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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13
    관능과 에로틱/사랑과 네페쉬, 네쉐마의 관계에 대해서.
    박종권

관능과 에로틱/사랑과 네페쉬, 네쉐마의 관계에 대해서.

 

erotic india 1.jpg

인디아, 카마수트라 

 

 

음란 淫亂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무엇이고, 음란 淫亂이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상당히 심오하고 어려운 문제일 것입니다.

 

 

에로틱Erotic, 관능 官能이라고 표현합니다. 에로틱, 관능은 그다지 부정적인 의미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음란이라고 하면,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로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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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에로틱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흔히들, 음란물이라고 표현합니다. 남녀가 성교를 하는 장면을 묘사하거나, 혹은 사진, 영상으로 표현한 경우를 음란물로 규정하는 것이 현재 인간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놓고 잘 살펴 보면, 진정으로 사랑하여, 관계하고 있는 장면도, 일단 사진으로 찍거나, 영상으로 촬영하면, 음란물로 취급 받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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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도시 폼페이 시내 건물에 그려진 벽화들 

 

육체 관계를 하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진정으로 사랑해서 하던” 아니면, “다만 육체적인 욕망에 의하여 하던” 그 외면적 행위는 동일합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서로 안고, 성기를 삽입하거나, 성기를 애무하거나, 육체를 애무하는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는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 세상에서의 어떤 도덕적 판단 기준이라는 것이 참으로 위선적이고, 모순된 것들 투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얼마 전, 특급 연예인들의 마약 痲藥 성교 性交 파티Party 건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난한 건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 입니다. 심지어는 “지성 知性의 꽃, 아나운서들까지도, 성 상납을 했다”는 사실들이죠.

 

 

본능적 쾌락, 본능 本能적 욕망 慾望과 인간이 지닌 지성과 지식, 지혜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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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케이시는, 자신의 전생 前生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전생에서 위대한 신비력을 개발한 고승 高僧이었는데, 진보의 길을 가다가, 그만 관능의 덫에 걸려 추락하고 말았다 는 내용입니다.

 

 

관능, 에로틱이 “타락 墮落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Yes”입니다.

 

 

이 문제는 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광의적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협의적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광의적으로 본다면 “No”입니다. 협의적으로 본다면 “yes”입니다.

 

 

광의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죄도, 벌도, 타락도 아닙니다. 관능은 오히려 사랑의 표현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그것이 바로 사랑 그 자체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죄” “타락” “부도덕”과 같은 부정적 관념은 “현상계의 문제일 뿐 입니다”

 

 

“사상 思象이 구체화 되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표현된 세계”가 “현상계 現象界”입니다.

 

 

현상계란 곧, 관념, 개념, 사상이 구체화 되어 표현된 “제한된 영역”을 의미합니다.

 

 

절대계란 “제한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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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신들의 영역으로 묘사된 그리스 올림푸스 산의 전경, 그리스 로마 신들은 인간적인 신들로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신들로 묘사된다. 

 

 

그 곳은 “구분하고, 판단하고, 판별하는 기준이 없는 곳”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약속”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제 이와 같은 우주, 현상계를 만들어서, 도대체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자 연극을 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제부터 우리는 모두 이 신성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가지고 시작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 신성한 약속은 우리가 말하는 바, 우주법칙이며, 신성한 신의 율법으로 표현되고 있는 그런 것들이죠.

 

 

절대계란 “오로지 조건 없는 사랑으로 진동하는 무한대의 파동주파수 영역, 즉 절대의 사랑만이 존재하는 우리 모두의 고향을 의미합니다”

 

 

왜 절대계가,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할까요?

 

 

조건이라는 것 자체가, 만들어진 조건, 만들어진 개념, 만들어진 하나의 약속이기 때문 입니다. 그것은 신성한 약속입니다.그것이 조건이죠. 조건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도, 이미 그것이 현상계의 관념, 개념임을 생각해 봅시다.

