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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뜨린느 브레야의 <팻걸>

가부장제의 터널에서 출발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까뜨린느 브레야의 <팻걸> 김윤은미 기자 2004-08-22 20:34:19 <기사를 보고 영화를 보시면 재미가 덜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까뜨린느 브레야의 <팻걸>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이 소녀들의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두 소녀가 처음으로 성경험을 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남자의 첫 경험이 떼내야 할 ‘총각 딱지’를 뗀다는 발판 같은 지점이라면, 소녀의 첫 경험은 남성중심적인 현실이라는 끝없는 터널로 들어가서 욕망을 추구해야 하는 불안한 과정임을 예고한다. 영화 초반은 약간 불안하면서도 도로를 그럭저럭 따라가는 초보자의 자전거 바퀴처럼 흐른다. 여름 별장으로 휴가를 온 두 자매, 엘레나와 아나이스. 이들은 ‘첫 경험’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논쟁을 벌인다. 인형처럼 예쁜 언니 엘레나는 첫 섹스를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섹스는 진정한 사랑이 보증되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단 하나뿐인 처녀성을 바치는 행위다. 반면 주인공인 뚱뚱하고 조숙한 동생 아나이스는 첫 섹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거짓인지를 깨닫게 될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거짓임이 판명 났을 때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아나이스의 논리. 언니 엘레나는 성공적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여기에 두 소녀의 서로에 대한 애증 어린 심리가 대조되면서 흥미진진하다. "만약 내가 꿈꿀 상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살았든 죽었든 남자든 시체든 짐승이든 상관없는데…." 수영장을 오가며 나무 막대와 철제 막대에 키스하면서, 막대기들을 두 남자라고 상상하고 역할극을 하는 아나이스는 추해 보일 정도로 많이 먹는다. “남자들이 너를 알기도 전에 도망갈 걸”이라고 비꼬는 언니의 말처럼 아나이스는 현실적으로 연애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때문에 그녀의 좌절감은 심각하다. 아나이스는 모든 여성들이 되고 싶어하는 모델 같은 언니를 어쩔 수 없이 따라 하지만, 절대로 언니와는 같아질 수 없다. 엘레나는 이런 동생을 경멸하면서도 자신의 연애에 필요한 도구로 이용하며, 때로는 그녀를 다정하게 포옹한다. 그러나 감독은 아나이스를 좌절감 때문에 답답한 캐릭터로 만들지 않는다. 이 점은 <팻걸>이 뚱뚱한 여자를 스테레오타입으로 다룬 것이 아닌가 라는 혐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한다. 아나이스는 자기 나름대로 욕망에 충실하다. 그리고 아나이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얼마나 조숙한가. 여자는 경험하면 할수록 더욱 새로워진다고, 여자는 비누가 아니기에 섹스를 아무리 해도 닳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나무 막대에 키스하는 아나이스의 모습은 기묘한 매력을 풍긴다. 상상에서나 성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소녀의 고독하면서도 에너제틱한 심리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부터 아나이스가 중얼거리는, “내 심장을 창문에 걸어놓아서, 까마귀가 그걸 쫀다면 고통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라는 노래는 감독 까뜨린느 브레야가 10대에 썼던 가사다. 아나이스는 실제로 매력적인 언니와 10대를 보낸 감독의 심리가 반영된 자전적인 캐릭터다. 아나이스의 괴로움은 같은 방을 쓰는 언니 엘레나가 저쪽 침대에서 만난 지 5분만에 유혹하는 데 성공한 한 남자와 첫 경험을 치르는 소리를 들을 때 최고에 달한다. 그러나 언니 엘레나 역시 순탄하게 첫 경험을 치르는 것은 아니다. 엘레나의 첫 경험은 섹스를 원하는 남자가 불안해하는 여자를 어떻게든 달래서 소위 ‘따먹기’에 이르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섹스가 끝나도 나를 사랑할 건가요?”라고 묻는 엘레나를 향해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끝나도 사랑할 거야”라고 말하는 남자의 대답은, 감독이 첫 경험의 기만적인 속성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엘레나는 섹스를 요구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울어버리고, 아나이스는 엘레나에 대한 복잡한 심경과 초라한 자기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어버린다. 엘레나가 받은 약혼반지가 실은 남자가 어머니에게 훔쳐왔다는 사실이 탄로 나면서 영화는 후반부로 접어든다. 화가 난 엄마는 두 딸을 데리고 파리로 올라간다. 이제 영화는 초보자의 자전거 바퀴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사고가 날 것처럼 고속도로를 불안하게 질주하는 그녀들이 탄 자동차 그 자체가 된다. 엘레나는 울먹거리고 엄마는 화가 난 심리를 대변하듯 마구 속도를 내며 아나이스는 뒷자리에서 계속 과자를 먹는다. 세 명의 여자가 유지하는 긴장된 분위기는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여성의 심리 상태를 감독이 능숙하게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의 백미다. 남성의 첫 경험과는 달리 소녀의 대담한 첫 경험은 아무도 환영하지 않으며, 그녀의 신체는 통제를 받는다. 그래서 세 명의 여자는 긴장된 분위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첫 경험에 대한 통제는 도로를 질주하며, 감히 남자들이 운전하는 트럭을 추월하는 세 명의 여자가 탄 자동차가 범죄의 표적이 된 상황으로 은유 된다. 그리고 세 사람은 실로 충격적인 결말을 맞는다. 이 영화의 원제는 ‘내 누이에게’다. 까뜨린느 브레야의 영화는 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한데 <팻걸> 역시 다소 그렇다. 좀 비약하면 어느 영화 평론가의 평처럼 이나이스의 첫 경험이 강간으로 시작됐기에 “뚱뚱한 여자 두 번 죽이는 영화”라는 신랄한 평도 가능할 테고, 원제목처럼 사랑과 섹스가 같아야 한다고 믿는 순진한 언니 엘레나에게 이나이스가 보낸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볼 수도 있다. 혹은 강간의 경험에서도 살아남은 도발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소녀의 성장기로 읽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읽어내든지 간에 영화가 여성의 신체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이성애적 성 각본과 폭력의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는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장점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에 대한 여성의 호기심과 실험, 쾌락은 이처럼 끝없는 터널 같은 답답한 현실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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