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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해서..

'신화로서의' 가족에서 '현실 속의' 가족으로 '가족처럼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어느 날 버스에 올라탔을 때 운전기사 뒤쪽 의자에 다음과 같은 TM티커가 붙어 있었다. '가족처럼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문득 그것을 보면서 나의 머리 속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그려졌다. 가족을 태우고 가는 운전기사 아저씨는 그 집안의 가장(=아버지)으로 상징된다. 승객(=가족구성원)이 내리고 오를 때 보살펴주고, 버스요금을 받는(=살림을 담당하는)차장언니는 버스 자동화로 인하여 '그때를 아십니까'라는 TV프로에서나 볼 수 있는 인물로 사라져 버렸다. 버스기사는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생계를 담당하며) 사람이지만 때로는 과속을 하기도, 급정거를 하기도 한다. 버스기사의 갑작스런 급정거에 놀란 한 아저씨가 용감하게 소리친다. - 아저씨 : 아저씨, 왜 이렇게 운전을 하세요? 갑자기 급정거해서 기둥에 다칠 뻔 했잖아요. - 버스기사 : 내가 급정거 하고 싶어서 그래요? 아저씨도 직접 해보세요. 보니까 다친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큰 소리 쳐요? - 아저씨 : 아니, 다치지 않으면 말도 못해? 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 - 버스기사 : 어? 이 ○○가 어디다 대고 찍찍 반말이야? 야, 너 나이가 몇 살이야? * (드디어 기사 아저씨. 운전석에서 일어선다. 순간 버스 안에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다른 승객들도 한마디씩 거든다) 버스 안은 항의하는 사람, 말리는 사람들로 웅성웅성하며 소란스러워 진다. 그러나 곧 버스에 탄 승객들은 버스운전기사의 손동작 하나에 자신의 생명이 달려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황은 수습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창밖을 내다본다. 이것은 가족처럼 편안해야 할 버스 안의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결코 상상하지 않으며 '가족처럼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를 바라본다. 편안해야 할 가족을 생각하며. 타인과의 피 말리는 경쟁과 음모, 비인간적인 대우로 상처받는 현대인들은 어디선가 위로받고 싶어 한다. 자신도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냉혹하고 살벌한 우리 사회에서 따뜻함. 친밀함과 애정이 넘쳐나는 유일한 곳은 가족이라고 이야기한다. 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어 일터와 가정이 분리되면서 일터와 가정의 상징과 역할은 엄격하게 분리되었다. 직장은 전쟁터로 의미도어 여기서는 '죽었다'생각하고, 쉴 때는 '집으로'가라는 것이다. 편안함과 따뜻함, 친밀한 사랑을 내용으로 하는 가족에 대한 신비화는 사회의 가치와는 대비되어 곳곳에서 발견된다. 최근 쏟아지는 가족에 관한 국내 영화들도 가족에 관한 신화를 내용으로 한다. 대중교통수단에서 발견되는 '가족처럼 편안히 모시겠습니다.'에서부터 시작해서 구인광고에 이르기까지 가족의 신화는 사회 곳곳에 배어 있다. 구인광고에서 꼭 들어가야 할 구체적인 급여나 노동조건은 빠져 있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라는 말은 빠지지 않고 강조된다. 사회생활에서의 인간관계에서도 '누구 누구씨' 라는 호칭은 어느덧 친해지면서 가족관계를 규정하는 '언니·오빠·형님'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 사회는 가족화되어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가족의 생게를 책임지는 엄한 아버지로, 영부인은 가정에서 자식의 허물을 따뜻하게 감싸는 어머니로 상징된다. 알고 보면 대부분의 가족은 콩가루 집안? 가족화되어 있는 그 가족. '가족처럼 모시겠습니다.'의 가족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형태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가족이라고 여기는 '그 가족'은 친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는 가족이다. 그리고 살림하는 어머니와 일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분리되어 있다. 그 가족은 행복이 항상 묻어나는 화목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가정된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그 가족'은 내가 태어나서 성장한 현실 속의 가족이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고 사회가 정의한 가족이다. '가족같은 분위기'의 직장이 마음에 와 닿을 때 우리는 지지고 볶으며 컸던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ideal)으로서의 가족을 상상하는 것이다. 나 또한 현실 속의 가족과 이상적인 가족 간 간극으로 인해 갈등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내 가족은 남들에게 부러움을 많이 사는 가족이었다. 온화한 어머니와 생계부양자로서는 성실하셨던 아버지, 공부 잘해서 일류대에 척척 들어간 형제들이 있었던 우리 가족은 늘 주변에서 행복한 가족의 전형으로 이야기되었다. 주말에 엄마는 고운 한복을 입고 멋쟁이 아버지는 한껏 멋을 내시고 뒤에 자식들이 줄줄 따라가며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은 창문을 열고 우리 가족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그 전날 어머니와 아버지가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는 동안, 우리 형제들은 화장실에 모여서 벌벌 떨고, 아버지에게 맞은 어머니는 밤새도록 끙끙 앓았던 것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아버지는 주말이면 가족들을 데리고 외출을 하는 자상한 아버지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것은 내가 경험한 중산층의 전형적인 행복한 가족의 뒷면이다. 내가 태어나서 성장했던 가족 구성원들 모두는 각자 아픈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대외적으로는 너무 행복한 가정이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어느 날, 친구들과 풀밭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진실게임'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 게임의 규칙은 한 사람씩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다. 