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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에서 퍼온 로쟈님의 글이다. 사실 통독은 여러 번 했지만, 다시 꼼꼼히 따라 읽으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내가 덧붙인 부분은 색깔을 달리 했다. (이하 존칭은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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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서울(=한국)은 이라크에서 반미 테러조직의 인질로 억류돼 있던 김선일씨가 결국은 피살된 사건으로 술렁거린 듯하다. 테러조직의 요구조건은 한국의 이라크 파병 철회였지만, 한국정부로선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혹 다른 협상카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의심스럽지만), 협상테이블에 미처 앉아보기도 전에 피살 소식을 들어야 했다. 마지막까지 대통령과 정부에 구명(救命)을 호소했던 애꿎은 한 국민의 잔혹한 죽음은 무엇으로도 보상되거나 애도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인질을 살해한 테러조직의 행위 또한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한 트로츠키주의자의 지적대로, 그들의 행위는 결국 한국인들의 ‘반감’을 초래하는 한편, 반(反)테러전쟁의 기치를 내세운 부시 정부의 입지만을 더 강화시켜줄 따름이다. 극과 극은 그렇게 서로 공모적이다). [김선일씨 사건에 대한 로쟈의 첫 코멘트들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정부로선 '파병 철회'가 수용하기 힘든 요구 조건이었다. 2) 다른 협상카드도 없었을 듯싶다. 3) 김선일씨의 죽음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을 것이다. 4) 테러조직도 정당화될 수 없다. 5)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들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고 부시의 입지를 강화했다. 3과 4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고, 5는 사실에 대한 기술이다. 나로서도 어떤 사태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데, 사실은 항상 당위와 의도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지', 즉 결과 예측 능력의 부재, 혹은 의도적 회피를 탓하고 싶다. 윤리와 연결되는 것도 이 지점일 것이다. 문제는 1과 2다. 나는 여기에 아직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다(나는 정치판 돌아가는 사정에 대한 나의 무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로쟈가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근거들이 아래에 제시된다면 여기에 대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그것도 겨우 간접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외상(=트라우마)’적인 사건들은 우리가 한 인간이고, 개인이면서 동시에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지만(외국에 나오면 비로소 그런 걸 체감한다), 이 ‘개인과 국가’란 주제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대신에, 이 글에서는 이 사건을 기화(奇貨)로 하여 불거지고 있는 일부에서의 ‘정권퇴진운동’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어제 폐막된 모스크바영화제를 며칠 좇아 다니느라고 소홀히 한 ‘밥벌이’에 매진해야 할 참이지만(밥벌이가 전제돼야 민주주의도 가능하다!), 부득이하게도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혀야 하게끔 됐다. ‘객지’에서 시국과 관련하여 이런 의견을 밝힌다는 게 ‘객쩍은’ 일이긴 한데, 여러 ‘현지사정’으로 인한 제약을 무릅쓰고 몇 자 적도록 하겠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인터넷서점 알라딘 사이트에서의) balmas님과의 ‘논쟁’이며(하지만, 이 글의 ‘수신자’를 내가 balmas님으로만 국한하고 있는 건 아니다), 서로의 의견차이가 해소될 걸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나의 입장을 ‘정립’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는 줄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내가 이해하는바 balmas님의 입장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이 요약은 ‘기억’에 의존하여 재구성한 것이므로, balmas님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1)(AP통신의 폭로에서 드러난바, 김선일씨 피랍사건을 고의로 은폐하거나 적어도 방관함으로써) 노무현 정권은 도덕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안게 됐다(“노무현 정권의 생명은 끝났다!”). (2)이로 인해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수구세력들의 노정권에 대한 공세는 가일층 강화될 것이고, (치명상을 입은) 노정권으로서는 국정운영의 헤게모니를 상실하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수구세력에 영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따라서, 이후 이라크 파병을 강행함과 동시에 반동수구 세력화할 수밖에 없는 노정권에는 더 이상 어떠한 개혁성/진보성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개혁/진보세력은 이제라도 당장 노정권퇴진운동에 나서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현 정세는 87년 4월, 전두환정권의 호헌선언 때만큼이나 ‘비상시국’이다. 민주주의는 물론이거니와 국민의 기본권(=생존권)마저 보장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권’에 맞서 결사항전에 나서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당시 5공의 전두환정권 역시 박종철 학형의 고문치사사건을 은폐했다가 그것이 폭로되는 바람에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고서 수세국면에 처하게 됐는바, (대통령 직접선거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결연하게 무시한) 4월의 ‘호헌선언’은 수세국면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적반하장’격의 카드였다. 그것이 결국은 (가장 보수적이라는) 중년의 ‘넥타이부대’까지 거리로 나선 6월항쟁을 가져왔고, 이 항쟁은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는 정권의 6.29(항복)선언으로 봉합되었다. 하지만, 새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그 해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김영삼’도 ‘김대중’도 아닌 ‘노태우’였다(알다시피, 이후 92년, 97년, 2002년 차례로 대선이 있었고, 우리 정치사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진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6월항쟁의 결과로 가능해진 이러한 정권/정부교체의 사슬을 ‘87년 체제’라고 부른다).
