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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0/31
    까뜨린느 브레야의 <팻걸>
    양이
  2. 2004/10/31
    팻 걸(Fat Girl)
    양이

까뜨린느 브레야의 <팻걸>

가부장제의 터널에서 출발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까뜨린느 브레야의 <팻걸> 김윤은미 기자 2004-08-22 20:34:19 <기사를 보고 영화를 보시면 재미가 덜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까뜨린느 브레야의 <팻걸>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이 소녀들의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두 소녀가 처음으로 성경험을 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남자의 첫 경험이 떼내야 할 ‘총각 딱지’를 뗀다는 발판 같은 지점이라면, 소녀의 첫 경험은 남성중심적인 현실이라는 끝없는 터널로 들어가서 욕망을 추구해야 하는 불안한 과정임을 예고한다. 영화 초반은 약간 불안하면서도 도로를 그럭저럭 따라가는 초보자의 자전거 바퀴처럼 흐른다. 여름 별장으로 휴가를 온 두 자매, 엘레나와 아나이스. 이들은 ‘첫 경험’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논쟁을 벌인다. 인형처럼 예쁜 언니 엘레나는 첫 섹스를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섹스는 진정한 사랑이 보증되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단 하나뿐인 처녀성을 바치는 행위다. 반면 주인공인 뚱뚱하고 조숙한 동생 아나이스는 첫 섹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거짓인지를 깨닫게 될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거짓임이 판명 났을 때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아나이스의 논리. 언니 엘레나는 성공적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여기에 두 소녀의 서로에 대한 애증 어린 심리가 대조되면서 흥미진진하다. "만약 내가 꿈꿀 상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살았든 죽었든 남자든 시체든 짐승이든 상관없는데…." 수영장을 오가며 나무 막대와 철제 막대에 키스하면서, 막대기들을 두 남자라고 상상하고 역할극을 하는 아나이스는 추해 보일 정도로 많이 먹는다. “남자들이 너를 알기도 전에 도망갈 걸”이라고 비꼬는 언니의 말처럼 아나이스는 현실적으로 연애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때문에 그녀의 좌절감은 심각하다. 아나이스는 모든 여성들이 되고 싶어하는 모델 같은 언니를 어쩔 수 없이 따라 하지만, 절대로 언니와는 같아질 수 없다. 엘레나는 이런 동생을 경멸하면서도 자신의 연애에 필요한 도구로 이용하며, 때로는 그녀를 다정하게 포옹한다. 그러나 감독은 아나이스를 좌절감 때문에 답답한 캐릭터로 만들지 않는다. 이 점은 <팻걸>이 뚱뚱한 여자를 스테레오타입으로 다룬 것이 아닌가 라는 혐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한다. 아나이스는 자기 나름대로 욕망에 충실하다. 그리고 아나이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얼마나 조숙한가. 여자는 경험하면 할수록 더욱 새로워진다고, 여자는 비누가 아니기에 섹스를 아무리 해도 닳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나무 막대에 키스하는 아나이스의 모습은 기묘한 매력을 풍긴다. 상상에서나 성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소녀의 고독하면서도 에너제틱한 심리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부터 아나이스가 중얼거리는, “내 심장을 창문에 걸어놓아서, 까마귀가 그걸 쫀다면 고통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라는 노래는 감독 까뜨린느 브레야가 10대에 썼던 가사다. 아나이스는 실제로 매력적인 언니와 10대를 보낸 감독의 심리가 반영된 자전적인 캐릭터다. 아나이스의 괴로움은 같은 방을 쓰는 언니 엘레나가 저쪽 침대에서 만난 지 5분만에 유혹하는 데 성공한 한 남자와 첫 경험을 치르는 소리를 들을 때 최고에 달한다. 그러나 언니 엘레나 역시 순탄하게 첫 경험을 치르는 것은 아니다. 엘레나의 첫 경험은 섹스를 원하는 남자가 불안해하는 여자를 어떻게든 달래서 소위 ‘따먹기’에 이르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섹스가 끝나도 나를 사랑할 건가요?”라고 묻는 엘레나를 향해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끝나도 사랑할 거야”라고 말하는 남자의 대답은, 감독이 첫 경험의 기만적인 속성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엘레나는 섹스를 요구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울어버리고, 아나이스는 엘레나에 대한 복잡한 심경과 초라한 자기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어버린다. 