 

 

佛家에서 사량분별 思量分別이라고 말합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고, 이것 못나고, 저건 잘나고, 이건 길고, 저건 짧고, 이건 차고, 저건 뜨겁고~ 이런 개념이 바로 사량분별심 思量分別心 입니다.

 

 

절대계는 그러한 조건이 없는 곳을 의미합니다. 여기는, 현상계에 존재하는 그 모든 사량분별심과 가치 판단, 구분의 척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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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 악도 없습니다. 밝음도 어두움도 없습니다. 잘하고 못하고도 없습니다.

 

 

현상계란, 순수의식이, 자신이 누군지 알려고 하는, 그리고 그 알고자 하는 의지와 그 앎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지식과 지혜를 통하여, 더 발전하고 더 나은 의식으로 탈바꿈하려고 시도하는 “의식”들로부터 만들어진 하나의 제한된 조건 속의 세계입니다.

 

 

신성한 의지로부터 생겨난, 神의 미망 迷妄, 神의 꿈, 신의 게임Game인 것이죠.

 

 

근원에 다다르면, 결국 “사랑만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절대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절대의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면, 절대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절대계란 선도 악도 없는 영역으로서, 현상계의 존재가 “정의할 수 없는 영역이죠”

 

 

왜? 현상계란 “우리가 이렇게 해 보자”는 신성한 의지의 창조적 발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제한된 게임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무한대의 파동 주파수 영역이, 제한된 파동 주파수의 영역으로 분열되고 갈라져서 내려온 영역이 바로 현상계라는 것입니다”

 

 

즉, 제한되었다, 제한된 영역이다 라는 것입니다.

 

 

제한되었다는 말은, 유한을 의미합니다. 유한, 한정된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유한한 의식이 무한한 의식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

 

 

유한하게 한정된 의식이 무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음은, 모래 알 속에 스며들어 있는 의식이, 망망대해 큰 바다의 의식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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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영역 내에서만 그는, 모든 것을 추론하고 인식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상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무한대의 세계가 분명히 펼쳐져 가고 있지만, 우리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죠.

 

 

비근한 예로서,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하여, 쇠로 만든 무거운 비행체를 하늘로 날려 보내는 것에 성공하기 전까지 이른바 세계의 유명한 과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공기보다 무거운 것들, 쇠, 철로 만든 기계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단언했다고 하죠. 갈릴레오는 지구는 태양을 돌고 있는 작은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가 화형 火刑을 당할 뻔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알고 있고, 인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까지만, 눈에 보이고 인식하게 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한한 존재, 한정된 존재들이죠.

 

 

일체 유심조 一切 唯心造란 결국 이런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고, 인식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이 영역이 모든 것의 진실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지나간 지구 인류1만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 줍니다. 현대문명은 이제 약1만년의 주기에 도달하고 있죠.

 

 

1만년이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진보하느냐, 멸망하여 퇴보하느냐의 갈림길이라는 것입니다. 진보냐, 퇴보냐를 결정짓는 분수령이1만년이라고도 합니다. 하나의 문명 文明에 있어서 말입니다.

 

 

유한 有限은 무한 無限을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적어도 이성과 지성, 논리의 도구를 이용해서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한정된 현상계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 입니다. 신성한 약속에 의하여 유한하게 한정되어 만들어진 세계에서 필요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 입니다. 그 한정된 세계를 벗어난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로봇의 예를 자주 듭니다.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입니다. 로봇은 한정된 존재입니다. 인간이 로봇을 만든 창조주들 격에 해당될 것이고요. 인간이 로봇을 설계하고, 그 인공두뇌의Logic 로직을 설계하게 되겠죠. 그러면 로봇은 인간이 만든 알고리즘, 로직의 프로세스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비유를 위해서 드는 예입니다. 로봇은, 인간이 설계하고 프로그래밍한 로직과 알고리즘 내에서 사고하고 생각하고 계산하고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로봇은 그 이상의 영역은 생각조차 할 수도 없으며, 상상조차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로봇이 계산을 잘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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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 영화 속에 등장하는 로보트, 사이보그(전자+기계인간) 

 

아마도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러한 로직, 알고리즘을 만들어서 주입시켜 주기 전에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치입니다.

