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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15
    <변화의 지각>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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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10/05
    정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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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9/27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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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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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7/10
    순수이성비판 새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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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지각>에서, 1

두 번째 강의

 

어제 여러분은 제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주신 만큼, 오늘 제가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여러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재와 우리 사이에 놓아 버린 인공적인 도식을 제쳐 버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되어 버린 어떤 생각이나 지각의 습관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와 운동성에 대한 직접적 지각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우선 이러한 노력의 결과를 즉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변화, 모든 운동을 절대적으로 분할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운동으로부터 시작합시다. 나는 내 손을 A 지점에 두고 있습니다. B 지점으로 손을 옮기면, 나는 AB라는 간격을 가로지르게 됩니다. 저는 A로부터 B에 이르는 이 운동을 본성적으로 단순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우리들 모두가 직접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A에서 B로 우리의 손을 움직인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손을 멈출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긴 합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우리가 다루는 것은 [문제의 운동과] 같은 운동이 아닙니다. A부터 B까지의 단일한 운동은 더 이상 있지 않게 되고, 가정에 의해서, 하나의 간격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운동이 있게 됩니다. 안으로부터 근육 감각을 통해서도, 밖으로부터 시각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지각을 갖게 됩니다. 만약 내가 A부터 B까지의 운동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나는 그 운동이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분할 불가능하다고 단언해야 합니다.

 