엘레나가 받은 약혼반지가 실은 남자가 어머니에게 훔쳐왔다는 사실이 탄로 나면서 영화는 후반부로 접어든다. 화가 난 엄마는 두 딸을 데리고 파리로 올라간다. 이제 영화는 초보자의 자전거 바퀴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사고가 날 것처럼 고속도로를 불안하게 질주하는 그녀들이 탄 자동차 그 자체가 된다. 엘레나는 울먹거리고 엄마는 화가 난 심리를 대변하듯 마구 속도를 내며 아나이스는 뒷자리에서 계속 과자를 먹는다. 세 명의 여자가 유지하는 긴장된 분위기는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여성의 심리 상태를 감독이 능숙하게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의 백미다. 남성의 첫 경험과는 달리 소녀의 대담한 첫 경험은 아무도 환영하지 않으며, 그녀의 신체는 통제를 받는다. 그래서 세 명의 여자는 긴장된 분위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첫 경험에 대한 통제는 도로를 질주하며, 감히 남자들이 운전하는 트럭을 추월하는 세 명의 여자가 탄 자동차가 범죄의 표적이 된 상황으로 은유 된다. 그리고 세 사람은 실로 충격적인 결말을 맞는다. 이 영화의 원제는 ‘내 누이에게’다. 까뜨린느 브레야의 영화는 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한데 <팻걸> 역시 다소 그렇다. 좀 비약하면 어느 영화 평론가의 평처럼 이나이스의 첫 경험이 강간으로 시작됐기에 “뚱뚱한 여자 두 번 죽이는 영화”라는 신랄한 평도 가능할 테고, 원제목처럼 사랑과 섹스가 같아야 한다고 믿는 순진한 언니 엘레나에게 이나이스가 보낸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볼 수도 있다. 혹은 강간의 경험에서도 살아남은 도발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소녀의 성장기로 읽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읽어내든지 간에 영화가 여성의 신체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이성애적 성 각본과 폭력의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는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장점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에 대한 여성의 호기심과 실험, 쾌락은 이처럼 끝없는 터널 같은 답답한 현실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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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 걸(Fat Girl)

소녀들의 결말 - 팻 걸(Fat Girl) 현실의 것과 너무도 닮아서 현기증마저 느끼게 하는 고통에는 눈을 감아버리기 일쑤다. 그것이야말로 '날것'의 고통. 어떤 것은 보며 공감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지언정, 어떤 것은 그 생생한 고통을 함께 느끼며 몸서리를 치게 된다. 그 현실감으로 치자면 활자보다는 영상이 한 수 위라서, 내가 영화를 고르는 기준들 중 중요한 것은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웃으며 잊어버릴 수 있는 영화, 였다. 그런 내게 딱 한 영화관에서만 상영하는 팻걸을 보러 종로까지 간 것은 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종로까지 가는 오랜 걸음 동안에는, 언제 또 이런 영화를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조바심도 작동했을 터다. 그 언제 또 '실제로' 비만한 여성의 이야기가 나오는 이런 영화를 볼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영화의 신데렐라 스토리도 구원하려 하지 않는, 그야말로 비만한 여성의 이야기를 우리가 그 언제 볼 수 있겠는가? 누가 이런 '시각적 쾌감을 신경쓰지 않는' 영화를 또 만들 것인가? 글로나마 간략히 전하는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두 자매 아나이스와 엘레나는 가족과 함께 교외의 별장으로 휴가를 왔다. 엘레나는 가녀린 몸을 가진 당찬 15살 소녀이고, 아나이스는 비만한 몸 을 가진 12살 소녀이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 다니며 - 정확히 말하면 아나이스가 엘레나를 쫓아다닌다 - 서로에게 애증의 감정을 느낀다. 엘레나는 휴양지의 까페에서 한 이탈리아 남자를 만나 사귀게 되지만 그 남자는 처녀인 엘레나와 성관계를 가진 후에 연락을 끊어버린다. 일 중독인 아버지는 먼저 회사로 가 버리고, 엉망이 된 기분의 세 모녀는 자동차로 귀경길에 오르게 된다. 운전대를 잡은 어머니가 피곤해서 잠시 휴게실에서 자는 동안, 괴한이 나타나 엘레나와 어머니를 죽이고 아나이스를 강간한다. 숲속에 버려진 아나이스가 경찰에 의해 발견되면서 영화가 끝나게 된다. 아나이스만의, 아나이스의 캐릭터는 넘겨짚어진다. 