 

 

한정된 세계, 한정된 두뇌, 한정된 사고체계, 지성, 논리, 이성의 도구로서는, 도저히 무한의 세계, 절대계, 神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결론이 여기서 도출되죠.

 

 

관능, 에로틱이란 그래서 죄도 아니며 善도 아니며 惡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꾸로 본다면, 절대의 사랑을 모방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르가즘의 순간을 잘 경험해 보십시오.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내가 내가 아닌 듯한 느낌, 내가 내가 아니라, 모든 것과 하나가 된 느낌, 내 자아가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듯한 느낌, 일명 황홀한 느낌이 들어오는 것이 오르가즘입니다.

 

 

하늘로 붕 뜨는 것 같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 같고, 미칠 것 같이 좋기도 하고, 말로 표현이 잘 안 됩니다. 평소 이성적이고 지성적이고, 똑똑하고 아는 것 많고, 도도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대단해 보이던 사람들도, 여자들도, 뻑~~~ 가 버리는 순간이 그 순간입니다.

 

 

저로서는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절대의 황홀경에 대한 모방으로서, 현상계의 존재들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성교의 오르가즘, 성교의 창조적 특성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성교 싫어하는 사람은 좀 드물 겁니다.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짐승들이나 미물들조차도 그러합니다. 왜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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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인 성인잡지, Play Boy. 

 

 

그런데 음란 淫亂을 말합니다. 음란? 음란?

 

 

음란 淫亂이란 도대체 뭘까요? “정상적(?)인 사람들보다 좀 더 색(色)을 밝히면 음란일까요?"

 

 

개인적인 견해로는 아닙니다. 음란이란 본래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음란이란, 육욕적인 탐욕에 몰두하여, 사랑을 잊어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을 오로지 성욕과 쾌락에의 욕구 만족을 위한 노예적 대상으로 다루고 취급하는 것,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나, 노예, 종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것, 상대를 자신보다 낮은 대상, 아랫 것으로 취급하고, 함부로 다루고, 그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것 등등이 포함됩니다. 즉, 상대를 같은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사랑 혹은 최소한 좋아한다는 감정조차 가지지 않고 대하는 것, 오로지 쾌락 추구를 위한 목적으로서만 다루고자 하는 것을 음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연예인 마약 성교 사건을 보던 중, 이 일과 연관된 놈이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년은 언제 먹어도 맛있는 보~~지야~~~”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상대를 사랑하거나, 좋아한다면 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

 

 

최소한 존중한다면, 이런 식으로 말하지 못할 것이죠. 이게 바로 음란입니다. 이게 바로 죄악이죠. 사람들은 종종 개념을 혼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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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당신은 최고야~ 당신과 성교하면 정말 너무도 좋아~~ 당신이 정말 너무도 좋군~ 내게 이런 기쁨을 주는 당신에게 감사하게 생각하오~~” 이렇게 표현하는 것과,

 

 

이 년은 정말 언제 먹어도 맛있는 보~~지군~~~ 마약 먹고 헤롱거리는데, 집에까지 데려다 줘~~~ “

 

 

상대를 사랑하거나, 혹은 좋아하거나, 혹은 최소한 존중하거나, 같은 인격체로서 생각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쑤시고 박고 하는데 너무도 말초적 쾌락이 좋다 이겁니다. 너는 내게 있어서 너무도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인형, 노예, 종, 아랫 것 혹은 어떤 쾌락을 위한 도구이다 라는 관점이죠. 이게 음란 淫亂입니다.

 

 

저는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져 있는 고승대덕 高僧大德들이나, 신비력을 개발하여 높은 의식차원에 올라섰다고 알려져 있는 존재들이 너무도 “차갑다” 혹은 “진리라고 알려져 있는 그 어렵고 높은 이상에 치우쳐 집착하고 있다”는 관점입니다.

