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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지각>에서, 1

두 번째 강의

 

어제 여러분은 제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주신 만큼, 오늘 제가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여러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재와 우리 사이에 놓아 버린 인공적인 도식을 제쳐 버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되어 버린 어떤 생각이나 지각의 습관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와 운동성에 대한 직접적 지각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우선 이러한 노력의 결과를 즉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변화, 모든 운동을 절대적으로 분할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운동으로부터 시작합시다. 나는 내 손을 A 지점에 두고 있습니다. B 지점으로 손을 옮기면, 나는 AB라는 간격을 가로지르게 됩니다. 저는 A로부터 B에 이르는 이 운동을 본성적으로 단순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우리들 모두가 직접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A에서 B로 우리의 손을 움직인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손을 멈출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긴 합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우리가 다루는 것은 [문제의 운동과] 같은 운동이 아닙니다. A부터 B까지의 단일한 운동은 더 이상 있지 않게 되고, 가정에 의해서, 하나의 간격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운동이 있게 됩니다. 안으로부터 근육 감각을 통해서도, 밖으로부터 시각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지각을 갖게 됩니다. 만약 내가 A부터 B까지의 운동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나는 그 운동이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분할 불가능하다고 단언해야 합니다.

 

내가 A로부터 B로 움직이는 내 손을 보면서, 그 간격 AB에 대해서 내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여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간격 AB는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A에서 B까지의 운동도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왜냐면 이 운동은 그 간격에 정확히 들어맞기 때문이다.” 또는: “이동하는 매 순간마다, 그 운동자는 어떤 지점을 지나며, 따라서 그 운동 안에서 원하는 만큼 많은 단계들을 구분해낼 수 있고, 따라서 그 운동은 무한히 분할 가능하다.” 하지만 잠시 숙고해 봅시다. 어떻게 운동이 그것이 가로지르는 공간과 들어맞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움직이는 어떤 것이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과 일치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움직이는 대상이 그것의 통과 궤도 위의 한 지점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대상은 그곳을 통과합니다, 또는 다른 말로, 그것은 그곳에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거기 멈추었다면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멈춘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과 동일한 운동이 아닙니다. 그 이행에 아무런 중단이 없다면, 하나의 이동은 항상 단 한 번의 도약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이 도약은 몇 초, 혹은 몇 날이나 몇 달,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도약인 순간, 그것은 분해 불가능합니다. 단지, 일단 이행이 완료되면, 그것의 궤도는 공간이고 공간은 무한정하게 분할 가능하므로, 우리는 운동 자체도 무한정하게 분할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하기를 좋아하는데, 왜냐면 어떤 운동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위치의 변화가 아니라, 위치들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운동이 남기고간 위치, 그것이 차지할 위치, 만약 중간에 멈추었을 경우 그 운동이 차지했을 위치. 우리는 부동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운동과 운동이 통과한 공간의 지점들의 부동성을 더 잘 일치시킬수록, 우리는 그 운동을 더 잘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실재적 부동성이란, 우리가 그것을 운동의 부재로 이해하는 한에서,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운동이 실재 그 자체이며, 우리가 부동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물들의 어떤 상태인데, 이는 두 기차가 평행하는 선로 위에서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을 때 발생하는 어떤 상태와 유비적으로 비슷합니다. 두 기차들 각각은 다른 기차에 앉아 있는 승객들이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예외적인 이러한 상황이 우리에게는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행동을 할 수 있으며, 그 사물들도 우리에게 작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기차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오로지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경우에만, 다시 말하면, 그들이 같은 방향과 같은 속도로 가고 있는 경우에만, 문을 통해서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서로에게 말을 건넬 수 있습니다. “부동성”이 우리 행동의 필요조건인 만큼, 우리는 그것을 실재로서 놓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며, 우리는 운동 안에 무엇인가가 겹쳐져 놓여 있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실행보다 더 정당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마음의 습관을 사변의 영역으로 가져간다면, 우리는 진정한 실재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일부러 만들어낼 것이며, 실재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것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엘레아의 제논의 증명들을 상기해 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 증명들은 모두 운동과 그 운동이 주파한 공간에 대한 혼동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는 최소한 공간을 다루듯이 운동을 다룰 수 있으리라는 확신, 운동의 마디를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나눌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에 따르면, 아킬레스는 절대로 그가 쫓고 있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아킬레스가 도달하면, 거북이는 그 시간만큼 그보다 멀리 가 있을 것이고, 이것이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은 수많은 방식으로 이 증명을 반박해 왔는데, 이 방식들은 너무 까다로워서 그 각각의 반박들은 다른 어떤 반박이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권리를 그로부터 빼앗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작업을 쉽게 만드는 아주 간단한 수단이 있었습니다. 