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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17
    조선왕조의 궁궐들/창경궁,창덕궁, 상생의 군자나라
    박종권

조선왕조의 궁궐들/창경궁,창덕궁, 상생의 군자나라

창경궁은 원래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이다.성종14년(1483년)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4대 궁궐(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창덕궁)

 

성종 때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령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4,325척이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는데, 광해군7년(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이듬해11월에 마무리되었다. 창경궁 재건보다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창덕궁과 인접한 관계로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는데,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이처럼 창경궁에는 화재로 건물의 변화가 생기고 여러 사건도 일어났다.(위키백과)

 

 

2012년5월16일 오후3시 우등열차를 타고 동해안을 가보려는 마음으로, 청량리 역을 찾았습니다.

 

 

오후4시에 무궁화 호 열차가 있습니다. 갈까 말까 합니다.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망설이다가, 나중에 날씨가 좋을 때 가자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 섭니다.

 

 

역사를 빠져 나오는데, 친숙한 모습의 여자 애가 보입니다. 순전히 제 추론이지만, 꼭 제 둘째 아들 놈 같습니다. 여자 애지만, 분명히 그 녀석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정면5칸, 측면4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밖에서 보면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아 통칸으로 트인1층 건물이다. 인정전은 궁궐에서 으뜸되는 건물로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외관이 주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추어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 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둘러쳐 있다. 어좌 위에는 보개(寶蓋)라 하여 별도의 천장을 설치하여 어좌의 공간적 차별성을 극대화하였다. 인정전이란, 어질게 정치한다, 자비로 다스린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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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제가 둘째 아들 녀석이 태어나기 전에 명석몽 속에서, 둘째 아들 녀석이 저를 찾아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 입니다. 오동통하고 귀여운 처녀 모습입니다. 이 녀석이 전생에는 여자였다는 생각을 가지는데, 이는 이 녀석이 태어난 후에 보여주는 여러 모습들도 그러한 추론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꼭 계집 애처럼 행동합디다.

 

 

환생은 진실이며, 영이 여자로도 남자로도 태어난다는 것 역시 진실입니다. 제가 다른 분들이 적은 책을 좀 보고, 아는 척 하지만, 사실 세상에 알려진 많은 진리들, 어떤 진실에 대한 가르침이나 사례 들은 “진실”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꿈에서 보았던 그 계집 애는 쟁반에 뭔가를 담아서 가져 오더니 저에게 선물로 주는 듯 했습니다. 태어나면서, 아버지가 될 사람에게 복(?)을 가져 온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녀석이 먹을 것은 가지고 온 것인지, 아니면 아빠에게 선물을 가져 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안으려고 하자, 토라져서 뒤로 돌아 섭니다. 연인 관계가 아니라, 부모자식 관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꿈에서 보았던 그 아이의 모습이, 요즘 현실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은2010년부터 입니다. 이 당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데, 여자 애들이 몇 명 들어 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꿈에서 본, 아들 녀석이 태어나기 전, 여자 애의 모습으로 찾아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그래서 이 녀석 모습만 보면, 웬지 모르게 마음이 흐믓해 지고, 참 좋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나타났는데요. 어제 또 본 것입니다. 이게 사실일까? 하는 의혹과 진짜 같다는 두 가지 생각 속에서 늘 혼란스럽지만, 어쨌든 제가 정상 상태는 아니므로, 진실일 가능성이 있는데,

 

 

영의 모습이던지 혹은 누군가가 만든 아바타일 수도 있다는 추론입니다. 그리고 희한한 것은, 제가 추론했던 바와 같이, 영의 그룹, 영의 부족, 종족이 존재한다는 관점입니다.