내가 A로부터 B로 움직이는 내 손을 보면서, 그 간격 AB에 대해서 내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여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간격 AB는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A에서 B까지의 운동도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왜냐면 이 운동은 그 간격에 정확히 들어맞기 때문이다.” 또는: “이동하는 매 순간마다, 그 운동자는 어떤 지점을 지나며, 따라서 그 운동 안에서 원하는 만큼 많은 단계들을 구분해낼 수 있고, 따라서 그 운동은 무한히 분할 가능하다.” 하지만 잠시 숙고해 봅시다. 어떻게 운동이 그것이 가로지르는 공간과 들어맞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움직이는 어떤 것이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과 일치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움직이는 대상이 그것의 통과 궤도 위의 한 지점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대상은 그곳을 통과합니다, 또는 다른 말로, 그것은 그곳에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거기 멈추었다면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멈춘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과 동일한 운동이 아닙니다. 그 이행에 아무런 중단이 없다면, 하나의 이동은 항상 단 한 번의 도약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이 도약은 몇 초, 혹은 몇 날이나 몇 달,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도약인 순간, 그것은 분해 불가능합니다. 단지, 일단 이행이 완료되면, 그것의 궤도는 공간이고 공간은 무한정하게 분할 가능하므로, 우리는 운동 자체도 무한정하게 분할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하기를 좋아하는데, 왜냐면 어떤 운동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위치의 변화가 아니라, 위치들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운동이 남기고간 위치, 그것이 차지할 위치, 만약 중간에 멈추었을 경우 그 운동이 차지했을 위치. 우리는 부동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운동과 운동이 통과한 공간의 지점들의 부동성을 더 잘 일치시킬수록, 우리는 그 운동을 더 잘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실재적 부동성이란, 우리가 그것을 운동의 부재로 이해하는 한에서,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운동이 실재 그 자체이며, 우리가 부동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물들의 어떤 상태인데, 이는 두 기차가 평행하는 선로 위에서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을 때 발생하는 어떤 상태와 유비적으로 비슷합니다. 두 기차들 각각은 다른 기차에 앉아 있는 승객들이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예외적인 이러한 상황이 우리에게는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행동을 할 수 있으며, 그 사물들도 우리에게 작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기차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오로지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경우에만, 다시 말하면, 그들이 같은 방향과 같은 속도로 가고 있는 경우에만, 문을 통해서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서로에게 말을 건넬 수 있습니다. “부동성”이 우리 행동의 필요조건인 만큼, 우리는 그것을 실재로서 놓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며, 우리는 운동 안에 무엇인가가 겹쳐져 놓여 있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실행보다 더 정당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마음의 습관을 사변의 영역으로 가져간다면, 우리는 진정한 실재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일부러 만들어낼 것이며, 실재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것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엘레아의 제논의 증명들을 상기해 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 증명들은 모두 운동과 그 운동이 주파한 공간에 대한 혼동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는 최소한 공간을 다루듯이 운동을 다룰 수 있으리라는 확신, 운동의 마디를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나눌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에 따르면, 아킬레스는 절대로 그가 쫓고 있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아킬레스가 도달하면, 거북이는 그 시간만큼 그보다 멀리 가 있을 것이고, 이것이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은 수많은 방식으로 이 증명을 반박해 왔는데, 이 방식들은 너무 까다로워서 그 각각의 반박들은 다른 어떤 반박이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권리를 그로부터 빼앗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작업을 쉽게 만드는 아주 간단한 수단이 있었습니다. 아킬레스에게 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결국 거북을 따라잡고 심지어 거북을 앞지른 만큼, 바로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그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걸어서 움직임으로써 운동의 가능성을 시연해 보였던 고대의 철학자는 옳았습니다. 단, 그 철학자의 유일한 실수는 동작으로만 표현했을 뿐 거기에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킬레스에게 그 경주에 대해서 설명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제논은, 내가 있는 지점에서 거북이가 있었던 지점으로 내가 움직이고, 다시 그 지점에서 거북이가 그 때 있었던 다음 지점으로 움직이며, 이와 같이 계속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내가 뛰도록 하는 그의 절차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나는 한 걸음을 내딛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걸음을 내딛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마침내 몇 발자국을 디딘 후에 한 발자국을 더 내딛음으로써 그 걸음으로 거북이를 앞지릅니다. 따라서 나는 연속적인 분할 불가능한 행위들을 수행합니다. 나의 진행은 이런 행위들의 연속입니다. 당신은 그 진행을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걸음의 수만큼 나눠서 부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 진행을 다른 법칙에 따라서 재분절하거나,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분절되어 있다고 가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제논이 한 대로 나아가는 것은, 이 달리기가 마치 그것이 주파한 공간처럼 자의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행이 실제로 궤도에 들어맞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는 운동과 부동성을 일치시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를 다른 하나와 혼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운동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부동성으로 구성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그 운동을 살펴볼 때 마치 그 부동성들을 가지고 운동을 재구성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운동이란 어떤 한 점, 그리고 다른 한 점, 이렇게 무한정하게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다른 무언가가 있으며,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가는 간격에는 그 간격을 뛰어넘는 이행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심지어 우리가 아직 두 개의 연속적인 점들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이행을 가정해야 한다고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이행에 우리의 주의를 고정시키는 순간, 우리는 즉시 그 이행을 지점들의 연속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이행에 대해서 고려해야만 하는 순간까지 그것을 연기합니다. 우리는 이행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고, 그것에 이름을 부여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 지점이 만족스럽게 자리잡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그 지점들로 관심을 돌리며 그 점들만을 다루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우리는 운동으로서의 운동의 광경이 우리의 사유 속에 일으킬 수 있는 그러한 어려움들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즉시 운동을 부동성들로 채우게 됩니다. 만약 운동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즉, 우리가 처음부터 부동성이 실재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운동은 우리가 그것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갈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운동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변화든 이와 같다고 말하겠습니다. 모든 실재적 변화는 분할 불가능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그 변화를 구별되는 상태들의 연속과 같은 것처럼, 그리고 이 상태들이 마치 시간의 선을 형성하는 것처럼 다루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변화가 우리 안에서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사물들 안에서도 그러하다면, 우리들 각각이 “나”라고 부르는 이 끊임없는 변화가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끊임없는 변화에 대해서 어떤 작용을 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두 변화는 서로에 대해서 앞에서 언급한 두 대의 기차와 같은 상황에 처해져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대상이 색깔을 바꾼다고 말하며, 그리고 여기서 그 변화는 변화의 구성 요소가 되는 색조들의 연속이며, 그 색조들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첫째로, 만약 각각의 색조가 어떤 객관적 실존성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무한히 빠른 진동이며, 곧 변화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그에 대해서 갖고 있는 지각은, 그 지각이 주관적인 만큼, 우리의 신체의 일반적 상태의 어떤 고립되고 추상적인 측면에 불과하고, 이 상태는 전체로서 계속해서 변화하면서 이러한 소위 불변적인 지각이 자신의 변화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야기합니다. 사실, 계속해서 변경되지 않는 지각이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색깔, 우리 밖에 있는 그 색깔은 운동성 그 자체이며, 우리의 신체 또한 운동성입니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우리 지각의 전체 체계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행동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외부와 내부의 운동성 사이에 아까 말한 두 대의 기차와 비슷한 상황을 일으킬 수 있는 방식으로 조절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좀 더 복잡하지만, 같은 종류의 상황입니다. 두 변화가, 대상과 주체의 변화가, 특정 조건 하에서 일어날 때, 그 변화들은 “상태”라고 불리는 특정한 외관을 산출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들”을 일단 소유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은 그것들을 가지고 변화를 재조립합니다. 반복하건대,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변화를 상태들로 분해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들에 작용을 가할 수 있게 해 주며, 변화 그 자체보다 상태들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유용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행동에 유리한 것이 사변에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변화를 정말로 상태들로 구성된 것으로 상상한다면, 당신은 즉시 해결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문제들은 오로지 외관만을 다룹니다. 당신은 진정한 실재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됩니다.

