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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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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반복

발단은 별 거 아니었다. 그저 엄마한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어봤냐고 물어봤고, 엄마가 읽어봤다고 대답한 것 뿐이었다.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였다. 굳이, 왜 물어봤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내가 원래 엄마한테 이런저런 일들, 특히 최근에 겪은 일 중 내게 의미있는 것으로 남겨졌던, 그래서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던 것 같은 일들을 조잘조잘 얘기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죄와 벌"을 읽은 것도 그러한 '일'이었고, 엄마는 (예상 외로) 읽었다고 대답했다. 딱히 예상 외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은, 딱히 읽었거나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그걸 물었을 때의 내 의도나 대답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 없이, 내게 어떤 끔찍한 기억/예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런 질문을 왜 던졌을까.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겠다. 왜 나는 내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며 학교 공부는 그럭저럭 되어가고 있고 최근에 LCD 모니터를 새로 샀으며 방 한 구석에 곰팡이가 피었다는 것 말고도, 베르그손이 왜 중요한 철학자이며 이혼에 대한 그런 시각에는 어떤 문제가 있고 내가 "죄와 벌"을 읽고 깨달은 점이 무엇인지 따위를 엄마에게 얘기하는 것일까? 물론 꽤나 '학술적인' 이 질문들이 내 삶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소소한 것들이 나의 일상이듯 상대적으로 무거운 저 주제들 또한 나의 일상이기 때문일 것이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한 가지 사악한 의도를 숨기고 있다. 나는 그걸 의식하고 있고, 또한 특별히 내가 그렇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사실 나는 엄마를 계몽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엄마에 대한 나의 우월성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자녀교육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엄마에게 배운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타협지점은 있다. 엄마는 '아기-나'에게는 최고의 엄마였다. 그러나 그 후로는 아니다. 내가 자타의 비난을 무릅쓰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엄마가 내게 책을 골라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어린이백과나 어린이 문학전집은 사 주었지만, 그 뒤로는 내게 무슨 책을 읽혀야 하는지 몰랐다. 따라서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침몰하고 만다. 정보를 얻을 곳도 없기에 방황한다. 그런데도 엄마는 자기가 가장 잘났다. 특히 자녀 교육에 있어서 그렇단다. 나는 화가 난다.

 

다소 거칠게 정리된 나의 개인적인 '지성사'는, 엄마로부터 벗어나려는 나의 '가족사'로 다시 쓰여질 수 있다. 내가 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때, 나는 엄마의 무지를, 교양 없음을, '교양 있는 척'을 그토록 증오했던 것이다. 나는 교양과 지식을 얻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집과는 단절된 존재로서 나를 새롭게 수태하고 싶었다. 자기가 '최고의 무엇'이라고 반복해서 되뇌이므로써 얻게되는 효과가 아닌, 진짜인 지식과 교양을 얻고 싶었다. 엄마는 그 위약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엄마 때문에 나는 길이 잘못 들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을 한다. 집은 천박한 곳이었고 나는 거기를 떠나 교양인과 지식인의 세련된 공간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집이 특별히 천박했던 건, 그곳에 유사-교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엄마를 부끄러워했다. 나는 내가 배운 새로운 것들을 엄마의 코 앞에 들이대며 윽박질렀고, 그 때 느끼는 우월감을 내가 엄마로부터 벗어난 징표로 여겼다. 베르그손이나 도스토예프스키도 모르면서 교양은 무슨... 그런데, 읽었다니!

 

엄마는 "죄와 벌"을 읽었다. 당장에 이 말을 듣고는 거의 놀라지 않았는데, 사실 엄마가 엄마 말로 '소싯적에' 책을 좀 읽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무정"을 읽다가 울기도 했고, 에리히 프롬의 어려운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발밑으로 달려드는 세월에 묻혀, 야금야금 불어나는 삶의 무게에 눌려, 읽다가 말다가, 눈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회사에서 돌아오면 잠자기 바쁜 십 수년의 생활이 결국에는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은 오롯이 자식놈에게 바쳐졌다. 그런데 인제 이 자식이라는 것이 윽박지른다, 지금껏 뭐 했냐고. 왜 책을 안 읽혔냐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뒤늦은 반성과 효도는 엄마에게 직접 가서 하는 것으로 좀 더 미루고, 다른 생각에 좀 더 붙어있어야만 한다. 띄엄띄엄 시집과 소설을 읽고, 대단한 능력은 없기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격정과 환희를 그저 조금씩 빌려 쓰고, 자신은 주변 사람들과는 다른 고귀하고 세련된 종족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슬픈 자존심만으로 보잘것없는 일상을 버텨내는 것. 그것은 엄마의 인생이기만 한가? 나의 인생일 수도 있지는 않은가?

 

엄마가 이룬 것이 보잘것없다면,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엄마보다 당당한 것은, 살 날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뿐이지 않을까? 따라서 내 삶을 평가하려는 시도에 '잠깐 기다려 보세요, 아직 더 남았다니까요'를 더 쉽게 외칠 수 있는 것뿐이지 않을까? 내가 철학자가 되고자 한다면, 엄마는 지금의 모습이 되고자 했던 것일까? 엄마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내 능력으로서는 택도 없는 높은 지위를 꿈꾸면서 서서히 질식하는 중은 아닐까?

 

나는 내가 좋은 대학에 왔기에 별종인 줄 알았다. 그러나 머리는 엄마 쪽을 닮는 거라기에 비로소 자주 왕래하지 않는 외가 친척들 쪽으로 눈을 돌리니, 유명한 대학 안 나온 사람이 없다. 나는 내가 특별히 '순수학문 지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쪽도 상당수가 '순수과학' 전공이다. 그래도 나는 철학을 택했기에 내가 별종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도 물려받았다. 엄마와 아빠는 수 년째 '종교 전쟁' 중이다. 둘이 대립하는 지점을 보면, 영락없는 철학적 문제가 놓여 있다. 많은 것이 정해져 있다. 운명이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다. 그게 누구든, 울면서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무엇을 배웠든, 그것을 단 한 명의 후손에게라도 전할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어렵게 배운 것을 그의 발 밑으로 깔아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단 한 명의 제자도, 자식도 키우지 못한 채, 끔찍한 반복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증오와 멸시와 환멸의 반복을? 멸종의 그 순간까지?

 

답의 일부분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내가 엄마 나이 정도는 먹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이룬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구체적인 대답 하나는 얻게 되겠지. 그리고 아마 나는 그걸로 만족할 것이다. 인생은 그리 끔찍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의미에서 끔찍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인생이 반복하는 것이라 해도 그게 그리 끔찍한 것만은 아니지, 하고 생각하면서 스무 살 먹은 자식에게 '하는 일 없이 쳐박혀 책이나 읽는 저 벌레같은 인간이 싫어' 하는 소리를 들으며 살 수도 있다.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껴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야만 내가 그걸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그래야 할 책임이 있다.

 

 

- 2006년 2학기, 조금만 더 잘 살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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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Poetry

What is Poetry

 

 

When we refer to “language”, we should be aware that there are kinds of languages in use, that differ mainly in function. In our everyday lives, we communicate information about the weather, the newly published books, or the best way to get a good score, through the language which is said to be in practical use. Otherwise language persuades us to buy some clothes, to visit our friend's house, or to vote for a candidate. This time, it is in argumentative use. Lastly, there is another use of language that seems to exclusively relate to literature. The language in literary use creates concentrated and organized experience in many works of literature. The language in poetry may be called, as in other kinds of literature, to be in literary use.

 

             As to the poetry, it is experience. When it is said to be experience itself, it is not about experience. Actually, ordinary language is frequently about experience, so the language can have it as its object. The poetic kind of language, however, may not regard to experience as a thing or an object which can be transferred, handled, and analyzed. This kind rather composes, constructs, and synthesizes experience. While ordinary language analyzes experience and puts it under the process of our intellects, poetic language synthesizes it and opens its ways to our senses, emotions, imaginations, as well as intellects, or to something else if later discovered.

 

             As far as the language is “poetic”, here is made the distinction between poetry and other kinds of literature. The poetry is condensed in form when compared to other kinds. When a work of literature narrates something about an experience, it simultaneously hides something as it gives us impression that it provides everything we need to recompose in our mind the reality of the experience. Though, a poem is condensed in that it does not pretend to present everything, so it does not hide anything. It retains the comparatively intact reality in relatively short length and by limited words, which is ironical. But this distinction needs to be understood as a continuum which takes purely poetic language and purely ordinary one as its two extreme ends. They may exist only in our thought, and actual works of literature may be holding their position between the two. In other words, other genres of literature tend to use ordinary language more, but the poetry rarely does.

 

             We may pay more attention on our definition of poetry by considering a brief and famous statement that MacLeish suggested in his poem, “Ars Poetica”: “A poem should not mean / But be.” It seems that the verb “mean” implies, for to mean is to mean something, the existence of the meaning or the content of the poem, so experience is contained in the poem and may be, when readers read it, transferred to them as a thing, a bundle of words, independent of the poem itself. The verb “be”, on the other hand, shows that there is no other thing which is on a different level than the poem. A poem is something itself. So, a poem should not express out of itself something like content, reality, or experience, but should be experience itself.