돌아가며 그 사람에게 어떠한 은밀한 질문을 하여도 그녀는 진실에 의거하여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 게임을 하며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가족과 관련하여 숨기고 싶은 비밀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친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된 가족만을 정상이라고 규정짓는 이 사회는 불의의 사고로 일찍 어머니를 잃은 가족에게도 결손 가정이라는 굴레를 씌워버렸다. 한 친구는 어머니가 재혼을 하여 성이 다른 큰오빠가 있었다. 그 친구는 자신의 가족사를 이야기하며 평평 울어버렸다. 분명히 형제인데 성이 다른 형제가 호적에 나란히 올라 있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몹쓸 짓이라도 한 사람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정상 가족에서 벗어난 범주를 비정상 가족으로 분류하여 소외시켜 버리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알고 보며 콩가루 집안에서 성장한 것이다. 더군다나 점점 늘어만 가는 이혼율, 한부모 가족의 증가, 결혼제도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인구의 증가와 출산율의 저하 등으로 인하여 '비정상 가족'은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사회현상을 일컬어 '가족해체' 또는 '가족파괴'라고 분석하며 성급히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한 현상을 분석하면서 빠짐없이 나오는 것은 현대여성들의 이기주의, 철없음, 인내심부족, 비정한 모성 등이고 전통 대가족으로의 복귀와 향수를 강조하기도 한다. 다양한 가족의 등장을 인정하는 열린 시각이 필요한 때 가족은 몇천만 년의 역사 속에서 계속 변화해 왔다. 원시농경 사회에는 개별적인 가족들이 여러 개의 집에 나누어 살기도 하고, 한 개의 씨족이 한 집에서 사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혼인 후 남자가 여자 집에 머물러 생활하기도 했고, 조선 전기까지도 여성들이 제사 및 재산 상속에 있어서 상당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가족이라고 이야기 되는 대가족이라는 것도 현대에 와서 각색된 것이다. 인간수명이 60, 70세를 넘어선 것이 불과 몇 십년 전인데 몇백 년 전에 3대가 함께 사는 가족은 '장수만세' 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도 3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이 보편적이었던 시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야기한다. 그때가 그립고 좋았을 것이라고. 없어지면 뭔가 가족에 쓸쓸하고 허전한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호주제라는 것이 한국에 들어온 때는 일제시대인 1921년도인데 그것이 우리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나는 이혼율의 증가와 출산율의 저하, 또 그로 인한 한부모 가족과 독신 가족, 무자녀 부부, 재혼 가족 등을 가족해체로 보고 싶지 않다. 그 가족들은 정상적인 가족에서 벗어난 비정상 가족, 일탈가족이 아니라 충분히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다양한 가족 중의 하나인 것이다. '가족' 파괴현상이라고 이야기되는 '그 가족'은 이제 권좌에서 내려와 허울뿐인 실체를 드러내야만 한다. 진정으로 가족해체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가족 구성원 모두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가로막는 제도와 법을 개정하고 빈손한 가족에 대한 지원대책을 수립하면서 특정 가족에 대해 색안경을 끼지 않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그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족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진로를 막지는 않았는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만 희생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가족처럼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라는 표어를 보며 버스를 탈까 말까를 고민하지 않는,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 모두가 편안한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사회가 편안하지 않으면 결코 가족은 편안할 수 없으므로. 글∥조주은 이화여대 여성학 박사과정, 상지대 강사 가족에 관한 읽을거리가 가득한 책 가족은 꼭 필요한 제도인가? 이 질문은 가족해체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많은 동시대인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 만큼 최근 몇 년 사이에 사회과학, 인류학, 여성학 혹은 문화연구에서 가족의 중요성과 의미가 끊임없이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오고 있다. 그와 관련 책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가족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혹자는 '가족'을 생물학적, 인성적 차이에 기초한 기능적 단위로, 또는 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혹은 생존을 위한 경제적 단위로 파악하는 입장을 표명한다. 또한 한편에서는 인간을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고 살게 되어 있고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여성해방론자들은 가족이 지난 여성 억압적 성격, 나아가서는 반사회적 성격을 지적한다. 이러한 다양한 논의들은 가족의 실체가 얼마나 복잡다기한 것인가를 입증하는 증거물이다. <<서양의 가족과 성>>당대·12,000원은 로마시대에서 현대까지를 망라하여 서양 가족과 성의 발전과정을 다루고 있다. 로마시대의 혼인과 성관계, 중세 프랑스 귀족의 결혼과 성, 종교개혁이 가정과 여성에 끼친 영향, 근세 초 프랑스 가족 속의 성, 18세기 초 런던상인의 가족 등 서양의 가족과 성문제를 시·공간적 유형별 특성을 고려하면서 재구성했다. 서양가족사 연구에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근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본 가족에 대한 연구서가 눈에 띈다. 