사실상 뚱뚱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여성들의 캐릭터는 넘겨짚어진다. 외모상의 콤플렉스 때문에 상상할 수 없을만큼 소심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털털하고 수더분한 성격일 것이라고 넘겨짚어진다. 혹은 강요당한다. 이러한 넘겨짚기는 영상에서 움직이는 주인공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영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아나이스는 관객의 상상 혹은 기대와는 한참이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아나이스가 서슴없이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드러내며 수영장에서 혼자 연극을 할 때 - 수영장 이 쪽과 저 쪽에 있는 구조물을 옮겨다니며 자신을 둘러싼 두 상대라고 생각하고 가상의 상황을 만들어 즐길 때 -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관객의 생뚱맞은 웃음은 말 그대로 '일반' 관객이 아나이스와 같은 여성들의 성적 판타지에 대해 얼마나 신경조차 쓰지 않아왔는가, 얼마나 익숙하지 않고 무지하기까지 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나이스가 자신의 외로움과 권태로움을 담은 가사로 노래를 할 때 관객들이 큭큭 웃는 현상(사실 팻걸 관객들의 웃음은 하나의 현상이었다.)에 가서는 나는 좀 얼이 빠져 버렸다. 해변에 우두커니 앉아 노래를 하는 모습은 익숙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웃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나이스가 아니라 엘레나가 수영복을 입고 해변에 퍼질러 앉아 노래를 하고 있었다면 그것 또한 코메디였을까. 나는 실제 생활에서의 비만한 여성들이 겪어내는 비웃음들과 똑같은 수위로 그 관객들의 웃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녀들이 무엇을 하건 간에 그녀들의 모든 행동이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몸소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상은 관객의 웃음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은 채 꿋꿋이 잘 흘러갔다. 영상에서 보이는 아나이스의 캐릭터는 절대로 스테레오 타입의 덫에 걸리지 않았다. 두 아름다운 모녀가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간 옷가게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들어온 아나이스가 고심 끝에 고른 옷은 엘레나와 모양이 같은 것이었는데, 엘레나는 '따라하지 마!'라고 외친다. 아나이스는 부들부들 떨며 이야기하는 언니를 보며 '따라한 거 아닌데?'라고 말해준다. 그녀는 언니를 닮기를 원하지 않는다. 언니의 낭만적인 성적 판타지 - '첫경험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해' - 에도 동감하지 않는다. 아나이스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첫경험을 하게 되면, 이젠 더 이상 처녀가 아닌 자신을 떠나가 버리는 상대 때문에 마음이 아프게 되니까 첫경험은 그저 아무하고나 치루어야 해'라고 말한다. 언니 엘레나가 '너는 나랑 닮은 게 하나도 없어. 그래서 미워.'라고 말하면 '언니도 나랑 닮은 게 하나도 없어서 미워.'라고 말하는 아이가 아나이스다. 영화 초반부에서 아나이스의 행동을 코메디로 받아들인 사람은, 혹은 그냥 터져나오던 웃음에 자기 자신도 당혹해하던 사람들은 점점 예상 밖으로 흘러가는 아나이스의 캐릭터 때문에 더더욱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시선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씬이라면 언니와 언니의 남자 애인이 첫 섹스를 하는 과정을 아나이스가 몰래 훔쳐보는 장면이다. (이들은 한 방을 쓴다) 아나이스는 어떤 감정도 없는 그저 관찰의 시선으로 그 둘을 응시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코메디가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엘레나와 이 남자의 실랑이 부분을 뽑을 것이다. 처녀인 엘레나와 섹스를 하기 위해 그녀를 얼르고 협박하며 절박히 매달리는 이 남자의 꼴이란 정말이지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의 코메디다.) 이 씬을 통과하면서, 아나이스의 시선이 줄곧 이런 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절대 그 행위 자체에 들어가지 않은 채 외부에서 차분히 응시하는 식이다. 그것은 배제 당해서일수도 있고 스스로 걸어나와서일수도 있다.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아나이스의 시선은 영화 전반에 걸쳐 현상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지게 된다. 언니 엘레나가 말하는, 소녀들의 세계에서 지배적인 '사랑'이라는 단어에 거리를 두고 보게 되는 것도 아나이스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아나이스의 시선은 가족 이데올로기의 연약한 껍데기를 허상으로 보이게 만든다. 