 

지상에서 가족으로 태어나서 살았던 관계는 아스트랄 유계에서 마무리가 된다고 합니다. 이후 아스트랄 유계를 떠나서, 진정한 영계로 들어가면, 영으로 돌아가는데, 그 영에게 맞는 영의 집단, 영의 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거기가 영의 가족이라고 불러야 할 곳일 것입니다.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지상에 화신해서 살았던 가족관계보다는 더 오래 유지될 영의 근원적 가족 관계 혹은 그 영이 속한 사회, 그 영이 가장 친밀하게 알고 지내고, 서로간에 깊은 이해와 평화가 존재할 그런 근원적 사회의 표본이라고 할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물론, 지상에서의 가족 관계가 해체된다고 해도,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과 우정으로 맺어진 관계는 인연으로 남아서, 계속 유지될 것이기 때문 입니다. 즉, 영으로 돌아가고, 지상에서의 가족 관계가 해체된다고 해도,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는 계속 유지될 것이며, 이것은 인연으로 남아, 다시 다음 번 환생에서 또 다시 가족관계나 연인, 친구 관계로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녀석(영의 모습일까?)을 볼 때마다 무한한 사랑과 애정이 솟아남을 느낍니다. 걸어 가는 뒷 모습을 보면서, “진실로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가져 보았습니다”

 

 

웬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 지더군요. 아빠 믿고 아빠 찾아와서 태어났는데, 아빠가 잘 해 주지 못하고, 고생시키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프기도 합니다. 지상에서의 일입니다.

 

 

일단, 현실 지구에서 두 아들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상류층에 버금가는 생활하게 해 달라고, 돈10억 보내주라는 부탁을 했지만, 그게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010년에도 그랬지만, 두 아들과 전처가 어둡고 음습한 폐가 같은 곳에 갇혀서 머리카락 빠지고, 병에 걸려서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광경을3번이나 목격했기 때문 입니다. 2010년과2012년2월, 5월 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일까?를 생각해 보지만 답은 없습니다. 어쨌든 걱정인데, 제가 생각한 대로, 일단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중에 확인해서 그게 아니면, 알아서 하시오.

 

 

제가 의심하는 부분은, 오리지널 가족들 그러니까 오리지널 두 아들과 오리지널 나만 이렇게 고생하게 만들고, 다른 변종 가족들(?) 내가 모르는 가족들만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냐는 것들입니다. 이 부분도 나중에 확인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저야 일단 그렇다고 치고, 두 아들만큼은 상류층에 버금가는 생활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뿐 입니다. 1차10억이고, 2차20억, 도합30억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일단은 애들이 대학 갈 때까지 제 에미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10억 보내 주고, 이후 대학 졸업하고, 직장 잡으면, 제 먹고 살 것은 벌겠지만, 그래도, 노후까지 에미와 비교적 안정되게 살 수 있도록30억 정도는 지원해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해 보면서, 두 아들 녀석은, 정말 이 녀석들이 맘에 드는 여자 얻고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무탈하게 평탄한 삶, 즐겁고 행복한 삶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부모 마음은 누구나 같습니다.

 

 

꼭 아들 녀석 같아 보이는, 여자 애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짐과 아련함을 느끼며 버스를 타고 창경궁으로 갑니다.

 

 

그런데 좀 희한한 것은, 둘째 아들 녀석의 전생 혹은 영이라고 할 여자 애 모습과 비슷한 사람들 모습이 많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를 두고 아마도 영의 씨족, 부족, 영의 가족 집단이라고 해야 할 그것 같다는 추론을 해 봅니다. 보통 영의 씨족, 영의 가족 집단은 생김새도 비슷 비슷하다고 하니까요. 아들 모습을 생각해서 그런지, 그냥 흐믓하다, 그냥 보기 좋다, 귀엽다, 정이 간다는 그런 모습들입니다. 대부분 착하고 순진하며 선해 보입니다. 과거에 보았던 깡패 같은 사람들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요즘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답은 없어 보입니다.

 

 

저는 한 때 명석몽 속에서 이미 죽은 듯한 두 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두 아들이 서 있는 모습입니다. 영의 모습 같아 보였는데, 이로서 상당히 불길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2008년6월부터 시작된 해괴하고 이해되기 힘든 갖가지 사건들, 도대체 진실이 뭘까 입니다만,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잘 되었기를 바랄 뿐 입니다. 제 근원적 믿음은, “내가 상상하던 그 어떤 안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믿음입니다.제 내면 깊숙한 곳에 내재된 이 기초적 믿음은, 태산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종종 이러한 내적인 확고한 믿음이나 신념은, 그 어떤 안 좋은 사건도 피해가고 바꿔 놓게 해 주는 거대한 힘이 됩니다. 그것이 내 믿음입니다.