이화여대 이재경 교수는 근대가족과 페미니즘에 관한 연구서 <<가족의 이름으로>>또 하나의 문화·9000원를 발간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 가족의 의미와 변화양상을 여성의 경험을 통해 읽어내고, 사회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가족들에 대한 고정 관념에서 탈피하여 좀더 개방적 사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가족은 이러해야 한다'고 주장 하면서 단일한 가족 형태만 고집한다면, 갈수록 당면한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 가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적 가족제도 아래서 주변부에 머물렀던 여성들의 역할을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본 가족>>한울·15,000원은 인류학, 여사학, 사회학, 심리학, 정신의학, 철학, 경제학 그리고 법학 등 다양한 분과에 속해 있는 저자들의 논문을 통해 페미니즘적 사고의 가정과 논쟁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크게 다섯 가지 핵심 주제를 담고 있는데, 먼저, 가족의 부양자인 남편과 전업주부이자 어머니로 구성되는 현대 핵가족만을 자연스럽고 합법적인 가족 형태로 부추기는 '전형적인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입장. 둘째, 성별 노동분업, 이성 간의 성관계. 남성지배, 모성(motherhood)등의 주제를 포함하여 가족을 사회적 ·역사적으로 재분석하고자 하는 입장. 셋째, 모성과 사랑으로 미화되고 천국 같은 가정이라는 가족의 이미지로 신비화되어 온 가족경험이 실상은 이질적이라는 것. 넷째, 가족의 경계에 대한 의문 제기와 다섯째, 개인주의와 평등, 그리고 재정적 보살핌과 집합성 간의 이분법적 갈등을 이 책을 통해 고찰하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101가지 이야기>>국일미디어·9000원는 이처럼 가족을 둘러싼 갈등이 있는 가정생활을 좀더 수월하게 해 나가는 것을 돕는 책이다. 저자인 리처드 칼슨은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Don't Sweat The Small Stuff)의 저자이자 심리학 박사이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위한 그의 해결방법은 바로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 것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경험에서 우러난 그의 101가지 이야기는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생활에서 잃어버릴 수 있는 가정생활의 재미를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책으로 손색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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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들의 생존자 말하기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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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2004.10.8 역사교육과 여성주의 모임 茶飯事 제2차 세미나 여성의 몸의 주인은 누구인가 남성이 월경을 한다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책은 그로부터 시작한다. 여성의 월경이 어떻게 변할 지를. 바꾸어 여성이 상위 계층이 된다면, 적어도 좀 더 평등한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나은 세상이 될 지를 상상하게 한다. 1970년대와 80년대 주로 쓰인 글들로 엮인 이 책은 그 연도가 무색할 정도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 대부분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진보하지 않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까. 이 책의 여러 부분 중에서 나는 여성에 대한 몸의, 더 큰 의미로 정신적인 면을 포함한 몸의 폭력에 대해 발제 하고자 한다. 신체의 폭력 가장 원초적인 폭력이 바로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이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여성의 성기에 가해지는 폭력은 저자의 경고한대로 끔찍하고 읽기조차 괴롭다. 이러한 일들은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고,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조차 과학적 근거라는 주장으로 합리화 시켰다. 게다가 이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조차 얼마나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가! 신체에 대한 억압은 소유와 권력의 표시이다. 여성은 인간생활에서 가장 기초적인 부분인 신체에 대한 권리마저도 지키기 힘들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순결해야 한다,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는 누구를 위한 덕목들인가.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야만적이고 미개한 종교와 풍습을 가진 나라의 일이라고 믿고 싶지만,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전체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여성을 보는 시각과 여성이 가진 위치를 상징적으로 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체적인 폭력은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간간히 보도되는 매 맞는 아내들은 알려진 것 이외에도 여전히 많은 수가 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TV드라마에서 수다스럽고 방정맞은 아내가 다음날 눈이 시퍼렇게 멍든 모습으로 눈을 달걀로 문지르며 엄숙한 남편과 함께 등장하곤 했다. 눈이 멍들 정도로 맞으려면 상당한 고통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코믹하게 그려져 있음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과묵하며 신중해 보이기까지 하는 ‘때린’남편은 우리사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신체적 폭력이 얼마나 관대하게 여겨지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실제로도 아내를 때린 남편은 구속의 대상이 아니고, 처벌을 받더라도 처벌의 정도가 매우 낮으며, 처벌 후에도 다시 보복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래도 여성과 남성은 평등한가? 시선의 폭력 여성을 보는 시각 또한 폭력의 도구가 된다. 남성 위주의 권력 구조의 사회에서 여성은 어떻게 보이고 있는가? 최초 포르노의 주인공인 린다 러블레이스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그녀가 받은 신체적, 물리적 폭력은 잠시 제쳐 두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특히 남성이 그녀를 보는 눈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그녀에게 무엇을 원했는가? 