 

저는 이 요점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각자 실제로 한 번 실행에 옮겨 봅시다. 어떤 변화, 어떤 운동의 직접적인 시각을 한 번 갖도록 해 봅시다. 우리는 절대적 분할 불가능성의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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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화

"충남 예산의 한 초등학교 교장의 자살을 둘러싸고 전교조 교사들과 이 나라 교장 선생님들이 벌이고 있는 죽기 살기의 싸움은 저 아이들의 찬란한 생명력 앞에서 수치스럽다. 교장이 젊은 여교사들에게 차 시중을 시킨 일이 발단이라고 한다. 듣기에도 민망하고 꼴 같지도 않다."

 

김훈은 앞 문단들에서 '고3 선배님들'을 응원하러 수능시험 고사장 앞에 진을 치고 서서 '지옥의 문턱 앞에서의 축제'를 벌이는 아이들을 눈물겹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저 자살 사건으로 화제를 옮기는데, 꼴 같지도 않단다. 어떤 의미에서? 다음 문단을 계속 읽어본다.

 

1) "나는 젊은 여교사가 늙은 교장에게 차 한 잔을 가져다주는 선의와 애정은 예(禮)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저런! 이렇게 나이브하고 고루한 생각을 여과 없이 내뱉다니! 하는 생각이 대번에 든다. 편안하게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우파 김훈이 또 한 건 했나 싶다. 마음을 추스리고 계속 읽어본다.

 

2) "또한 교장이 젊은 여교사에게 차 시중을 시키는 일은 스스로 삼가는 것 또한 예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시금 화들짝 놀란다. 무엇인가? 이 문장은 사실, 당연한 문장이고, 이런 말을 한다고 대단히 진보적인 것도 아닌, 뭐 그렇고 그런 문장이다. 그리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다시금 놀랐으며, 방금 전 내가 우파 김훈에게 겨누었던 탐탁지 않은 시선이 쥐꼬리 사라지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1)을 말한 사람이 2)를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면 내 분류 체계에는 1)의 화자와 2)의 화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중간 어딘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위태롭게 경계선 위에 서 있을 뿐 자기만의 이름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1) + 2)가 오히려 당연한 생각, 그러니까 더 '객관적인' 생각, 더 '보편적인' 생각이 아닐까? (객관성, 보편성에 대한 경계를 유지하면서)

 

다시 1)을 읽어본다. 아무렇지도 않다. 맞는 말이다.

 

이 사건의 문제는 1)과 2)의 생각 중 어떤 것도 적용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차 한 잔을 가져다주는 '선의와 애정'도 없었고(그게 누구 탓이든), 차 시중을 스스로 삼가는 예도 없었다.