 

 

딱딱하다, 엄격하다, 냉정하다,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는 그런 점들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가장 중요한 자비와 사랑을 도외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점들입니다.

 

 

여신적 원리가 보다 위대한 근원적 본질이라는 것이 여기서 증명되는데, 결국 여신적 원리란, 사랑과 자비, 동정과 연민이 그 근원적 본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신적 원리는 결국 여신적 원리를 모태로 하여 창조된 원리들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지혜, 지성, 위엄, 권위, 이성과 논리란 결국 사랑, 자비라고 하는 보다 큰 모태 속에서 창조되어 나온 이차적 원리라는 생각 말이죠.

 

 

 

 

관능과 에로틱은 그래서 여신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남자들이 보다 강한 성욕을 지니고 있고, 성적인 관계에서 보다 우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 반대입니다. 여성들이 월등하게 우월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성적인 문제들입니다. 남성들의 성은 보다 저급하고 천박한 면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남성적 원리와 여성적 원리의 차이 때문 입니다.(근원에서의 문제들을 말하는 것이지,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질투한 고추들이 여성적 원리를 억압하고 짓눌러 버린 것이 오늘 날의 지구 사회이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남성들의 성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여성들의 성은 보다 복잡하고 미묘하죠. 그리고 근원적 측면에서 본다면 남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능력들이 그녀들에게 존재합니다. 다만 그녀들이 그걸 모르고 있거나, 억압되도록 교육받고 사는 결과일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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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 관능에는 아름다움과 사랑이 함께 내재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움, 매력, 사랑스러움은 에로틱, 관능이란 요소를 제외한다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주 귀엽고 사랑스런 아기를 볼 때의 느낌과 사랑스런 여인의 육체를 볼 때의 느낌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저는 깨닫게 되었죠. 아주 오래 전입니다. 그렇게 느끼면서 생각해 보았죠. 도대체 에로틱, 관능이란 무엇일까?

 

 

선지자, 현자, 성자들께서 하신 말씀들이 귀에 와 닿았습니다.

 

 

구분된 힘, 나눠진 힘, 구분된 개념, 감정, 느낌이란 없다는 것이죠. 오로지 하나의 힘, 하나의 느낌, 하나의 관념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분화되어, 쪼개져 갈라져서 나간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말씀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아기를 볼 때와 여자를 볼 때의 느낌이 근원적으로 같았다는 점에서 입니다.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럽고 그러면 나도 모르게 고추가 서는 것입니다. 사랑의 느낌이 고추로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여자를 볼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음의 문제일 뿐 인데, 근원이 되는 힘은 하나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경험들입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근원적인 힘이, 여자와 성교하고 사랑하는 육욕적인 측면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아기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그런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이 되는 근원 속에는, “극진한 사랑의 마음과 자비, 연민의 마음이 포함됩니다” 이게 에로틱, 관능의 배후에 숨어 있는 힘이기도 하죠.

 

 

하나의 힘, 하나의 에너지, 하나의 근원적 개념이 여러 갈래로 나눠져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결국에는 하나만 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음란 淫亂에 대한 정의를 저는 그렇게 내리는 것이죠.

 

 

세상에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힘은 바로 “가슴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가슴에서 근원적으로 우러나와 발출되는 마음의 힘은 지구를 뒤흔들 수도 있는 힘을 지닙니다.가슴은 바로 神께 연결되는 통로이기 때문 입니다. 진심으로, 진정으로, 극진한 마음으로 그것을 가슴으로 소원한다면, 그것이 성취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머리와 가슴은 명백하게 다릅니다. 이 점은 다 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근원에서 근원으로 연결되는 그 힘은 그 무엇보다도 강대한 힘과 위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에 옷(육체적 형상)이 중요하다면, 옷은 언제든지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날 시기가 올 것이죠, 옷은 잠시 동안 걸치는 것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현재가 그렇다면 주어진 대로 만족하고, 견디며 살다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요가치를 지닌 사랑을 억지로 조작하거나 왜곡하여 무언가를 하려한다는 것 자체도 옳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동입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입니다. 근원에서 근원으로 와 닿는 필이며, 교감이며, 근원적 진실입니다. 이게 바로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지닌 힘은 비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막강합니다.