 

             If a poem is divided into two parts—the poem itself, and the thing it expresses—, the latter is said to be transferred to a reader through the medium of language. As the very part of the reality can be carried through the language, the poem cannot help but distort the reality, or the experience. If a poem is, however, not divided, there is nothing conveyed to a reader. What is given to the reader is the poem itself, and s/he may only participate in it. As we read a poem, we participate in an event and experience it, constructing it with our other prior experiences. We participate in the being of the poem.

 

             Experience, as far as we consider it as the meaning contained in a poem, is presented through the medium of language that, to some degree, necessarily reduces and distorts the reality. If we strive to catch what the poem really means, there is always something leaking and we are sure to misunderstand or partly understand it. To experience is somewhat different. Its concern is the reality before it is articulated by language. When reading a poem, we should not try to turn the whole thing into some language-concerns, but rather make it our own experience which is not articulated and interpreted. What is the most difficult is that we should do it with language. So, poetry is a struggle to grasp the reality itself through the language that never touches it without distorting it. The struggle may not come to an end.

 

 

[영미시강독 수업에서 레포트로 제출했던 것을 아주 약간 손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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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생각

아래의 글은 최근 보건의료노조와 한 대학 총학생회 사이에 있었던 사건에 관한 것으로서, 현장에 있었던 총학생회장(직무대행)이 작성한 글이다. 우선, 이 글에는 "이상이 사실관계"라고 되어 있으나, 여러 가지 정황상 왜곡이나 오류, 누락 등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현장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이 상황에 대한 다른 의견을 내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이 글을 기초로 몇 가지를 확인해 두고 싶어서 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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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대학교 학생여러분
총학생회장(직대) ㅇㅇㅇ 입니다.
새벽에 있었던 사건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1. 기숙사에 계시는 분들이 총학홈페이지, ㅇㅇㅇㅇㅇ 등에 제기한
소음에 대한 항의글과 총학 집행부 핸드폰으로 들어오는
"소음 항의"를 해결하기 위하여
저와 ㅇㅇㅇ 미디어국장은 집회의 장소인 노천강당으로 갔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숙사생들이 항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단지 노천강당을 빌려 쓰는 게 아니꼽거나 꼴보기 싫어서 의도적으로(적극적으로) 노조원들을 몰아내고자 이런 불평을 쏟아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항의는 복잡한 상황 파악을 기피하는 일반 사생들의 중의라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소음 항의를 해결하기 위하여" 총학생회장과 미디어국장은 어떤 준비를 하고 가야 했을까? 즉, 어떻게 해야만 그 항의를 '해결하는 것'이 되었을까?

 

이미 진행되고 있는 행사를 완전히 중단시킬 작정이 아니었다면, (행사를 하는 것 자체가 아니꼬운 게 아니라 다만 시끄러웠을 뿐이었으므로) 어느 정도까지 행사에서 발생하는 소리의 볼륨을 줄여야 할 지는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준비나 합의가 되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이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다툼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즉, 그냥 "줄여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줄이고자 하는 측에서는 상대편이 줄인 것보다 더 줄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고, 행사를 주관한 측에서는 상대편이 줄이라는 것보다는 조금 덜 줄이고 싶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객관적으로 얼마나 줄였는가 하는 것은 절대로 논쟁이 될 수 없다. 처음에 '시끄럽다'고 한 사생들에게 물어보았어야 하는 것.]


2. 보건의료노조 "ㅇㅇㅇ 단장"을 찾았으나 자리에 안 계셔서
우선 사운드를 총괄하는 무대 옆 콘솔 쪽으로 갔습니다.

3. 여기서도 단장을 찾았으나 안계시고, 책임자를 자처하시는 분이
계셔서 "ㅇㅇ대학교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잠을 못 이루고 있으니
볼륨을 줄여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4. 우선, 지금 진행 중인 한 곡만 끝나고 볼륨을 줄여주신다고 하여
한곡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오히려 의외인데, 바로 여기에서 주먹이 안 날아간 것만 해도 다행이다. 나는 솔직히 이 아저씨들이 몹시 무섭다.]

5. 한곡이 끝나자 소량의 볼륨을 줄이셨습니다.
그래서 현재 크기의 절반으로 줄여달라고 요청 드렸습니다.
역시 또 소량을 줄이시기에 다시 줄여달라고 요청 드렸습니다.
그러자 지금 진행중인 한 곡 끝난 후에 줄이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실 관계에 대한 논쟁이 있는 모양이지만, '얼마나 줄였나'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양 측에서 모두 소리의 크기에 대해서는 자의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만 증명할 따름. 차라리 사생에게 물어보았어야 했다. 전화 연락 등의 방법을 사용해서.

 

요컨대, 음량을 줄여달라고 요구하는 측에서 계속해서 음량을 줄여달라고 할 경우, 그건 행사 주최측에 대한 도발로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계속 줄여달라고 하다가 어느 선에서 물론 그들은 만족하겠지만, 그렇게 볼륨을 줄인 측의 입장에서 볼 때는 완전히 농락당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요구하는 측이 완전히 자의적으로 음량을 판단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으므로). 따라서 정확한 기준을 제시했어야 했다.]


6. 이러한 언쟁이 계속되는 도중에 총학 미디어 국장이
콘솔의 볼륨을 내렸습니다.

 

[이것 역시 도발적 행동인데, 딱히 할 말은 없다. 나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자존심이 센지, 오만한지, 혹은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7. 이에 운용자는 바로 볼륨을 올렸고, 운용하시는 분 왼쪽에 계시는 분이
ㅇㅇㅇ씨의 멱살을 잡고 오른쪽에 계신분이 주먹으로 ㅇㅇㅇ씨 얼굴을
가격하였습니다.

 

[아무리 정상 참작을 하고 사실 관계에서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역시 이 부분(과 여기를 포함하여 아래에 계속되는 폭행에 대한 기술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큰 짜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할 수 있겠다.

 

1) 싫다. (실현 불가능한 상상이라는 걸 잘 의식하고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만) 손을 잘라버리고 싶다. 어찌 그리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지. 아니, 아무리 자기 감정이 상했기로서니 거기서 손찌검을 하는 식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발동하는지. 정말 유치원(혹은 유치장)에 다시 가라고 말하고 싶다.

 

2) 무식하다. 어쨌든 그 사람은 일을 다 그르쳤다. 바보. (일이라는 게 얼마나 의미있는지도 모르겠지만)]


8. ㅇㅇㅇ씨는 뒤로 넘어지고, 노조분들 수십명이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노조원들과 ㅇㅇㅇ씨를 분리시키려고 막고있는 중에
ㅇㅇㅇ씨가 일어나면서 노조원들에게 몸부림을 치고, 신발을
던지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사실 관계에서 문제가 있다는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ㅇㅇㅇ씨가 무술인이 아닌 이상 여러 '노조원'들을 상대로 대단한 무공을 펼쳐 폭행을 가했을거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ㅇㅇㅇ씨가 아무리 그 상황에서 싸가지없게 보였다 한들(분명히 그랬을테지만) 어쨌든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다고 보는 편이 좀 더 적절할 것 같다. 아래에서 좀 더 확실해진다.]

9. 이어 노조원들이 ㅇㅇㅇ씨를 넘어뜨려 수십명의 노조원들이
ㅇㅇㅇ씨를 발로 밟는 등의 구타를 행하였습니다.
(노조원 한 분과 ㅇㅇㅇ씨가 싸웠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수십명으로 부터 구타 당한 것입니다.)

 

[이런 데에서.]


10. 어느정도 간부급의 사람3~4명이 오자, 수십명의 노조원들이
저와 ㅇㅇㅇ씨 머리채를 휘어잡고 천막쪽으로 끌고 갔습니다.

 

[여기에서도.]


11. 저와 ㅇㅇㅇ씨는 천막에서는 따귀를 5~6 차례 불특정 다수로 부터
맞았습니다. 머리채를 휘어잡힌채로 고개 숙이기를 강요받고
뒤통수를 4~5차례 타격 당하였습니다.

 

[정말 혐오스럽다. 이게 정확한 사실이라면, 소위 운동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인간들의 일부가 (아마도 일상적/가능적으로)하는 짓거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일부를 마치 썩은 살처럼 도려내지 않는다면, 운동의 구호도 공허할 뿐이다. 나는 이런 인간이 내뱉은 구호 따위는 조금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바로 앞 문장은 분명히 오버한 것이지만, 일단 그대로 둔다)]

12. 총학이 노동자들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하시면서
사과를 강요하셨습니다.
우선 먼저 볼륨을 내린 행동은 무례했다고 사과드렸습니다.

 

[모든 것은 여기에 기인하는 것 같다. 당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팩트에서 출발하는 것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에 살고 싶다. 사생들 잠은 못 재울 망정...]

13. 돌아가려고 하자 강제로 잡혔습니다. 계속해서 머리 숙이기를 강요 받으며
ㅇㅇㅇ씨의 핸드폰을 뺏고, 갖은 욕설을 퍼붓는 등의 강압적인 행동이 계속되었습니다.

14. 노조 규찰대원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우리끼리 해결하겠다" 면서
옆에 계시던 청원경찰 분들을 막았습니다.

15. 노조 규찰대원들은 일단 단대 학생회에 연락해서 해결하겠다면서
전화를 하자 농대회장, 농대 부회장, 법대 회장, 사범대 부회장 등이
와서 저와 ㅇㅇㅇ씨를 관망하였습니다.

