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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9/27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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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9/26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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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9/23
    그 여자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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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9/19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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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9/15
    오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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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9/07
    타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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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9/02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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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9/02
    끔찍한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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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 개를 데리고 산보를 할 때, 나는 개 다리의 움직임에서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을 느낀다. 개 한 마리가 나에게 주는 행복만으로도 나는 오래오래 이 세상에서 살고 싶다. 개 다리가 땅 위에서 걸어갈 때, 개 다리는 땅과 완벽한 교감을 이룬다. 개의 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다리가 땅을 밀어내는 저항이다. 개의 몸속에 닿는 이 저항이 개를 달리게 하는데, 이 저항이야말로 개의 살아 있음이다. 개 한 마리가 이 세상의 길 위를 달릴 때, 이 세상에는 놀라운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를 데리고 공원에서 달릴 때 나와 개가 똑같은 아날로그의 짐승임을 안다. 나는 개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날로그 세상의 네발짐승인 것이다. 내 콧구멍에서 김이 날 때, 개 콧구멍에서도 김이 난다. 이 세상의 길바닥을 헤매고 다닌 개의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고 내 발바닥에도 굳은살이 박여 있다. 이 굳은살은 각질로 금이 가 있고, 거기에 때가 끼어 있기도 하지만, 나는 사람이나 개의 몸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은 발바닥의 굳은살이라고 생각한다. 그 굳은살은 말랑말랑하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다. 그 굳은살은 개나 사람이 이 세상을 딛고 다닌 만큼 단단하거나, 아직 덜 딛고 다닌 만큼 말랑말랑하다. 그래서 개 발바닥의 굳은살은 한 편의 역사를 이루는데, 이 역사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다. 그 역사는 해독하기 어려운 역사인데, 그것이 해독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 역사가 세상과 개 사이에만 이루어진 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개의 발바닥이나, 두 갈래로 갈라진 돼지 발바닥, 소 발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 존재들의 개별적 삶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목이 멘다. 그리고 못대가리가 휠 때마다 세상과의 교감에 이토록 서툰, 내 생명의 초라함에 문득 놀란다. 아날로그 세상의 슬픔과 기쁨은 등불처럼 환하다. …

 

- 김훈,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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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01. slowdive - souvlaki space station

02. sigur rós - (untitled 4)

03. azure ray - sleep

04. radiohead - planet telex

05. sunset rubdown - us ones in between

06. smashing pumpkins - mayonaise

07. velvet underground & nico - venus in furs

08. yo la tengo - autumn sweater

09. my bloody valentine - sometimes

10. porcupine tree - shesmovedon

11. antony and the johnsons - hope there's someone

12. jeff buckley - hallelujah

13. coldplay - everything's not lost

14. mono - the remains of th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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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그 여자네 집 -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6 
박완서 (지은이)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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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 원제 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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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제 하나 읽고 또 다른 거 읽자.
(그런데 '믿을 수 없게'라는 표현은 흔히 쓰이는 말인가? 보통 '믿을 수 없이'라고 하지 않나? 내 눈에는 영 어색해 보이네. 라임을 맞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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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늘(과 내일 새벽엔) 꼭 발제문 쓴다. 쓰고 주말에 즐겁게.. 읽자.

아, 구질구질.

 

 

 

   봄철날 한종일내 노곤하니 벌불 장난을 한 날 밤이면 으레히 싸개동당을 지나는데 잘망하니 누어 싸는 오줌이 넙적다리를 흐르는 따근따근한 맛 자리에 펑하니 괴이는 척척한 맛

 

   첫여름 이른 저녁을 해치우고 인간들이 모두 터앞에 나와서 물외포기에 당콩포기에 오줌을 주는 때 터앞에 밭마당에 샛길에 떠도는 오줌의 매캐한 재릿한 내음새

 

   긴긴 겨울밤 인간들이 모두 한잠이 들은 재밤중에 나 혼자 일어나서 머리맡 쥐발 같은 새끼요강에 한없이 누는 잘매럽던 오줌의 사르릉 쪼로록 하는 소리

 

   그리고 또 엄매의 말엔 내가 아직 굳은 밥을 모른던 때 살갗 퍼런 막내고무가 잘도 받어 세수를 하였다는 내 오줌빛은 이슬같이 샛맑았다는 것이다

 

- 백석, <동뇨부(童尿賦)>

 

*벌불: 들불 / 싸개동당: 오줌을 참다가 기어코 싸는 장소 / 잘망하니: 얄미우면서도 앙증스런 모습, 얄밉게도 / 물외: 오이 / 당콩: 강낭콩 / 재밤중: 한밤중 / 쥐발 같은: 쥐발같이 앙증맞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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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질구질' 때문에 이게 생각났는데 다시 읽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고나. 백석은 진정 개그쟁이!