물론 거기에는 정권차원의 ‘이벤트’도 한몫 한바, 선거 바로 전날에 KAL기 폭파사건의 ‘주범’ 김현희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돼 왔다(참고로, 노태우가 구호로 내건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호응하려는 듯이 TV에서는 로버트 레드퍼드가 감독한 아카데미작품상 수상작 <보통사람들>이 방송되었다. 지금 생각으론 우스워 보이지만, 그때는 그런 것들이 다 ‘먹혔다’). 아마도 그 건은 안기부(현 국정원) 역사에 남을 만한 극적인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거사’가 아마도 같은 세대로서 나와 balmas님이 겪어온 바이다. 이러한 과거사의 한 대목을 미리 꺼내든 것은 그것이 서로의 의견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경험론적’ 지반으로서 한 준거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balmas님은 ‘2004년 6월’을 ‘1987년 4월’과 마찬가지의 상황이라고 간주하는 것인지?(어느새 17년 전이군!) [이건 발마스님의 논조가 어땠는지를 참조해야 로쟈의 질문이 얼마나 적절한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단지 '수사적' 차원에서 노정권 퇴진운동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발마스님도 정말로 그런 운동을 조직하거나, 조직하는 단체를 후원하거나 하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지 의문스럽고, 대신에 아마도 노정권 퇴진이라는 다소 선정적인(따라서 내겐 오히려 수사적으로밖엔 들리지 않는) 구호로써 노무현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을 표시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로쟈의 대응은 ('노정권 퇴진운동'의 시의성에 대한 판단이라기 보다) 자신의 정치관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떤 판단 자체에 시비를 걸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취미판단이야 각자의 몫이 아닌가? 어떤 정권이 맘에 든다, 안든다는 판단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지난번 국회의원선거에서 ‘반전’에 성공함으로써 노정권이 ‘탄핵정국’을 정면 돌파하게 됐지만,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자체는 급등한 것 같지 않다. ‘노사모’가 있긴 하지만 노무현은 현재로선 ‘인기 없는’ 대통령이다(그의 참여정부는 초기 ‘문민정부’의 상징적 아우라도 초기 ‘국민의 정부’의 카리스마도 갖고 있지 않다).