 

 

그러나 만약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오후5시, 창경궁을 들르니, 삼성 사람들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이상하게도 제가 글을 적으면, 그 글과 연관된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참 희한 합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라는 의문을 종종 가지지만, 그냥 지구라고 생각하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래 간만에 찾아가서 보는 창경궁은 오늘 따라 더 웅장해 보이고, 오래된 역사적 전통과 문화를 보유한 조선 왕궁의 면모를 느끼게 해 줍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는데, 요새는 이상하게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아~ 우리 민족도 참 세계에 내 놓을 만한 역사와 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그런 자부심 같은 것들입니다.

 

 

워낙 힘 세고 덩치 큰 다른 나라들 사이에 끼어서, 죽도 밥도 아닌 신세로 살아 온 민족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력이 있는 민족입니다.

 

 

주변을 돌아다 보면,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거대한 곰3마리가 버티고 있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구도 속에서 그래도 생존해 왔다는 것이 대단한 저력입니다. 이런 조건에 처한 나라를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인구5천만(남한 기준)이면, 세계 어디를 가도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독일, 프랑스, 영국에 해당될 인구이자, 국력인데, 워낙 큰 놈들이 버티고 있어서 쪽을 못 쓴다는 것입니다.

 

 

남북한을 합치면, 7천만 입니다. 적은 나라가 아닙니다. 고구려 시절, 고구려를 기준으로 통일되고, 보다 강대한 국력을 가지고 나아갔다면, 적어도 만주까지는 우리 나라의 영토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신라가 원흉입니다.

 

 

창경궁은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오래 간만에 느껴보는 평화와 안식의 느낌입니다. 궁궐 중 한 곳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앉아서 가만히 있는데,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마음을 평화롭고 안정되게 해 주는 침묵의 고요함을 느끼며 그대로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1층 건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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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昌慶宮 明政門 및 行閣)은 창경궁 외전 일곽을 형성하는 회랑과 정전인 명정전으로 출입하는 정문이다. 명정문은 정면3칸, 측면2칸,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공포를 갖추었다. 이 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서 옥천교를 지나 명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좌우에 행각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 행각은 장대석 기단 위에 조성되었으며, 행각의 기단은 명정문 기단보다 낮다 (위키 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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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의 환각이 보여집니다. 과거 조선 시대에 그 궁궐에서 살았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의 어떤 희미한 잔영, 환상이 어렴풋이 보인다 느껴진다 고 할 그런 것입니다.

 

명정전 입구 계단에는, 왕조의 상징인, 용과 봉황 조각 문양이 새겨져 있다. 용과 봉황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영물로 간주되었다. 참고로 용은, 동양에서는 영물, 길조, 힘, 권위, 위엄을 상징하였으나 서양에서는 불길함, 사악함으로 간주되었다.

봉황 부조물

용을 형상화 한 조각물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종종 희미한 환각, 환영 같은 것들이 보여지고 느껴집니다. 내가 시간 여행을 하고 있을까요?

 

 

한국, 조선정궁(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다), 궁궐의 특성은 이와 같이, 소나무 노송, 백송, 느티나무 등의 위주의 수풀들로서, 대체로 수목의 크기가 작고, 덜 울창해 보인다. 반면에 일본의 궁궐들은 거대한 수목들과 울창한 숲이 특징이라 할 듯 싶다. 일본 궁궐 유적지의 숲은 울창하나 음산해 보이고 한국 궁궐 유적지의 숲은 수목의 크기가 비교적 작고 덜 울창해 보이나, 밝다. 일본적 특성은 "귀기" "음산함"과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살기" "날카로움"이다. 그러나 한국적 특성은 "밝음" "관대함" "중용적 특성"을 지닌다 할 것이다.