16. 노조원들은 강압적인 행동으로 사과를 강요하였고, ㅇㅇㅇ씨가
먼저 폭행을 일으킨 것처럼 진술하도록 강요하셨습니다.
(ㅇㅇㅇ씨가 볼륨을 먼저 내린 것은 사실이지만, 폭행은
노조원들이 일방적으로 퍼 부은 것이었고, ㅇㅇㅇ씨는
이를 막기위한 몸부림 과정에서 신발을 던지는 등의 행동을 한 것입니다.)

17. ㅇㅇㅇ 집회 단장이 와서 학생처 주임선생님과 농대, 법대 회장이 있는 가운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에 사과를 하셨고, 저는 ㅇㅇㅇ씨가
볼륨을 내린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사과드렸습니다.

18. 청원경찰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ㅇㅇㅇ씨는 진찰을 받고
입원을 해야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듣고, 입원 수속을 밟았습니다.

19. 어두운 곳에서는 못 봤지만, 이두희씨의 옷은 군데군데 찢겨져 있었으며,
온몸이 피와 상처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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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사실관계 입니다.
노조 간부들과 여러 단대회장/부회장들은 대책회의를 하여
입장을 맞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 곳이 몸도 아프고, 정신도 혼미하여
입장이나, 향후 대책 부분에 대해서는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학생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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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내 입장인 바, 여기에 제기된 내용이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내가 여기에 덧붙인 나의 의견을 수정할 생각이 없다. 이런 식의 지긋지긋한 정치는 제발 그만두라고, 제발 끝장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시위대의 폭력과 전경의 폭력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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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자세

철학(혹은 학문)은 (그 체계 구축에 있어서) 정교해야 하고, (현상과 텍스트 분석에 있어서) 엄밀해야 한다. 혹은 최소한 이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이 엄밀성은 하늘이 두 쪽 나고 바다가 갈라져도 꼿꼿하고 흔들림 없이 버틸 수 있는 엄밀성이다.

 

그러나 그런 엄밀성은 과연 있기는 할까?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하나의 철학이 절대적일 수 있나, 혹은 영원할 수 있나? 내 생각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이것만은 절대적인 듯하다) 그럼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종류의 엄밀성을 추구해야만 하는 철학, 혹은 그러한 철학함의 방법은 모순이 아닐까? 아마도 모순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또한 나름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지는 않을까? 모순은 곧 경계이고, 항상 경계에서만 무엇인가가 발생하므로. 요컨대, 그 목표가 모순적이기 때문에 곧바로 폐기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이 모순이 '무의미'한 것으로 남겨져서는 안 되겠다. 의미있는 모순만이 폐기의 위협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엄밀성을 추구한다는 것(+A)'과 '절대적인 엄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B)'은, 양자 각각의 부정(즉 -A와 -B)에 해당하는 입장과 결정적으로 갈라짐으로써 이를테면 다소 유동적이고 불안한 연대를 맺는 바, 이 연대의 그러한 유동성으로 인해 철학(학문) 자체의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 있다. 즉, 이 연대는 부정적으로는 '-A도 -B도 아닌 것'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이처럼 느슨한 규정이 철학함의 다양성을(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다양한 철학들의 적합성을) 보장한다.

 

'-A'의 문제는 사유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데 있다. 여기서 방점은 '엄밀성과 정교함을 추구하느냐 추구하지 않느냐'에 찍히는 것이지, 그 존재 여부에 찍히는 것이 아니다. 즉, 마치 절대적인 엄밀성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이럴 때에만 학문의 '발전'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동어반복적이지만, 발전이라는 것이 곧 더욱 정교하고 엄밀한 사유로 이행하는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학문(철학)의 민주주의'란 없다. 혹은 불가능하다. 혹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리학에서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만큼, 바람직하지 않은 만큼. (대중화와 민주주의는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 역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틀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학자(학자) 자신에 대한, 혹은 특정 철학에 대한, 더 나아가서 이론 일반, 그리고 인간 일반에 대한 일종의 자신감인데, 이 자신감이 학문과 인간을 병들게 한다. 절대적 학문이 있다손 치더라도, 의심을 불허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 철학이 아니다. 학문이란 곧 생각하는 것인데, 생각을 지양하는 학문이란 더 이상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의미있는 모순'도 아니다!)

 

정리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학문하는 자세는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엄밀성과 정교함을 추구하는 것. 따라서 온갖 반론과 예외적인 경우에 정당하게 대응할 수 있으며 삶과 세상의 가장 복잡한 측면들을 왜곡 없이 보여주는 것. 그러면서도 절대적인 엄밀성이나 정교함 따위가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애써 획득한 복잡성과 섬세함을 특정한 이름으로 환원함으로써, 이론의 가치를 날려 버리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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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감상문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읽기
                             — 기억과 공감의 연대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1)을 읽은 후에 이 책에 대해서 즉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정리하려 한다면 이는 순서에 맞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면 이 소설은 ‘나’의 윤리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 ‘대해서’ 쓰는 것은 오히려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이 소설에 의해 영향 받은 것들에 대해서 쓰는 셈이 되는 것이다.


즉, 이 글은 나에 대한 윤리적 반성이 될 것이다. 나는 이반과 알료샤에게 동시에 감정을 이입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 물론 이는 라끼찐의 말을 빌면 ‘까라마조프적’ 특성을 나 역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다른 까라마조프, 이를테면 드미뜨리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스타일의 문제일 것이다. 알료샤 역시 정욕으로 가득 찬 드미뜨리와 자신이 단지 정도의 차이만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또한 이 ‘까라마조프적’이라는 형용사의 분열적 의미는 인간 일반을 수식하는 데 특별히 적절한 듯하며, 아마도 이로 인해 나에게도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즉, 우리는 인간인 이상 “아주 극단적인 모순”을 가지며, 우리의 안에서 “서로 다른 두 심연을 동시에(1221)”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충분히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확대된’ 해석으로 간주해 경계하고 인간 일반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논점을 제한하는 태도가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좀 더 맞아 떨어질 것이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이 소설은 인간 세계 전체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시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소설을 읽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반성’이라는 말은 아주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다. 나 역시 이반-라끼찐-꼴랴가 공유하는 오만불손한 가치관을 가지고 타인의 마음과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재단하곤 했었다. 이런 모습의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굳이 변호하자면 이는 아마도 더욱 올바른 삶을 살고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삶과 사회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쉽게 가정하므로, 삶과 세상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욕구는 이를 치료하고자 하는 욕구와 구별하기 힘들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의식하고 또한 책임지겠다는 욕구가 정당하며 진실하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나는 너무도 쉽게 ‘나의 지식’이라는 무딘 메스를 들고 세상을 해부하려 들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소설 전체에 걸쳐 빛을 발하는 작가의 심리학은 주요 주인공 중 어느 한 사람도 만만하게 파악되거나 분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구체적 인간이 아닌 인간 일반에 대한 이렇고 저런 평가가 얼마나 쉬운가를, 또한 그러므로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려준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쉽게’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것이 바로 오만일 것이다. 작가는 엄청나게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인간학적 현상이나 인간 자체에 대해서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은 그가 포착하려는 것 자체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고 단순한가를 드러내고 있다.

 

오만한 이론과 이반


이렇게 무력한 지식, 혹은 지식의 무력에 대한 비판은 이반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이반의 “모든 무신론자들의 입장에서 악행은 허용되지 않을 수 없으며 가장 필연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출구로 인정된다(131)”는 사상이 설령 이론적으로는 흠이 없다고 할지라도, 작가가 이 사상과 얼마나, 그리고 어떤 식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가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요약할 수 있는 이반의 사상을 둘러싼 논의에서, 방점은 ‘신이 없다면’이라는 조건절에 찍힌다. 이 표현은 이반이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 주는데, 이로 인해 문장의 명확한 의미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된다. 이반은 후에 동생 알료샤와 함께한 자리에서 신과 불멸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아버지 표도르의 질문에 둘 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243). 이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모든 악행이 허용되며, 그것이 심지어 합리적인 해답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이반의 생각은 알료샤에게 서사시 「대심문관」의 내용을 들려주는 대목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이반의 대심문관에 따르면 예수는 기적을 행해 보라는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선사해 주었다. 기적에 의해 강요된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하는 신앙을 예수는 인간에게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인간이 그렇게 강인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오히려 견뎌내지 못하며, 자유로운 선택의 부담 때문에 짓눌리기 보다는 강제에 의한 평안을 원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기적을 사용해 빵을 만들어 보라는 사탄의 요구를 거부하였지만, 인간은 빵을 제공하는 권력에게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반납한다. “당신은 사람들이 […] 소리 지르며 조롱하고 놀려 대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소. 당신이 거기서 내려오지 않은 것은 인간을 기적의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기적에 의한 신앙이 아닌 자유로운 신앙을 열망했기 때문이오. […] 그러나 당신은 사람들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말았소.(455)” 신, 즉 “<기적>과 <신비>와 <교권>(457)”은 인간을 ‘속박하고 동시에 해방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말하는 신은 이미 ‘악마’다(458).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 사실은 권력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으며, 그들은 인간에 대한 자기들 나름대로의 위대한 사랑으로 신/악마를 통해 인간의 자유를 빼앗고 평안을 보장한다. “인간을 덜 존중하고 그에게 더 적은 것을 요구하면 그의 부담이 줄어들 테니, 더욱 사랑으로 다가가는 길이 될 거요.(456)”


