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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는다

Beethven sonata No.23. 1st

 

  

내가 어떤 특정한 정념에 빠져있다는 것.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건 이것은 사실이다.

 

단 한순간도 정념에 빠져있지 않은 경우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상황에 대해 내가 골몰해있는 이유는  

 이 정념이란, 그토록이나 특별하게도, '사랑'이라부르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빠져있는 정념에 대해
객관성을 부여하고, 비평을 하며

그것으로부터 온전하게 빠져나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어느 한순간 나는 그 정념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생이 무던히도 지속되듯,

연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이 묵직하고 뜨거운 감정들에

나는 대부분 무방비상태로 내던져진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신비적인 환영"...

그리고 이 환상을 지속시켜가는 수많은 이유들..

이 모든 것들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진실로 모순적이다.

결국 그 환영은 과잉된 자기애의 일부일 뿐이고.
상대의 시각에서 보일법한 자신의 형상에 대한 사랑일 뿐이다.

 

나는 계속에서 내가 허우적대고 있는 이 감정의 이유들에 대해

묻고 따져보곤 했다.

 

다스리기가 버겁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
여기에는 논리적 근거와 이성적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대상의 본질적 진의 자체가 확인되지 않은 채, 이미 제멋대로 부풀려져서는  

과잉된 기대와 환상을 증식시킨다.

 

그렇게도 어이없는 환영들..

이것들이 인식과 사고의 영역을 물들여가고 있다.  

그 끈끈하고 짙은 색감의 액체가 흰색 무명천에 거침없이 번져가듯.
사고의 영역이 짙게 젖어들어간다.

때론 그 물질의 농도가 너무 진하게 엄습해와
가슴이 떨려오게된다.
정말 이상한 설레임...

쉽게 쉽게 웃어버리며 지나쳐보려 노력해도

결코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이유는

삶의 시간이

원래 그리도 엄격한 규칙아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쨌건 내가 '정념'이라 부르는 이것으로부터 온전하게 해방되어
그 '사랑스런' 어떤 대상을 알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려는..

그런 노력의 무망함을 인정하기로 했다.

 

어쨌건 정념에 빠진다는 것은 혹은 특정 대상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 발휘되고 있는 현상은 
연속적인 시간에 있어 "비가역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이제 '사랑'에 빠지기 이전단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과잉된 정념이란 그렇게 결과할 것이다.
나는 분명 지금의 이  감정을 일정하게 경유하면서,

어디로든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대상에 대한 독점적인 소유욕을 극한까지 몰아가

억지스럽게도  그 모든관계들로부터 우위에 있는

"연애관계"를 특권화하는 것으로 결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상에 대한 과잉된 기대와 환상이

그 어느 순간 그 '진의여부'가 드러나게 되어

별안간 모든 환영을 산산조각내고는

허탈하게 뒤돌아서

뚜벅뚜벅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

 

그리고 만약, 그런 방식들이  아닐 수 있다면.

콜론타이의 "승화된 에로스" 를  배우기 위해

나는 다시 한번 더욱 진지하게 "사랑의 학교"에 몰두하고 있게 될 수도 있다.


그 어떤 방향이 되었건  이 '정념'은 이제 그 다음 수순으로서  어떤 '결론'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결론이 났었건,
대상에 대한 열정과 뜨거움은 늘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다만, 너무 과잉되었거나 너무 과소되었던 나의 서투름들이

어느날 일기장의 때늦은 후회와 반성으로 기록될 뿐이다.

 
문득  특정 대상에 대한 '사랑'들은 

언제나 엇비슷하게 닮아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피부와 머리로 느꼈던 그 감정의 질감들은 말이다.

 

이에 대해..

나는 때로는 우매하게,

 때로는 지혜롭게,

그렇게 정념은 나의 성장곡선과 함께 '겪어져"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충분히 지혜로운가?


누군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베토벤의 음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음악을 들음으로써 정념의 '부적합성'을 '적합함'으로 승화시킨다고 한다.

대상에 대한 "신비적 환영"의 무게감으로 인해  아득해지는 아픔에 묘하게 행복해지면서도,

그것으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와 이 "비가역적인 사건"을 수습하려 애쓰는 "이성적" 노력...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사실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 아닐까?
둘 사이의 모호한 경계자체가 혹시 부적합한 것은 아닐까? 

 

무엇이 적합하고 또 그렇지 않은지를 나누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정념에 빠져들어가는 나의 사유가

 반드시 '나쁜방향'으로 갈 것이라며

무작정 밀어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정념의 외부적 비판이 불가능하다면 말이다.

 

 

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노력해야 할 것은, (아니 적어도  내가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정념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정념을 통해 내 사고가  '나쁜방향'으로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는지..

 

다시말해 배타적인 소유욕으로부터 형성되는 관계가 아닌

그 자체로 자율적인 충만함이 아름다운 어떤 방향을 찾아내는 것..

 

이 향방은 사실 너무도 모호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성찰과 운동을 통해 도달하고싶은

어떤 목적지의 향방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역시 '음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한다.  

베토벤 소나타의 음율이 밝히고자 하는 실체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악보에 펼져져 있는 이 음표들의 존재이유는

정념으로부터 빠져나와 "현실적"으로 살아가라는 일종의 " 이성적" 논증의 우위에서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을 정념의 그 고통 외부에서 주입하여

당사자의 허한 마음을 위로나 해주는 역할에  있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비가역적 정념들의 분명한 물질성을 분명히 인정하고 존중하며,

아니, 심지어는 그것들의 깊은 무게감, 그것들이 선사하는 고통과 상념에 대해

본격적으로,

가장 중심적으로,

논의를 진전시켜보자는 취지인 것 같다.

 

따라서

음악이 우리에게 필요한 까닭은 
정념을 현실의 삶으로부터 떼어내어 

부차화시키기 위한 '도피'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정념들에 관해,

무엇을 전유해야 하고, 또 무엇을 버려야하는지를 인식하고

그 정념의 '긍정성'을 보다 깊이 보듬을 수 있는  

어떤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는 수단에 있는 것이다.

 

새롭게 열정을  전유하여

그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갈무리된 힘으로

그 대상에 한정되지 않는 다수의 것들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이성'과 '감성'의 경계라는 모호한 통념으로부터 해방되어
적합한 정념 혹은 이데올로기 내부에서 숨쉴 수 있다면..

다만 그 과정에서 버려내야 할 부적합한 모순과 통념만이 있을 뿐이라면,.,.

나는 훨씬 편안하게 지금의 이 상념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베토벤의 '소리들'에 가만히 의지해보면
문제의 해답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베토벤의 소리는 부동적인 고독 한가운데 빠져 있는 것 같지만,
더없이 즐겁고 맑다. 때로는 도발적인 경쾌함으로 모든 침잠을 상쇄한다.
그것은 마치 지침없는 정진과 열의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지만,  전혀 맹목적이거나 당위적이지 않다.

 

바로 그런 것..
온전한 자율성, 가장 안정된 이성과 감정의 배분 질량을 머금고 있는 그런 인상들..

바로 이런 요소들이

우리에게  요동치는 정념의 문제에 대한

적합한 해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런것들이 나의 어리고 어설픈 정념들을

어딘가로 미끄러져버리지 않게

조용히 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꾸 음악을 듣게된다...

 



Beethven sonata No.23 2nd & 3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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