 

어찌보면, 한국적 특성은 선비, 학자 풍이라 할 것이며, 일본적 특성은 무사, 사무라이, 칼잽이, 조폭들의 특성이라고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조선왕조 5백년 간(고려 시대 포함, 고구려 이후는 계속 주어 터지며 살았다) 그토록 얻어 터지고 산 것인데, 이는 인류가 상생 相生의 문명으로 발전하기 전에는, 무력이 우선이 될 수 밖에 없는 상극의 세상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선비 학자처럼 고고하게 살려고 해도, 칼과 주먹이 먼저일 수 밖에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선민족의 비애였다는 생각이다. 상극의 하늘에서는 먼저 주먹이 강해야 한다. 그러나 상생의 하늘에서는 지혜와 사랑이 우선시 될 것이다. 그러나 지구는 불행하게도 상극의 하늘이므로, 주먹이 강해야 하지, 공자 왈 맹자 왈 한다고 해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창경궁을 관람한 후, 다시 창덕궁으로 갑니다. 여기도 많은 궁궐과 누각이 보입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 학생 시절에 본 후, 그 이후는 본 적이 없는 듯도 합니다. 오랜만에 보니, 참 많은 궁궐과 누각, 전각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다‘인정(仁政)’은‘어진정치’라는 뜻이며,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法殿)입니다. 법전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이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 순조3년(1803)에 일어난 화재로 인한 재건, 그리고 철종8년(1857년)에 보수공사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부른다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문무관으로 각각18품계를 새겼다.(다음 백과)

 

창덕궁은 태종5년(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3년(1394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2년(1400년)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받은 태종이 재위5년(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창덕궁'이라 이름지었다. 1408년 태조는 이 궁에서 죽었다. 태종11년(14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창덕궁은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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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 明政, 인정 仁政, 근정 勤政 조선 왕조 시대의 정치 화두 話頭이자 철학 哲學이었다. 명정, 밝게 정치한다 바르게 정치한다, 바르게 다스린다는 의미다. 인정, 어질게 정치한다, 어질게 다스린다 이다. 근정, 열심히 노력한다, 성심을 다해 노력하고 진지하게 정치한다, 다스린다는 의미로 보인다. 조선은 역시 학자 군자의 나라가 되고자 했던 나라로서 그 기본적 정치철학이나 사상이 만일 이상적으로 표현되고 성취될 수 있었다면, 요순 堯舜시대의 유토피아 세계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했는데, 이는 목적과 이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수준의 삶을 현실에서 구현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인간 존재가 진보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보인다.

 

 

 

우리 민족의 특성 중 장점을 부각시킨다면, 어쩌면 상생 相生의 세계를 열어가는 일에 있어서 모범적 사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기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했으며, 자비와 관대, 중용을 덕목으로 하던 군자 君子의 나라(이상적 목표로 했던)였다. 이는 주변의 호전적이고, 잔인하며  무도 無道한 패권주의 覇權主義적인 다른 나라 민족과 비교 시, 상생의 호혜적 문명을 이끌어 나가는데,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장점 부분을 말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폄하하기 위하여, 당파 분쟁, 파벌 싸움에 해가 뜨고 해가 지는지 몰랐던 민족, 모래알 민족, 두들겨 패야 말을 듣는 민족 등의 여러 가지 험담을 하고 있으나, 항상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다. 장점 부분을 말할 때, 그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런 문제들은 사실에 있어서는 지도층, 리더의 자질 문제라는 생각도 한다. 백성(사람)이란 어떻게 교육되고 지도 되고 이끌어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사회와 국가의 주류로서 작용하는 핵심이라고 할 “사상적 조류”는 누가 만드는가? 국가 지도층, 지식층, 즉 리더들이 만들기 때문이다.

 

 

 

 

왕의 보좌, 왕과 신하(3정승이었을 것이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다.)고 앉아서 정사를 논하던 장소.

대조전은 조선 시대 왕비의 처소였다.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36칸으로 앞면9칸·옆면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다음 백과)

 

희정당(조선 왕의 침소, 자는 곳)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임금님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건물을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연산군2년(1496)에 수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일제강점기인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1920년에 지은 것이다.

 

선정전 동쪽으로 내전 일곽이 전개되는데, 임금과 왕비의 생활 공간인 침전이 있는 곳으로 마당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집들이 중첩되어 있어 궁궐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 선정전 동쪽으로 맨 앞에는 임금의 거처인 희정당(熙政堂)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임금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이 있으며 그 뒤 북서쪽에는 경훈각이 자리잡고 있다. 희정당 동편에는 성정각(誠正閣) 등 부속 건물이 있으며, 그 동편으로는 담장을 경계로 왕세자의 처소였던 동궁과 창경궁이 접해 있다(위키)

 

희정당은 임금이 자는 곳, 대조전은 임금과 왕비가 사랑하던 곳, 같이 자던 곳이라고 보면 되겠다.