 

그 다음 절차가 사회적 분석, 혹은 권력 분석인데, 김훈은 이걸 전혀 못한다. (아래에 이어지는 바로 다음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데 여기부터는 오차 범위가 너무 크다. 이른바 인간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고유한 문제다. 하지만 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일단 두고 단락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본다.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양쪽이 인의예지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는 방식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양쪽이 이른바 '참교육'을 한다는 교사와 교장이 아닌가. 개인적 자율의 영역을 스스로 포기하고 이를 악물고 끝까지 싸우다가 한쪽이 자살을 하고 나니까 양쪽이 각자의 입장을 세력화, 집단화, 이념화, 정치화함으로써 권력투쟁의 전면전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 싸움의 형국은 한마디로 개수작이다."

 

사회가 이렇게 흘러가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세력화, 이념화, 정치화...등이 '기존 사회'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보수적인' 단락의 마지막 부분의 명제는, 뒤집힌 형태로, 어떤 개혁의 요구가 된다. 개인의 개혁, 혹은 윤리적 개혁인 것인데, 그러므로 당연히 집단화, 사회화될 수 없고, 따라서 운동도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은 사회학이 아니라 심리학이 줄 수 있을 것이다.

 

- 김훈, "아이들은 청순하기만 한데"

 

제목은 거짓말이다. 김훈의 줄타기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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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 개를 데리고 산보를 할 때, 나는 개 다리의 움직임에서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을 느낀다. 개 한 마리가 나에게 주는 행복만으로도 나는 오래오래 이 세상에서 살고 싶다. 개 다리가 땅 위에서 걸어갈 때, 개 다리는 땅과 완벽한 교감을 이룬다. 개의 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다리가 땅을 밀어내는 저항이다. 개의 몸속에 닿는 이 저항이 개를 달리게 하는데, 이 저항이야말로 개의 살아 있음이다. 개 한 마리가 이 세상의 길 위를 달릴 때, 이 세상에는 놀라운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를 데리고 공원에서 달릴 때 나와 개가 똑같은 아날로그의 짐승임을 안다. 나는 개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날로그 세상의 네발짐승인 것이다. 내 콧구멍에서 김이 날 때, 개 콧구멍에서도 김이 난다. 이 세상의 길바닥을 헤매고 다닌 개의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고 내 발바닥에도 굳은살이 박여 있다. 이 굳은살은 각질로 금이 가 있고, 거기에 때가 끼어 있기도 하지만, 나는 사람이나 개의 몸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은 발바닥의 굳은살이라고 생각한다. 그 굳은살은 말랑말랑하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다. 그 굳은살은 개나 사람이 이 세상을 딛고 다닌 만큼 단단하거나, 아직 덜 딛고 다닌 만큼 말랑말랑하다. 그래서 개 발바닥의 굳은살은 한 편의 역사를 이루는데, 이 역사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다. 그 역사는 해독하기 어려운 역사인데, 그것이 해독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 역사가 세상과 개 사이에만 이루어진 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개의 발바닥이나, 두 갈래로 갈라진 돼지 발바닥, 소 발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 존재들의 개별적 삶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목이 멘다. 그리고 못대가리가 휠 때마다 세상과의 교감에 이토록 서툰, 내 생명의 초라함에 문득 놀란다. 아날로그 세상의 슬픔과 기쁨은 등불처럼 환하다. …

 

- 김훈,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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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그 여자네 집 -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6 
박완서 (지은이)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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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 원제 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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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제 하나 읽고 또 다른 거 읽자.
(그런데 '믿을 수 없게'라는 표현은 흔히 쓰이는 말인가? 보통 '믿을 수 없이'라고 하지 않나? 내 눈에는 영 어색해 보이네. 라임을 맞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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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 문장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이 없다면"이라는 조건절로 은근슬쩍 가리고 있는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작가(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이고, 또 하나를 들자면, 만약 다른 텍스트를 활용해서 신에 관한 작가의 입장을 밝힌다 하더라도 이를 저 문장에 적용시켰을 때 도출되는 직설적 결론이 저 문장의 의미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다시 말하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저 명제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신은 없으므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 또는 "신이 있으므로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두 개의 문장 중 어느 것과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 명제를 제시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에게 가 보자. 물론 이 말을 하면서 이반이 가졌던 생각과 작가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불일치 자체가 곧 작가의 생각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이반은 일단 무신론자다. 그러나 신을 부정하지는 않는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반은 신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반이 볼 때 우리 인간들은 본성적인 기질상 우리의 자유를 견뎌내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일을 오로지 우리의 판단에 의거해 결정해야 한다는 중압감(그리고 아마도 그에 따르는 책임감)을 이겨내지 못한다. 인간은 단순히 자유로운 존재라기 보다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짐이다.