한나라당이나 수구세력은 그를 대통령으로 아예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인정하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듯하며(대통령은 한 ‘개인’이기 이전에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태도는 정치의 룰을 무시하는 反민주주의적 태도이다), 민주노동당이나 개혁세력은 그의 미지근한 개혁속도와 ‘반동적인’ 파병방침에 불만이 고조돼 있는 듯하다(나는 그러한 불만에 일부 공감한다). 그는 한쪽에서 보기엔 ‘모험주의적 좌파’이며(그래서 위험하다), 다른 쪽에서 보기엔 ‘개량적 보수주의자’이다(그래서 믿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가 그렇게 끼인 형국 속에서 용케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하며, 그가 속한 열린우리당이 의회의 과반수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나는 지난번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지만, 그건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서 특별한 호감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한나라당(본체는 5공의 ‘민주정의당’인바, 나는 5공 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다)의 집권만은 눈뜨고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나는 이회창에 대해서도 특별한 반감을 갖고 있지 않다). [왜일까? 돌려 물으면,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왜 모두 이회창을 싫어하나? 아마도 한나라당의 당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마 그가 내뱉었던 '지배층다운' 말들 몇몇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에 대한 '근원적인' 혐오감을 갖는 사람이 그 당수에 대해서 특별한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나? 그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이 그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 그대로 옮겨지는 것이 경솔하고 위험할 수 있다고 본다(꼭 이회창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물론 한나라당 '따위'에 들어간 사람이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 당원/정치인 역시 다종다기할 것이며, 이 차이를 간과하고 '한나라당인'으로 뭉뚱그려 판단하는 사람들이 나 역시 곱게 보이진 않는다. ("ㅁㅁㅁ 왜 싫어?" "한나라당이잖아!" "ㅇㅇㅇ 왜 좋아?" "민노당이잖아!") 문제는 그 차이들이 이른바 당론으로 봉합되는 현상일 것인데, 이 현상을 당원/정치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듯싶다. 당론이 문제면 당이 문제다. 개인에 대한 판단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회창의 ‘한나라당’이나 노무현의 ‘민주당’이나 “다 똑같은 놈들” 아니냐라고 반문한다면, 나로선 할말이 없다. 하지만, 이미 다른 글들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거의 똑같다’ 하더라도 정치적 판단에서는 ‘작은 차이’란 게 중요하며, 그러한 ‘상식’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요컨대,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하더라도, ‘더 나쁜 놈’이 있고, ‘덜 나쁜 놈’이 있는 것이다. [이회창이 대선에서 이기면 이회창 개인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로쟈의 전제인 듯하다(물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전제일 것이다).]
나의 ‘정치적 판단’의 핵심적인 기준은 ‘좋은 사람’(=혁명)에 대한 이상주의적 기대가 아니라 ‘덜 나쁜 놈’(=개혁)에 대한 현실적인 지지이다(흔히 하는 말로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 ‘개혁’이다). 즉, 내가 갖고 있는 정치적 구도는 ‘좋은 사람’(=진보개혁세력) 대 ‘나쁜 놈들’(=수구보수세력)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아니라, ‘좋은 사람’-‘덜 나쁜 놈’-‘더 나쁜 놈’이라는 3분법적 구도이다. 선과 악,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를 판별하는 ‘윤리적 판단’에서라면, 이러한 3분법은 궤변이거나 넌센스이다. 하지만, ‘정치적 판단’에서라면 이러한 3분법은 ‘실제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도에서 내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 지지하는 것은 ‘덜 나쁜 놈들’의 공간을 넓히는 일이다. [이건 일종의 허무주의인데, 모든 현실적 인식은 얼마간 허무주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당위나 이상의 선언은 허무하고 말고 할 게 없다. 당위와 현실의 괴리에서 허무가 발생하는 바, 이 괴리는 필연적이다(괴리가 없다면 이미 유토피아다). 따라서 허무가 없다면 다음 세 입장 중 하나다. 1) 당위가 없다. 대충 살면 된다. 2) 현실이 없다. 선언만 한다. 3) 당위에 따라 살지 못하는 현실적 인간들을 모두 숙청하면/비웃으면 된다. 1과 2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고, 3을 선택한다면 분명 허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의 당위를 갖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에 의해 분류된 '현실적 인간'들을 비웃으며 산다(이들이 혁명을 일으킨다면 비웃음이 숙청으로 쉽게 이어질지도). 그러나 이도 저도 싫다면, 이 필연적 허무주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
사실, 3분법적 구도라는 건 나의 창안이 아니며,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유구한 것이다. 10세기부터인가 중세 기독교적 상상력 속에서 연옥이 차지했던 자리를 떠올려보라(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 참조). 천국에 가야 할 ‘착한 분’도 아니고, 지옥에나 떨어져 마땅한 ‘나쁜 놈’도 아닌 대부분의 ‘사악하지는 않지만 좀 모자란’ 인간들을 천국-지옥이라는 이분법적 구도하에서는 마땅히 처리할 방도가 없어서 ‘탄생’한 것이 중간계로서의 ‘연옥’이었고, 그래서 형성된 것이 천국-연옥-지옥의 3분법적 구도였다.