 

 

 

 

조선시대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데 사용했던 것으로 풍기와 풍기대에 대해 『증보문헌비고』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화강암을 다듬어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긴8각기둥을 세운 모습이다. 8각형 기둥의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옆으로 물이 고이지 않게 배수구멍을 뚫었다. 깃대 길이는 확실치 않고 깃대 끝에는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알 수 있었다.

앙부일구는 세종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큰 것은 시계의 지름이35.2㎝, 높이가14㎝이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며, 작은 것은 시계의 지름이24.3㎝이며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

 

양화당[養和堂], 창덕궁 명정전 서북쪽에 있는 건물. 양화당(養和堂)은 왕비의 생활 공간으로1484년(성종15년)에 기었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으로 인해 불에 탄 것을 매번 다시 지었으며1830년(순조30년) 또다시 불에 탄 것을1843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며, 1878년(고종15년) 철종의 아내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글씨이다. 양화당은 정면6칸, 측면4칸 규모의 단층집으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었고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이다

보물 제818호. 통명전 通明殿은 창경궁에 있는 왕과 왕비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이다.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동쪽에 있는 환경전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창경궁 창건 때인1484년에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16년에 재건하였으나, 다시 정조14년(1790년)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34년(1834년) 창경궁의 전각 대부분을 재건할 때 지은 것으로, 건물은 정면7칸, 측면4칸 규모인데, 정면5칸, 측면2칸을 감싸며 퇴칸이 설치된 형식을 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창덕궁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다.

 

 

경춘전, 원래 대비전으로 쓰인 건물이다. 정조, 헌종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다

 

원래 연산군때 지은 인양전이 있던 터이나 왜란 때 타버렸다. 인조가 인조반정 후 인왕산밑에 인경궁에서 헐어다가 옮겨지었다. 함인정 부근은 마당이 넓어 임금이 신하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많이 사용되었다. 원래 함인정은 전면 열린 공간이 아니었다. 3면은 막힌 공간이었다. 함인정과 환경전 사이에 공묵합이라는 전각이 있었으나 소실되어서 현재는 없다.

 숭문당 밖으로는 내전의 전각들이 전개된다. 숭문당의 서북쪽으로 함인정이 있고, 그 좌우로는 담이 둘러져있다. 이 담 뒤편으로 환경전·경춘전 등의 침전이 있고, 그 북쪽으로 내전의 정전인 통명전이 있다. 환경전에서 통명전으로 이르는 일대는 왕과 왕비가 기거하던 곳으로, 다른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식이 높게 잘 다듬어져 있다.

 

문정전 뒤에 있는 숭문당은 임금의 경연이 있었던 곳으로, 왕이 태학생들을 접견하여 주연을 베풀었던 곳이다. 나랏일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영조가 현판의 글을 직접 썼다.

 

 

문정전,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이다.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은 명정전의 오른쪽인 남쪽으로 명정전과 직교하며 서 있다. 여기서 사도세자의 임오화변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죽은 곳은 선인문 쪽이라 한다. 원래12칸이었으나 복원 때9칸으로 복원하였다. 동궐도에서 보면 문정전 주변에 회랑이 쳐져있다.

 

명정전(바르게 정치한다, 밝게 다스린다)은 창경궁의 정전이다. 대한민국 국보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은 성종15년(1484년)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8년(1616년)에 중건한 건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2단의 월대 위에 정면5칸, 측면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지어, 중층인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보다 격식이 낮다. 특이한 점으로는 건물 뒤쪽에 퇴칸 형식의 월랑을 두고 있으며, 건물 내부의 앞쪽으로 고주를 세우고 뒷부분 기둥은 모두 생략하였고, 정면 양 협칸의 벽면 하부를 전복돌로 쌓아 점을 들 수 있다. 명정전은 뒤쪽 터가 높게 경사져 있어, 뒤를 제외한 세 면에만 경사지에 맞추어 월대를 조성하였고, 좌향도 지세에 흐름을 맞추었기 때문에 정문인 명정문의 중심과 축이 일치하지 않는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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