여기에서는 이반이 자신과 ‘일반 민중’에 대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지성의 판단에 의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존재 여부가 중요하지도 않지만, 허약하고 비열한 보통 인간들에게는 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진정한 무신론자인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 지식인인 자신만이 자율적 존재이며, 인간 일반이 자신의 수준까지 지적으로 고양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 이것이 이반의 오만이며, 지식과 이론의 오만인 것이다. ‘오만한 이론’이 아닌 ‘이론 그 자체의 오만’은, 이론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이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만을 다루는 ‘이론적 틀’을 가지고는 파악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오만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이론 스스로가 이론이 아닌 다른 것과 직면해야만 한다. 이반의 이론이 현실과 교접하는 지점이 바로 스메르쟈꼬프의 범죄이다. 불쑥 잠입한 이 실재 앞에서 이반은 자신의 언어(logos)를 잃고 침잠한다.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


이러한 이론 비판을 통해 작가는 더 이상 윤리‘학’으로 포섭될 수 없는 독특한 지점들을 가지는 새로운 윤리를 제시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했다. 그가 제시하는 윤리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녀야 한다. 첫째로,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는 (과)학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 그에게 윤리는 이론이 아니라 믿음이다. 따라서 이론을 구성하는 증명의 확실성은 믿음이라는 좀 더 겸손한 원리로 치환된다.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때 종교라는 말은 제도가 아니라 어떤 ‘영성(靈性)’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과학은 보편자에 대한 담론인 반면 이 종교/윤리는 개별자를 우선시해야 한다. 이 조건은 말 그대로 보편자보다 개별자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뜻이지, 보편적인 실천의 원칙을 제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가 가장 난처한 부분일 것인데, 이 윤리는 사실과 당위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진통제]’이라고 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현실의 행복을 위해서는 행복의 환상에 불과한 종교를 폐기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환상을 걷어내고 현실적인 지복의 세계를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고도의 정치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두고 이반은 맑스와 정 반대편에 선다. 즉, 이반은 인간에게는 신과 같은 강인한 능력이 없으므로, 종교를 폐기하기는커녕 이를 적극 이용해서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름대로 사실(fact)을 존중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반은 수많은 사례들을 들어 잔인하고 비열한 인간의 모습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421-437). 이 점에 있어서는 작가도 섣불리 이반의 입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어떤 완벽한 이론이든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구멍’이 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인간의 이성/이론을 통한 사회의 개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리가 없다. 요컨대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회의 이성적 변혁을 추동하는 이론은 오만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가 윤리적 허무주의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현실과 당위의 사이 어딘가에 서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작가가 제시하는 윤리는 이른바 ‘기독교적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단어가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잠깐 제쳐두고 이 윤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 알료샤와 그의 또 다른 ‘아버지’인 조시마 장로를 통해 설파되는 작가의 윤리는 조시마 장로의 형이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머니, 우리들 중 누구나 서로에게 죄를 짓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제가 가장 많은 죄를 지었어요.(511)” 이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죄인의 처지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인간은 능력 없고 무식한 비열한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죄인’일 뿐이다. 따라서 이성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이 문제로 된다. 즉, 개인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으로부터 이반의 윤리적 허무주의가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이것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우리의 ‘이웃들’에 대해서 죄인이다. 이어서 이 깨달음은 1인칭으로 다시 표현되며, 그 순간 이 명제는 인간의 필연적 조건에 대한 인식의 원리를 넘어서서 윤리적 실천의 원리가 된다. 바로 ‘내가’ 가장 큰 죄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성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하는 투사가 아니라 이웃들에게 죄를 저지른 죄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온갖 악행과 부조리를 용감하게 떠맡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죄를 저지른 ‘나’는 구체적인 선행을 통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 세상의 불의를 모두 해결하는 엄청난 일은 ‘신이 아닌 이상’ 해낼 수 없다. 그저 내가 저지른 구체적인 악행에 대해서 사죄하고 개별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선행으로서 이를 되갚아야 한다. 이 작은 선행이 소설에서는 알료샤가 그루셴까에게 (상징적으로) 베푸는 “파 한 뿌리(633)”, 그리고 의사 게르쩬쉬뚜베가 드미뜨리에게 준 “호두 1푼뜨(1175)”로 나타난다. 이러한 작은 선행은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에 ‘나’ 역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다면 책임과 선행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에는 촘촘한 그물 모양의 연대를 이루는 인류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 개인에 대한 선행이 분명하게 우위에 있는 윤리적인 보편 명제이다. 이 윤리는 강령으로써 개인을 덮어버리지 않고, 하나하나의 개인에 대한 서로 간의 공감의 능력에 바탕을 둔다. 이 공감의 테마는 소설 속에서 조시마가 시골 아낙네들과 대화하는 장면(92-103), 스네기료프의 처절한 고통을 목격하고 알료샤가 눈물 흘리는 장면(361-371), 일류샤가 쥬츠까에게 바늘이 든 빵을 먹이고 괴로워하는 장면(933-934)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드미뜨리-알료샤와 비교했을 때 이반에게 부족했던 것은 이러한 공감하는 마음, 고통에 반응하는 능력, 즉 형제[자매]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을 통해 인류는 비로소 ‘형제[자매]로서’ 하나가 된다.

 

윤리 체계로서의 종교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의 ‘기독교’는 종교적 제도라기보다는 하나의 가치관 체계로서 기능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그들이 종교를 믿기 때문에 그 종교의 윤리관을 따라야만 하는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윤리를 실천하기 위한 바탕으로서 종교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여기에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관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기독교’라는 단어에 신경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와 작가가 소설 속에서 사용하는 ‘기독교’라는 단어는 아마도 그 기표만을 공유하고 있을 뿐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어떤 ‘영성’이며, 이는 신자들의 물질적 욕구의 절실함과 그들의 신앙의 깊이를 공공연하게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현대 한국의 개신교에도,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기독교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당대의 기독교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일 듯하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가 말하는 ‘신(神)’도 기독교적 인격신으로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즉, 작가가 말하는 기독교가 하나의 제도로서의 종교라기보다 영성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적 관점이라고 본다면, 그가 말하는 신 역시 기독교적 의미의 신이라기보다는 형제[자매]애가 무한히 확대된 상태로서의 어떤 ‘전체성’ 혹은 ‘무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종교적’ 주제는, ‘무한한 전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윤리적 언명으로 전환된다. 물론 이 전체라는 것이 개별자들을 단박에 엮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슬 모양으로 하나씩 하나씩 연결시키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의 신이 기적을 일으킬 리는 없다. 조시마 장로의 ‘썩는 냄새’가 바로 이를 증언한다. 왜냐하면 자연 전체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신론이 전혀 아니다. 영성이란 굳이 인간적 형상을 가진 존재와 마주하고 있지 않더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손에 대한 책임과 시간의 연대


과학과 이론 때문에 인간이 잃어버린 것, 혹은 인간에게 금지되어 있던 것은 바로 ‘전체로서의 연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것을 보편적 틀로 포획하는 추상적인 이론과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접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연대이다. 조시마는 소위 말하는 보편적 사랑이 구체적인 개인에 대한 사랑과 오히려 상충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기 때문이다.(111)” 이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알료샤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직접 발로 뛰며 만나왔던 것이다. 한 인간의 보편적 철학이 세계를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각각의 개인이 한 명도 빠짐없이 서로에게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윤리는 구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연대에 하나의 차원을 추가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시간’이다. 여기에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적 연대의 독특성이 있으며, 또한 이를 통해 작가의 윤리적 언명은 보편성을 거부하면서도 또한 다시금 보편적인 것일 수 있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의 서문에서 이 일대기는 두 개의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혔다. 작가의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첫 번째 소설뿐인데, 이 소설의 말미에서 우리는 알료샤와 아이들의 테마가 그 다음 편에서 이어질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 두 번째 소설을 통해 그가 자신의 윤리관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개진할 생각이었다는 점 등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추측을 좀 더 강화하는 것은 바로 아이들 테마의 중요성이다. 알료샤는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독립적인 두 이야기, 즉 ‘어른들’의 이야기와 ‘아이들’의 이야기 사이를 오가고 있는데, 전자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하는 일은 이미 타락한 인간들에게 파 한 뿌리를 선사하는 것, 그들을 윤리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일류샤와 아이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가르친다.’ 즉, 일종의 교육을 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제시한 길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화석화된 인간인 ‘어른’이 구원받는 길이고, 하나는 ‘아이들’이 구원받는 길이다. ‘어른’은 최소한 친부 살해범으로 기소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할 정도의 커다란 사건이 없이는 정신적 변화를 쉽게 일으키지 못한다. 작가는 드미뜨리를 통해 이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길 하나뿐이라면 그의 윤리관은 실천적 힘을 지니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아이들의 길을 제시한다. 아이들은 고통이 아닌 교육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지식의 배움이 아니라 감정의 배움이어야 한다. 알료샤가 꼴랴에게 ‘가르친’ 것도 바로 사랑과 공감이었다(964-974).