 

따라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마땅한 전능한 신의 존재는 인간의 보다 나은 삶에 필수적이다. 신은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복종을 강요하지만, 사실 인간은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헌납하고 신 앞에 바짝 엎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여야 더욱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인간에게는 자유로부터의 해방이 가장 절실한 과제다. 요컨대, 이반은 신이 없다고 믿지만 동시에 신이 필요하다고 믿으며, 신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그의 판단을 압도한다. 신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반에게서 위의 명제는 다음과 같은 보충적인(동시에 중심적인) 의미를 갖는다.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므로, 인간은 그와 같은 절대적 자유를 견뎌내지 못하고 자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이와 같은 제안은 다소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①신이 존재하지 않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를 알 필요가 없고 그저 ②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견디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이를 적용할 때 전자(①)는 후자(②)의 아래에 억압되어 있지만, '신의 부재'를 알고 있는 이반 자신에게 이 모순적 명제를 들이밀면, 억압되었던 '신의 부재'는 결코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드시 남아서 이반의 자의식(우월감)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부터 이 기만적 명제의 의미는 삐걱거리게 된다.

 

이 명제의 의미가 결국 파열하게 되는 지점은, 의미화될 수 없는 어떤 것, 곧 '실재'가 이반의 명제에 틈입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상징계 안에서 신의 부재는 엄연한 사실이며, 이 사실과 윤리적 강령이 가까스로 봉합되어 있는 것이 이반의 명제였다면, 작가는 이 봉합의 끝 매듭을 살짝 건드리므로써 '사실'이란 상징계 안의 어떤 것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그 사실은 실재의 어떤 것이 불가피하게 누락되었기 때문에(의미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을 폭로한 것이다. 끝 매듭이 풀린 봉합은 단번에 해체되었다.

 

그 실재는 곧 스메르쟈코프의 범죄이다. 이반의 '사상적 아들'인 스메르쟈코프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으므로" 그냥 한 번 표도르 카라마조프(이반의 아버지)를 죽여 본다. 이반은 자신의 이론이 '실제로' 아버지의 몸 위에서 시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상징계 안에서는) 할 수 없었으므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고 만다(상징계로부터 벗어남).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여기에서 이렇게 이반을 단죄하므로써 이반의 명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반의 단죄는 '신의 부재'라는 사실의 거부를 의미한다(①의 소거). 또한 상징계의 한계와, 상징계는 실재의 배제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그렇게 배제된 부분이 사실은 상징계 전체의 의미를 좌우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반은 자신의 아버지의 육체가 '모든 것이 허용된' 인간의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실재)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상징계)을 구성했다.

 

'신의 부재'가 부정됨으로써 도스토예프스키의 저 명제는 분명하게 유신론으로 읽힌다. 또한 이론이 아닌 실재의 신앙, 실재의 윤리학으로도 읽힌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는 가타부타를 따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삶에 대한 이론은 그러한 것들의 배제를 매개로 해서 구성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이론화할 수 없는 것들, 이론의 찌꺼기, 곧 순수한 삶 그 자체이다. 윤리는 직접적으로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덧) 스메르쟈코프도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지만) 아마 표도르의 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반의 이론으로 침입한 실재, 곧 그의 이론을 지탱하면서 결코 이론화되지는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은 바로 '부친살해'가 된다. (스메르쟈코프가 표도르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이반의 사상에 의해 살해된 것이므로 부친살해가 맞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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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 원제 Hegel (2000) 

 

 