그녀는 한 개인으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성적인 이미지뿐이었고, 그녀가 더 이상 그것을 채워주기를 거부했을 때 그녀는 사람들로 하여금 비난을 받았다. 그녀를 포함한 모든 포르노 등의 산업에서 여성은 성적인 만족을 위한 도구로만 비추어진다. 한 사람의 인간은, 인권은, 개인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비단 포르노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여러 매체 등에서 여성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가장 쉬운 예로, 광고 산업에서 여성은 단순히 ‘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장 아무 광고나 살펴보자.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당당한 모습의 여성을 볼 수 있는 경우가 몇 개나 되는가? 여성이 여성 한 개개인으로서의 특징을 지닌 사람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다른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 인식되는 이러한 시선은 절대로 평등으로 이어질 수 없고, 이것은 강자의 약자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시선은 다시 불평등한 구조를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생각의 폭력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어떤 역할이어야 하는가? 분명히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이러이러한 모습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역할이라는 것이 힘을 가진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 밝힌 남자와 여자의 대화 형태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여자는 순종적이고 공손하고 상냥해야 한다.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며, 남성이 원하는 주제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찾아야만 한다. 또 다른 예도 있다. 필자의 어머니는 능력있고 적극적인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위해 일을 포기하고 자아를 잃는다. 사회가, 가족이, 남편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녀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래야만 미덕을 가진 것이라는 사회의 통념이 그녀에게 그러한 생각을 강요한 것이 아닌가. 여성적일 것, 모성적일 것. 대부분의 여성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이다. 그렇지만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개념에서 여성 자신의 욕구나 성취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녀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이었고, 그래야만 ‘좋은’여자였다. 이러한 강요들이 전통적인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었다고 보는가? 물론 이전의 사회보다 나아진 면도 있지만, 여전히 여성은 자신의 생각을 사회가 바라는 방향으로 맞출 것을 강요받고 있다. 여전히 여성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는 좋은 어머니요, 아내다. 여성이 가진 관념까지도 강요받고 있는 사회, 우리는 평등한가? 우리의 지향점은 동등하고 평등한 여성과 남성의 사회이다. 현실의 사회에서는 아직도 넘어야할 산들이 많다. 강자에 의한 약자에 대한 넓은 의미의 폭력이 바로 그 산이다. 30여 년 전에 필자가 느낀 그 산들은 지금 여전히 우리 주변에 버티고 서 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 알지만 모르는 척 했었던 것들을 모두 이야기해 보자. 그리고 그 산들을 넘기 위해 우리가,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들을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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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남편에 강제추행 유죄선고 의의

아내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법원, 남편에 강제추행 유죄선고 의의 조이여울 기자 2004-08-23 08:58:28 2년 전 울산에서는 한 남성으로부터 지속적인 구타와 강간을 당해 온 여성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그 남성이 자는 동안 목을 졸라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늘 강간을 당했다. 강간을 피할 수 없었다”고 진술한 그 여성이, 10여 년간이나 세상에 구조요청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한 가지다. 그것은 가해자가 그 여성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정조권’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지난 20일 아내를 성추행 한 남편에게 우리 법원이 처음으로 유죄(강제추행 치상)를 선고했다.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부장판사 최완주)는 부부 간에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으며, 이를 침해하는 행위는 법이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이는 부부간 강제추행만이 아니라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번 판결이 2004년 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해 지금까지 우리 역사 속에서 ‘아내’라는 이름의 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해도 법이 구제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들이 겪은 피해가 성폭력이라는 사실조차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내의 몸을 남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로 보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인식은 성폭력 범죄를 ‘부녀에 대한 정조 침해의 죄’로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과 맥을 같이 한다. 