사회학적 상상력을 약간 발휘하면, 나는 중세의 이 ‘연옥’이야말로 세속의 공간이며, 귀족과 농민 사이에 시민(=부르주아) 계급이 들어서면서 형성되는 사회적 신분의 ‘세 위계’의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 중세의 연옥과 부르주아계급의 성장,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 간에는 모종의 ‘커넥션’이 있을 거라 짐작되지만, 이 자리에서는 자세히 따져보지 않겠다(참고로, 서구와는 달리 러시아의 사회적 위계는 철저하게 이분법적이었으며, 종교적 상상력 또한 ‘지옥’을 강조하는 종말론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요컨대 러시아에는 ‘중간’이 없었다. 그 결과는 러시아에는 ‘혁명’(=단절)만 있어왔지 그 ‘개혁’(=계승)은 존재해본 적이 없다).
(계속...)
여기를 오래 버려두었는데, 혹시나 가끔씩 찾아주었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사실 다른 곳에 블로그를 열었고, 지인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로 운영하고 있다. 아무래도 여기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게 더 이상 힘들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지금까지 쌓인 글들과의 단절이 너무 뚜렷해서일 수도 있고,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해서일 수도 있겠다. 단지 음악 게시물을 올리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여기서는 음원 파일을 내 계정에 올릴 수 없다). 다시 전부 여기로 옮겨오거나 아니면 그리로 이사가야 할텐데, 조만간 결정해야 할 듯 싶다. 여기로 옮겨오자니 음악 게시물들이 아깝고, 이사가자니 굳이 왜 그래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사물들을 그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왜냐하면 ‘가장 탁월한’ 감각은 눈의 감각이며, 눈은 시각장 안에서 형태는 바꾸지 않고 장소만을 바꾼다고 가정되는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형상들을 분리해 내는 습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운동은 운동체에 대해 우유성으로써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는 안정적인 대상들, 그리고 사람에 관해서 말하자면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신뢰할 만한 대상들을 다루는 것이 유용합니다. 시각은 이런 방식으로 사물들을 다루기를 시도합니다. 촉각의 전위(前衛)로서, 시각은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약 청각에 호소한다면, 운동과 변화를 독립적인 실재들로서 지각하는 데 이미 어려움을 덜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멜로디를 들으면서, 그 멜로디에 우리의 몸을 맡겨 봅시다. 어떤 운동체에 부착되지 않은 운동이나, 변화하는 어떤 것이 없는 변화에 대한 분명한 지각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이 변화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물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여전히 분할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 멜로디가 곧 멈춰 버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동일한 전체로서의 음향이 아닐 것이며, 동일하게 분할 불가능한 어떤 다른 음향일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그것을 분할하고, 멜로디의 끊임없는 연속성 대신에 구별되는 음표들의 병치를 상상하려는 경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럴까요? 왜냐면 우리는 만약 우리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우리가 들은 그 소리를 비슷하게 다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가 들여야만 하는 일련의 불연속적인 노력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의 청각이 시각적 이미지들을 흡수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악보를 보면서 갖게 되는 시각을 통해서 멜로디를 듣게 됩니다. 우리는 상상 속의 종이 위에다 음표들이 차례차례 놓여 있는 것을 그려 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건반을 연주하는 것을, 그리고 활이 위 아래로 오르내리는 것을, 연주자들이 서로 맞추어서 자신의 부분을 연주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와 같은 공간적 이미지들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서 충분하며, 어떤 식으로도 나누어지지 않고, 변화하는 어떤 “사물”에 어떤 식으로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변화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시각으로 다시 돌아옵시다. 시각에 좀 더 주의를 집중하다 보면, 우리는 여기서도 운동이 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단어의 일상적인 의미에서 실체를 변화시키지도 않는다는 것을 지각하게 됩니다. 물질적 사물들에 대한 이와 같은 영상은 물리학에 의해서 이미 암시되고 있습니다. 