정   가 : 48,000원

출간일 : 2006-07-31 | ISBN : 8956440832
양장본 | 1088쪽 | 233*16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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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되기 전에 사 놓아야 할 텐데, 가격과 분량이 너무 무겁다. '이제이북스'는 (아주 약간 과장해서) 숭배받아 마땅한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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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 가장 뛰어난 시인들의 경우에도 첫 시집이 대표 시집이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적 재능의 성격과 관련되는 것 같다. 수학적 재능이 그렇듯, 시적 재능도 매우 일찍 피어나는 일이 흔하다. 그리고 그런 재능의 극히 일부만이 나이 듦과 더불어 마모하는 일 없이 유지되거나 진화하는 것 같다. 미당은 만년의 다소 흐트러진 듯한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생애 전체를 통해 자신의 시 언어를 한국어의 최정상에 두었던 매우 예외적인 시인이다. 이젠 너무 남용돼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하는 상투적 표현을 다시 끄집어내자면, 미당의 시 언어들은 지난 세기 한국어에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미당의 죽음 앞뒤로 문단 안팎을 소란스럽게 한 그의 정치적 몸가짐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미당의 경우를 두고 시와 정치의 관계를 따져보려는 논자들이 쉽게 치이는 덫은 문학과 삶, 또는 문학과 정치를 모순 없이 일관되게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의 유혹이다. 그래서 그의 행적에 비판적인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시적 성취의 허약함을 찾아내려 하고, 그의 문학적 성취에 매혹된 사람은 되도록 그의 행적을 호의적으로 이해하는 데 기여할 상황논리를 구성하려 애쓴다. 이렇게 문학과 삶을 내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오캄의 면도날처럼 매력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설명의 깔끔함이 아니라 사실 앞에서의 겸손함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어떤가? 미당의 삶은, 적어도 그의 공적 자아의 행적은, 시시한 것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젊은 시절 태평양전쟁 시기에 쓴 전쟁선동시든 갑년이 넘어 군사깡패에게 바친 생일 축시든, 그런 문자 행위가 그에게 절박한 신체적 위협과 함께 강요되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도 미당은 천연덕스럽게 그런 역겨운 언어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활자화했다. 그리고 아무런 뉘우침 없이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는 궤변으로 그 행적들을 얼버무렸다.

 

그가 비슷한 세대의 몇몇 반동적 문인들에 견주어 실제로 누린 것 없이 이름만 더럽혔다는 점을 들어 도리어 그의 순박함을, 그 '시인됨'을 높이 사주자는 견해도 있다. 그가 실제로 누린 것이 대단찮았느냐는 판단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 사실이 그 행위들의 역겨움을 눅여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그의 공적 자아는 시시한 것이었다. <<화사집>>의 서시序詩 격인 <자화상>의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 어떤이는 내눈에서 죄인을 읽고가고 / 어떤이는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가나 /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같은 대목은 그의 생애 전체를 미리 요약하는 예언의 울림으로 파닥거리지만, 이 구절들의 빛나는 진솔함이 그의 휘어진 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

 

─ 고종석, <<모국어의 속살>>.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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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저녁만 먹으면 들어와서 몇 시간씩 자고 일어나니, 밤에 잠이 안 와서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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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편

정처없는 블로깅 중 이 시편 8편의 일부분이 적혀있는 포스트를 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고3때의 기억을 음미.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이 구절은 졸업 후에 기독교에 대한 내 감정이 여러 번 변하면서도 잊혀지지 않았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사람의 자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what is man that you are mindful of him, the son of man that you care for him?)"

[*권고(眷顧): 관심을 가지고 보살핌]

 

노래로 들으면 더욱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오겠지만, 인터넷에 올라 있는 것을 찾아봤자 그 '너무 경건한' 기독교합창단식으로 녹음되어 올려져 있을 테니 아예 환상을 깨 버릴지 몰라 찾아보지 않았다. 내가 감정의 격랑을 경험했던 목소리는 파릇파릇한 고등학생 천여명의 합창소리였으므로. 다시 듣기는 힘들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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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새 번역본

순수이성비판 1   순수이성비판 2

임마누엘 칸트 (지은이), 백종현 (옮긴이) | 아카넷

    

 

 

아카넷은 참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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