성폭력을 ‘한 남자(남편 혹은 남편이 될 자)의 소유’인 여성의 몸을 다른 남성이 침범한 행위라고 보았을 때, 부부 간에 강간죄는 성립되지 않게 된다. ‘정조’라는 개념 자체가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하므로, 아내와 남편 상호간에는 침해할 “정조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각은 결국 결혼한 여성에겐 지켜야 할 ‘정조’는 있으나 ‘성적 자기결정권’은 없는 것으로 본다. “강간인데 강간 아니다”? 여성운동진영에서는 수년 전부터 남편으로부터 폭력과 더불어 성적 학대를 겪는 아내들의 숱한 사례들을 토대로 아내 강간을 인정하라고 요구해왔다. 배우자로부터 가해지는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더 큰 굴욕감과 무력감을 주며, 일상적인 공포에 시달리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피해자는 가해자와의 관계망을 벗어나기 어렵고, 지지기반도 없어 그 피해와 후유증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부부 간 성폭력을 인정하라”는 주장은 사회적으로 다분히 ‘급진적’인 것으로 읽혀져 왔고 법조계 인사들을 비롯한 많은 남성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아내강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부부 사이에 성폭력이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성폭력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처벌해선 안 된다”는 것. “부부 사이에 어떻게 성폭력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이들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성폭력을 정조권 침해범죄로 보고 있으며,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폭력과 성관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남편이 아내를 강간했다 해도 처벌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성폭력 가해자의 편에 서서 ‘강간인데 강간이 아니다’라는 모순된 주장을 해왔다. 그런데 이 같은 주장이 바로 우리 대법원이 1970년에 내린 판결의 내용이다.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는 설령 남편이 폭력으로써 강제로 아내를 간음했다 하더라도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수적인 한국 법조계의 ‘관행’상 이 판례는 30년간이나 족쇄가 되어 우리 사회에서 부부 간 성폭력을 은폐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법원, 왜곡된 통념 깨는데 제 역할 하길 남편의 아내에 대한 강제추행 행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이번 판결이 특히 반가운 이유는 재판부가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을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검찰은 30년도 더 묵은 대법원 판례를 들먹이며, 남편에 의한 강간사건을 아예 기소조차 하지 않아왔다. 이번 판결도 참으로 늦었다는 판단이 들지만, 기존의 판례를 교과서로 삼는 우리 법조계의 뒤떨어진 현실감각과 인권의식 등을 감안했을 때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다. 이번 판결이 그간 성폭력에 대해 떨치지 못하고 있던 사회적 통념들을 떨궈내고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 본다. 그리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수많은 판례들- ‘목숨을 건 반항’을 한 증거가 있어야만 강간을 인정한다든가, “보호해야 할 인권은 따로 있다”는 식의-을 이제 더는 접할 수 없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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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뜨린느 브레야의 <팻걸>

가부장제의 터널에서 출발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까뜨린느 브레야의 <팻걸> 김윤은미 기자 2004-08-22 20:34:19 <기사를 보고 영화를 보시면 재미가 덜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까뜨린느 브레야의 <팻걸>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이 소녀들의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두 소녀가 처음으로 성경험을 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남자의 첫 경험이 떼내야 할 ‘총각 딱지’를 뗀다는 발판 같은 지점이라면, 소녀의 첫 경험은 남성중심적인 현실이라는 끝없는 터널로 들어가서 욕망을 추구해야 하는 불안한 과정임을 예고한다. 영화 초반은 약간 불안하면서도 도로를 그럭저럭 따라가는 초보자의 자전거 바퀴처럼 흐른다. 여름 별장으로 휴가를 온 두 자매, 엘레나와 아나이스. 이들은 ‘첫 경험’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논쟁을 벌인다. 인형처럼 예쁜 언니 엘레나는 첫 섹스를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섹스는 진정한 사랑이 보증되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단 하나뿐인 처녀성을 바치는 행위다. 반면 주인공인 뚱뚱하고 조숙한 동생 아나이스는 첫 섹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거짓인지를 깨닫게 될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거짓임이 판명 났을 때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아나이스의 논리. 언니 엘레나는 성공적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여기에 두 소녀의 서로에 대한 애증 어린 심리가 대조되면서 흥미진진하다. "만약 내가 꿈꿀 상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살았든 죽었든 남자든 시체든 짐승이든 상관없는데…." 수영장을 오가며 나무 막대와 철제 막대에 키스하면서, 막대기들을 두 남자라고 상상하고 역할극을 하는 아나이스는 추해 보일 정도로 많이 먹는다. “남자들이 너를 알기도 전에 도망갈 걸”이라고 비꼬는 언니의 말처럼 아나이스는 현실적으로 연애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때문에 그녀의 좌절감은 심각하다. 아나이스는 모든 여성들이 되고 싶어하는 모델 같은 언니를 어쩔 수 없이 따라 하지만, 절대로 언니와는 같아질 수 없다. 엘레나는 이런 동생을 경멸하면서도 자신의 연애에 필요한 도구로 이용하며, 때로는 그녀를 다정하게 포옹한다. 그러나 감독은 아나이스를 좌절감 때문에 답답한 캐릭터로 만들지 않는다. 이 점은 <팻걸>이 뚱뚱한 여자를 스테레오타입으로 다룬 것이 아닌가 라는 혐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한다. 