바로 알료샤-아이들의 연대가 도스토예프스키적 연대의 독특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공동체적 의식은 공간이 아닌 시간의 축을 따라 확장되고 전파된다. 공동체 의식은 무엇보다도 후손에 대한 책임과 기억이다. 후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작가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은 소설의 에피그래프에 잘 드러나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9)” 실제로 악의 화신 표도르 까라마조프가 가장 크게 잘못한 일 역시 아들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이다. 표도르는 자신에게 세 아들이 있다는 것조차 망각하고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했다. 후에 아들 드미뜨리가 그루셴까를 두고 아버지와 다툴 때에 그는 엄청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루셴까가 새로운 연적인 폴란드 인과 떠나버리자 그는 놀랍게도 연적에 대한 증오나 질투심 없이 순순히 양보하는 태도를 보인다. “나는 방해하지 않고 양보하겠어. 나도 양보할 수 있단 말이야.(700)” 그 후에 변호사의 증언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드미뜨리는 아마 어느 정도는 자신의 연적이 바로 아버지 표도르였기 때문에 더욱 질투와 복수심에 불타올랐을 것이다. 자신을 책임지지 않고 심지어 기억하지 않은 아버지 표도르에 대한 드미뜨리의 증오는 동정을 받고 다소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건의 발단이 아버지 표도르가 자식들의 존재를 망각한 데 있는 만큼, 이 소설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가장 중대한 윤리적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기억의 윤리


도스토예프스키적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망각하지 않고 잘 기억해두어야 하며, 이러한 기억을 새로운 연대의 기초로 삼을 필요가 있다.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공감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우리가 직접 ‘타인이 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는 타인과 온전한 연대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고립된 채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를 이루어야 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타인의 입장에 서지 않고서는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시간적 차원의 연대이다. 어른은 과거에 누구나 아이였으며, 아이 또한 자라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면 그는 이를 바탕으로 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 또한 자라서 어른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처럼 연대는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다.


나의 오만을 극복하는 방법은 최대한 많이 나의 경험들을 꺼내어 보고, 그 때의 감정들을 되살려 보는 데에 있을 것이다. 과거의 어느 때에 나는 분명 내가 지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타인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적이 있을 것이고, 그 때의 나의 감정을 기억해냄으로써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기억의 윤리이다. 언어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복잡성, 그 한 쪽 극단이 보여주는 사악함의 심연, 개별자의 차이를 사상하는 연대와 이성적인 사회 변혁 기획의 허구성.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한 후에도 여전히 윤리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끝)

 

 

1) F. M. 도스또예프스끼, 이대우 옮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하)>>, 열린책들, 2002. 너무 익숙해져서 쉽게 바꿀 수 없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명 표기는 책에 나온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인용할 때에는 괄호 안에 페이지만 적어 넣었다.

 

 

["러시아 명작의 이해" 레포트를 조금 수정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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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원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구호는 "맑스가 아니라 진보"였다. 이 말은 말 그대로 '맑스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그저 맑스냐 비-맑스냐 하는 틀을 상대화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맑스가 아니면서도 맑스적인 다른 이론들로 맑스주의를 전개/확장하려는 것인데, 이런 노력은 사실 맑스주의 이론이 탄생한 순간부터 계속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알튀세르를 읽어도 푸코를 읽어도, 알튀세르 맑스주의 혹은 푸코 맑스주의라는 식. 기준은 진보다. 맑스가 아니라 진보.

 

그러나 내 생각엔, "진보가 아니라 윤리"가 되어야 한다. 물론 유비적으로, '진보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저 진보/보수의 틀을 상대화하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삶과 세상의 극히 일부분, 즉 '정치적인'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 틀은 삶에 대한 여러 잣대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잣대는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여기에서는 이 '일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치환해 버린다.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진보'라는 말은 삶을 정치(학)화한다. 단순화한다는 말이다. 이론은 단순하면 경제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삶이 단순한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내 삶뿐만 아니라 남의 삶까지가 문제로 된다면 이는 극도로 세심/소심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첫 문단의 유비를 하나 더 끌어오자면, "진보가 아니라 윤리"라는 말은 '진보가 아니면서도 진보적인 다른 이론들로 진보 개념을 전개/확장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전개보다는 확장에 방점이 찍힌다. 맑스와 진보의 불연속성보다는 진보와 윤리의 불연속성이 단연코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격한 변환은 아니다. 묶였던 매듭이 '급격하게' 풀려 봤자, 뭐 대단히 격한 장면이 연출되지는 않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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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unting paul

 

이를테면, 비틀즈의 노래 "something"을 듣는다.

 

조지 해리슨이 작곡하고 부른 노래다. 편안하면서도 호소력있는 조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멜로디가 참 좋다. 음 하나 하나가 모두 여운을 남길 만큼 공간감도 좋고 무엇보다도 따듯하다. (따듯함은 비틀즈 전매특허) 어떤 테너 가수는 이 노래를 두고 금세기 최고의 사랑노래라고 했다고.

 

그런데, 멜로디에 집중이 잘 안 된다. 마음을 다시 가다듬는다. 왠지 모르게 다른 노래가 섞여서 들리는 것 같다. 잡음이나 이물감은 아니다. 그런데 조지의 옆에서 누군가가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 하다. 아니, 확실하다. 바로 폴의 베이스라인이다! 보컬 멜로디와 능청스럽게 조응하며 베이스 멜로디가 꿈틀대고 있다. 폴이 노래하고 있다. 전경과 배경이 뒤섞인다. 이것이 'haunting paul'이다.

 

어느 노래를 들어도 그렇다. "come together"를 이끌어 가는 것은 존의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because"의 아카펠라 속에도, "you never give me your money"의 간주 속에도 폴이 있다. 심지어는 "back in the u.s.s.r."의 드럼 연주 속에도 있다. 물론 베이스가 모든 노래에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고, 폴이 각종 악기를 연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없는 것처럼 있다. 저기에 서서 흥얼흥얼거린다. 초점이 비껴 있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선명하게 보인다. 폴은 항상 거기에 있다. 없는 줄 알았는데도 있다. 폴은 출몰한다. 그게 그의 매력이다.

 

내가 폴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에는 반사적으로 두 개의 질문이 던져져야 한다. 하나는 "왜 존이 아니라 폴인가?"이고, 두 번째는 "왜 조지가 아니라 폴인가?"다.

 

두 번째 질문부터. 조지는 탁월한 송라이터다. "here comes the sun"과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는 적당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여지없이 눈 앞에 안개가 서리도록 만든다. 그는 감정을 자극하는 노트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틀즈'가 없다. 그는 비틀즈의 멤버이지만 비틀즈의 구성 요소는 아니다. 이것은 어떤 천재, 혹은 보편성, 혹은 어떤 위대성과 관련된다. 이는 그의 능력과 크게 상관없다.

 

 

비틀즈는 존과 폴이 만든다. 이 역시 그들의 능력과 상관없다. 아니, 전혀 없지만은 않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연이 개입한다. 둘의 경합이 비틀즈를 만든다. 둘은 동전의 양면이지만, 분명하게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는 양면이다. 둘은 떨어질 수 없지만, 종종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물론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비틀즈의 아우라는 사라진다. 각자의 아우라도 사라질 수 있다. 실제로 폴의 아우라는 사라졌다.

 

존과 폴이 함께 작곡하거나, 혹은 각자 작곡한 모든 곡에는 "lennon & mccartney"라는 서명이 붙어있다. 존이 앞에 있다. 이것은 그들의 약속이었다. 폴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살짝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가끔 앞에도 있어 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역시 앞에 오는 것은 존이다. 존은 "imagine"이다. 또한 존은 오노 요코다. 존은 "power to the people"이다. 따라서 존은 폴과 분리된 이후에도 독자적인 위대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폴은 존과 분리되면 그 위대성이 소멸한다. 존 없이 폴은 "silly love song"이나 부르는 존재일 뿐이다.

 

존은 죽었다. 폴은 아직 죽지 않았다. 결국은 둘 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존이 죽은 이후에도 폴은 도처에 있다. 존은 죽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한다. 존은 그저 위대할 뿐이다. 폴도 가끔은 위대하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폴이 자꾸 출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폴의 위대성을 자주 잊는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좋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름이 바로 존과 폴이다. 둘 다 좋다. 그런데 나는 폴이 더 좋다.

 

덧)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으로부터의 해방구를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한다. amoral한 것으로 하나쯤. 숨을 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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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합리론 철학에서 실체의 개념


Ⅰ 실체 개념과 근대 철학의 태동

 

철학자들은 세계를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을 지양하고,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리에 대해서 탐구해왔다. 이러한 탐구를 위해서는 그 탐구 활동이 대상으로 하는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결정하고 제시해야만 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불변적인 것, 우연의 연쇄 속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것, 다양한 속성을 가진 외관의 껍질 속에 존재하는 단순하고 본질적인 것을 철학의 직접적인 탐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본질적인 대상은 각 철학의 입장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다양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원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과 설명이 각각의 철학 자체를 특징짓고 그 주요한 부분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를 철학에서의 실체론(substantialism)이라고 한다.