 

 

만일 사람이 진실로 이와 같은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 어떤 강대한 악마와 사탄, 어둠의 세력의 준동 앞에서도,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어떤 마법과 마력, 초능력과 정신지배 하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머리는 지배할 수 있어도, 가슴은 지배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슴은 바로 근원과 연결되는 통로이며, 神께서 거하는 장소이기 때문 입니다. 神을 이길 수 있는 惡은 존재치 않습니다. 이게 답이라고 저는 봅니다.

 

 

가슴의 길, 내면적 진실의 길을 따른다면, 그 어떤 악마의 준동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그대들 스스로가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관능, 에로틱 적인 요소가 사람의 의식차원이 보다 높은 세계로 날아오르는 것을 방해할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사랑과 존중, 동정과 연민의 마음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에로틱, 관능이라면, 사람의 의식이 보다 높은 차원으로 날아 오르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

 

 

이는 본능의 영역이기 때문 입니다. 즉, 동물적, 육체적 본능에 의거한 에로틱, 관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슴을 울리는 사랑이 내재된 관능적 요소들이라면, 사람의 의식을 높게 올려주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의식 세계로 그들을 올려줄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요소 속에, 관능, 에로틱이 없다면? 김 빠진 맥주 꼴입니다.

 

 

플라토닉 러브라고 합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 아닌 영적인 존재들조차도, 그저 얼굴만 쳐다보고, 대화나 나누고,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사랑이라면, 어딘가 공허하고 허전할 것입니다. 에너지를 섞고, 나누고, 교류하고, 뭉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 지닌 본질적 요소들이죠.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육체적 관계로 표현되는 것이고, 영적인 존재들에게 있어서는 영적인 에너지를 합치고 교류하고, 뭉치는 것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플라토닉 러브가 일견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런 것들에게서 증명되는 일들입니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하긴, “누군가 이상적인 대상을 놓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비록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도, 영원히 간직될 아름다운 추억으로서 말이죠.그러한 플라토닉 적인 사랑의 마음은 내면의 정서와 의식을 순화시켜 주고, 보다 아름답게 나를 가꿔주며, 보다 높고 이상적인 의식 차원으로 나를 날려 보내 줄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외사랑이든, 짝사랑이든, 사랑은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음란이란, 사랑을 잊었거나, 사랑을 찾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이 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좋게 생각하고, 이상적인 대상으로 보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음은 하늘을 날아갈 듯 하고,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그러한 대상이 없을 때, 우리는 공허해 지고, 의기소침해 지며, 세상은 메마르고 건조해 보입니다. 삶은 지루하고, 공허해 지죠. 사랑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되든 안 되든 그런 것에 의미를 두지 말고,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죠. 그렇지 못하면, 저 같은 상태가 됩니다.

 

 

이건희씨와 이명박 씨 덕분에 무려400만 명과 선을 보고, 2,200명에서 두들겨 맞은 사람이죠. 분하고 원통하고 억울하고 말로 표현 못하는 부정적 감정 속에서 고통 받게 됩니다. 사랑이란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것이 반드시 남녀 간의 사랑에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에로스 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 적인 사랑이 또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 동료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 인류애 같은 것들이죠.