아나이스는 자기 나름대로 욕망에 충실하다. 그리고 아나이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얼마나 조숙한가. 여자는 경험하면 할수록 더욱 새로워진다고, 여자는 비누가 아니기에 섹스를 아무리 해도 닳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나무 막대에 키스하는 아나이스의 모습은 기묘한 매력을 풍긴다. 상상에서나 성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소녀의 고독하면서도 에너제틱한 심리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부터 아나이스가 중얼거리는, “내 심장을 창문에 걸어놓아서, 까마귀가 그걸 쫀다면 고통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라는 노래는 감독 까뜨린느 브레야가 10대에 썼던 가사다. 아나이스는 실제로 매력적인 언니와 10대를 보낸 감독의 심리가 반영된 자전적인 캐릭터다. 아나이스의 괴로움은 같은 방을 쓰는 언니 엘레나가 저쪽 침대에서 만난 지 5분만에 유혹하는 데 성공한 한 남자와 첫 경험을 치르는 소리를 들을 때 최고에 달한다. 그러나 언니 엘레나 역시 순탄하게 첫 경험을 치르는 것은 아니다. 엘레나의 첫 경험은 섹스를 원하는 남자가 불안해하는 여자를 어떻게든 달래서 소위 ‘따먹기’에 이르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섹스가 끝나도 나를 사랑할 건가요?”라고 묻는 엘레나를 향해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끝나도 사랑할 거야”라고 말하는 남자의 대답은, 감독이 첫 경험의 기만적인 속성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엘레나는 섹스를 요구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울어버리고, 아나이스는 엘레나에 대한 복잡한 심경과 초라한 자기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어버린다. 엘레나가 받은 약혼반지가 실은 남자가 어머니에게 훔쳐왔다는 사실이 탄로 나면서 영화는 후반부로 접어든다. 화가 난 엄마는 두 딸을 데리고 파리로 올라간다. 이제 영화는 초보자의 자전거 바퀴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사고가 날 것처럼 고속도로를 불안하게 질주하는 그녀들이 탄 자동차 그 자체가 된다. 엘레나는 울먹거리고 엄마는 화가 난 심리를 대변하듯 마구 속도를 내며 아나이스는 뒷자리에서 계속 과자를 먹는다. 세 명의 여자가 유지하는 긴장된 분위기는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여성의 심리 상태를 감독이 능숙하게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의 백미다. 남성의 첫 경험과는 달리 소녀의 대담한 첫 경험은 아무도 환영하지 않으며, 그녀의 신체는 통제를 받는다. 그래서 세 명의 여자는 긴장된 분위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첫 경험에 대한 통제는 도로를 질주하며, 감히 남자들이 운전하는 트럭을 추월하는 세 명의 여자가 탄 자동차가 범죄의 표적이 된 상황으로 은유 된다. 그리고 세 사람은 실로 충격적인 결말을 맞는다. 이 영화의 원제는 ‘내 누이에게’다. 까뜨린느 브레야의 영화는 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한데 <팻걸> 역시 다소 그렇다. 좀 비약하면 어느 영화 평론가의 평처럼 이나이스의 첫 경험이 강간으로 시작됐기에 “뚱뚱한 여자 두 번 죽이는 영화”라는 신랄한 평도 가능할 테고, 원제목처럼 사랑과 섹스가 같아야 한다고 믿는 순진한 언니 엘레나에게 이나이스가 보낸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볼 수도 있다. 혹은 강간의 경험에서도 살아남은 도발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소녀의 성장기로 읽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읽어내든지 간에 영화가 여성의 신체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이성애적 성 각본과 폭력의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는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장점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에 대한 여성의 호기심과 실험, 쾌락은 이처럼 끝없는 터널 같은 답답한 현실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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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 걸(Fat Girl)

소녀들의 결말 - 팻 걸(Fat Girl) 현실의 것과 너무도 닮아서 현기증마저 느끼게 하는 고통에는 눈을 감아버리기 일쑤다. 그것이야말로 '날것'의 고통. 어떤 것은 보며 공감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지언정, 어떤 것은 그 생생한 고통을 함께 느끼며 몸서리를 치게 된다. 그 현실감으로 치자면 활자보다는 영상이 한 수 위라서, 내가 영화를 고르는 기준들 중 중요한 것은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웃으며 잊어버릴 수 있는 영화, 였다. 그런 내게 딱 한 영화관에서만 상영하는 팻걸을 보러 종로까지 간 것은 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종로까지 가는 오랜 걸음 동안에는, 언제 또 이런 영화를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조바심도 작동했을 터다. 그 언제 또 '실제로' 비만한 여성의 이야기가 나오는 이런 영화를 볼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영화의 신데렐라 스토리도 구원하려 하지 않는, 그야말로 비만한 여성의 이야기를 우리가 그 언제 볼 수 있겠는가? 누가 이런 '시각적 쾌감을 신경쓰지 않는' 영화를 또 만들 것인가? 글로나마 간략히 전하는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두 자매 아나이스와 엘레나는 가족과 함께 교외의 별장으로 휴가를 왔다. 엘레나는 가녀린 몸을 가진 당찬 15살 소녀이고, 아나이스는 비만한 몸 을 가진 12살 소녀이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 다니며 - 정확히 말하면 아나이스가 엘레나를 쫓아다닌다 - 서로에게 애증의 감정을 느낀다. 엘레나는 휴양지의 까페에서 한 이탈리아 남자를 만나 사귀게 되지만 그 남자는 처녀인 엘레나와 성관계를 가진 후에 연락을 끊어버린다. 일 중독인 아버지는 먼저 회사로 가 버리고, 엉망이 된 기분의 세 모녀는 자동차로 귀경길에 오르게 된다. 운전대를 잡은 어머니가 피곤해서 잠시 휴게실에서 자는 동안, 괴한이 나타나 엘레나와 어머니를 죽이고 아나이스를 강간한다. 숲속에 버려진 아나이스가 경찰에 의해 발견되면서 영화가 끝나게 된다. 아나이스만의, 아나이스의 캐릭터는 넘겨짚어진다. 사실상 뚱뚱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여성들의 캐릭터는 넘겨짚어진다. 외모상의 콤플렉스 때문에 상상할 수 없을만큼 소심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털털하고 수더분한 성격일 것이라고 넘겨짚어진다. 