물리학이 더욱 발전할수록, 그것은 더욱 더 물질을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행동들로, 계속되는 진동 속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운동들로 용해시키며, 따라서 운동은 실재 그 자체가 되고 있습니다. 과학이 이 운동성에 어떤 지지물을 할당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진보하면서, 지지물은 희미해집니다. 덩어리는 분자들로, 분자는 원자들로, 원자는 전자나 미립자들로 분해되며, 마침내 운동에 할당되었던 지지물은 그저 편리한 도식이었다는 점이 밝혀집니다. 학자들로서는 우리의 시각적 상상의 습관을 단순히 허용한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멀리 나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마치 수송 차량에 그러는 것처럼 우리의 눈이 운동을 거기에 맞붙여 버리는 바로 그 “운동체”란 무엇입니까? 단지 채색된 한 지점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 그 자체로서 극단적으로 빠르게 진동하는 어떤 것들의 연속이 합쳐진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 운동한다고 근거 없이 단언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운동들이 운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내적 삶의 영역보다 더 변화의 실체성이 가시적으로, 그리고 촉각적으로 명백하게 느껴지는 곳은 없습니다. 인간 존재에 관한 이론이 도달하게 된 모든 종류의 어려움과 모순들은, 한편으로는 그 각각이 불변적이며 그것들의 연속을 통해 자아의 변화를 낳는 구분되는 심리적 상태들을 우리가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불변적이며 위의 상태들에 대한 지지대로서 기능하는 자아를 상상하는 데에서 옵니다. 어떻게 이 통일성과 이 다양성이 만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둘이 모두 지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첫째로는 변화가 덧붙여진 어떤 것이기 때문에, 둘째로는 그것이 변화하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지속하는 자아를 구성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굳고 움직이지 않는 기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마치 무대 위의 배우들처럼 기체를 통과해 가는 구별되는 상태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의 내적 삶의 연속적인 멜로디—우리 의식의 실존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분할 불가능한 멜로디—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성질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 분할 불가능한 변화의 연속이 바로 진정한 지속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내가 다른 곳에서 다루었던 질문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시작할 수는 없겠습니다. 저는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국한하겠습니다. 즉, 이러한 “실재적 지속”이 표현 불가능하고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답으로, 저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명확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실재적 지속은 우리가 언제나 시간이라고 불러왔던 것, 그러나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지각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계기를 함축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계기가 처음에 우리 의식에 나란히 놓인 “이전”과 “이후”의 구별처럼 제시된다는 점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멜로디를 들을 때,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계기의 가장 순수한 인상—동시성의 인상으로부터 가능한 한 가장 멀리 떨어진 인상—을 가지며, 이제 우리에게 그 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멜로디의 연속성과 분해 불가능성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구별되는 음표들로, 수많은 “이전들”과 “이후들”로 나눈다면, 우리는 그것에 공간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고 계기에 동시성이 스며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간에서, 그리고 오직 공간에서만, 서로에 대해 외재적인 부분들을 그 윤곽이 뚜렷하도록 구분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곳이 공간화된 시간 속이라는 것을 인지합니다. 우리는 삶의 깊은 곳의 부단한 노랫소리를 듣는 데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실재적 지속이 있습니다. 그것 덕분에, 우리가 우리의 안과 외부 세계에서 목격하는 어느 정도의 길이를 갖는 변화들이 단일하고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게 됩니다.