아나이스가 말없이 수북한 음식을 집어먹으며 예의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하는 그녀의 가족은 허술히 고여진 사금파리처럼 흔들리고 있다. 비참한 결말은 어디에서든 암시된다. 이 가족의 진실은 역시 또 다른 외부자인 엘레나의 남자애인이 방문했을 때도 여실히 드러난다. 사교성이 좋은 어머니의 말을 자꾸만 막으며 창피해하는 아버지는 그녀에게 어떤 존중감도 보이지 않고, 엘레나와 가족들은 자신의 남자애인 앞에서 동생 아나이스의 식습관을 경멸하며 모욕한다. 이 은밀하지만 첨예한 반목 속에서도 이 가족 구성원들은 식탁에 앉기만 하면 휴가 온 화목한 4인가족의 분위기를 내려 애쓴다. 아나이스는 아침부터 식탁에 앉아 서럽게 울지만 그녀의 '사춘기 히스테리'를 막기 위해 가족들은 그녀에게 다시금 음식을 먹이고, 엘레나는 그녀의 입에 머쉬멜로우를 쑤셔 넣어준다. 그녀는 진정된다. 그리고 소녀들의 결말 일 중독인 아버지는 회사로 가 버렸고, 엘레나의 애인도 배신하고 떠나버렸다. 어머니와 엘레나, 그리고 아나이스는 엉망이 된 기분으로 귀경길에 오른다.(실은 아나이스는 기분이 그리 엉망이지는 않다.) 밤의 고속도로, 온갖 차들이 그녀들이 탄 차를 추월해가는 귀경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영화에서 감독은 이 장면을 매우 공포스럽게 찍었다. 마치 액션 스릴러 영화와도 같은 이 아슬아슬한 운전 장면은 어머니에게 매우 힘겹게 그려지고 있다. 이 야만적인 길 위에서 그녀들이 안전하게 있을 곳은 없으며, 이는 영화에서 계속 그려져 온, 남자들로부터 외면당한 이 여자들의 인생이 결코 쉽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위험천만한 씬은 결말로 곧장 이어지는데, 운전을 하느라 피곤한 어머니가 휴게소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새우잠을 자게 된 것이다. 세 여자가 아무도 없는 밤길에 차를 세우고 자는 상황은, 앞의 공포스러운 운전 씬 때문에 더더욱 위험해 보인다. 차에 여자 사진을 덕지덕지 붙인 트럭 운전사의 끈적한 눈빛이 지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의 앞유리는 사정없이 깨어지고 어머니와 엘레나는 어이 없이 즉사하고 만다. 그리고 아나이스는 강간당한다. 결과적으로, 이 두 소녀의 첫 경험은 모두 실패했다. 밤마다 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말하곤 했던 소녀들의 환상은 깨어졌다. 그것도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게 - 괴한이 부수어댄 차유리 소리가 얼마나 관객들을 깜짝 놀래켰는지 모른다 - 이 결말은 소녀들이 학습한, 또한 사회가 겉으로만 말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말들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엘레나와는 달리 아나이스는 그것을 이미 간파한 것이며, 그 힘은 허구에 불과한 것들에 의해 끊임없이 밀려나버린 그녀의 경험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존재까지 허물어져 버리지는 않았다. 아나이스가 차분히 읊는 마지막 대사 '강간당하지 않았어요. 믿지 않아도 좋아요'는 자신이 당한 강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회피가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진짜 실제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녀하고 한 번 자 보려는 위장된 사랑의 속삭임 따위가 가지는 말랑한 허구성이 아니라 진짜 삶에 닥친 역겨울 정도의 생생함.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자신보다는 세상이 백 배 천 배 더 역겨움을 몸으로 알고 있는 아나이스의 인생은 어떤 식으로 꾸려지려는가. 눈부시게 아름답고, 그만큼 무심한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들이 그녀의 눈 앞에서 총천연색으로 펼쳐질 때는 어떻게 할까. 너무 어린 나이에 많은 것을 알아버린 이 소녀가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몸 속으로 음식을 쑤셔 넣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뻔한 위선들에 비해 자신이 말하여 내보낼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어서가 아닐까? 아무리 말하고 또 말하려 노력해도 타인들에게는 여전히 불가해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 분명한 것들이 늘어만 가서가 아닐까? 그녀의 말이 자꾸만 지워지고 흩날려 가고, 그녀의 존재도 점점 옅어지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어서가 아닐까? 채워지지 않는 존재적 허기를, 그녀는 머쉬멜로우와 빵과 샐러드로 부족하게나마 채우는 것이 아닐는지. 서울대학교여성주의자치언론 쥬이쌍스 http://www.jouissance.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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