 

여기에 가끔 출몰하는 ㄱㅇ이가 이걸 보면 좋아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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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내가 남성이라는 게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쉽게 바꿀 수 없기에 내가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죽을 정도로 부끄럽다면, 그리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아마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살다보면, 타협해야만 하는 순간이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들뢰즈 덕분에 '-되기'라는 말이 유행해서, '여성-되기'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렸다. 들뢰즈는 '여성도 여성-되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들뢰즈주의자들도 여기에 동의하는 듯 하지만 나는 이런 말들 때문에 들뢰즈로부터 멀어진 것 같다. 그(혹은, 들뢰즈주의자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나는 그게 좀 불편했다.

 

남성이라도 여성-되기를 해야만 하는 걸까. 그런데 여성-되기라는 게 그저 그런 수사나 은유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꼭 되어야만 할까. 나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딱히 답을 못찾겠고, 그저 조금 슬프고 안타깝다. 무엇 때문인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왜 비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았을까.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한 적은 없을까. 나는 왜 내가 인간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타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생태주의나 장애인 담론을 아주 들어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을텐데, 여성주의를 접하고 내가 그랬던 것만큼 엄격한 잣대를 여기에는 들이밀지 않았다. 타협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에는 타협하고 무엇에는 타협하지 않나? 나도 잘 모르겠다. 여성-되기보다 장애인-되기는 물리적으로 더 쉽다. 그래서 타협했을까. 지구의 암세포인 인간으로써, 내가 살아있는 게 지금 곧바로 죽는 것보다 환경에 더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그런데도 살고 있다. 타협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생태주의자들은 타협했을까? 그들도 타협했을 것이다.

 

내 생도 수많은 타협의 산물이다. 다른 사람의 생도 그렇다. 열심히 열심히 낑낑대며 기어가고 있다. 앞뒤에 친구들이 보인다. 주변 사람들도, 슈퍼집 아주머니도 주인집 할머니도 전공수업 선생님도 보인다.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다같이 기어간다. 이마에는 다들 '타협'이라고 쓰여있다. 눈물은 나지만, 왠지 기분은 좋다.

 

덧) '타협'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여전히 좋지 않다. 그런데 이건 단지 뉘앙스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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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다음주에, 교재로 살 책의 목록이 확실해지기 전까진,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 지르면 안 된다.

 

그동안 사 놓은 책을 다 읽어야 한다. 두 권은 당장에, 두 권은 천천히,

한 권(사르트르의 구토)은 세월아 네월아 하며 읽어야 한다.

 

교재 구입과 당장에 읽어야 할 책 두 권의 독서 후에,

비로소 지를 것이다.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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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반복

발단은 별 거 아니었다. 그저 엄마한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어봤냐고 물어봤고, 엄마가 읽어봤다고 대답한 것 뿐이었다.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였다. 굳이, 왜 물어봤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내가 원래 엄마한테 이런저런 일들, 특히 최근에 겪은 일 중 내게 의미있는 것으로 남겨졌던, 그래서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던 것 같은 일들을 조잘조잘 얘기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죄와 벌"을 읽은 것도 그러한 '일'이었고, 엄마는 (예상 외로) 읽었다고 대답했다. 딱히 예상 외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은, 딱히 읽었거나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그걸 물었을 때의 내 의도나 대답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 없이, 내게 어떤 끔찍한 기억/예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런 질문을 왜 던졌을까.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겠다. 왜 나는 내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며 학교 공부는 그럭저럭 되어가고 있고 최근에 LCD 모니터를 새로 샀으며 방 한 구석에 곰팡이가 피었다는 것 말고도, 베르그손이 왜 중요한 철학자이며 이혼에 대한 그런 시각에는 어떤 문제가 있고 내가 "죄와 벌"을 읽고 깨달은 점이 무엇인지 따위를 엄마에게 얘기하는 것일까? 물론 꽤나 '학술적인' 이 질문들이 내 삶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소소한 것들이 나의 일상이듯 상대적으로 무거운 저 주제들 또한 나의 일상이기 때문일 것이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한 가지 사악한 의도를 숨기고 있다. 나는 그걸 의식하고 있고, 또한 특별히 내가 그렇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사실 나는 엄마를 계몽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엄마에 대한 나의 우월성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자녀교육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엄마에게 배운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타협지점은 있다. 엄마는 '아기-나'에게는 최고의 엄마였다. 그러나 그 후로는 아니다. 내가 자타의 비난을 무릅쓰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엄마가 내게 책을 골라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어린이백과나 어린이 문학전집은 사 주었지만, 그 뒤로는 내게 무슨 책을 읽혀야 하는지 몰랐다. 따라서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침몰하고 만다. 정보를 얻을 곳도 없기에 방황한다. 그런데도 엄마는 자기가 가장 잘났다. 특히 자녀 교육에 있어서 그렇단다. 나는 화가 난다.