혹은 강요당한다. 이러한 넘겨짚기는 영상에서 움직이는 주인공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영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아나이스는 관객의 상상 혹은 기대와는 한참이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아나이스가 서슴없이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드러내며 수영장에서 혼자 연극을 할 때 - 수영장 이 쪽과 저 쪽에 있는 구조물을 옮겨다니며 자신을 둘러싼 두 상대라고 생각하고 가상의 상황을 만들어 즐길 때 -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관객의 생뚱맞은 웃음은 말 그대로 '일반' 관객이 아나이스와 같은 여성들의 성적 판타지에 대해 얼마나 신경조차 쓰지 않아왔는가, 얼마나 익숙하지 않고 무지하기까지 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나이스가 자신의 외로움과 권태로움을 담은 가사로 노래를 할 때 관객들이 큭큭 웃는 현상(사실 팻걸 관객들의 웃음은 하나의 현상이었다.)에 가서는 나는 좀 얼이 빠져 버렸다. 해변에 우두커니 앉아 노래를 하는 모습은 익숙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웃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나이스가 아니라 엘레나가 수영복을 입고 해변에 퍼질러 앉아 노래를 하고 있었다면 그것 또한 코메디였을까. 나는 실제 생활에서의 비만한 여성들이 겪어내는 비웃음들과 똑같은 수위로 그 관객들의 웃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녀들이 무엇을 하건 간에 그녀들의 모든 행동이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몸소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상은 관객의 웃음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은 채 꿋꿋이 잘 흘러갔다. 영상에서 보이는 아나이스의 캐릭터는 절대로 스테레오 타입의 덫에 걸리지 않았다. 두 아름다운 모녀가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간 옷가게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들어온 아나이스가 고심 끝에 고른 옷은 엘레나와 모양이 같은 것이었는데, 엘레나는 '따라하지 마!'라고 외친다. 아나이스는 부들부들 떨며 이야기하는 언니를 보며 '따라한 거 아닌데?'라고 말해준다. 그녀는 언니를 닮기를 원하지 않는다. 언니의 낭만적인 성적 판타지 - '첫경험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해' - 에도 동감하지 않는다. 아나이스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첫경험을 하게 되면, 이젠 더 이상 처녀가 아닌 자신을 떠나가 버리는 상대 때문에 마음이 아프게 되니까 첫경험은 그저 아무하고나 치루어야 해'라고 말한다. 언니 엘레나가 '너는 나랑 닮은 게 하나도 없어. 그래서 미워.'라고 말하면 '언니도 나랑 닮은 게 하나도 없어서 미워.'라고 말하는 아이가 아나이스다. 영화 초반부에서 아나이스의 행동을 코메디로 받아들인 사람은, 혹은 그냥 터져나오던 웃음에 자기 자신도 당혹해하던 사람들은 점점 예상 밖으로 흘러가는 아나이스의 캐릭터 때문에 더더욱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시선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씬이라면 언니와 언니의 남자 애인이 첫 섹스를 하는 과정을 아나이스가 몰래 훔쳐보는 장면이다. (이들은 한 방을 쓴다) 아나이스는 어떤 감정도 없는 그저 관찰의 시선으로 그 둘을 응시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코메디가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엘레나와 이 남자의 실랑이 부분을 뽑을 것이다. 처녀인 엘레나와 섹스를 하기 위해 그녀를 얼르고 협박하며 절박히 매달리는 이 남자의 꼴이란 정말이지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의 코메디다.) 이 씬을 통과하면서, 아나이스의 시선이 줄곧 이런 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절대 그 행위 자체에 들어가지 않은 채 외부에서 차분히 응시하는 식이다. 그것은 배제 당해서일수도 있고 스스로 걸어나와서일수도 있다.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아나이스의 시선은 영화 전반에 걸쳐 현상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지게 된다. 언니 엘레나가 말하는, 소녀들의 세계에서 지배적인 '사랑'이라는 단어에 거리를 두고 보게 되는 것도 아나이스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아나이스의 시선은 가족 이데올로기의 연약한 껍데기를 허상으로 보이게 만든다. 아나이스가 말없이 수북한 음식을 집어먹으며 예의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하는 그녀의 가족은 허술히 고여진 사금파리처럼 흔들리고 있다. 비참한 결말은 어디에서든 암시된다. 이 가족의 진실은 역시 또 다른 외부자인 엘레나의 남자애인이 방문했을 때도 여실히 드러난다. 사교성이 좋은 어머니의 말을 자꾸만 막으며 창피해하는 아버지는 그녀에게 어떤 존중감도 보이지 않고, 엘레나와 가족들은 자신의 남자애인 앞에서 동생 아나이스의 식습관을 경멸하며 모욕한다. 이 은밀하지만 첨예한 반목 속에서도 이 가족 구성원들은 식탁에 앉기만 하면 휴가 온 화목한 4인가족의 분위기를 내려 애쓴다. 아나이스는 아침부터 식탁에 앉아 서럽게 울지만 그녀의 '사춘기 히스테리'를 막기 위해 가족들은 그녀에게 다시금 음식을 먹이고, 엘레나는 그녀의 입에 머쉬멜로우를 쑤셔 넣어준다. 그녀는 진정된다. 그리고 소녀들의 결말 일 중독인 아버지는 회사로 가 버렸고, 엘레나의 애인도 배신하고 떠나버렸다. 어머니와 엘레나, 그리고 아나이스는 엉망이 된 기분으로 귀경길에 오른다.(실은 아나이스는 기분이 그리 엉망이지는 않다.) 밤의 고속도로, 온갖 차들이 그녀들이 탄 차를 추월해가는 귀경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영화에서 감독은 이 장면을 매우 공포스럽게 찍었다. 마치 액션 스릴러 영화와도 같은 이 아슬아슬한 운전 장면은 어머니에게 매우 힘겹게 그려지고 있다. 이 야만적인 길 위에서 그녀들이 안전하게 있을 곳은 없으며, 이는 영화에서 계속 그려져 온, 남자들로부터 외면당한 이 여자들의 인생이 결코 쉽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위험천만한 씬은 결말로 곧장 이어지는데, 운전을 하느라 피곤한 어머니가 휴게소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새우잠을 자게 된 것이다. 세 여자가 아무도 없는 밤길에 차를 세우고 자는 상황은, 앞의 공포스러운 운전 씬 때문에 더더욱 위험해 보인다. 차에 여자 사진을 덕지덕지 붙인 트럭 운전사의 끈적한 눈빛이 지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의 앞유리는 사정없이 깨어지고 어머니와 엘레나는 어이 없이 즉사하고 만다. 