을 산산조각내고는
허탈하게 뒤돌아서
뚜벅뚜벅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
그리고 만약, 그런 방식들이 아닐 수 있다면.
콜론타이의 "승화된 에로스" 를 배우기 위해
나는 다시 한번 더욱 진지하게 "사랑의 학교"에 몰두하고 있게 될 수도 있다.
그 어떤 방향이 되었건 이 '정념'은 이제 그 다음 수순으로서 어떤 '결론'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결론이 났었건,
대상에 대한 열정과 뜨거움은 늘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다만, 너무 과잉되었거나 너무 과소되었던 나의 서투름들이
어느날 일기장의 때늦은 후회와 반성으로 기록될 뿐이다.
문득 특정 대상에 대한 '사랑'들은
언제나 엇비슷하게 닮아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피부와 머리로 느꼈던 그 감정의 질감들은 말이다.
이에 대해..
나는 때로는 우매하게,
때로는 지혜롭게,
그렇게 정념은 나의 성장곡선과 함께 '겪어져"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충분히 지혜로운가?
누군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베토벤의 음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음악을 들음으로써 정념의 '부적합성'을 '적합함'으로 승화시킨다고 한다.
대상에 대한 "신비적 환영"의 무게감으로 인해 아득해지는 아픔에 묘하게 행복해지면서도,
그것으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와 이 "비가역적인 사건"을 수습하려 애쓰는 "이성적" 노력...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사실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 아닐까?
둘 사이의 모호한 경계자체가 혹시 부적합한 것은 아닐까?
무엇이 적합하고 또 그렇지 않은지를 나누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정념에 빠져들어가는 나의 사유가
반드시 '나쁜방향'으로 갈 것이라며
무작정 밀어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정념의 외부적 비판이 불가능하다면 말이다.
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노력해야 할 것은, (아니 적어도 내가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정념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정념을 통해 내 사고가 '나쁜방향'으로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는지..
다시말해 배타적인 소유욕으로부터 형성되는 관계가 아닌
그 자체로 자율적인 충만함이 아름다운 어떤 방향을 찾아내는 것..
이 향방은 사실 너무도 모호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성찰과 운동을 통해 도달하고싶은
어떤 목적지의 향방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역시 '음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한다.
베토벤 소나타의 음율이 밝히고자 하는 실체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악보에 펼져져 있는 이 음표들의 존재이유는
정념으로부터 빠져나와 "현실적"으로 살아가라는 일종의 " 이성적" 논증의 우위에서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을 정념의 그 고통 외부에서 주입하여
당사자의 허한 마음을 위로나 해주는 역할에 있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비가역적 정념들의 분명한 물질성을 분명히 인정하고 존중하며,
아니, 심지어는 그것들의 깊은 무게감, 그것들이 선사하는 고통과 상념에 대해
본격적으로,
가장 중심적으로,
논의를 진전시켜보자는 취지인 것 같다.
따라서
음악이 우리에게 필요한 까닭은
정념을 현실의 삶으로부터 떼어내어
부차화시키기 위한 '도피'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정념들에 관해,
무엇을 전유해야 하고, 또 무엇을 버려야하는지를 인식하고
그 정념의 '긍정성'을 보다 깊이 보듬을 수 있는
어떤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는 수단에 있는 것이다.
새롭게 열정을 전유하여
그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갈무리된 힘으로
그 대상에 한정되지 않는 다수의 것들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이성'과 '감성'의 경계라는 모호한 통념으로부터 해방되어
적합한 정념 혹은 이데올로기 내부에서 숨쉴 수 있다면..
다만 그 과정에서 버려내야 할 부적합한 모순과 통념만이 있을 뿐이라면,.,.
나는 훨씬 편안하게 지금의 이 상념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베토벤의 '소리들'에 가만히 의지해보면
문제의 해답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베토벤의 소리는 부동적인 고독 한가운데 빠져 있는 것 같지만,
더없이 즐겁고 맑다. 때로는 도발적인 경쾌함으로 모든 침잠을 상쇄한다.
그것은 마치 지침없는 정진과 열의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지만, 전혀 맹목적이거나 당위적이지 않다.
바로 그런 것..
온전한 자율성, 가장 안정된 이성과 감정의 배분 질량을 머금고 있는 그런 인상들..