즉, 그것이 내부의 문제든 외부의 문제든, 우리의 문제든 사물들의 문제든, 실재는 운동성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제가 변화는 있지만 변화하는 사물들은 없다고 말했을 때 의미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운동성의 광경 앞에서, 어지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육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옆질과 뒷질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유와 실존을 붙일 수 있는 “고정된” 점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만약 모든 것이 지나간다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만약 실재가 운동성이라면 누군가 그것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 이미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라고—그것은 사유를 피한다고—생각합니다. 그들은, 물질적 세계는 허물어질 것이며, 정신은 급류와도 같은 사물들의 흐름에 익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다시금 안심하기를! 만약 그들이 사이에 삽입된 베일을 걷어 내고 직접적으로 변화를 보는 데 동의한다면, 그 변화는 그들에게 가능한 한 가장 견고하며 가장 잘 견디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단단함은, 단지 운동들 사이의 덧없는 배치에 불과한 고정성보다는 무한히 우월합니다. 사실 저는 제가 여러분에게 주의를 기울여주기를 요청하는 세 번째 요점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변화가 실재적이며 심지어 실재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거라는 것을 지금까지 우리가 철학과 언어를 통해서 생각하던 익숙한 방식과는 사뭇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철학자들은 우리 안의 이러한 자연적 경향성을 장려합니다.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는, 현재만이 스스로 존재합니다. 만약 과거의 어떤 것이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현재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쪽으로부터 어떤 자선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요컨대—비유 없이 말하자면— 기억이라 불리는 어떤 특정한 기능의 개입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기억의 역할은 과거의 어떤 부분들을 보존하고, 예외가 좀 있긴 하지만, 일종의 상자에다가 과거의 부분들을 저장해 놓는 것이라고 가정됩니다. 이것은 심각한 실수입니다! 유용하긴 하다고 인정할 수는 있으며, 아마도 행동에는 필수적일 것이지만, 사변에는 치명적입니다. 여러분 말마따나 “간단히 하면/하찮은 것 속에서in a nutshell”, 우리는 그 안에서 철학적 사유를 손상시킬 수 있는 대부분의 착각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남성이라는 게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쉽게 바꿀 수 없기에 내가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죽을 정도로 부끄럽다면, 그리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아마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살다보면, 타협해야만 하는 순간이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들뢰즈 덕분에 '-되기'라는 말이 유행해서, '여성-되기'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렸다. 들뢰즈는 '여성도 여성-되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들뢰즈주의자들도 여기에 동의하는 듯 하지만 나는 이런 말들 때문에 들뢰즈로부터 멀어진 것 같다. 그(혹은, 들뢰즈주의자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나는 그게 좀 불편했다.
남성이라도 여성-되기를 해야만 하는 걸까. 그런데 여성-되기라는 게 그저 그런 수사나 은유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꼭 되어야만 할까. 나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딱히 답을 못찾겠고, 그저 조금 슬프고 안타깝다. 무엇 때문인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왜 비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았을까.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한 적은 없을까. 나는 왜 내가 인간이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타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생태주의나 장애인 담론을 아주 들어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을텐데, 여성주의를 접하고 내가 그랬던 것만큼 엄격한 잣대를 여기에는 들이밀지 않았다. 타협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에는 타협하고 무엇에는 타협하지 않나? 나도 잘 모르겠다. 여성-되기보다 장애인-되기는 물리적으로 더 쉽다. 그래서 타협했을까. 지구의 암세포인 인간으로써, 내가 살아있는 게 지금 곧바로 죽는 것보다 환경에 더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그런데도 살고 있다. 타협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생태주의자들은 타협했을까? 그들도 타협했을 것이다.
내 생도 수많은 타협의 산물이다. 다른 사람의 생도 그렇다. 열심히 열심히 낑낑대며 기어가고 있다. 앞뒤에 친구들이 보인다. 주변 사람들도, 슈퍼집 아주머니도 주인집 할머니도 전공수업 선생님도 보인다.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다같이 기어간다. 이마에는 다들 '타협'이라고 쓰여있다. 눈물은 나지만, 왠지 기분은 좋다.