근대 이전에는 주로 자연에 존재하는 개별 사물이 실체(substance)로 간주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비가시적인 이데아 세계를 부정하면서 개별적 사물을 실체로 인정하고, 그러한 사물 안에 사물의 본질적인 형상이 들어있다고 한 이래로, 이를 이어받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사물들은 자신 안에 능동적인 운동의 원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를테면, 불은 위로 오르려는 성질을 갖고 있고 돌은 아래로 떨어지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는 실제로 근대 이전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기도 했는데, 이때까지 그들의 눈에 비친 자연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완전히 비정신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어떤 커다란 인식론적 단절이 일어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자연학이 태동하게 되는데, 이 자연 과학은 발전된 실험 도구와 이를 이용한 경험적인 탐구를 통해 물리적 세계의 자연 법칙들을 하나하나 규명해냈다. 이로써 자연적 세계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 가능한 인과적 법칙들에 의해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내적인 원리로 운동하는 능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인과 법칙을 따라서 외부적 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이러한 경험 과학이 종교의 권위를 위협하며 진리나 객관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경험 과학을 통해 얻은 성과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에 반영되어야만 했고, 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근대 철학의 실체 개념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실체라는 개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감각적인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것이므로, 이는 감각적인 것의 우위를 주장하는 근대 경험론보다는 현상의 내적 본질에 대한 이성적 인식을 강조하는 합리론에 의해서 정교하게 발전되었다. 이에 따라 나는 이 글에서 근대 합리론의 대표적 철학자 세 사람, 즉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실체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고, 각 실체론의 특징과 의의를 서술하려고 한다. 또한 이 세 철학자의 실체론이 물론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주장되었고, 이전 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점점 더 발전하는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일면 사실이겠지만, 이러한 흐름의 역사로 환원할 수 없는 각각의 철학에 고유한 특징 역시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세 실체론이 어떤 하나의 철학적 흐름의 발전 과정을 순순히 따라가고 있다고는 간주하지 않을 것이며, 각 실체론에 고유한 내용을 설명하는 데 좀 더 주력할 것이다.

 


Ⅱ 근대 주요 합리론자들의 실체론

 

1 데카르트의 실체론

 

중세까지는 자유의지의 가능성에 대해 고찰할 때 인간이 신의 예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설명으로써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근대 경험 과학이 물리적 인과 필연성이라는 또 하나의 필연성을 확인하고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를 설명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철학자들에게는 물리적 인과성과 의지 자유를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최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의 실체론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는 바로, 인과 필연성을 법칙으로 하는 물리학의 영역과 자유의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윤리학의 영역을,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실체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완전히 배타적인 두 종류의 실체, 즉 정신과 물체를 설정한다. 이로써 중세 철학에서 자연에 부여하던 최소한의 정신적인 특성은 자연 세계로부터 완전히 제거되었으며, 이러한 물체적 실체의 영역은 물체 외적인 작용인만이 운동의 원리가 되는 기계론적인 세계로 변모하였다. 데카르트의 물체적 실체의 영역은 근대적 유물론의 단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자연으로부터 제거된 정신성을 나(자아)의 의식 속으로 환원함으로써, 그리고 물체의 연장성과 운동성을 제외한 모든 속성을 정신이 주관 안에서 구성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유물론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근대 철학이 태동하는 순간과도 동일시되는 저 유명한 코기토의 도출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나의 정신은 무한히 특권화되며 물체 세계는 무한히 탈실재화된다.

 

데카르트는 <<철학 원리>>에서 실체를 “실존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실존의 독립성을 실체의 기본 원리로 천명한 것이다. 이 정의를 통해 정신은 육체와 독립적으로 실존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영혼불멸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정의를 엄밀하게 적용할 경우, 실체는 다른 실체로부터 뿐만 아니라 실존의 원인으로부터도 독립적이어야 한다. 즉, 실체는 실존에 있어서 완전히 자족적이어야만 하며 이렇게 본다면 신(神)만을 실체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 정의를 완화하여 신을 제외한 다른 실체로부터만 독립적인 것도 유한한 실체로 인정함으로써 정신과 물체라는 두 종류의 유한 실체를 설정하였다. 이는 후에 스피노자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는 부분이며 스피노자는 이 정의를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여 신만이 실체라는 신 유일실체론을 전개하였다.


실체의 이러한 실존의 독립성은 두 종류의 실체가 각각 독립적으로 인식된다는 사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속성(attribute)을 통해 인식된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증된다. 인식의 독립성으로부터 실존의 독립성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는 실체를 속성을 통해서만 인식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실체가 무(無)가 아니라는 사실은 속성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들 중에서도 한 실체에 오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가장 본질적인 속성이 있으며, 다른 모든 속성들1)은 이에 의존한다. 이러한 속성은 실체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속성 개념과는 달리 실체의 본성과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체와는 사실상 구별할 수 없는 것2)이다. 이러한 속성을 특히 주요 속성이라고 하며, 하나의 실체는 하나의 주요 속성을 갖는다. 정신의 주요 속성은 사유(thought)이고 물체의 주요 속성은 연장(extension)이다.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표현은 실체가 이러한 속성과는 분리된 기체로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물체실체는 항상 연장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돌멩이를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것의 특정한 크기나 모양을 굳이 떠올리지 않고서도 그것을 표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삼차원적으로 연장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를 표상할 수 없다. 이 때 이러한 연장을 물체실체의 본질적 성질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특정한 크기나 모양, 그리고 운동의 여부 등은 우연적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별적 실재의 상태나 운동의 방식을 데카르트는 양태(mode)라고 한다. 이는 실체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실체는 양태와 분리된 채로 파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양태 역시 실체의 변용(affection)이며, 실체와 완전히 외재적인 관계를 가지는 우유(accident)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두 종류의 실체는 작용에 있어서도 서로로부터 독립적이며, 이를 바탕으로 데카르트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규칙을 가지고 작동하는 두 영역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구분을 통해 인과 필연성과 의지 자유의 양립 가능성 문제를 해결하고 자연과학과 윤리학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이처럼 실체의 독립성은 실존의 독립성, 인식의 독립성, 그리고 작용의 독립성을 모두 함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실체론은 기독교적 전통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하나의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전통에 따르면 세계를 창조한 신은 세계 바깥에 있어야 하므로 이 세계와는 외재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기독교적이며 초월적인(transcendent) 신 개념을 유지한 채로 만약 신만을 실체로 인정한다면, 이 세계 자체에 존재하는 실재들은 실체적 요소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마치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결론을 거부하고 이 세계 안에도 존재하는 유한 실체를 설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이러한 유한 실체 개념은 초월적 신 존재를 가정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으로, 이 가정 하에서는 이처럼 실체의 개념을 단일하게 정의할 수 없다. 반면 신을 이 세계의 내재적인 원인으로 정의하는 스피노자는 유한 실체를 설정할 필요가 없게 되며 따라서 단일한 실체 개념이 유지된다. 또한 라이프니츠 역시 기독교적 전통에 서 있는 철학자이므로, 창조주인 실체로서의 신뿐만 아니라 신에 의해 창조되는 다른 개체적 실체들도 인정하게 되는데, 그는 모나드라는 새로운 실체 개념을 창안하여 데카르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데카르트 실체론의 가장 큰 난제는 바로 정신과 육체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인간)를 제외한 이 세계의 모든 개체적 실재는 사유하지 않는 물체적 실체일 뿐이고, 신은 연장이 없는 사유하는 실체일 뿐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속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그 두 실체 사이에는 모종의 상호작용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나의 의지에 따라 나의 신체가 움직이며 신체가 손상되면 정신이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두 종류의 실체는 서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인식되고 작용하는 것으로 정의되었으므로,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를 송과선 가설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 송과선은 뇌의 중심에 존재하는 작은 선(gland)으로서 영혼과 신체의 소통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다소간 억지스러운 것이어서, 후에 데카르트를 따르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우리의 결의와 행동이 결합이 전능한 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기회원인론을 주장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또한 스피노자에게서는 정신과 물체가 하나의 실체의 두 속성으로서 평행하는 것이 되어서 상호작용의 문제가 해소되어 버리고, 라이프니츠는 물체실체를 비판하고 부정함으로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든다.

 