그리고 아나이스는 강간당한다. 결과적으로, 이 두 소녀의 첫 경험은 모두 실패했다. 밤마다 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말하곤 했던 소녀들의 환상은 깨어졌다. 그것도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게 - 괴한이 부수어댄 차유리 소리가 얼마나 관객들을 깜짝 놀래켰는지 모른다 - 이 결말은 소녀들이 학습한, 또한 사회가 겉으로만 말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말들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엘레나와는 달리 아나이스는 그것을 이미 간파한 것이며, 그 힘은 허구에 불과한 것들에 의해 끊임없이 밀려나버린 그녀의 경험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존재까지 허물어져 버리지는 않았다. 아나이스가 차분히 읊는 마지막 대사 '강간당하지 않았어요. 믿지 않아도 좋아요'는 자신이 당한 강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회피가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진짜 실제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녀하고 한 번 자 보려는 위장된 사랑의 속삭임 따위가 가지는 말랑한 허구성이 아니라 진짜 삶에 닥친 역겨울 정도의 생생함.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자신보다는 세상이 백 배 천 배 더 역겨움을 몸으로 알고 있는 아나이스의 인생은 어떤 식으로 꾸려지려는가. 눈부시게 아름답고, 그만큼 무심한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들이 그녀의 눈 앞에서 총천연색으로 펼쳐질 때는 어떻게 할까. 너무 어린 나이에 많은 것을 알아버린 이 소녀가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몸 속으로 음식을 쑤셔 넣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뻔한 위선들에 비해 자신이 말하여 내보낼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어서가 아닐까? 아무리 말하고 또 말하려 노력해도 타인들에게는 여전히 불가해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 분명한 것들이 늘어만 가서가 아닐까? 그녀의 말이 자꾸만 지워지고 흩날려 가고, 그녀의 존재도 점점 옅어지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어서가 아닐까? 채워지지 않는 존재적 허기를, 그녀는 머쉬멜로우와 빵과 샐러드로 부족하게나마 채우는 것이 아닐는지. 서울대학교여성주의자치언론 쥬이쌍스 http://www.jouissance.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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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악여락이 열린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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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정의

이 작품은 4.19 또는 LA폭동을 기념하기 위해서,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제작된 것이다. 이 작품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과의 섬뜩한 연결을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나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에 태어났다. 나는 어린아이로서 4.19를 목격하였고 나의 가족은 그해에 이민을 떠났다. 나의 생일은 4.19가 일어난 날이다. 이는 바로 미국 페미니스트들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핵심 구호의 직설적인 동시에 은유적인 예증이라 할 수 있다. - 민영순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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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제 Women as High Priestess

나는 타로카드 유형부터 일정한 규정에 메이지 않는 민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작업해왔다. 타로카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그것에 연결시킬 수 있음으로해서 대중적 인기를 가지게 된 이미지 형식이다. 이번 전시에서 나는 필리핀 생활 속의 여성의 역사 Herstory에 초점을 맞추어 타로카드의 프레임을 이용한 작업을 보인다. 각각의 작품에서 타로카드의 프레임은 다양한 시, 공간에 놓여있는 필리핀 여성의 이미지들을 틀지우는 정신적인 인도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인쇄기법에서 기인한 에칭 선들은 나의 작품이 드로잉, 혹은 판화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회화적 이미지의 일부로 작용하는 글자들은 구조적 그리드 위에서 이미지 전체의 부분으로 그 경계를 허물게 된다. 또한 작품에 나타나는 다른 이미지들은 사진이나 시각적 개념의 몽타주 속에 편집된 기록들로부터 차용되었다. 여성에 관한 전시는 모든 여성이 자유로운 본래의 자신이 될 수 없는 모순적인 시대에 환영받는 이벤트다. 이 전시가 여성들에게 자신이 지닌 인간 고유의 가치를 전해주기를 바란다. - Brenda V. Fajardo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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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Roots

뿌리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이고 여성의 역사이다. 남성들이 기술한 역사에서 인류의 존속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멋진 나무만 보고 그 뿌리는 보지 않는 것과 닮아있다. 나는 뿌리를 그리면서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대지의 거대한 자궁 속에서 뿌리는 수분과 자양분을 찾아 끊임없이 잔뿌리를 늘려간다. 수많은 잔뿌리로 양분을 흡수하여 위로 빨아올리는 힘은 여성이 아기를 낳을 때 배속에서 밀려오는 파도같은 힘과 흡사하다. 뿌리는 나무를 키우고 잎을 티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만들면서도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뿌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뿌리가 상처받았을 때이다. - 김인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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