덧) '타협'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여전히 좋지 않다. 그런데 이건 단지 뉘앙스의 문제일 것이다.
발단은 별 거 아니었다. 그저 엄마한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어봤냐고 물어봤고, 엄마가 읽어봤다고 대답한 것 뿐이었다.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였다. 굳이, 왜 물어봤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내가 원래 엄마한테 이런저런 일들, 특히 최근에 겪은 일 중 내게 의미있는 것으로 남겨졌던, 그래서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던 것 같은 일들을 조잘조잘 얘기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죄와 벌"을 읽은 것도 그러한 '일'이었고, 엄마는 (예상 외로) 읽었다고 대답했다. 딱히 예상 외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은, 딱히 읽었거나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그걸 물었을 때의 내 의도나 대답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 없이, 내게 어떤 끔찍한 기억/예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런 질문을 왜 던졌을까.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겠다. 왜 나는 내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며 학교 공부는 그럭저럭 되어가고 있고 최근에 LCD 모니터를 새로 샀으며 방 한 구석에 곰팡이가 피었다는 것 말고도, 베르그손이 왜 중요한 철학자이며 이혼에 대한 그런 시각에는 어떤 문제가 있고 내가 "죄와 벌"을 읽고 깨달은 점이 무엇인지 따위를 엄마에게 얘기하는 것일까? 물론 꽤나 '학술적인' 이 질문들이 내 삶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소소한 것들이 나의 일상이듯 상대적으로 무거운 저 주제들 또한 나의 일상이기 때문일 것이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한 가지 사악한 의도를 숨기고 있다. 나는 그걸 의식하고 있고, 또한 특별히 내가 그렇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사실 나는 엄마를 계몽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엄마에 대한 나의 우월성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자녀교육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엄마에게 배운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타협지점은 있다. 엄마는 '아기-나'에게는 최고의 엄마였다. 그러나 그 후로는 아니다. 내가 자타의 비난을 무릅쓰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엄마가 내게 책을 골라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어린이백과나 어린이 문학전집은 사 주었지만, 그 뒤로는 내게 무슨 책을 읽혀야 하는지 몰랐다. 따라서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침몰하고 만다. 정보를 얻을 곳도 없기에 방황한다. 그런데도 엄마는 자기가 가장 잘났다. 특히 자녀 교육에 있어서 그렇단다. 나는 화가 난다.
다소 거칠게 정리된 나의 개인적인 '지성사'는, 엄마로부터 벗어나려는 나의 '가족사'로 다시 쓰여질 수 있다. 내가 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때, 나는 엄마의 무지를, 교양 없음을, '교양 있는 척'을 그토록 증오했던 것이다. 나는 교양과 지식을 얻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집과는 단절된 존재로서 나를 새롭게 수태하고 싶었다. 자기가 '최고의 무엇'이라고 반복해서 되뇌이므로써 얻게되는 효과가 아닌, 진짜인 지식과 교양을 얻고 싶었다. 엄마는 그 위약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엄마 때문에 나는 길이 잘못 들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을 한다. 집은 천박한 곳이었고 나는 거기를 떠나 교양인과 지식인의 세련된 공간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집이 특별히 천박했던 건, 그곳에 유사-교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엄마를 부끄러워했다. 나는 내가 배운 새로운 것들을 엄마의 코 앞에 들이대며 윽박질렀고, 그 때 느끼는 우월감을 내가 엄마로부터 벗어난 징표로 여겼다. 베르그손이나 도스토예프스키도 모르면서 교양은 무슨... 그런데, 읽었다니!