 

 

사랑이란, 나를 바르게 세워 주고, 나를 우뚝 일으켜 주며, 내가 지닌 힘과 능력의100% 이상을 발휘하게 해 줍니다. 나의 자존심, 나의 자부심, 나의 명예심을 고취시켜 주고, 나를 하늘로 날려 보냅니다. 이게 사랑의 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거꾸로 표현된 것이 이건희 표 상표를 부착한, 대박횡재의 거짓된 사랑입니다. 이런 민감한 사안들에게 두들겨 맞게 되면, 그 고통과 상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 됩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이며, 치명적인 문제들이었는지, 그들이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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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고 맑고 사심 없는 사랑을 해 보세요. 사실은 이런 사랑을 해 보고 싶은 것이 제 바램이기도 했죠. 그러나 다 지나간 일입니다. 계산기 두드리지 말고, 한번쯤은 그런 사랑을 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알퐁스 도데의 “별이 빛나는 밤에”라든지, 황순원 씨의 “소나기”에 등장하는 그런 사랑을 한번 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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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홀닥 벗고 마약 드시고 해탈 삼매경 속에서 보~지 맛 죽인다는 말씀을 읊고 계시는 그런 동물적 사랑만 하지 말고 말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사랑입니다. 그게 진실된 사랑이죠.

 

 

용기를 말하지만, 정말 사랑하게 되면 말도 제대로 안 나오게 되는 것이 진실된 사랑입니다. 용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사랑, 극진한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을 만나면 말도 잘 안 나오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판국에 맛있는 보~지라느니, 이 년이라느니 하는 말이 나옵니까? ^^

 

 

사랑에는 나이가 없습니다.나이 먹은 사람이라고 해서 사랑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사랑은 존재의 본질입니다. 어린 아기, 갓난 아기도 사랑을 구하죠. 어머니의 사랑 말입니다. 연로하신 노인들도, 짝이 있어야 하고, 같이 위로하고 벗 삼아 살 짝이 필요하죠. 존재의 본질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 입니다. 나이 먹은 노인네가 주책이야~ 이거 변태 아냐~~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들이 이건희 씨나, 삼성 사람들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저는 아직 노인 네는 아닌데도, 이 사람들이 자꾸 노인 네 취급하고 조롱하고 그럽디다. 잘못된 행위들입니다.

 

 

이건희씨의 인격이죠.

 

 

어쨌든 사랑이란 반드시 육체관계를 해야만 사랑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논하는 관점이, 육체관계로서의 에로틱, 관능적 측면의 것들이므로, 그것을 논하려고 그런 시각으로 글을 적는 것 뿐 입니다.

 

 

여기서는, 사랑하는 대상과 사랑을 이룬다는 측면, 즉, 에로틱, 관능적 사랑의 측면에서 고찰해 본 생각들입니다..

 

 

사랑이란, 나눠져 존재하는 분리된 존재로 생각되는 현상계의 존재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아교 풀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나눠져서 존재하는 개아 個我들, 나눠져 분리되어 홀로 떨어져 존재하는 “독립된 개체들로 오해하고 착각합니다”

 

 

이러한 오해와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본래 하나였으니,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이 그들 속에 있습니다.육체는 나눠져 있으나,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그 마음 속의 열망이 성교라고 하는, 에로틱, 관능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영혼들조차도,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 속에 그들의 영적인 에너지를 뒤섞고 뭉친다고 하죠. 분리된 존재, 외따로 떨어져서 고독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온 우리들이 본래는 하나의 거대한 의식에서 출발한 존재들이며, 하나였다는 희미한 창조의 드라마에 대한 기억들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며, 그러한 사랑을 표현하는 구극의 방법은, 서로의 에너지를 섞고, 가능한 최대한 밀착하여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바램을 표현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게 성교입니다.

 

 

관능과 에로틱이 왜 인간의 의식차원이 보다 높은 세계와 차원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성, 관능, 에로틱은 그 자체로서 중립이며,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리고 근원에 있어서는, “지고무상의 황홀경, 해탈과 각성의 경지, 가장 높은 황홀한 의식 차원을 모방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랑과 존중이 없다면, 아마도 의식이 보다 높은 차원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방해하게 될 것이기도 합니다. “동물적 본능만이 개입된 에로틱, 관능의 한계점이죠”

 

 

이와 같이, 한가지 사안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각도에서 그것의 본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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