바로 이런 요소들이
우리에게 요동치는 정념의 문제에 대한
적합한 해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런것들이 나의 어리고 어설픈 정념들을
어딘가로 미끄러져버리지 않게
조용히 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꾸 음악을 듣게된다...
Beethven sonata No.23 2nd & 3rd
생각이 너무 복잡하게 꼬여있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엄마의 우울증은 자꾸만 내 가슴을 무너뜨린다.
가슴이 쓰리고 아파와 겁이난다.
내가 엄마의 우울증 그 한가운데 몰입해 있는 기분이다.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엄마의 고통스런 기분은 특히 딸들에게 고스란이 전달된다.
그냥, 당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된다.
그녀의 외로운 슬픔을
이유없이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난 그녀에게 고통의 진원지가 될 수 있을 지언정,
치유의 존재는 되지 못한다.
내 존재자체가 그녀의 슬픈 외로움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정말 못된 딸년들...
그럴땐, 난 엄마와 똑같이 외로워지지만..
내가 그녀의 외로움을 온전히 알 수 있다해도 ,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외로워진다.
내가 슬프고 외로울 때
그녀도 꼭 이런 기분일까..
침을 삼키면 쓴 맛이 느껴질 정도..
그냥 그정도로 조금 외롭다.
엄마도
그냥 이런 정도라면,
그냥 조금 견디어 주었으면 한다.
슬픔이나 외로움을
삶을 채우는
일종의 잔잔함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냥 그정도의 쓴 맛으로 꿀꺽 삼킬 수 있는...
그런 정도면
거뜬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어차피 누구나 그런것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실해 보이는 외모에 시니컬한 목소리를 가졌던 그 아이는
항상 변치않는 심정으로 운동에 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벌써 육개월이나 훨씬 넘었나?
병특 취직에 성공한 그 아이가 사무실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리고나서
지금껏 안부전화 한통을 못했었나보다.
아직 회사인지, 특유의 성실함에 더해진 엄격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전화를 받는 그 아이에게
나는 요즘 전화연락이 끊겼다는 또 다른 한 아이의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잘 지내느냐는 물음과 그렇다는 대답은 물 흐르듯 사소하게 지나쳐간 듯 하다.
동기들이나 활동했던 거의 모든 이들의 전화는 받지 않는다는 또 다른 그 아이는
낯선 나의 번호에 별 생각없이 전화를 받았던 듯 하다.
나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변한 음성에서 굳어진 그 애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난 3월 황새울 들에서 포크레인 앞에 버티고 싸우다 연행된 건에 대한 재판이 내일인데,
도통 연락이 안되었던 아이였다.
어찌할 꺼냐는 물음에 알아서 벌금을 마련하겠다는 대답이 오고갔다.
왜 그걸 혼자 책임지냐..왜 연락을 끊은 거냐...사람들이 걱정하던데 무슨일이냐...질문공세에
미처 준비되지 않은 대답들이 얼버무려졌다.
전화를 빨리 끊고 싶어하는 그 애의 민망함이 자꾸만 눈에 보여 되려 내가 더 미안해졌다.
지레 서둘러 전화를 끊고는 가만히 궁금해졌다.
전화를 끊고 그 아이는 무슨생각을 했을까?
움찔하게 들켜버린 '은둔생활'을 돌아보며 다시한 번 우울해졌을까.
아니면 이제부터 못보던 새 번호의 전화는 절대 받지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까.
"무슨 일 있음 혼자서 고민하지 말고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하자"
대충 이런식의 문짜를 보낼까하다가 말아버렸다. 지키지도 못할 꺼면서...
생각해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와 함께 서 있다.
갑작스러운 용무를 위한 전화통화..
그리고 물흐르듯 사소한 안부인사의 가벼움으로...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있던 그/녀들에게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떤 형상일까.
운동과 활동의 흐릿한 윤곽을
그/녀들은 일상의 탄탄한 순환 속에서 어떤 심정으로 찾고들 있을까.
성실하고 시니컬했던 그 아이는 언젠가 함께 마주할 술 자리에서
왜 운동의 논리가 자신의 지금을 설득할 수 없는가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물을 지도 모르겠다.
잠적을 탄 그 아이는 진정한 미안함으로 어느 날 10만원짜리 회원이 될 지도 모르겠다.
쓸데없이 비관적인...