 

다소 거칠게 정리된 나의 개인적인 '지성사'는, 엄마로부터 벗어나려는 나의 '가족사'로 다시 쓰여질 수 있다. 내가 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때, 나는 엄마의 무지를, 교양 없음을, '교양 있는 척'을 그토록 증오했던 것이다. 나는 교양과 지식을 얻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집과는 단절된 존재로서 나를 새롭게 수태하고 싶었다. 자기가 '최고의 무엇'이라고 반복해서 되뇌이므로써 얻게되는 효과가 아닌, 진짜인 지식과 교양을 얻고 싶었다. 엄마는 그 위약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엄마 때문에 나는 길이 잘못 들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을 한다. 집은 천박한 곳이었고 나는 거기를 떠나 교양인과 지식인의 세련된 공간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집이 특별히 천박했던 건, 그곳에 유사-교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엄마를 부끄러워했다. 나는 내가 배운 새로운 것들을 엄마의 코 앞에 들이대며 윽박질렀고, 그 때 느끼는 우월감을 내가 엄마로부터 벗어난 징표로 여겼다. 베르그손이나 도스토예프스키도 모르면서 교양은 무슨... 그런데, 읽었다니!

 

엄마는 "죄와 벌"을 읽었다. 당장에 이 말을 듣고는 거의 놀라지 않았는데, 사실 엄마가 엄마 말로 '소싯적에' 책을 좀 읽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무정"을 읽다가 울기도 했고, 에리히 프롬의 어려운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발밑으로 달려드는 세월에 묻혀, 야금야금 불어나는 삶의 무게에 눌려, 읽다가 말다가, 눈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회사에서 돌아오면 잠자기 바쁜 십 수년의 생활이 결국에는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은 오롯이 자식놈에게 바쳐졌다. 그런데 인제 이 자식이라는 것이 윽박지른다, 지금껏 뭐 했냐고. 왜 책을 안 읽혔냐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뒤늦은 반성과 효도는 엄마에게 직접 가서 하는 것으로 좀 더 미루고, 다른 생각에 좀 더 붙어있어야만 한다. 띄엄띄엄 시집과 소설을 읽고, 대단한 능력은 없기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격정과 환희를 그저 조금씩 빌려 쓰고, 자신은 주변 사람들과는 다른 고귀하고 세련된 종족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슬픈 자존심만으로 보잘것없는 일상을 버텨내는 것. 그것은 엄마의 인생이기만 한가? 나의 인생일 수도 있지는 않은가?

 

엄마가 이룬 것이 보잘것없다면,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엄마보다 당당한 것은, 살 날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뿐이지 않을까? 따라서 내 삶을 평가하려는 시도에 '잠깐 기다려 보세요, 아직 더 남았다니까요'를 더 쉽게 외칠 수 있는 것뿐이지 않을까? 내가 철학자가 되고자 한다면, 엄마는 지금의 모습이 되고자 했던 것일까? 엄마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내 능력으로서는 택도 없는 높은 지위를 꿈꾸면서 서서히 질식하는 중은 아닐까?

 

나는 내가 좋은 대학에 왔기에 별종인 줄 알았다. 그러나 머리는 엄마 쪽을 닮는 거라기에 비로소 자주 왕래하지 않는 외가 친척들 쪽으로 눈을 돌리니, 유명한 대학 안 나온 사람이 없다. 나는 내가 특별히 '순수학문 지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쪽도 상당수가 '순수과학' 전공이다. 그래도 나는 철학을 택했기에 내가 별종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도 물려받았다. 엄마와 아빠는 수 년째 '종교 전쟁' 중이다. 둘이 대립하는 지점을 보면, 영락없는 철학적 문제가 놓여 있다. 많은 것이 정해져 있다. 운명이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다. 그게 누구든, 울면서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무엇을 배웠든, 그것을 단 한 명의 후손에게라도 전할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어렵게 배운 것을 그의 발 밑으로 깔아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단 한 명의 제자도, 자식도 키우지 못한 채, 끔찍한 반복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증오와 멸시와 환멸의 반복을? 멸종의 그 순간까지?

 

답의 일부분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내가 엄마 나이 정도는 먹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이룬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구체적인 대답 하나는 얻게 되겠지. 그리고 아마 나는 그걸로 만족할 것이다. 인생은 그리 끔찍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의미에서 끔찍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인생이 반복하는 것이라 해도 그게 그리 끔찍한 것만은 아니지, 하고 생각하면서 스무 살 먹은 자식에게 '하는 일 없이 쳐박혀 책이나 읽는 저 벌레같은 인간이 싫어' 하는 소리를 들으며 살 수도 있다.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껴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야만 내가 그걸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그래야 할 책임이 있다.

 

 

- 2006년 2학기, 조금만 더 잘 살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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