아킬레스에게 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결국 거북을 따라잡고 심지어 거북을 앞지른 만큼, 바로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그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걸어서 움직임으로써 운동의 가능성을 시연해 보였던 고대의 철학자는 옳았습니다. 단, 그 철학자의 유일한 실수는 동작으로만 표현했을 뿐 거기에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킬레스에게 그 경주에 대해서 설명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제논은, 내가 있는 지점에서 거북이가 있었던 지점으로 내가 움직이고, 다시 그 지점에서 거북이가 그 때 있었던 다음 지점으로 움직이며, 이와 같이 계속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내가 뛰도록 하는 그의 절차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나는 한 걸음을 내딛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걸음을 내딛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마침내 몇 발자국을 디딘 후에 한 발자국을 더 내딛음으로써 그 걸음으로 거북이를 앞지릅니다. 따라서 나는 연속적인 분할 불가능한 행위들을 수행합니다. 나의 진행은 이런 행위들의 연속입니다. 당신은 그 진행을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걸음의 수만큼 나눠서 부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 진행을 다른 법칙에 따라서 재분절하거나,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분절되어 있다고 가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제논이 한 대로 나아가는 것은, 이 달리기가 마치 그것이 주파한 공간처럼 자의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행이 실제로 궤도에 들어맞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는 운동과 부동성을 일치시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를 다른 하나와 혼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운동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부동성으로 구성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그 운동을 살펴볼 때 마치 그 부동성들을 가지고 운동을 재구성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운동이란 어떤 한 점, 그리고 다른 한 점, 이렇게 무한정하게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다른 무언가가 있으며,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가는 간격에는 그 간격을 뛰어넘는 이행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심지어 우리가 아직 두 개의 연속적인 점들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이행을 가정해야 한다고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이행에 우리의 주의를 고정시키는 순간, 우리는 즉시 그 이행을 지점들의 연속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이행에 대해서 고려해야만 하는 순간까지 그것을 연기합니다. 우리는 이행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고, 그것에 이름을 부여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 지점이 만족스럽게 자리잡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그 지점들로 관심을 돌리며 그 점들만을 다루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우리는 운동으로서의 운동의 광경이 우리의 사유 속에 일으킬 수 있는 그러한 어려움들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즉시 운동을 부동성들로 채우게 됩니다. 만약 운동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즉, 우리가 처음부터 부동성이 실재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운동은 우리가 그것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갈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운동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변화든 이와 같다고 말하겠습니다. 모든 실재적 변화는 분할 불가능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그 변화를 구별되는 상태들의 연속과 같은 것처럼, 그리고 이 상태들이 마치 시간의 선을 형성하는 것처럼 다루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변화가 우리 안에서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사물들 안에서도 그러하다면, 우리들 각각이 “나”라고 부르는 이 끊임없는 변화가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끊임없는 변화에 대해서 어떤 작용을 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두 변화는 서로에 대해서 앞에서 언급한 두 대의 기차와 같은 상황에 처해져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대상이 색깔을 바꾼다고 말하며, 그리고 여기서 그 변화는 변화의 구성 요소가 되는 색조들의 연속이며, 그 색조들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첫째로, 만약 각각의 색조가 어떤 객관적 실존성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무한히 빠른 진동이며, 곧 변화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그에 대해서 갖고 있는 지각은, 그 지각이 주관적인 만큼, 우리의 신체의 일반적 상태의 어떤 고립되고 추상적인 측면에 불과하고, 이 상태는 전체로서 계속해서 변화하면서 이러한 소위 불변적인 지각이 자신의 변화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야기합니다. 사실, 계속해서 변경되지 않는 지각이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색깔, 우리 밖에 있는 그 색깔은 운동성 그 자체이며, 우리의 신체 또한 운동성입니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우리 지각의 전체 체계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행동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외부와 내부의 운동성 사이에 아까 말한 두 대의 기차와 비슷한 상황을 일으킬 수 있는 방식으로 조절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좀 더 복잡하지만, 같은 종류의 상황입니다. 두 변화가, 대상과 주체의 변화가, 특정 조건 하에서 일어날 때, 그 변화들은 “상태”라고 불리는 특정한 외관을 산출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들”을 일단 소유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은 그것들을 가지고 변화를 재조립합니다. 반복하건대,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변화를 상태들로 분해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들에 작용을 가할 수 있게 해 주며, 변화 그 자체보다 상태들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유용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행동에 유리한 것이 사변에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변화를 정말로 상태들로 구성된 것으로 상상한다면, 당신은 즉시 해결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문제들은 오로지 외관만을 다룹니다. 당신은 진정한 실재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됩니다.

 

저는 이 요점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각자 실제로 한 번 실행에 옮겨 봅시다. 어떤 변화, 어떤 운동의 직접적인 시각을 한 번 갖도록 해 봅시다. 우리는 절대적 분할 불가능성의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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