2 스피노자의 실체론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는 데카르트가 고안하거나 중요하게 부각시킨 여러 개념들을 상당 부분 이어받기도 하지만, 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여 데카르트 철학과는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철학적 개념들은 그가 그것을 사용하는 고유한 방식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가 전복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기존 개념들 중 하나가 바로 신인데, 이 신은 유대-기독교의 신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스피노자는 실제로 공공연한 이단적 주장으로 인해 자신이 속해 있던 암스테르담의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을 당하였으며, 그의 주저 <<윤리학>>의 1부 부록에서는 기존 철학과 종교의 신인동형론적(anthropomorphic) 신 개념을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그의 신 개념의 특징은 그가 신을 자연화된 존재로 파악한다는 데 있으며, 이 때문에 그는 범신론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신 개념은 실체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는 신만이 오직 유일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을 통해 파악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유일 실체인 신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이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된다. 또한 스피노자의 실체는 자기-원인적(self-caused)이므로 실존의 원인에 있어서도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독립해 있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실체를 다른 것을 통해 파악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데카르트적 실체의 인식론적 독립성을 이어받고 있지만, 데카르트가 한 것처럼 실체의 정의를 완화하여 유한 실체 개념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다.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의 본질은 역량(power; potentia)이다. 스피노자는 속성을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정의한다3). 그런데 스피노자에게서 하나의 속성은 오직 하나의 실체에 귀속되어야 하지만, 그 하나의 실체는 또한 여러 개의 속성을 가질 수 있다. 하나의 속성이 여러 개의 실체에 귀속되는 경우만을 배제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그렇게 되면 속성을 통해서 실체를 구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을 가지는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스피노자는 절대적으로 무한하며 또한 무한한 수의 속성을 가지는 유일한 실체만이 실존한다고 결론짓는다. 여기서 스피노자적 실체(신) 개념의 독창성이 드러나는데, 그는 신을 사유하는 실체일 뿐만 아니라 연장된 실체로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유대-기독교적 전통과는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또한 속성은 실체의 본질, 즉 역량이 표현되고 전개되는 차원이거나 혹은 그것이 파악되는 관점이다. 그리고 양태는 이 속성의 차원에서 산출되는 개체적 실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개별자는 양태4)이다. 동시에 이 양태는 실체의 변용(affection) 또는 변양(modification)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양태는 항상 실체 안에 있고 실체를 통해 파악된다. 실체는 각각의 양태들의 원인이 되지만, 이는 자신의 밖에 양태들을 산출하는 타동적(transitive) 원인이 아니라 자신 안에 산출하는 내재적(immanent) 원인이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스피노자의 실체는 세계 바깥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세계 자체에 내재하는 근원적 역량이 된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양태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이는 신으로부터 엔텔레키에 이르기까지 개체적 존재자의 위계를 엄격하게 설정한 라이프니츠와는 상반되는 입장이다. 또한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적 사물로부터 정신성을 제거함으로써, 동물을 인간과는 본성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즉 기계로 정의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과도 상반된다. 이처럼 자연을 수동적인 존재로 본 데카르트와는 반대로, 스피노자는 ‘신이 곧 자연’이라고 하면서 신 자체를 자연화한다.


스피노자는 이처럼 신으로서의 실체를 자연과 동일시한다. 하지만 이때의 자연이라는 개념은 통상적 의미의 자연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자연과 스피노자의 실체를 동일시하고, 스피노자의 실체관을 ‘모든 것이 곧 신’이라는 명제로 정리하는 해석이 바로 범신론적 해석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원인으로서의 자연, 즉 능산적 자연(naturing nature)과 결과로서의 자연인 소산적 자연(natured nature)을 구분하면서, 좀 더 정교한 자연 개념을 사용한다. 이러한 구분을 도입하여 설명하면, 능산적 자연으로서의 신이 자신 안에 소산적 자연, 즉 개체적 실재들의 총합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곧 신이다’라는 명제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실체의 모든 속성들은 존재론적인 위계가 없이 모두 동등하며, 이 중에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속성은 사유와 연장밖에 없다. 이는 인간이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속성의 관점에서 산출된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피노자에게서는 사유와 연장이 동일 실체의 서로 다른 속성일 뿐이므로 이들 간의 일치 문제가 아예 제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계를 사유 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연장 속성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어떻게 하나의 실체가 다수의 속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야기한다.


스피노자는 세 종류의 구별을 제시하면서 실체와 속성, 양태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실체와 실체, 또는 속성과 속성은 ‘실재적으로’ 구별된다. 양태와 양태, 그리고 실체와 양태는 ‘양태적으로(modally)’ 구별된다. 마지막으로 실체와 속성은 ‘사고상으로’ 구별된다. 그렇다면 하나의 실체에는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무수히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는 것인데, 이는 논리적으로 납득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이 부분을 해명하는 것이 스피노자 해석의 난제가 되고 있다.


또한 스피노자는 유일한 실체인 신을 모든 것의 자유 원인으로 설정하고, 양태들은 제약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개별자에게는 어떠한 자유의 조건도 남겨놓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인간이 갖고 있는 자유의지의 가상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태의 진정한 원인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을 들어, 인간의 자유의지를 비판하고 부정한다. 역설적으로 그의 주저의 제목은 <<윤리학>>인데, 과연 자유의 개념 없이 윤리학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이 점에서 자유의지 개념을 자연 법칙과 동등한 지위의 원리로 설정하고 이를 따르는 두 개의 영역을 설정한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3 라이프니츠의 실체론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는 데카르트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기독교적 신 개념과 자유의지를 부정한 스피노자의 길을 따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앞선 철학자들의 여러 논리적 난제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였으며 기계론적인 데카르트의 세계와 결정론적인 스피노자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라이프니츠의 세계에서는 데카르트에 의해서 배제된 목적인이 다시 자연으로 복귀하며, 스피노자에 의해 부정된 자유의지가 신의 예정과 조화되어 다시 나타난다.


먼저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체실체의 개념을 각각 비판하면서 자신의 실체 개념을 정립한다. 그는 먼저 데카르트의 물체실체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연장된 실체는 그 연장성 때문에 논리적으로 무한히 분할 가능한데, 그렇게 되면 실체성을 보유하고 있는 최소한의 단위를 설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단순성, 즉 분할 불가능성을 실체의 기본 조건으로 삼는다. 그의 실체 개념인 모나드(monad)는 하나 또는 단순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모나스(monas)’에서 왔다. 이 모나드는 가장 단순한 것이므로 일종의 점(點)인데, 이 점은 이론상으로 분할이 가능한 물리학적 점(원자)과도 다르고 아무 내용이 없는 수학적 점과도 다른, 형이상학적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나드는 비연장적인 성질을 가지며 일종의 영혼과 같은 것이지만, 데카르트의 정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정신적 실체의 속성으로 데카르트가 제시한 사유 개념을 비판하면서, 정신이 항상 의식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정신의 속성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의식적인 사유 개념을 영혼의 일반적 활동인 지각(perception)으로 대체하며, 의식적인 반성적 사유는 특별히 통각(apperception)이라는 개념으로 지칭한다. 세계는 무수히 많은 모나드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모나드는 모두 지각을 가지고 있다. 정신적 활동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사물과 같은 물체적 존재자들은 이러한 지각 활동이 너무 미미해서 그러한 활동의 존재가 우리에게 잘 인지되지 않을 뿐이다.


이 모나드의 본성은 힘이며 이는 스피노자의 실체의 본질인 역량과 비슷한 개념이다. 데카르트가 자연으로부터 제거한 힘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세계에서는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실체의 이러한 힘을 라이프니츠는 근원적 힘(primitive force)이라고 한다. 이 힘은 능동적 근원력인 욕구(appetite)와 수동적 근원력인 저항(resistance)으로 구성된다. 현상세계의 작용력과 저항력, 관성 등은 이러한 실체적 힘으로부터 파생된 힘이다.


모나드에는 ‘창이 없다.’ 즉, 다른 모나드와 상호 소통하여 자신의 지각 내용을 변화시키거나 하지 않는다. 모나드의 지각 내용은 자신 안에 ‘가능한 상태로’ 모두 내재해 있으며,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모든 것들은 이러한 지각 내용들이 잠재적인 상태로 있다가 순차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는 주어와 술어의 논리적 관계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각 모나드는 주어이며 가능한 모든 지각 내용들이 여기에 술어로서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 술어들은 주어로부터 ‘분석적으로’ 도출된다. 이 지각 내용들은 물론 그것을 포함하는 개체적 실체의 우연적 성질이지만, 이 단순한 개체적 실체는 자신이 갖고 있는 지각 내용에 의해서만 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를 본질적 성질로 볼 수도 있다.


또한 모나드들은 각자가 소유한 지각의 판명성에 따라 존재론적인 위계를 갖는다. 라이프니츠는 신으로부터 정신, 영혼 등을 거쳐 엔텔레키에 이르기까지 모나드들의 등급을 설정한다. 엔텔레키는 지각의 정도가 극히 미미한 모나드인데 이것이 우리의 지각에서는 물체로서 현상한다. 즉, 물체는 현상으로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신을 제외한 모든 모나드들은 다수의 열등한 모나드가 하나의 우월한 모나드를 둘러싸고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때 이 열등한 모나드들의 집합이 우리에게는 물체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모나드 자체는 연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이 창조한 세계는 이러한 비연장적인 모나드들의 세계이며 이를 예지계라고 하고,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 보이는 세계는 현상계이다.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물체의 상호작용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하였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세계는 예지계와 현상계의 두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예지계에는 물체가 실재하지 않으며 현상계의 물체는 지각이 혼미한 모나드의 집합에 대응한다. 또한 모나드의 내부 지각은 목적인에 따라 변화하는 반면 현상계는 작용인에 의해 결정된 세계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념에 주어진 현상계를 배제한다면 자연 필연성으로부터 의지 자유가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라이프니츠에게서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신의 예정으로부터의 자유가 다시금 의지 자유 문제의 중심으로 복귀한다.


무수히 많은 각각의 모나드가 가지고 있는 지각 내용 사이에 서로 모순이 없으려면, 모나드가 창조될 때부터 이것이 이미 조정된 채로 내재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설’이다. 각 모나드의 지각은 우주 전체를 반영하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어떠한 두 모나드의 지각도 서로 상충될 수 없도록 완벽하게 예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렇게 신이 모든 것을 조화롭게 예정해 놓은 세계에서 자유의지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 문제로 된다. 그러나 신의 예정이 의미하는 바는, 신이 인간의 행위를 자신의 임의대로 규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이 어떤 행위를 선택할 지를 미리 예견하여 이 행위가 다른 모나드들과 상충하지 않도록 조화시킨다는 것이다.