엄마는 "죄와 벌"을 읽었다. 당장에 이 말을 듣고는 거의 놀라지 않았는데, 사실 엄마가 엄마 말로 '소싯적에' 책을 좀 읽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무정"을 읽다가 울기도 했고, 에리히 프롬의 어려운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발밑으로 달려드는 세월에 묻혀, 야금야금 불어나는 삶의 무게에 눌려, 읽다가 말다가, 눈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회사에서 돌아오면 잠자기 바쁜 십 수년의 생활이 결국에는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은 오롯이 자식놈에게 바쳐졌다. 그런데 인제 이 자식이라는 것이 윽박지른다, 지금껏 뭐 했냐고. 왜 책을 안 읽혔냐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뒤늦은 반성과 효도는 엄마에게 직접 가서 하는 것으로 좀 더 미루고, 다른 생각에 좀 더 붙어있어야만 한다. 띄엄띄엄 시집과 소설을 읽고, 대단한 능력은 없기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격정과 환희를 그저 조금씩 빌려 쓰고, 자신은 주변 사람들과는 다른 고귀하고 세련된 종족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슬픈 자존심만으로 보잘것없는 일상을 버텨내는 것. 그것은 엄마의 인생이기만 한가? 나의 인생일 수도 있지는 않은가?
엄마가 이룬 것이 보잘것없다면,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엄마보다 당당한 것은, 살 날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뿐이지 않을까? 따라서 내 삶을 평가하려는 시도에 '잠깐 기다려 보세요, 아직 더 남았다니까요'를 더 쉽게 외칠 수 있는 것뿐이지 않을까? 내가 철학자가 되고자 한다면, 엄마는 지금의 모습이 되고자 했던 것일까? 엄마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내 능력으로서는 택도 없는 높은 지위를 꿈꾸면서 서서히 질식하는 중은 아닐까?
나는 내가 좋은 대학에 왔기에 별종인 줄 알았다. 그러나 머리는 엄마 쪽을 닮는 거라기에 비로소 자주 왕래하지 않는 외가 친척들 쪽으로 눈을 돌리니, 유명한 대학 안 나온 사람이 없다. 나는 내가 특별히 '순수학문 지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쪽도 상당수가 '순수과학' 전공이다. 그래도 나는 철학을 택했기에 내가 별종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도 물려받았다. 엄마와 아빠는 수 년째 '종교 전쟁' 중이다. 둘이 대립하는 지점을 보면, 영락없는 철학적 문제가 놓여 있다. 많은 것이 정해져 있다. 운명이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다. 그게 누구든, 울면서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무엇을 배웠든, 그것을 단 한 명의 후손에게라도 전할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어렵게 배운 것을 그의 발 밑으로 깔아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단 한 명의 제자도, 자식도 키우지 못한 채, 끔찍한 반복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증오와 멸시와 환멸의 반복을? 멸종의 그 순간까지?
답의 일부분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내가 엄마 나이 정도는 먹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이룬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구체적인 대답 하나는 얻게 되겠지. 그리고 아마 나는 그걸로 만족할 것이다. 인생은 그리 끔찍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의미에서 끔찍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인생이 반복하는 것이라 해도 그게 그리 끔찍한 것만은 아니지, 하고 생각하면서 스무 살 먹은 자식에게 '하는 일 없이 쳐박혀 책이나 읽는 저 벌레같은 인간이 싫어' 하는 소리를 들으며 살 수도 있다.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껴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야만 내가 그걸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그래야 할 책임이 있다.
- 2006년 2학기, 조금만 더 잘 살아보아야겠다.
내가 너무나도 쓰레기같아서 잠이 안 오는 그런 밤이 있다. 그런 밤에는 다리가 여럿 달린 흉측한 그리마 한 마리가 벽을 가로질러 달아나고, 나는 굳이 휴지를 둘둘 뭉쳐 꾹 눌러 죽이고서는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누가 죽었어야만 했는지 궁금해한다. 선풍기 소리가 머리를 꽉 채워서 시끄러운 여름밤.
요즈음 나는 아무래도 내 안의 곤충들과 싸우고 있나 보다.
흉측하지만, 존재하기를 그만둘 이유는 없는 것들. 끊임없이 출몰하는 것들. 이 공간의 주인이지만, 헤드폰을 쓰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별 것도 아닌 동물에게 쫓겨다닐 뿐이다. 항상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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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야 비로소 너인 것은 아니고? 후후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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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시간을 불문하고 심지어는 이 아침에도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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