이러한 결과들이 도래할 것에 대해
괜히 마음이 쓰이는 이유는
그 아이들을 믿지 못해서가 결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그들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할 치열함으로 오늘도 운동과 활동을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다만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의 '어색함'과 '불편함'을 곧 회피해버릴 나의 모습을,
그리고 한 걸음씩 어디론가 걷고 있는 그들의 발걸음을 멈춰세울 수 있는
나의 자신있는 '대안'이나 '전망'이 없다는 사실을.
그냥 잘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답도 없이
걱정을 한다...
직업이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만들고,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자기계발을 하고, 좀더 권위와 명예, 부를 얻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그/녀들의 삶들,
이러한 길들의 목적과 향방이 어디인지는 사고할 필요가 별로 없다.
목적에 대한 사고하고자 하는 경계지점에 그/녀가 도달하자마자 따스하고 안락함을 담지한 수많은 논리적 내용의 차단벽들이 그/녀를 향해 작동하기 시작하니 말이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만들어 포근한 안식처를 마련하는 일, 그 안식처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일...그래서 풍요로운 휴가를 꿈꾸는 일.
아프간 피랍과 이랜드 투쟁의 의미가 그/녀들의 치열한 일상을 잠시나마 멈춰세울 수 있을까..
우리의 존재는 무엇일까
'직장'이라는 공간에서의 공적인 생활이라는 경계선이 그/녀의 노동을 좀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방책임을 비판하는 우리에게 일과 생활이란 무엇일까..그리고 휴가란 또 무엇일까..
학생회, 동아리적인 활동이라는 비난, '정상적인 어떤 궤도'에 도달하지 못하는 나약한 도피자들의 집단이라는 비웃음..
바로 당신들이 알지못하는 그 각자의 삶의 향방과 목적을 가늠하고, 그 길로 매진하는 당신의 목적과 향방을 결정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그렇게 우리의 존재감을 말하는 것은 너무 과도한 대답일까.
따라서 나와 우리의 '일과 노동'이란 어떤 특정한 경계선 안에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의 구분을 통해 통제되고 관리되는 삶의 양식과 일상의 구성과는 전혀 다른 질과 구성요소로 채워지는 일상.
일은 곧 생활이라는 말로는 채워질 수 없는 어떤 난감한 영역을 발견한다.
잠시 쉬기위해 활동의 시공간을 떠났을때, 나의 존재의 이유와 삶의 방식은 현실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어 붕붕이 떠다니고 있는 한마디의 관념적 단어 하나가 되어버린 것 같다.
대중들의 삶의 조건의 문제를 인식하는 일과 또한 그것이 엄청난 힘과 내용적 근거의 풍부함을 담지하고 있는 그것(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나와 우리의 존재의 객관적인 조건으로 사고한다면,
나는 다시 내일부터 분명하게 사무실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게 되겠지..
활동가로 살아가는 일상이란
그래서 대중들의 삶과 생활의 굴레를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둘러싼 삶과 생활의 조건에 대해 명확하고 분명하게 정리해낼 수 있을 정도로.
사뿐하고 가뿐하게 그 경계의 영역들을 넘나들수 있을 정도로,
뜨겁고, 가벼우며, 드넓고, 또한 깊어져야 한다.
경계선을 훌쩍 훌쩍 넘으면서 어떤 방향의 '지평'을 만드는 일에는
어쨌거나 훨씬 더 많은 열정어린 몸짓과 노래가 필요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경계선의 첨예한 대립지점으로부터도 훌쩍 떠나 어떤 형상과 모습으로 내가 존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잘 볼 수도 있어야 한다.
나의 여행은
그 곳을 비틀비틀 걷고 있는,
아니 너무 열중해서 걷고 있는,
아니 너무 욕심 많게 걷다가 지치고 있는,
아니 어딘가 비틀려 꼬여 괴로워하고 있는,
어쩌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어쩔 줄 몰라 두리번 거리고 있는..
이 모든 내 모습과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들의
진상과
맥락과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일주일 동안의 숨죽인 휴가를 마치고..
다시 보송보송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훨씬 더 많이 건강하고, 강해져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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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쇄투쟁... 그런 말은 좀... 아시겠지만, 옥쇄라는 것이 일본군들이 천황을 위해 옥이 부숴져 가루가 되듯 싸우자는 얘기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런 말을 투쟁 현장에서 쓰게 된 거죠? 궁금하네용...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