 


Ⅲ 실체론과 자유의지

 

여기에서는, 근대 합리론자들의 실체론에서 자유의지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근대 철학의 실체론은 ‘인간도 기계론적 세계의 일부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일면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특히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는 정교하게 설정된 실체론 체계를 통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는 어떤 맥락에서는 근대에 등장한 기계론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인간이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지, 혹은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지를 묻는 과정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대상화/객관화(objectification)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자연을 대상으로 설정하고 인간을 그 대상에 대한 주체로서 정립하는 어떤 인간관/세계관 자체의 변혁이 없이는, 자연과 인간이 동일한 층위의 개념이라는 인식, 혹은 그 둘이 동등한 수준에서 논의될 수 있는 항들이라는 인식 자체가 발생하기 힘들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대상화는 나 또는 나의 정신의 주체화 과정과 짝패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근대 철학은 주체 철학이라고도 불리는데, 근대 철학의 시발점이 데카르트의 코기토, 즉 주체의 확립이라는 것 또한 이를 상징적으로 뒷받침한다.


한편 기독교적 전통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강조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자유의지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개념인데,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보장되어야만 인간에게 원죄의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에게 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따라서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가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것, 스피노자가 자유의지 개념을 부정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관 또는 세계관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데카르트의 실체론은 물리적 세계로부터 예외적인 영역(코기토)을 설정함으로써 자유의지를 보존하려 하였다. 근대 철학에 이르러 자연 전체를 인간의 정신과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는 기독교적 신 개념을 부정하였기에 자유의지에 천착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의 신만을 자유롭다고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는 보통 결정론으로 해석되지만, 신은 또한 모든 실재들의 ‘내재적’ 원인이므로, 스피노자에게서는 개별자의 자유 문제에 대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과제는 자유의지를 부정하고도 윤리학이 성립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물체의 실존을 부정하였으므로 자연 필연성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음을 보이는 문제로부터는 벗어났지만, 목적론적인 신의 예정설을 통해 자연의 조화를 설명하였으므로 이를 고려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야 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전지(全知)한 신 개념을 통해, 신은 자의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지 않고 다만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을 완전하게 예정하고 이에 따라 다른 것들을 조정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근대 철학의 실체론은 방법론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데카르트가, 철학을 하나의 나무로 비유했을 때 윤리학은 철학의 가지이며 열매는 가지에서 딴다고 말한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합리론자들의 실체론은 각 철학자의 윤리적 입장, 또는 이에 상응하는 메타-형이상학적인 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반이나 방법으로서 존재하는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렇게 보았을 때 실체론은 독립적인 발전 과정을 거치는 순수한 사변적 논증의 측면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철학자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고유한 특징 역시 가지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근대 합리론의 실체 개념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끝)

 

1) 주요 속성을 제외한 이러한 속성들은 양태라는 개념과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고 있다. F. C. 코플스턴, 김성호 옮김, <<합리론>>(1998, 서광사) 189쪽 참조. 정신의 양태로는 지성적 지각과 의지적 작용이 있고 물체의 양태로는 모양과 운동이 있다.

2)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따라 실체와 속성 사이에는 실재적인 구별(real distinction)이 없으며 사고상의 구별(distinction of reason)만이 있다고 표현하였다.

3) 실제로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성이 지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성이 지각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둘러싸고 주관적 해석과 객관적 해석이 대립해 왔는데, 전자는 이 표현을 이유로 속성이 실제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성이 그렇게 지각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며, 후자는 실제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근래에 와서는 특히 프랑스의 스피노자 주석가들이 스피노자의 다른 저작 등을 참고로 하여 객관적 해석을 지지하는 추세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하나의 난제를 야기하는데, 이는 이후에 본문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4) 정확히 말하자면 유한 양태이다. 스피노자는 무한 양태와 유한 양태를 구분하는데, 유한 양태는 앞서 말했듯이 개별자를 뜻하고, 무한 양태는 또다시 직접적 무한 양태와 매개적 무한 양태로 나뉜다. 직접적 무한 양태로는 운동과 정지, 무한한 지성이 있고 매개적 무한 양태로는 우주의 모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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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떠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어디를 떠나 어디로 이행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학적 급진성이 정치적 급진성을 구원할 수 있을까. 노련하고 교활한 자가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것은 가능할까.

 

나는 이런 의미에서 나의 기질에 굴복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주체적'이므로, 그 누구보다도 많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나보다. 나는 어떻게든 새로운 것을 나의 일부로 보존하려고 하고, 이전의 것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한다. 나의 기질은 양 끝 중 어느 한 곳에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결코 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스럽지 않다. 이것은 히스테리이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보수화될 수 있다. 저 보수성이라는 놈과 평생을 싸워서 한 번도 지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 번 지면 질질 끌려간다는 것은 주변의 무수한 사례들을 통해 보아 온 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줄 위 어딘가에서 '위대한' 균형을 잡되, 보수성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초라한 모토일 것이다. 나는 교활한 인간이므로, 보수화되기 위해서는 정교한 정당화를 이용해 나 자신마저도 속일 것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특히 나 자신에게는!

 

나는 지독하게도 슬픈 이 외침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미 죽어있다면 이 증명은 무효가 될 것이며, 나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절대적인 고독에 흽싸여서 허공을 헤매는 유령과 다름없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도록 하자. 흔들리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이렇게라도 나는 삶을 느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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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2

일단 구호부터. 평택은 광주 이래 처음으로 주민들을 상대로 한 군사 작전이 벌어진 곳이다. 이것은 살이 떨리고 눈이 뒤집힐 일이다. 그러나 소위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찌하여 여기에 별로 분개하지도 않고, 되려 보상금 운운하며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지껄여대는 것일까. 왜 지금 이 나라는 노무현 탄핵 때보다도 더 조용한 것일까. 일단 여기에 첫 번째 방점이 찍힌다.

 

분석은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자. 다수의 대중들은 평택의 투쟁을 '반미꾼'들의 선동으로 보고 있다. 이 사실은, 인정하기 싫지만,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왜냐하면 투쟁이 대규모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심각하게 낮추기 때문이다. 하긴 그 때 광주의 시민들은 빨갱이 소리를 들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권의 조작이었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다. 도대체 지금 이 순간에 반미가 왜 등장하는가? 물론, 평택의 투쟁이 미국과 매우 관련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미국에 의한 한국의 종속도 엄연한 '사실'이라 주장할 지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평택이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의 전략적 교두보가 되었다는 것을 '사실'이라고 선언할 지 모른다. 이것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으로 압도적인 사실은 지금 평택 주민들의 땅을 뺏기 위해 경찰과 군대가 대규모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반미나 신자유주의 논쟁은, 지금 바로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논점을 흐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반미주의자들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인가. 어느 정도 그렇다. 그들은 물론 가장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 하지만, 평택이 다수 대중의 절대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반미주의자들은 분명 책임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구조적 설명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다. 실존적 설명만이 필요할 뿐이다. 평택의 현 위기는, 거기에 나중에 미군 기지가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이 순간에 그곳이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두 번째 방점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에 찍힌다. 평택은 폭력에 의해 침탈당했다. 자기가 평생 농사지어 온 땅을 군화발로 짓밟는 이들에게 죽자사자 매달리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마지막 남은 보루였던 대추분교를 지키기 위해, 거기서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이것은 삶을 망가뜨리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며, 따라서 생명 그 자체의 발산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분노했다. 그런데 이 분노를 어찌할 것인가. 이 분노를 또다시 폭력에 사용할 것인가?

 

목숨을 걸고 대추분교를 사수하다가 끌려나는 것과, 미대사관으로의 '행진'을 막는 전경을 폭행하는 것은 같은가. 아니다, 이것은 같지 않다. 후자는 분명 폭력이다. 물론 이것은 정당한 분노에 의한 폭력인지 모른다. 그러나 정당한 분노에 의해서 폭력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폭력은 행사되자마자 거꾸로 소급되어 분노 자체도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만든다. 논밭에 들어오는 굴착기를 막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것과, 미대사관으로 그저 조금 더 가보겠다고 전경을 밀치고 때리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같은가? 시위 지도부는 시위대가 위험한 상황에 더 크게 노출되고, 사람들이 더 많이 잡혀가고 끌려가는 것으로써 평택에 대한 부채감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분노에 찬 대규모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도 시원치 않은 판이다. 그러나 그 시민들이 전경을 때리고 군인을 죽이고 청와대로 진격해서 관리들을 폭행하는 것을 우리는 바라는가? 도대체 우리가 바라는 게 무엇인가? 그것이 평화라는 사실을 잊었는가?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폭력에 대한 분노는 절대로 폭력적으로 표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방식을 모른다. 그래서 또 다른 폭력을 저지른다. 물론 이 폭력은 정부의 폭력이 없었다면 발생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됐든 시위대의 폭력 역시, 시위에 참여하고픈 사람들, 평택과 함께하고픈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폭력이 시위를 축소시키고,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머뭇거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기분이 참담하다. 할 것이 많다. 그러나 막막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큰 힘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중에게 배워야 한다. 그들은 말하고 있다. 폭력은 싫다고. 반미는 싫다고. 우리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대중의 무지를 비판하고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설교하거나, 대중이 원하는 것에서 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고 이 투쟁을 철저하게 대중의 투쟁으로 만들어 나가거나. 여기 남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대중들에게 떳떳해야지만, 평택 주민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폭력'이라고 오해받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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